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에 관여하는 삶과 정치학

 

 

 

 액터 마르티네즈 - 줌인과 줌아웃, 두 감독과 두 배우.  연기인지 실제인지, 감독이 연출을 가장하는 것인지 드나들며 그 경계를 허문다. 몸으로 쉬는 숨의 몇 장면. 도대체 이런 짓한 게 대체 몇번이야라고 액터 마르티네즈의 분노의 말로 정지된 화면도 영화도 끝이 난다.

 

볕뉘.

 

1. '메타' 영화이든, 메타정치학이든, 메타철학이든 다른 관점에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일 것이다. 기존의 관점이나 시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려고 하기때문에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무책임하다. 물론 다른 사유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문득 좋은 삶의 정치사상의 마지막 논문이 생각이 났다. "농사짓는다"를 사유의 중심에 놓고, 기존의 정치학이나 철학 사유의 문제점을 되짚어보는 논문이었다. 요지는 자아라는 것도, 원인-결과에 과다하게 집중해서 중간에 서성이는 것들,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들, 중간태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사유를 못한다는 것이다. 명사, 동사의 과도함만으로 사유하지, 부사로 생각할 줄도 몰라 놓치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뒤풀이하면서 나누었지만, 속내는 모를 것이다. 다시 오지 않을 자리여서 요점만 나누었다. 철벽같은 아성을, 관성의 아성들을 부술 수 있을까. 말하고 나누고 나누어도  관점들과 태도는 바뀌지 않는다. 그대로 살아온대로, 보아온대로 사고하고 일들을 벌인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조차 눈치채지 못하면서 말이다.

 

3. 전주영화제 하룻밤의 여운이 이리 길 줄은 몰랐다. 몇 편의 인상비평도 기회가 되면 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면서 이어받은 것에 자긍심을 갖고 싶다는 소망과, 지난날의 불평등, 불의, 권력의 작용에 대해서 정직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성과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다양한 사상의, 사람들의, 제품의, 혹은 기술의 상호작용과 흐름을 어느 하나를 생각해보아도, 잘 알다시피 역사라든가 유산이라는 테마를 특정한 국경선 안에 가두는 일은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712

 

자유주의 사관이라는 새로운 조류를 형성한 역사수정주의자의 일단은, 일본의 과거의 어두운 면만을 강조하는, 그들의 말에 의하면 자학사관은 부당하다며 분노했다. 역사수정주의자 중에는 1937-1938년에 난징 대학살이 일어난 것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도 있다. 그들은 특히 일본이 독립된 근대국가로 급부상한 것을 비롯해서 일본이 이룩해온 다양한 성과를 강조함으로써 일본인인 것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역사가 필요하며, 특히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그러한 것이 아니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에 대동아전쟁긍정론을 주장한 하야시 후사오와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은 서양 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고상한 영위였다고 간주하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은, 학교의 역사교육에서 위안부라든가 민간인 학살 등의 주제를 다루는 데 이의를 제기했다. 706

 

잃어버린 10년 뒤 10년의 회복 이유 - 해고, 인원 감축 등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감축은 3-5년에 걸쳐 이루어지거나, 자연감소(퇴직이나 전근에의해 생긴 결원을 보충하지 않음)나 희망퇴직에 주로 의존하고 있었다. 사실상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직장을 떠난 사람들은 대부분 정년퇴직했거나 희망퇴직자였다. 오직 8%만이 사용자의 재량에 따라 해고되었다.” 이 비율은 1975년 오일쇼크 때의 정리해고 수준보다 낮은 것이었다. 노동자의 이직율은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일본이 여러 직장을 전전하는 사람들의 사회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2006년과 2007년에는 인구감소시대에 안정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임시직 노동자를 정규직 노동자로 전환하는 기업이 늘어났다. 이런 조치는 평생고용이라는 오랜 관행을 재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702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움직임도 제한적이었다.

 

요컨대 1990년대 일본경제의 고통은 일차적으로 파멸적인 거시경제정책의 산물인 듯하다. 2000년대의 경기회복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글로벌 경제의 변화에 발맞춘 몇 가지 정책이었다. 일본의 국제무역은 2000년에서 2006년까지 크게 증가했는데, 늘어난 수출물량의 절반이상은 동아시아로 향했다. 2004년에는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일본의 가장 중요한 교역상대국이 되었다. 중국은 일본 수출입물량의 5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중국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이 만들어낸 중대한 결과였다...금리는 낮추고....임금은 인상했다. 702-703

 

20058, 고이즈미의 우정민영화 법안은 자민당 내에서 상당수의 이탈표가 나온 탓에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그러자 고이즈미는 의회를 해산하고 9월에 중의원 총선거를 하기로 한 다음,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을 공천에서 배제하고 새로운 후보들을 내세웠다. 매스컴은 이 정치신인들을 고이즈미의 자객으로 묘사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의원들은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다. 이런 대결구도를 만들어놓고, 고이즈미는 개혁에 반대하는 후보들을 지지하지 말라고 유권자들에게 직접 호소했다. 고이즈미의 자객들을 비롯한 자민당 후보들은 9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다음 달에 우정민영화 법안은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이 법안의 주요 조항은 2007년에 발효되었으나, 민영화에 필요한 제반 절차는 2017년에야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 700

