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사랑)의 과잉 - 담론성장, 해체 그리고 열정의 분산


어쩌면 삶의 진정한 의미는 사실상 기억 속에서만 재구성되어 드러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후회에서 벗어나기위해 우리는 맹렬하게 추억을 다시 구성하려 노력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한 사람을 끈질기게 기억하는 것은 사랑할 수도 있었던 다른 여러 사람을 모두 잊게 만들고, 아름 다웠던 추억 하나만을 질기게 반복해서 상기하는 것은 아름다울 수 있었던 수많은 다른 추억들을 몰아내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발라드를 통해 추억을 되새기는 일은 과거를 기억 속에 버려두지 않고 새롭게 창조하려는 의지를 반영한다. - 본문 116쪽에서


1.1 우리 대중가요 속에 나타난 낭만적 사랑을 다룬 한 논문에서는 시대에 따른 사랑의 형태를 임을 잃은 사람들의 사랑 노래(1950년대까지), 낭만적 사랑의 정착(1980년대까지), 낭만적 사랑의 현실과 이상 간의 갈등 표출(1990년대 이후)로 나눈다.


1.2 귀는 다른 어떤 기관보다 싫증을 덜 내는, 인체에서 가장 보수적인 기관이라고 한다. 더욱이 가장 예민한 시기인 10대중반부터 20대 초반에 심취한 음악은 결국 인생 전체의 사운드 트랙이 되어 버린다. 이런 이유로 이동진이 지적했듯 김민기나 송창식을 통해 475세대론을, 조용필이나 이문세를 통해 386세대론을 논할 수 있을 터이다.  흔히 386세대라 일컬어지는 세대를 중심으로 이 이전과 이후는 너무도 확연한 변화를 보인다. 트로트, 포크와 민중가요를 듣는 세대와 댄스가요와 랩, 힙합을 즐기는 세대. 전혀 다른 두 세대를 모두 이해하고 연결할 수 있다는 데 386 세대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사랑에 대한 과도한 반응과 , 연애를 끊임없이 유포하는 일상은 뭔가 석연치가 않다. 어찌 그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며, 인류사의 지고지순하거나 잉태되어 있는 것인데 과민반응하는 것은 아니냐는 반문도 있겠다. 하지만 대중매체를 통한 반복-충전-재생산의 구조는 너무 단순하여 질리게 만들지만, 그것은 어른들의 이야기다. 민중가요를 떠나 몸에 베인 노래, 무의식중에 흥얼거리는 노래가사는 글쓴이의 말처럼 온전히 대변해주는 것 같다.  나를 갖고 움직이는 것은 통속이 대부분, 그렇지 않은 것은 약간.

커서 알게 된 일이지만 많은 어른들이 과거에 갇혀산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자신이 겪은 노래가사에 생각과 테두리를 치고, 그 욕망에 갇혀 살고 있다는 느낌까지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실존의 나-욕망)은 단순하면서도 그 벽은 단단하다고 여긴다. 더구나 연애가 지상명령인 듯. 조장하는 시대적분위기는 일상뿐만 아니라 의식 속에 자리잡아 내가 된지 오래이다.

사랑에 대해 이토록 과도하게 집착한 시대가 있었을까? 열정을 이토록 연애에 대한 생각으로 응축시킨 적은 있을까? 자본의 이식만큼 연애의 이식이 자리잡았을 것이다. 삶이 버거워질수록 그 간절함은 더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에서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후회와 미련으로 증폭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구체적 모습으로 표현되고 다양화되는 것은 '통속'의 성장이라고 바라볼 수 있을까? 연애에 대한 다른 생각, 결혼에 대한 다른 관점, 10대와 20대의 귓속말로 다르게 속삭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복이라고 여겨야 하나?

사랑이란 노래의 제재가 60%가 넘은 시대에 살고 있다한다. 50년대까지 50% 안쪽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 우리의 맘을 돌이키는 노랫말, 추억을 살려내는 말들 가운데 10에 6이 사랑이란 말이다. 상품에 둘려쌓여 있는 만큼, 당신의 과거와 현재, 앞으로가 그것에 둘려쌓여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랑이란 말엔 남,녀가 있을 뿐.  삶에 대한 애틋함이나, 후두둑 긋는 빗방울이나 사회를 보고, 친구를 보고 울컥거릴 무의식의 힘이 아무것도 없는 절름발이라는 말이다.

