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따듯한 "가슴"

 

 

등의 맞은편에 가슴이 있습니다. 손등의 맞은편은 손바닥이라고 하지만 손가슴이라 부르는게 맞습니다. 발등의 맞은편은 발바닥이라고 하지만 발가슴이라 부르는게 맞겠습니다. 그래서 귓등의 맞은편은 귀가슴, 눈등의 맞은편을 눈가슴, 콧등의 맞은편을 코가슴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본다는 것은 세상의 의미 있는 것을 눈가슴으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소리 중에 가치 있는 소리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또한, 걷는다는 것은 대지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 본질에 있어 낯선 것인 세계와 내가 소통하는 방법은 그처럼 ‘끌어안음’을 통해서만 실현됩니다. 그러나, 끌어안음은 한 사상가가 표현했듯이 ‘목숨을 건 비약’입니다. ...내게 목숨같이 중요하던 관성을 성찰을 통해 뒤집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낯선 세계와 만날 수 있습니다. 낯선 세계에 대한 사람의 포옹속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낯선 세계와의 포옹을 통해 만들어지는 ‘결’입니다. 낯선 세계일뿐인 ‘물’은 나와의 포옹을 통해 ‘물결’이 됩니다. ‘바람’은 ‘바람결’이 됩니다. ‘숨’은 ‘숨결’이 됩니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존재로서의 예술가는 ‘결’을 만드는 존재입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결’은 금강저의 투철함과 천의무봉한 선녀옷의 한없는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습니다. ‘결’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끼새의 부리질과 밖에서 알을 깨주려는 어미새의 부리질이 정확하게 일치하여 새끼새가 세상에 태어나는 ‘즐탁동시’의 절묘함이기도 합니다.

‘결’을 창조하는 예술가의 작업은 매체에 대한 숙련성만으로 달성되지 않습니다. 미야고프스키‘가 말하듯 ‘시어 하나가 창조되는 것은 수십톤의 흙을 걸러 1g의 라듐을 만드는’과정이며, ‘노신‘이 말하듯 ‘소가 취하는 것은 거친 풀이나 세상에 내 놓는 것은 젖’인 것처럼 감상자가 눈물을 흘리기 위해 창작자는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결’은 창조되지 않습니다.

저의 창작관은 ‘90%의 학문과 9%의 실천과 1%의 영감’으로 사진은 창작 된다는 것입니다.

사진가는 혹은 예술가는 시대의 본질을 관통하는 주제를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대에 이룩된 학문적 성취를 뛰어넘는 독자적인 학적세계와 시대의 본질에 대한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학문일뿐 아직 예술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견해가 실천을 통해 확인되고 검증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운동일 순 있어도 아직 예술일 순 없습니다.

공자님은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아는 것이 학문이라면 또 좋아하는 것이 가치를 실현하기위한 실천이라면 즐기는 것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며 체화입니다. 즐거움은 이론과 실천을 통해 이르고자하는 궁극이며 ‘결’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즐거움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술이 됩니다. 예술가가 학자의 모습으로, 운동가의 모습으로 비출 수 있는 것은 현실발전의 법칙과 예술발전의 법칙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래줄임, 이시우 옥중편지 07.05.01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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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어느 시인은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꽃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호명되지 않는 순간, 머뭇거리는 순간, 자주 마주치지만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모르는 사이. 그 사이가 마음에 든다. 이름을 애써 불러 sos 타전을 할 위급함이 아니라면, 그 사이 사이 굴곡과 멈칫이 더 끌린다. 새벽과 아침. 저녁과 밤, 밤과 새벽. 너와 나만 아니라 너와 나의 사이. 명사와 동사의 부산스러움에 형용하거나 꾸밈이 날개짓하는 꼴.  어느 틈엔가 님의 졸음 한켠에 두고 나온 바람결, 은은한 향기, 별빛, 파도 소리... ...어쩌면 잠시 멈춤, 그것이 더 빠른 장단으로 내달음할지, 중중모리로 느려지는지 모르지만 의도를 벗어나 사이. 사이사이를 들여다보는 예민함과 셈세함을 곁들인 너-나의 변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이 민주주의. 주의를 뺀 명사 민주만 탐하지 않는다. 민주라 이름부르기에 앞선 모호함. 설레임같은 것. 사이. 믿지못할 명사같으니라구! 끝없는 발품만 파는 동사같으니라구. 그런 것 말구 좀 허접하면 어때!

