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생태학 위기

1.

[ ] ‘다른 사람에게 선한 행동을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미미하고 상세한 일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 일반적인 선은 깡패, 위선자, 아첨꾼들의 변명이다.‘ 일반적인 선이란 자라는 세대에겐 위선의 냄새를 풍긴다. 712

[ ] 인식론의 병리:

[ ] 우리 마음은 시차가 심도 있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수학적 계산을 하도록 훈련되어 있거나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그리고 훈련을 위한 많은 근거들이 존재한다. 마음은 결단이나 여러분의 의식 없이 이런 묘기를 수행한다. 여러분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이 예를 내가 말하려는 오류의 패러다임으로 사용학 싶다. 그리고 이것은 인식론적 오류의 만질 수 없는 성결과 인식론적 습관을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예증한다. 721 일상적인 사고 속에 나는 여러분을 본다.....정신이상은 이를 너머서는 정신 요법이나 어떤 커다란 새로운 경험으로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721

[ ] 마음이란: 1. 시스템은 차이들을 가지고, 차이들을 근거로 작동할 것이다. 2. 시스템은 차이나 차이의 변형이 전달되는 통로의 닫힌 고리 또는 네트워크로 구성될 것이다.(뉴런에 전달되는 것은 충동이 아니라 차이에 관한 소식이다.) 3. 시스템 내의 많은 사건들은 방아쇠를 당기는 부분의 충격보다는 반응하는 부분에 의해 활성화될 것이다. 4. 시스템은 항상성을 향하거나 폭주하는 방향으로 자기-교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자기-교정은 시행착오를 내포한다. 724

[ ] 이제 컴퓨터가 생각을 하느냐는 문제를 잠시 살펴보자.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각하고‘ ‘시행착오‘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 더하기 컴퓨터 더하기 환경이다. 그리고 인간과 컴퓨터와 환경 사이의 선은 순전히 인위적인 가상의 선이다. 그 선은 사고하는 시스템의 경계가 아니다. 생각하는 것은 시행착오에 참여하는 전체 시스템이며, 그것은 인간 더하기 환경이다. 723

[ ] 이제 우리는 서구 문명의 인식론적 오류들의 일부를 보기 시작한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일반적인 사고 풍토에 따라 다윈은 자연선택과 진화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는데, 그 이론에서 생존 단위는 가계, 종, 하부 종, 또는 그와 비슷한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늘날 이것이 실제 생물학적 세계에서의 생존 단위가 아니라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생존 단위는 유기체 더하기 환경이다. 우리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 자신의 환경을 파괴하는 유기체는 자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만약 이제 우리가 다윈의 생존 단위를 수정해서 환경과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포함한다면, 아주 이상하고 놀라운 동일성이 출현할 것이다. 진화의 생존 단위는 마음의 단위와 동일한 것으로 드러난다. 725

[ ] 오늘날 육체와 분리되고, 사회와 분리되고, 자연과도 분리되어 있는 총체적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믿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미신‘이라고 말할 사람들을 위해, 나는 그런 미신과 함께하는 사고 습관과 사고방식이 아직도 그들의 머릿속에 있으며 아직도 그들의 사고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것을 즉시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장담한다. 여러분은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지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런데도 여러분이 나를 볼 수 있다는 관념은 여전히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728

[ ] 권력은 타락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것은 난센스다. 사실은 권력에 대한 관념이 타락하는 것이다. 권력은 권력을 믿는 사람을 가장 빨리 타락시키며, 권력을 가장 원하는 것도 이런 자들이다. 분명 우리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권력을 갈망하는 자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으며, 권력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피할 모든 기회를 제공한다. 만약 권력을 믿고 원하는 자들을 타락시킨다면, 그것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 제도이다. 아마 일방적인 권력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하지만 권력의 신화는 물론 매우 막강한 신화이며, 아마 이 세상 모든사람들이 많든 적든 그 신화를 믿을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다면 그만큼 신화는 자기-정당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인식론적으로 정신이상이며, 필연적으로 여러 종류의 재앙으로 나아간다. 729, 730


2.