맘 속에 내 님만 두고, 맘 속에 될 님만 두고 산다는 것은 가혹한 표현일까?  나도 그렇게 길러지고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가게 될 것이지만, 과잉의 허전함은 너무 냉혹하고, 현실은 없다. 그렇게 대체물만 바꿔치기할 뿐은 아닐까? 애틋함은 과장되고 집중되고 중앙집권적인 것은 아닐까? 대상을 분산시키고 나눠주고, 잔잔함에 충만함이 깃들여 있는 것은 아닐까?


 

<애수의 소야곡> 남인수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구나








<길가에 앉아서>, 김세환



가방을 둘러멘 그 어깨가 아름다워

옆모습 보면서 정신없이 걷는데

활짝 핀 웃음이 내 발걸음 가벼웁게

온 종일 걸어 다녀도 즐겁기만 하네


길가에앉아서 얼굴 마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우릴 쳐다 보네


라라라라라~~~~~~~~~~~








<사랑에 관한 충고>, 이승환


넌 사랑을 해본 적 있니

아마 한번쯤은 있을 거야


어떤 기억이 남아 있니

있는 그대로를 생각해봐


사람들은 가끔 착각하지

서로의 조건들을 좋아하고선

이게 사랑일 거라고


때로는 자신을 숨기며

드러내는 모습을

사랑을 위한 미덕이라 여기지



가식된 사랑은 언제나 솔직한 사랑을 이기고

자신의 거짓된 욕구를 위한 이별에는

참된 사랑이란 미화를 하지



그래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거야

우린 어느 정도 현실적인 사람들

서로 그런 걸 이해하면 되는 거야



 

<결혼>, 015B


1. 어렸을적 우리가 생각한 결혼은 셀레임 이었지

가장 사랑하는 이와 평생을 같이 산다는 것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배운것은 결혼이란 조건들을 맞추는것

서로의 학벌을 들추며 집안은 어떤지 중요하지

사랑만으로는 살수없다 강요 하면서


2. 결국 결혼이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 아냐

적령기에 만난 조건이 맞는 사람과 하는것 어짜피

서로의 정이란 살다보면 자연스레 드는거라 여기겠지

그런 사랑은 내버려 부모가 골라준 일등배필 만나

신데렐라되어 평생 살면 되잖아


Bridge : 결혼은 서로의 값을 재는 거래가 아닐거야

사랑을 완성시켜가는 생활일






<벌써일년>, 브라운 아이즈



처음이라 그래 며칠뒤엔 괜찮아져

그 생각만으로 벌써 일년이

너와 만든 기념일마다 슬픔은 나를 찾아와.

처음 사랑고백하며 설렌 수줍음과

우리 처음 만난날 지나가고

너의 생일에 눈물의 케익 촛불켜고서 축하해.


I believe in you. I believe in your mind.

벌써 일년이 지났지만

일년뒤에도 그 일년 뒤에도 널 기다려


너무 보고싶어 돌아와줘 말못했어

널 보는 따뜻한 그의 눈빛과

니 왼손에 껴진 반지보다 빛난 니 얼굴 때문에.

 






 

 

 

 

 

2


현재 '대중문화'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심성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유행을 좇고, 문화를 소비하는 대중적 감수성의 기원은 1930년대이다. 당시 자본주의 문화가 대박을 기원하며 도박에 빠지고, 그렇게 번 돈으로 백화점을 드나들며 유행을 따르는 문화를 만들었다.

그렇게 식민지 조선의 사람들은 근대와 만났고, 그러면서 조금씩 변해갔다. 식민지 시대에 발표되었던 문학작품들과 대중잡지에 실린 짤막한 글들을 살펴나가면서, 저자는 그 변화의 근저에는 여러 대중매체들을 통해 형성되기 시작한 '대중적 감수성'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1. 자본주의적 상품경제는 유행과 대중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욕망을 표준화한다. 그리고 상품의 소비를 통해 표준화된 욕망을 충족시키도록 요구한다. "1930년대 경성사람들도 백화점 진열장 앞을 오기만하면 이 유행균의 무서운 유혹에 황홀하여 걸음것기를 잊고 정신이 몽롱화하여 다 각각 자기의 유행세계를 설계하려"들었던 것이다.
 
