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챈들러의 <롱 굿바이>의 일본 드라마 5부작을 봤다. 2014년작. 주인공 레녹스의 장인 캐릭터는 꽤 비중있게 나오는데 소설 속 차가운 기업가가 아니라 '미래의 일본'을 비장하게 외치며 신문물 테레비 방송을 우매한 대중에게 던지는 늙은 너구리 정치인이다. 그리고 생뚱맞게 화면엔 2020 도쿄 올림픽 로고가 슬쩍 지나가며 '이제 (1960년) 올림픽도 열릴거야' 라는 기자의 나레이션이 나온다. 하지만 드라마 배경은 일본 도쿄, 소설의 1950년대 중반이라는 거. 현지화를 미묘하게 덜 해서 미쿡 셋트장 기분이 많이 나고 기모노 입은 사람은 안 나온다. 2020년이 어쩔지 이때는 몰랐지.


소설의 비밀스런 주인공 테리 레녹스에 코유키 캐스팅은 꽤 어울린다. 책임감 없고 속없는 말간 얼굴. 대신 레녹스의 얼굴 흉터와 백발은 작은 칼 자국과 불편한 다리로 바뀌었다. 도망자가 가는 곳 멕시코는 대만이 되었다. 이 드라마에서 보이는 대만에 갖는 일본 사람들의 은근한 향수와 편안함은 당혹스럽다. 얼마전 본 에키벤 만화의 대만/오키나와 편에서도 대만의 '일본 통치 시대' 건물과 기차에 대해서 (뿌듯한 얼굴에) 향수를 머금고 설명하는 일본인 캐릭터가 나온다. 이런 뻔뻔한 장면이 꽤나 많이 나와서 당황한 건 오히려 한국의 독자, 나. <롱굿바이>의 미국인 탐정이 멕시코(와 구별하지 않는 남미 여러 나라들 출신의)사람을 대하는 우월감을 일본판 드라마에서는 대만을 상대로 펼치고 있다. 예전 '일본 통치 시대'는 따뜻한 기후와 열대 난초꽃 속의 순수한 첫 사랑이다. 일본 드라마/영화의 단골 주제, 첫사랑 い, 그 좋았던 시절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새로운 올림픽의 새일본으로 나아간다는 결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징그럽다. 과거를 잘 정리하고 결산을 해야지 미래도 있는 거라고. 근데 어제 또 우루루 야스쿠니 신사에 갔더라?

욕하면서 완주한 일본판 드라마를 챈들러와 분리할 수 밖에 없었던 더 큰 이유는 바로 주인공 탐정 (아사노 타다노부, 극중 이름은 까묵어뿟다)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소설의 말로에게 백점을 준 건 절대로 아니다. 언젠가 그를 향한 나의 욕 바가지 페이퍼를 쓰려고 벼르고 있다) 일본인 주인공은 껑충한 키의 의리있는 매력남 말로 보다는 여느 일본 탐정 드라마의 다부지고 끈질긴 명탐정이었고 분위기만 멋진 사무실 구석에서 정성스레 사이폰 커피를 만드는 그는 ...그래, 하루키 상이었다. 파스타도 만들 것 같고. 키나 외모가 별로인데 여자들이 접근을 하고, 심지어 대부호의 맏딸은 탐정더러 女子し(온나타라시, 여자 꼬시는 매력있는 사람)라고 말한다. 정말 하루키 주인공 같네. 하루키의 소설 롤모델이 챈들러였다더니 겹치는 그림이 꽤 많이 나온다. 바에서 남녀가 함께 마시는 김릿의 색은 영롱하고 배경으론 재즈가 흐른다. 사람들이 하나, 둘, 셋 죽는다. 탐정은 담배를 아주 많이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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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04-22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부지고 끈질긴 명탐정인데 ‘여자 꼬시는 매력‘이라니ㅋㅋㅋ 커피도 잘 내린다고요? 하루키가 떠오를 수 밖에 없는데요 ㅎㅎㅎㅎ

유부만두 2023-04-23 11:19   좋아요 0 | URL
네 설거지나 청소도 바지런하게 합니다. 하루키에요 딱. (마라톤은 안함)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 애니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애플tv. (난 이미 파친코로 1달 무료를 써버렸으니 남편을 구슬러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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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3-01-30 07: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 파친코 재밌어요?? 저는 읽으려고 했더니 영어 문장이 좀 그렇던데요?? 그래서 내용도 신뢰가 안 가서 안 읽었어요,, 암튼 저는 애플 티비 무료 한 달 이용권을 받았는데 저는 레슨 인 케미스트리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거 있으면 당장 볼래요!! 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유부만두 2023-01-30 08:16   좋아요 0 | URL
파친코는 드라마가 훨씬 나아요!!
영어책은 문장도 캐릭터 묘사도 너무 구식이라 작가가 미국 거주인것도 우리 세대인 것도 의외로 느껴질 정도였어요. 책 정말 꾸역 꾸역 완독했는데 한국서 인기 있는건 좋은 번역 덕인거 같아요.
전 레슨 인 케미스트리 책 그냥 그랬어요. (;;;;)
근데요, 파친코 드라마 시리즈 길어서 추천하면서 미안한 마음도 드네요.