 

품 다  

 

 하다. 해라. 하자. 해야한다 보단 품는 것이 좋다. 겉절이도 좋지만 발효시킨 젓갈이나 시간에 삭힌 묵은 음식이 끌린다. 언제부터 일들에 숙성이란 몸말이 걸려버린다. 그래서 결과를 져버리고 팽개쳐버린 것은 아니지만, 수다같은 과정이 눈가에 어린거린다. 꼭 해야하는 결정문과 통고문보다 소수의견에 마음이 걸려 아프다. 그래서 끙끙거린다. 남이 눈치를 채든 말든, 그 한마디에 걸려 동불안, 좌불안이다. 그러다보니 나만 품기에는 억울하기도 하다. 굳이 알려야 되느냐고 타문자문도 하지만, 역시 아직 익지 않아 맛이 덜 난다. 가끔 느낌이 통하는 애서가의 글과 마음을 만난다. 가끔 말하지 않아도 찌릿한 사람들이 있다.  유명을 멀리하는 괴팍함이 있어 문제이긴 하지만 함께 품어 맛을 낼 님들, 그 생각들이 여물어 여쭙지 않아도 저만치 먼저 갈 일들이 있으면 좋겠다 싶다.  지금여기를 애틋해 하지만 온기도 흐르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온기도 쌓이다 보면 넘치는 곳도 있을 것이고 뫔 맞는 것도 이렇게 품고 숙성하고 저절로 스르르 풀린 일이기에 느긋해지고 볼 일이다.

 

 

생각 

 

 세상에 혼자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나? 자본의 그물에 걸려 파닥거릴 뿐 생각마저 꿈마저 여기를 벗어나 저기에 머무를 수 없다.  그나마 운신의 여력이 있는 것은 몸뚱아리와 맘속 생각의 정원이다. 마음의 경계, 울타리를 뜯고 고치고, 저기 멀리 또다른 과실나무를 심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로 늘 딴 생각이다. 딴 생각이라야 뭔 대단한 생각이겠는가만, 그래도 몸뚱아리보다 갇힌 뫔에서 좀더 낫게 움직거려 볼 수 있다는 점때문에 생각을 품는다. 그 생각흔적을 남기려 애쓴다. 휘발성 강한 그 쪽지들은 근력이 없어 아직 안개같다. 뭉쳐뭉쳐 빗방울이라도 후둑후둑 떨어지면 좋으련만, 여물지 않은 익지 않은 그래도 조금 색다르고 맛다른 정원을 여기저기 두어 마음은 배부르다. 또 어느 태풍같은 앎의 소용돌이에 빠져 초라해질지 모르지만, 그 읽고 생각하고 구름같은 것이 더 익숙해져 버린다.

 

 

마실-산책 

 

 더운 여름 무더위와 호흡하다 맺힌 땀방울. 등줄기를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물줄기. 숨을 멈추게 만드는 일상. 동안거로 무뎌지는 몸의 갈증들. 거친 땀한줄기로 풀어내는 몸마실. 정해진 생각. 정해진 비평, 짜여진 생각틀에 갇혀버린 시간들. 이해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다른 생각이나 이해를 생각조차 못하는 기름기들. 공과 사, 생각길을 걸으려하지 않는 굽굽함과 답답함. 이리 먹구름 드리우는 날이면 책보따리, 생각보따리들고 마실나선다. 책마실, 생각마실. 그 가운데 사람마실은 으뜸일텐데. 아직 여물지 않는다. 머리 나눌 이보다 마음 나눌 이, 몸의 겹침이 간절하지만 지인들은 늘 바쁘다. 몸의 동선들은 가혹할 정도로 넓고 깊다. 세상의 곤혹함과 일의 고삐에 매인 벗들도 맘마저 매여 아직 따듯한 온기마저 나누기에 힘든 님마실. 언젠가 속맘도 통해 저기 책안의 님이 아니라 책밖의 님을 만나 달님산책, 달림마실, 생각산책도 부쩍 하고싶은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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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너를 탐하면서부터이다. 님에게로 가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 길이 너란 걸 말이다. 저릿저릿 스며드는 너를 갖게되면서 불편하다. 그러나 너는 차별도 차등도 두지 않아, 저 지구 한바퀴를 안을 수 있는 말은 너밖에 없다. 저 마음의 끝과 디뎌온 역사의 보폭을 느낄 수 있게 해줘 고맙다. 너를 헤아리는 순간, 네가 읽히는 순간 네가 내뫔 속 어딘가 꿈틀거린다.  너로 가는 길 너로 가는 길목, 너가 되는 교각이다

