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올리고 주전자와 드립잔, 여과지를 챙긴다. 수동밀로 넉넉하게 갈아낸다. 물은 끓었고 숙성을 하자 향기가 진하게 퍼져 나간다.  몇 주 사이 근황들을 묻자. 사건 사고가 물려나온다. 눈이 많이 온 수도권 딸아이를 챙기러 갔다 넘어져 많이 다쳤다는 소식. 아들이 다쳐 3주간 입원하고, 한 주 집에서 요양시키고 있다는 소식. 마트를 운영하고 있어 혹시 피해가 될 수 있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소식. 


몇 주는 어쩌면 참으로 긴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평온한 일상 또한 얼마나 힘든 일인가.  만남의 발화로 만들어지는 온기가 사라져 간다. 사람이 그리워지는 그 시점도 고개를 넘어서고 있다. 서먹함이 그새 비집고 들어오는 그 빈 자리의 농도. 밀도. 연하고 흐리다. 맺히지 않는다. 그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부디 터널의 마지막 부근이기를 바래본다. 


매화와 진달래, 개나리 잔가지를 좀더 챙겨서 꽃병에 꽃아둔다. 스크랩을 살펴보고 할 일을 가늠해본다.


"웅크리는 것으로 계절을 통과하고 나면

시리게 쏟아지는 빛으로

왈칵 눈이 부신 봄이다


헤어짐의 방식으로 

나는 비로소 당신에게 도착한다" 

정용화, <터널이라는 계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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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앨튼 존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그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며 서**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 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올여름의 인생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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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 예약을 해두었는데, 시간이 두시간 남짓 남는다. 검색을 해보니 다행스럽게 알라딘 우주점이 있다.  


1. 옥편 - 처음에는 예술코너를 보려는데 쉽게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취미 코너가 바로 보이지만 원하는 책들은 없다. 그렇게 산책하기 시작한 뒤 보리출판사 국어사전이나 어린이용 한자 사전을 둘러보았지만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그러다가 외국어 사전류가 있는 곳에 다다랐고, 한자사전을 다 보다가 겨우 마음에 드는 민중사의 활용옥편이 초서를 쉽게 볼 수 있고, 오고가는 길에 부수별로 산책을 하니 시간이 무척 빠르게 지나간다 싶다. 늘 처음이 중요하다 싶다.


2. 어깨 - 한의원에 들러 부황을 뜨고 사혈을 했다. 작업을 하다보니 어깨 근육과 손이 쉽게 피로감을 느끼는 듯 싶다.  약식 운동도 해보는데 그렇게 쉽게 낫질 않는 것 같다. 철봉도 한 달정도 쉬었다. 이 책은 그 순환구조를 그려서 왜 반복되는지 알려준다. 늘 답은 가까이 있다. 30분이나 한시간 안밖으로 몸을 풀어주는 것이 좋다고 말이다. 늘 가까운 것을 하지 않아 문제다 싶다. 늘 습관이 바람직하다.


3. 성찰 - 조심스럽게 발문을 적는다. 너무 조심스러워서 걱정이다. 시대와 개인을 읽어내지 않으면 그 글을 담아낼 수 없다. 데카르트의 번역서도 많이 있지만 이도 고르기가 쉽지 않아 애를 먹었다. 먼저 저가의 통버전을 하나 구입했고, 위의 최근 번역서를 골랐다. 결론은 잘 해냈다 싶다. 라틴어 원본 번역을 했고, 번역사를 짚고 시대 배경을 같이 녹여냈다. 글을 읽는 사이 그 긴장감이 서슬퍼렇게 다가선다. 평생 벼르고 쓸 수 있는 글. 자칫 삐끗하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다. 그래도 써야한다는 강박. 아니 사명감. 위기감이 느껴진다. 아껴서 소화해내야 한다. 


