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격동 : 2 연민

감정이 윤리()에 어던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처럼 아무리 부분적이더라도 모두 에로틱한 사랑의 애증병존성과 과도함을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에로틱한 사랑의 제거가 과연 연민과 다른 감정을 그대로 놔둘지 의심할 수 있는 이유가 실제로 존재한다. 친구 사이의 사랑은 모두 실제로는 은폐된 에로틱한 사랑이라는 프루스트의 주장은 너무 멀리 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 두 감정이 너무 긴밀하게 서로 뒤얽혀 있어 만약 에로틱한 사랑을 도덕()에 대한 위협으로 제거한다면 시혜적인 연민의 에너지를 계속 유지하기를 기대할 수 없으리라고 본 것은 아마 맞을 것이다.

이 때문에 심지어 신스토아학파적 설명이라는 관점에서도 사랑에 대한 내러티브적 설명들에 특히 민감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감정 사이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또한 감정들을 아리스토텔레스적 사랑의 다른 요소인 행위 및 상호작용과 관련시킴으로써 감정적 측면을 조명해줄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이미 성적 욕망 자체는 어떤 특수한 육체적 드러남이라기보다는 생각과 환상의 문제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에 그것은 에로틱한 사랑을 어떤 특수한 육체적 드러남에 의존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우리의 신스토아학파적 견해를 근본적인 방식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 에로틱한 사랑은 육체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도망치지만 용감한 병사(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이렇게 묘사할 것이다)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두렵지만 도망치는 것은 수치스럽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 비슷한 DJEJS 것이 사랑에 대해서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사랑은 종종 소유 및 통제 기획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도우려는 보다 호의적인 기획과 연관되기도 하지만 그리고 비록 사랑에 대한 몇몇 유명한 설명은 그러한 기획을 사랑에 대한 규정의 일부로 삼지만– 아마 그 대신 말해야 할 것은 사랑은 가장 경이롭고 가장 중요하며 자아에 의해 절실하게 요구되는 대상에 대한 특수한 종류의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도하게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고, 복수심에 불타거나 편파적이지 않도록 그리고 일반적인 사회적 연민, 상호성, 개별성에 대한 존중을 지지하도록 하려면 사랑은 어떻게 자신을 갱신할 수 있을까?

불멸의 대상을 사랑하는 그녀는 세속적 재화에의 의존을 포기하고, 어떤 필멸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불멸의 자신에게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이 이행은 그녀가 일반적인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하고 원하는지, 어떻게 고통 받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중요한지를 보는 데는 그리 능숙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연민을 가혹하게 거절하고 비극 시인을 공격한 것은 플라톤의 등정 이야기와 동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의 방향 수정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등정을 마친 연인에게 굶주린 자들, 사별당한 사람들, 병약자들, 박해 받고 박해로 고통 받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었어야 할 때 외적인 것들에 아연실색한바보들처럼 보이며, 실제로 바보들이다. 임종의 자리에 누운 소크라테스는 동정을 꾸짖는다. 크산티페와 아폴로도로스 모두 방에서 나가야 했다. 눈물이 아니라 냉철한 논증이 세속적 고통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재앙을 넘어서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연민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것을 우쭐대는 성향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적 연인은 그와 반대로 사랑의 대상을 소중한 속성의 처소로, 따라서 창조에 적합한 매개체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 자신의 주체성과 선택을 무시한다. –이 점은 오래 전에 블라스토스에 의해 크게 강조된 바 있는데, 그는 이것을 플라톤 이론의 핵심적인 결함으로 그리고 기독교도들이 진보를 이루어낸 핵심적인 영역으로 간주한다. 플라톤적 사다리에 오르는 순간부터 AM이 하거나 선택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는 그녀가 찬양하는 명상의 대상이지 그의 독립을 그녀가 원하고 조장하는 의지가 아니다. 그녀의 명상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과학적 체계 또는 세계 전체의 미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궁극적으로 아무 차이도 없다. 이것이 정확한 이기심인 것은 아닌데, 플라톤적 창조성은 세계 전체에 아낌없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무망한 태도이며, 따라서 공적 영역의 다른 시민들에 대한 태도의 무망한 토대이다. 시민들은 행위와 존재를 위한 노력들에서의 협력만큼 다른 시민들의 명상을 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블라스토스의 견해를 들어보자.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의 처소로서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정확히 개인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포용하는 방식이 아니다. 개인들의 별개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후 아름다운 것의 모든 특수한 초소는 그저 텅 빈 용기처럼 보일 것이며, 거의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것의 모든 차원은 아름다움의 큰 바다의 방울들처럼 보일 것이다. 각각의 개인은 각자에 고유한 별개의 삶을 산다는 생각은 이 분석에서는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질적 변별성의 경우 플라톤의 등정은 훌륭하거나 아름답지 않은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은 무시하며, 따라서 사랑에서 제외한다. –결함과 결점들, 중립적인 특이성들, 신체의 내력 등이 그것이다. 아주 철저하게 차이라는 사실 자체를 포용하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오직 이상적으로 좋은 것과 같은 종류의 것만 좋아한다. 다른 부분들 너무나 인간적인 부분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은 포용하기를 거부한다. 이 거부가 비자유주의적인 완벽주의 정치, 외적으로 강요한 도덕적 표시와 함께 나타날 때만 시민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정치와 함께 등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등정은 또한 개인적 삶에서의 실제적인 인간 존재를 사랑하는 방법으로도 유망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내가 소중하게 간직했을 속성을 네가 존중하는 한에서만 너를 사랑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는 자비를 위한 여지가, 불완전하고 취약한 삶에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감싸는 무조건적 사랑을 위한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치유법과 등정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은 플라톤주의 전통에 크게 빚지고 있다. 하지만 사랑의 질병에 대한 진단의 깊이에서, 따라서 이해가 왜 그리고 어떻게 치료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설명에서 플라톤을 넘어선다.

스피노자에게 두려움, 슬픔, 분노, 즐거움, 사랑 같은 감정은 항상 자신의 안녕과 관련되어 있는 상황에 대한 평가를 포함한다. 감정은 단순히 갑작스런 충동이나 욕구가 아니라 고도로 선별적인 유형의 비전과 해석이다. 예를 들어 두려움을 느낄 때 나는 단순히 몸을 떨지만 않는다. 나는 나 자신 그리고 나의 안녕과 관련해 세상의 상황을 평가하며, 나의 안녕이 상황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런 식으로 스피노자는 스토아학파의 견해 중 소중한 통찰로 간주되는 것을 통합해 들이며, 감정의 인지적 내용과 지향성을 강조한다.

스피노자는 감정[정서]은 외적 사물과 이처럼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지라고, 따라서 실제로는 이러한 외적 사물들 앞에서의 좋든 나쁘든우리의 궁핍함과 수동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감정을 갖는 것은 속박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감정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신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4부 서문).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식으로 살며 외적 원인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동요되어 결코 영혼의 참다운 만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5부 정리 42 증명).

따라서 속박 문제는 무엇인가를 덜 필요로 하고, 우리 바깥의 사물을 우리의 안녕에 필수적인 것으로 덜 보는 것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스토아주의로부터 이 생각을 끌어오며, 감정의 멸절이라는 그의 프로그램은 직접적으로 스토아학파의 생각을 모델로 하고 있다.

M에 대한 A의 사랑은 수동성에서 태어난 일종의 속박이다. 잘살려고 하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에 그녀는 그러한 속박을 증오하며, 그것을 초래한 원인을 증오하는 동시에 사랑한다. 스피노자는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간직하고 보존하려 한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증오하는 사람은 증오하는 것을 없애고 파괴하려고 한다(3부 정리 13 증명). 하지만 증오와 복수하려는 욕망에 휘둘린 삶을 사는 것은 훌륭한 삶일 수 없다(4부 정리 44). “자신이 당한 불법을 미움으로 복수하려고 하는 사람은 확실히 비참하게 생활한다”(4부 정리 46 증명).

그리스와 로마의 스토아주의자들처럼 스피노자는 크게 보아 공적 삶에서 분노와 증오에 의해 초래되는 손해에 대한 자신의 견해 때문에 감정을 해부해볼 생각을 품게 되었다. 종교적 관용에 대한 그의 옹호 그리고 애증병존적인 감정들에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에게서는 동일한 기획의 일부이며, 그의 철저한 반-감정 프로그램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러한 질문들과 제대로 씨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인간은 각각 우리에 의해 어떤 신성과 결합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경우 그러한 인간은 그와 같은 신성의 단편적인 반영이며 그러한 신성의 가장 낮은 품계에 불과할 뿐이고 그러한 신성을 관념으로 바라본다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당한 그러한 괴로움 대신 당장 기쁨을 얻는다. 살아 나가는 온갖 기술, 그것은 우리를 괴롭힌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로 하여금 성스러운 형태에 이르게 하는 계단의 발판으로만 이용하면서 그들 신성에 의해 우리의 생활을 하루하루 풍요롭게 만드는 데 있다(『되찾은 시간』, 209~210).

내레이션은 마치 진창에 빠지듯 너무 감정에 깊이 빠져 자유의 전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스피노자와 달리 프루스트는 내레이션은 유일하게 참된 자유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데, 그의 주장은 상당히 그럴 듯하게 들린다. 오직 내레이션을 통해서만 온갖 인과적 관계를 맺는 우리 사랑의 보편적 형태에 숙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렇게 숙달되는 과정을 독자에게 선물로 주면서 말이다. 따라서 다른 삶들을 사다리의 단으로 이용해 자신의 삶을 문학작품으로 바꾸는 것이 등정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제는 창조보다는 해독의 노동을 요구하는데, “실제가 우리에게 받아쓰게 강요한 유일한 책이자 실재 자체가 우리 마음속에 인상을 낳게 한유일한”(『되찾은 시간』, 190) 텍스트를 위해 자신의 과거를 탐색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원료는 삶 자체에 의해 심중에 남은 상념들이다(190). 하지만 이 과제는 따라서 실제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등지고 살아가는”(207) 일상생활의 통상적인 운용과는 정반대 작업이어야 한다. 일상생활은 사람들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중요한 습관과 질투심들과 허영심을 덮어, 그것들의 중요성을 감추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처럼 거짓으로 덮어 가리고 있는 것을 타파하고 삶의 참된 소재를 드러낸다. “완전히 살아온삶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일상생활이 아니라 오직 예술작품뿐인 것은 이 때문이다(206, 207). “나는 현실에서 나 자신의 심층에 있는 것에 도달하기가 불가능함을 이제까지 너무도 많이 경험해왔다.”

단 한 동의 성당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많은 성당을 보아두어야 하듯이, 양감, 밀도, 보편성, 문학적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작가는 화가보다도 더 단 하나의 감정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되찾은 시간』, 218)

자아인식과 예술적 표현의 소재는 고통이다. 하지만 이 고통을 보편적인 소통의 힘과 형식미를 가진 예술을 위한 소재로 사용하는 것은 심오한 기쁨(209)과 위안을 준다.

한 지점에서 화자는 심지어 고통당하는 것에 대한 연민이 사랑의 즐거움보다 강하다고 진술하기까지 한다(『사라진 알베르틴』, 16).

따라서 등정은 오직 실제 사람들 위로 너무나 높이 올라가 그들의 인간적 실존의 특수성이 보이지 않을 때만 성공할 수 있다. 우리의 세 사상가는 모두 오직 이런 식으로만 사랑의 무시무시한 과도함과 애증병존성이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A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만약 세 사람 진단에 동의하지만 결론에는 여전히 불만이라면 우리는, 특히 사회적 삶이 관련되는 한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증오를 극복할 수 있는 아무런 희망도 없거나 아니면 극복하더라도 그것은 여민, 상호성, 그리고 특수성을 완전히 제거해버릴 것이다. 철학자와 신 또는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명상적 관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명상적 연인은 모든 연인이 유한하고 필멸일 수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사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유아기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발한 도구를 발견한다. –인간의 유아의 최초의 기질에서 너무나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탄과 호기심을 상당히 효율적으로 동원해서 말이다. 이 연인은 보다 적절한 인간적 바람을 위해 총체성에 대한 바람을 포기하는 대신 계속해서 유아기의 전지전능함에서 동기를 부여받아 왔으며, 바로 이 때문에 유아의 바람들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세계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프루스트도 인정하듯이 다른 사람의 특수성을 진정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보려면 이 다른 특수자를 통합시키거나 집어삼키려 하지 않는 자세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수하려는 자아에 외적인 행위 주체들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절대적으로 맞았다. 알베르틴을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알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의 잘못인 것은 (그가 생각하는 대로) 그녀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서 자신이 설정한 특수한 목표 그리고 그가 받아들인 사랑에 대한 설명 이것은 그처럼 기저에 깔린 목표에 너무나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서 세속적 사랑과 천상의 사랑 사이에는 심원한 심리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두 사람 모두에게서 선한 기독교적 삶은 플라톤적 전통에서 바라는 사랑보다 더 변덕스럽고 에로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중요한다. 두 사람은 기독교적 전통 내부의 상이한 관점을 대변하는데, 나는 둘이 공유하는 생각뿐만 아니라 차이도 탐구할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든 단테든 사랑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 전체를 공평하게 다루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텐데, 두 사람 모두 내적으로 아주 복잡한 내력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기독교도로서 순수하고 적극적인 지성이 아니라 민감한 감수성을 갖고 사랑으로 가득 한 복잡한 심리를 통해 등정하게 된 A는 두 가지 방식으로 심오하게 우연성의 처분에 맡겨진다. 등정을 위해 그녀는 자신의 자제가 아니라 그녀의 인격 중 본인이 지배하지도 또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측면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의 인격 속에 들어 있는 이처럼 민감한 요소는 역으로 행복한 활성화를 위해서는 하느님이 부르는 신비한 방식에 의존해야 한다.