생태학적 위기의 근원


[ ]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재의 많은 위협들은 모두 세 가지 근본 원인에 기인한다. 1. 기술의 진보 2. 인구 증가 3. 서구 문화의 사고방식과 태도에서의 어떤 오류들, 우리의 ‘가치들‘이 잘못되어 있다. 736 우리는 이 세 가지 근본 요소 모두가 우리의 세계를 파괴하는 필요조건들이라고 믿는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그중 하나를 교정하면 우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믿고 있다. 736

[ ] 현재의 시점에서 가장 치명적인 형태로 우리의 문명을 지배하는 생각들은 산업 혁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환경에 적대적인 우리 2. 다른 사람과 적대적인 우리 3.문제는 개인 또는 개별회사나 개별국가다. 4. 우리는 환경을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그 통제를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5. 우리는 무핞히 팽차하는 ‘개척지‘ 속에 살고 있다. 6. 경제 결정론은 상식이다. 7. 기술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지난 150년 동안의 우리 과학 기술의 위대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파괴적인 위업에 의해 잘못된 것임이 입증되었다. 게다가 이런 생각들은 현대 생태학 이론하에서도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환경과 싸워서 승리하는 피조물은 자신을 파괴한다. 739


3.

도시 문명의 생태학과 융통성


[ ] 생태학자의 목표는 융통성을 증진시키는 것이며, 이런 범위 내에서 그는 대부분의 복지 계획 입안자들(법적 통제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보다 덜 전제 군주적인 반면에, 그는 또한 이미 존재하거나 창출될 수 있는 융통성을 보호하기 위한 권위도 행사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점(대체할 수 없는 자연 자원의 문제)에서, 그의 권고는 전제 군주적이어야 한다. 사회적 융통성은 석유나 티타늄만큼 귀중한 자원이며, 적절한 방식으로 예산이 짜여야 하며, 필요한 변화를 위해 쓰여야(지방처럼) 한다. 대체로 융통성을 ‘소비‘하는 것은 문명 내의 하부 시스템의 재생(즉 증대) 때문이므로, 결국 이 하부 시스템들이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융통성은 구속받지 않은 변화의 잠재성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 ] 우리는 적극적인 요구보다는 금지를 선호하는 문명 속에서 살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침해하는 변수들에 대항하는 법률(예컨대 독점금지법)을 제정하려고 노력하며, 침해하는 권위에 대해 법률적으로 이름뿐인 처벌을 함으로써 ‘시민의 자유‘를 지키려 한다. 우리는 어떤 침해를 금지하려고 하지만, 자유와 융통성에 대해 알고, 그 자유와 융통성을 좀더 자루 행사하도록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 모른다. 우리 문명에서는, 육체의 변수들을 극한값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육체의 변수들에 많은 융통성을 보유하는 것이 원래 기능인 생리적 육체의 운동조차 ‘관객의 스포츠‘가 되었으며, 사회 규범의 융통성도 똑같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대신하는 경험을 하려고 영화관이나 법정에 간다. 또는 신문을 읽는다. 754

[ ] 성서에서 가장 확실한 말은 바오로가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이며, 이 말은 인간과 그의 생태계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공해와 착취라는 독특한 죄악이 그저 사소한 것이었을 뿐이라거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거나, 최선의 목표를 가지고 저질러진 것이었다고 변명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또는 ‘만약 내가 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했을 것이다‘라는 변명도 마찬가지다. 생태학의 과정은 조롱당하지 않는다. 산중의 사자가 사슴을 죽이는 것은 풀이 과도하게 뜯기는 것으로부터 풀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어떻게 우리의 생태학적 추론들을 생태학적으로 ‘좋다‘고 여겨지는 방향으로 우리가 영향을 주려는 사람에게 전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 자체로 생태학적인 문제다. 우리는 우리가 계획하는 생태계 밖에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생태계의 일부다. 755

볕뉘.