 

19946월 자민당이 제1야당이자 오래된 이념적 라이벌인 사회당과 제휴했던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자민당이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의 총리 취임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 연립정권을 미국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 민주당 정치인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다양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민당과 사회당의 연립은 일본의 유권자에게 여전히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사회당의 타격이 컸다. 국민은 자민당이 실용주의적 거래를 성사시키는 정당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자민당 지지자들은 이데올로기적 일관성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기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선거에서 사회당이 획득한 지지는 상당 부분 평화헌법의 수호, 미일군사동맹 반대, 정겨유착 배격이라는 원칙에 대한 지지였다......사회당의 정치적 존재감은 순식간에 미미해졌다. 693-694

 

19937월 총선거에서, 자민당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과반수 의석에 훨씬 못 미쳤다. 자민당을 탈당한 오자와와 그의 지지세력이 정치개혁을 내걸고 결성한 신생당과, 전년에 결성된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이끄는 또 하나의 개혁파 정당 일본신당은 함께 건투했다....선거 후의 정권담당을 둘러싼 줄다리기에서, 오자와의 신생당과 호소카와의 일본신당은 구래로부터의 야당들(사회당과 공명당)과 제휴하여, 1947년 이래 최초로 비자민당 정권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오자와는 연립정권 수립을 획책했지만, 자기는 입각하지 않고 배후역할자로 일관했다. 총리직에는 호소카와가 취임했다. 691

 

1993년 여름, 자민당의 아성이 결국 무너졌다. 야당세력은 미야자와 내각이 제대로 된 개혁에 임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들며, 내각불신임안을 상정했다. 의석이 반수도 되지 못하는 야당세력이 그런 불신임안을 상정한 것은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때도 상징적인 항의행동으로서 끝날 것처럼 보였다.....오자와와 그의 지지자들은, 자민당에 반기를 들고 야당이 상정한 불신임안의 지지로 돌아섰다. 형세가 극적으로 전환됨으로써 불신암은 가결되었다. 미야자와는 내각 총사퇴, 중의원 해산과 총선거 실시라는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690-691

 

여당에 다행스러운 일로, 전후 헌법 아래서는 참의원은 국회의 이원 속에서는 중의원보다 열위에 있었다. 양원의 권한 차이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중의원이 예산의 선의권과 의결권을 갖고 있고, 참의원은 중의원에 의한 예산의 결정을 뒤집지 못하는데 있다. 자민당으로서는 중의원에서 과반수를 점하는 한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후 수개월 동안 사회당은 참의원에서의 약진을 바탕으로 자민당의 정책에 대항하려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19902월의 총선거에서는, 자민당은 중의원에서 과반수 지배를 더욱 확고히 해버렸다. 689

 

허술한 금융 시스템에 의해 부하가 걸린 경제는 1990년대 전반기 내내 비틀거렸다. 정부는 소비자와 민간기업에서 자신감과 활기가 되살아나길 바랐고, 경제 활성화를 위해 공공사업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정부는 댐과 고속도로 건설에 수천억 엔을 지출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공공투자로 침체된 경기를 부양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달러 가치가 유례없이 하락했다....수출을 통해 경기회복을 꾀하기가 불가능해 진 것이다..경제상황은 1995년과 1997년 중반 사이에 다소 호전되었다. 미일공동으로 엔화의 가치를 절하하고...GDP3%이상에 달하는 공공지출계획을 발표했다. 이런 조치들은 수출과 국내의 투자와 소비를 자극했다.....그러나 경제회복은 부실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실업이 늘어났다. 기업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신규채용을 하지 않고 기존사원들의 초과근무시간을 늘렸다. 물가는 하락했다. 그렇지만 소비지출의 증가는 크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 소비세를 3%에서 5%로 인상했다. 19974얼 시행되었다. 683-684

 

미국은 또한 일본에게 군사 파트너로서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이 문제는 1991년의 짧은 걸프전기간에 전면으로 부상했다. 일본헌법의 평화조항은 파병을 금지하고 있었고, 여론도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에 대항하기 위해 구성된 다국적군에 파병하는 것을 반대했다. 미국은 이라크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습과 지상군 침투를 주도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전쟁을 지원하라고 일본을 압박했다. 결국 일본정부는 전쟁비용으로130억달러를 내놓았다. 678

 

 

군사행동이 시작되자마자 경찰과 군 당국은 군사행동을 반대하는 국내의 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했다. 그러나 만주점령을 완력으로 정당화할 필요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일본서민은 물론 엘리트도 1931-1932년에 걸친 사태의 진전을 노골적으로 환영했다. 신문은 일본군의 전진을 열광적으로 전했다. 뉴스영화와 라디오는 경쟁적으로 최신전황을 선정적으로 보도했다. 좌익은 종전의 입장을 바꾸어, 만주 점령은 ㅅㄹ업을 줄여 국민 전체에 은혜를 가져다줄 약속이지, 결코 자본가적 제국주의적인 침략행위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일본제국이 만주국이라는 빛나는 왕관을 손에 넣은 것을 축하하는 새로운 가요곡, 신작 가부키, 심지어는 레스토랑의 새로운 메뉴도 등장했다. 가장 신경 예민해 있던 국가관료들조차도 한숨을 돌렸다. 사법성의 1932년판 위험사상조사는, 만주사변은 사회적 긴장이 고조될 때 불어온 가미카제라고 형용했다. 19325월에 육군성은 만주사변이 사회적 대립 대신에 새로운 연대정신을 함양했다고 지적했다. 425-426