『고백론』에서 감동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훌륭함, 자기이해, 지식에 대한 추구는 이 책 내내 자신은 연속적인 시간적 존재라는 아우구스티누스 본인의 인식을 전제한다. 이 시간적 역사는 그의 영혼의 비-필연적 속성일 수도 있다. 그것은 여전히 그의 구원에 핵심적이다. 자기이해는 그가 이것을 성취하는 한 고백의, 즉 핵심적으로 기억을 통해 과거를 끌어내는 활동의 열매라고 말해진다. 그는 분명하게 이렇게 선언한다. 하느님에 대한 추구는 널따란 평원을 지나 기억이라는 큰 전각에 이르며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갖가지 사물의 무수한 영상이 간직되는 보고이다”(10 8). 기억은 변덕스러운 능력이다. 그것은 항상 의지에 복종하는 것도 또 그것의 내용이 신중한 검토에 항상 맡겨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에 따른 어려움과 어둠 없이는 열매를 거둘 수 없다. 플라톤주의적 등정이 주장하는 대로 그것을 잘라내는 것은 자아에 대한 인식을 포기하는 것일 것이며, 따라서 갈망하고 사랑하기를 그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기억과 책임 사이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세계에 속하는 과정에서 내가 만든 자아를 사랑하지 않은 것과 동일하게 나는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만나는 내 이웃 역시 사랑하지 않는다. …… 나는 그 속에 있는 어떤 것, 즉 그에게 속하지만 그가 아닌 바로 그것을 사랑한다. ‘너는 그의 속에 있는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의 그가 아니라 네가 그였으면 하고 바라는 그것을 사랑한다.’ 이는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서조차도 단지 그들 소에 있는 신을 사랑하는 한에서만 걱정하는 연인을 계속 고립되도록 만든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이웃의 입장에서도 사랑은 단지 고립으로 불러들이는 초대이자 신의 현전 속으로 들어오라는 소환장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 죽음은 이러한 사랑에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사랑받는 모든 이는 오직 신을 사랑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뿐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인간 속에 있는 동일한 원천이 사랑받는다. 어떤 개인도 이 동일한 원천과 비교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다.[169~170]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히 감정을 훌륭한 삶에서 명예로운 위치로 복원시켰다. –그리고 이 감정과 함께 우리 인간성의 궁핍하고 불완전한 측면을. 그는 플라톤주의적 전통으로 하여금 모든 불완전성과 인간적인 것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비난하도록 만든 교만을 비난했다. 하지만 에덴동산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우리를 추방한 죄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사랑의 등정에 대한 생각과 마찬가지로 그에 고유한 방식으로 원초적 수치심에 기반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의지의 불복종 그리고 그것의 징후인 정욕이 우리를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존재로, 따라서 에덴동산에서 생식기를 원예 도구처럼 이용해 만든 로봇 같은 사람들과는 다르게 만든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많다. 즉 우리 인간성의 기본 요소, 즉 독립성, 의지함, 성적도덕적 예견 불가능성을 여전히 플라톤주의자들처럼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심원한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선을 다해 행동하는 대신 몸을 가리고, 슬퍼하고 기다리는 편이 더 나은 것이다.

즉 개인의 가장 진실 되고 가장 적절한 사랑을, 개인을 모든 유별남과 독특함 속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고 사랑하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적 구원의 맥락에서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단테는 이교도적 전통을 통째 기각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의 헌신적 추종자로서 그는 주체성의 존엄성과 특수성의 지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에 충실하며, 이교적 전통과 기독교적 전통의 최고의 것을 융합시키려고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이 세상에서의 분토는 새로운 존엄성을 얻으며, 심지어 천국도 미덕을 안다.

우리가 갖게 되는 느낌은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개()성과 주체성을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개()성과 주체성에 대한 충분한 존경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삶을 주체성이나 숙고를 포함한 것으로 전혀 간주하지 않는다. 열정의 힘들에 내맡긴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테의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다. –심지어 플라톤도 아니다. 지성의 자기-추진적인 운동을 보다 에로틱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가 단테에게 던지는 첫마디는 궁정풍 연애시에서는 편안한 사랑의 말들이다.

상호성 및 행위 주체로서의 동료 시민에 대한 존중과 관련해 우리는 플라톤적 전통과 아우구스티스적 전통 모두를 넘어 정말 결정적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단테의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일반적인 윤리적 태도는 타자의 주체성과 자유에 대한 아주 강력한 존중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훌륭한 인간적 사랑의, 따라서 함축적으로는 사회적정치적 제도들의 핵심적 성분이다.

예를 들어 사회계약론은 시민들을 단지 행위 주체로만, 롤즈의 의미심장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완벽한 삶에 대해 완전히 협력하는 사회의 성원들로서만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인간 존재도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심각하게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종속의 시기를 갖기 때문이다. –가장 분명하게는 유아기와 노년에. 하지만 돌봄에 대한 필요와 요구는 우리 삶의 직물로 직조된다. 돌봄에 대한 이 필요는 충족되어야 하며, 사회는 그것이 잘 충족되도록 돌보아야 한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또 돌봄을 베푸는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고 말이다.

실제로 무감각은 인간의 특성이 아니다. …… 그러니 만약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즐거운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아무 차이가 없다면 그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는 정의와 인간의 안녕에 대한 세속적 추구는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임을 아주 분명하게 한다. 그런 만큼 천상의 연민을 포함해 연민은 계속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 굶주린 자들을 먹이는 일, 박해받는 자들을 보호하는 일,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인 프란치스쿠스의 자발적 빈곤과 고통 받는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은 그를 『천국』(11)의 중심적 주인공중의 하나로 만든다.

하지만 그들의 천국은 에드거 린튼의 정적인 천국이 아니라 이승적 열정의 활기찬 영역으로, 거기서는 자연과 육체를 사랑하는 영혼의 본질 자체가 된다. 그들은 여전히 사랑에서의 자유로운 주체성과 특수한 지각에 대한 기독교적 연인들의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관심은 더 이상 관습적인 종교적 권위의 체계 내부에는 수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주체성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방향을 찾아야 하며, 관습적인 기독교도에게 이들이 걷는 길은 지옥에 이르는 길처럼 보일 것이다.

요약해보자. 낭만주의적 연인은 기독교적 세계에 이 세계가 잃어버린 에너지와 헌신의 깊이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적 동정심을 박탈당해 우리를 동물로 만들지 않고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 린튼 가의 세계에서는 일종의 지옥을 만들어 진짜 열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린튼의 죽은 감정들은 사회적 도덕()과 연결되며, 이 둘은 모두 자기방어적 자체 및 타산과 연결된다. 그와 반대로 완전 무방비 상태인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좀 더 깊은 종류의 관대함 및 좀 더 진정한 이타주의의 뿌리와 연결된다. 이 소설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진심으로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캐릭터는 히스클리프뿐이며, 진정한, 즉 비타협적인 이타주의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 번째로, 관습적인 기독교는 모든 움직임과 분투가 멈추는 정적인 천국을 고대할 것을 가르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리하여 움직임과 분투를 폄하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품이 넓은 미덕이 아니라 쩨쩨한 린튼적 미덕을 함양할 것을 가르친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기독교적 세계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 중의 하나, 즉 상상력을 무시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기독교적 캐릭터들 중 생생한 공감과 함께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앞서 말한 대로 히스클리프와  캐시의 사랑은 자아를 타자의 손길과 눈길에 완전히 드러낸 것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위험을 자초하는데, 너무나 전적인 그것은 죽음에 가까워진다. 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방어막도 존재할 수 없다. 다자는 자신 속에 있고 자신과 한 몸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경계들이 투과적인 것이 되도록 허용하려면 과거의 자신이거나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모습대로의 자신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실로 그렇게 하려면 낯선 이, 집시가 되어 이 모든 캐릭터들이 자신을 보호해온 자족성이라는 단단한 껍질을 포기해야 한다.

말러도 교향곡의 결론을 위한 원천으로 기성의 모든 문학을 거부했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나는 이 텍스트가 1악장의 정서적 궤적에 대한 해석을 위해 뭔가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것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러 본인의 프로그램들이 분명히 훨씬 더 큰 통찰력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관습적인 종교적 도덕과 말러의 예술의 지정한 영성사이의 대조가 또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러의 삶은 많은 측면에서 격동으로 가득 차고, 관습적인 기준으로 볼 때 죄로 가득한것이었다.

휘트먼에게 민주주의적 비전은 자체가 시적 비전이며, 시민이란 모든 봉건적 절차들과 시를 버리고 민주주의 시와 절차를 받아들인 사람”(BO 185)을 말한다.

휘트먼은 다소 말러적 우리는 그가 성경을 포함한 모든 세계문학을 통해 구원의 말을 찾았지만 사랑의 말들은 단지 자신의 상상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음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철학적종교적 체계들에 의해 창조된 우주론들에 맞서기 위해 휘트먼이 제공하는 새로운 우주론이 있다. 즉 유한하고 필멸이며 개인적이며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며 동등한 민주적 시민인 우리는 슬기로운 상상력과 연민어린 사랑 덕분에 자신 안에 세계를 담고 있다. “나는 공감을 입증하는 사람”(LG 22. 461)이라고 시인은 선언한다. 따라서 공감하지 않으며 길을 걷는 자는 누구든지 수의를 걸치고 자신의 장례식으로 걸어가는 것이다”(SM 48. 1272). 그리고 이승적 사랑의 결함들은 어떤 기성의 신념 체계가 아니라 시인은 종파나 학파는 접어두자고 말하기 때문이다(SM 1. 10) –동등한 사랑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도록 공감의 원환들을 외부로 확대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

지금이라는 것보다 더 나은 완벽이란 없을 것이고/지금이라는 것보다 더 나은 천국이나 지옥도 없을 것이다”(SM 3. 42~43). 단지 삶만이 있을 뿐. 그것은 부단히 자신을 갱신한다.

그것이 노예경매의 범죄이다. 모든 육체는 동등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육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자신에게 똑같이 궁핍하며, 유한하고 필멸인 존재로, 또한 똑같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드러낸다. 우리는 동등한 지원뿐만 아니라 동등한 존중과 사랑의 토대를 발견한다. 그러면 일부 육체는 단순한 살덩어리로 다루고 다른 육체는 영혼으로 다루는 태도의 추함과 비합리성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노예건 자유민이건, 노동자건 관리자건, 이주민이건, 원주민이건, 부유하건 가난한던 각자는 모두 행렬에 자기 위치를 갖고”(BE 6. 88) 있음을 볼 수 있다. 『에밀』에서의 루소와 아주 흡사한 방식으로(6장을 참조하라) 휘트먼은 공통의 육체적 인간성과 취약성에 대한 지각을 고도로 비판적이며 도덕적으로 공격적인 공감의 발생과 연결시킨다. 우리의 인간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일부 집단을 예속시켜 단순한 사물로 다루는 권력의 위계들은 인위적이며 옹호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휘트먼에 의한 섹스의 복권은 그의 비판자들이 종종 주장하듯이 섹스에 대한 가볍고 난잡한 접근인 자유연애에 대한 승인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와 정반대로 산문뿐만 아니라 시에서도 그는 근엄한 모럴리스트로 성적 문란과 성의 상품화, 특히 사람들을 포르노의 대상으로 삼는 것 그는 이것을 민주적 목표와 과정을 심하게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한다을 통렬히 비난한다. 하지만 로런스와 흡사하게 그는 포르노에서 표현되는 섹스에 대한 호색적인 태도, 그리고 섹스 산업으로 대변되는 성의 상업화를 에로틱한 욕망의 불가피한 양상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에 대한 청교도주의적 거부의 양상들로, 진정 에로틱한 시선에 대한 아메리카의 공포와 동류의 양상을 간주한다. 휘트먼은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형태의 잘못된 관계를 아메리카의 다른 왜곡된 형태들과, 특히 자연에 대한 착취적 태도 자연은 자신의 필멸성을 거부하는 사람에 의해서는 생사를 넘어 연속되는 외경스러운 존재로 바라보여질 수 없다와 끈질기게 결부시킨다. 자연에 대한 시인의 사랑을 성적 여성의 인간성에 대한 인정과 연관시키면서 휘트먼은 1860년에 아래 시구를 흔히 볼 수 있는 창녀에게 바치고 있다. “태양이 그대를 내쫓지 않는 한 나는 그대를 내쫓지 않소/물길이 그대 위해 반짝이길 마다하고 나무 잎사귀가 그대 위해 살랑거리길 마다하지 않는 한/내 말은 그대 위해 반짝이며 살랑댈 것이오.”

이 목표들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휘트먼은 말러와 아주 흡사하게 공동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연민의 힘을 강조하며, 또한 사랑의 성공적 갱신에서 민주적 평등과 호혜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말러처럼 그는 이 목표들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랑은 에로틱해야 하며, 자신의 이승적 분투를 목적 그 자체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 모두 비록 각자에 고유한 방식으로 종교적이지만 관습적인 종교를 거부하고 예술가의 상상력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는 보다 개인적인 영성을 선호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한 모든 설명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모두 일상적 삶을 거부한다.

이 모든 작품은 이처럼 각각의 작품이 구성하는 독자와 현실적 삶 속의 독자 사이에 넓은 간극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저 위를 주목하도록 사람들을 몰고 가기 위한 의도적인 전략이다. 하지만 이 전략은 우리가 여전히 우리임을 발견했을 때 분노와 혐오감을 악화시킬 수 있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윤리적, 종교적, 민족주의적 쇼비니즘은 사랑, 따라서 삶과 정반대되는 모욕 그리고 증오의 주요한 원천이다. 결국 블룸은 이렇게 말한다어쨌든 같은 지역 안에 살고 있는 같은 백성”(602)이 아니라면 민족이란 무엇인가? –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을 전혀 만족시키지 못할 김빠진 규정이다. 블룸은 이를 이렇게 요약한다. “나는 어떠한 형태나 형식이든 폭력이나 편협성을 불쾌하게 여기네.” “모퉁이 근처에 살면서 다른 국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들을 증오한다는 것은 확실히 불합리한 짓이지, 말하자면 옆집에 말이야”(1089)

조이스는 이상주의적이든 아니면 결함이 있는, 헌신적이든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든 사람들이 온전히 나아가 되는 것을 허용할 분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러한 ’ –조이스는 이렇게 암시한다가 건전한 정치적 삶, 즉 민주적이고 보편주의적이며 따라서 자유주의적인 삶의 핵심적 토대로, 거기서 인간의 자유는 copriright의 법칙에 의해 보호받을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등정적 전통은 자기증오와 타자들에 대한 증오의 공범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대상이 된다.

창조적 개인의 몸과 영혼의 분투에 대한 말러의 의기양양한 긍정은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이 딜레마를 가로지른다. 우리의 분투는 자체가 하나의 목적임을 간파함으로써, 우리가 이 세상에서 헌신하는 일들의 고결함을 믿고 앞으로 나감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려는 의지 자체에 의해 증오심을 물리친다. 등정에 대한 이 견해는 여러모로 이상으로는 내가 가장 완벽한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사랑이 어떻게 증오를 이길지 하는 질문과 관련해 최고의 대답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혐오감에서 나온 이 비명은 말러의 작품이 보여주는 대로 자체가 이상에 대한 모든 지속적 헌신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따라서 또한 현실적인 것에 대해서도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는 관념론이 요구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사랑하는 개인들은 다져서 양념한 통조림 고기를 먹고 요강을 사용하는 등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원대한 낭만적 갈망과 영혼에 대한 진지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포함하는 정의에 대한 헌신이. 우리가 연속적으로 살펴본 것 중에서는 오직 폴디와 몰리만이 둘 사이의 사랑의 아주 코믹한 단편성 속에서 영혼을 포함해 사랑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을 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오직 이 텍스트만이 현실 속의 삶을 사는 독자의 사랑을 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다 관념론적인 등정론들이 현실적인 것을 용납하지 못함으로써 자체 속으로 붕괴되어 들어가지 않도록 필요한 것을 보충해주는 방식으로.

