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치, 그리고 취미들


때때로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면 그는 책장에서 새로운 책들을 무작위로 한 다스쯤 꺼내서 욕실 선반장과 소파, 주방, 책상 그리고 침대 등등에 이미 놓여 있던 책들 일부와 교체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의 세계는 무작위로 쇄신된다. 그의 삶이 임의의 페이지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의 독서는 이렇듯 종종 무작위의 우연을 즐기는 방식이므로, 그는 자신이 결코 흥미를 느낄 수 없다고 분명하게 결정 내린 책들은 집 안에 두지 않는다. 가능하면 언제 어디서나 제목을 특별히 확인하지 않은 채 손만 뻗어서 집어 들어도 만족스러운 독서가 보장되는, 그런 책들만으로 집 안의 책장을 채우려 한다. 17-18

집 안에서 그가 주로 머무는 장소에는 반드시 손에 닿는 곳에 책이 있다. 침대의 베개 곁이나 베개 아래, 소파 위, 그리고 글을 쓰는 책상과 주방의 찬장 위, 그리고 욕실 책장과 욕조 곁에는 늘 각각 몇 권의 책들이 그에게 읽히기를 기다리며 거기 놓여 있다. 그런 식으로 그는 보통 서너 권에서 많게는 십여 권에 달하는 책들을 동시적으로, 돌아가며 읽는다. 예를 들어서 욕조에서는 단테를 읽고 침실에서는 추리소설이나 역사서를 읽으며 소파에서는 고대연금술 백과사전을 무작위로 펼치고 한두 페이지씩, 그리고 지하철에서는 휘트먼이나 엘리엇의 시집을 읽는 식이다. 길가 카페에 앉아 있을 때는 주로 희곡들을 읽는다. 16

볕뉘.

0. 번역서인 줄 알았다. 단편소설이란 걸 까맣게 모르고, 그저 제목에 끌려 사게된 책이다. 페북에서 가끔 톡톡 튀는 작가의 일상을 맛볼 수 있지만, 이렇게 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스타일을 접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 있는 것이리라.

1. 주인공의 책 시식 법이 무척이나 상세하고 내밀하여 따라하고픈 충동이 인다. 소설뿐만 아니라 이렇게 책을 다루고 마음에 넣는 법을 탐하고 싶다. 아니 읽히는 책결들과 그 가운데 파묻혀 있는 건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

2. ‘영국식 뒷마당‘에서 오늘도 그네를 타고 논다는 책을 모티브로 한 이어진 소설이 더 아릿하고 몽롱하다. 하지만 아직 카프카의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지 않았으므로 우열은 당분간 보류하기로 한다.

3. 한번은 책을 어떻게 읽느냐고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미뤘다. 사실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고, 이러저러하다고 규정지어 말을 뱉는 순간, 책읽는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가는 여정이 더 중요하다라고 여긴다. 물리적인 시공간에 따라서도 다르게 접근해야 할 방식이다.

작가의 책 읽기 스타일을 살펴보면서 살짝 부러웠다. 욕실은 책과도, 나와도 비사교적인 공간이기에 제외하고, 여기저기, ㅈㅓ기여기 손닿는 곳마다 닿아있고 간절히 읽히길 바라는 책들이 많은 것이 유사하다. 그렇지만 동선에 깊이 개입하는 책들의 동선까지 생각해보진 못했다. 내공이 몇 수 위다.

4. 모두에 커피를 음미하고 즐기는 법 또한 나는 기분에 따라 무척 기복이 심하다. 다방커피부터 에스프레소, 연한 커피, 더치, 설탕만 넣은 블랙....요동하는 마음과 긴장의 온도마다 내 몸은 다른 손길을 ㄴㅐ민다는 것을 이제야 제법 알게 된 것 같다. 술도 그러하며 스포츠 또한 종목을 ㄱㅏ리지는 않지만 나에게 맞는 속도와 몸이 원하는 것들은 좁혀져 있지만 다양하다. 더 알맞는 것을 찾는 중이기도 하다.