0. 정독할 요량이었지만 메타 이야기를 읽고, 두꺼워 호흡을 조절하다가 그래도 마지막 6장이 하고자할 마음들을 잘 파악할 듯 싶어 읽다.

1. 이 이야기들은 1966 - 1970년에 발표한 글들이다. 하지만 무척이나 간결하면서도 놓치고 있는 우리들의 관점을 예리하게 헤집고 있다. 물론 저자는 그때 그때 느낀 점들 정리한 것들이 향하는 방향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집필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그 관점에서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집약하려고 한 듯싶다.

2. 마음, 기계, 기술에 대한 이야기도 좋은 참조가 되지만, 3절 융통성이란 부분에 대한 그의 강조는 되새겨볼 만하다. 행정이나 법제화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금지를 위주로 하기때문에 사회가 더욱 경직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짚고 있다. 그러면서 그 해결책으로 실험예산, 외줄타기의 심정으로 새로운 실험으로서 행정이 반드시 요소요소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줄타기 밑의 안전망, 실패해도 떨어져도 다시 시할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한다.

3. 그는 시민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문제를 개선시키려는 행정이나 법제화를 실험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의 관객처럼, 영화나 신문을 소비하면서 해소한다는 점을 뼈아프게 짚고있다. 운동은 관람하면서 좋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문제는 영화를 관전하면서 풀리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야기하듯이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을, 풀이 없어지는 것을 막기위해서 합리화시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아닌가 되묻고 있다.

4. 관계는 나 이전에 있다는 말, 유기체는 환경으로 더해져 있다는 말. 그 차이가 마음이고 거꾸로 우리의 생태를 흔들고 있는 그물이 무엇이냐고 되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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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01-09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님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여울 2020-01-09 15:57   좋아요 0 | URL
늘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실거예요^^
 


0. 익숙한 곳에서 몸에 익은 듯 전원을 연결하고 브루투스 자판을 두드린다. 옆에 막 나온 책들은 금방 식기라도 할 듯, 어서 봐달라고 재촉을 한다. 오늘은 금방 가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자정은 활처럼 휘어져 한 것 제 몸을 늘리다가 새벽쯤 황급히 시위를 떠나는 화살을 낳을지도 모를 일이다.

1.

[ ] 사고 과정 전체는 여전히 우리에게 불가사의로 남아 있지만, 나는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밝혀내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튜링, 1951 11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2.

[ ] 만진다는 것은 ‘피부에 닿아서 깨닫는다‘는 촉각의 감각을 말한다. 12 촉각은 무엇보다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적 측면과 직결되기에 나는 촉각 그 자체로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13 춤, 어떤 형태로 가기 이전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춤은 시작되며, 가장 본질적인 것은 내면에 깃들어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바깥으로 밀려 나오면 비로소 형태가 된다 34 세계의 살, 우리, 타자, 세계는 모두 살이라는 존재의 원소를 토대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아와 타자는 서로 얽혀 있다. 살은 가역적이기에 본다는 것은 보인다는 것이고 만지는 것은 만져진다는 것, 다시 말해서 몸은 ‘감각되는 감각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그리하여 봄과 보임, 만짐과 만져짐 사이에 얽힘과 교차가 일어난다. 그는 정신과 몸, 나와 타자의 이분법을 넘어 작동되는 몸을 통해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만들어 간다. 37 건축, 촉각이 가지는 근접성, 친밀성, 진실성, 동일시, 애정의 측면이 배제되면 인간은 무관심, 소외감, 외면성의 영역으로 밀려난다. 수영하는 사람이 물의 흐름을 자신의 피부로 감지하듯, 이미지의 흐름은 강화된 촉감적 감각으로서 이해해야만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다. 38 접촉 경험에 실패한 아이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 행동적으로 서툰 인간으로 성장함을 지적하면서 타인과 생애 첫 의사소통을 시작할 때 인간이 촉각으로 통한 탐색으로 첫발을 내딛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바 있다. 만약 촉각적 경험이 부족하다면 기지 tact를 갖춘 존재로 발달하는 데 실패하고 타인의 욕구에 둔감하며 대처하는 데 서툰 존재로 성장한다고 애슐리 몬터규 ashely montagu의 책 <<터칭>>에서 언급한다. 63 <<촉각, 그 소외된 감각의 반격>>, 유려한 에서


3.