『율리시스』의 거꾸로 뒤집힌 사다리는 불완전함은 우리의 인간적 이상과 사람들에 대해 당연히 예상해야 할 것임을 상기시킨 바 있다. 그것은 사다리를 올라갈 것을 요구하지만 종종 그것을 뒤집어 침대 속이나 요강에 앉은 현실의 사람을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오직 그런 식으로만 이상으로부터 최고의 것을 얻을 수 있다. 오직 그런 식으로만 모든 이상 속에 내재해있는 유혹, 즉 그저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경멸하려는 유혹을 극복 할 수 있다.

등정의 정신을 인정하는 동시에 부드럽게 조롱하는 폴디와 몰리로 논의를 끝마치는 것을 통해 나는 심지어 현실 생활의 불완전한 형태에서, 실로 특히 인간적 삶의 불완전함과 놀라움이 증오되기보다는 받아들여지는 그처럼 불완전한 형태에서 여러 감정(연민, 슬픔) 중 사랑과 이 사랑의 동맹자들은 우리 텍스트들이 식별해낸 다양한 형태의 증오를 낳기보다는 다른 집단과 민족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정치의 토대를 이루는 사회 정의로 나갈 수 있는 강력한 안내를 제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시도해왔다. 우리는 폴디가 돌연 스피노자를 저버리는 것에서, 몰리의 변덕스런 욕망에서, 놀라움과 수동성이 텍스트의 움직임 속에서 포용되는 방식에서 우리의 보다 지고한 다른 비전들과 결합시킬 필요가 있는 자비와 공평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의문의 여지없이 어떤 것에 관심을 보이고 욕망하는 것이 한결같지 않게 간헐성을 띠는 것 이것은 우리 자신의 상상 속에 내재해 있다을 우리 자신이 관용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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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격동 : 1 인정과 욕망

롤즈는 칸트가 훌륭한 윤리적 행위 주체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장치로부터 연민을 갖도록 하는 감정을 빼뜨린 것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비판에 응답하면서 그러한 결합이 실제로 쇼펜하우어가 칸트적 합리성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의 모델을 제공해준다고 말한다. 롤즈는 자기이익과 무지의 결합을 연민과 정보의 결합보다 선호하는데, 자신의 전략이 더 많은 확실한 결과를 낳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두 전략이 아주 내밀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민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상력의 운동은 몇 가지 방식으로 차단될 수 있다. 루소의 주장에 따르면 한 가지 장애물은 계급과 신분(그리고 우리는 쉽게 종교, 인종, 민족, 남녀라는 구별짓기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에 따른 사회적 구별짓기에 의해 제공된다. 이러한 구별짓기는 첨예한 사회적 형태가 주어질 때 연민을 방해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어려움은 사람을 범주별로 분류해 서로 분리시키는 모든 사회적 체계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루소 말대로 위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특히 첨예하게 드러난다. 이 상황에서는 특권 집단이 자신의 전망을 열등한 집단보다 훨씬 더 우월한 것으로 규정하며, 심지어 자신을 끄떡없는 존재로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무엇인가를 갖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강렬한 질투심을 느낀다. 상실감과 슬픔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좌절을 원한으로 전환시킨다. 실제로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세상을 맘대로 하는 것을 위협한다. 어떤 경쟁자도 세상을 맘대로 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감정이입뿐만 아니라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 모두를 거부한다. 그러한 사람이 연민 같은 것을 가질리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따라서 폭넓고 바람직한 연민을 가르치길 바라는 사회에게 주어지는 핵심적인 도전은 수치심과 혐오감의 이러한 이상비대성 버전들 이면에 놓인 메커니즘과 싸우며 자신의 인간성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도저히 쉬울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예술을 통해 연민을 발전시키기 위해 당연히 우리가 의지하게 될 내러티브는 비극적 곤경의 내러티브로, 특히 현저하게 고전의 비극 드라마 자체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필록테스 이야기가 그것으로, 그는 본인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도 끔찍한 고통을 당한다. 우리는 쉽게 그러한 예술작품들은 연민뿐만 아니라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을 불러옴으로써 청중에게 연민을 촉진함을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스토아학파적 무관심의 가장 충격적인 측면 심지어 제 자식을 포함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마음 아파하지 말라는 명령은 스토아학파의 평등주의적 코즈모폴리터니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인간 존재는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우리는 기본적으로 가족이나 도시국가의 성원이 아니라 kosmoploitai, 세계의 도시국가의 성원이다. 이것은 우리가 만인에 대해 동일한 관심을 가져야 하며, 동일한 관심은 친족에 대한 특수한 애착과는 양립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가족의 성원이나 동료 시민에게 편중된 양의 관심과 에너지를 쏟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삶이 우리를 놓아둔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도움이 되려고 시도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기 가족에게 얼마나 특수한 가치나 양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조직적 쟁점이 편중된 투자를 정단화해준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는 이보다 더 멀리 나가 가족의 존재 자체가 본래적인 의미의 관심 자체를 위태롭게 하며 질투심과 적대감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아이들은 공동으로 양육되어야 한다.

이 두 비전은 각각 자체에 고유한 방식으로 평등뿐만 아니라 자유를 추구한다. 전자는 기본적 욕구에 대한 동등한 지원을 겨냥하며, 그것을 통해 자유로운 선택과 자기실현을 위한 동등한 기회를 촉진시키길 바란다. 후자는 내적 자유라는 사실 어떠한 불행도 제거할 수 없는 사실로부터 시작하며, 이 사실 속에서 정치적 평등의 원천을 발견한다. 전자는 선택의 자유를 완전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해줄 세속적 배치들을 통해 사람들을 위해 쌓아올려져야 할 어떤 것으로 바라본다. 후자는 자유를 양도 불가능한 소여, 모든 물직적 배치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간주한다. 전자는 고통에 대한 상상과 관심의 점진적 확대를 통해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정념을 물리치는 것을 겨냥한다. 후자는 그러한 정념을 완전히 제거하고, 앙갚음을 자제와 자비로 극복하는 것을 겨냥한다. 전자는 인정 많음을 통해 자선을 베풀려고 시도한다. 후자는 칸트와 함께 그러한 인정 많음은 인간 존재들 사이에서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자는 인간의 허약성이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유약함은 공통체에 대한 장애물이며, 오직 진정 자족적인 인간만이 진정한 친구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연민의 지지자와 적 사이의 논쟁은 공적 삶에서의 선택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사유 과정의 유형이나 능력의 유형과 관련된 단순한 형식적 논쟁이 결코 아님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이성의 열렬한 옹호자와 어떤 무심하고 비인지적인 힘의 열렬한 옹호자 사이의 논쟁도 아니다. 그것은 윤리적 가치에 관한 실질적 논쟁이다. 이제 우리는 이 논쟁에 대한 판정을 내려야 한다.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해 연민을 갖는 것과 그러한 사람의 위엄에 대해 존경심을 갖는 것 사이에 왜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선택을 강요받아야 할까? 그렇게 구분한 다음 운명이 초래한 잘못과 관련해 연민을 갖는 동시에 훌륭한 사람이 그러한 재난을 힘껏 견뎌내는 방식에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질 수는 없을까? 인간성을 볼 때 그것을 존중하려면 그의 도덕적 인간성이 상실을 상쇄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탁월함을 스토아학파가 바라는 대로 존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도덕적 능력을 미덕을 위해 이용하는 것으로 인간이 훌륭한 삶을 사는 데 충분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상실은 심각한 상실이 아니었다는 스토아학파적 입장을 택한다면 실제로 이 경우 우리가 어떤 것을 존중하게 될지를 알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사건을 위엄 있게 견뎌내는 불굴의 용기는 어디 있어야 할까? 비극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아이들의 죽음, 강간, 전쟁, 물질적 박탈에 의해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처럼 끔찍한 일들이 그러한 인격의 핵심 자체를 어떻게 찌르는지를 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탁월함에 대한 경탄을 끌어낸다.

다른 한편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과 결합해 나타나는 한 연민 자체는 공통의 인간성이라는 생각을 포함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이런 식으로 그것은 존중의 적이 아니라 동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타인들의 동등한 인간성에 대해 우리가 가진 존중은 그들의 물질적 행복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강력한 관심으로 이어져야 할 것처럼 보인다. 특정한 개인이 인간적 능력의 담지자라는 사실은 그에게 물질적 관심을 요구할 권리를 부여하는데, 그리하여 그러한 능력은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원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어려움은 인간 존재에게서 훌륭한 삶을 박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러한 능력을 제대로 존중할 수 없다.

그러한 구분을 위해 연민은 기본적인 인간적 재화에 대한 적절한 이론과 결합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처럼 형편없는 이론을 갖게 될 것이라고 추정할 이유는 없다.

연민 속에 구현되어 있는 가치평가를 좋은 것으로 승인하지 못하는 칸트의 실패는 정념을 비인지적인 것으로 보는 그의 일반적 관점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또 다른 원천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본성상 보다 인지적이다. 칸트는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에는 뭔가 모욕적인 것이 있다는 깊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존중과 자기존중은 너무 많은 사랑의 관심이 아니라 거리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실천적 사랑이라는 원리는 가까움과 주의 깊은 관심을 명한다. 칸트는 이 두 가지 도덕적 힘은 균형을 이룰 수 있지만 훌륭한 도덕적 주체를 어느 정도는 모순적인 방향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만약 우리 능력이 육체적 능력이라면 육체적으로 필수적인 조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수미일관되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니체는 당시의 민주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루소에 의해 발전된 친-연민적 전통은 외적 재화에 대한 연민의 생각을 민주주의적-평등주의적 사유의 현대적 발전을 위한 토대로 만들었다. 하지만 지체는 기본적인 생각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루소가 하려고 했던 것을 보지 못한다.

이의제기는 연민의 소중한 감정으로, 핵심적 사례에서는 진정한 믿음에 기반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의 판단 각각이 정확한 윤리적 이론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각함에 대한 판단은 외적 재화의 가치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부당성에 대한 판단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정확한 이론을 필요로 한다. 행복주의적 판단은 본연의 관심에 대한 정확한 이론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단순히 사회가 종종 이 영역에서 잘못된 이론을 가르친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이 연민을 버리고 보다 추상적인 규칙의 체계로 옮겨가는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규칙 또한 오류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 존재가 전형적으로 연민 공감 및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에 이르도록 해주는 심리학적 메커니즘이 전형적으로 그것을 원리상 협소하고 불평등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감과 상상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발달에 대한 설명이 그래도 타당성이 있다면 사람들은 유아기의 강렬한 특수한 애착을 통한 처리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죄책감과 감사함을 통해 서서히 그러한 애착을 확대하지는 않고는, 연민의 특징을 이루는 상상을 통해 관심사를 확장하지 않고는 이타주의에 이르지 못한다. 연민은 타인에게 좋은 것을 우리의 상상들의 근본적으로 (이기적이 아닌) 행복주의적인 구조와 우리의 가장 강력한 관심과 결합시키기 위한 우리 인간이라는 종의 방식이다. 타인들에게 좋다는 말은 추상적으로는 또는 그렇게 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매우 중요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그거이 우리가 이미 부모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함께, 편안함과 안전에 대한 열정적 요구와 함께이해하고 있는 것과 관계를 맺게 될 때이다. 인간적(반드시 신성한 것은 아니지만) 연민에서 중요한 메커니즘인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상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중요한 도덕적 작업을 수행한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오직 다른 사람에게 좋고 나쁨을 상상할 수 있을 때만 도덕적 관심을 타인들에게까지 완전히 확대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우리 각자가 일군의 동심원 속에서 산다고 상상해 보자고 말한다. –가장 가까운 존재는 자신의 육체이며, 가장 먼 존재는 인간 존재들이라는 우주 전체이다. 도덕적 발단의 과제는 이 원들을 점점 더 중심에 가깝게 움직여나가며, 그리하여 부모는 자신처럼, 다른 친인척은 부모처럼, 이방인은 친인척 등처럼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동등한 관심을 또는 규범적으로 올바른 다른 어떤 유형의 적절히 순위가 매겨진 관심을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어떤 인간 정신도 그것을 성취할 수 없다. 자신이 이해하는 바의 의미들에 기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절박함이 없는 평등만 남게 된다.

그와 반대로 상상력과 연민이 떠올려주는 이 연관성들의 손길이라고는 닿지 않은 추상적인 도덕 이론은 쉽게 사악한 목적에 전용될 수 있는데, 그것의 인간적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연민의 특징을 이루는 판단은 완벽한 성인의 합리성의 건강함을 위해 핵심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민 자체는 우리가 타인에게 좋고 나쁨을, 그리고 그것의 완전한 의미를 보는 눈이라는 결혼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계산적인 지성의 추상적 시선은 가치에 맹목적이게 된다.

우리는 대담하게 스토아학파에게 분노는 종종 정당화될 수 있으며 올바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불의와 심각한 잘못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실로 분노를 멸절시키면 사회정의와 억눌린 자들을 옹호하기 위한 주요한 힘을 멸절시키게 될 것이다. 만약 분노가 부적절한 대상에게까지 넘쳐 흐를까봐 걱정이라면 그러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분노를 완전히 제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연민은 오직 기본재의 가치에 대한 적절한 이론을 갖출 때만, 오직 행위 주체와 잘못에 대한 적절한 이론을 갖출 때만, 그리고 오직 가까운 사람뿐만 아니라 먼 사람까지 포함해 행위 주체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에 대한 알맞게 포괄적인 이론을 갖출 때만 귀중한 사회적 동기가 될 것이다. 이 판단들은 훌륭한 발달 과정을 통해 생성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 연민은 핵심적인 삶 그리고 도덕()과의 연관성을 제공하는데, 이것들이 없다면 연민은 위험할 정도로 공허하고 뿌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제대로 재현되는 핵심적 사례에서 연민은 정확한 가치평가를 구현하며, 우리의 관심을 우리와 공동의 인간성을 공유하는 사람을 향하도록 한다. 유아기의 관계들에서 배우는 이 연관성들은 도덕()을 둔감할 것보다는 분별력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서 중요하다. 따라서 연민은 존중에 대해 반드시 필요한 보완물로, 그것이 없다면 칸트의 주장대로 선행은 에너지를 결여할 가능성이 크다(칸트가 제시하는 것보다는 휠씬 더 인지적인 이유에서). 우리는 오직 연민이라는 동기만을 통해 좋은 사회를 만들려고 해서는 안되는데, 연민이 별나고 신뢰 불가능하기보다는 가치 있는 것으로 입증되는 것은 말하자면 이성의 한계 내에서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런 식으로 제한된다면 그것은 아이의 협소하고 자기 참조적인 관심사에 훨씬 더 넓은 도덕적 세계로 이어주는 극히 중요한 다리를 마련해줄 것이다.

