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여러 얼굴의 니체 가운데 그동안 우리가 만난 니체는 대체로 온건한 표정의 니체였다. 진리 문제에 몰두하는 학자 같은 니체였다. 신의 죽음이라는 문제를 안고 대낮에 램프를 들고 배회하는 광인 같은 니체라고 해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약간 이상하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생각이 깊은 니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뒤 영어권에 니체를 알렸던 월터 카우프만이 그런 니체상을 유포한 사람 가운데 대표자였다.

프랑스 철학자들이 발견한 니체는 ‘의심의 대가’다. 이 철학자들의 묘사 안에서 니체는 서양 형이상학을 해체하고 도덕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진리의 폭정을 허물어뜨린 위대한 반형이상학자로 나타난다. 특히 들뢰즈의 해석 속에서 니체는 ‘다름’을 창출하고 ‘다름’을 향유하는 차이의 철학자, 긍정과 기쁨만을 아는 밝고 환한 철학자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들이 주목한 니체는 싸우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 싸움은 철학자가 철학의 역사를 대상으로 벌이는 지적인 싸움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니체의 정복 대상은 인식에만 머물지 않는다. 칸트의 상상력 안에서 시작한 모험은 그 인식의 바다를 벗어나 삶 그 자체의 전장으로 나아간다. 니체의 분신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제자들에게 삶의 전쟁터에 선 전사가 되라고 명령한다. 그것은 니체가 니체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니체는 감추지 않고 강자의 승리, 강자의 지배를 옹호한다. 그는 연민과 같은, 약자를 이롭게 하는 감정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다. 민주주의·사회주의 같은 이념도 부정한다. 약자를 이롭게 하고 약자의 삶을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신념도 가치도 모두 니힐리즘(허무주의)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규정해 단호하게 거부한다. 이런 위험하고 잔인한 측면을 외면하고서는 니체 사상은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니체가 고통을 긍정한 것은 니체 삶이 고통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끝없는 질병의 침탈과 회복의 반복이 니체의 일생이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니체는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치기조차 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지나고 나면 그는 다시 새로운 삶을 의욕했고, 창조의 의지로 불탔다. 니체에게 삶은 끝도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삶은 또 그 고통을 넘어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이었다.

니체의 언어로 말하면, 테세우스는 권력의지이고, 아리아드네의 실은 진리 의지다. 권력의지가 진리 의지의 힘을 빌려 괴물의 실체와 만날 수 있을지, 한번 용기를 내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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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리뷰] <역사의 종말> : 자유민주주의, ‘패기‘를 통해 불멸의 정체가 될 것인가 https://blog.aladin.co.kr/winter_tiger/14318713 에 글을 남겨주신 김민우님의 글에 답변입니다. 글을 정리하던 중 내용이 길어져 별도의 페이퍼로 정리해 봅니다. 아래는 김민우님께서 남겨주신 글입니다. 


김민우 : 네 하비 맨스필드는 thumos를 즐겨 연구한 학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정의하는 thumos는 동물이 위협에 직면하여 털을 곤두세우듯이 인간도 자기의 것(정체성, 소유, 명예)에 대한 위협에 분통을 터뜨리는 정념을 지칭합니다. 그 분노가 정치의 출발점이라고 맨스필드는 말하는데, 어떤 도덕적 기준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것을 본 것에 대한 의분은 아님 셈이죠. 후쿠야마도 크게 다르지 않을텐데, 그래서 맹자의 수오지심과의 대응은 말그대로 엉뚱한 생각이라는 의견입니다(아 저는 맨스필드를 개인적으로 되게 좋아해서 그의 글을 즐겨 읽었습니다 ㅋㅋ)


 제가 이해한 바로 김민우님께서는 <역사의 종말>에 언급된 '패기' thumos(thymos)와 관련하여 1)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학문적으로 같은 위치에 서 있는 하비 맨스필드의 정념에 대한 정의 - 자기의 것에 대한 위협에 분통을 터뜨리는 정념 -와 2) 이로부터 tumos는 분노이고, 도덕적 기준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주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 맹자의 수오지심(羞惡之心 :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과 thumos의 연결이 엉뚱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이제 김민우님께서 지적하신 이들 세 부분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tumos는 자기의 것에 대한 위협에 분통을 터뜨리는 정념인가?


 사실 용어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매우 조심스러워집니다. 대표적으로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후쿠야마의 'thymos'와 맨스필드의 'thumos'가 같은 것인가 하는 부분은 단정하기 어렵다 생각합니다. <역사의 종말>에는 맨스필드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후쿠야마는 같은 책에서 'thymos'에 대한 최초의 기원을 플라톤에서 찾고 있으며, 플라톤은 <국가 Politeia>에서 이성, 욕구, 격정(thymos)를 각각 혼을 구성하는 3요소로서 설정합니다. <역사의 종말>에서 맨스필드가 언급되지 않았고 플라톤이 설명되었다면, 사상의 원류인 플라톤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라 생각되어 이하 논의에서는 플라톤을 인용하겠습니다. thymos를 처음 사용한 플라톤에 의하면 이는 감정에 가까운 정념과는 분명 구분되는 혼을 구성하는 또 다른 부분입니다.