5. 나만의 사물들을 갖는다는 것. 그것이 사치이어도 좋다. 책에 대한 사치는 부릴대로 부리고 싶다. 때ㄸㅐ로 삶을 갱신하는 방법이라면 미학적 탐욕을 마다하지 않으리라. 어떤 충고도 달콤하게 받아들이고 시샘하고 싶다. 몇몇 대목을 - [밀레나 밀레나 활홀한] 작은 책을 옷깃에 넣은 – 또 다른 취미나 일상의 동선에서 곁들여 ㄷㅏ시 맛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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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1-09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님 덕에 배수아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인용하신 첫단락 읽으면서, 아 나도 오늘 기분 안좋은데 집에 가서 침대 위에다가 좋아하는 책을 좀 쌓아둘까, 싶어집니다.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

여울 2017-01-09 14:12   좋아요 0 | URL
네 ㅎㅎ 한번 따라쟁이 해보죠~~ 손해볼 것은 없잖아요!!!
 

하나의 대상이 내게 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나에 의해 수립되어야만 한다. 요컨대 내가 그것을 그 총체성 속에서 수립한 경우에만 그 대상은 총체적으로 나의 것이 된다. 완전히 나에게 속해있는 유일한 현실은, 그러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나의 행위이다. 24

사물과 나의 관계는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응결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 관계를 순간순간 재창조한다. 어떤 관계는 죽고, 어떤 관계는 생겨나며, 또 어떤 관계는 부활한다. 끊임없이 그것들은 변화한다. 매번 새롭게 지양함으로써 그 지양된 것이 나에게 주어진다. 26

순간

나와 대상을 분리시키고 있던 이 거리의 덕분으로, 나는 대상 쪽에 몸을 던질 수 있어서 운동이며 초월성일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 거리를 제거하자마자 나와 대상과의 이 응결된 결합체는 벌써 하나의 사물적 양식으로만 존재하게 된다.(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르스티포스로 시작한 오늘을 즐겨라하는 쾌락주의에 대한 반론) 32

그러나 고착되어 있는 순간은 결코 새롭지 않다.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순간은 새로워진다. 바로 ㅈㅣ금 출현한 형태는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배경이 뚜렷하고 분명해야만 자신의 모습도 명확하게 ㄷㅡ러난다. 나무 그늘의 시원함이 귀중한 것은 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대낮의 길가에서이다. 휴식은 고딘 일과를 ㅁㅏ친 뒤의 편안한 긴장 이완이다. 33 향락의 한순간 속에 모든 과거가 집적되어 있다.

나는 자신의 미래를 바라본다. 모든 ㅎㅑㅇ락은 내 기획을 앞으로 투사하는 기투이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서 과거를 추월하는데, 과거란 미래의 ㅇㅣ미지가 응결된 세계에 다름아니다. 34

사라ㅁ은 죽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유없이, 목적 없이 존재한다. 사르트르(존재와무)도 밝혔듯이 인간 존재는 사물처럼 응고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 순간마다 그는 자신을 존재시키려고 ㄴㅗ력한다. 이것이 바로 기투이다. 인간 존재는 기투의 형태하에서 실존하고 있지만 그 ㄱㅣ투는 죽음을 향한 기투가 아니라 각기 개별적인 목표를 향한 기투이다. 82

헌신

타인의 존재를 확립해 주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고, 그 도구를 사용하여 타인은 자기 자신을 확립한다. 오로지 그 자신만이 ㄴㅐ가 준 선물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를 만든다. 102

우리는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새로운 출발점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타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헌신에 대한 검토가 ㅇㅜ리에게 가르쳐 ㅈ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즉 헌신한다는 ㅈㅜ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고, 헌신이 내세우는 목적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ㅇㅜ리는 타인을 위하여 우리의 자유를 포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온전히 ㅎㅏㄴ 사람을 위하여 행동할 수도 없고, ㅇㅏ니 그 어떤 ㅅㅏ람을 위해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08

소통

나의 존재가 타인과 소통하는 것은 오직 내 존재가 관여한 대상들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결코 완전히 보상되는 것은 ㅇㅏ니라는 사실을 감수해야 한다.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기획이 있고 어떤 기힉들은 한순간에 끝나기도 ㅎㅏㄴ다. 그러나 그 어떤 기획도 내 존재의 총체를 표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총체는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24 우리는 행위를 ㅎㅏ고 있는 한에서만, 다시말해 분열된 존재 속에서만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 124

소통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우선 필요하지만 누구와 소통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소통할 것인지를 아는 일도 여전히 중요하다. 남들로부터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아무 동의나 마구 구하는 것은 그 역시 ㅎㅓ영에 불과하다 125