즉 타인의 고통에 슬퍼하라는 요청이 그를 도우려는 행동이 아니라 방종과 자축적인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연민을 경험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훌륭한 일을 했다고 너무 쉽게 느낀다.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어떤 조치이것은 이들을 진짜 어려움과 희생 속에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도 취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회에 적절한 연민을 고취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연민에 기반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연민은 공적 도덕성에 윤리적 시각 이것 없이는 모든 공적 문화는 위험할 정도로 뿌리를 잃고 공허하게 될 것이다에 핵심적인 요소를 제공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충분한 만큼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제도와 관련해 연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 체제는 인간적이며, 오직 인간적 방식으로 살아 있는 한에서만 좋은 것이다.

루소와 토크빌 공히 보여주듯이 공감 및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은 제도가 사람들을 서로 관련을 맺도록 하는 방식에 의해 심오한 영향을 받는다.

비극은 엄청난 불행이 인간적 행위의 심장부를 강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재앙은 단지 피상적인 불편만 초래하지 않으며 이동성, 계획, 시민권, 궁극적으로 삶 자체를 방해한다. 다른 한편 이 재앙이 인간적 주체를 강타할 때 우리가 비극적 연민의 감정을 갖는 것은 바로 그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성이 허비되는 것을, 또는 심지어 매정하게 처분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아주 복잡한 상황에서 제대로 평가하기가 어려운 점을 고려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이 실수들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태도였다. 심지어 기본적으로 훌륭한 사람도 잘못을 한다. 용서하는 태도가 전반적 유약함과 인간이 내리는 판단의 취약성에 적절할 것이다. 어떤 사람의 비난받을 만한 실수를 용서하는 정신에 따라 판단함으로써 우리는 아무리 최선의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우리 자신이 판단에서 완벽하지 않음을 밝히는 셈이다.

비거 같은 범죄자에 대해 그가 범죄에 대해 완전히 책임이 있는 것으로 다루는 것과, 동시에 그가 어떤 아이도 견뎌서는 안 되는 불행을 겪었음을 연민어린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은 완전히 일관된다. 오직 이 점을 인정할 때만 사회적 위계와 경제적 박탈에 따른 비용을 온전히 추정할 수 있다. 스타인벡은 정말 부자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불평등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불행뿐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약 불평등이 인격 자체 속에까지 깊이 뿌리 내려 분노와 원한, 나쁜 성격의 뿌리를 낳는다는 걸 이해한다면 모든 아이에게 인간의 존엄성이 요구하는 물질적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참여할 훨씬 더 깊은 동기를 갖게 될 것이다. 연민을 가진 사회는 소포클레스적 비극이 암시하는 의미에서 내 행위와는 무관하게 시민에게 닥칠 수 있는 피해를 충분히 가늠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연민은 인간의 존엄성을 뒷받침하고 보호하는 기본적 지원을 모든 사람에게 확보해주려는 동기를 마련해준다.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사회는 기초적인 복지 후생을 일련의 특히 중요한 영역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일군의 역량이나 기회로 묘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중요한 것으로 입증될 인간의 삶의 몇몇 핵심영역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일군의 기본적인 기회를 모든 시민에게 보장해야 한다(다원주의 기회와 역량을 제공하는 것에 의해, 따라서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갖게 되는 기회에 맞추어 기능할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풍부한 여지를 허용함으로써 존중된다).

핵심적인 인간 역량

1.    생명. 정상 수명이 끝날 때까지 살 것.

2.    신체적 건강. 재생산적 건강을 포함해 신체가 양호할 것.

3.    신체적 통합성. 자유롭게 장소를 이동할 수 있을 것.

4.    감각, 상상, 사유. 감각을 사용하고, 상상하고, 사유하고, 추론 할 수 있을 것.

5.    감정. 외부의 사물과 인간들에게 애착을 가질 수 있을 것.

6.    실천이상. 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고 자기 삶을 계획하는 것에 관한 비판적 성찰에 뛰어들 수 있을 것(이것은 양심과 종교 의식의 자유에 대한 보호를 포함한다).

7.    귀속. A. 타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은 향해 살고,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을 인식하고 보여주고,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할 수 있을 것. B. 자기존중 및 모욕당하지 않을 사회적 토대를 가질 것.

8.    다른 종. 동물, 식물, 그리고 자연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리고 그것과 관련을 맺고 살 수 있을 것.

9.    놀이. 웃고, 놀고,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즐길 수 있을 것.

10.  자신의 환경에 대한 통제. A. 정치적인 것. B. 물질적인 것.

사람들을 서로 가까이 놓음으로써 이 체제는 타자의 곤경 속에서 자신의 곤경을 보는 것을 더 쉽게 만들어준다.

국경 바깥에 있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극히 불균등하고 신뢰할 만하지 않은 연민은 대부분 우리의 극히 불균등하고 신뢰할 만하지 않은 연민은 대부분 우리를 함께 삶의 공통 형태속에 놓아줄 수 있는 모든 효율적인 제도적 구조가 부재한 데서 원인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의 비극적 곤경 속에서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될 가능성을 아주 충분히 인식할 수 있고 또 종종 실제로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은 정말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과 연민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치들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가 알다시피 그러한 연민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법적 구조에 의해 형성된다.

사회가 만약 시간, 나이, 유악함, 질병의 온갖 부침에 종속된 인간적 몸을 가진 건 하등 부끄러울 게 없다는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면 공적 삶에 미치는 원초적 수치심을 감소시킬 가능성이 가장 커진다. 젊은이들에게는 (또래 또는 연장자의) 그러한 몸을 경멸감과 공격성 이것은 너무나 자주 자신도 그렇게 될 가능성에 대한 원초적 수치심을 동반한다이 아니라 존경심과 우정을 갖고 바라보도록 촉구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육제적이고/또는 정신적으로 극단적으로 의존적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주요한 사회적 선으로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문화는 더 이상 시민이 모두 독립적인 합리적 성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인 사회 계약론이 조종 그렇게 주장하는 바와 달리 말이다. 이 사회는 모든 사람이 무엇인가를 필요로 함을,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극단적인 의존 상태에서 삶을 시작하며 많은 사람은 그러한 상태에서 삶을 마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정신박약아와 신체장애우의 존엄성을 지원하기 위한 최근의 노력([장애 아동과 특수 아동의] 특별[차별] 교육 철폐, 적절한 교육에 대한 지원)도 그와 비슷하게 유약함과 연약함을 수치심이나 혐오감 없이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공감 및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 이것은 관심의 확대를 지지한다 이것 중 많은 것은 사적으로, 가족 내부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사회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민 됨 그리고 훌륭한 시민적 판단의 이상을 수용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실제로 연민에 대한 교육을 지지하는 몇몇 구체적인 실천 전략이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들 없이는 둔감하고 감정이 죽은 시민들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며, 그들은 타자의 이미지에 무감각한 내면 세계를 너무나 자주 동반하는 공격적 바람의 먹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예술을 교과 과정에서 제외하는 것은 병리적 나르시시즘을 낳는, 어떤 사안이 인간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을 해당되는 다른 사람과 연관시키는 데 어려움을 가진 시민을 낳는 처방일 뿐이다.

그리고 단지 이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성인들은 항상 경험을 확대하고, 핵심적인 윤리적 진리에 대한 파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미래의 젊은 시민에게 비극은 특수한 중요성을 가진다. 그러한 관객은 이 과정에서 연민을 배우기 때문이다.

특수한 사회적 장애물을 넘어 공감을 촉진시키려면 그러한 장애물과 그것의 의미를 아주 구체적이 방식으로 제시하는 예술작품에 의지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계급, 인종, 국적, 자신과는 다른 성적 지향에 대한 사실을 배워야 한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 이 삶 속으로 끌려들어가야 하며 그러한 투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미디어는 숙고적 도구이다.

게다가 모든 것에서 다산에 가득 찼던 아 어머니여, 얼마나 오랫동안 불임에 불임을 거듭했던가?

이 이유로 경제학자 센은 복지와 개발의 초점은 마치 자체로 어떤 가치를 갖기라도 한 듯 자원 자체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역량이 중요한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을 지원하는 데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두어져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나는 모든 시민에게 헌법의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역량이라는 접근법을 사용해왔다. 그동안 이와 동일한 접근법은 국제기구들의 복지 측정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UNDP가 고인이 된 울 하크의 후원 하에 1990년부터 속간해온 『인간 개발 보고서』 시리즈는 복수형으로 복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경제적 척도들이 몇몇 핵심적인 영역에서 기능할 수 있는 시민 역량에 대해 가진 인간적 의미를 강조해왔다. 거기에는 개발은 인간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경제를 자체에 고유한 생명을 가진 엔진으로 다루기보다는 상이한 종류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들의 상이한 종류의 삶의 영역에서 경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믿음의 오류 가능성이 모든 믿음을 빼버리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되듯이 연민의 오류 가능성이 법적 숙고로부터 그것을 완전히 빼버리도록 유도해서는 안 된다.

법의 인간적 의미와 영향을 이해해 보려고는 하지 않은 채 동등한 보호라는 쟁점에 외적이고 형식적으로 접근한다면 그러한 법률들은 평등에 대해서는 둔감하기 쉬우며 동등한 보호를 위해서는 형식적 중립성으로 충분한 것으로 간주하며 시민들에게 법의 보호라는 진정 동등한 가치를 부정하는 데서 인종과 젠더라는 위계체계가 하는 역할을 놓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내러티브가 더 많다고 해서 항상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데서 나타나는 특수한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이유에서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내러티브를 도입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혐오감은 정확한 공적 선택, 합리적 공감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 경우 그것은 또한 합리적인 자기비판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반면 얼마든지 나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은 건강한 자기비판을 촉진한다.

혐오감과 원초적 수치심은 공적 숙고에 아무런 소중한 것도 제공하지 못하며, 심지 이간을 고급과 저급이라는 두 부류로 나눔으로써 그것을 훼손한다. 모든 감정은 동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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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정의 격동 : 3 사랑의 등정
    from 木筆 2017-01-22 12:00 
    감정이 윤리(학)에 어던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처럼 아무리 부분적이더라도 모두 에로틱한 사랑의 애증병존성과 과도함을 다루어야 한다.하지만 에로틱한 사랑의 제거가 과연 연민과 다른 감정을 그대로 놔둘지 의심할 수 있는 이유가 실제로 존재한다. 친구 사이의 사랑은 모두 실제로는 은폐된 에로틱한 사랑이라는 프루스트의 주장은 너무 멀리 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 두 감정이 너무 긴밀하게 서로 뒤얽혀 있어 만약 에로틱한 사랑을 도덕(
 
 
 

동물성육체를 부여받은 나, 그리하여 그와 반대로 정신이나 이성만 또는 이념만붙잡으려다 초라하게 뒤를 돌아다보며 한숨짓는 우리를 뒤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우리고 하여금 인간의 성숙과 사회의 성숙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와 관련해 누스바움의 연민과 상상력의 정치학존재초인’, ‘탈주등의 등정의 철학이나 온갖 논리와 달리 우리 삶속으로 하강하면서 훌륭한 삶’, ‘살 만한 세상이라는 고전 철학의 문제를 되묻는다.

그렇게 한 것은 무엇보다 먼저 우연인지 필연인지 인정과 욕망’, ‘연민’, ‘사랑의 등정 3부로 구성된 이 책이 구조상 감정에 대한 일종의 순수 이론’, ‘실천 이론그리고 판단력 비판으로 칸트의 3부작과 너무나 흡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독자들도 그렇게 칸트에 빗대 보면 이 책의 위상과 논지의 핵심 줄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물구나무 선 칸트이다. 즉 칸트의 감성을 누스바움의 감정으로 바꾼 다음 칸트의 주장을 거꾸로 세우면 이 책의 구조가 얼추 드러날 것이다. ‘The Intelligence of Emotions’라는 부제만 보아도 금방 확인할 수 있듯이 감정의 지력이니 말이다.

누스바움은 마치 칸트가 중세에 신학의 시녀이던 철학을 만학의 여왕으로 복권시키듯 철학천덕꾸러기였던 감정을 우리 세대의 민주주의와 정치를 위한 만학의 토대로 복권시키려고 한다.

조금 단순화하자면, ‘감정적 동물인 인간의 감정은 일체의 관심을 가진 인지, ‘목적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합목적성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최근 한국에서도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스피노자를 그녀의 독법에 넣어 읽어보면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그의 철학 같은 지성중심주의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성에 대한 그의 규정에 따르면 동물과 유아, 즉 대표적인 인간적사회적 약자들은 지성은 물론 감정또한 가질 수 없으며, 따라서 신에 대한 사랑과도 무관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스바움의 논지를 빌어 이렇게 되물을 수 있지 않을까? 왜 신을 꼭 지적으로만 사랑해야 하냐고.

감정을 이런 식으로, 즉 소중함[가치]의 지각에 대한 지적 반응으로 보려는 결정에 따라 많은 것이 좌우된다. 감정이 지력과 분별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자체 안에 가치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예컨대 윤리적 판단에 대한 설명에서 쉽게 감정을 도외시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사에서는 너무 자주 그렇게 해왔지만 말이다. 그리고 감정을 윤리를 추론하기 위한 체계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도덕은 공평무사한 지력에 의해[서만] 파악되어야 할 원리의 체계로 그리고 감정은 원리에 따라 행동하려는 선택을 지지하거나 뒤집어엎는 동기부여로 보는 대신에 말이다. 일단 감정이 내용안에 참/거짓인 판단, 그리고 윤리적 선택으로 이끄는 좋은/나쁜 지침을 포함하고 있다고 인정해보자. 그러면 아마 앞의 추론 체계에서 감정을 뺄 수는 없을 것이다.

