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 이상하다. 


미니벨로 페달을 밟는데 이러면 안되는데. 강가 인적이 드문데 아불싸.  끌고 가는데 튜브 바람은 빠지고 이러다가 질질 끌리게 생겼다 할 쯤, 찾던 자전거 판매수리점. 쥔장이 경량바이크 튜브 바퀴를 떼우고 있다. 손길이 날렵하다. 다행히 연이어 수리를 할 수 있었다. 쓱쓱싹싹. 야무진 손맵시에 금방 뚝닥뚝닥. 마침 현금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카드 결제가 가능하단다. 영수증과 함께 주시는데 단돈 5천원. 깜짝 놀랐다. 재료비도 받지 않으신 듯싶다. 감사.


0. 


외곽을 타고 빙빙빙 둘러서 라이딩 퇴근이다. 그렇게 에돌아도 20k 조금 넘었을 뿐, 평소에 조금조금 타주는 것이 좋다.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다. 단골집에 시원한 맥주에 오늘 마무리하기로 한 마지막 장을 펼친다. 생각보다 페이지수가 많은 건가. 읽는 속도가 느린 건가. 샐러드와 오백을 하나 더 시키고 긴장감과 모서리가 접히는 속도가 는다. 도대체 지금까지 니체를 제대로 읽고나 있었던가 싶다. 니체 서거 100주년 기념 강연인 듯싶은데, 행간에 왜 이 책이 나오게 되었는가를 세밀히 밝히고 있다.


1.



지금까지 언어라는 것이 대상을 찬양하기 위해 쓴 것이지, 한번도 개인의 삶을 찬양하기 위해 씌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니체 이전 7-80년전 미국의 제퍼슨 대통령이 성서를 자신의 관점(찌꺼기는 버리고 금만 모았다라고)에서 추려 책을 만든 것이 유일한 언어의 전용사례라고 한다. 


2.


아우라를 높이기 위해 쓰지 않는다. 찬미하기 위한 미사여구를 쓰지 않는다. 추궁하기 위해서도 밀어붙이지 않는다. 하루하루 일상의 틈으로 몸을 밀어넣는다. 땀냄새가 흠뻑 나도록, 네가 역겨울 수도 있겠지만 밀어붙인다. 한 끼의 식사가 허기를 메우듯이 한 마디 말이 네 삶의 며칠을 사로잡을 것이다. 몸살이거나 지친 신열을 내리게 할 환약이기도 하다. 


3.


니체는 자신이 다른 부류의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가 만든 작품을 퇴고하면서 스스로 놀란다. 백년이 아니라 천년의 독자가 건네받을 말이란 걸 새긴다. 정말 짜라투스트라는 처음 책이 나오고 읽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한다.


볕뉘.


0. 페터가 면역학을 얘기하고 있다고 했는데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이 장에서 그 요지와 문맥을 정확히 읽을 수 있다. 그 이야기 역시 니체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하다.


1. 아무래도 다시 읽기 시작할 것 같다. 맥락을 쫓아가거나 쫓겨가거나 할 것 같아. 눈시울이 시큰거려 혼이 났다. 어제 마지막 쯤에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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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몇 일정이 겹쳐 어젯밤부터 잠을 설친다. 중간에 한번 깨고, 반쯤 열어둔 창문 사이로 가끔 냉기를 느낀다.

1. 


이른 아침 요기를 하려고 하지만, 역 구내 분식집은 아니 오픈 전이다. 아아가 필요치 않은 것 같아 따듯한 병커피를 챙긴다.

2. 


문서 작업을 해보려고 하니 키보드도 문서뷰어도 한글독스(독사라 읽어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를 설치한다. 스마트보드도 지우고 다시 연결을 몇 번하니 된다. 주말 보내주기로 한 행사개요문서를 작성하다 두고 이렇게 딴 짓이다.

3. 


일터 동료들과 회식이 늦어져 보다가 접은 책. 페터 슬로터다이크 두 권을 챙긴다. <<냉소적 이성 비판>>과 함께.

4. 