행위

어떤 순간도 영원성에 합류하지 못한다. 황홀과 고뇌는 다시 시간 속에 자리 잡는다. 그것들 자체가 기획이다. 모든 사유, 모든 감정이 기투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인생은 전진이 아니라 순환이다. 152



자유는 선택하는 자유일 뿐,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다.” 동시에 “실존하지 않을 자유도 없다” 왜냐하면 자유란 실존의 원초적 존재 양식이므로. 168

사르트르나 보부아르의 글에서 그냥 “자유”라고 지칭된 대부분의 주어들은 자유라는 추상명사라기보다는 실존적 ‘인간‘ 그 자체이다. 예를 들어 본문에 “인간은 신 앞에서 자유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때 “자유”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유롭게 선택한 기획을 앞으로 투사하는 실존적 인간‘을 의미한다. 170

인간에게는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영역도 있다. 태어난 국가, 부모, 외모, 능력 등은 선택할 수 없는 강제적 조건이다. 이것을 사실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와 사실성이 합쳐진 존재이다. 그러나 이 주어진 여건을 어떻게 뛰어넘어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주체인 나의 선택과 자유에 달려있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내 인생을 선택하거나 살아 줄 수 없다. 174


인간은 부단히 자기 밖에 있는 것이며 자기 밖으로 스스로를 투사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림으로써 존재하게 한다. 한편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함으로써다. 그처럼 사람은 자기 이상의 것을 행하는 것이며 그러한 초월에 비추어서만 인간은 사물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초월의 한복판, 즉 중심에 있다. 인간은 우주, 즉 인간 주체성의 우주 이상의 다른 우주가 있을 수 없다.....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함으로써가 아니라 어떤 해방이라든가 어떤 일정한 일의 실현이라든가 그러한 목적을 자기 자신 밖에서 찾음으로써라는 것을 우리가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또 초월성과 인간이 자신 속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의 우주 속에 처해 있다는 의미로서 주체성과의 관계, 그것을 우리는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라고 부른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볕뉘.

0. 낯설 수도 있겠다. 철학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일이기도 한 것 같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리오타르가 왜 철학을 하는가에서 말했듯이 끊임없이 반추를 거듭해 새롭게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1.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 민중사회학 강좌, 한완상교수의 강의는 인기가 있었다. 대형강의실에 학생들로 가득차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혈기충천한 대학 신입생은 국정교과서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이 한마디 말로 흔들렸고, 일상에 분개했다. 즉자적 존재, 대자적 존재. 그 말이 여전히 유효하려면 어떡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대자적 존재로서만 자신을 위치지은 것은 아닐까?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국내에 잘못 소개되었고, 아직도 그러한 듯하다. 그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3권의 저작자이며 맑시스트라는 사실도 제대로 읽히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뭔가 쓰려고 했다면 명확한 목표물이 있어야 한다. 권총의 탄환에 비유하는 그는 대자와 앙가주망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너‘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2. 시몬드 보부아르의 이 책 역시 그 결을 같이 한다. 한 세대이상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나에게 묻는 너에게 되묻는 즉자-대자의 물음은 유효하지 않을까? 철학이 늘 유효한 것처럼....우리의 일상은 무궁무진하다.

3. 모든 사람은 혼자다 - 몽테스키외는 자신만의 서재에서 모든 연을 끊고 홀로 지냈다. 글렌굴드도 모든 것을 끊고 자신의 음악을 온몸으로 연주해내었다. 스스로를 되묻는 일은 우주를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도 홀로 서지 않으려는 우리의 암묵적 증상을 깨뜨려, 너로 가려는 몸부림이자 또 다른 확장이지 않을까

4. 총체성, 전체성 - 이란 개념은 상당히 중요하다. 전체를 조망하려는 끊임없는 사유이자, 대상의 너머를 보려는, 달의 이면을 보고자하는 변증법적 사유방식이다. 단순한 종합을 말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긴장들...분석과 해석의 너머 다른 사유를 찾고자 하는 디딤돌 같은 것이다. 뒷 장에 몇가지 개념을 훑고 읽으면 좀더 나은 접근이 될 것 같다. 시인들이 자신의 시집에서 즐겨쓰는 단어들처럼...몇가지 개념어에 충실해보는 것도 좀더 나은 철학읽기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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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