감정 속에는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외적 대상이 나의 행복에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는 판단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그렇게 판단하는 사람의 마음이 불안하게 외적 대상들의 세계로 투영된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 사랑, 두려움, 분노 등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으려면 그러한 애착에 대해 상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즉 그러한 애착의 즐거움과 공포에 대해, 대상에 강렬하고 심지어 강박적으로 몰입하는 이유에 대해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인지적/가치평가적 감정 이론이 맞다면 그러한 주장은 특별한 비중을 갖게 된다. 즉 그러한 주장은 만약 감정을 빼면 단지 감정적 사유에 부수된 심리적 부속물이 아니라 윤리적 사유 자체의 일부가 빠져나갈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단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생명체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연료가 아니라 이 생명체의 생각 자체의 일부, 고도로 복합적이며 복잡한 일부이다.

우리 주장대로 감정을 단지 지성의 버팀목이나 지주보다는 인간 지성의 본질적 요소로 생각해보자. 그러면 정치 문화에서 감정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조건을 촉진해야 할 특히 강력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견해안에는 감정의 발달이 없으면 우리가 정치적 생명체로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의 일부가 사라지리라는 것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논의와 관련해 또한 이 지점에서 감정적 삶의 지형학을 한층 더 자세하게 그려 보이는 데 도움이 되는 세 가지 중요한 구분에 대해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과 욕구, 감정과 기분, 감정과 행동의 동기의 구분이 그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오류였음을 알 수 있다. –감정에 대한 성인의 경험을 구성하는 상념의 지형학적 융기는 삶에서 훨씬 더 이전에 놓인 토대들을, 즉 애정, 욕구, 기쁨, 분노의 경험을 포함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대상에 대한 후일의 지각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성년의 애착 관계는 유아기의 애증의 흔적을 담는다.

실제로 나의 설명은 음악적 경험에 대한 분석을 괴롭혀온 딜레마를 헤치고 나갈 수 있도록 해준다. 여기서는 말러의 음악 및 자신의 음악에 대한 정곡을 콕 찌르는 말러의 진술이 나의 주장을 인도한다. 내가 제시하는 견해가 슬픔, 사랑, 죄의식, 무력감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려는 복잡한 사례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말러의 <죽은 아이를 기리는 노래>에 들어 있는 두 곡에 대한 해석을 제시해보았다.

먼저 감정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며 자족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감정은 우리가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사건에 취약함을 드러낸다. 따라서 훌륭한 삶에 대한 개념 속에 이처럼 인간의 삶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에 대한 대규모의 통제 불가능성을 포함시키면 인간의 주체성 자체를 너무 깊이 손상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감정은 나 자신의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세상을 철저하게 불편부당한 관점보다는 내가 세운 목표와 계획이라는 관점에서 표상한다. 더 나아가 감정은 극히 긴밀하고 친밀한 애착 관계 속에서 발전한다. 따라서 나의 역사적[내력적] 설명은 어린 시절의, 아주 특수한 애착이 후일의 대상관계에 그림자를 드리움을 암시한다.

세 번째로, 감정은 대상에 대한 애증병존적 태도ambivalence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4장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즉 어린 시절의 대상관계의 본성 자체 속에는 사랑과 분노가 도덕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결합된 채 숨어 있으며, 그것은 생존하고 훌륭한 삶을 사려면 타자가 필요하지만 그의 움직임을 나로서는 전혀 어쩌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직접 솟아난다.

따라서 감정은 실제로는 내가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며 자족성을 결여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다.

인지심리학 분야에서는 무력감과 제어력에 대한 연구, 감정을 생명체의 번영과 관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가늠으로 바라보는 연구 등이 그렇다. 인류학에서는 감정을 가치평가적인 사회적 구성물로 바라보는 연구가 있다. 그리고 정신분석에서는 어린 시절의 대상관계에 대한 연구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가진 가치평가적 차원들에 대한 연구가 있다.

이 책 전체에 걸쳐 우리는 슬픔, 두려움, 기쁨, 희망, 분노, 감사, 미움, 질투, 질시, 동정, 죄의식을 몇몇 종으로 하는 유를 우리의 설명 대상으로 삼을 생각이다. 이 군에 속한 것들은 이 점은 2장에서 논의될 것이다굶주림이나 갈증 같은 육체적 욕구나 짜증과 내인성 울병처럼 대상 없는 기분과는 철저하게 구분된다.

무엇보다 감정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대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의 두려움, 희망, 나의 궁극적 슬픔은 모두 엄마에 관한 것으로, 당신과 당신의 삶을 대상으로 한다. 바람도 무엇인가에 부딪히고 혈류 또한 무엇인가를 마구 두드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두려움으로서의 나의 두려움 자체의 정체성은 어떤 대상을 갖고 있는 것에 의존한다.

두 번째로, 대상은 지향적 대상이다. 즉 대상은 그것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진 사람이 바라보거나 해석하는 바대로 감정 속에 나타난다. 감정은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쏠 때처럼 단지 겨냥한 다음 줄을 놓아버린다는 의미에서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세 번째로, 감정은 대상을 보는 방식뿐만 아니라 대상에 대한 종종 아주 복잡한믿음을 구현한다. 두려움을 가지려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간파한 대로나쁜 일이 임박했다고 믿어야 한다.

하지만 감정이 이 특수한 엄마에게 중점을 두도록 만드는 것은 세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놀라운 사람과 엄마들 중에서도 당신이 나의 엄마, 나의 삶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감정은 국소화된다. 즉 감정은 내 삶 속에 자리를 잡고 앉아, 우주 전체에서의 빛과 어둠의 일반적 분배보다는 내 맘속에서 빛과 어둠이 왔다 갔다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다른 한편 그것들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나의 행위로서,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으로서 소중하게 평가된다.

신스토아학파는 슬픔은 가치평가적이고 행복주의적인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즉 당사자가 세우고 있는 목표와 목적 중의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것과 관련된다고. 우리는 아직 이 명제()를 감정과 등치시키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로 미루어볼 때 그러한 판단 자체가 감정의 격동일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이 지점에서 앞서 묘사한 것과 같은 종류의 판단은 감정의 필수적인 구성요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충분한 구성요소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판단 자체도 완전히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 직하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앞절에서의 논의는 그러한 충분조건을 내적인 것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암시한다. 즉 자체가 다른 부분이 존재할 수 있도록 확실히 해주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구성요소로 말이다.

인지하는 것과 마음의 격동은 나의 하나의 동일한 부분에, 내가 세상을 이해하게 해주는 부분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지속적으로 그러한 명제를 받아들이거나 그에 동의하는 것이다. 감정은 정확히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즉 우리는 처음에는 어떤 명제에 동의하거나 인정하며, 그런 다음 우리의 인지적 구성의 일부로 그것이 존재하게 된다. 슬픔의 경우 이미 일어난 일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부정하려는 것이 인간의 성향인 이상 해당되는 명제가 확실하게 자리 잡기 전에 여러 차례 받아들이는 행위를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감정의 삶의 일부이다. 마치 먼저 수용한 다음 뒤이어 유지해 가는 것이 모든 판단의 삶의 일부이듯이 말이다.

이 때문에 크리시포스의 슬픔은 (다른 감정과 함께) 나의 삶의 중요한 일부가 사라졌다는 판단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속상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판단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슬픔은 자신의 가치평가가 참임을 주장하는 셈이다. 그것은 대상이 진정한 가치가 있음을 주장하며, 속상해하는 것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진정 소중한 어떤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한다. 감정은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도 참 또는 틀린 것이 될 수 있다.

종종 좋음에 대한 생각과 내가 함께 살아온 것들에 대한 생각은 무수한 방식으로 얼기설기 얽히며, 이 둘을 분리시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 것이다. 고대의 행복주의는 이러한 복잡한 사태에 대해 아무 한 말도 없다.

감정은 세상을 나의 관점에서 본다. 이 분이 내 엄마라는 사실은 단지 세상에 대한 다른 어떤 사실과 같은 게 아니다. 바로 그것이 전체 상황의 지형학의 구조를 결정하며, 이 요소를 포함하지 않고는 감정을 포착할 수 없다.

그러한 경험 자체는 그러한 내용 주변에 떼 지어 몰려드는 기억의 폭풍과 구체적인 지각을 포함한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 안에 존재하는 것 이상을 덧붙인다. 따라서 어떤 감정의 경험은 인지적 내용으로 가득하게 되거나 빽빽하게 채워진다. 명제적 태도를 가진 견해로는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빽빽하게 채워지는 것이 항상은 아니지만 통상은 슬픔 같은 감정의 경험에 필수적 특징이라는 생각은 정확하다.

이리하여 내가 겪은 슬픔의 많은 측면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국소화된 성격을 가지며, 강렬하며, 상상을 통해 대상에 머문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간단히 말해 일단 내가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것에 대한 애착을 형성하고 나면, 일단 내가 잘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개념과 관련해 이러한 부분을 만들고 나면 그것에 대한 배경적인 종류의 감정 내 견해에 따르면 그것의 어마어마한 소중함을 인정하는 판단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삶을 일종의 직조물로 짜는 가운데서도 지속되며, 행위에 대한 설명에 핵심적이다.

실제로 배경적 감정의 핵심적 형태는 내가 잘 사는 것에 아주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이나 사람에 대한 사랑 또는 애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어떤 것이나 사람의 안녕이 완전히 나의 통제 하에 있지 않다는 요지의 어떤 일반적 믿음과 관련해서 말이다.

배경적 감정은 상처이며, 상황적 감정은 상처 속에 파고든 세상의 칼이다.

감정의 지향성이 나타내는 정교함과 명백함의 수준은 상이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일부 감정은 심지어 성인에게서도 대상에 대한 언어 이전의 유아의 아주 오래된 본능적 견해를 간직하고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감정이 언어적으로 정식화 가능한 내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데, 프루스트는 그것을 감동적으로 논한다. 상실 이후에 우리는 삶의 직조물을 다시 짜고, 우리 목표와 열망을 중심적으로 규정했던 생각들의 시제가 바뀔 때 그만큼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변동 자체가 투쟁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자아의 상실이며, 자아는 망각과 진정을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상상()은 자체가 고도로 구분적인 지향적/인지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명제적 내용에 외재적인 인지적 활동은 감정의 변화에서 역동적 역할을 하며 명제적 내용이 변동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럴 때는 삶의 우발적 사건 자체가 어떤 대상에 대한 애착과 결합해 애착을 가진 사람을 이렇게 만들 것이다. 즉 사랑하는 대상을 손에 넣게 될 때는 강렬한 즐거움 속으로, 그것이 위협받을 때는 두려움 속으로, 그러한 대상에 파국이 밀어닥칠 때는 슬픔 속으로 내몰 것이다. 타인이 대상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해준다면(또는 다른 식으로 표현해, 해당되는 사람이 좋게 되는 것을 막는 취약한 측면을 바꿔준다면)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해를 끼치면 분노를 느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처럼 소중한 대상을 갖고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면 질투를 느낄 것이다. 이 대상과 관련해 경쟁자가 된다면 질투를 느낄 것이다. 일단 장차 문제의 빌미가 될지도 모르는 것을 갖게 된다면 모든 범위의 감정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또는 그렇게 보인다.

간단히 말해 감정을 기준으로 바라본 세계의 지형학은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다. 통제 불가능한 움직임, 그리고 높이와 깊이의 차이들이 그것이다. 다시 한 번 샤를뤼스에 대한 프루스트의 묘사를 생각해보라. 사랑에 빠진 샤를뤼스의 세계는 산악과 계곡으로 가득 찬 풍경에 비교되는데, 마치 상념의 지형학적 융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차이가 나게 된 풍경은 아무런 애착도 갖지 않았던 이전의 삶의 평탄한 벌판과 대조를 이룬다. 거기서는 어떤 생각도 급박하거나 중요한 것으로 우뚝 솟거나 어떤 가치평가도 다른 모든 것 위로 돌출하지 않았다.

감정과 욕구, 감정과 분위기, 감정과 행동 욕구 사이의 구분이 그것이다.

즉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믿음은 인간, , 쥐 등 온갖 다양한 동물 사이에서 우울증적 감정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우울증적 감정은 복잡한 가치평가를 포함해 인지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습 능력부터 급사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위험천만한 행동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셀리그먼의 이론은 인지적/가치평가적 관점을 옹호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력감 및 상실과 관련된 특수한 내용 때문에도 인간과 동물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우리 설명에 중요하다.

1) 시간적 참조 사태 또는 사건 또는 행동과 관련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방향 설정에 의해. 2) 자야-타자 구분에 의해. –우리는 사건을 자신에게 좋은 것/나쁜 것, 따라서 타자에게 좋은 것/나쁜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3) 좋은 것-나쁜 것이라는 구분에 의해. 따라서 예를 들어 타자들의 현재의 운과 관련된 감정으로는 주요한 네 점주를 구분할 수 있다. a) 타자에게 좋은 사건을 좋은 것으로 보는 감정. –축하하고 공감하며 즐거워하는 감정이 그것이다. b) 타자에게 좋은 사건을 나쁜 것으로 보는 감정. –질투하고 앙갚음하려는 감정. c) 타자에게 나쁜 사건을 나쁜 것으로 보는 감정. –측은지심 또는 연민. d) 타자에게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보는 감정. –앙심을 품고 고소해하기.

인지는 생각하고 있는 것에 최소한의 자기-연루 또는 적은 판돈만 걸려 있을 때는 상대적으로 차가운 것일 수 있다. 인지는 또한 뜨겁거나 감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오틀리는 맨들러가 선구적으로 제시한 생각을 수정하고 발달시키는데, 그에 따르면 –‘가늠뿐만 아니라– ‘갈등방해가 감정에 대한 분석에 핵심적이다. 감정은 행위 주체의 중요한 목표와 관련된 환경에 대한 가늠이라는 라자루스의 기본적 생각에 오틀리는 인지는 그러한 목표의 지위에서의 일정한 변화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덧붙인다. “감정은 어떤 심리적 경향이 정지되거나 부드럽게 흘러가던 행위가 방해받을 때 발생한다.” 종종 그는 가늠에서의 변화를 촉발하려면 세계로부터 무엇인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말로 그의 입장을 요약한다. 그는 종종 가늠에서의 변화는 생명체 자체에 의해 어떤 순간에든 개시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러한 견해는 최종적으로 이렇게 진술될 수 있다. 즉 감정은 어떤 중요한 목표를 향한 진전 가능성의 변화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종류의 설명은 인간이 아닌 동물의 감정에 대해서는 불완전하지만 분명히 인간보다는 동물에 대해 훨씬 더 완전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 특히 시간의 지속에 대한 감각을 결여한 동물은 인간보다 배경적 감정은 훨씬 덜, 상황적 감정은 더 많이 가졌을 수 있다.