이 친구는 참 재미있다. 지금을 특징 짓는 것이 냉소라 한다. 폴 비릴리오의 속도나 원격적객체를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무언가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다고 말한다.

5. 


그래서 그는 할 말이 많고 그가 언급하는 냉소적 이성-대중(경멸해서 평균을 고집하여 수직적 편차를 인정하지 않는)-복음은 연결되어 있다. 철학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고 그나마 구해내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들을 취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번역자는 ‘드라마‘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현대적 냉소주의는 소박한 이데올로기들과 이에 대한, 계몽의 뒤를 이어 나타난 의식의 상태라고자신을 표현한다."8) 슬로터다이크의 인식에 의하면 이데올로기 비판이 진행되면 될수록, 즉 계몽의 영역이 확대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냉소적이 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비판은 통상 허위의식의 계몽으로 이해된다. 이런 관점에서 "냉소주의는 계몽된 허위의식" (Aufgeklärtes falsches Bewußtsein)과 다를바 없다.

"그것은 현대화된 불행한 의식이다. 계몽은 이 의식에 대해 성공적이지만 동시에 헛되이 작업을 하였다. 냉소주의는 계몽의 교훈을 배우긴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뿐더러 아마 실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 P22

슬로터다이크는 여기서 경멸이 현대사회의 전염병이 되었으며, 대중은 경멸을 통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사이비 주체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현대는 대중을 주체로 발전시키고자 했던시대이다. 대중과 함께 정치적 무대에는 강력하고 엄청난 행위자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슬로터다이크는 "대중이 주체가 되고 거기에다의지뿐만 아니라 역사를 얻는다면 형식이 임의대로 재료를 주무를 수있다고 믿었던 이상주의적 교만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한다.

왜 대중은 경멸의 사이비 주체가 된 것인가? 슬로터다이크는 대중을주체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근대의 기획이 실패한 가장 커다란 이유는‘평등지상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 P31

"니체의 시학이 간접적 찬사의 규칙들을 지양하고 타인칭송을 자기칭송으로 대체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확인은 단지 새로운 개간지의 바깥층만을 보여줄 뿐이다. 더욱 깊은 차원에서 니체의 긍정적 언어는여전히 낯선 것을 칭송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 니체의 언어는아직까지 찬미된 바 없는 비(非)자아를 칭송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른 인격의 타자성 이상의 것인 타자성에 전념한다."37)슬로터다이크의 서술을 통해 니체는 결국 자기를 칭송하기보다는타자를 칭송하는 저자로서 나타난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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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책을 펼치면서 몇 장을 넘기다보면 주저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옆의 책은 제1부 이론, 제 2부 실천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저자가 열 분 이상이 된다. 서론에 구조와 목적, 보는 방법을 보다가 멈칫하고 있다. 밑바탕에 부르디외의 (문화생산의) 장의 개념을 근간으로 한다고 한다. 부르디외. 언제 적 부르디외를 소환한다 말인가. 그리고 사회학을. 읽어야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마지막 장 베를린 재건축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은 흥미롭다.(재닛 스튜어트) 이 장을 먼저 읽고 나머지는 추려 읽게 될 것 같다.





1. 


무위인. 약하지 않을까. 단행본이어서 반가운 마음에 덥썩한다. 펼쳐보니 묶음집이라 밝히고 있다. 제3부는 뜬금없어 보이기도 한다.  존재, 주체, 윤리. 되기의 윤리학은 좀 처져 있어 그 자체로 생동감을 잃은 것은 아닐까 싶다. 지난 십여년의 사유보다는 지금의 사유가 궁금하다. 그렇게 한 걸음도 못나가고 멈칫하고 있다. 저자의 세계철학사 1-4시리즈가 궁금해진다.










2.

 

본주의 아래 인간은 자본주의보다 예속을 위해 더 싸우는가? 왜 그런 주체만이 재생산되는가? 국가는 대체 뭔가? 저자는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불러낸다. 들뢰즈가 문제제기한 물음을 지금여기에서 다시 생각해보자 한다. 경쟁과 공정(성과급의 다변화- 이 것은 마르크스가 예견한 바이기도 하다. 자본론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이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고 대기는 잠식하는 가스로 가득차있다.  