몸을 백여일 챙겨본다. 먹을 것도 가려서 해보고 만나는 모임도 줄여서 해보았다. 육식도 과식도 많이 줄었고 생기도 있었고 활력을 찾는 여러가지 실험도 해 본 셈이다. 이렇게 처음을 다시 만들어 보는 것도, 습관의 바닥을 점검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돌이켜보면 많은 것들을 소화시켜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시간시간이 많이 궁금해졌다 싶다. 내려오니 무척 포근하다. 곧 주문한 책들을 받으러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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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자 자란 함박눈의 궤적이 좀 느려져. 곱게 쌓인 눈들을 바짝 달려들어 찍을까 하다가 멈춰. 햇살은 곱고 따듯하고 폭 쌓인 눈들이 포근해지자 눈물이 나. 한해가 이렇게 시작되기도 간만인 듯 싶어. 아직 바닷가는 설기척도 없겠지만 이렇게 맛보는 풍경은 더욱 조심스러워져.  마음에만 갖고 있기로 해. 셔터를 아무 곳에서도 누르지 않았어. 


1. 가족 -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에서 우리의 관계는 무엇일까. 법으로도 규정짓지 못하고, 혈연으로도 포획되지 않는 관계. 그러면서 책친척이란 말들이 나왔다. 히로키의 2부는 가족으로 출발한다. 아 그러고보니 재-관-언-법조계의 혼맥도가 겹치는 것은 왠일일까? 그의 사유의 출발은 현실과 그 개선의 주체로서 더 이상, 개인도, 공동체도, 계급도 아닌 현실에 대한 무력감에서 이어진 것일 수도 있다. 그 낯선 것을 잡아내어 눈을 꽁꽁 뭉칠 수 있는 어떤 개념으로 사유하고 싶은 것이다. 유사가족일 수도 있고, 그와 유사한 또 다른 어떤 것으로 말이다. 고진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에 대한 스케치도 역설적이지만 다른 틀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2. 섬세 - 무형문화재 상설전시관이 대전역 인근에 있다. 기차 시간에 앞서 짬이 되어 둘러본다. 앉은 굿의 한지 작업, 단청장,초고장(짚고예)목기장, 악기장, 각색편, 단청장, 국화주 장인. 그리고 소제동 마지막 기억을 담은 <<소제, 도시를 기억하다>>가 전시중이다. 그 손길에서 드러나는 것은 늘 섬세함이라고 할까 아니면 야무짐이라고 할까. 허투루 보이지 않은 깐깐함이 물씬 풍겨온다 싶다. 빠져들기 보다는 튕겨져 나올 듯 싶다. 


3. 노선 - 택시를 탈까하다 버스노선을 검색해본다. 어 왠일일까. 채 오십분이 걸리지 않다니, 정말일까 싶어 버스를 타기로 한다. 그래. 중간 도심환승센터에서 갈아 타면 되는구나 싶다. 중간 기다리는 시간에 노선도를 본다. 송도환승센터, 오천환승센터, 간선과 지선으로 분류되어 한 눈에 알아보기 쉽다. 크게 곤란하지 않을 듯 싶기도 한데, 배차간격이 약간 걸린다싶다. 그래도 큰 버스를 혼자 대절하니 미안스럽기도 하다. 내리는 전 기사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큰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구룡포, 감포까지 버스여행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물론 날이 따뜻해져서 이겠지만, 나쁘진 않다.


명문옥편이 와서 중국어간체자를 살펴본다. 500여자가 더 되었는데, 보는 재미가 있다. 몇 번 더 보면 눈에 익을 듯싶다. 탐색하기 전에 도움이 될 듯도 싶다. 딸이 불쑥 죽음이 뭐냐고 물어본다. 음. 그리 대단한 건 아냐. 잘 모르기도 하고, 살아있다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기도 하지. 저자가 왜 제목을 저렇게 지었는지 공감이 가기도 한다. 우리는 생각보다 긴 시간을 함께 살아있다. 이삼백년을 품으면서 살고 있고, 그것을 여실이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빙하의 흔적이 고스란히 물과 그 아래 사는 사람들의 살림살이와 직결되는 것임을 말이다. 새롭게 사유하고 대화해서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긴 시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물꼬를 터 보는 일들을 주저하지 말고 말이다. 코로나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건네주고 있다. 안목들을 겹치면서 살펴보자구 이야기하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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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로 비춘 햇살이 환하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맞닿아 있기도 해서다.  밝지만 추위는 뾰족하다.