 

서구의 파시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전쟁을 위한 동원을 창조의 어머니로 찬미했다. 전쟁의 수행은 변혁을 가져오는 촉매인 동시에 도한 그런 변혁의 결과이기도 했다. 469

 

히호시마와 나가사키는 화재와 죽음으로 생지옥이 되었다. 피폭 후 추가로 1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합계 250만에 가까운 일본인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류 최초의 원폭투하를 경험한 것이, 살아남은 일본인에게 자신들은 전쟁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강한 인식을 안겨주게 되었다. 패전이 체험은 수백만 일본인에게 모든 전쟁에 대한 강한 증오감을 심어주었다. 496

 

신헌법등 다방면에 걸친 단호한 조치는 일본의 사상 환경을 일신하고, 경제적 사회적 힘의 분포를 변화시켰다. ‘민주화열풍이 일본 전체를 휩쓸었다. 민주주의와 평등을 추진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을 창도한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평등이라는 것을, 선거라든가 농지개혁을 넘어선 꽤 넓은 의미로 이해했다. 많은 사람은 민주주의와 평등을 추진한다는 것을 인간의 혼을 다시 만드는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지식인은 어떻게 하면 진정한 민주적인 자립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함양하는 것이 가능할까를 둘러싸고 주도면밀하면서도 고상한 논쟁을 벌였다....식량뿐 아니라 지식에 대해서 굶주렸던 많은 사람은 헌책방의 서가를 휘젓고 다니면서 책을 낚았다. 니시다 기타로 전집이나 정치사상에 관한 대저의 발매일에는, 며칠 전부터 대형서점 바깥에서 밤샘으로 줄을 서서 반드시 손에 넣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이 한창 혁신과 개조, 변혁의 화제로 들썩거렸다. 510

 

전전과 전중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학력에 근거한 위계구조는, 그대로 1950년대의 직장과 완전한 대응관계에 있었다. 중졸자는 남녀 모두 장래성이 비교적 한정된 공장노동자로 취직했다. 고졸 남자에게는 적어도 중견관리직으로의 승진이 거의 확실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승진도 가능했고, 숙련을 요하는 생산현장의 기술직, 혹은 사무직으로 취직의 길이 열려 있었다. 고졸 여성에게는 일류기업이 사무실에서 비서나 사무직으로일하는 길이 열려 있었다. 대졸 남성은 기업이나 관청의 엘리트 관리직의 길로 나아갔다....성역할과 학력의 조합에 의해서 사람들은 책임이 경중과 보수의 액수에 따라 몇 층씩이나 뚜렷이 구분된 여러 직종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548

 

종전 무렵 잡지가 겨우 몇 개밖에 없었는데, 그후 몇십 년 사이에 보도 중심의 주간지와 오락 중심의 주간지가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다. 새로운 잡지는 젊은 여성, 젊은 남성, 주부, 성인남성 등 특정 독자층을 겨냥했다. 1960년에는 주간지의 발행부수가 매주 평균 1,150만 부에 달했다. 게다가 신문의 발행부수는 매일 2,400백만 부에 달했다. 같은 해 신간서적은 24천 종, 발매부수는 총 12,500만 권이었다. 이들 숫자를 보면, 일보의 독자는 세계에서 가장 활자에 굶주리고, 독서욕이 왕성한 사람들이었다. 일인당 판매부수로 비교하면, 일본과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웃도는 규모의 출판산업을 보유한 나라는 영국,독일,소련, 미국뿐이었다. 572

 

1950년대 후반 이래 여러 명의 관료출신 정치인이 총리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상호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던 정치인, 기업가, 관료라는 3자로 된 엘리트 집단은 일본의 철의 삼각형이라 불렀다. 자민당이 우위를 점하고 있던 40여 년간은 일당지배의 시대라고 불렀다. 584

 

자민당의 전략가들은 자신의 동맹세력을 키우기 위해 한층 힘을 쏟아부었다. 농촌지역에서 도시로, 농업에서 공업이나 서비스 부문으로 거센 인국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던 그들은, 이 추세가 계속 유지되면 사회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민당은 협조적인노조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 그리고 근로대중에게 생활의 보장과 생활수준의 향상을 약속하는 노동협약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자민당은 폭넓은 정치적 견해를 허용하는 큰 텐트 형의 정당이 되어갔다. 606

 

일본은 이미 극도로 기업 중심적인 사회로 변용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업에게 좋은 것은 사회 전체에도 좋다고 믿게 되었다. 식자들은 일본적 시스템의 성공을 호들갑스럽게 칭송했다. 일본식 품질관리의 추진자로 저명한 가라쓰 하지메는, 1986년에 이렇게 주장했다. “일본은 세계 속에서 실험국가였다. 일본인의 무원칙적인 점 덕분에, 세계의 모든 가설과 제언 등을 여기서 테스트하는 것이 가능했다...유럽적 발상의 원점의 하나인 데카르트에게대들 정도의 일을 하지 않고는 이상한 사태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642

