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비가 온다. 일어나보니 밤새 내린 모양이다. 안전 안내 문자도 어김없이 왔다( 스스로 긴급에 대한 기준을 정한 것인지조차 의문스럽지만). 책읽기가 길어져 새로운, 온 책들이 기다리고 있다.


1. 완독. 시간을 보니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제법 진도가 빠르다고 여겼는데  카페, 맥주집, 음식점, 회식 뒤 강독까지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천 개의 고원>> 마지막이 1000페이지다. 이 사람들. 이렇게 맞추려니 글자는 작고 줄간간격도 조밀했지 싶다.


2.

 최근에 다시 불러낸 들뢰즈 읽기들이다. 무척 흥미로웠다. 원전을 읽을 때도 되었다는 느낌. <<안티 오이디푸스>>는 들뢰즈가 한참 유행이던 스무해전 쯤 사두고 다시 읽으니 읽었던 밑줄이 다시 올라왔다. 들뢰즈 안의 다른 저자들에 대한 앎이 부족한 상태가 여실히 보인다 싶었다.


3. 읽는 와중에 느꼈지만 맑스 자본론 원전을 읽는 느낌이었다. 해설서가 아니라

각주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절박함이나 전하고 싶은 간절함까지 보이는 듯하다. 읽는 내내 마르크스와 알튀세르를 포괄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서문에 언급하듯이 정신분석이 아니라 분열분석, 무의식을 생산해낸다는 관점이 일관되면서도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4. 어제는 마지막장 결론.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을 반주를 겸해서 읽다. 정치-경제-사회-문학-철학-과학-음악-예술-역사-글쓰기-혁명까지 그 화려한  꼬치안주는 절절한 맛이다. 그 동안 만났던 저자들을 따로따로 하나씩 불러내는 맛. 누구의 도움없이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맛.


5. 연삶술표(주기율표). 지도 한장, 함=앎=삶의 보물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읽어야할 저자들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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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드 용의 <<이토록 굉장한 세계>를 본 뒤, 과학에 대한 관심이 더 생긴다.  그의 책은 우주나 천문학에 제한된 세계를 깨고 오감을 너머 육감 이상의 것들은 생명체가 자신을 위해 쓸모를 갖게 되는 과정을 열어준다.  고래와 코끼리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저주파?로 교신하거나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들. 대왕오징어와 고래의 삽화는 더욱 더 진기하다.  메기는 피부로 맛을 느낀다거나 빛의 공해로 생물의 다양성이 가장 많이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은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기도 한다. <<생물학의 쓸모>>와 <<아무도 본 적 없던 바다>>를 골라봤다. 줄거리 독서 외에 반주 삼아 읽을 예정이다.







2. 브로노 라투르가 가장 많이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학자. 


<<임무니타스>> 로베르토 에스페지토의 면역학에서 면역학의 많은 참조를 했다고 하는 학자. 


이렇게 저자들이 책 속에서 다시 가르키는 학자.의 벽돌책을 어렵게 완독한 뒤, 중고책들을 살펴본다.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이 가장 늦게 도착한다.  간절한 책들은 늘 순서가 늦다. 다른 두 책도 조금 천천히 살펴볼 듯하다. 읽었던 책들도 여러 권 있지만 줄거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참에 좋은 계기가 된 듯하다. 다른 시선. 자유저술가로서 다른 맥락을 볼 수 있게 되다니, 이런 것들이 책읽기의 묘미는 아닐까싶다.


0. 지난 주말 미니벨로 라이딩을 좀 멀리 나갔다. 영남알프스 완등을 하고 오는 손님들이 있어, 몸의 구색을 맞출 겸 형산강을 따라 경주 무열왕능까지 70k이상 최장거리주를 했다.  손님을 배웅하고 난 어제 푹 쉬어주었다. 자전거 크랭크 커버가 말썽이다. 수리하러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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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이디푸스』에서 핵심적으로 다루었던 세 가지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무의식은 극장이 아니라 공장처럼 기능한다(따라서 재현이 아니라 생산이 문제이다).

2) 세계와 세계사 속에는 사방에서 환각과 소설이 넘쳐나고 있는데, 이것들은 전혀 가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우리는 인종, 부족, 대륙, 문화, 사회적 지위 등을 끊임없이 망상한다).