특히 그는 습관화된 화들짝 놀람은 유기체를 변화시키며, 그리하여 뒤바꾸기가 아주 어려움을 보여준다. 일단 동물이 화들짝 놀래키는 자극에 의해 조건반사화되면 오직 아주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재조건반사화에 의해서만 다시 조건반사에서 풀려나올 수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궁극적으로 감정적 습관의 집요함, 그리고 변화에 대한 끈질긴 저항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항상 아주 조심스러웠으며, 항상 모든 장면을 냉정하고 무관심한 구경꾼으로서 묘사했다.. 본인이 주인공이었지만 자신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그는 삶에도 그와 동일한 중립적 어조로 접근했던 것 같다.”

먼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내용을 강력하게 주장해야 한다. 즉 인지적 가늠은 모두 성찰적인 자기의식의 대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동물(그리고 인간)은 자기의식 없이도 위협적인 것을 그렇지 않은 것과, 달가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다. 대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동물은 의식적 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을 갖고 있다. 즉 동물에게는 세계와 비슷한 어떤 것이 존재하며, 세계를 지향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동물의 행동에 대한 설명에서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논한 일부 동물은 도무지 자기의식이 없지만 감정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기의식을 갖고 있지만 항상 그것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위협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다. 모든 경우에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식화하지 않고도 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성찰적으로 면밀히 따져보지 않고도 말이다.

어쨌든 그러한 절차가 인간의 사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배경적 감정과 상황적 감정 사이의 구분을 낳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동물도 일반적 사유 능력을 갖고 있고 이를 일시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만큼 두려움, 사랑, 분노 등의 배경적 감정이 동물들이 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데서 적어도 일정한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어떤 것이 중대한 의미가 있다거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러나는 인지적 활동이나 어떤 것을 그렇게 보는 방식은 많다. 즉 회화적 방식으로 상상하기, 음악적 방식으로 상상하기, 춤과 관련해 몸동작을 이용한 형태로 상상하기 등. 이것은 모두 언어적 상징체계로 환원 가능하거나 곧바로 번역 가능하지 않으며 또한 언어적 재현 방식이 가장 복잡하거나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자리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욕구는 대상에 고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치에 대해 무관심하다. 감정은 대상의 가치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포함한다. 그것은 자체에 내재적이다. 그리고 실체로 가치에 대한 이 생각은 대상을 특징짓기 위해 감정이 사용하는 핵심적 방식이다.

감정에 핵심적인 것은 대상에 투여되는 가치이다. 따라서 감정은 가치평가적이며 (어쨌든 어느 정도는) 대상에 대해 유연하다.

감정은 여전히 내가 가치 있고 중요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당혹감, 우울, 득의양양, 침착함 같은 기분은 이 특징을 결여하고 있다. 실제로 모호하거나 아주 일반적인 대상을 가진 감정을 기분과 구분하기는 매우 어렵다. 만약 어떤(모호한) 위험이 임박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 내용이라면 일반적으로 무서움을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이 모호한 대상을 가진 감정이 될 것이다. 심지어 그처럼 매우 일반적인 또는 모호한 대상이 부재하는 만큼 기분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삶이 진행되는 방식이나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아주 일반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일반적인 대상을 가진 감정이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즐거움은 기분 같고 정말로 대상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어떤 것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은 일종의 희열 같은 것이 그것이다.

간단히 말해 감정은 나의 목표와 그것의 지위에 대한 인정이다. 따라서 세계가 그러한 목표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하도록 만드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욕망은 모두 자신의 대상이 좋은 것이라는 지각을 포함할 것이다. 하지만 좋다고 하는 모든 지각이 직접 행동을 이끌어내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행동을 믿음이나 판단 그리고 욕망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종류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다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감정은 판단이지만 불활성 판단이 아니다. 가치평가적 내용 때문에 다른 믿음과 달리 동기부여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다른 한편, 목전의 상황을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끌어들이지 않기 때문에 또한 욕망과도 다르다.

하지만 감정의 사회적 가변성의 정도와 본질에 대해 일정한 인식을 갖고 있을 때만 감정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 극단에는 인규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종종 마치 한 사회의 감정적 레퍼토리는 속속들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듯이, 생물학이나 삶의 공통적인 상황에 의해 감정의 구성에 강요되는 제한은 거의 없는 듯이 말한다. 최소한 종종 그러한 공통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호기심이 결여된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보통 다른 사람 처지에 있는 게 어떤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으며, 아동기 초부터 지속적으로 이 능력의 획득 훈련을 받는다. 이 관점주의적 사유는 인간의 감정적도덕적 삶에 근본적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이 모든 인지적 차이는 자야 개념, 그리고 자아와 타자 간의 관계라는 개념에서 차이를 낳는다. 우리가 자신을 보는 방식은 우리의 타고난 인식적∙지각적∙통합적 능력에, 하지만 또한 시간성, 인과성에 대한 우리의 특수한 개념에 의존한다. 종과 민족 그리고 가족 관념에. 그리고 선, 정신 그리고 우주 개념에. 또 우리가 타자들과 별개임을 파악하는 정도, 자신을 타자와 동일한 범주의 성원으로 간주하는 정도에. 동물은 상대적으로 초보적인 자기-개념을 갖고 있을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간단히 말해 윤리적∙사회적/정치적 피조물에게서 감정 자체는 윤리적이고 사회적/정치적이며, ‘무엇이 돌볼 만한 가치가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이다.

동물도 무리[사회]를 공유하는 다른 동물에 관한 감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감정을 명명하고 규범적 가치평가의 관행을 전달하며, 그것들은 성원들이 가질 감정의 내용 속에 들어간다. ‘사회적 구성이라는 명제는 가장 개연성 놓은 형태로 보자면그러한 관행들이 구체성을 띨 때 사회의 감정적 레퍼토리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명제이다.

러츠는 이팔루크 문화어업 경제에 기반한 섬 문화는 특히 자연의 위험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섬의 감정적 레퍼토리는 그러한 강박증에 대한 반응으로 발전해왔다고 주장하는데, 상당히 개연성이 있다.

예를 들어 핀란드인들은 숲, 엄청난 자연에 직면한 인간 개인의 왜소함과 하찮음에 대한 고독한 명상과 관련된 감정을 집중적으로 함양하며 그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이처럼 특수한 경험을 위한 조건은 캘커타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타인들과 긴밀하게 협력해야 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 길을 가며 자기 주도적인 기획을 추구할 수 있다.

확실하게 자기 통제 하에 있지 않은 외적 재화를 더 놓이 평가할수록 두려움, 슬픔, 분노, 시기, 질투, 희망 같은 온갖 종류의 감정을 느낄 기회도 더 많다는 스토아학파의 생각은 정확한 것이었다(세네카 말을 빌리자면 만약 희망을 그칠 수 있다면 두려움도 그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들은 명예, , 육체적 아름다움, 건강, 우정, 아이들, 정치권력의 중요성과 관련해 상이한 규범적 가르침을 갖고 있다. 따라서 분노, 질투, 두려움, 사랑, 슬픔에서 많은 차이를 가진다.

우리가 살펴본 감정적 변형의 다섯 가지 원천이 모두 규범적 판단의 이 차이들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물질적 조건이 분노를 멀리하려는 우트쿠 족의 바람을, 사랑에 너무나 많은 초점을 두는 미국의 여유로운 삶을, 로망스보다는 연민을 위한 여지를 더 많이 가진 이팔루크 족의 삶을 형성한다. 형이상학적 믿음(또는 그것의 부재)이 슬픔에 대한 발리인들의 혐오를, 사랑을 구원과 연관시키는 미국인의 태도를 형성한다. 관행과 판에 박힌 일상의 일 또한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이 눈을 응시하거나 로마인들은 당신의 사회적 환경에서는 관례였기 때문에 적을 위협하거나 한다. 언어도 아마 일정한 역할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낭만적 사랑을 가리키는 특정한 용어의 부재, 그리고 파고라는 용어가 양육의 핵심적 경험과 관련해 가르쳐지고 충족되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은 이팔루크 족이 낭만적 사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미국적 믿음을 왜 공유하지 않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론 한 문화 안의 모든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가, 여성과 남성은 어떠해야 하는가, 상이한 계급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사회적 규범은 사회 전체든 아니면 특수한 사회적 행위자에 대해서든 감정의 범주를 속속들이 형성한다.

마지막으로 감정의 어휘 자체도 사회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모든 알려진 사회는 사랑, 두려움, 슬픔, 분노, 질투, 선망, 그리고 몇몇 다른 것 등 주요한 감정의 유형에서 몇 가지 변형태를 갖고 있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심지어 커다란 유적 범주 수준에서도 우리는 문화 간의 완벽한 일대일 대응관계를 발견할 수 없는데, 문화들은 감정을 서로 구분하는 요소를 상이한 방식으로 조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팔루크족의 파고는 개인적 사랑뿐만 아니라 연민의 요소를 포함하는데, 이것의 핵심적인 생각은 양육적인 태도로 어떤 것을 필요로 하거나 취약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랑을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는 높은 가치나 특별남과 연관시키는 문화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이 두 감정을 결합시킬 수 없다. 그러한 한 내가 방금 커다란 유적 범주에 대해 제시한 목록은 편협하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로마인들이 좋은 것/미래라고 분류한 것이 과연 정확히 나의 학생들이 현재의 것/나쁜 것으로 통일적으로 분류한 분노와 동일한 유적 감정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는 개인의 감정에 대한 설명의 핵심적인 부분을 제공해주며, 인지적/가치평가적 이론은 감정적 삶의 이러한 측면을 조명해줄 완벽한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 자체가 쿠키 만드는 틀로 수많은 쿠키를 찍어내듯이 일련의 동일한 인간을 판에 박듯이 찍어내는 권력 기계가 아니라 개인이 최소한 제법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일부 가질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해주는 격렬한 논쟁과 상당한 다양성의 장면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또한 직관적으로 개인적 유형들은 최초의 그리고 몇몇 경우에는 주요한 문화 전달의 매체임을, 그리고 문화는 개별적 아이의 삶 속에 들어갈 때만 전달 가능함을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감정을 깊은 사랑의 역사, 보호와 위안에 대한 갈망의 역사, 위안의 원천이 멀리 떨어져 있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분노의 역사, 나의 공격성에 대한 두려움의 역사, 죄의식과 보상해주었으면 하는 욕망의 역사 속의 한 가닥으로 파악하지 않고는 나의 슬픔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슬픔 자체는 그러한 역사 전체의 흔적을 담고 있다. 배경에 숨어 있는 다른 감정들은 그것에 특수한 내용과 인지적 특수성을 부여한다.

스토아학파는 감정을 범주화하면서 시간적 범주로서의 과거를 뺐다. 이 학파의 어휘에는 과거의 사건을 겨냥한 감정을 위한 여지가 전혀 없다. 더 중요하게는, 이 학파는 또한 과거의 사건, 특히 유아기와 아동기의 사건이 현재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부각시키는 데 실패하고 있다. 여기서 이들의 너무 지적인 유형의 인지주의가 감정의 특수한 감정적 내용을 완전히 인식하는 것을 막고 있다. 철학에서 감정에 대한 인지적 설명을 옹호하려는 최근의 몇몇 탁월한 시도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데, 그것들은 감정을 과거로부터 단절시키고 어떤 사람이 당면한 상황에 대한 현재의 입력에 의해 완전하고 신뢰 가능하게 규정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감정이 유아기와 아동기에 뿌리내리고 있는 모습에 대한 일반적 설명 이것은 또한 특수한 감정의 역사를 분석하고 그것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의 개요를 그려 보려고 할 것이다. 나는 발생론적 명제와 인과적 명제를 동시에 제시할 것이다. 즉 후일의 삶에서 갖게 되는 검정은 자신의 안녕에 중요한 대상들과 인지적 관계를 맺는 것으로 처음 유아기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역사는 후일의 감정의 경험에 다양한 특수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러한 연구 결과들은 비록 기원이나 지금도 계속 작동하고 잇는 많은 기능에서는 적응적으로 합리적이지만 감정이 종종 또한 과거의 이미지를 감정에 투사할 때 현재의 대상에 부응하는데 실패한다는 의미에서 비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해준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처럼 경직된 태도는 또한 윤리적으로 되려는 또는 윤리적인 아이를 만들려는 모든 시도에도 여러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나는 일군의 극히 일반적인 윤리적 목표를 위해 대조적인 발달 유형을 검토할 것이다. 이러한 규범적 쟁점들에 대한 탐구는 가정에 대한 이해에서 그리고 감정의 발달 자체에서 상상력이, 따라서 내러티브적 예술이 중요한 역할을 함을 보여줄 것이다.

위니콧은 정말 말 그대로 보다 건전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으로, 인간의 다양성과 상호작용에 보다 진실하게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화가 묘사하는 것은 유아의 전지전능함, 세계가 자신의 욕구를 중심으로 돌며 완전히 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치된다는 유아의 생각이다.

안아주기라는 그의 개념은 영양 공급, 세심한 돌봄, ‘촉진적 환경의 조성을 포함한다. 위니콧이 지적하는대로 상당히 큰 힘이 되는 촉진적 환경은 유아의 전지전능함(이것은 또한 완전한 무기력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아이가 관심의 중심을 차지할 것을 요구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이 충족되고 인정되는 환경을 말한다.

위니콧의 말을 빌리자면 안겨 있는 유아는 …… 무한히 떨어지는 것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조금만 잘못 안아도 아이는 무한히 떨어진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처럼 극심한 무력감은 유아의 삶에서 불확실성, 불안, 분노가 나타날 여지를 아주 크게 만든다.

생물학자 허디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의 유아는 품에 안겨 듬뿍 사랑받는 거에 대한 거의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갖는데, 그런 식으로 사랑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품에 안겨 있는 것을 통해 유아는 세상 속에서 살아갈 의지를 갖게 되며, 세상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적극적 행동을 지원해줄 수 있는 정도로 충분히 상냥하다는 확신을 발달시킨다.

따라서 수치심과 나르시시즘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먼저 자아가 혼자인 것으로, 별개의 존재로 그리고 작은 존재로, 그리고 이어 장대하게, 완벽함을 지향하며 자신의 이상과 다시 결합하려고 애쓰는 것으로 경험되면서 말이다.”