[ ] 베이트슨은 마음의 생태학이란 물질적 형태의 사물들 속에 구현된 패턴, 정보, 관념의 생태학리라고 주장했다...마음이라는 것에 자기-교정적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반응하는 능력을 가진 그 무엇임이 분명했다. 마음은 과정과 패턴을 위해 배열된 다수의 물질적 부분들로 구성된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마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의 물질적 기초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육체에서 마음을 분리하거나 물질에서 마음을 분리하는 전통적 이원론은 잘못된 것이다. 마음은 다수의 유기체들뿐만 아니라 살아 있지 않은 요소들도 포함할 수 있으며, 잠깐뿐만 아니라 장기간 동안 기능할 수도 있으며, 반드시 피부의 외피와 의식 같은 경계에 의해 정의될 필요는 없다. 단 하나의 유기체보다 그 이상을 포함하는 정신시스템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생존의 단위가 언제나 유기체 더하기 환경이라는 주장으로 그레고리를 이끌었다. 14 그레골의 마음의 생태학을 인식론적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을 주로 물질주의적인 대학의 생태학과 구별시켜준다. 20 개체에 앞서 관계가 있다./오늘날 육체와 분리되고, 사회와 분리되고, 자연과도 분리되어 있는 총체적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믿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미신‘이라고 말할 사람들을 위해, 나는 그런 미신과 함께하는 사고 습관과 사고방식이 아직도 그들의 머릿속에 있으며 아직도 그들 사고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것을 즉시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여러분은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지적으로는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나를 볼 수 있다는 관념은 여전히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같은 식으로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잘못된 것으로 알고 있는 인식론에 지배당하고 있다. <<마음의 생태학>>, 그레고리 베이트슨 표지에서

4.

[ ] 좌-우. 근대-전근대.서구-비서구. 3중의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유라시아/사‘의 재구성. 새 길을 내고 싶었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공간의 장벽을 허물고, 전통과 근대 사이의 시간적 단층을 돌파해내고 싶었다. 유라시아의 길을 걷고 싶었다. <<유라시아 견문>> , 이병한


-1. 흔적을 남기는 일도 오래된 기억같다. 여러 책들 사이 책갈피에 시선을 모으게 된다. 책들은 읽는 사이, 또 읽을 책들을 낳고 만다.
-2. 일터 일들도 뒷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말미의 불안감. 뭔가 챙겨야 할 일들이 대기하고 있는 기분이다.
-3. 친구가 다녀갔다. 이야기는 자꾸 말을 재촉하는 듯 싶었다. 밀린 이야기들을 했고, 이미 달려가거나 붙어가버린 몸들의 흔적을 물끄러미 봐야할 듯하다.

5. 몇 차례 만남들은 다른 책읽기를 요구한다 싶다. 이미 깊숙하게 읽고 있는 듯싶다. 구석구석을 걷고 있는지 모르겠다. 걷다보면 어디쯤 가 있을 것이다. 숨이 차더라도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는 곳에서 머물러야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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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 깨달음과 즐거움 간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둘 모두를 그대로 드러내는 힘은 말년의 양식의 특징이다. 반대 방향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두 힘을 긴장 속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오류 가능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노년과 망명으로 인해 신중한 확신을 얻은 예술가가 가진 성숙한 주체성이다. 195

[ ] 그리고 그 땅이 설령 초라하다 할지라도 이타카는 자네를 속이지 않을 것이니, 많은 경험을 쌓아 현자가 되도록 하게. 그때가 되면 이타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네. 193 이상 7. 그 밖의 말년의 양식들에서

 



6.

