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감정의 철학

[ ] 차이의 소멸. 이 질서의 위기를 맞아 하나의 숨겨진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전원 일치의 폭력을 위한 공물. 분신처럼 너무도 닮아 버린 구성원들 속에서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미미한 징후를 근거 삼아, 한 사람의 제물(희생양)을 가려낸다. 분신과도 같은 서로를 향하던 악의와 폭력이, 순식간에 이 불행한 제물에 쏠린다. 이렇게 전원 일치의 의지에 따라 공물이 성립한다. 공물을 계기로 집단은 새로이 차이의 체계를 재편하고, 위기를 교묘하게 모면한다. 58

[ ] 현실 사회는 권력 구조로 점철되어 있고, 너희는 이미 그 사실을 깨닫고 무의식적으로 그 예행연습을 하고 있노라고,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인간은 평등하다느니 기본적 인권이라느니 하는 입바른 소리를 그저 이념에 불과하며 (이념적으로는 훌륭하지만) 현실은 이와는 동떨어진 아수라장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가해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내 몸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에 결국 가해자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쳐 주는 것이다.; 열 살쯤 먹었으면 이런 가혹한 권력관계는 알고도 남는다. 60

[ ] 차별 감정으로서의 혐오가 강한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 둔감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몹시 민감한 사람들이다. 그중에서 ‘정상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강하고, ‘의례적 무관심‘을 가장해 자기 주위에 이상한 사람이 없는지 탐색해서 찾아내고 고발하는 사람이다...... 관련 요소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차별 감정이 심한 사람도 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에게 혐오감을 가진 사람들 이상으로 ‘정상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강하고, 자신과 타인에 대한 도덕적 욕구가 높고, 그렇기에 타인의 부(비)도덕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공격적으로 비난을 가한다. 61

[ ] 차별 감정이 강한 사람이란, 일반적으로 남을 싫어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감정에 따라 남을 미워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또한 관념적으로 사람을 싫어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며, 어떤 사람을 향한 자신의 혐오감에 대한 자기비판 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선량한 약자들 역시, 약자 특유의 지극히 비열한 방법으로 차별 문제를 흐리고 있다. 그들은 상처 받기 쉽고 약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맞추라고 요구한다. 자신도 가급적 타인을 싫어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는 오로지 자신이 타인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이다. 이들은 미움을 받으면 더 이상 살아갈 기력도 없을 정도로 침울해진다. 그래서 어떻게든 미움 받고 싶지 않다는 강한 바람을 품고, 자신은 미움 받고 있지 않다고 필사적으로 믿는다. 그래서 이곳에는 자기기만이 꿈틀댄다. 71,72

[ ] 미움 받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극단적으로 강한 사람은 반성해야 한다. 이는 미덕이 아니라 그저 인간으로서 미성숙할 뿐이며, 오히려 사회에 끊임없이 해악을 끼친다. 인간이란 부조리하게 남을 미워하는 존재이니,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우리는 타인으로부터 (부조리하게) 미움 받는 것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야하며, 그러한 저항력이 있는 사람만이 현실적으로 차별 감정에 맞설 수 있다./인간의 위대함은 악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선을 갈구하는 데 있으며, 남을 속이고 상처주고 이용하고 파괴할지언정 ‘상냥함‘과 ‘배려‘를 완전히 버릴 수 없는 데 있다. 이러한 인간의 다이너미즘을 가르쳐야 한다. 72

[ ] 나치스가 대중의 마음을 조작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유대인의 의지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고 과대 선전한 덕분이었다. 이는 유대인에 대한 ‘공포‘와 연결된다. 경멸의 배후에는 공포가 있다. 75

[ ] 권위주의적 성격과는 반대되는 요인을 가지면서도 차별의식이 강한 사람이 있다. 차별 문제에 몰두하며 피차별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듣는 사이에 ‘무슨 수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가해자와 피해자로 양분하는 지극히 단순한 이항 대립을 적용하고 그 생각을 구축해 나간다. 그들 역시 ‘역차별‘이라는 차별 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복수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으며, 논리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대단히 공격적이다. 80

