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책방*‘

[ ] 모임을 한다기보다 참여자가 오든 말든 우선 내가 하고싶은지가 중요했다. 그래야 참여자의 많고 적음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해나갈 동기를 내 안에서 찾을 수 있었고, 헌신한다는 생각보다는 놀이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포항에서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은 있었지만 그것은 대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다, 는 식으로 ‘해내고‘ 싶지는 않았다. 직장인에서 자영업자로 서점 사장이 되는 것이 내게 큰 모험이었던 만큼 그것이 무엇이든 시작과 끝의 이유를 나에게서 찾고 싶었다. 146

[ ] 모임 역시 친해진 손님과 나의 공통 관심사를 반영해 새로운 모임을 만들어나갔다....저자 강연 같은 행사는 책방 모임의 흐름 속에 두려 했다. 유명한지 아닌지보다 모임에서 함께 읽고 토론했던 이야기 중 좀 더 다루어졌으면 하는 주제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저자를 초청했다. 자연스럽게 모임참여자들이 강연도 신청했기 때문에 행사의 밀도를 높이고 행사참여자를 안정적으로 모집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47

[ ] 직장인에서 자영업자로 바뀐 나의 직업적 속성을 매일 새롭게 체험했다. 직장인이었을 때도 하고 싶은 일을 따라 직장을 선택했지만, 그런데도 자본주의적이거나 위계적인 시스템에 포위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선택한 첫 직장은 너무나 상업적이고 열정을 가진 이십 대를 싼값에 착취하는 곳이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들어간 비영리단체에서는 내가 문화기획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위해 감당해야하는 부수적인 업무가 너무 많았다. 출판, 기획, 공간운영 전반을 경험할 수 있었던 서점에서는 열정적으로 일했지만 지나치게 소진되었고 결국 지쳐버렸다. 마지막 직장에서는 지역 스토리텔링과 구술생애가는 흥미로운 분야를 경험했지만 일은 좋아도 그 일을 구성하는 조직의 논리가 갑갑하게 느껴지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149

[ ] 매년 한 해의 수입지출을 계산하고 받아든 성적표는 초라했다. 그것이 내 노동의 사회경제적 가치라는 것이 몹시 서글펐다. 나는 더이상 노력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하는 중인데 그에 대한 대가가 이것이구나. 차라리 적당히 했으면 ‘그래 최선을 다하면 더 나아지겠지‘하는 희망을 품어볼 수 있을텐데 나는 매일 결승전을 치르는 기분으로 사는데 내가 속한 팀은 매번 지는 기분이었다. 정작 결혼을 욕망하지도 않으면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붙인 ‘꺾인 여자‘라는 낙인은 나를 위축시켰고 일마저 잃는다면 나는 그 무엇에게도 선택되지 못한 존재가 될 것 같아 두려웠다. 160

[ ] 아이들의 글을 읽고 강사 섭외할 때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바쁘신데 지방 저희 서점까지 오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같은 수사들이 부끄러워졌다. 지금 여기를 중심으로 생각한다고 하지만 서울 중심의 한국에서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고 나는 서울에서 떨어진 만큼 스스로를 더 약자로 만든 것은 아니었는지. 하지만 그 거리감이란 사실 얼마나 상대적인 일인가. 울진에서 온 아이들에게 포항은 대도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공이란 얼마나 상대적인 일인다. 나는 적어도 아이들에게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성공한 사람이라니. 마치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지 못한 부자처럼 어리석게 느껴졌다....나는 내가 버는 수입의 크기가 내 야망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했다. 지난 오 년 동안 내가 이뤄낸 것들, 첫 해보다 커지고 능숙해진 일의 능력치를 스스로 격려할 필요가 있었다. 경계로 밀려났다고 느꼈지만 새로운 중심을 세우기도 했다는 것을. 175, 176

