손목과 무릎이 드러나게 작아진 코트를 입은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옆에는 큰 짐가방이 있고 먼 길을 떠나는 듯 기차길 옆에 서 있다. 


작가 주디스 커는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에서 느낄 수 있듯이 '손님'을 두팔 벌리고 받아들인다. 낯설 수 있지, 두렵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들이 여기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면 도와줘야 하지 않아? 느긋하게 손님을 대하는 시선은 그의 경험에서 나왔다. 


호호 할머니 작가의 여유로운 모습에서는 잘 몰랐는데 그의 어린 시절은 분홍 토끼와 함께 히틀러가 훔쳐가 버렸다. 이 동화책은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고있다. 


1930년 초반 히틀러가 세력을 장악해 가자 유태인 안나는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망명한다. 이제 막 열 살이 되는 안나는 친구들과 제대로 된 이별도 못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국경을 건너 아주 다른 상황으로 들어선다. 그나마 다행으로 안나 곁엔 부모와 오빠 맥스, 그리고 낯선 방법으로 다가서는 친구들이 있다. 잠시 부모와 떨어져 있게 될 때 안나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생생하고 다시 새로운 장소, 프랑스에 와서 모르는 언어와 풍습 속에 당황하고 좌절하는 모습은 측은하다. 이제 또 한 번 낯선 도시 런던에 도착해 큰 가방 옆에서 작아진 코트를 입고 선 안나는 이 '어려운 아동기'를 견뎌내는 자신을 생각한다.


2차 대전 중 숨어살다 수용소로 끌려가는 안네 프랑크에 비하면 (불행을 비교하다니, 이런 끔찍한 독자야) 동명의 주인공 안네/안나는 가족과 함께 살아 있고 학교도 다니니 얼마나 다행일까 싶지만 아이의 매일은 불안과 차별 앞에 놓여있다. 삶의 기본 이었던 안정은 낡은 분홍 토끼 인형과 함께 멀리 남겨졌고 이제 아이는 가족의 손을 잡고, 때론 살짝 놓으면서 걸어가야 한다. 진정 '난민'이라고 느끼고 좌절할 때도 있지만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다. 잔잔하고 차분하게 쓰여진 이야기지만 계속 불안하고 측은한 심정으로 읽었다. 집을 잃고 떠도는 생활이니까. 


이 아이가 자라나서 멋진 그림책 작가가 되어서 정말 기뻤다. 

주디스 커 작가님, 편히 쉬세요. 이젠 그 분홍 토끼를 다시 만나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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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아버지들의 마지막 날들..... 이 제목이 곧 내용이다. 제 2차 대전 중 레지스탕스들과 연계해서 영국 정보원 산하에서 활동한 프랑스인들의 이야기. 그들이 견뎌낸 훈련과 전쟁, 그 비극들과 견뎌낸 힘, 전우애,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조국에 두고 떠나온 가족, 아버지. 아버지.

 

진정한 '인간' 이 볼드체로 강조된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선다, 그리고 인간 답지 못한 것들을 처단한다. 그 가치의 끝에는 아버지가 있고. 그 아버지들의 마지막은 아들과 연결되고 대를 잇는다. ... 잠깐만요, 딸들은요? 어머니는요? .... 왜 꼭 창녀 이야기는 속죄와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까? 21세기의 불란서 현대 젊은 작가의 소설이 어쩐지 육이오 전쟁 소설 같은 건, 그닥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증오, 잔인함이 참된 인간을 누를 때 전쟁이 난다, 그걸 잊지 않아야 하는데 인간의 희망인 '아들'이 있어서 가능하다. 아, 어머니는 아름답지요. 뭐 이런 흔하고 낡은 공식. 그리고 '영웅' 을 한 번 더 뒤집어 보면서 아,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아들이구나, 하지만 으으리이를 외치는 전우들은 정의의 기준점을 슬쩍 깔고 앉아버린다. 소설의 마지막은 어째 훗, 하고 웃음마져 나왔는데 작가의 넘치는 자의식이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었기 때문인데요. 어째서 내가 부끄럽고 막.

 

그래, 그저 흥미진진하며 널리 알려지지 않은, 어쩌면 부끄럽고 그래서 더 인간적인 (인간이라는 단어가 정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로 쓰이는 단어) 인물들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소설이니까. 하지만 소설이 책장이 넘어가게 만드는 힘이라도 최소한 있어야지. 문장이 멋지거나. 전개가 지루하고 반전이랄 것도 없는데 인물들 마저 평면적이라 다른 친구들에게 차마 권할 수가 없다. 아니, 말리겠어. 이 작가는 첫 소설이 끝인 거 같어. 인물들, 작가가 자기 페르소나와 현실을 범벅해서 녹아들어간 그들의 애국심도 막연하고 모든 레종데트르인 부자관계도 작위적이며 신선한 도구는 (엽서 마저 '새벽의 약속'의 재탕)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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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는 덜 재미있게 읽었다. 선거와 정치 이야기가 나오자 버락과 미국 이야기 비중이 많아지고 남의 이야기인 게 확실히 보였다. 일하는 엄마의 노고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딸 아이의 대학입시와 인턴 과정이 그 특수한 가정환경 덕이라는 생각을 피하기 어려웠다. 남의 나라, 남의 인생.