1.1 백화점을 진정으로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일 뿐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소수들이 만들어 내는 욕망의 표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값싼 세일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대리 충족할 뿐이다. 김기림은 ' 갖고 싶은 것이 무수하게 번식하고 또 그 자극이 쉴 새 없이 연달아 오니까 거기 따라서 사람들이 욕망의 창고에는 빈 구석만 늘어갈 수 밖에 없다.
 
2. 과도기사회, 노름은 결국 무사태평하고 열정적인 이 사람들의 신앙, 지식, 관심, 야심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달라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때문에 그들은 사회의 주변부에서 영원한 아이로서 보람 없이 살아가게 되고, 그리하여 우연놀이는 습관이자 제2의 천성이 된다.
 
3. 유행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다가와서 어느 틈엔가 욕망을 설득하여 거기에 추종하게 만든다.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인 방식으로 계몽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의 형태로 우리의 감각 속에 각인되는 방식으로 욕망을 설득한다. " 유행이란 참말 이상한 힘을 가졌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금욕케 하고 자율적으로 인고케 하는 점에 있어서 공승이나 목사의 설교 이상의 힘을 가졌으며 사회생활을 규제하고 관리하는 점에 있어서 여하한 법률보다도 더 우세의 힘을 가졌습니다."
 
3.1 그것은 상품의 형태로 우리에게 꿈과 함께 주입되며, 유토피아나 신분상승, 달콤한 낭만 등의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는 마침내는 우리 모두를 일정한 삶의 패턴으로 포섭하게 된다. 원재 자본이라는 것이 공간적으로도 끝없이 시장을 창출해가지만, 삶의 미세한 영역 하나하나에서도 시장을 만들어낸다. 유행은 사람의 외양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아까지도 변모시킬 만큼 놀랍고도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4. 1930년대의 영화와 잡지는 사진에서 비롯한 이와 같은 이미지의 힘을 당시 대중들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내적인 자아를 강조하던 전통은 따라서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부단히 변화하는 표면의 세계가 주도건을 잡게 되고 외양의 본질을 지배하게 되는 시기의 도래를 가져온 것이 바로 영화와 잡지 였던 것이다. 이 매체들은 사람들에게 이미지를 통한 삶의 패턴을 제시하면서 사람들의 내면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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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제 한몸 가누기 힘들어지는 현실은 격랑을 연상시킨다. 한 미술평론가의 말처럼 구석기시대처럼 야생에서 수렵으로 하루를 이어가야하는 구석기인에 비교하는 것에도 머리를 끄덕이게 만든다.  정착하면 살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일상을 비장함과 생존으로 치장하는 사보타지는 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점점 바빠지고 점점 반경이 좁아지는 현실속에서,  인식의 관계망이나 사람의 관계망, 사고의 외연은 조금씩 조금씩 움추려드는 것은 아닐까? 살아야겠다는 절망감이 몸을 점차 파고들어 인식의 폭을 그만큼 줄이는 것은 아닐까? 피상적인 관심, 피상적인 앎, 피상적인 관계 - 점점 깊어지는 외로움들

나는 그런 면에서 돌연한 '잠수'를 나르시시즘를 표현하는 하나의 징표라 여긴다.  잘못된 인식일까? 그리고 OFF가 부족한 e-편한 접속망도 그러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여긴다.  잘못된 생각일까?

2.


우리의 몸에 녹아 살아있는 십장생은 더 이상 십장생이 아니다. 오감을 벗어난지 오래된 일이고, 오직 시선에만 의지하는 눈팅으로만 박제화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 속에 마음과 몸이가는 것은 대체된 십장생들이다. 스타이거나, 잔인함이 증폭된 오락이거나, 관음증이거나... ...

자본주의에 대체된 ' 대체 십장생' 을 오감으로 체험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더이상 밋밋한 것에 재미와 감수성을 느낄 수 없는 불감증 환자인지도 모른다. 자극적인 맛에 입맛이 길들여져 더 이상 평온한 맛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3.




'자기연민'은 단절을 전제로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시각에만 의존해 깊어지는 관계, 대면하지 않고 풍부해지는 관계란 과연 있을까? 주고 받고, 매개고리가 없으면서 나눈다는 것은 가능한가?

그런면에선 나는 돌이켜보면 환자수준이다.  관계맺기와 쌓여가기 - 풍부해지기는 숙제처럼 불편하다. 그렇게 길들여지고 편해져서 다른 감각의 공간이 있는 것도, 만드는 것도 감히 생각해보질 못했다.

4.