 

여당인 자민당은 두 종류의 정치가들에 의해 인도되었다. 한 그룹은 지방, 특히 농촌지역에 탄탄한 기반을 쌓은 정당정치가였다. 그들은 선거구의 농민이나 건설업계 관계자 등을 중심으로 확고한 후원회 조직을 구축했고, 그런 지지자의 이익을 보호해주는 대신 표를 얻었다. 644 대기업은 자민당의 선거전을 지원하는 정치헌금을 하고, 그 보답으로 자민당의 정책에 의해 이익을 얻었다. 정경관의 철의 삼각형은 너무나 견고해서 거의 부식할 일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646

 

야당세력의 교섭력이 강해졌다고 해서정치가 크게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1970년대의 정치적인 화해 조정으로의 분위기 속에서, 자민당은 이미 사회복지의 확대라는 야당측의 중요한 요구를 수용해버렸다. 몇몇 중도주의 정당의 등장도 마찬가지로 정쟁의 대립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당시 최대의 야당세력이었던 일본사회당은, 정부 여당에대한 비판에 점점 미온적이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바야흐로 보수적인 활동이야말로 사회당의 최대 공헌이 되었다. 사회당은 이따금 개혁의 필요성을 제창했지만, 정후 민주정체의 현상유지를 옹호했다. 모든 정당의 지도부는 갈수록 안전지향적이 되어, 대담하게 개혁이 주도권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1980년에는 중의원 512개 의석 중 세습의원, 즉 전 의원의 아들 딸 소자, 심지어는 증손자가 차지한 의석이 140석에 달하게 되었다. 이들 세습의원의 거의 90%는 자민당 의원이었고, 7% 정도가 사회당 의원이었다. 648

 

1990년대 - 이런 장수화와 저출산이라는 두 경향이 겹친 결과, 일본의 젊은이들에 대한 고령자의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급속히 상승했다. 650 1987년에는, 정부도 희생자의 유족이 보상금을 청구하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업무재해의 정의를 완화했다. 과로사 110번에서 받은 상담건수를 토대로, 이 그룹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과로사 건수는 연간 500건에 이른 것으로 추정했다. ...서비스 잔업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풍조가 강했다. 654

 

풍요에 의해 판매 제조 시스템이 점차 유연해지면서, 대중이 바야흐로 자신만의 특별한 흥미와 취미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소집단으로 분할되는 현상, ‘대중의 마이크로화가 진행되었고, 다양한 의미에서 논쟁을 벌였다. 655 사람들이 맹렬사원에 의해 대표되고 있는 사상, 교육마마에 의해 공부로 내몰리는 아이들에 의해 대표되는 사회사상, 즉 높은 지위를 목표로 대단히 노력하는 생활방식을 우스꽝스럽다고 보는 것, “평균적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생활하는 방식이 가능하다면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것을 쓰루미 슌스케는 칭송했다. 656

 

고도성장기에 진행된 사회적 균질화 추세를 역전시킨 두 번째 움직임은 교육분야에서 나타났다....높은 일류 국립대학이나 사립대학 진학률을 자랑하는 사립고교와 심지어그런 고교에 직결하는 부속의 초중학교의 평판이 자연스레 높아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런 유명한 사립 진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학원까지등장했다. 입시경쟁에서 이기는가 지는가는, 부모가 부자인가 아닌가에 아주 크게 좌우되었다. 일류대학에서 부유한 가정 출신의 학생비율은 급격히 증가했다. 657 땅값은 튀고, 투기는 겉잡을 수 없었다....위험하고 지속 불가능한 투기적인 거품이 생겼음을 쉽게 알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호시절이 언제까지나 계속 될 거로 생각했다. 659 1990년에는, 1980년대의 투기적인 버블이 요란하게 깨지면서 10년이 넘게 지속되는 경제불황이 시작되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인은 수십 년동안 중간층의 생활방식을 폭넓게 공유한 것으로 유명했던 나라가, 점증하는 사회적 분열에 의해 교란되고 있는 현실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청년층과 노련층, 부자와 빈자, 일본인과 외국인,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기성종교와 신흥종교의 대립과 갈등이 일본사회를 점점 분열시키고 있었다. 666

 

대학진학을 원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경쟁이 줄어들자, 일본정부는 대학들이 국고보조금을 받기 위해 경쟁을 벌이게 함으로써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정부는 영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사례를 모방하여 100여 개에 달하는 일본의 국립대학을 독립행정법인으로 전환시키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초중등 교육이 여러 가지로 비판을 받자 학업부담을 줄이면서 선택권을 주기위해 교과목을 축소했다.....2000년대 초반에는 교사가 학생들을 통제하지 못해 수업을 아예 할 수 없는 상황, 즉 학급붕괴가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2006년 소학교 학급의 8-9%가 붕괴되었다고 추정했다. 670

 

볕뉘.