[ ] 굴드의 연주는 워낙 독특해서 청자의 환심을 사거나 고독한 황홀경과 일상의 혼잡함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연주가 의식적으로 노리는 것은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즐거운 예술, 연주를 통해 작품이 여전히 작곡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술을 대표하는 비평적 모델이 되려는 것이다. 175

[ ] 굴드가 몇 차례 중요한 기회를 통해, 자신이 연주라려고 선택한 바흐의 작품엔 뭔가를 생성해내는 뿌리 같은 면이 있다고 언급한 사실이다... ...굴드 본인은 생전의 청중과 사후의 청중은 물론 그를 개인적으로 알았던 사람에게도 대단히 고립된 인물, 독신에 우울증에 괴상한 습관이 있고 제멋대로이고 지적이고 낯선 인물로 여겨졌다. 어떤 의미로 보든 굴드는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았고, 영향을 받은 음악가나 사상가도 없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이 관습적인 영토에서 벗어나 연주를 통해 자신의 거주지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초연한 남자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굴드가 바흐 음악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창조성의 보고로 여겼으면서 정작 자신은 자손도 없이 고립된 생활을 했던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174

[ ] 바흐의 음악이 기적적이라는 생각은 뒤로 물리고, 그 대신 바흐가 어떤 규칙은 지켜야 할 것으로 어떤 규칙은 무시해도 좋은 것으로 간주하고, 어떤 한계는 신성하게 받아들이지만 어떤 한계는 구속적이라며 버리고 어떤 기법은 생산적으로 보지만 어떤 기법은 쓸모없다고 무시하고, 어떤 아이디어는 존중하지만 어떤 아이디어는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을 추적해보는 것이 더 생산적이면서 바흐의 자발적인 창안을 가정하는 미적모델로 존중하는 태도일 것이다. 171

[ ] 바흐 연주는 드러냄인 동시에 들어올림이 된다. 바흐에 있어 특정한 종류의 창안을 연주자가 포착하여 현대적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굴드가 이런 식으로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선견지명과 본능을 발휘하여 명인기적이면서 한편 담론적인 의미에서 지적이기도 한 다성음악 작법에 드러난 바흐의 창조성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169

[ ] 굴드는 활동 초창기부터 바흐의 건반악기 곡들이 한 가지 악기만을 위해 작곡된 것이 아니라 오르간, 하프시코드, 피아노 등 여러 악기로 연주하게끔 작곡되었거나, 푸가의 기법처럼 어떤 악기를 위해서도 작곡된 곡이 아님을 강조했다. 따라서 바흐는 관례나 관습, 혹은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정치적 올바름과 분리된 채로 연주해도 무방하며, 굴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것들을 무시해왔다. 둘째 당대의 바흐는 옛 교회 형식과 엄격한 대위법 규칙으로 회귀하려는 시대착오적인 작곡가이자 연주자였으면서, 동시에 고난도 작곡 기법과 과감한 반음계를 종종 구사했던 대담한 현대적 작곡가이기도 했다. ...굴드의 연주는 낭만주의 이전의 바흐로 돌아갔으며, 음악사운드를 소비의 대상이 아닌 엄밀한 분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온전히 현대적이다. 167

[ ] 굴드는 젊은 졸업생들에게 음악이란 ˝체계적인 사고를 순전히 인공적으로 구성한 산물˝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여기서 인공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로 ˝이면과 관련된 것˝을 나타낸다. ˝부분들로 나뉘 수 있는 일용품˝이 전혀 아니라 ˝부정을 통해 잘려나간 것, 부정의 공백에 맞설 수 있는 아주 작은 담보물˝이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가 정중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 부정이 체계와 비교할 때 얼마나 인상적인지 적절히 설명해야 하며, 이런 점을 명심할 때에만 졸업생들이 ˝창조적인 생각의 출처인 창안력을 계속적으로 공급받아˝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창안은 체계 내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서 체계 바깥에 있는 부정에 조심스럽게 몸을 담그는 것이기 때문이다.˝ 165