5


끊임없는 자기 보기, 보호본능에서 시작한 자기애는 경로를 잘못 선택한 기관차처럼,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흐릇해지는 주변 경관처럼, 시선을 놓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통증마저 잃어버린 시대. 내 것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동정도 사치로 변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무신경과 불감증, 뒤섞인 뻔뻔함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지? 소통과 교류란 없고 끊임없는 자기만들기만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면에서 나르시시즘은 우리가 인지못하는 자본주의와 한통속일지 모른다. 끊임없는 자기애로의 지향과 그 속도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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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참 축구를 좋아한다. 발등을 감기며 튕겨나가는 슛맛, 발맛만 생각하기만 해도 아연해진다. 서로 느낌을 나누며 주고 받는 공맛, 만들어가는 과정의 재미~ 어느 하나 놓칠 수 없고, 그 긴장감도 역시 생각만해도 짜릿해진다.  그런 나는 사실 4년전과 달리, 지금은 거의 관심이 없다. 누구와 경기를 하는 것인지? 언제 하는지? 아무래도 지나친 과잉이 나를 질리게 만들어 놓은 지도 모르겠다.  몇달전부터 기획을 해온 언론자본과 결탁한 쥐어짜내기 광고의 역겨움을 일찍 냄새맡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경기 전후, 앞뒤를 온통 스포츠 중계를 하는 지겨움에 몸둘 바를 몰라서인지도 모르겠다.

스포츠의 기억은 아련하다. 아마 차범근이 버마와 경기전이었을 것 같다. 흑백텔레비젼 앞에 앉아 수많은 관중에 둘러쌓여 어른거리는 화면, 역전에 환호하는 환호성은 너무도 기억에 또렷하다. 정지한 듯한 그 분위기맛.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승리의 감격과 섞여있는 그 응원 맛일까?



우리에게 있어 스포츠 마케팅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3s로 대변되는 문화정책은 그래도 귀엽게 보아 줄만 하다. 아마추어리즘이 베여있는 자본에는 인간미가 조금이라도 드러나 있는 듯 싶다. 참여와 놀이가 섞여있어, 그 나마 자라는 청소년에게 아련한 추억을 살찌울 수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던 그이가 요즘은 무척이나 변한 듯 싶다. 그 은밀함은 우리 뇌를 훤하게 들여다보듯 무의식에 차곡차곡 욕망덩어리를 아무도 모르게 주사놓는다.  '나는 다 이길 수 있는 이성'이라구 주장이 가능한가?

2.



어린 아이들은 똑같은 광고, 회수의 반복에 그대로 노출된 실험아이이다. 마음에 들어온 광고는 기어코 엄마아빠의 호주머니를 비우게 만든다. 마음으로 들어간 광고는 소유와 함께, 맘먹던 재미와 달리, 현실의 소유감은 별로다. 그리 오래가지고 놀지도 못한다. 맘 먹던 재미와 현실의 괴리, 그 차연 - 겉재미에 농락당한 아이는 아닐까?

돈 냄새가 승천하는 시대이다. 간결 명료한 광고의 미학은 너무도 쉽게 주부들의 맘 속에 자리잡는다. 똑같이 제조되는 무의식과 구전효과는 가히 놀랄만 하지는 않는가? 어느집 어디를 가나 색깔까지 똑같은 소유물들. 김치냉장고 들--- 놀이가 끝나 방치된 김치독에 김치는 잘 담아져 있는가? 아이들 장난감같지는 않은가?

의식보다 무의식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 어떤 연구자들은 95%까지 표현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면에서 네모난 화면을 가진 매체는 자본주의를 굴리는 쌍두마차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그토록 공부잘하길 바라는 부모들, 아이들은 매체를 끼고 산다.  그 속엔 '공부'란 재미는 원래부터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3.

화장 하나, 시선 하나, 장신구 하나하나  그 경기에 매혹되어 마음을 주자마자 그 로고와 소유욕이 우리의 무의식에 둥지를 튼다. 나는 자신있다구. 이것은 자신의 있구 없음의 문제가 아니다. 내면화되자마자 살아있는 지식은 나를 움직인다. 유사한 상황이 되면 더욱 명확하게 움직인다. 어디서 본 듯한, 친밀감이 손내민다.

그런 면에서 우리 언론매체는 저질이다. 돈 냄새 풀풀 풍겨가며 쥐어짜내는 꼴이란 차마 돈을 벌려고 질질 울며짜는 것 같아 안스러울 정도이다.

4.