[ ] 마녀재판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마녀‘를 장작불에 던졌던 사람들, 히틀러 정권 아래에서 유대인 박멸 연설을 들으며 환희로 가득 찼던 사람들, 그들은 극악무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놀랄 만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자기비판 정신‘과 ‘섬세한 정신‘이 철저히 결여된 ‘선량한 시민‘이었다. 81

[ ] 왕따의 구조를 살폈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균질적인 사람들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현대 일본에서는, 고상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고상하지 않은 타자를 만들고, 그 사람들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정한 고상함을 확고히 하려고 한다. 90

[ ] 자기 안에 깃든 악을 타인에게 투영하는 치밀한 투영이 선행되어 차별하는 이들의 죄책감을 없앰으로써, 차별은 양심의 가책 없이 당당하게 실행도고 한층 가혹해진다. 극악무도한 사람이 아닌, 모든 도덕관념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퇴폐주의자가 아닌, 오히려 죄책감이 강하고 소심하고 선량한 시민이기에, 차별 감정으로서의 경멸에 매달린다. 91

[ ] 차별 문제의 어려움은자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싶고, 우월감을 느끼고 싶고, 더 좋은 집단에 소속되고 싶다는, 즉 ‘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좋은 점이 나쁜 점을 뒤에서 받치고 있다‘는 데 있다. 차별을 없애려면 악을 없애면 된다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다. 차별 문제는 인간의 마음속에 깃든 ‘악‘을 잘 파악해서 퇴치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차별 문제는 우리 인간의 발전하고자 하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 105

[ ] 칸트는 자신과 타인 안에 있는 ‘인간성‘을 존중하라고 했다. 인간의 동물적 측면을 포함한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하라는 말이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존중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이면서 동물이기도 한, 대단히 불안정한 인간 존재를 존중하라는 말이다. 배설이나 성교 같은 동물성이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일수록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117

[ ] 지적장애인이라면 약자이자 피차별 후보자이기에 현대사회에서는 정중하게 보호 받는다. 그런데 단순히 학습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다. 이러한 부조리 앞에서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는 수밖에는 없다. 철학자는 이러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이 거대한 부조리를 건너뛴 채, 장애인 차별이나 여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같은 전형적인 차별 문제만을 다루는 한, 그 문제에 아무리 열정을 쏟는다 한들 섬세한 정신을 지녔다고 할 수 없다.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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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수집가의 여행
[ ] 어머니는 어디든 다시 돌아올 사람처럼 여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다 보려고 안달하기 쉬운데 그러면 오히려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다음에 볼 것을 남겨 둬야 해. 다시 오고 싶게 만드는 무언가를.> 19

[ ] 가끔 평범한 목격자가 정책 분석가보다 더 귀하다. 선입견 없는 아마추어가 진실을 더 제대로 본다. 맞춤 양복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1

[ ] 나는 영국에서는 교육이 야망에 떼밀린 필수 활동이 아니라 즐겁게 누리는 사치로 간주되곤 한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깨우쳤다. 계급으로 나뉜 사회에서는 실력주의의 지배력이 미묘하다는 사실을 이전에는 몰랐다. 푹푹 끓인 음식이 왜 그렇게 많은지도 몰랐다. 한 땅에서 수백 년을 이어 노동해 온 집안들이 품는 자신감을 몰랐고, 영국인은 다급한 진심을 반쯤 가리고자 유머를 우아하게 사용하곤 한다는 사실도, 나라 전체가 영속성이라는 든든한 습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영국인 친구들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읽지 않았다는 데 놀랐고, 나는 친구들이 좋아하는 시인들을 이름도 몰랐다는 데 놀랐다. 우리는 정녕 내 예상보다 공통점이 더 적은 공통의 언어로 나뉜 두 나라였다. 나는 영국의 모든 곳에 스민 위풍당당함을 사랑하게 되었고, 즐거움이 성공만큼 중요하다는 새 신념을 사랑하게 되었다. 뱅크 홀리데이와 오후의 티타임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종교가 심판하는 것이자 늘 재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고상하고 의례적인 것이라는 점이 좋았다. 영국인은 미국인보다 훨씬 더 열심히 여행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여행지에 흠뻑 녹아들 줄 아는 영국인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이 책에 기록된 여정을 시작하게 만든 한 요인이었다. 25