[ ] 굴드가 1964년 경력의 정점에서 연주회 무대를 포기한 것은, 그가 여러 차례 밝혔듯이 아도르노가 그토록 거부했던 인공성과 왜곡을 피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굴드의 연주 스타일이 최상의 상황일 때면 아도르노가 토스카니니를 공박하며 말했던 원자화되고 앙상한 음악성과 정반대의 효과를 나타낸다....굴드는 콘서트 무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왜곡이 일어난다면 이를 피했다. 무대에서는 5층 발코니에 앉은 청중의 주목도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무대를 완전히 떠났다. 164 이상 6. 지식인 비르투오소 에서

5.

[ ] 베토벤, 아도르노, 슈트라우스, 람페두사, 비스콘디는 - 이런 점에서는 글렌 굴드와 장 주네도 마찬가지다 - 음악 비지니스, 출판, 영화, 저널리즘이라는, 20세기 서구 문화를 확산시킨 거대한 규약들의 힘을 업신여기고 이용한다. 그들은 자의식이 무척 강하고 전문기술 또한 뛰어나지만, 그들의 작품에서 수줍어하는 기색은 찾아보기 어렵다. 비록 나이는 먹었지만 으레 수반되기 마련인 평온함이나 성숙함은 필요 없다는 듯이, 사랑스럽게 굴거나 환심을 사려는 생각은 없다는 듯이 군다. 그러나 이들 누구도 필멸을 부인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의 주제로 계속 돌아옴으로써 관습적인 언어와 미적인 것을 훼손하고 그 한계를 묘하게 넓힌다. 154

[ ] 아도르노는 베토벤이 칸트처럼 주관의 관점에서 궁극적인 존재론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대담한 주장을 한다. 즉, 그 작품은 사실상 ˝누군가가 속임수 없이 절대자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노래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이어 아도르노는 장엄미사의 양식적 특징과 의고주의를 풍부한 상상력을 가동하여 분석한다. 음악의 움직임은 ˝표현되지 않은, 규정되지 않은 무언가를 향해˝ 뒷걸으미고, 그렇게해서 나온 딱딱한 양식과 애매함은 작품에 뭔가 마무리되지 않은 듯한 신비한 특징을 부여한다. 주관과 객관의 완연한 조화를 상실한 - 여기서 아도르노는 화해 불가능한, 영원히 풀리지 않는 내적 대립이 말년의 베토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임을 재차 확인한다. 이는 사실상 ˝배제의 작품, 영원한 포기의....작품이다.˝ 129 이상 5. 사라지지 않는 구질서의 매력에서

4.

[ ] 주네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반항과 열정, 죽음과 재생이 서로 긴밀하게 얽힌 곳으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그의 독특한 감수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118

[ ] 주네는 늘 언어를 정체성과 진술을 나타내는 것에서 위반적이고 파괴적이며 심지어는 의도적으로 사악하기까지 한 배반의 양태로 변형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이런 ‘변형‘에서 ‘배반‘해야 할 명백한 필요성을 본다면, 이제 우리는 바람직한 것, 어쩌면 성애의 흥분에 필적할 만한 것을 배반하고 싶어질 것이다. 배반의 황홀함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황홀감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해도 무방하다. ...주네의 글쓰기 목표는 맹렬한 반율법주의 성향을 지키는 것이다. 118

[ ] 정체성은 우리가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혹은 영적 존재로서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어떤 것이다. 문화의 논리와 가족의 논리가 여기에 더해져서 정체성의 위력을 증대시킨다. 주네처럼 비행을 저지르고 격리되고, 또 권위를 위반하는 재능이 있고 이를 즐기는 사람은 그로 인해 자신에게 부과된 정체성의 희생자이므로, 그에게 정체성은 결연하게 반대해야 할 그 무엇이다....따라서 주네는 정체성을 넘나드는 여행자, 혁명적이고 끊임없이 자신과 무관한 대의명분에 기껑 몸 바치려고 밖으로 떠나는 관광객이다. 120