건수하 2023-01-30 08:24   좋아요 1 | URL
레슨인케미스트리도 드라마화 되었군요~ 파친코 원서로 읽었는데 문장은 평이했던것 같고 드라마 잘 만들었어요 :)

라로 2023-01-30 09:10   좋아요 1 | URL
저도 첨엔 신선하고 막 재밌었는데요, 뒤로 갈수록 그냥 그랬지요,, 하지만 드라마로 만들면 재밌을 것 같아서 기대하고 있어요. 더구나 읽은 책이니까,, 파친코는 정말 영어로는,, 근데 어떻게 인기가 있는지 이해가;;; 말씀처럼 번역덕을 톡톡히 본 것 같네요,, 근데 파친코가 애플에서 하는 군요!! 얼마나 긴지 모르지만 별 말씀을요,, 저는 유부만두님이 추천하는 거에 늘 허기진 일인입니다요. 제가 마이 따랑하잖아요. ^^;;

건수하 2023-01-30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 클라센의 도형 시리즈도 애플티비에 있다는데.. 애플티비 1달 구독 고민해봐야겠네요 ^^

유부만두 2023-01-30 09:31   좋아요 1 | URL
아... 이렇게 볼거리는 늘어만 가는군요.

파이버 2023-02-04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어떻게 애니로 만들었을지 궁금하네요... 애니도 잔잔한 힐링이겠죠...? 색감은 너무 마음에 듭니다. 원화의 선 느낌도 잘 살렸네요~

유부만두 2023-02-05 07:57   좋아요 1 | URL
원 그림도 좋았으니 애니도 좋을것 같아요. 그런데 색 없는 선그림들은 어떨지 궁금해요.

psyche 2023-02-08 0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친코 드라마는 재미있어? 요즘 뜨개하면서 드라마 보는데 딱히 끌리는 게 없어서 이거 조금 저거 조금 보고 있는데 파친코 봐야겠다. 전에 어디선가 프로모션으로 받은 애플 티비 무료 구독이 언제까지더라 확인해 봐야겠네

유부만두 2023-02-11 10:06   좋아요 0 | URL
드라마 파친코가 훨씬 나아요. 인물들이 좀 다르기도 하고요. 그냥 틀어놓고 뜨개 하셔도 좋을듯. ^^ 책은 아휴.... 비추천입니다.
 

<페일 블루 아이>란 영화가 넷플릭스에 있어요. 추천. 


 루이스 베이야드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했고 크리스찬 베일 주연이에요. 


1830년 미국 육군사관 학교에서 한 생도가 사망, 시체가 훼손 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학교가 조용히 수사를 진행시키려 은퇴형사 랜도어(크리스찬 베일)를 부릅니다. 그가 사망한 생도와 가까웠다는 다른 생도 '애드거 앨랜 포우'(해리 멜링 --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밉상 해리 사촌 뚱띵이. 여기선 아주 마른 체격)와 함께 사건을 조사, 해결해 나갑니다. 


여기서 포우가 정말 그 포우의 사진이랑 너무 닮아서, 책 이야기 할 때 눈이 빛나는거 하며 찌질해 보이는 행동하며 열심인데 형사 랜도어는 슬픈 사연을 갖고 묵직하게 수사를 진행합니다. 중반쯤되면 수상한 사람들이 어째 다 한가족이라 지목하기가 너무 쉽지만.... 그래요, 에밀리 헨리가 말한 마지막 페이지의 surprise가 있어요. 


남들은 잘만 따오는 동영상 짤은 못하지만, (영화 시작 48분쯤) 포우가 처음 랜도어 집에 갔을 때, 그 책장 가득한 책들 (가죽장정!)을 보고 "우와! 책이다!" 하면서 감동하는 장면이 나와요. 전 그 장면이 제일 좋았어요. (나 북러버 라니까요?) 영화는 지루하단 평, 스릴있단 평이 반반이어서 어쩔까 싶었는데 겨울날, 나름대로 폐쇄적인 집단에 외부인이 들어가서 고질적 악행을 짚어낸다는 점에선 <장미의 이름>도 생각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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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3-01-16 0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봐야겠어요. 말씀대로 <장미의 이름> 느낌 있네요♡

유부만두 2023-01-16 07:40   좋아요 1 | URL
살인 사건 미스테리 + 가족의 비극이라 ‘재미‘라고 말하기 미안하지만 잘 봤어요. 특히 애드거 앨런 포우!!! 보시면 아실거에요.

라로 2023-01-16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요!! 크리스챤 베일!! 작가 성이 참 재밌네요. 암튼 지금 볼래요. 겨울날 좀 칙칙해 보이는 배경은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혹시 Glass Onion: A Knives Out Mystery 보셨나요?? 전 재밌게 봤어요.)..

유부만두 2023-01-17 06:36   좋아요 0 | URL
글래스 어니언 재밌게 봤어요!!!
화려하게 시작해서 다 때려부수니 시원한 기분도 들고요. ㅎㅎ 페일 블루 아이에선 “포우”의 활약이 돋보입니다. 크리스쳔 베일의 진중함이 받춰주고요.