[ ] 희망이란 행복한 유년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 수혜자에게 불가피하게 뒤따를 트라우마를 견딜 힘을 갖춰 준다. 그것은 또한 원초적 사랑처럼 경험된다. 이전까지 비교적 비정치적이었던 내 삶은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동안 궁지에 몰린 진실성이 갖기 마련인 절박함을 띠게 되었다. ..비록 근거없는 희망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어도, 그때 그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후 내 모든 생각을, 내 모든 그림을, 내 모든 존재를 결정지었어요...32

[ ] 집에서는 하루하루가 경계 없이 흐릿하게 이어지기 쉽지만, 낯선 환경에서는 하루하루가 삶을 또렷하게 만들어 준다. 테니슨의 시 속에서 율리시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을 그만둘 수는 없다: 다 마셔 버리리라/삶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나는 여행이 시간을 멈추게 하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현재에 머물도록 만들기 때문에 좋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은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한 쪽만 읽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나는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다 읽고 싶었다. 나는 길을 나섰다. 이 세상에 벌어진다면 좋을 것 같은 변화들을 목격하고자. 34

[ ] 나는 개입과 상호성이라는 문제를 갈수록 더 유념하게 되었다. 모든 새로운 관게는 양쪽 모두에게 혼란을 준다. 그것을 피하거나 최소화하려고 애쓰는 대신, 그 혼란에 자신을 더 활짝 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이례적인 상황에 적응하는 일은 본디 잘하는 편이지만, 그러면서도 그들과 내 차이를 인식해야 했고 그들도 그 차이를 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들과 같은 척 꾸며서는 그들에게 녹아들 수 없다. 서로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 그리고 우리 삶의 방식이 그들의 방식보다 어떤 면에서든 더 낫다는 가정을 접어 둘 때, 비로소 녹아들 수 있다. 36

[ ] 여행은 자신을 넓히는 연습인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알아보는 연습이다. 여행은 우리를 증류하여, 맥락을 떠난 본질만을 남긴다. 완전히 낯선 장소에 몸을 담갔을 때만큼 자신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경우는 또 없다. 39

[ ] 장소를 알아 가는 것은 사람을 알아 가는 것과 같다. 그것은 심리를 깊이 이해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나눈 소통을 이해하려면, 먼저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내게는 조리 있는 논리가 상대에게는 부조리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려면,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맥나마라는 말했다. <우리는 전쟁의 언어로 논쟁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보편 언어인 줄 착각했던 거죠.> 42

[ ] 원초적이면서도 진정성이 없기는 쉽지만, 거친 것을 두려워하면서 진정성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에세이스트 존 러스킨은 열차 여행의 효율성이 여행의 즐거움을 없앴다고 불평하면서 이렇게 썼다. <열차 여행은 다른 장소로 그냥 <<보내지는 >> 것이다. 짐짝이 되는 것과 별다를 바 없다.> 내가 불편함을 즐기는 취향을 기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불편함을 즐기는 것보다는 모험을 즐기는 편이 좋았지만, 후자라면 멋진 시간을 보내게 되고 전자라면 이야깃거리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차츰 어느 쪽에든 마음을 열게 되었다. 44, 45

