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노동계급의 형성 -상
에드워드 파머 톰슨 지음, 나종일 외 옮김 / 창비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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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톰슨의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은 노동 계급이 무지하고 난폭하다는 자본가들의 루머에 대한 강력한 문제 제기이며 노동자가 지닌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역능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다. 이 책 앞에 달린 수많은 수식어와 그 역사적 의의를 논하기 이전에 이 책은 어느 영웅담 못지않게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책이라는 점을 먼저 말하고 싶다. 이 책은 1790년대 초의 런던 교신 협회의 활동부터 1832년의 차티스트 운동까지 영국 노동 계급의 완성에 이르는, 억압 속에서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해 단결하고 자신의 삶과 역사의 주체로 일어서는 영국노동자들의 서사시 같은 장대한 투쟁의 기록이다.

우선, 톰슨이 사용하는 계급이라는 개념이 그 톰슨 이전의 계급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톰슨 이전에는 계급이라는 것을 현상파악을 위한 사회 과학적 개념, 범주, 혹은 맑스에 따라서 경제적인 생산관계에 따라서 결정되는 물체 혹은 구조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톰슨에 의하면 계급이라는 것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다. 톰슨은 계급이라는 것을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하나의 의식이라고 파악한다. 따라서 이러한 계급에 대한 정의에 따라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에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이 생겨나는데 우선, 계급 형성이 일종의 문화적 현상이라 할 때 프랑스 혁명과 같은 외부의 사건보다는 당시 노동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문화적 전통이 노동 형성에 중요한 특징으로 떠오르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계급은 경제 구조에 의해 단순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활동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즉 여기서부터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톰슨에 의하면 당시 노동 계급의 형성은 노동자들의 삶이 피폐화되는 데에 대한 수동적인 반작용이 아니었다. 기존의 노동사 연구를 통해 비춰진 노동자들의 모습은 새로운 진보에 적응하지 못하고, 난폭하고 음주를 즐기는 무절제한 집단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톰슨은 노동자들을 절제하고 스스로 만든 규칙을 지키며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집단으로 묘사한다. 일례로 러다이트 운동이 단순히 기계 문명에 대한 거부라는 반동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전통적인 '도덕경제'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음이 톰슨의 연구를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거부했던 것은 산업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산업혁명을 둘러싸고 있던 여러 정치적 억압들, 노동자에게 저임금과 고된 노동을 강요하는 자본가와 국가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들이다. 그러므로 톰슨에 의하면 노동 계급의 형성에 이르기까지의 영국 노동자들의 투쟁은 절망에 의한 폭동도, 유토피아적 향수에 의한 반동적 운동도 아닌, 산업혁명 후의 사회를 인간적으로 만들기 위한 헌신적인 투쟁이다.

톰슨의 책은 '우리는 이 시대의 영웅적 문화를 꽃피운 그들에게 감사할 만하다'라는 감동적인 말로 끝난다. 그러나 이후에 나온 실증연구에 의하면 영국의 노동 계급들이 제국주의에 전혀 적대적이기 않았고 오히려 제국주의가 노동자들로부터 올라오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노동 계급 역시 백인 남성이라는 자기 계급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 계급 역시 그 시대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서 당시 노동자들의 운동을 폄하할 수 있을까? 영국 노동계급들이 당시에 보여줬던 영웅적인 기록들은 당시의 시대적 맥락 안에서 평가 받아야할 것이다. 따라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 단순히 이 책이 가져온 인문사회과학의 방법론적 혁신으로만 평가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오히려 폭압에 대항하며 역사의 주체로 일어서는 노동자, 보통 사람들의 역능을 생생히 증언하는 그 내용이 더욱 소중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끝으로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한 작품의 번역에 쏟은 역자들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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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5-01-2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지인 술자리로 향하던 중, 건축일하는 친구이야길 한다. 일거리도 없고 아이들 먹여살리기가 힘들다고 '죽음'을 생각해보았느냐구 해서 '멍청한 생각'하질 말라고 했단다. 그러면서 둘이서 대작을 주거니 받거니하면서 폭음을 하였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자꾸 시선이 간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노동계급의 코드가 베여 있는 절망을 반복한 시선은 어떨까? 삶과 죽음은 늘 같은 시선으로 반복될 것이고, 그 경계에 대한 심각한 절망도 고독도 옅어지는 것은 아닐까? 너무 가진것?이 많아 소자본가의 코드로 인해 죽음에 대해 담을 쌓아두고 이해했던 것은 아닐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면... 솔직함과 건강함이 노동계급의 미덕이라고, 내일 하루 품팔려면 지나친 음주, 사치스러우면 그만큼 고통이 따르기에 사치스러울 수도 없는...