 

 

앎과느낌 

 

 앎과 함에 갇히면 느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느낌은 그렇다고 온전히 머무름에서 오지 않는다. 함과 앎의 온기가 가시지 않고 남아있을 무렵, 며칠이든 몇달이든 차고 기울도록 마음도 몸도 열어둘 때야 조금 조금 기웃기웃 하는 것이다. 너무 기댈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기엔 아쉽다. 유대의 밑절미가 되기도 하기때문이다. 앎과 함, 그것을 벼리게 하거나 또 다른 깊은 맛을 보게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삶 

 

 삶을 얘기할 수 있을까? 동물처럼, 짐승처럼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조건을 공유하고, 세상이 삶에 말걸 수 있을까? 작은 울타리로 그래도 삶의 조건이 가혹하더라도 삶을 나눌 수 있을까? 머리 속, 생각 속에서 벗어나 삶을 그래도 조금 다르게 만들 수 있을까? 삶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농도가 진해질 수 있을까? 공동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스러우면서도 일상의 합, 일상의 곱인 삶이 곁에 와서 친할 수 있을까? 막연함이 아니라 조금 더 세세함이나 예민함이 스며드는 삶을 나눌 수 있을까? 철학의 머리말이 아니라 가슴을 적시고, 마음과 몸에 남고 육화된 몸말로 생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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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 그래요 몸과 맘을 합친 말이 뫔이에요. 사전에 없는 말이죠. 요즈음을 조금씩 쓰고 있는 듯 싶어요.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수소문하다가 쓰인 흔적이 있어 놀라기도 했어요. 말 만드는 사람을 조심하란 말씀이 있죠. 말 옮기는 사람..?  그래도 뫔이란 말은 마음도 몸도 놓입니다. 마음과 몸 사이에서 방황할 때 그 말이 있어줘 고맙더군요. 뫔 맞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죠. 그렇지 않답니다. 뫔 맞는 사이가 늘면 늘수록 좋은 것 아닐까요. 예민하고 까칠함에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사이. 모임과 마음을 나누다가 이 녀석도 이들과 같은 꽈다라고 생각해봅니다.  삶의 동반자들 아니겠어요. 뫔 맞는 벗들, 님들!! 그래 시작해요. 마음과 몸의 온도를 높여보죠. 모임에서....동시대에 살면서 조금 더 넓고 깊이.....은밀하고 화려하게..도 좋군요.

 

 

짓다 만들다

 

사람들과 모임 사이, 마음을 나누다보면 오해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선입견이 들 때가 많습니다. 모임을 고르려고 하는군요. 소비의 욕구를 느낍니다. 그리고 차버리는거죠. 그런데 좋은 사람들 자장이 멀리가겠습니까? 그 나물에 그 밥!! 그렇지 않아요. 사연도 있고, 정말 못참을 일들이 많죠. 떠나기도 하고 만나기도 하고 그런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이런 조금 멀리보면서 생각에 잠겨보기도 합니다. 만들면 어떨까 지으면 어떨까 중이 절을 떠날 수도 있지만 절을 고쳐 쓰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몸이 무거운가 봅니다. 마음하고 몸하고 뫔을 푹 담그는데 익숙하니 말입니다. 단소리보다 쓴소리, 쓴 약을 서로 삼키는데도 익숙하고 근력도 생겨 좀더 마당을 넓고 크게 쓰면 어떨까 생각도 해봅니다. 짓고 만드는 기본근력을 키워서 말입니다.

 

 

안-곁-밖 

 

ㅇㄹ은 귀족본능보다 서민본능이 있습니다. 음식 가리지 않구 격과 절차에 맞춰 드는 음식을 별반 좋아하지 않습니다. 육해공군도 부위도 따지지 않으려하지만...세월에 인이 박혔네요. 생각해보니 이것저것 구분도 하고 말에요. 막걸리 생각나는 주말이네요. 예전 따로 또 같이라는 문고판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때 구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안과 곁, 그리고 밖. 제도안, 제도곁, 제도밖을 나눕니다. 그렇게 분리해서 사고해야 조금 더 활동이 입체적이고 생동감이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선거때만, 제도권 안만 호시탐탐 하는 문화가 암묵적으로 있구나 하는 것을 여깁니다. 그렇게 사고하다보니 정치적 중립이란 모호한 표현이 나오기도 합니다. 예술의 중립처럼 말입니다. 그런 연유에 제도 안과 곁, 밖....사회문화적 근력이라고 해야될까요. 끊임없는 사람들의 교류를 시간에 맷집을 갖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고 여깁니다. 고기위 부위를 아직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지만 활동의 삼중주를 위해 안곁밖을 나눠 접근하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활동 스타일별로 뫔에 맞는 것이 다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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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선면 