[ ] 직장인이었을 때는 몰랐던 삶의 모퉁이를 돌아왔고 거기서 접하는 사람과 세상의 모습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면적이라는 것을. 오늘 나의 공간에서 무례했던 누군가도 다른 곳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을. 우리 삶에 위계가 생기는 곳, 그것이 젠트리피케이션의 모습이거나, 결혼의 유무이거나, 독립의 유무이거나, 나이의 많고 적음이거나, 돈의 많고 적음이거나, 여자이거나 남자이거나, 그런 모서리에서는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과 사람도 이상하게 구부러지기도 한다는 것을. 또한 그 속에서 내가 고통을 느꼈다면 나의 아픔은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자기 분의 생의 어려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데 나의 아픔이 특별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돈을 벌어 먹고 사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나는 왜 이렇게 투정하는 기분일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느끼는 고통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나‘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고통으로부터 주변이 될 수 없다. 고통은 내 존재의 경계를 만들어준다. 177 무언가 나를 침범한다면 나는 고통 받을 것이고 그것은 내가 나를 돌봐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의 고통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고 많은 확률 중 단 하나의 확률인 나의 맥락에서 일어난 내 삶의 서사이다. 179

[ ] 내가 나에게 발신하는 아직 알아채지 못한 이야기의 시작이며, 그것을 수신할 수 있다면 나의 고통은 언어가 되고, 이야기가 된 고통은 예전처럼 두렵지 않다. 경계와 경계가 만나는 곳에 사는 사람은 중심에 산다. 내가 어떤 경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이 글을 쓰면서 비로소 나를 둘러싼 경계들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회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가 함께 작동하는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179

뱀발.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내는 힘. 어쩌면 멋, 맛나는 일상을 만들어내는 비법같은 것이 숨어 있는 듯하다. 가까이 지켜본 나로서는 응원하고 소문내지 않을 수가 없다. 구입은 책방에 직접 연락하셔서 택배로 받아보시거나 여섯서점을 온라인으로 찾아들어가서 주문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면 더 알차게 보고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책이 모인 모서리 여섯 책방 이야기>> 달팽이책방 편에서/ 소심한책방, 손목서가, 유어마인드, 고스트북스, 동아서점, #달팽이 책방 - 달팽이Books&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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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이유없이 당한 그는 끝내 주검이 되어버린다. 영업사원인 그는 ‘벌레‘가 되었지만 온몸으로 방안을 끈끈한 액체로 애틋하게 흔적을 남긴다. 오랜만에 본 TV방송은 검찰이 이제는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고 하며 자료를 여기저기서 한결같이 읊조린다. ‘관료‘라는 말의 의미나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정작 불릴 말이 별반없다. 당신은 뭐라 부르겠나. 너도 조직人間이냐고 . 차마 갑蟲이란 말은 그보다 못한 것 같아 붙이고 싶지 않아. 니들이 ‘카프카‘를 알아. 도대체 문학보수교육은 하는 건지. ‘성城‘만 쌓아 평균율조차 잊은지 오래. 조직으로서 자존심을 알면 개인으로 자존심은 기본이야. 알고 살자. 이러지 말자. 검사 판사 변호사 점점 번지며 싫어지는 밤이다 싶다. 조직을 대행하며 살아야하는 우리들 삶들을 어딘가 이렇게 하고 싶은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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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계에는 명확한 구별이라는 것이 없다. 인간이 이해하 기 쉽게 다양한 구별법을 만들어 분류하고 이해할 뿐이다. 식물학에서도 식물을 다양하게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이 이해하기 쉽도록 구분선을 그은 것에 불과하다.
 51쪽에서 사과와 장미를 같은 장미과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같은 장미과라도 사과는 목본성이지만, 딸기는 초본성이다. 목본성인 사과는 과일이고, 초본성인 딸기는 채소로 분류된다. 그러나 식물에 있어 나무인가 풀인가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저 환경에 적응하도록 진화했을 뿐이다. 식물의 생존 방식은 인간의 생각보다도 훨씬 임기응변에 능하며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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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틀러는 ‘수행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젠더 규칙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어떻게 강제적이고 반복적으로 행해지는지 연구했다. 그녀는 아기의 탄생을예로 든다. 의사나 간호사가 어떤 아기가 여자나 남자라고 선언할 때,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무엇인가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버틀러는 자연스럽게 젠더화된 몸은 없다고 말한다. 그보다는 버틀러가 ‘수행적 발화‘라고 부르는 이런 ‘발화 행위‘가아이의 젠더를 만든다. ‘여자아이예요‘ 혹은 ‘남자아이네요‘라는 진술이 아이의 몸에젠더를 각인시킨다는 것이다. 버틀러에게 젠더 수행의 핵심은 그것을 둘러싼사회 규범과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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