바람돌이 2023-01-16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넷플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다보고 이제 뭐보지 하고 있는데 요거 봐야겟네요. 추천 감사요. ^^

유부만두 2023-01-17 06:36   좋아요 0 | URL
마음에 드시길 바라며 (제발 그러길)….

psyche 2023-01-23 0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봐야지 생각만 하고 아직 못 보고 있는데 유부만두 글을 보니 빨리 봐야겠다.
요즘 뜨개질에 빠져서 딴 건 아무것도 안하고 있네.

유부만두 2023-01-26 16:39   좋아요 0 | URL
그냥 틀어 놓으셔도 돼요. 고어한 장면은 없고요, 서사도 평이한 편이에요.
‘에드거 포우‘ 역의 배우 연기가 압권입니다.
큰 기대 없이 (액션이나 서스펜스가 크지 않아요) 보시면 될거에요.

파이버 2023-02-07 0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의 이 글을 읽고 어제 페일블루아이 봤어요. 말씀대로 장미의 이름 느낌이 났는데 특히 형사 주인공이 육사 학교 또한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게 인상 깊었습니다. 앞부분 시체가 리얼ㅠㅠ한거 말고는 딱히 (시각적으로) 잔인한게 없어서 잘 봤어요. 유부만두님 좋은 영화 추천 감사합니다~

유부만두 2023-02-11 10:11   좋아요 1 | URL
뭘요~ 영화를 즐기셨다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전 주인공들의 진지한 연기와 표정이 인상 깊었어요. ^^
 

이번만은 다에코와 두 자매의 감정이 소원해지지나 않을까, 특히 유키코와의 사이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집에 돌아온 데이노스케는 사치코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찾아볼 생각으로 욕실 앞 다다미 여섯 첩 크기 방의 장지문을 열었다. 유키코가 툇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다에코가 발톱을 깎아 주고 있었다. 

"언니는?" 

"언닌 구와야마 씨 댁에 갔어요. 아마 곧 올 거예요."

다에코가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 유키코는 발등을 살며시 옷자락 안으로 감추며 앉음새를 바로 했다. 데이노스케는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반짝반짝 빛나는 발톱을 다에코가 무릎을 꿓고 하나하나 손바닥에 주워 담는 모습을 흘깃 보고는 곧 문을 닫았다. 그 한순간 자매의 아름다운 정경이 오랫동안 인상에 남았다. 그리고 이 자매들은 의견의 차이는 있을망정 사이가 틀어지는 일은 좀처럼 없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 것 같았다. 




둘째 사위는 어느 날 저녁 두 처제들을 보며 자매들의 우애를 생각한다. 이 소설의 평범하고도 매우 내밀한 장면을 영화판 <세설 The Makioka Sisters, 1983>에서는 노골적인 성애 장면으로 만들어 놓았다. 둘째 사위 데이노스케는 영화 초반부터 아름다운 유키코가 음식을 먹는 장면을, 그녀의 입을 (클로즈업) 홀린듯 쳐다보고, 중반부엔 유키코의 옷입는 것을 도와주다 포옹한다. (그걸 부인이 목격하지만 결국 오해(??)라며 나중에 화해함) 하지만 맹하달까, 무심한 유키코의 표정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정수인 유키코가 결혼을 하자 '눈'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데이노스케는 눈물바람으로 혼술을 한다. 영화판 <세설>은 1930년대가 아닌 1980년대 쇼와 시기의 화려하고 무거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안볼걸 그랬지) 

자매들이 서로 발톱을 깎아준다거나 발톱에 매니큐어를 발라주는 것은 친밀감의 표시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일본의 또다른 네 자매 (막내는 아버지의 불륜/두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남)도 언니가 막내의 발톱 정리를 해주며 어릴적 추억을 나눈다. 이 장면에서 막내가 언니들과 드디어 스스럼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농염한 영화 <세설>의 발 장면 때문에 이 장면이 오염된 기분 마저 든다. 



그나저나 나는 왜 변태같이 '발'과 '발톱'에 집착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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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1-11 1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로 손과 손톱에 집착하곤 하는데 만두님은 발과 발톱에??ㅋㅋㅋ
저는 손이 못나서 집착하거든요.
혹시 만두님도??^^

유부만두 2023-01-11 18:32   좋아요 2 | URL
ㅎㅎㅎ 평소엔 아닌데 이 소설 읽으면서 ˝반짝반짝 빛나는 발톱˝ (ㅂ ㅂ ㅂ 두운법)에 꽃혀서 연결되는 발톹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영화로 나와있다. 

책은 기대에 못미쳤는데 영화는 또 보고 싶어짐 




https://blog.aladin.co.kr/yubumandoo/1238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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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12-2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보다 말았어요. 캐릭터와 배우들이 이입이 안 되더라고요. 전 아마도 책을 먼저 읽어서 그런 것 같아요.

유부만두 2022-12-27 06:36   좋아요 0 | URL
저 봤어요. 책보다 못하네요. 너무 밋밋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