 

1. 자민당이 사회당에게 총리직을 제안하면서 연정을 한다. 그 뒤로 사회당은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국민들은 사회당에서 등을 돌리게 된다. 자민당 내부의 분열도 있었지만 특유의 철의 동맹과 중소사업자, 농촌의 침투성을 그들의 지지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된다.  정치-사회적 출구를 잃어버린 그들은 팬덤과 팬심이 정치색을 가미한 오락거리에 심취하여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2. 삶도, 정치도, 문화도 자기 길을 나서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사회적인 분위기의 확보가 관건이 될 것이다. 10-15년의 격차. 제발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일본 현대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복기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판박이처럼 삶을 배껴 살고 있는지 말이다. 그 틈새 또 다른 가능성도 되짚어보면 좋을 것 같다.

 

3.

  옆의 책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자민족, 자중심에 갇히는 순간 거꾸로 우리는 서로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전쟁은 늘 도나 모였다. 평화를 위한 전혀 다른 사유가 필요한 듯 싶다.

 

 

 

4. 도올의 차이나도올을 보고있는데 살짝 걱정된다. 고구려 패러다임이나, 동이 중심주의일까 우려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이삼성교수의 내륙아시아와 중화주의 개념을 달리보는 관점도 유념해서 보면 좋을 것 같다. 곧 도올 중국사도 새겨보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과학기술학이란 무엇인가

 

세부적인 이론에 따라 개념이나 방법론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과학기술학은 과학기술이 내적 논리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23

 

과학기술학은 제1세대, 2세대, 3세대를 거쳐 진화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각 세대는 대략 1920-1960년대, 1970-1990년대, 2000년대 이후에 해당한다. 18

 

1세대 과학기술학의 여러 분야들은 공통적인 개념이나 방법론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과학이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며 사회로부터 자율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었다. 이는 표준적인 과학관, 혹은 계몽적 합리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로버트 머튼) 19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등 표준적인 과학관을 비판할 수 있는 다양한 계기가 제공되었다. 그후 2세대를 통해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특히 과학지식사회학(SSK)은 과학기술학이 본격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과학지식사회학은 기존의 과학사회학과 달리 과학제도보다는 과학지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과학지식사회학은 과학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주장했으며, 흔히 과학에 대한 사회구성주의로 불린다. 과학지식사회학은 스트롱 프로그램과 상대주의 경험프로그램, 그리고 실험실 연구 등의 형태로 발전해 왔다. 21 이미 만들어진 과학(Ready-made science)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science-in-the-making)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에 모색되고 있는 3세대 과학기술학은 고교회파와 저교회파라는 두 가지 전통을 생산적으로 결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세대 과학기술학의 키워드가 구성이었다면, 3세대는 관여를 표방하고 있다. 2세대 과학기술학이 주로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관한 이론적 시각을 마련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면, 3세대 과학기술학은 과학기술과 사회에 관한 이론과 실천을 통합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22 고교회파가 STS를 과학기술학의 약어로 보는 반면, 저교회파는 STS를 과학기술과 사회의 약어로 보고 있는 셈이다....이론을 정교화하는 것은 물론 과학기술정책과 민주주의, 과학기술과 사회운동, 과학기술논쟁과 전문성, 과학의 상업화, 과학기술과 위험,첨단 과학기술의 윤리적 쟁점 등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탈정상과학 Post- normal science) 23

 

2. 위험사회 속의 과학기술

 

루만은 위험을 온전히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비롯되는 사회적 현상으로 본다.(사회를 인간주체가 아니라 체계(시스템)의 자기실현과정으로 본다) 설령,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했다고하더라도 우리사회에 그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 한 그것은 위험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경에 실재하는 위협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커뮤니케이션되고 있는 내용(의미)이 위험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의사결정(판단)에 따라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의사결정에 참여한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로 나눠볼 수 있을텐데,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위험의 내용에 대한 판단은 극단적으로 나뉠 수 있다. 227

 

기후변화뿐 아니라 GMO와 나노기술 같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수 있는 신기술도 빠르게 늘고 있지만 우리의 예측능력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이런 상황을 사실은 불확실하고, 가치는 다툼의 대상이 되고, 이해관계(위험부담)은 크고, 결정은 긴급을 요하는현실을 제롬 라베츠와 펀토비치는 진단한다. 이제 우리는 확실치 않은 과학적 사실을 통해 얻어낸 불확실한 예측을 놓고 인류의 명운을 건 힘든 판단(결정)을 내려야할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렇게 다급한 환경에 적합한 새로운 접근으로, 두 학자는 탈정상과학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232

 

너무나 자주, 과학적 정보가 빈약한(soft) 상황에서 어려운 판단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니 확장된 사실이 새로운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과학적 사실만으로는 곤란하니 차선책으로 인류의 지혜를 총동원하자는 것이다. 확장된 사실이 정보로 제공되기 위해서는 정책결정의 참여집단도 과학기술 전문가로 국한되지 않고 확장된 공동체로 넓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위의 두학자 의견 - 시민배심원제도, 시민포사이트, 합의회의 등) 234

 