로진의 잠정적 결론은 이렇다. 즉 혐오감에서 핵심적인 생각은 만약 동물의 분비물의 동물성을 받아들이면 우리 자신이 동물적 지위로 격하될 것이라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대상을 피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도한 일반화는 의문의 여지없이 우리 조상들을 진짜 위험한 것을 멀리하도록 이끄는데 보다 성공적으로 기여했다. 오래 전에 니체가 말한 대로 과도한 일반화를 거부하고 어떠한 일반화도 하기 전에 각각의 특수한 대상을 탐구하는 종은 아마 오래 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아를 혐오스러운 것으로부터 확실하게, 과도하게 일반화해 떼어놓는 것은 자아에게 자신의 견고함과 권력을 확신시켜주는 데 기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원초적 수치심과 관련해서와 마찬가지로 혐오감과 관련해서도 우리의 신체적 구조, 무기력함, 필멸성 및 부패와의 연관성에 대한 우리의 애증병존적 태도가 아이의 발달하는 사회적 삶의 감정을 물들이며, 완강하게 지속되는 몇몇 도덕적사회적 문제들의 씨앗을 뿌린다.

혼자 놀기라는 개념과 과도적 대상이라는 개념 모두 상상()에 핵심적 역할을 부여한다. 부모가 아이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해줄 때 상상력을 행사하듯이 이제 아이는 자기가 자신의 위안이 되는 것을 즐기며, 안전을 보장해주는 가시적 자원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안전한 세계를 상상한다.

따라서 사랑, 불안감, 분노 그리고 종종 미움은 하나의 동일한 인물에 의해 촉발된다. 그 결과 고통스런 충돌이 불가피해진다.”

즉 이 단계의 발전에서 가장 강력하고 어느 정도는 보편적인 요소는 애증병존적인 사랑/분노로, 이는 수치심과 시샘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이 감정들이 과연 좁은 의미에서 성적인지, 얼마나 그런지 아니면 특별히 성적 질투 포함하는지는 사회와 개별 사례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인간적 사랑의 애증병존성 얼핏 이것은 우리가 동물과 다른 것의 나쁜 특징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 이 또한 인간적 사랑의 강도와 창조성의 원천일 수 있음을, 자신의 비순수성을 발견하는 끔찍한 순간이 또 다른 사람의 욕구를 인정하기 위해 진정으로 밖을 향하는 것의 원천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대신 가차 없는 나쁨이 자신의 자아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이 아이의 원초적 반응이었다. 몸을 숨기고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자신의 분노에 대처할 방법이 없으며, 그리하여 대부분의 아이가 분노와 시샘을 물리치기 위해 수행하는 투쟁을 겪기를 거부한다. B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제, 나중에야, 투쟁에 가치가 있을 수 있음을 알겠어요. 물론 처음에 일이 잘돼야 하지만 말이죠. 요약하자면 나 자신의 문제는 결코 치루지 않았던 투쟁을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죠.” 도덕적 위기는 사형선고처럼 느껴졌으며, 그는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위니콧은 그는 배상 능력으로 어수선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 배상이라는 현상을 사용하고 있음을 가리킬 수 있는분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이는 물론 도덕()에 대해서는 명백히 무능력해졌다. 도덕()은 배상 능력의 사용, 다른 사람의 인간성에 대한 존중 그리고 타자의 곤궁에 대한 배려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불완전한 것은 나쁘다는 것을 강력하게 강조하고, 완벽하고 관용을 모르는 부모의 이미지를 통해 원초적 수치심을 강화시키는 것은 모두 아이의 도덕적 위기를 도덕적 죽음을 낳을 정도로까지 악화시킬 수 있다. 다른 한편 자비로운 안아주기는 아이가 배상 노력으로 공격성에 맞서 싸우도록 격려해준다. 이 일이 일어나려면 부모가, 아이가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아이에게 두 명의 동등하게 인간적인 형상이 나눌 수 있는 미묘한 상호작용같은 것에 쾌감을 느끼도록 생각을 북돋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이것은 예를 들어 아이가 하는 놀이와 창조적 노력에 기쁨을 표시해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타인들 안에 있는 인간적인 것에 대한 아이의 사랑을 형성해줄 수 있는 관계를 창조하려면 특정한 유형의 안전, 즉 완벽하고 무자비한 아버지가 저 놓은 곳에서 모든 의무를 지시하는 유형의 엄격한 체계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안전을 포기할 것이 요구된다. B가 말하는 대로 대등함과 관련해 걱정스러운 것은 그렇다면 우리는 둘 다 아이라는 것으로,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즉 아버지는 어디 있는가?”

초도로우는 이 요구는 세계의 많은 문화의 남성의 발달사에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것은 나쁜 것이며, 어른이 되려면 부모와 떨어져 제 할 일은 제가 알아서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배우기 때문에 남성은 종종 상호성과 유희성을 보여줄 수 잇는 자신의 인간적 능력에 대해 수치심을 보이도록 배우게 되는 반면 여성은 어른이 되려면 지속적인 상호의존 관계를 가져야 하며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감정은 적절하다는 메시지를 부모에게서 받을 가능성이 더 크게 된다.

이와 다른 방향에서 보자면, ‘안아주기와 상상적 놀이 능력이 질투의 포기 및 타인들의 적법한 요구의 수용을 지지하는 걸 볼 때 그것들을 아이의 발달의 중요하고도 매력적인 부분들로 볼 이유가 존재하는 셈이다. 발전 자체에 대한 설명에서 주어진 이유들에 덧붙여 말이다. 완벽함과 원초적 수치심을 강조하는 B와 같은 방식의 양육이 타인을 자체에 고유한 목적을 가진 존재로 존중하거나 배려할 수 없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걸 볼 때 그러한 양육에 비판적일 수 있는 추가적인 이유가 존재하는 셈이다. B의 슬픈 발달사 자체에 의해 주어지는 이유에 덧붙여 말이다. 이와 비슷하게 혐오감의 이상비대화를 조장하지 않으며, 나중에는 혐오감을 다른 아이나 집단에 투사하는 것을 저지하는 부모의 노력을 지원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배변 훈련이 모든 사람에 대한 존중을 허용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지지하는 걸 볼 때 이 유형의 발달을 지지할 이유가 존재하는 셈이다. 앞서 언급된 심리적 이유에 덧붙여 말이다. 테벨라이트가 연구한 독일 장교들의 발달사가 광적인 반공주의와 반유대주의를 통해 이상비대화하고 원래 여성혐오적인 혐오감의 매개체가 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걸 볼 때 그러한 종류의 유아발달을 피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존재하는 셈이다. 비록 그와 다른 상황에서라면 그것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말이다.

이제부터 내가 성숙한 상호의존이라고 부를 성숙한 의존에서 아이는 자신이 사랑하고 계속 필요로 하게 될 사람은 자신의 의지의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별개의 존재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아이는 모종의 방식으로 그()에게 의존하는 것을 허용하며 전지전능함을 주장하지 않는다. 역으로 그()의 모종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모종의 방식으로 헌신적으로 그()에게 책임을 다한다.

다른 한편 그는 또한 아이가 유아적 의존을 벗어나 성숙한 상호의존을 향해 발달하려면 배타적이며 국지적인 사랑을 포기하고 점점 더 넓어지며 호혜성과 상호배려에 의해 지배되는 공동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성숙한 의존은 부모의 별개성과 자유에 대한 인정을 포함한다. 하지만 같은 이유에서 그것은 타자들이 부모의 관심을 차지할 수 있으며 보다 일반적으로는 타자들도 욕구를 갖고 있으며 자신처럼 삶의 좋은 것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자유를 공격하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하는 한편 일부 민주주의 또한 과도하게 민족주의적이며 인종주의적이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

아동기에 징벌의 핵심적 목표는 아이의 배상 능력을 지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의 주장이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징벌이 그것을 가장 잘할 것이다. 만약 징벌이 배상 능력을 약화시키는 원초적 수치심을 강화시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도록 촉구해야 하는데, 그것이 아이가 저지른 짓에 대한 적절한 도덕적 감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B에게서처럼 불완전함에 대해 수치심을 가지라고 촉구해서는 안 되는데, 이것은 아이의 인격 속에 경직성과 공포를 만들어내 배상 능력을 지하로 숨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이에게 벌을 주는 부모는 아이를 업신여기는 것 이것은 불안전하다는 것은 거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이 아니라 위엄 있게 다루어야 함을 의미한다. 부모는 배상 능력에 대한 아이의 신뢰를 강화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을 골라야 하는데, 위니콧은 이것을 무엇인가를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임에 대한 점증하는 신뢰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자신이 저지른 것에 대해 배상할 수 있도록 가족적 맥락으로부터 일정한 시간 동안 분리시켰다가 재결합시키는 것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성혐오적 분노와 증오를 품고 있다면 생각의 변화는 행동뿐만 아니라 또한 감정 자체의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은 가치판단에 따라 세상을 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견해는 예를 들어 다른 종족과 종교의 성원에 대한 감정의 영역에서의 도덕 교육을 위해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세상을 바라보는 좋은 방식을 발전시켜 증오가 드러나는 것을 막을 수 있기를 희망해볼 수 있을 것이며, 항상 선천적인 공격적 성향을 억눌러야 한다는 생각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감정이 바뀌기 어려운 것은 습관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인지의 초창기 뿌리 때문인 것으로 본다. 나의 견해는 우리는 감정-생각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바꾸지 않는 것에 많은 것을 투자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견해는 성격에 관한 여러 상 중 모든 감정을 이성의 정언명령이나 무엇이 되었든어떤 사람의 이상의 정언명령과 일치시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너무 단순할 뿐만 아니라 너무 잔인한 것으로 거부할 것을 촉구한다. 인간이 애증병존적이고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 한,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감정으로 미루어볼 때 그러한 목표를 처방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그리고 달성 불가능한 완벽함이라는 규범을 처방하는 것이 바로 B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감정을 망가뜨려 엉망으로 만든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선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 감정적 완벽함을 요구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그렇게 해 항상 정확한 사람에게, 정확한 방식으로, 적시에 등등으로 화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면 그의 견해는 압제적이며, 우리에게서 인간-임이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감정이 내러티브적 구조를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단일한 감정에 대한 모든 이해는 현재의 반응에 어떤 빛을 비추어 주느냐라는 관점에서 그것의 내러티브적 역사가 파악되고 연구되지 않으면 완전할 수가 없다. 이것은 이미 인간의 자기이해에서 예술이 핵심적 역할을 함을 암시한다. (음악작품이든 시각 예술작품이든 문학작품이든) 다양한 종류의 내러티브적 예술작품은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이 감정-역사[내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에 관한 몇몇 진리는 오직 내러티브적 예술작품에 의해서만 언어적이고 텍스트적인 형태로 전달 될 수 있다는 프루스트의 주장은 이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직 그러한 작품만이 감정적 생각의 상호 연관된 시간적 구조를 정확하고 완전하게 보여주며,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부정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탁월하게 포함할 수 있다.

그리하여 위니콧은 예술적 활동은 아기와 엄마, 아이와 가족, 개인과 사회를 매개하는일종의 잠재적 공간으로 개인에게는 성스럽다고 말한다. 엄마가 아이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고 아이의 욕구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머니 본인이 자신의 잠재적 공간을 계발했기 때문임을 주목하라. 다라서 상상력은 건강한 성격, 따라서 세대를 초월한 사회적 안정성의 재생산의 핵심적 부분이다. 아기와 부모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은 아이 또한 다른 사람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게 되면서 내러티브와 이미지들을 이용한 놀이에 의해 핵심적으로 매개된다.

내러티브적 놀이는 불안전함을 즐겁고 유희적인 형상으로 꾸밈으로써 인간적인 모든 것에 대한 원초적 수치심을 약화시키고, 아이가 불완전한 존재의 삶에 대해 일정한 관용, 심지어 기쁨을 갖는 것을 도울 수 있다. 만약 나의 주장이 맞다면 이 발달은 역으로 애증병존성에 맞서는 사랑과 감사의 투쟁에, 그리고 상실의 무기력함에 맞선 적극적인 관심의 투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미학적 활동의 잠재적 공간은 삶의 가능성 중의 일부를 탐구하고 시험적으로 사용해볼 수 있도록 해주는 공간이라고 말해왔다. 비극에 연민과 공포를 갖고 반응하는 가운데 우리는 등장인물들뿐만 아니라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몇몇 절박한 주장을 파악하게 된다. 즉 오이디푸스는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슬픔을 겪게 되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선한 사람이 이런 식으로 슬픔을 겪는 것이 가능하며 우리도 그렇게 되는 것이 가능함을 말이다. 이런 식으로 문학작품의 독자나 관객은 작품을 읽거나 보며, 동신에 세상을 읽고 자신의 자아를 읽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작품은 프루스트 말대로 독자가 특정한 개인적 현실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해주는 광학 기계이다.

음악작품의 표현적 특징은 문제의 음악적 전통과 해당 작곡가의 전작에 대한 상당한 지식 없이는 해독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문학작품에서도 상황은 동일하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비록 아주 일반적인 수준에서 인간에 공통적인 사건들의 문학적 재현은 종종 광범위한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감정을 끌어내는 것을 가능하게 해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랭거에게 음악은 인간적 느낌의 역동적 유형을 상징하는 형식을 담고 있다. –그녀는 이것을 지향성을 참조하지 않아도 형태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 활동으로 간주한다. 감정을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확신하는 레빈슨에게 음악은 어떤 감정 전체를 재현하거나 초래할 수 없다. 하지만 감정의 운동적 측면이나 정동적 측면은 재현하거나 초래할 수 있다. 레빈슨은 이 정동적 측면을 완전한 감정에 필수적인 것으로, 믿음이나 판단과는 인과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 감정을 식별할 수 있는 믿음이나 판단 없이도 충분한 것으로 다룬다.

하지만 이 모든 견해의 난점은 한슬릭이 맞다는 것이다. 즉 감정에는 판단 또는 판단과 아주 흡사한 모종의 지향적 활동이 필요하다. 그리고 감정에게는 각자에 특징적인 인지적/지향적 내용을 참조할 때만 개성이 부여될 수 있다. 랭거는 설명에서 지향성을 빠뜨리기 때문에 감정에 대해 아주 특이한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그에 상응하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에 비해 훨씬 덜 흥미롭다).

음악은 언어와 문화에 의해 크게 분리되어 잇는 사람들이 같은 음악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반응이 자동적이거나 별로 애쓸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지는 않다. 일본 음악이나 인도 음악의 표현적 내용은 서구인들의 귀에는 분명 처음에는 당혹스럽다. 다른 어떤 교향곡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말러 식의 교향곡의 표현적 내용 또한 마찬가지다. 몇몇 민요는 복잡한 교향곡 작품과 달리 쉽게 표현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톨스토이의 지적은 정확하다. –그리고 바로 이 의미에서 단순성 때문에, 즉 도로게시판을 헨리 제임스 소설보다 훨씬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휠씬 더 큰 보편성을 가진다. 그리고 일부 복잡한 작품은 다른 작품보다 더 쉽게 즐길 수 있음 또한 명백하다.