3) 보편사는 존재하지만 이것은 우발성의 역사이다(역사의 대상인 흐름들이 원시적 코드를 넘어, 전제군주적 덧코드화를 넘어, 자본주의적 탈코드화를 넘어 독립적인 흐름들의 연합을 가능하게 해주듯이 말이다).


 -1. 서성거린다. 마음과 몸에 들어온지 며칠. 몇 장을 읽어내었다는 착각은 무얼까. 시작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의무감도 아니지만 전작의 화려함과 유려함, 마르크스를 담지한 사유로 읽어내는 내내 전작 『안티-오이디푸스』는 충격적이었다.


1. 우연도 아니고 우발성이다. 우연으로 이루어진 역사. 대부분 동의하지 않는다. 제도교육을 받아온 우리들은 그저 익숙해져 있다. 현대과학의 진전. 미시세계. 양자역학의 판단은 우리들에게 쉽게 건너오지 못하고 있다. 인과, 아리스트텔레스의 작용인을 버리고 확율로 사유하는 연습은 되어 있지 않다. 그 근저에는 인식론의 단절을 요구한다. 불확정이나 미결정성의 원리. 이 우발성의 역사를 경제에서 잘 밝혀낸 아나키스트가 앨버트 허시먼이다. 자본주의 이윤의 근거인 <이해관계>라는 용어가 논리적 시대적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우연히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사유에서 인과를 버리기를 주저하고 있다. 두려워하고 있다.




『천 개의 고원』은 칸트 이후의 반헤겔적 시도들을 기반하고 있다. 『안티-오이디푸스』가 무의식 차원에서 순수이성비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달리 우리는 다양하다는 것이 어떻게 실재 상태로 넘어가는지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는 다양체를 무의식이라는 조건 속에서만 고찰했지만, 『천 개의 고원』에서는 정신분석과 고별하면서 다양체가 의식과 무의식, 자연과 역사,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했다. 다양체들은 현실이며, 어떠한 통일도 전제하지 않으며, 결코 총체성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절대 주체로 되돌아가지도 않는다. 총체화, 전체화, 통일화는 다양체 속에서 생산되고 출현하는 과정들일 뿐이다. 서문 4,5쪽


-1. 네그리-하트는 들뢰즈-가타리에게서 대체 무엇을 읽은 것일까. 그저 관념을 빌려온 것인가. 이론을 고정점으로 둔 것일까. 그냥 해석만 한 것일까. 불만이 크다. 지난 이야기지만 그 관념에 사로잡힌 것은 우리일까. 변화하는 속도보다 거스르는 속도가 너무 적었던 것인가? 여지없는 쓰나미의 물결은 더 강력해지기만 하는 것일까.


0. 다양하다. 다양성. 다양체. 우리 앎은 고집한다. 끊임없이 통합을 요구한다.  그런데 총체화, 전체화, 통일화가 과정들일뿐이라고 얘기한다. 뭔가 부여잡으려는 욕심 역시 제대로 흐름을 읽을 수 없음을 말하는 걸까


2. 책을 쓴 연유를 깔끔하게 정리해주어 감사한 마음이 든다. 개작을 한 이유를 타이핑하다나니 역시. 하게 된다.



리좀(서론)


11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든 않든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


-2. 무수한 가스라이팅은 나때문에, 내가 아니면 어쩔뻔으로 시작한다. 나를 중심으로 칭칭 얽어매는 유아. 어린아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경우들이 있다. 그 <나>는 여지 없이 <우리>로 자란다. 우리때문이라고. 편을 가르고 상황을 아전인수한다. <나>란 것이 여기저기 붙어있지 않으면 윤리라는 것은 생기지 않는다. 책임이라는 것을 질 수 없다. 좋은 것만 영양가있는 것만이 내 것이므로 말이다. 나를 비운 빈 그릇들만이 무엇일 채울 수 있는 건 아닐까. 내가 그 때 그랬어. 기억도 나지 않는 걸. 그 지경. 그 경지는 참 어렵다 싶다.