당신들로부터 그런 습관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살림살이도,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건강한.... 나의 얄팍한 삶의 태도에 대해 주저스럽다.

톰슨 책을 보고 싶다. 계급은 그 구성원들이 유형화된 관계, 제도, 관념들을 정립함으로써 가시적으로 만들때만 비로소 가시적인 것이 된다는, 계급 형성은 정적 형성이 아니라 능동적 과정이라는 톰슨의 책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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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박정애 옮김 / 큰나(시와시학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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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결혼해서 철든 아줌마들의 푸념식 일상 얘기, 아니면 지극히 학술적인 수준을 넘지 못하는 많은 한국 페미니즘, 아니면 주체를 모호하게 해서 현상만 분석, 지적하고 끝내는 서적에 싫증을 느껴가면서 오히려 열심히 쏟아지는 번역판 서양페미니즘 서적에 거부감이 들었다. 왠지 악을 쓰듯 최후의 발악을 하는 듯한 한국 여자들이 쓴 책과 여유있고, 깊은 성찰에서 나오는 훨씬 성숙해 보이는 그네들의 깊은 맛이 느껴지는 책이 묘한 대조가 되어서 허탈한 마음에 눈물을 짜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책에서 그 허탈함의 실체가 잡혔다. 바로, "그저 자기가 희생되는 것에 대한 울분과 적의를 풀어놓는" 이 부분. 많은 한국 페미니즘 서적을 읽으며 내가 불편했던 감정이 바로 이 한줄에서 정리가 되었다. 자기 남편과 시부모 앞에서는 풀어내지 못하던 감정을 억누르고 억누르다 그렇게 풀어낸 책들이 불편했던 거다. 물론 결혼한 여자들끼리야 맞아맞아 나도 그래 하면서 맞장구 칠 내용들이겠지만 나로선 감당하기 짜증나는 책들이었다. 물론 그런 책에서도 부분부분 얻을 내용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인 코드는 울분과 분노와 적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데에 실망을 하게 되는 거였다. 처음엔 별 개념이 없었지만 언젠가부터 손에 잡히는 여성학관련책에 대한 인상이 이렇게 굳어져 가고 있다.

이것 말고도 내가 그동안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이 책에서 의문이 많이 풀렸다.

저자는 어쩌면 그렇게 예리한 지 읽는 내내 가슴에 와닿는, 말그대로 ‘행복한 페미니즘’이었다. 인종문제를 뺀다면 이 책에서 말한 내용들은 한국 페미니즘에서도 역시 고민해야할 문제들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계급의 차이’가 미국에서는 ‘인종차별’로, 한국에서는 빈부의 계층 문제로 나타난 것뿐, 넓은 의미에서 보면 ‘계급의 차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한국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 전반적인 구조적 문제를 보지 못하고, ‘여성’이라는 코드만을 읽어내는 우마저 보인다. 여성 자신을 자각하지 않은 채 언제나 남성, 사회, 가부장제 탓이라고만 외쳐대는 페미니즘이 회의가 든다. 여성 자신이 아닌 남성 때문이라는 그 ‘때문에 페미니즘’만 난무하고, ‘(~에도)불구하고 페미니즘’ 즉, 반기를 들지 않았던 여성의 모습을 반성하지 않는 모습에서 한국페미니즘에 별 희망이 없어 보인다. 여성은 피해자이기만 할까? 남성은 가해자이기만 할까?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사랑은 이성이 있어야 이루어지듯 모든 현상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한국사회가 남자만의 잘못으로 가부장제가 되었다면 도대체 여성은 그동안 어디에 숨어있었단 얘긴가! 스스로 일상에서 성차별과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적응해가는 여자들이 오히려 가부장체제를 오히려 더 공고히 했던 건 아닐까? 이 부분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점에서 난 한국여성운동에 관심이 식어버렸다. 여성을 '피해자'로, 남성을 '가해자'로 설정하고 출발하는 페미니즘에선 여성 스스로 가부장적 사고를 체화하고 살아가는 여자야말로 마초에 버금가는 가부장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존재라는 점은 고찰 대상이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성차별적 사고와 행동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여자야말로 위협적인 존재라는 점은 남자를 적으로, 가해자로 설정하는 페미니즘에서는 고찰대상이 아닌 것이다. 내가 이런 걸 지적할 때마다 굉장히 불편해 하는 여자들을 많이 보았다. 심지어 남자에게서 들었던 욕보다 더 심한 욕까지 얻어먹은 적도 있다. 페미니스트라고 자부하는 여자의 입에서 나온 “입닥쳐!”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몇 해가 지난 지금도 정의내리지 못하고 있다.