[ ]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개인이 각자 야망을 이룰 기회가 있지만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서는 그런 선택지가 없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더 거창한 야망이 허락되기도 한다.47 자유가 정체와 연관되는 경우는 드물다. 자유는 거대한 변화의 시기에 단발적으로 등장한다. 자유의 한 구성 요소는 낙관주의인데, 낙관주의는 앞으로 벌어질 일이 지금 벌어지는 일보다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동반한다. 변화는 종종 무모하다. 종종 끔찍하게 잘못된다. 분위기에 짜릿한 자극을 가하지만 종종 그 짜릿함이 실현되지 않고 소실되는 결과만을 낳는다. 민주화의 전제 조건은 모든 구성원들이 의사 결정의 무게를 나눠서 짊어지기로 동의하는 것이다....정부만 바뀌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에 길들었던 국민들의 마음도 바뀌어야 한다. 이 일에는 한 세대가 걸릴 수도있다. 나는 사람들이 자유를 좇아 구속을 떨치는 모습을 보면서 변화란 참으로 영광스럽지만 참으로 힘들 수도 있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자유를 획득한 뒤에는 자유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자유로워진 자신을 되찾고...자유는 배워야 하는 것,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49

[ ] 부르카를 쓰고 와서 도착하자마자 벗었는데.. 법도 더 이상 여자들을 옭아매지 않았는데..첫 번째 여자는 ˝세상이 바뀌면 당장 벗어던지겠다고 늘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는 변화가 안정적이지 못할까 봐 걱정스러워요. 혹 탈레반이 권력을 되찾게 되면, 난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 두 번째 여자가 말했다. ˝나도 벗고 싶지만, 사회의 기준이 아직 바뀌지 않았어요. 이걸 쓰지 않고 나갔다가 강간이라도 당하면, 사람들은 다 내 탓이라고 말할 거예요.˝ 세 번째 여자는 말했다. ˝나도 이 쓰개가 싫어요. 탈레반이 물러나자마자 벗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남들에게 나를 내보이지 않는 데 익숙해졌어요. 그게 내가 되어 버렸어요. 다시 남들 눈앞에 드러낼 걸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너무 커요.˝ 먼저 개개인으 마음속에서 많은 것이 변해야만 뒤따라 사회가 변하는 것이다. 49

[ ] 위대한 진전이 비극과 함께 벌어질 때도 있다. 그런데도 사회가 새롭게 재탄생하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상시적 불확실성으로 혼란스러운 사회라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변화는 점진적인 침식의 결과가 아니라 빈발하는 부정 출발의 결과일 때가 많다. 실패한 시작이 두 번, 세 번, 혹은 열 번쯤 쌓인 뒤에야 비로소 돌파구가 열리고 변화가 오는 것이다. 거꾸로, 변화에서는 즉각 노스탤지어가 따라 나온다. 현재가 더 낫다고 해서 흠 있는 과거를 지울 수는 없는 법이고, 그 어떤 과거라도 대단히 아름다웠던 요소를 조금은 갖고 있는 법이다. 우리가 이제는 말소된 과거의 정체성을 기억하면서도 현재를 살아가려면,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52

[ ] 어떤 것이 변할 수 있는 소수의 것에 속하고 어떤 것이 변하지 않는 많은 것에 속하는지 패턴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진단은 덜 내리고, 질문은 더 잘 던지고, 답은 성급히 내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었다. 과거에는 변혁적 혁명을 믿었지만, 지금도 믿는 것은 개선적 진화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순진했던 듯한 그런 확신 덕분에 내가 다른 문화들을 더 많이 탐구했던 것은 사실이다. 54

[ ] 선의로 의도되었더라도 강요된 통제보다는 공개된 담론이 더 쉽게 정의로 이끈다. 금지된 발언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고, 금지된 것을 말하여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은 대단히 멋진 일이다. 61

[ ] 어릴 때 나는 용기보다 안락을, 안락보다 안전을 우선하라고 배웠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그 위계를 뒤집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릴케는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연습할 것은 하나뿐, 서로를 놓아주는 것이다. 서로를 붙잡는 것은 쉽게 되는 일이니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내가 거듭 밖으로 나가 본 뒤에야 집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작별은 친밀함의 필수조건이다. 71