3. 우리는 주체를 버리지 못한다. 나라는 집착. 그 고정점에 묶여서 스스로 온도를 올리지도 밀도를 채우지도 강도를 강하게 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나를 버리고 오로지 대상과 관계만을 그 선만을 집중해버리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우리의 손은 손가락에 묶여있다. 손가락에 고여있다. 쥐고 펴고 만지고 멀리 던질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조차 말이다.


13 기의든 기표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한다.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책이 무엇과 연결접속되었을 때 강렬함을 통과하거나 가로막는지, 책이 어떤 다양체들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책이 당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어떤 기관 없는 몸체들에 수렴시키는지.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3.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원한다. 주인공이 없는 드라마를 원한다. 그렇다고 주인공들이 많은 영화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극작을 한다는 건 무얼까. 탐정소설이든, 작가의 발아래 놓여진 인물들은 그 경계를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가 싫어졌다. 그래서 드라마가 싫다. 과몰입되어 세상에 대한 불만마저 사그라든다. 천만 영화라니. 집단 정서 해우소도 아니고. 그래서 소설을 원한다. 그런데 없다. 인식과 의도를 너머서는 작품을 만들지 못한다. 지금의 상상에 잡혀있다. 상상이하라고 여긴 적들이 있다.


4. 서론에는 책 얘기가 가득하다. 왜 이 책을 썼는가뿐만 아니라 책의 용도나 기존 장(章) 챕터가 가지고 있는 한계까지. 어떻게 읽혀질 지는 모른다. 인기에 편승할 때도 있을 것이고, 몇 백년뒤에 리뷰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은 어디에서 읽든지 상관없도록 했다한다. 앞으로 자주 반복되는 중간과 고원이 그런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책이다. 주인공이 없는 책. 멋지다. 찾는 소설보다.


24 모든 리좀은 분할선들을 포함하는데, 이 선들에 따라 리좀은 지층화되고 영토화되고 조직되고 의미화되고 귀속된다. 하지만 모든 리좀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선들을 따라 리좀은 끊임없이 도주한다. 분할선들이 하나의 도주선 속에서 폭발할 때마다 리좀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지만 도주선은 리좀의 일부이다. 분할선과 도주선은 끊임없이 서로를 참조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이원론이나 이분법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좋음>과 <나쁨>이라는 조악한 형식으로라도 말이다.


-4.

세상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란 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책임이 따른다. 란 대목은 움베르또 마뚤라나가 어머니에게 어릴 때 들었던 얘기를 평생신조처럼 갖은 연유를 인터뷰집에서 얘기한다. 선악과 성과속, 흑과 백, 자연과 문화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이분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살고 벗어날 수가 없다. 근대 철학은 이런 이분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발한다. 탈이분법이 숙제인 셈이다. 어느 순간 이렇게 정리가 되자 책읽는 방향은 달라진다. 읽기는 읽는데 일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선언한다고 안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었던 셈이다.


5

. 들뢰즈는 풀, 잡초얘기를 많이 한다. 금새 쑥대밭이 되거나 뿌리까지 다 뽑았다고 여겼는데 금새 잡초밭이 되는 풀. 그 잔인한 생명력. 아니 찬란한 생명력. 몬스테라를 들여와 키우는데 너무 잘 자란다. 중간 중간 잘라서 뿌리를 내리고 분양도 해주었다. 또 한해가 되자 너무너무 잘 자란다. 그래서 철사 받침을 놓아주었는데 이 친구는 그 받침을 바닥으로 여기는지 밑둥보다 더 굵고 튼튼하다. 그래서 속으로 이랬다. 쟤는 자기 뿌리부터 시작하는지 잘 모르나 봐.라구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덜컥 걸렸다. 그렇게 자라는게 맞다. 내 인과론이란 이렇게 허접한 거구나 하구. 허나 너무 쉽게 포기하면 되지 않겠지. 좀더 읽어보자.




29 우리는 나무나 뿌리라는 재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낡아빠진 사유의 변주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재생산)의 논리이다. 30 나무는 사본들을 분절하고 위계화한다. 사본들은 나무의 잎사귀와 같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 그러나 사본을 만들지 말아라. 서양란은 말벌의 사본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서양란은 리좀 속에서 말벌과 더불어 지도가 된다. 지도가 사본과 대립한다면, 그것은 지도가 온몸을 던져 실재에 관한 실험 활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 낸다. 지도는 장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로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있다.