조금 다른 맥락에서 위험문제를 과학과 사회의 공동생산(co-production)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다. 그 사상적 배경은 행위자-연결망 이론(ANT)과 미국의 STS 학자 자사노펴의 사이보그 페미니즘에 기초한다고 볼 수 있다....우리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을 구별하고, 인간적인 것에 한해서 움직였다. 현대사회에서 가능한 것은 비인간적인 것을 포함한 변화(매개의 실천)였는데 우리는 인간적인 것만(정화의 실천) 바꾸었다. 위험은 바로 이런 실천의 불일치에 존재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괴물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다가 그 징후를 발견하고 느끼는 불안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연결된 경중완급의 줄기인식과 그 연결망을 역동적으로 변환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235-236

 

위험커뮤니케이션은 이타적인 커뮤니케이터(주로 전문가)에 의해 객관적인 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정치적·제도적·실천적 고려속에서 참여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성격을 띤다 또한, 위험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내용보다 정보원(정부기관, 전문가, 언론매체 등)의 신뢰가 더 중요하며, 성공한 위험커뮤니케이션이란 관련 쟁점이나 행동에 대한 이해수준이 향상되고, 이용가능한 지식의 한계 속에서 관련자들이 적절하게 정보를 제공받았다고 만족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241

 

위험의 출현은 15세기 초반의 해양항해와 관련이 깊었다. 그때까지 위험은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폭퐁우)나 신의 행위에 따른 것으로 일종의 불운에 불과했다. 그 후, 위험은 그 의미와 활용에서 변화를 겪는데 1718세기의 서구 근대사회의 출현과 연동되어 있었다. 18세기 들어, 과학의 발달(특히 확률론과 통계론)에 힘입어 위험의 과학화가 심화되었고, 그 결과 보험이 위험을 관리하는 사회 제도로 확립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위험은 자연과 신의 영역을 떠나 인간의 영역으로 확실하게 들어왔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근대사회와 위험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근대인은 신의 보호를 벗어나서 자신의 판단과 결정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존재인데, 그에 따라실패의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위험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발명은 그런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16

 

위험이라는 단어는 무릅쓰다 to dare'는 뜻의 초기 이탈리아어 risecare에서 유래한 것으로, 운명이 아니라 선택을 의미했다. 무릅쓰기 위해서는 선택이 자유가 중요하며, 또한 합리적 판단수단인 확률(통계)이론의 발달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보면, 합리적 위험감수야말로 근대적 인간의 존재조건이며 소중한 덕목임을 알 수 있다. 위험이 클수록 이익도 크다는식의 투자가의 태도가 이를 잘 보여준다. 217

 

심리학적 접근 - 일반인들은 (1) 정보를 쉽게 얻고 떠올리기 쉬울수록, (2) 나와 관련성이 클수록, (3) 근접한 것일수록, (4) 드물지만 피해가 큰 것일수록, (5) 새롭고 강제된 것일수록, (6) 손해가 클수록, (7) 언론에 보도된 것일수록, (8) 잠재적 성격이 클수록 더 위험다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219

 

위험은 낙인효과 stigmatization를 낳기도 한다. , 위험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위험과 연관된 지역, 상품, 기술 등에 대해 과도한 거부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가령,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 후 낙인효과로 후쿠시마에서 생산된 상품은 물론 후쿠시마 출신들도 차별을 받았다. 한편,2008년의 광우병 파동으로미국산 소고기에 낙인이 찍혔는데, 이는 위험의 사회적 증폭에 따른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220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에서 얻은 객관적 지식을 토대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사회에서 위험은 사회와 무관한 객관적 지식에 대한 것으로 정의되고, 그에 따라 정치적 영역을 빠져나와 전문가의 영역에 갇히게 되었던 것이다. 가령, 최근 들어 환경오염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거센데, 이는 실제로 환경이 오염되었다는 사실 못지않게 개발 위주의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가치판단이 크게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현대사회에서도 위험은 사회질서의 유지(복원)이라는 기능과 역할을 유지하고 있다. 221

 

현대사회에서 사회의 안전망을 보장하는 대표적 제도로는 보험과 과학을 들 수 있다. 전자는 피해를 보상해 준다는 점에서, 후자는 전문성에 기반하여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기후변화와 같은 위험의 경우에는 부담이 너무 커서 과학은 해결책을 제때 내놓기 힘들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벡은 이런 조건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탈근대가 아니라 성찰적 근대화라고 주장한다. 이때, 성찰성이란 반성을 넘어선 자기-대면을 말한다. 225

 

정상사고란 일종의 시스템 사고로서, 원전과 같은 고위험 시스템은 정상적으로가동되고 있는상태에서 사고가 발생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는 고위험 시스템의 경우에 사고를 피할 수 없음을 뜻한다. 228

 

벡의 패러독스 - 그 핵심에는 불확실성이 자리 잡고 있다. 전반적으로, STS 학자들은 이 개념을 중심으로 위험문제에 접근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노력은 과학기술과 사회의 미시적·상호작용적 관계를 충분히 반영하면서 과학적 합리성(전문성)과 사회적 합리성(민주성)을 함께 반영한 이론들과 실천방안의 도출로 이어졌다. 231

 

영국 컴브리아 지방의 목양농 사례를 통해 과학모델에 기초한 전문가들의 지식(전문지식)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와는 질적 성격을 달리하는 지역주민들의 지식(민간지식, 지역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실패는 지역주민들에게서 기원한 지식 투입을 통해 방지될 수 있었다는 입장을 취한다. 235

 