주목해 볼 사항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내 관심을 끈 내용은 바로 이 부분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쳐 주는, 대중적 기반의 교육 운동을 창출해 내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주류의 가부장제적 매스미디어로 하여금 우리 이웃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하여 부정적인 것 일색으로 학습시키도록 방조한 셈이 되었다. 벨 훅스 가 미국 페미니즘을 이렇게 염려했다시피, 모든 사람들의 고민거리가 아닌 페미니스트 그들만의 잔치가 되어버린 한국 페미니즘 역시 이 점에 고민이 필요하다.

벨 훅스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남자들이 페미니즘의 기치를 들고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이다. 지구에서의 삶이 안전성과 지속성을 가지려면 남자들이 페미니즘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 남자들은 페미니즘이 자신들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할까? 이 물음이 남자에게만 던져져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들을 자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성이 일상에서 반기를 들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적응해 갈 게 아니라 여성 각자가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 여성은 깨어나지 못하면서 남성을 깨우려는, 남성이 깨어나기를 바라는 건 박자가 맞지 않는 일이니까. 여성의 일상에서 ‘때문에’라는 언어를 거두어내면 여성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벨 훅스도 진정한 페미니즘을 실천하려면 자기의 내면화된 성차별주의와 우선적으로 맞닥뜨려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에 대한 인지와 관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사랑은 인정과 돌봄과 책임과 헌신과 지식을 결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우리는 정의가 없는 곳에 사랑이 있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한 이해를 통하여,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게 지배에 반대할 힘을 준다는 사실 또한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 정치학을 선택하는 것은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진짜 사랑을 실천하는 남녀라면 페미니즘을 빼놓고 사랑을 얘기할 수 없다. 나는 여자든 남자든 페미니즘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진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여러번 다룬 ‘페미니즘 이론: 주변에서 중심까지’라는 책이 검색되지 않는 게 좀 아쉽다. 최근에 나온 ‘사랑의 모든 것’이란 책을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이 책도 당장 주문해야겠다. 원서로 소장하고 싶은데 원서를 구하지 못해 아쉽다. 이 좋은 책을 도서관에서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치다 이제야 손에 잡은 게 후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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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을산 > 자기조직화, 길 만들기

전인미답의 숲 속에 길을 내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뻥 뚫린 길을 시원하게 내는 것.
엘리트들의 계획과 설계를 바탕으로, 정부의 중앙집권적인 통제 하에 땅을 수용하고 고속도로를 까는 것이다.

또 하나는, 사람들이 자기 필요에 따라 이리 저리 헤메면서 길을 찾아가는 것.
처음에는 한걸음 한걸음 나뭇가지를 헤치고 거미줄을 피하면서 전진해야 하지만, 
그 길이 유용한 길임이 판명되고 그 길을 찾는 사라들이 늘면 그 길은 곧 오솔길이 되고, 도로가 될 것이다.

이 두 방법에는 각기 장단점이 있고, 길의 목적이나 기능, 필요성의 경중에 따라 어느 방법이 더 유용한 것인지 선택이 달라질 것이다.  

브라질에서 열리는 세계사회포럼의 한국 참가단이 어제 저녁 출발했다.

세계사회포럼의 조직의 원리와 준비 과정을 보다보면 두번째의 길내는 모습이 자꾸 떠오르게 된다. 
세계사회포럼은 신자유주의와 자본과 제국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고 제안하고 경험을 나누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장이다.
세계사회 포럼에는 8개의 단체가 준비의 실무를 맡고,  129개의 단체가 국제 위원회를 구성해서 포럼의 방향을 의논한다. 

포럼 수개월 전서부터 주제를 제안하고 분류하고,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갖는 단체끼리 프로그램을 고안한다.
금년에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11가지 주제에 대해 3000여 개의 워크숍이 6일간 열린다. 전체 운영위에서 주관하는 행사는 첫 날의 개회식, 마지막 날의 폐회식 뿐이다. 나머지 회의들은? 관심 있는 단체들이 이메일과 전화로 서로 연락해서 구상한다. 

각 워크숍은 그 크기에서 50명부터 4000명에 이르고, 
주제은 인권, 대안사회, 자연보호, 노동운동 같은 기본적인(?) 사회운동의 영역에서부터,
이런 사회운동을 어떻게 미국 국내에 옮겨심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 
순수 기독교 봉사단체들의 모임, 
네팔의 독립에 관한 논의를 위한 티벳 승려 단체,
심지어  ' *** 에 관해 내 이야기를 들어볼 사람은 오시오" 하는 프로그램도 등록되어 있다.
물론, 대부분의 회의는 중요한 이슈에 대해 문제를 밝혀내고, 경험을 나누고, 공동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모색하는 자리이다.