-5.

전쟁 은유, 전쟁관련 언어들이 우리의 일상을 대부분 점유하고 있다. 그 아래에는 적이라는 이름짓기 쉬운 편가름이 존재한다. 의학 역시 세균을 박멸하거나 멸균하는 비유도 그러하다. 면역학에서도 이러한 개념이나 스토리텔링은 별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이겨야 한다는 강박이나 달성해야 한다거나 스스로를 채근하는 일도 무의식적인 언어습관과 따로 논다고 볼 수 없다. 면역의 기본은 이물, 다른 생명과 공생이기도 하다. 


6. 스스로 흔히 쓰는 비유 가운데 하나가 나무였다. 앎의 나무. 마인드맵. 나름의 정리.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리좀을 나무의 비유로 오해하고 있었으니 무지에 스스로 무안해진다. 자본주의는 우울이라는 병을 무의식중에 생산해낸다. 특유의 성과주의 이면에 가난과 우울은 같이 간다. 『안티-오이디푸스』전작 에서는 이 무의식을 밝혀냈다. 하지만 스스로 거기에 그쳐있었다. 해석만 하고 있던 셈이다. 무의식은 기관없는 몸체 곳곳에서 여러 방향으로 생성된다고 한다. 더 따라가보자.


31 우리는 지금 지도와 사본을 좋은 쪽과 나쁜 쪽으로 대립시키면서 단순한 이원론을 복원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복사될 수 있다는 것은 지도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뿌리를 교차시키고 때로는 뿌리와 뒤섞인다는 것은 리좀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하나의 지도는 이미 자신의 고유한 사본들인 잉여 현상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의 다양체는 통합과 총체화, 군중화, 모방 기제, 의미화하는 권력의 장악, 주체의 귀속 작용 등이 뿌리내리고 있는 자신의 지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주선마저도 우발적으로 갈라져 가면서 대형들을 해체하거나 바꿔 놓지만, 결국 스스로가 그런 대형들을 재생산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역 또한 참이며, 따라서 문제는 방법이다. 언제나 사본을 지도로 바꿔 놓아야 한다.



33 사본들을 지도에 다시 연결시켜주어라. 34 이는 집단의 지도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이다. 대중화, 관료주의, 리더십, 파쇼화 등의 현상이 리좀의 어떤 지점에서 형성되는지, 그럼에도 어떤 선들이 살아남아 있는지, 어떤 선들이 땅속에서 희미하게나마 계속해서 리좀을 형성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자폐아의 몸짓과 움직임에 대한 지도를 만들 것, 한 아이나 여러 아이를 위해 여러 장의 지도들을 조합할 것...... 지도나 리좀이 본질적으로 다양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충분히 조심한다면 우리는 심지어는 사본들의 길이나 뿌리-나무들의 길을 통해서도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7. 놀랍지 않은가. 실뭉치. 실타래를 풀어내 듯 연루된 것들을 모조리 당겨보는 모습. 사본들로부터 거꾸로 그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하는 일. 그가 언급하는 것은 미시정치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이다. 


35. 나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우리는 더 이상 나무들, 뿌리들, 곁뿌리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래 참았다. 생물학에서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무 형태의 문화는 그것들 위에 기초하고 있다. 땅밑줄기와 공기뿌리와 헛뿌리와 리좀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아름답지도 사랑스럽지도 정치적이지도 않다. 결코 뿌리 박혀 있지 않은 도시, 줄기-수로들을 갖고 있는 리좀-도시 암스테르담을 보라. 유용성과 극히 커다란 광기가 상업적 전쟁 기계와 관계 맺으며 연결접속되어 있다. 사유는 결코 나무 형태가 아니며, 뇌는 결코 뿌리내리거나 가지뻗고 있는 물질이 아니다.....36.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나무가 심겨 있지만 뇌 자체는 나무라기보다는 풀이다. “축삭과 수상돌기는 나무딸기 둘레의 메꽃처럼 서로 감겨 있으며, 각각의 가시에는 시냅스가 달려 있다.” 기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얘기를 할 수 있다......짧은 <관념>의 찬란함이여. 우리가 비록 긴 개념들로 이루어진 긴 기억을 가지고서 읽고 또 다시 읽는다고 해도 글을 쓸 때는 짧은 기억을 가지고서, 따라서 짧은 관념들을 가지고서 쓴다. 짧은 기억은 망각을 과정으로 포함하고 있다. 짧은 기억은 순간과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시간적이고 신경적인 리좀과 뒤섞인다.