우리는 어쩌면 재미를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겉재미와 속재미의 구분이 없어져, 겉재미만 재생산되는 시대에 살고 있어, 정말 그런 것이 있느냐는 반문을 받을 만하다. 보는 것만으로 축구의 참맛을 알 수 없다. 어릴 때 가진 감흥은 흑백화면에 중계되는 축구가 매개가 되었겠지만, 열정에 넘치는 아저씨 아주머니, 운집한 마을 사람들의 열띤 분위기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열세임에도 호흡을 맞추고, 뛰고 땀흘리고 노력하는 모습들, 정오의 낮에 태양과 같이 떠있는 축구공의 기억과 재미는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축구 경기장보다 축구에 참여하는 내 재미가 현실적이고 아쉬움의 여운도 없다. 그 공백을 충분히 메울 수 있는 시간은 언제든지 있다.

5.



집단무의식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똑같은 소유물을 갖고 있고 작은 아파트에 몰려사는 우리에겐 아마 있는 것 같다.  청계천으로도 외화하고 황우석으로도 외화하고, 월드컵으로도 외화하는 적정한 시점, 적정한 때에 현실화하는 우리의 무의식이 있는 듯하다.

 


6.




어떻게 분열하고, 떨어져나갈 수 있을까? 자본의 무의식포위망에 우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잇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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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거리, 허름한 이발소에 걸린 액자그림. 겨울녘 졸음이 올 때쯤이면 아늑해지고 꾸벅거리는 투박한 아저씨의 조는 모습. 그렇게 파리똥이 액자유리에  군데군데 뭍어있더라도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유행가와 소가죽에 날을 세우는 면도날과 거품에 잘 어울리는 명작이다.

古 윤중호 시인의 시집, <청산을 부른다>의 청산을 쫓아가보기로 한다. 낮은 사람들과 푸른 세상의 숨결, 허접한? 것들이 향으로 묻어나는 그런 <청산>은 없을까?


2. 




푸르름이 지나친 것일까? 강열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버린다. 녹음과 구름은 우러러보이는 듯 품을 듯. 아주 마음에 드는 청산은 아닌 듯, 허전하게 박혀있는 인적은 청산과 어울릴 틈이 없는 것 같다. 도도함과 분리를 자극하는 <청산>은 마음에 들어왔다 빠져나간다.


3.





강렬하게 뿜어나오는 푸르름의 진동이 아찔하다. 시선은 깊어지고 안개에 잠겨본다. 곱고 청아한 색에 노닐어도 한참일 듯 싶다. 애써 목동과 소와 기러기를 지워본다. 하지만 <청산>과 쉬이 놀지 못한다. 청산의 강렬함에 강물을 제외하곤 섞이지 않는다. 사람의 손길도, 풀잎의 애정도 그리 상관없는 듯 보인다.


4.




고갱,세잔,고호의 산 그림을 찾는다. 구릉지라 산맛은 아예 배여나지 못하지만, 서로 섞이고 엉키고 또렷해지는 모습들은 한결 원하는 <청산>에 다가가는 듯 싶다. 김홍도의 <청산>은 우뚝하면서도 주변을 기죽이지 않고 잘 살려놓은  것 같아 맘이 끌린다.

 

5.







시인의 <청산>은 '하찮은 풀잎도'  '못쓰는 돌멩이'도 자라서 계곡을 심고 뭇짐승을 키운다. 청산에 삿대질 하는 사람들에게도, 비탈에서도 나무를 반듯하게 키운다. '청산'을 닮아 청산이 되지 말라한다. 자신의 본디 모습대로 잡풀이 되고, 강이 되고 곡식이 되고, 먼지가 되고, 티끌이 되어 산그늘과 같이 자라면  그것이 모두 청산이라 한다.
 

6.





그렇게 따로 따로 나누어 제 위치를 찾아준 그림에 맘이 끌린다. 제색깔도 서로 두드러지지 않고, 바람도  한데 어울려 함께 제 색을 내는 <청산>에 맘이 간다. 고호의 해바라기는 아니지만 경계를 섞고 제빛을 드러내는 화폭에도 맘이 끌린다. 

 

7.

하지만 원하는 <청산>은 찾아내지 못하였다. 더 강열하면서도 어울리면 좋을 것 같고 훨씬 더 생동감도 있으면 하고, 어떻게 보아도 늘 변하는 <청산>이었으면 좋겠다. 