 

우리 마음 한점 한점 만나 불꽃을 낸 적 있느냐 우리 고민 한점 한점 섞인 적 있느냐 늘 대의에 충실하다고는 하지만 그 대의 믿을 수 있느냐 어쩌면 우리라는 실체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것은 아닐까? 믿고 의지하는 이들의 마음 속, 그 따듯함이 한점한점 섞이면 얼마나 좋을까? 점-선-면 어느 화가의 책이름이긴 하지만 훨씬 더 그 이전부터 아끼고 사랑하는 말이다. 나와 너가 점으로 만나다보면 점과 점이 선이 되고 나-너의 흔적들 그 선들과 선이 만나는 날 마음은 요동치기도 할 것 같다. 언제부턴가 점과 점이 만나는 것도 쉽지 않는 일이고 그렇게 만나 마음이 사르르 녹아 더 큰 점이 되는 일도 만만치 않다. 그렇지만 마음을 살피고 보듬다가 일상에 새긴 선들을 음미하는 일들은 뿌듯하기도 하다. 그래도 여전히 점과 선, 선과 면....의 낙관을 믿는 편이다.

 

 

점선과 실선

 

실선은 너무 강하다. 그래서 주저스럽긴 하다. 점선 약하디 약하지만 없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나와 너 사이  점 점 점점   점....약한 관계가 좋다. 늘 강렬함만 원하는 나이가 아니어서 좋다. 점선의 점 점  점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어 좋다. 그렇게 너와 약한 관계도 좋다. 너무나 뜨겁지 않음. 또 다른 온도의 마음의 선을 유지할 수 있어 괜찮다. 그렇게 조금 낯선 이들과 관계맺고 싶다. 조금 더 다른 생각, 튀는 생각, 낯설 일상들을 나누고 만들고 싶다. 그러다가 떨어질 수 없는 사이. 실선이 되어 또 다른 이에게 점 점...선을 내밀고 사귈 수 있다면 말이다. 점선과 실선은 날선 우리 몸을 많이 열어준다. 점선을 이야기하는 순간 님이 열어두는 마음 안에 내 마음이 비칠 수 있어 설렌다. 실선을 이야기하는 순간 채곡차곡 다져온 따듯함으로, 그 따듯함은 또 다른 점선들에게 열려 있어 든든하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만 남긴 채  님은... ... 님은 좋다. 그 대명사의 온도의 추락과 부상을 다 담고 있다. 님은 때때로 뜨거움을 식힐 수 있어 좋다. 님은 때때로 차거움을 따듯하게 해줘서 좋다. 나-너,  너가 님이 되어 늘 기다리고 설레게 하는 순간. 님으로 발화하는 순간, 님의 금빛을 안을 수 있어 좋다.  바람, 하늘, 꽃, 숲, 나무, 길......그 사이사이 나눈 마음은 여전히 늘 기다린다. 더 기다려진다. 그리워 너를 그린다. 그리워한다. 책마실길, 몸마실길......그래 사람마실 길로 다가서고 싶은 마음을 꼴깍 삼킨다.

 

 

시공간

 

 울타리 안에 머물다보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내맘같지 않다. 그래서 물끄러미 그 말앞에 생각을 붙인다. 생각시공간 - 몸도 삶도 담보를 잡혀있지만 생각이라도 마음껏 풀어주고 싶다. 책그늘에서 만난님과 생각을 섞고 나누다가 어쩔 수 없음에 낙담도 한다. 그래도 생각끈을 가진 이들과 같은 시공간을 살아내고 있음에 감사한다. 공간과 시간, 거꾸러 거스를 수 있을까 시간을 짓거나 만들 수 있을까?  공간을 꾸미거나 만들 수 있을까 새로운시공간을 꿈꾼다. 아직 마음으로만 꿈꾸지만 너-나가 함께 고민을 나누고 섞다가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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