8. 나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전쟁은유라면 지끈지끈하다고. 더구나 글쓰는 법의 선물까지 덤으로 선사하신다. 거기에 손 쉬운 방법들까지. 그릇이 한 가운데를 비워 채울 수 있듯이 중심을 빼버리는 일. 그 권력을 지워버리는 일로 다른 무의식 상태에 다다를 수 있다고 친절히 말한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무의식이 생성되는 현상이다. 또 다른 무의식을 생산하는 방법이다. 그 첫 번째가 스스로 중심을 지워버리는 일이라 한다.


39 n명의 개인들이 일제히 발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꼭 장군이 필요한가? 유한한 수의 상태들과 그에 상응하는 속도의 신호들을 포함하는 중심 없는 다양체에서는 전쟁 리좀이나 게릴라 논리의 관점에서 <장군>을 갖지 않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중앙의 명령의 사본이나 복사물이 없는 것이다. 저자들은 심지어 기계적 배치물이나 기계 사회인 그러한 다양체는 중심화하고 통일화하는 모든 자동장치를 “반사회적인 침입자”로 거부한다는 것까지도 증명한다. 따라서 n은 언제나 n-1이다.



41. 정신분석은 무의식이라는 독재적 개념 위에 자신의 고유한 독재 권력을 정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정신분석의 실천에 허용된 폭은 아주 한정되어 있다. 정신분석의 대상에서도 그렇지만 정신분석에는 항상 장군이, 우두머리가 있다(프로이트 장군). 그와는 반대로 분열분석은 무의식을 중심 없는 체계로, 다시 말해 유한한 자동장치들의 기계적 그물망(리좀)으로 여기며, 따라서 완전히 다른 무의식 상태에 도달한다. 언어학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얘기할 수 있다......욕망을 다루든 언표를 다루든 무의식을 나무 모델에 따라 축소시키고 해석하고 기표작용하게 만드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무의식을 생산하는 일이며, 그와 더불어 새로운 언표, 다른 욕망을 생산하는 일이다. 리좀은 이러한 무의식의 생산 그 자체이다.



46 글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떤 것을 정확하게 그려내기 위해서는 비정확한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필히 그것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도 아니고 근사치를 통해서만 진행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비정확함은 결코 하나의 근사치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일어나는 일이 지나가는 정확한 통로이다. 우리가 어떤 이원론을 원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원론을 거부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우리가 모델들의 이원론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모든 모델을 거부하는 과정에 도달하기 위해서일뿐이다. 우리가 결코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거쳐 가게 되는 저 이원론들을 해체하는 두뇌라는 교정자가 매번 필요하다. 모든 이원론을 통과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추구하던 <다원론=일원론>이라는 마법적인 공식에 도달해야 한다. 우리의 적인,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적인, 우리가 끊임없이 옮겨놓는 가구인 이원론을 통과함으로써.


-6.철학의 문제가 이분법이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정답이 따라올 줄 알았다. 다양성이 답이다. 하는 순간, 다양성이 몰려올 줄 알았다. 그 다음 순간. 적막하거나 더 어두워졌다. 어떻게 무엇을은 쉽게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그랬다. 엉크러진 실타래를 풀기위해 하나 하나 당겨서 힘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수학문제를 푸는 근육을 키우기위해 하나하나 연습문제를 풀어보는 일이었다. 이분법과 이원론에 사로잡혀있는 스스로 앓게 만드는 일이다.


9. 그 역시 이원론을 해체하는 교정자가 매번 필요하다고 한다. 집안에 놓여있는 가구를 청소하듯 이사하듯 매번 옮겨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비정확한 표현들이 바로 선명한 길이라고 한다. 삐뚤빼뚤이 지름길이다. 온몸으로 겪고 쓴 길이 바로 그 길이다. 