이렇게 '방만하게' 준비되는 포럼이기 때문에, 기획자적인 입장에서 볼 때 행사의 준비가 위태위태해 보일 수 있다. 
이번에 출발한 우리 단체만 하더라도, '이런 주제에 대해 관심 있고 활동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단체 있으면 연락 바람'이라는 이메일을 받은 것이 불과 1주 전. 그것도 그 워크숍을 준비하는 단체에서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한 세 다리쯤 걸쳐서 단체 메일로 받은 것이다. 우리 단체의 관심사와 일치하고, 우리 경험을 나눌만 해서 발제를 하겠다고  다시 세 다리 걸쳐서 주관 단체와 연락을 한 것이 출발 3일 전, 이메일 및 전화로 직접 구체적인 참가 협의를 한 것은 우리 나라 참가단이 떠나기 하루 전인 지난 토요일이었다.
그 워크숍 참가자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자리에 모여 준비하는 것은 워크숍 바로 전날이 될 예정이다.

때로는 행사 전날이나 당일 행사가 취소되는 경우도 있고, 준비하는 단체의 역량이나 주제에 알맹이가 없는 프로그램도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을 통해 문제의 제기와 해결을 위한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회의 변화에 관심 있는 단체라면 사회포럼에 한번쯤 참가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연대의 네트워크를 구성해 가는 귀중한 장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사회포럼도 주로 문제제기 혹은 성토, 사례발표 중심이었다.
참가자들끼리도 '계속 이렇게 말만 하고 있으면 언제 행동할 것이냐?' 는 자조적인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만남이 몇 번 지속되면서 회의의 중심이 점차 대안 제시와 공동대처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한다면, 너무 낙관적인 관측일까? 

참가하고 싶은 단체 혹은 개인에게....

우선, 지구 반바퀴를 가서 수줍게 듣고만 오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면 좋겠다.
점잖은(?) 우리 국민성으로 보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간단한 질문이나 의견도 밝힐 건 밝히는 것이 좋다.
우리 시민운동의 성과도 어느정도 있으니까 주눅 들 필요 없다.

영어 공부를 하자.
사실, 얼마 전, 한 서재인이 퍼온 이진경씨의 글처럼, 한 '학문' 한다는 이진경씨까지도 국제 학회에서 외국어 때문에 서러웠다고 한다. 이진경씨의 지적대로, 당시 이른바 운동에 관심을 둔 사람들 간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좀 낯간지러운 일이었다. 그 결과, 우리 나라에서 외국과 활발히 교류하고 하는 쪽은 경제계, 법조계, 학계 중심이고, 시민 사회 단체에서는 주로 국내 문제에 촛점을 맞추어 왔기 때문에 외국어와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영어가 유창한 인재들은 주로 경제계의 '선진 이론'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우리의 앞날인 것으로 떠들어 댈 때에도, 우리의 시민단체들은 외국과 반 세계화 논리를 제대로 접하지도 못했고, 우리 시민운동의 성과 혹은 한국의 상황을 외국에 알려 연대하는 것도 변변히 하지 못했다.
영어가 받쳐 주지 않으면 사회 포럼에 참가해서도 수천개의 워크숍 중에서 오직 영한 동시 통역이 가능한 몇 개의 워크숍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아무리 다른 워크숍을 듣고 싶어도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다.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자.
명함을 만들어 가지고 가자.  단체를 대표해서 가는 것이라면 자기 단체에 관한 간단한 소개 전단지도 만들자.
관심사가 같은 외국의 단체 참가자나 발제가 인상 깊었던 사람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명함을 주고 받자. 관심 이슈가 같은 단체나 활동가라면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된다.
궁금한 자료나 질문을 부탁하면 대부분 아주 반갑게 자료 제공을 해주고, 지속적으로 정보 및 활동 공유를 할 수 있게 된다.

돌아와서 잊지 말자.
꼭 보고서 혹은 메모 형태로 기록을 남기자.
새로 알게 된 단체나 개인의 연락처, 이메일, 주 활동 분야, 특이사항을 정리해 놓자.
이 참가 경험을 국내의 다른 활동가들과 나누고, 향후 활동 방향에 반영하자.
가져온 자료들 중 중요한 것들은 가능하면 한국어로 번역하자.

이렇게 하면 '아래로부터의 변화'로 한걸음 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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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 시집 몇권을 주말 들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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