[ ] 주네는 정체성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적대적인 인물이다. 그의 모든 노력은 엄정하면서도 우아하며, 가장 정연한 프랑스어 문체라고 했던 양식으로 표현된다. 그의 글에서는 단정치 못하거나 산만한 구석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주네의 유목적 에너지는 정확하고 우아한 언어 속에 들어앉아 있다. 낭만적인 희망도 없고 흔히들 내비치는 불안도 없이 궤적을 그리며 돌 뿐이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천재는 절망을 통해 단련되는 것이다.˝ 121

[ ] 주네는 자신과 그의 인물들을 데려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죽음이 작품 속의 ‘폭발적으로 타오르는‘ 격동의 소란에 개입하여 저지하거나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런 격동의 소란이야말로 작품의 핵심이자 신비스러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영락없는 종교적 확신이 막판에 그토록 중요하게 부각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주네에게 악마든 신이든 절대자는 인간의 정체성이나 인격화된 신으로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모든 것이 말해지고 행해진 뒤에도 가라앉지 않는 것, 포섭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것으로만 인식된다. 126 이상 4. 장 주네에 대하여

 

 

 

 

 

 

 

 

 

볕뉘. 

 

1. 전시 뒤, 행사가 있어 재독을 하다보니 놓치고 있는 것이 많았다. 6년전 가을이었기도 하였고, 그가 말하는 바를 세밀히 뜯어보지도 않은 연유기도 했다. 

 

2. 장 주네를 읽는 것도(사이드가 말하는 책들은 번역이 다 되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작품을 끝까지 밀어부치며 토해내는 것과 달리 삶은 차분하면서도 냉정하고, 그 경계를 명확히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작품은 다시 읽혀야 하는 것이다.

 

3. 뒷 장에서 말하는 인물들은 더 많기도 하며 더 중요하기도 하다. 카바피스의 시는 장소와 장소상실, 비장소성이라는 말들을 공부하며 체감하기도 한 사실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놀랍기도 했다.

 

4. 굴드 역시 고독이라는 주제로 공부를 하면서 느낀 부분이기도 한데, 흔히들 남는 시간들을 주체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꼭 넘어가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한 시인이 말하지만 고독이라는 신발을 신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어느 누구도 스스로 주어진 시간을 참아내는 것도 배우려하지 않은 듯하다.

 

5. 토크 행사 텍스트 읽기가 있어 재독을 하게 되었는데, 여러모로 이 가을녘에 읽기엔 알맞은 것 같다. 인문, 삶의 무늬에 관심이 깊어진다면 서슴없이 책과 책 속의 책들을 읽어낸다면 분명 스스로를 뛰어넘을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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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은 옳다, 알랭바디우

[ ] 반역은 옳다 造反有理 71

[ ] 나는 이 시대를 기꺼이 공산주의적 가설의 재정식화의 시대라고 지칭하려 한다/오늘날의 주된 정치적 덕성은 용기다...우리의 이념을, 원칙을, 우리의 말을 방어하고 실천하는 용기,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행하는 것을 긍정하는 용기다. 68,69

[ ] ˝소비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나 ˝부자가 되시오˝라는 말들은 ˝이념없이 사시오!˝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우리는 이념 없이 살지 않겠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 유적인 의미에서 공산주의적 이념일 수밖에 없는 이념을 지탱할 정치적 용기를 가져라.˝ 바로 이것이 68년 5월의 동시대인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다. 70 이상 8. 결론에서

[ ] 매우 위대한 수많은 수학자들은 페르마(17세기)와 동시대인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68년을 동시대성과 충실성으로 정의할 수 있다. 64, 65/ 그 시대보다 노조와 당의 조직은 오늘날 쇠락했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똑 같다. 우리는 네 번째 68 탐구대상으로서 도마 위에 올렸던 문제와 동시대에 있다. 그 경험을 되찾는 동시에 재창안해야 한다. 64 7.에서