볕뉘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하는 무엇이 다를까. 일상 가운데...끊임없이 일어나는 것 가운데 변화. 그것은 무엇일까. 지난 겨울 독서를 그 실마리를 조금 마련해주었다싶다. 그렇게 해서 어쩌다 손에 들린 책이다. 경이롭고 놀랍고, 어쨌든 그 놀라움을 추적해 가다보면 저자의 유년에 실마리가 있다. 게이인 저자는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어쩌면 그의 감정의 촉수는 그가 경험한 많은 대륙들의 일상에 끊임없이 접속되어 있는 지도 모르겠다. 아는 것이 괴로움일지도 모르겠지만, 가끔 스스로 무지가 재미도 없고 스스로를 무디게 만든다 여긴다. 좀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접속하는 이들의 흐름에 녹아 산다는 것. 제법 부러운 일이라는 생각들에 잠겨있다. 당분간..어쩌면 분위기의 톤으로 잠잠히 읽는 독서가 이어질 것 같다. 영국 단편소설 가든파티도 주문을 넣었다. 러시아 단편소설에서 좀더 색다른 맛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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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너만 생각해도
가슴 안이 환해지고

너만 봐도
볼이 화사해져

점점
박힌 실루엣만 봐도

콕콕
마음이 따뜻해져서.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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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2-2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화꽃인가요? 벌써 봄이오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아요^^

여울 2019-02-21 23:37   좋아요 0 | URL
네 매화에요. 봄이 성큼 왔네요^^
 

경애의 마음

[ ]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27

[ ]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줄거리도 씬도 배우도 아니고 오직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관객과 상영되는 영화 사이에 이는 그 순간이라는 시간이라는 좀 과격한 논리를 폈고 그걸 ‘불타는 시간‘이라고 불렀다. 64

[ ] 상수는 마침내 괄호 안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이 되고 만다˝라고 문장을 완성했다. 123

[ ] 시작도 진행도 종료도 모두 마음의 일이었는데 그 마음을 흐르게 한 동력은 자가발전이 아니었다는 것, 황망한 가운데에서도 오직 그것만은 분명했다. 조교와 상수 사이에 있던 위계가 일종의 권력의 위치에너지를 생산해 감정을 만들어냈다는 것. 그런 상수의 분석은 스스로에게 여러모로 이로웠는데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150

[ ] 상수는 마치 추처럼 어떤 것과 어떤 것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경애는 그가 그렇듯 갈등하는 것에 고유한 윤리가 있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상수는 막무가내의 이기주의자나 꼴통, 심지어 고문관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마음의 질서가 있는 사람이었고 다만 그런 자기윤리를 외부와 공유하는 데 서툰 것뿐이었다. 158

[ ] 베이지색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에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자 상수는 눈물이 어렸는데 사랑이 있다는 느낌이 가져오는 의외의 헛헛함 때문이었다. 사랑이 있다고 하면 대개 차오른다거나 벅찬다거나 하는데 지금 상수는 무언가가 급하게 빠져나가 완연히 달라진 바깥의 온도와 내면의 온도를 느꼈다. 260
[ ] 경애는 사실 호찌민이라는 사람에게는 이름이 160개도 넘게 있다는 걸 아느냐고 물었다. 263

[ ] 상수는 실체라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일이란 이렇게 어떤 형상에 숨을 불어넣어 그의 일부를 갖는 것일까. 그래서 상수는 그동안 그런 일들이 그렇게 무서웠을까.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그동안 상수가 경애에게서 가져와 하나씩 완성한, 상수의 마음속에서 걷고 말하고 먹고 마시는 경애라는 형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297

[ ] 이별이 분노나 실망감, 적의 같은 단일한 감정으로 이루어졌다면 오히려 품고 살아가기가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순간순간 전혀 반대의 감정이 몸을 부풀려 마음을 채우기에 아픈 것이었다. 아픈 것을 대체할 다른 말이 없었다. 316

[ ]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349

볕뉘.