이 세가지 물음을 전면에 내세운다. 첫 번째, 세 번째 질문이 아니라 두 번째 질문 서술을 읽으며 막힌다. 욕망. 들뢰즈만이 아니라 네그리 하트의 욕망.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고 싶은데로 읽는 건 아닐까. 천 개의 고원 기관없는 신체(몸체) 편을 다시 읽는다. 삐긋하면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저자는 들뢰즈가 주목한 흄을 불러낸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세심하게 읽게 될 것 같은데, 이렇게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3. 


얕은 책들은 위험하다. 마치 단물 같아서 빨아먹고 나면 남는게 없을 수도 있다. 1/3지점을 향해 가고 있는데, 긴가민가 한다. 대중서라는 것이 가뜩이나 책들을 읽지 않고, 이리 가벼운 한권만 읽고 신주단지처럼 이야기하는 세태가 그려지기도 해서다. 부디 괜찮길 바란다.









4.


 <<지옥에서 보낸 한철>> 옛 판본을 다 읽은 줄 알았는데 접혀있었다. 오고가는 길 이책과 함께 읽고 나서야 온전해진다. 함께 읽어나가면서 랭보야 말로 시의 힘을 믿었고, 베를렌과 친구들과 밀도높은 하루하루를 보내며 너무도 일찍 고독이라는 신발을 신을 줄 알았던 건 아닐까 싶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힘. 어디든지 살 수 있는 힘.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결기가 그림자처럼 붙어있을 수 있던 걸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브 폰푸아가 이 제목의 글은 85세가 되어서 쓴 글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또 한번 증명해낸다.


-1. 


두서없이 잘 읽히지 않는 책들을 남겨본다. 

구름은 불고 바람은 하얗고 자전거 발틈 사이로 가을하늘이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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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알라딘에는 리토피아 <<돌이나 물이나 그런>>시집을 구할 수가 없다.(곧 되겠죠. 감사) 


 -1. 구월의 이틀 삼일이 지나자 찬기운이 느껴진다. 얄팍한 마음은 벌써 몸의 길로 깊숙히 들어가 겨울초입까지 간다싶다. 오늘 구름도 하늘의 파랑도 부지런해 아름답다. 


-2.  다른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청춘도 지났다.(아직도 그런 부류들이 많기는 하지만, 남시인은 시 한가운데에서 '라떼'라고 꼰대에게 막대기를 들이대기도 한다. 83p)평균적인 남성의 삶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에, 수 많은 언어들이 이에 적합하게 일대기에 맞춰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것이 현실이다. 시인의 말은 그들을 닮지 않았다.  


-3. 그는 철저히 식물성이다. <<상처를 만지다>>란 시집.(알라딘에서 검색할 수 있겠죠.)에서 태초에 빛이 아니라 태초에 상처가 있었다라고 선언(105p)한다. 상처로 우리의 언어들이 회자되고 사유할 수 있다면 분명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시집의 행간을 읽어보면 시인은 식사시간이 길 수 밖에 없으며, 평균적인 한국 일터 생활인들과 사뭇  먼 가장자리(그제서야 보이는, 53p)에 자리잡고있다.


 1.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시집이 도착해 푹 빠져든다. 제 1부는 호주(戶主)(15p)로 시작해 여성성 강한 시들로 가득하다.(박은옥 41p) 小史(22p)에서 여자는 언제 죽었나라 물으면서도 어머니의 삶이 한번 더 언제 죽었는지 되묻고 있다. 시인의 여성성은 그저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표준적인 남성상으로 느낄 수 없는 잔잔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여기저기 박히고 기록해두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시인의 말, 7p)


2. 이 시집에서는 또 다른 그의 습관? 아니 그의 삶에서 기면과 얽혀있는 부분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바닷가 우체국장님의 점심일과가 그려지기도 하는데, 시인은 주류에서 벗어난? 식습관의 차이와 불쑥 몰려드는 잠을 소재로 삼는다. 