그림출처   2. 박노수,  3. 운보 김기창,  6, 유영국,박고석 7. 이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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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주말 대*동사무소 환*연 도서바자회가 있었습니다. 참* 일로 만날 일도 있고해서 들렀는데 수중에 돈도 없고, 은행도 찾고자니 그렇고해서 *국장에게 빌었는데.... 품절인  이면우 <저석양>, 호서문화사, 윤중호 시집을 단돈 1000냥에 구하는 횡재를 했네요. 로또만큼의 뿌듯함은 아니지만 괜찮은 맘의 수입인 셈입니다. 아이들 책도 몇권 사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월요일은 대학생 자원활동 학생들의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꼼꼼한 준비와 발표에 무척이나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학생들의 지식과 노력이 섞일 수 있다는 것 모두 좋은 경험이 되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말미 수고의 여운이 조금 길어졌고, 할 이야기도 있곤해서 참*일꾼들과 시간을 잡아당기려 애를썼습니다.

 

 

2.

이야기를 나누며 몇달간 말의 여운을 쫓다보니, '신뢰'가 과연 있는가? '믿음'이 남아있는가? 서로를 안을 수 있을까? 계파만 있고 일은 소멸되고, 손가락은 상대를 가르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자성의 목소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의아심이 점점 진해지는 것은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생활인이 한나라당을 찍고, 친구들이, 식구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음에 대한 예민한 촉수는 없어진 듯 하고, 그 불감증은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남탓에 너무 익숙해있는 조짐, 소식들이 번번히 들려 괴롭더군요. 그래서 가까운 지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우리를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을 믿느냐고? 서로 잘하는 구석들은 없느냐고?

매도해도 되지 않겠지만, 일을 하기에 앞서 어떤 계보인지부터 확인하거나, 정세를 문건이 없으면 알 수 없는 수준이거나 한 상태는 아닐까? 그런 처지에서 무슨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당을 쪼개라' '주고 나와라' '해산해라' 라는 발언들까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을 볼 때, 제대로 일들을 해나갈 수 있을까? 지금까지 온 2년과 앞으로 2년은 대동소이한 것은 아닐까?하는 헛생각만 들게 되더군요.

'신뢰 불감증'이라고 할까요? 우리라는 것이 함께 포옹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에게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닐까요? 장점은 보려하지 않고 단점을 보고 증폭시키는 것이 문화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유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수준을 바닥이라고 여기는 것이 차라리 편한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거울만 보고 왜 그렇게 못생겼느냐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요? 과연 우리가 (나-너)로  보듬어 밖으로 보려는 시선은 있는 것일까요? <피해의식>의 역사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당사자들이 풀지않는 이상 누구도 그것을 해줄 수 없을 것 같더군요.

3.

서로를 안을 수 있을까요? 두 팔을 벌려 상대방을 믿고 뒤로 넘어질 수 있을까요? 믿음과 신뢰가 실종된 상태에선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믿는 것도 걷는 것처럼 달리는 것처럼 연습을 하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 그런 것은 아닐까요? 아직도 예전엔 어땠는데, 옛날엔 뭐했는데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활동하지 않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떠벌이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요? 활동엔 끊임없는 지금이 소중할 뿐인 것은 아닌가요?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지난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혼자 살 수 없고 붙어 살 수밖에 없음의 뺄셈을 하더라고 손해봐야 그대로니 한번 연습해볼 일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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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801-4/52(4) 내외부자의 시선 (作)
    from 木筆 2008-01-28 15:35 
    지난 주 일터일로 바빴다. 아침저녁으로 약속을 스스로 정한 참* 회의까지 불참하였으니 말이다. 일꼬리가 바뀌고 살아나고, 생각이 맞지 않는 것 같아, 다시 결을 가다듬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이야기하고, 메일 보내고, 조금 모은 다음 다시 보내고, 회의하고, 확인하고 반복되는 실험에 생각결이 그나마 숨이 잦아들고 엇비슷하여 진다. 불쑥 불쑥 완장같은 일이 생기면, 기본을 흔드는 일이 생기면 불필요한 노력과 힘이 많이 든다. 일들 줄이고 좀
 
 
hnine 2006-06-06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내용과 사진이 이렇게 딱 떨어질수가 있는지요.
한번 보고 읽기 아깝습니다.

여울 2006-06-07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흔적을 남기면서, 남기고 나서도 많이 안타깝습니다.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인지부터 말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