3.  인간과 사물의 동맹맺기: ‘행위자-연결망 이론

 

Actor-Network Theory: 이 이론은 과학과 기술을 보다 크고 강한 연결망 구축의 산물로 본다. 이는 마치 권력 형성에 대한 정치적 분석과 비슷한 성격을 띤다. 즉 정치가가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동맹자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려 노력하듯이, 과학자와 엔지니어도 이와 동일한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다만 ANT의 행위자들은 인간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비인간들(예를 들어 생물, 기계, 텍스트, , 건물 등)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이질적 행위자들이며 인간과 비인간의 행위성 사이에 근본적 구분은 없다고 본다. 119

 

다른 STS접근과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성격과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 특징을 들자면, 형용모순인 듯이 보이는 행위자-연결망이라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들이 행위자인 동시에 연결망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함축한다....둘째, 인간과 비인간 요소들을 한 연결망 내의 행위자들로 동등하게 고려한다는 점에서 다른 STS 접근들과 구별된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마주하는 것이 인간이건, 텍스트건, 기계건 동일한 분석적 묘사적 틀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이 원칙은 인간에게만 행위성을 부어하는 것을 당연시했던 근대적 사회과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기호학에서의 노드가 바로 행위소이다..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의 정체성은 연결망 내에서 다른 행위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규정된다고 본다....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불필요한 이분법을 극복하기 이하여 사회기술적 연결망또는 이질적 연결망이란 용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한다. 122-123

 

과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질적인 행위자들(탄저균, 가축, 농민, 수의사, 위생학자, 언론, 정부 등)이 과학자의 실험실과 연결되고 이를 통해 구축된 공고한 이해관계의 동맹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탄저병 백신을 둘러싼 이 행위자-연결망이 구축되기 전과 후의 프랑스 사회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사회 역시 연결망 구축의 원인이 아닌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27

 

이러한 세 가지 원칙( 일반화된 불가지론-전문가가 아니다/ 일반화된 대칭성-비인간과 인간 동일 묘사/자유로운 결합-정체성을 미리 규정하지 않는다.)에 따라 칼롱은 생브리외 만의 가리비 양식 실험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이 실험의 성공을 좌우했던 중요한 실체들은 3명 연구자 외에 가리비, 어민, 동료 과학자 들이었다. ......실험이 처음 제안된 지 10년이 자난 뒤 가리비 양식에 대한 확증된 과학적지식이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과학지식과 사회관계가 공동생산된 것이다. 136-137

 

ANT는 정부, 기술, 지식, 텍스트, ,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한 관계를 추적함으로써 과학과 기술의 블랙박스를 열고자시도하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이라는 산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이고, 따라서 그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왜 그리고 어떻게 현재와 같은 과학과 기술을 우리가 갖게 되었는가를 용이하게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1

 

우리는 어떤 연결망이 다른 것보다 더 권력이 있는지 여부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우리는 어떤 결합이 다른 결합보다 더 강한지 여부를 물어야 한다. 행위자-연결망의 권력은 그것을 구성하는 결합들의 효과(또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경우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당신은 무력할 것이다. 당신이 권력을 행사할 경우네는 당신이 아니라 타인들이 그 행위를 수행할 것이다....따라서 권력은 결코 원인이 아니라 효과인 것이다.” 124

 

미시/거시로 구분하는 것은 이론적·개념적 이원론을 채택하는 셈이 되는데, 이는 성공하여 규모가 커진 행위자-연결망을 물화하는 효과를 초래함으로써그러한 대규모가 성취되고 조심스럽게 유지되는 방법들을 모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125

 

번역을 통한 행위자-연결망의 형성과 작동은 세 단계를 포함한다. 첫 번째는 거시세계를 실험실의 미시세계로 축소(또는 환원)시키는 단계를 보여준다. 두 번째는 제한적인 연구집단을 형성하여 이들이 도구와 능력의 강한 집중을 통해 기술과학 지식 또는 기계를 고안하고 탐색하게 만드는 단계를 말한다.(연구집합체) 세 번째는 언제나 아주 위험한 거시세계로의 복귀 단계인데, 실험실의 미시세계에서 생산된 지식과 기계가 과연 거시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는불확실성이 매우 크다.(ANT에서번역은 언어적 차원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의 개념이다..다양한 인간과 비인간들 사이에 이질적 연결망이 구축되는 것이다.) 128

 

가리비 양식 연구에 관한 논문에서 칼롱은 엥테레스망 interessement'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 엥테레스망의 구체적 양태들은 시대에 따라, 연구프로젝트에 따라,심지어 학문 분과에 다라 달라질 수 잇다. 그러나 모든 엥테레스망은 하나의 동일한 논리를 따르는데 그것은 군사적 용어로 필수통과지점의 논리라고 지적하였다. ..“당신의 목표를 성취하려면, 당신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려며, 당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려면, 당신의 크기를 느끼게 하려면, 빨리 우리의 실험실로 와서 우리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라!” 135

 

어떻게 실험실에서 얻는 것을 잃지 않고 번역3’에 달성할 수 있을까? 칼롱은그 해답이 사회의 실험실화 있다고 지적한다. 연구 실험실에서처럼 세계가 행동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숲(즉 거시세계)을 샅샅이 뒤지고 다닐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는 실험실의 복제판이 모든 전략적 지점에 위치하도록 세계를 변형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실험실화란 표현은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로 축소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행위를 실험실에서와 같은 것으로 틀 짓거나 미리 형성하기 위하여 실험실을 사회의 여러 장소에 이식하는 것을 말한다. 138

 

ANT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칸트 이래 서구사상을 지배해 왔던 근대주의적 이분법(주체/객체, 인간/비인간, 사회/자연) 자체를, 그리고 그러한 이분법에 내포된 비대칭성(즉 인간중심주의)을 일반화된 대칭성의 방법을 통하여 극복하려는 것이다. 144

 

볕뉘.