3. 다르다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은 코로나(제3부)를 반추한다. 정상인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일터에서도 몇 분이 세상을 등지기도 하고, 아주 가까운 현장대장님이 바이러스성 신경염으로 재활에 전념중이기도 하다. 누님도 완쾌되긴 했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전정기관이 문제가 생겨 몇 달을 고생하기도 해서...끊임없이 정상이란 무엇일까 되묻게 되기도 한다. 환자이거나 환우. 다르다는 스펙트럼은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단어까지 폭 넓다. 왜 그렇게 부류짓거나 편(편먹다, 112p)을 먹으려 하는 것인지. 그냥 다른 체로 놓아두질 않는다. 서로 다른 채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중심에 중심으로 들어가려는 노력만이 삶인 줄 아는 우리들은 스스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다. 가장자리에 서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자리에 서 있는 분들로 출렁거리는 것이다. 아플 것이다. 나이들 것이다. 차별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4. 60대초반의 은퇴한 남성. 여러분의 선입견은 어디에 걸려있는가? 그는 부지런히 꼼꼼히 읽고 전시들을 세세히 챙기고, 그 흔적들을 치밀하게 남긴다.  그는 언제부터 그렇게 살았을까. 시인은 사랑(98p)이란 시에서 그 비밀을 밝힌다. 밥상머리에서 불현듯 터지던 기도가 언제부터 "사랑합니다!"로 바뀌었다 한다. 구하지 않고, 기구하지 않고 애愛써 살았다 한다. 따듯하고 부드럽고 부지런한 시인의 일상은 곁에서 보기에도 남다르다. 깊이 반짝인다.


덧글.  제 5부는 80년대에 쓴 시로 이루어졌는데, 꺅꺅(185p)부터 각별한 내공이 느껴진다. 시에 대한 사랑이 남다름은 물론 출구(7p 발견하는 언어, 52p 그제서야 보이는 76p 이튿날 새벽)를 간간히 남겨두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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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리좀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 또는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 <하나>가 빼내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리좀은 일종의 반계보이다. 그것은 짧은 기억 또는 반기억이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를 통해 나아간다.


0. 


어제는 어류도감 관련 책들을 보려고 간만에 도서관 종합열람실에 들르다. 옛 기억들이 올라온다. 그래도 신간과 제법 많은 책을 보고 나눈 곳.인데 전집류 책들이 보이지 않는다. 과학도서 끝 부분, 나무와 새 가운데서 겨우 몇 권만 추려서 볼 수 있다. 아쉽다. 


1. 


<<천 개의 고원>> 서론:리좀 말미 코멘트를 달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는데 이렇게 이어간다.  나무라는 개념에 들뢰즈 가타리는 경끼를 일으킨다. 씨앗을 심다니. 그 비유의 사유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개념과 무관하다고 한다. 식물 관련 동영상을 보다나면 잎을 잘라 감자 편에 꽂아 심거나 과일나무를 다른 가지에 삽입하여 랩핑하여 키우는 장면들을 보고 있다. 따로 모아볼까 하지만 아직 시도는 하지 못하고 있다. 서로 말미 핵심개념인 리좀을 이렇게 시작한다.


51. “말하자면, 나에게 닥친 모든 것은 뿌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중간의 어떤 지점에서 온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붙잡도록 애써라, 그리고 먼저 줄기의 중간에서 자라기 시작한 풀을 붙잡아 거기에 붙어 몸을 지탱하도록 애써라”......사물들이나 말들 속에서 풀을 보기란 쉽지 않다(니체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포리즘은 “반추”되어야만 하며, 고원은 거기에 서식하는 하늘의 구름과도 같은 암소들과 분리될 수 없다).


2. 


그 리좀 개념이 바탕에는 중간이 있다. 중간을 잡아라. 애써라. 어제는 이 대목때문은 아니지만 달개비를 들여다보니 마디마디마다 잔뿌리들이 남아 있다. 고개를 쳐든 외모만 보다가 이리 얼기설기 엮어있는 모습은 처음 본다.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은 것이다. 씻고 말리고 젤리판에 올려 작업을 해본다. 여러 장을 해 보았지만 쉽게 곁을 주지 않는다.