[ ] 지금도 각자를 각자이 자리에서 조직하는 데 새로운 정치가 있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급격한 위치 이동을 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 그때 개인적으로 행진할 때, 학교, 공장 앞에서 경험에서 반추된다. 우리는 어쩌면 ˝대중이 우리에게 아직 불명료한 형태로 던져주게 될 것을 그들에게 명확한 형태로 돌려줄˝ 어떤 원칙이 구성되어야 하고 만들어져야 한다. 60 이상 6. 개인적인 작은 이야기에서

[ ] ˝의회주의적 백치병˝, ˝선거는 뻔한 계략이다˝와 같이 선거장치는 재현을 그 주요기능으로 삼는 장치도 아니라는 점, 그것은 또한 운동, 새로움, 단절을 억압하는 장치라는 점은 모두에게 명백하다. 49. 이 모든 것이 통일된 축제로서가 아닌, 모순적인 열광으로서 이미지를 부여하고 정치적 삶은 강렬한 한편, 다양한 모순 속에서 주어진다. 42. 바뀐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상 5. 본질적인 네 번째 68년 5월에서

[ ] 세번째 자유지상주의적인 5월이라고도 부르고 싶은데, 이는 푸리에의 공산주의인 유토피아적 공산주의의 전통, 또는 더 지적인 측면에서 분석된 수준에서는 ‘혁명‘이 무엇보다 우리 삶의 미학적 변화를 의미한다고 사유하는 초현실주의적 전통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 39. 이의 지배적인 재료는 실제로 생활 태도의 전환, 사랑의 새로운 관계, 개인적 자유였다...미학이 단연 정치보다 우수했다./몸이 주요한 현전이 되는 새로운 연극의 이념, 공적 발언의 새로운 형식의 이념, 집단적 행동의 새로운 스타일의 이념과 더불어, 해프닝과 즉흥의 격상들이 사건의 일반적인 색조를 공유하는 구성요소이다. 40,41

[ ] 68년 5월의 세 가지 구성 요소는 학생들에게 그 장소는 점거된 소르본 대학이고, 노동자들에게는 거대 자동차 공장이고, 자유지상주의적 5월에게는 결국 쑥대밭이 된 오데옹 극장의 점거다. 43 야만적인 파업은 1967년부터 노르망디에서 시작되었다. 35/모든 운동은 무기력과 헛된 소란을 내재적인 부분으로 포함한다. 코드화된 혁명적 이데올로기,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강경한 행동, 헛된 시간과 공상적인 개혁,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학생운동으로 대표되는 68년 5월의 첫 번째를 구성하고 있다. 31,32/ 1)대학생과 고등학생의 68년 5월 2) 노동자의 68년 5월 3) 자유지상주의자의 68년 5월 4) 그 이면들 25

[ ] ˝좌파는 쓰러져버린 시체다˝ 13 라는 사르트르가 얘기를 했지만, 이 지경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68년 5월은 막연한 만족만을 가져다주는 기존 형식 내에서 도발 이상으로 (당시) 운동이 그 형식을 물어뜯었다는 것이다. 16 그것은 각자의 수준에서 그리고 집단적 수준에서, 자본주의의 길과 공산주의의 길 사이의 투쟁이라는 용어로 세계관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렇게 깨어나려는 의식이 68년 5월을 새롭게 기념하게 되는 것이고, 그 신호를 삶에 아로새겨야 하는 것이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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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

이게 좋네.

다른 걸 볼 수 있어 좋아.
달리 느낄 수 있어 좋구.
오돌토돌 손 끝으로도 만질 수 있어 좋지.

서로 달라질 수 있어서 말야.

맞지 않아 더 좋구.

달리 만나게 되어 좋아.

다르다가 좋네.

발. 우린 아주 다른 세상에 살고 있지. 이리 살아지는 게 아쉬운 게 아니라 아주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단 사실이 더 중요할거야. 과거를 밀어내는 힘이라는 건 찾는 게 아니라 짓는 거라고 말야. 촌각을 다투고 싶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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