1. 관성 - 천자문 4자*250구절를 따라가보면서 꼭지별로 띠지를 붙이고, 헛갈리는 글자를 형광펜으로 칠해본다. 그러다가 늦게 도착한 옥편을 살펴봐. 우주는 어떻게 중국선왕과 지명, 행실은 어떻해야하며, 관직은 어떻고, 자연은 어찌어찌하며 등등 그리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더구나 암송이라니, 무의식중에 들어온 문맥의 역할들이 어찌했을지 궁금하다. 연구논문들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그래도 지금 나처럼 수긍을 하고 배우러 드는 이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직분은 늘 우주의 중심이고 당연한 천동설론자가 득실거리는 현실까지 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신분이 보여주는 구태는 여전할 것이며, 어른이 되어도 사회적 유아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관행과 제도는 어김없이 길게 제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늘 한해가 가고 다음해가 오는 것처럼 말이다. 


2. 갈증 -  모처럼 단골식당에서 저녁. 심장 스텐트 시술한 동생벌 친구도 오고, 술 센 할베도 와서 식사중이다. 내일 병원에 다녀온단 소리를 듣고 이 할베는 큰 병원다녀오라고 자문을 해주고 있는데 또 다른 손님이 왔다. 이 분은 몹시 거슬렸던지 버럭 소리를 내지른다. 마스크 쓰세요.  그런데 왠 일. 단체 손님. 넷*넷. 주변은 안중에도 없는지 특유의 강한 엑센트로 친밀감을 과시한다 싶다. 계산하려 일어서자 그제서야 미안함을 눈치챘는지 다가서서 미안하다고 한다. 다가서지 않으셔도 된다. 버럭하지 않아도 된다. 반가움을 표시하고 조언을 하지 않으셔도 된다. 모처럼도 없애야겠다 싶다. 뭐라도 해서 들거나 배달을 시켜야 하는구나 싶다.


3. 다짐 - 시술한 양반은 별반 직업이 없다. 아버지에게 받은 건물. 마땅히 소득이 없는 듯싶다. 날건달처럼 살아 욱하는 성미는 그대로 남아 있는 듯. 그가 몸이 좋지 않아 아마 큰 병원으로 문진을 가는게다. 아무 일 없으면 좋겠는데, 불쑥 책을 언제 내시느냐고 묻는다. 어 무슨 말이지. 아 도록을 말하는 구나 싶다. 내년, 아니 내 후년이 될 듯 싶어요 한다. 앞의 일이 어찌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나아진 것은 아닐까 싶다.


가끔 인체에 관한 책들을 자주 본다. 일터에 동료들이 아프거나, 주변 친구들이 자주 통증을 느낀다면 말이다. 어렵기도 하지만 틀을 잡고 가면 그리 어려운 편도 아니다. 대부분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너무 맡겨서 탈이다. 제 몸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하면 여러가지를 건질 수 있기도 하다. 최근 여러 연구들로 보는 맛도 있다 싶다.  배려도 그러할 것이다. 다르게 만드는 시작은 늘 나에 대한 자극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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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12-3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프레이야 2021-01-01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해 저도 몸의 소중함을 구체적으로 깨닫고 몸소 이겨내면서 지나왔네요. 아직 분투 중입니다. 나아지겠지요. 몸도 마음도 잘 돌보며 살아야겠어요.

여울 2021-01-01 21:08   좋아요 0 | URL
네 잘 챙기셔야해요. 늘 거기에서 시작되잖아요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