53 역사가 유목을 이해한 적은 없으며 책이 바깥을 이해한 적도 없다. 오랜 역사가 흘러가는 동안 국가는 책의 모델이었고 사유의 모델이었다. 로고스, 철학자-왕, 이데아의 초월성, 개념의 내부성, 정신들의 공화국, 이성의 법정, 사유의 공무원, 입법자이자 주체인 인간, 세계 질서의 내부화된 이미지로서의 국가, 인간을 뿌리내기게 했다는 국가의 오만 방자함. 그러나 전쟁 기계와 바깥의 관계는 또 다른 “모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배치물이다. 사유 자체를 유목민이 되게 하고, 책으로 하며금 모든 움직이는 기계의 한 부품이, 리좀의 줄기가 되게 하는 배치물이다(괴테 대 클라이스트와 카프카).


3. 


클라이스트가 여기서 언급이 많이되는 작가다. 괴테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인데, 작품들을 본 적이 없어 희곡선을 주문해둔다.  세상은 복잡하다. 복잡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것을 참지 못해 이념으로 잡아두거나 내식대로 막무가내로 가는 것은 시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늘 반복되지만 배치물이라는 것. 연루된 것의 확장. 그렇게 예민해지는 것이 인식의 오만이나 존재에 대한 차별을 너머 세심함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보다 잘 이해하게 되고 연민하게되는 윤리라는 것이 생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인이 인식이 존재론이나 인식론에 사로잡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존재론이나 인식론에서 진리를 추구하면 늘 공부를 새로 하듯이 영점으로 세팅해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 방법론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중간, 지금 여기를 얘기하는 것이다.


54 n에서, n-1에서 써라, 슬로건을 통해 써라. 뿌리 말고 리좀을 만들어라! 절대로 심지 말아

라! 씨 뿌리지 말고, 꺾어 꽂아라!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어라!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속도가 점을 선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빨리빨리, 비록 제제리에서라도!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 당신들 안에 있는 <장군>을 깨우지 마라! 올바른 관념들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관념을(고다르). 짧은 관념들을 가져라! 사진이나 그림이 아니라 지도를 만들어라. 핑크팬더가 되라, 그리고 당신들의 사랑이 여전히 말벌과 서양란, 고양이와 비비만 같아라! 



4. 


고다르를 이미 호출하셨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장 뤽 고다르. 삶이 마무리까지 영화같은 신비로움을 넘어 일관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글쓰기 방법은 매여있지 않다. 슬로건은 슬로건만이 아니라 다른 개념들로 이어진다. 불쑥불쑥 꺾꽂이 하는 모습은 책이 말미까지 이어진다. 학문이라는 책이라는 보고서라는 틀로 우리는 늘 완결성을 고집한다. 그림 또한 인상보다는 사실화에 가깝게 남기려 안간힘을 쓴다. 그런 면에서 방법까지 분기되어야 한다. 그 가짓수가 많을수록 많은 느낌들을 남길 수 있다. 잘 쓰려고만 하지 다르게 쓰려고 하지 않는다. 간절함들은 어느 순간 다른 모습들로 만날지도 모른다. 말벌과 서양란처럼, 제 모습을 닮게 할 것이다. 닮고 싶은 것들을.



55 리좀은 “그리고.....그리고...그리고 ...”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다>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백지 상태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행 또는 운동에 대한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여행하고 움직이는 다른 방법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 것이다....중간은 결코 하나의 평균치가 아니다. 반대로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내는 장소이다. 사물들 사이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거나 그 반대로 가는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휩쓸어 가는 수직 방향, 횡단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 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5. 


어디서 시작할 건데, 어떻게 할 건데. 막히면 되묻는 것이 이것이다. 질문이 탐탁치 않은 것이다. 중간은 그냥 가운데가 아니다. 속도를 내는 곳이라고 한다. 점이 아니라 선, 물결과 물결이 만나는 곳이다. 하나의 재료와 다른 재료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 곳이 바로 고원이다. 천 개의 고원이란 당신이 가까이온 그 개념이다.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는 정치이자 삶이자 윤리존재인식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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