47 리좀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 또는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 <하나>가 빼내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리좀은 일종의 반계보이다. 그것은 짧은 기억 또는 반기억이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를 통해 나아간다.



51. “말하자면, 나에게 닥친 모든 것은 뿌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중잔의 어떤 지점에서 온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붙잡도록 애써라, 그리고 먼저 줄기의 중간에서 자라기 시작한 풀을 붙잡아 거기에 붙어 몸을 지탱하도록 애써라”......사물들이나 말들 속에서 풀을 보기란 쉽지 않다(니체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포리즘은 “반추”되어야만 하며, 고원은 거기에 서식하는 하늘의 구름과도 같은 암소들과 분리될 수 없다).



53 역사가 유목을 이해한 적은 없으며 책이 바깥을 이해한 적도 없다. 오랜 역사가 흘러가는 동안 국가는 책의 모델이었고 사유의 모델이었다. 로고스, 철학자-왕, 이데아의 초월성, 개념의 내부성, 정신들의 공화국, 이성의 법정, 사유의 공무원, 입법자이자 주체인 인간, 세계 질서의 내부화된 이미지로서의 국가, 인간을 뿌리내기게 했다는 국가의 오만 방자함. 그러나 전쟁 기계와 바깥의 관계는 또 다른 “모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배치물이다. 사유 자체를 유목민이 되게 하고, 책으로 하며금 모든 움직이는 기계의 한 부품이, 리좀의 줄기가 되게 하는 배치물이다(괴테 대 클라이스트와 카프카).



54 n에서, n-1에서 써라, 슬로건을 통해 써라. 뿌리 말고 리좀을 만들어라! 절대로 심지 말아라! 씨 뿌리지 말고, 꺾어 꽂아라!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어라!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속도가 점을 선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빨리빨리, 비록 제제리에서라도!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 당신들 안에 있는 <장군>을 깨우지 마라! 올바른 관념들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관념을(고다르). 짧은 관념들을 가져라! 사진이나 그림이 아니라 지도를 만들어라. 핑크팬더가 되라, 그리고 당신들의 사랑이 여전히 말벌과 서양란, 고양이와 비비만 같아라! 



55 리좀은 “그리고.....그리고...그리고 ...”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다>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백지 상태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행 또는 운동에 대한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여행하고 움직이는 다른 방법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 것이다....중간은 결코 하나의 평균치가 아니다. 반대로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내는 장소이다. 사물들 사이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거나 그 반대로 가는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휩쓸어 가는 수직 방향, 횡단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 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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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빨간 날이 내일이다. 독서를 염두에 둔다. 읽다가 멈춘, 부피가 큰 블럭같은 책들이 눈에 다가온다.  조금 일찍 길을 나선다. 북홈아지트에 도착. 책은 잘 들어오지 않구 졸음이 쏟아진다. 어제 라이딩이 부담스러운 모양이구나 싶다. 그래도 자다깨다 온전히 책에 붙어있는다. 만화책이라도 보는 사람들이 조금 있으니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1.

올해 많은 생각들이 4월 전시 뒤 강릉여행에 잡혀있다. 미니벨로 여행도 시내 구석구석 새롭게 보게 해준 계기다. 활력이 생긴 전환점이기도 하구. 


-1.1 한 젊은 친구를 만나자 평범하지 않구나 느꼈는데, 여러 차례 옆자리에 함께 할 수 있게 된다. 아빠 초코렛은 없을 거라구. 지인들 나눠주고 나면 아마 없을 거라구.하는 모습에서 관점의 다름.  작곡가를 나오고 피아노연주를 하구 음식을 소재로 음악을 만들고 미끼얌이란 유투버도 활동. 그렇게 강릉#노마드인 우영우를 만난 기억이 아직도 지금을 사로잡고 있기도 하다. 


-1.2 자폐스펙트럼. 이 친구는 요일을 순식간에 맞추는 재주?가 있는데 한 지인이 진지하게 물어봤다. 그 방법을 알 수 없느냐구. 그러자 대부분 설명하고나서 오분이 되기도 전에 물려서 관심이 없더라구 한다. 그래도 필요하다고 재촉하자 그 방법을 얘기한다. 꼼꼼하게 들었다. 사진처럼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친구는 그 방법들을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짚어준다. 아 - 이해할 듯하다. 