 

1. 읽는 시간보다 옮겨적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옮기면서 완급을 조절하고 디테일을 다시 스미게 할 수 있다. 결국 득인 셈이다.  책 잘 읽히는 책방에서 읽고, 두번 째 친구를 만나고, 다시 우연히 만나면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2. 브로노 라튀르,  언젠가는 다시 읽어야지 했는데 한국과학기술학회에서 이렇게 대중적인 책을 만들어내었다.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3. 위의 책으로 오는 5월 10일 늦은 7시 참터(시민참여연구센터)에서 STS세미나의 일환으로 책나눔이 있다. 과학기술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더할 나위없는 입문서가 될 것이다. 저자들의 연결망을 참터가 강하게 가지고 있으니, 더 궁금한 것이 있다면 활용하면 될 것이다.

 

4. 사유의 지평을 많이 넓혀줄 것이다. 위험에 대한 개념사와 행위자-연결망 이론은 새로운 관점을 주게될 것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들은 타고난 물활론적 경향 덕분에 어른들이 가르쳐줄 수 없는 감수성을 갖는다고 느낀다.아이들은 꽃을 주울 때 친구를 만들어주려고몇 송이를 더 줍는다. 길거리의 돌멩이가 다른 풍경을 보게 해주려고 위치를 옮겨놓거나, 이사을 가서 힘들어하지 않도록 돌멩이를 주운 자리에 다시 가져다놓기도 한다. 이처럼 세상을 살아 있는 것으로 상상하면 자연히 연민이 생겨난다." 59

 

 

볕뉘. 연민한다. 이상한가. 한번 보면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울지도 모른다. 그리운 것을 그리워하면, 도 다르게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부끄러워 말자. 감각이 없어지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 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름다움은 어울림이다. ‘한 아름처럼 아름은 전체를 포섭한다. 미와 같은 한자보다 더 상위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아름다움의 아ᄅᆞᆷ은 우리말의 고어에서 의 뜻을 지니는 명사로 해석될 수 잇다. “아름다움나답다이다. 아름다움은 객관인 동시에 주관이며 궁극적으로 나의 체험의 요소 간에 발생하는 느낌이다. 아름다움은 나다운 것이며 나의 느낌화 되는 것이다. 11

 

아름다움이 참을 꼭 전제로 할 필요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참을 전제로 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공허한 것이다. 아름다움이 없는 참은 맹목적이다. 참이 없는 아름다움은 중후함을 결여한 저차원의 것이며, 아름다움이 없는 참은 국부적이며 사소한 차원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다. 15

 

진정한 참은 생성적일 수밖에 없다. 진리를 안다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이라는 생각은 진부한 도덕의 착오일 수도 있다. 진리를 아는 것은 이 세계를 왜곡하는 것일 수도 잇다. 진리는 계절에 맞추어 밥상에 오는 반찬처럼 시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참은 발견되는 것이며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새로운 느낌의 창조를 불러내는 아름다운 진리리가 되어야 한다. 진리의 실현은 느낌의 아름다움을 증진시키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16

 

에술은 스스로 그러함의 미니멀리즘을 지향해야 한다. 미니멀리즘은 스스로 그러함의 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나의 몸을 형성하는 모든 기의 사회 간의 내면적 어울림을 우리는 이라고 부른다. 이 외부로 표출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이라 부른다. 아름다움이란 맛과 멋이다. 맛과 멋은 몸의 건강이며, 궁극적으로 몸이라는 사회가 다시 거대사회를 이룬 문명의 건강이다. 20

 

삶을 위한 예술은 있어도 예술을 위한 삶은 없다는 것이다. 달콤함을 정제한 것이 설탕이며, 감칠맛을 극대화한 것이 인공감미료다. 정제된 미로서의 예술이나 극대화된 맛으로서의 조미료 따위보다 건강하고 온전한 삶을 위한 투박한 재료, 소박한 정신이 필요한 시절이다. 화려하든 소박하든 간에 그 대상이 나의 삶을 체감할 수 있게 해줄 때라야 더 친근해지는 것이다. 61

 

볕뉘. 따듯한 설명이 마음을 끈다. 도올의 발문도 좋다.  삶을 의식한다는 것. 더구나 서로의 삶들을 의식한다는 것. 맛을 내고 멋을 내고의 사이에는 나를 채색하는 과정도 들어있는 것이다.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 끌고 갈 수 있다면, 조금 멋을 부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 좋은 일이다. 정치도 급급해하면 안 된다. 아름다움이 비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되돌아 봄을 요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