사랑한다는 무언가 잡히는 일이 아니므로 손바닥을 가지런히 놓아 보듬는 것이라. ‘경애하는 마음‘으로도 읽히고 ‘경애의 마음‘으로도 비추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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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나라면 이 화보에서 이 사람을 이렇게 했을 것 같다‘(생산적 시선): 잡지가 아니어도 좋구, 인스타그래만 봐도 매거진마다 만든 패션 필름들이 있어요. 그럴 보고도 생각할 수 있어. 똑 같은 브랜드인데, 아니면 똑 같은 스타인데 여기는 왜 이렇게 찍고 여기는 왜 다르게 찍었을까? 왜 이 영상은 저 영상보다 더 반응이 좋지? 왜 ㄱ 잡지가 재미있고 ㄴ잡지는 멋있는데 조회수는 ㄷ이 더 높지? 이런 것들을 분석해. 사람들이 보는 시각적 결과물의 대부분은 협업이에요. 그 뒤에서 사람들이 한 일은 잘 보이지 않죠. 에디커를 하고 싶다면 그걸 보고 복기할 줄 알아야 해요. 내 생각을 되감기하듯 계획을 짜. 그걸 일주일 안에 해낼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해. 250. 잡지의 사생활에서

2.

[ ]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 가톨릭 신자였던 데카르트는 우주의 일반적 목적성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신을 자연과 동일시한다. 신의 자연의 광대한 힘이다. 자연은 스스로 산출되며 그런 자기 산출 외에 다른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자신 이후에도 라이프니츠가 계승해온 서구 전통 철학의 관점, 즉 여러 다른 세계들 가운데 한 세계를 선택하는, 또는 인간을 위해 세계를 실현하는 창조신의 개념을 선명하게 공격한 것이다. 431

[ ] 목적론은 주관적 경향에 따라 판단하는 인간적 상상에서 비롯되는 착각일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은 신에게서 자신의 절대적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즉 자기 고유의 내적 법칙에 따라 전개되는 최고 능력을 귀속시키기는커녕, 마치 신이 판사나 왕인 것처럼 인간의 의지와 유사한 의지를 귀속시키는 것이다....이런 내재적인 무지의 상태를 유지하는 쪽이 전체 구조를 파괴하고 새로운 구조를 생각해내는 것보다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의 판단이 인간의 파악력을 훨씬 능가한다고 확신하였다. 434-435 자연물에 대한 원인의 탐구는 무지에 기초한 자유와 목적 개념에 의거함으로써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가 자유롭게 욕망하는 목적은 자연물의 인식을 위한 유일한 원천이 된다. 이로부터 인간은 자신의 욕망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유일한 원인으로 간주하며, 반면 자연물은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생각할 뿐이다. 435

[ ] 스피노자의 욕망의 윤리학은 실존적이고 행복주의이다. 욕망의 윤리학은 인식이고 여정이며, 구조이고 지혜이며, 엄격함이고 기쁨이다. 욕망의 완성은 완전한 기쁨이며 극도의 존재 의식이다. 이런 욕망의 여정은 지극히 험준하지만 도달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문 만큼 어려운 것이다. 445 이상 스피노자 서간집에서

3.

[ ] 시를 쓰려하니: 시를 쓰려하니/기억마다 말끝마다/살았던 뼈들이 부스럭거린다.// 냉수처럼 수런대며/죽음의 뒤꼍들이/바닥의 면목을 드러낸다.//

[ ] 불멸의 노래: 총알 받은 몸이사/콩알처럼 나뒹굴었지// 마침내 비가 올 게야/ 그 젖은 땅에서/콩이 싹트듯// 내가, 우리가 날 거야.// 죽기 전 저항의 노랠 불렀으니/모두 영원이 되고/불멸이 될 거야.// 그래, 그래,/새벽의 어둠이 우릴 피워 올리기 위해/ 마구 수런거리겠지.// 마침내 너끈히 세계의 상공에/ 꽃들 뽑아 올려질 거야.// 이상 이하석 천둥의 뿌리에서

4.