-2.

자폐 스펙트럼.은 '신경다양성'으로 책에는 정리되어 있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에서 본 것인데, 흔히 사람들이 서열이나 중요도에 따라 순간판단을 하는 것과 달리 사물이나 관계를 병렬로 판별하는 경향이 있다.고 다른 측면에서 판단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런 흐름들은 정신병들(조현병 외)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가 하는 <<창조와 광기의 역사>>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은폐하거나 엄폐하는 경향과 이 바탕으로 인간존재를 철학이란 측면에서 탐색해서 다양성으로 다시 볼 수 있게 한다.


1. '신경다양성'. 다양성은 지금의 화두이기도 하다. 생물종다양성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다양함이 슬로건이나 표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생생함과 다름이 인식이나 존재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나 실천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리 많이 것이 바뀌지 않고 역으로 맹목이나 야생의 폭력이란 씁쓸한 분노들이 쏟아져 나오게 할 지도 모른다.


 1.1 이 책에서는 SNS의 폐해에 대해서 극명하게 언급한다. 분노와 격정의 증폭도구라 맥락없는 인간들의 출현을 말한다. 이야기, 서사가 더 이상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만 보듬을 수 있는 극심한 편가르기 증상의 과도함에 대해 말한다. 역방향의 출현. 결국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파편처럼 불쑥불쑥 나타날 개연성이 커진다.

 


2. 

<<피렌체 사람들 이야기>>만 아지트에서 완독하고 나왔다. 욕심은 많았으나 다른 책들은 받침으로만 쓰이고 말았다. 이 책은 단테 보카치오 알베르티, 레오나르도다빈치, 미켈란젤로, 보디첼리,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메디치가에 대해 다룬다.  여기서는  대단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여겨지지 않는다. 인간적인 몹시 인간적인 모습들로 다루어지고 부류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로 여겨지기도 한다.








3. 


사람들은 여러가지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은 고정관념이나 선입견때문


에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제어계측처럼 한 지점으로 수렴하려고 한다. 그래서 가장 변하지 않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존 학문들의 낡은 관념들이나 방법들이 그 발목을 꽈악 잡고 있어서인지도. 

 


4. 


다양성과 변화. 우영우의 고래나 강릉 노마드 친구의 날짜에 대한 감각 역시 비상함이 아니라 정도의 문제다. 독특한 방법과 방법론이 잠재해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폐성향을 가지고 있다. 열려있지 않고 닫으려는 경향이 만들어가기도 한다.

 <<바디 멀티플>>은 네덜란드 작가가 쓴 책인데, 책 자체도 경이롭다. 한 책이 두 권인 셈이다. 미시와 거시. 두 파트가 조화롭게 나란히 읽힌다. 이 책은 동맥경화증에 관해 종합보고서이다. 연루된 최대한을 관련시킨다. 환자, 의사, 영상처리기사, 치료법, 도구 등등. 다 읽고나면 동맥경화증이 정의란 단어로 묶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 이상 다수 이하라는 개념이 잡히기 시작한다. 신유물론이나 사물에 대한 관점의 전환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 있다.


-4.


해야할 것들이, 해야만 하는 것들이 놀이나 게임으로 바뀔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능성들>>이란 책에서 저자는 농담과 웃음을 시종 잃지 않는다. 삶이란 무엇일까. 70억의 인류의 숫자만큼 달라야 하지 않을까. 우린 왜 자꾸 묶으려 안달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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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을 아랑곳하지 않고 빌라투룸의 온도는 29도. 24도 25도의 날씨였음에도 책들이 품고 있는 잠열은 여전한 듯 싶다. 암막을 하면 낫다는 sns의 연동 지시로 이중창 사이로 50호 캔버스 커버를 넣고 온다. 며칠 차수리를 맡겼더니 휴가철이라 더디다. 어제 아침 비가 억수로 내리고 바람이 부는데 결국 카카오나 콜택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결국 뚜벅이로 나오는데 버스를 타고 중간에 내렸더니 비는 흩날리고 바람은 거세진다. 어쩔 수 없이 동료 호출을 한다. 찰랑찰랑 공단 도로는 물을 머금은 곳이 하나둘 늘기 시작이다. 시간당 10-20mm 아직 200mm를 넘지 않아 강풍이 더 걱정이었다. 큰 일은 아니고 밤새 작은 일들이 몇 건 있었지만 다행이 곁에 있어 무조건 작업은 홀딩상태를 유지한다.