심리학에서 감정에 대한 행태주의적 견해가 인지주의적 견해로 대체되던 것과 동일한 수십 년 동안 또한 그와 동일하게 당시 지배적이던 음악적 행태주의’ –음악 학습과 음악적 행동은 인지적 행위는 언급하지 않고 자극과 반응에 호소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는 입장음악적 인지주의’, 즉 음악의 획득과 음악적 기능은 음악이 펼쳐지면서 점점 더 증가하는 정교화의 여러 수준에서 복잡한 인지적 기능을 포함한다는 견해로 대체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음악을 본질상 음악 외적인 단순한 인지 도구로 다루기를 거부하면서 음악적 경험의 인지적상징적 복잡성을 보전할 수 있는 설명이다. 이 설명은 음악은 우리의 감정적 깊이와 내밀한 관계 실로 예술 중에서도 특수한 강도와 절박성을 갖고 있을 연관성를 맺고 있다는 우리의 직관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음악은 문학보다 덜 모호하다. 실제로 이것은 음악은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감정의 상처에 보다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접근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음악은 문학작품과 같은 방식으로 대상을 재현하거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 결과 음악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우리처럼 공간과 시간이라는 일상적 세계에 사는 캐릭터의 행동이나 고통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보편적 형태의 감정의 결정화이다. 이 사실은 모종의 방식으로 음악의 감정적 잠재력, “사물의 진상을 탐구하며, 외양을 넘어설 수 있는 음악의 능력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음악적 경험에서 실제 느낌이 주는 전면적 충격으로 우리를 후려지는 환등상 같은 구조를 보게 된다.

즉 꿈으로서의 음악적 감정의 암시적 이미지의 안내를 따라가되 꿈의 소재를 구현하는 것은 음악 자체의 형식이라는 생각을 시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놀랄 것도 없이 이 세 명 중 오직 말러만이 이 점을 올바로 파악해 반복해서 내용과 형식은 해소 불가능하게 섞여 있으며”, 삶의 고통과 슬픔은 실제로는 음악 자체 속에, 독특하고 엄밀하게 말해 해석 불가능한 형식 속에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작품의 ‘~에 관한 것임은 형식적 정교화와 불화하지 않는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에게 교향곡은 동원가능한 모든 기술적 수단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음악은 그 자체로는 원초적이거나 태곳적의 것이 아니다. 음악이 표현하는 내적 세계 또한 복잡한 지향성과 내용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견해는 큰 단점을 드러낸다. 하지만 음악이 의식적인 자기이해 아래 놓여 잇는 인격의 부분을 표현하기에 특히 편리한 장르라는 그의 말은 무엇인가 심오한 것을 건드리고 있다. 음악은 상징적 구조가 빛의 고통스런 광선처럼 직접 인격의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 뚫고 들어가는 식으로 습관, 용법, 그리고 지성화를 우회할 수 있다. 우리가 언어에서는 익숙한 서사적이고 대상 지향적인 구조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음악은 종종 아동기의 확실한 형태가 없는, 태곳적의, 극히 강력한 감정적 소재와 친화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음악은 그것을 예리하게 하고 밖으로 표현하면서 정확하게 가다듬는데, –말러는 이를 결정화라고 부른다여전히 태곳적 형태로 생각에 완전히 가려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언어 그리고 시간 및 인과성의 일상적 구조가 더 이상 장악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한 어둠의 세계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음악이 그러한 어둠의 흐릿한 형상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음악적 경험과 지적 통제나 조작의 결여 사이의 이 연관성은 내포 청취자의 경험이 집중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지는 인지적 활동인 동시에 또한 놀라운 수동성 중의 하나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음악적 경험을 여성적이고 여성화시키는 것으로, “세상의 정신에 의해 이용되는 것으로 바라보는 말러의 놀라울 말한 이미지가 나오는 것이다.

음악(어쨌든 형식적으로 작곡된 음악)은 일상적 몸짓이나 움직임보다는 시에 더 가깝다. 음악의 감정적 힘은 표현 매체의 압축적이고 형식적으로 복잡한 사용과 분리 불가능하다. 따라서 문제의 시적(음악적) 전통에 무지한 사람에게는 오직 가장 피상적인 이해 혹시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만이 가용하게 된다. 우리는 시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특히 시적인 방식을 갖고 있으며, 이 방식은 특정한 시적 전통에 내적임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렇다면 감정을 표현하는 특히 음악적인 방식이 존재하며, 그것은 특정한 음악적 전통에 특수함을 인정하기를 왜 그렇게 주저하는 걸까? 형식적 구조의 표현적 내용은 소통적 전통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주어진다.

작품은 불타는 듯한 고통이 결정화되는 구조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그처럼 불타는 듯한 고통을 경험하는 내포 청취자를 구성한다. 또는 –< 2번 교향곡>의 일부의 감정적 구조에 대한 그의 묘사를 이용하자면좋고 훌륭한 모든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구현하는 형식을 포함할 수 있으며, 바로 이 형식 덕분에 적막함을 세게 얻어맞아 땅바닥에 고꾸라지는것처럼 경험하는 청취자를 구성한다. 그것은 인간의 일상적 삶의 영위의 하찮음을 초월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구현하는 형식 그러한 초월의 가능성에 대한 수용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으며, 이 구조 덕분에 천사의 날개를 타고 최고의 높이까지 올라가는내포 청취자를 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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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정의 격동 : 2 연민
    from 木筆 2017-01-22 11:57 
    롤즈는 칸트가 훌륭한 윤리적 행위 주체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장치로부터 연민을 갖도록 하는 감정을 빼뜨린 것에대한 쇼펜하우어의 비판에 응답하면서 그러한 결합이 실제로 쇼펜하우어가 칸트적 합리성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의 모델을 제공해준다고말한다. 롤즈는 자기이익과 무지의 결합을 연민과 정보의 결합보다 선호하는데, 자신의 전략이 더 많은 확실한 결과를 낳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그는 이 두 전략이 아주 내밀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한다.그
 
 
 

1.

‘라디오 소리가 들립니다. 어린 부모가 탯줄을 달고 있는 아이를 피시방 화장실에 유기했습니다....사지도 않을 사람이 머리통만 두드리고 가는 오후입니다....심지가 타들어가 터지는 폭탄처럼 저렇게 입술이 바짝바짝 탑니다...바나나가 익어갑니다. 그 옆에서 수박도 함께 꼭지를 말리고 있습니다.‘ – 이 내용은 ‘라디오‘라는 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본 것이다. 아마 시인은 라디오로 이 뉴스를 들었을 것이며 마음을 괴롭히며 어른 거리던 시상을 모았을 것이다. 읽어내리면 아무렇지도 않거나 시에서는 오히려 튀어보이는 대목이, 사진의 음화처럼 거꾸로 보면 충격이 와 닿는다. 이런 틀은 ‘근원적 골짜기‘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된다. ‘ 자신의 아파트 난간으로 아이들을 떨어뜨렸던 여자가 있었다. 사과나무는 자신이 떨어뜨린 사과에 대해서 생각중이다. 어쩌면 구름을 바라보는 당신의 습관도 조금은 바뀌어야 할지모른다. 사과나무를 이해하기 위하여 바람이 불어오는 골짜기를 쳐다봐야 한다.‘고 말한다.

생활이라는 생각이라는 시집 가운데 덩어리라는 시는 정육점에 걸린 고기.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연상케한다. 사회가 뱉어내는 틀에박힌 삶은 사육, 정육, 그리고 덩어리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사육에서 정육으로 향하는 붉은 길을 도축이라 부른다. 사육의 기술을 소명받은 우리의 삶이자 한계라고 적는다. 결정적으로 무너지기 위해 존재하는 삶. 살인의 기술에 ㄱㅏ까운 무표정한 일상을 살아내는 우리를 묘사한다.


2.

비는 오고 빗방울을 굵어지고, 온갖 구멍들은 물로 채워진다. 온갖 것들을 녹는다. 녹아있는 것들로 존재한다. 7월 휩쓸고 가는 장마처럼 잠ㄱㅕ있다. 잠겨져 있다. 시인에게는 일인용 잠수정이 있다. 비린내를 맡으며 끊임없이 녹고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잠수한다. 녹은 것들의 냄새를 맡아가며 의심한다. 물살을 거슬러 천천히 일정한 속도로 ㄱㅓ슬러 오르는 기술을 배웠다. 빗속에 완전히 몸을 잠그고 걷는 법을 말이다. 그래야 제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은 딴 사람은 없는데 잃은 사람만 있는 판돈같은 이야기와 때린 사람은 없는데 언제나 아픈사람만 있는 이야기로 가득차, 눈코입도 없이 자꾸만 따라다니는 달걀귀신만 득실거린다. 채무의 삶만 있는 세계. 우리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있을 뻔한 이야기)

전기가 나가면 우린 동작을 멈추고 듣기 위해서 눈을 감고, 보기 위해 입을 다문다.(암전) 나머지의 세계에선 죽음의 사이사이 공기가 조금씩 더 무거워진다. 그 피와 살과 뼈를 뺀 나머지가 공기 속으로 녹아들며, 그 공기를 통해서만 적대감과 친밀함을 느낄 수 있다.(나머지의 세계)r 그는 비를 ㄷㅓ 맞는다. 죽은 화분에 귀를 기울인다. 빈틈없이 물을 채운다. 그래야만 더 젖지 않고 녹는 것을, 녹은 것을 냄새맡고 볼 수 있다. 포기만이 정답이다.


3.

그런 그가 화난 사람들에게 돌멩이를 하나씩 들게한다. 가슴에 사무쳐, 눈물이 맺힌 돌멩이를. 여전히 내리 꽂히는 빗줄기. 쇠창살 같은 빗줄기. 맞아도 아픈 그 자리에 비가 내린다. 내리는 빗속에서 더 이상 젖지 않는 것들은 이미 젖은 것들이고, 젖은 것들만이 아는 비의 무게. 우리는 언제나 물의 한가운데서 목마르다. 목마르다. 그러나 웃음. 천국.

껌도 세계적으로 씹고, 침도 세계에서 제일 잘 뱉는 우리 십대가 징표다. 좆나 씨발을 발음하고 침을 덜어내는 여중생 십대가 천국의 아이들이다 (뉴스의 완성, 천국의 아이들) 사라지기 전에만 나타나는 그믐. 구멍을 통해 구멍을 본다. 눈을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다. 구멍에서는 질문들이 끝도 없이 쏟아진다. 지문을 지우는 지문처럼, ㅈㅣㄹ문을 지우는 질문처럼.(그믐, 지나친 사람)


4.

포기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삶을 지속하는 유일한 조건이 된다고 당신에게 질문한다. 질문하고 있다. 너의 웃음만이 당신을 현상할 수 있다.(까다로운 주체) 당대를 과도기로 보는 발전주의자들을 혐오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무너져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웃음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 이상이다. 입맛 없이 우겨넣는 식사같아야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데 소요되는 비용이다.(시 농담을 위한 삽화)


낭떠러지

샤워기의 물줄기에서 이따끔씩 강의 냄새가 난다
강에 사는 것들의 체취를 느끼면서
나는 물살을 역류하는 물고기가 된다

미끌 하며 중심을 잃을 때
꼬리뼈에서 감지되는 낭떠러지
허공으로 뻗친 넝쿨손 같은 것이 잠시 잡힌다

낭떠러지에서는 긴 꼬리의 원숭이가 된다
움켜 쥔 허공은 손아귀를 빠져나가고
나는 지지대를 잃고 결정적으로 추락한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원숭이가 되었다가
떨어지면서 다시 새가 되지만
사실상 떨어지는 내내 나는 온전히 나 자신으로
가장 촘촘하게 추락을 몸에 새기는 중이다.
.

징후와 예후만으로 이루어진 위독의 자리, 훌륭한 칼잡이가 된다는 것, 훌륭한 칼놀림이란 죽이면서 또한 구하는 것. 이라고 시인은 시집이 마무리된 말미 시인의 말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정육에서 덩어리로 향하는 도축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다. 구하면서도 죽이는 것. 죽이면서도 구하는 것. 시인과 시, 시들 그리고 시를 읽는 이들은 할말이 많다. 무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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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요하네의 우산 - ‘아빠는 시인이다‘를 먼저 읽다. 그리고 오늘 아침엔 황정은의 ‘양의 미래‘를 읽었다. 앞은 빛이 비치는 부분을 흰 물감으로 지나칠 정도로 두껍게 올렸다. 뒤는 넓은 수채화에 촘촘히 세밀하게 하나하나를 수채화같지 않게 파서 넣었다. 둘 다 마음의 실금을 더 벌려놓았다.

2. 대리사회/단속사회/감시사회를 차례대로 표지글, 머릿말, 목차, 마무리말 그리고 중간중간을 살펴보았다. 며칠 전에 새긴 존재가 부각되는 것은 아플 때와 나를 잊은 듯 쾌락에 빠졌을 때라고 했다. 우리는 경계에 있으려고 하지 않기때문에 스스로 어디에 있는지, 나라는 존재에 대한 느낌이 없다. 조직의 필터는 백여일이 지나면 생생하게 그 틀이 가지려고 하는 관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거기까지이다. 그 다음을 저자들은 묻고 있다. 자기가 제일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모인 곳이 지옥이고, 아픈 사람만 봐도 아픈 곳이 천국이라는 한 시인의 말이 스친다. 우리는 어쩌면 아파하는 법조차 잊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옥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빠져나오는 데 생각보다 쉬울지 모른다. 쑤욱....

3. 섬이라는 그림이야기를 보았다. 바다와 성이 너무 또렷하여 몇 번을 뒤적였다. 통찰력을 주는 힘이 있다.

4. 할배의 탄생 – 두 할배의 삶을 읽다. 저자의 말미 말이 인상깊다. ‘새롭게 꾸려질 진보는 가난의 구조화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비하에 개입할 길을 먼저 찾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왜 보수화되느냐는 질문에 내놓을 답도 그 언저리에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는 지배자를 향한 선망과 숭배로 이어진다. 자기 속을 들여다 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비하를 깊이 ㅅㅏㄹ피고, 그 사람을 옹호하되 함께 분석한 뒤, 자기 긍정의 에너지를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힘으로 모아내야 한다. 그저 계급과 임금과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어느 시절 어느 순간이든 한 ㅅㅏ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성찰과 직립과 통찰의 실마리가 거기에 있다. 거기서 이어지는 삶은 그것 자체가 실천이다.‘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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