[ ] 경고, 민들레: 지난겨울 매설했다/초록의 톱니를 두른// 밟히고 밟혀 문들어진/문들레 민들레// 잔디밭 가로지르는 발꿈치 뒤로/ 수백 개 해가 뜬다// 째깍, 째깍,/ 조심해라! 밟으면 터진다. 노-란/발목을 날려버리는 대인 지뢰// 하늘에도 피었다/흰 구름 폭발하는 곳 꽃,/ 절름거린다/목발 짚은 봄 서영처, 말뚝에 묶인 피아노

[ ] 토마스 만의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에는 예술가의 고독과 심오한 고뇌가 담겨져 있다. 그는 ˝예술가의 고독은 과감하고 낯선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지만 또 한편 불균형적이고 금지된 것들을 야기시키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탈리아의 구키노 비스콘티 감독은 1971년 영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만들었다. 오래된 영화지만 아름답고 탐미적인 영상과 정교한 구성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될 정도이다. 감독은 대작가의 직업을 작곡가로 바꾸었고 어린 딸을 읽고 상심하는 에피소드를 추가했는데 이는 구스타프 말러의 실제 모습이기도 했다. 170 폴 발레리는 ˝아름다움은 사람을 절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아름다움은 마약처럼 중독성을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중독이란 어떤 병리적 상태를 말한다. 말러의 음악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과 죽음의 긴장은 그의 음악을 제의적인 모습으로까지 극대화시키고 있다. 172 토마스 만의 단편 [트리스탄]은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주인공 클뢰터얀 부인은....작가 슈피넬의 간청에 못 이겨 피아노를 치게 되는데...쇼팽의 야상곡 Op.9 No.2 내림 마장조를 친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녀는 <야상곡>을 한 곡 더 연주했고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곡까지 연주했다.....처음 몇 대목만 치고 나서도 그녀는 확실한 감각을 가지고 그 피아노를 다룰 줄 알았다. 미묘한 차이를 나타내는 음색을 다루는 대목에서는 신경질적인 감성을 드러냈지만, 거의 환상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리듬의 변화를 유쾌하게 다룰 줄 알았다. 건반을 치는 솜씨는 단호하고도 섬세했다. 그녀의 손을 거친 선율은 그지없이 달콤한 소리를 냈고, 장식음들은 머뭇거리듯이 우아하게 그녀의 손가락에 휘감겼다. 연주를 하는 동안 얼굴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입술의 윤곽이 훨씬 더 선명해지고 눈가에 패인 그늘도 더 깊어진 듯했다. 174 장시간에 걸친 연주로 남아 잇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버린 부인은 결국 허약 증세에 빠져 엄청난 각혈을 하고 죽게 된다. 177 서영처, 지금은 클래식을 들을 시간에서

볕뉘

설. 오고가는 길 짬짜미 읽다. 친구들이 하룻 밤을 묶고 갈 때 권해준 작가나 책친구들을 만나 건넨 이들이 함께 출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안타깝지만 슬픔이 목에 메이는 독서이기도 한 순간이었다. 두 시인은 우연히 얼굴을 뵙고 인상, 아니 풍기는 아우라가 잔영처럼 목에 차올라 읽게 된 것이다. 그게 잘못인게다. 첫 시구부터 막혀 어쩔 줄 몰랐고, 읽기가 겁이 나 두려움이 몰려와 더 서성거렸다. 아직도 열에 넷은 남아 있다. 죽음을 정면으로 다룬다는 것. 감히 엄두에 낼 수 없는 일이다 싶다. 몇 편씩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다. 글은 칼이라는 말. 삶의 행간을 발라낼 수 있다는 두려움.....문득 두려워지는 나날. 어쩌면 칼날 위를 걷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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