 

그녀의 순수한 열정과 희망에는 박수를 보낸다. 어린이 운동캠페인과 제3세계 여자어린이들의 교육에 힘을 실어준 활동에도 감탄한다. 야무지고 강단있는 사람. 용기있는 사람. 열심히 일하는 사람. 감히 내가 어떤 째끄마한 동질감을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만.... 참 멋진 사람. 그래도 남의 나라, 남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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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9-02-27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안 읽었지만 남의 나라 남의 인생 뭔지 알 거 같음. 여기 살아고 있어도 남의 인생.

유부만두 2019-02-27 07:48   좋아요 0 | URL
책은 좋았어요. 미셸 오바마가 공동체/사회에 매우 관심을 가지고 미래를 향하는 인물이란 걸 알게됬고요. 하지만 어쨌든 성공한 흑인 어메리컨 이라는 게 저와 거리감을 느끼게 하네요. 어린시절 이야기는 아주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후반부는 ‘미국‘이 (그리고 지금의 트럼프가) 크게 떠올라서 읽는 맛이 덜 했어요. 남의 나라, 남의 인생이죠, 뭐, 결국은.
 

신정은 진짜 시작이 아니다, 구정이 진짜다, 라고 멋대로 시작을 미뤄두었는데, 이젠 3월 새학기가 진짜 시작인 거시다, 라며 다시 미루고 있다. 무엇을, 시작을. 무슨 시작을, 모르겠으니 일단 커피 한 잔.

 

책 읽기가 더디고 힘들고 귀찮게 느껴지는 1월이었다. 커피책을 한 권 읽었는데 곧 번역서가 나올 예정이란다. 하지만 그때 가서 역서 읽고 리뷰 쓰자면 (늘 그렇듯) 까먹을테니 지금 짧게 남겨놓아야겠다.

 

커피. 드립커피. 커피콩 이야기. 에디오피아나 브라질이 아닌 예멘 커피. 모카, 라는 진짜 지명을 가진 나라 이야기. 그곳의 산악지역에서 재배되는 커피 나무와 그 나무를 몰래 몰래 문익점 방식으로 빼돌려 자기 땅에 옮겨 심은 사람들에서 블루보틀 까지.

 

미국 이민 삼세대의 한 사나이, 커피를 마시지도 않던 이십대 중반 목타르가 자신의 문화적 뿌리와 911 이후 짓밟힌 중동 자존감을 붙들며 커피를 만났다. 그가 조부의 고향 나라 여러 농장에서 커피 열매 포대들로 모으고 니캅을 쓴 예멘 여인들이 콩을 한알씩 분류한다. 예멘은 시리아를 따르는 듯한 내전 상태. 후티는 이란을 등에 업고 수도로 진격해 항구와 공항을 봉쇄하고 흔들리는 정부군은 안밖으로 혼란스럽다. 총성 사이를 피해 다니며 만나는 중동 싸나이들의 '우리가 남이가' 스피릿. 이제 주인공 목타르에게 정의란 커피콩 뿐이다. 이게 나라를 살릴겁니다! 라지만 그는 어메리칸 시티즌이고요. 책의 마무리는 타워팰리스, 아니 인피니티 옥상에 오르는 그를 보여주는데 (너무 계산한 티가 나서 읽으면서 웃었음) 내가 이 맛에 성공했지, 라는 뿌듯해 하는 그의 미소가 어째 우리나라 아자씨 같다. 그의 부탁을 거절 못했던 예멘 동포들 둘은 이 책의 출간 이후 일자리를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초반, 주인공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흔한 슬럼가 이민 가정의 청소년을 그린다. 그러다 그가 '운명적'으로 만나는 예멘 커피. 그는 무대뽀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뭉개고 들이댄다. 90년대 책이 아니란 게 이상할 정도. 한편 그를 대하는 많은 이들의 믿음과 애정에 감탄할 수 밖에 없다. 예멘 고향의 '사나이들' 끼리의 신뢰는 더 대단하다. 내전은 내전, 하지만 일단 말을 하면 그 앞에서는 믿는다. 늘 상대의 술수를 몇 수는 계산하며 함께 (약한 마약 정도의) 카트를 씹고 취하는 이들. 커피의 종류와 역사에 대한 챕터는 이 젊은 예멘 사나이의 성공 자서전일 뻔한 책에 향을 더한다. 영어문장이 단순하고 투박해서 자꾸 미셸 오바마의 문장이 그리워졌다. 그래도 피할 수 없는 커피. 향긋한 커피를 마시러 삼성역 근처의 테라 로사에 가서 핸드 드립 커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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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는 설명광이자 영국성애자입니다. 제목에 ‘철학’이 들어가지만 은근히 재미있다는 게 .... 이상합니다. 모든 게 그의 말처럼 깔끔할리는 없고 몇백년 뒤의 세상에서 읽자니 우스운 것들도 있지만 꽤 재미있네요? 볼테르가?! 학생 때 이 재미를 왜 몰랐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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