-1.


이제는 일기예보도 쉽게 믿기지가 않아 소**tv를 보고나서야 가늠이 된다. 패턴이 없는 패턴. 기상이 패턴이 없어졌다는 말. 기상행위가 다른 모습을 보인다니, 더이상 전문가들의 보고를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 개탄스럽기도 하다. 이렇게 일일이 찾아보고 비교를 해야되다니, 전문가도 그러한데 하물며 정부는 무얼 믿어야 한단 말인가. 문자폭탄이 한가득. 도대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건 무엇인가 싶다. 책임을 면하기 위한 것은 아닌지. 


0.1 동료의 차를 타고 작업실로 조금 일찍 퇴근한다. 오후 들어 비는 그치고 바람도 잠잠해져서 자전거를 챙겨 마스킹액을 사러 간다. 다이소도 들르고 시장에서 막 나온 아오리사과도 챙긴다. 한밤에도 잔가지와 잎사귀가 쌓인 자전거도로를 다니다가 그 길로 출근한다. 안도감이 몰려온다. 며칠 전전긍긍한 일들이 맺혀있던 모양이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태풍. 또 얼마나 많은 태풍을 겪어야 하나 싶다.


1. 그 와중에 이 책을 완독하다. 4부는 지루하기도 했는데, 벽돌책이기도 해서 일 것이다. 다행히 리처드 세넷을 호출해내서 견딜 수 있었다. 손의 모험, 수공업, 공예의 시대도 다른 의미로 다가설 것이다. 









2.  이 책은 인간공학, 아니 '철학적 인간학'이란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리스부터 붓다, 예수, 실존주의, 하이데거, 마르크스, 트로츠키, 룩셈부르크, 공산주의 혁명가, 트레이너, 현재의 성형학이나 유전자조작까지 사상가들과 기술요소들을 인간학이라는 측면에서 모조리 불러 세운다. 그렇게 왜 불러세우는지 비교해보는 맛이 쏠쏠하다. 다른 잣대와 유사한 측면들을 추스리기도 좋다.


3.너의 삶들을 바꿔야 한다는 릴케의 시 토르소(책표지처럼)에서 따온 것이다. 마치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를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물로 이 이런 언급은 책 속에 없다. 넓이와 깊이. 높이에 대한 사유도 맥락이 닿아있기도 하다.


 4. 그렇지만 주체, 개인이라는 개념들이 저작의 근간이다. 관계들이나 현상들이 아니라 자아라는 개념이 인간공학의 뿌리인 것이다. 모르겠다. 비체로 다시 사유할 수 있는 것인지 머뭇거려진다... ...가능할 것 같다. 


5. 저자는 독일에서 자유기고가라는 부류로 알려져 있다한다. 그 역할을 인정하거나 개척해가는 것이 좋아보인다. 과잉대표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교수나 승자독식의 언론발이나 다양한 시각들을 찾아보거나 인정조차 하지 않는 여기의 현실을 볼 때, 잡학의 아성을 쌓는 저자의 독특함이 돋보인다. 면역학이라는 개념은 로베르토 에스포지토가 이 저자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기도 한다. 저자는 니체에게서 차용했다고 한다. 개념들의 차용이 중요한 것인지 어디서 출발한 것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다.


6. 4쇄가 넘은 <<17세기 자연 철학>>은 그런면에서 인물들이 개념을 서로 어떻게 차용하는지 세세히 파악해낸다.  위대한 일인이라는 것 역시 빙산의 일각. 저류에 대한 관점들과 흐름들을 찾아내려해야 맥락에 더 가깝게 다가서는 것일 것이다.




7. 완독해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관련된 책들은 품절에 고가인 도서가 되어버렸다. 주말 태풍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온전히 쉴 수 있겠다 싶다. 가을 어서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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