시한테도 미안하고, 산문한테도 미안한 미시미산을 시산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틀이라는 것이 비의식, 무의식에 가까운 것들을 배경처럼 결정하기에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시산문의 여러편에서 말하고 있다. 중간 이피의 그림과 섞여있고, 시산문을 시로도 옮겨놓아 그 작업의 행간도 읽을 수 있다. ‘않아‘라는 필명으로 게시한 카페의 글에는 시간의 공백이 있다. 다름아닌 49일의 흔적이다. 죽음을 형상화한 시이다. 그 가운데 ‘아님‘이라는 시가 겹친다. 주문같은 시. 아님이 아닌 아닌 것이 아닌 아님은.......


시산문에는 유독 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누구 알아주고 규정하든 하지 말든 상관없이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하는 찰나를 형상화하는 작업이 그녀의 시였다고 고백한다. 아닌 것은 아닌 것과 연결된다. 웅웅거리는 소리도 없는 것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는 것들의 소리를 찾아내고 말로 다듬는 일. 말들을 조탁하여 언어를 만드는 일. 언어를 거르고 걸러 증류하듯 한방울 똑 똑 떨어지는 일이 시라고 말이다.


형상화되자마자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 늘 ㄷㅏ시 읽어도 다르게 읽히는 시들. 그것이 시라고 말한다.


그래서, 선입견을 버리기로 한다. 않아가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어떤 직업을 가지든 시산문에서 말한 것들을 그대로 안기로 한다.


볕뉘.

청문회를 본다. 대선주자들을 본다. 국회의원을 본다. 사회활동가들을 본다. 페이스북 친구들을 본다. 마누라를 본다. 아이들을 본다. 일터 동료들을 본다. 나를 본다. 내 안을 들여다본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닌데..이것은 아닌데.....작품은 시의 집 안에 웅크리고 있어 시 밖으로 나오지를 못한다. 시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은 소리에 묻히고..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저편으로 사라진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시 밖으로 나오려는 언어의 산문은 확성기같은 정책의 소리에 묻혀 모기 소리만큼 앵앵거린다.


이렇게 맘마라는 소리도 못내는 이건아닌데 이건아닌데는 웅웅거리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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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문화가 어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거나, 주류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주류 세력 내에 누구 하나가 트로이의 목마 역할을 해줘야 한다. 마이너리티들의 힘만으로는 주류로 들어가는 그 장벽을 돌파할 수 없다. 혁명을 꿈끈다면 직접 혁명가가 되지 않고도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트로이의 목마가 되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 후원을 ㅎㅏ거나, 권력을 잡아 힘으로 지원해주면 된다. 인디밴드 문화를 살리고는 싶지만 그렇게 살 수 없다면 돈이나 권력을 얻은 후 인디밴드의 공연을 마음껏 후원해주면 된다. 물론 돈이나 권력만으로는 안된다.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덧붙여져야 한다. 56

리듬앤블루스는 흑인 거주 지역 안에서도 하위문화였다. 이 하위문화는 절대 공식화될 수 없는 문화로, 티브이에 나오지도 않았고 어디서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철저히 흑인 거주 지역 안에서의 문화였고, 심지어 이름조차 없었다. ㅇㅣ 리듬앤블루스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은 1949년 빌보드 차트였다. 68

빌보드는 음반 유통 통계 잡지이기 때문에 누구를 상대로 팔든 팔리는 숫자들을 전국적으로 집계했다. 그 이전까지 흑인 음악은 레이스 뮤직으로 분류했는데, 그 이름을 조금 폼 나게 다시 만들려고 했다. 악기 편성을 보니 재즈였고, 곡은 좀 빨랐다. 그래서 재즈에서 ‘리듬‘을 가져오고, 보컬은 블루스 보컬이므로 ‘리듬앤블루스‘로 이름을 붙여 분류하기 ㅅㅣ작했다. 이 음악을 1950년대 백인 중산층의 10대들이 몰래 사들고 와서 즐겼다. 68

그것은 마치 1992년 서울북공고 야간 1학년 중퇴자인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했을 때 한 달 만에 전국의 10대들이 그들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몰아주었던 것과 같았다. 만약 서태지가 세상을 떠난 신해철처럼 서강대 중퇴만 했었어도 절대로 그렇게 팔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서울북공고 야간 1학년 중퇴자라는 것이 중요했다. 낙오자 ㅇㅏ닌 낙오자였던 10대들이 ㅈㅏ신들의 한 맺힘을 스스로는 능력이 없어서 못 풀었지만 서태지가 자신들 대신 풀어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69

“통장에 입금된 여덟자리 숫자를 보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한달에 35만원씩만 쓰던 그녀가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숫자들은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 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졌다.” 권여선 안녕주정뱅이 ‘ㅇㅣ모‘ 가운데서

“나는 점점 비인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아무도 나를 주체로 여기지 않아요. 그걸 받아들이는 게 아직도 때로는 분하고 힘이 들어요. 하지만 가끔은 여전히 명랑한 주체인 양 거울을 보고 명령합니다. 내 안의 장님이여, 시체여, 진군하라.” 같은 책 ‘역광‘ 가운데서

볕뉘. ‘편의점 인간‘ 이란 소설에서 보통 평균적삶(이미 그런 것은 현실에서 희귀함에도 가족을 이루고, 결혼을 하고, 안정적인 정규직 취업자의 삶)이 의식하고 뱉어내는 일상이 편의점 알바로 살아가는 (안정적인) 삶과 부딪히는 부분을 생생하게 묘사해낸다.

권여선의 소설 안녕, 주정뱅이는 모든 단편이 술과 연관되어 있다. 삶에 배여있는 피치 못하는 가혹한 삶의 일부로 묘사되어 있다. 그 이모는 맏딸로 가족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는 이모인데, 돌연 모든 관계를 절연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낸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아무도 나를 주체로 여기지 않아요”라는 대목처럼 우리들의 사고는 중산층의 평균적인 삶(별반 부러울 것도 없는 삶?)과 사고에 단단히 묶여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 당당한 삶이라고 가정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살아내고 있는 삶들에 목소리를 줄 수 없는 것일까?

공부해라, 취직해라, 결혼해라, 건강해라 해라 해라체의 무한 강권의 세상의 파열은 어디쯤에 서성이고 있을까? 많이 받지 않고, 많이 벌지 않고, 하고 싶은 것에 시간을 많이 쓸 수 있는 삶들. 그것이 더 당당하고 더 색깔있는 삶들이라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 삶들에 대한 사유까지 차단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위축된 것이 아니라 외려 명절마다 왜 그렇게 삶이 다양하지 못하고 얽매여 사느냐고 핀잔을 받아야 하는 것이 기존 고정관념의 괴롭기 그지없는 국정교과서의 삶이라면, 왜 다른 해석과 ㄷㅏ른 평가를 받아야 하는 ㄷㅏ른 삶이 수면위로 떠오르지 못해야 되는가? 국정교과서의 삶이 낳는 숱한 해악을 목도하면서도 우리는 왜 다른 삶들을 목청껏 외치지 못하는 것일까?

삶의 단위를 왜 평생으로만 볼까? 한 5년쯤 먹고사는 ㅅㅏㄹㅁ의 연대나 같ㅇㅣ 따로 사는 삶. 그래 너무 ㄱㅣ획하는 생각일 ㄱㅓㅅ이다. 다음에 더 생각해보기로 ㅎㅏ자. 앞의 글에서 트로이의 목마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재능을 보는 안목에 더 끌렸다. 마이너리티가 주류가 되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이 ㅇㅏ니라 안목들일 것이다. 세상에 끌려가고 지나간 것들을 뒤늦게 혁명이었다고 호명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세상을 끌고 갈 수도 있다는 안목의 혁신들이 ㄷㅓ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러면 재능이라는 것 ㄱㅏ운데 ㅎㅏ나로 살ㅇㅏ가는 천의 결, 만의 삶결이 다 다른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착상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되고 싶은 ㅅㅏㄹㅁ이 ㅇㅏ니라 살고 시ㅍ은 사ㄹ아낸 삶들이 서로 만나야 ㅎㅏ는 ㄱㅓㅅ은 아닐까. 안목을 ㄷㅏ르게 키워가야 ㅎㅏ는 것은 ㅇㅏ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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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움 - 얼마나 많은 말들이 새로 만들어져야 우리 일상은 달라질까!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시선, 골목˝이란 주제의 지역잡지를 보다 사진글에 꽂혔다. 홀로임 ㆍ 홀로움. 고독을 잘 다루는 이가 드문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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