439d 혼이 헤아리게(추론하게) 되는 부분(면)을 혼의 헤아리는(추론적, 이성적 : logistikon) 부분이라 부르는 반면, 그것으로써 혼이 사랑하고 배고파하며 목말라하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욕구들과 관련해서 흥분상태에 있게 되는 부분은, 어떤 만족이나 쾌락들과 한편인 것으로서, 비이성적이며(alogiston)이며 욕구적인(epithymetikon) 부분이라 부른다 해도, 결코 불합리하지 않을 걸세... 439e 그러면 이들 두 종류가 우리의 혼 안에 있는 것들로서 구별된 걸로 해두게나. 그러나 격정(thymos)의 부분이며, 그것으로써 우리가 격하게도 되는 부분은 제3의 것인가, 아니면 저들 둘 중의 어느 하나와 같은 성질의 것인가" 내가 물었네. _ 플라톤, <국가 제4권> 中


 플라톤은 <국가>에서 격정(thymos)이 '이성'과 '욕구'와 분리되는 별도의 요소이며, 때로는 이성과 때로는 욕구와 결합하여 인간의 여러 행동을 끌어내는 것으로 서술합니다. 격정이 이성과 결합할 수 있다는 <국가>의 내용은 격정을 단순히 분통과 같은 감정의 폭발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부분- thymos와 이성과 결합 - 에서 사단(四端)을 이(理)로 봤을 때의 기개를 수오지심(羞惡之心)의 발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440a 이는 다른 경우에도 종종 목격되는 게 아니겠는가? 가령 욕구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헤아림(logismos)을 거스르도록 강요할 때,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꾸짖으면서, 자기 안에서 그런 강요를 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분개하는데, 이런 사람의 격정(기개)이, 마치 분쟁하고 있는 두 당파 사이에서처럼, 이성(logos)과 한편이 되는 경우 말일세... 440c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이 올바르지 못한 짓을 당했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겠는가? 이 경우에는 그의 격정이 끓어오르며 사나워질 것이고,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것과 한편이 되어 싸우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하고자 하는 바를 성취하거나, 죽기까지는, 또는, 마치 개가 목자(牧者)에 의해서 진정되듯, 자신에게 있는 이성(logos)의 불러들임에 의해서 진정되기 전까지는 고귀한 행동을 중단하는 일이 없지 않겠는가?_ 플라톤, <국가 제4권> 中


2) thymos는 도덕적 기준을 가지지 않는가?


 이에 대해서는 플라톤 철학의 전문가 숀 세이어즈의 해설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자아의 세 부분들에 관한 이론과 심리적 조화로서 정의에 관한 설명이 플라톤의 도덕사상의 주요 개념들이다' . 숀 세이어즈에 따르면 thymos는 도덕적 기준이며 혼을 구성하는 세 요소 - 이성, 욕구, 기개 - 중 기개는 이성을 도와 욕구를 통제하는 보조적 역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플라톤의 <국가>에서 기개는 다른 욕구에 비해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후대의 홉스와 로크에 이르러서는 더 강해져 이성과 욕구만이 강조되었음을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에서 지적하고, 플라톤의 '패기'와 헤겔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끌어내서 역사를 움직이는 힘으로 격상시키고 있습니다. 맨스필드의 경우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기개(또는 좀 더 정확하게 자아의 기백이 있는 부분)는 자아의 수많은 단호하고 능동적인 측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인격의 야망과 경쟁심을 유발하는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정의로운 분노와 의분을 이끄는 자아의 부분이다. 플라톤의 영혼론에서 기개는 자아의 다른 두 구분들보다 비교적 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또한 현대 심리학적 연구에서도 미소한 반향을 가질 뿐이다. 플라톤은 사실상 자아에 대한 이중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설명 속에 기개는 욕구들을 통제하는 전투 속에 이성의 단순한 보조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이론이 몇몇 정당화를 통해 제시되었다(p141)... 플라톤은 자아의 다양한 부분들 간에 존재하는 본성적인 불평등과 위계질서를 가정하고 있다. 이성은 '좀 더 고상하고' 또한 '좀 더 훌륭한' 부분이며 기개의 도움을 통해서 욕구들을 반드시 통제해야만 한다. 인격의 '좀 더 낮은' 부분이 '좀 더 고상하고' 또한 '좀 더 훌륭한' 부분에 의해서 통제될 때 사람들은 자기 훈육의 덕을 보여 주게 된다(p143)... 자아의 세 부분들에 관한 이론과 심리적 조화로서 정의에 관한 설명이 플라톤의 도덕사상의 주요 개념들이다. _ 숀 세이어즈, <숀 세이어즈의 플라톤 <국가> 해설>, p144 


 3) 수오지심(羞惡之心)과 thumos의 연결은 엉뚱하기만 한 것인가?


 이상에서 thymos는 혼의 구성요소이며, 정념과는 다른 도덕기준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에서 '이성-욕구-기개'라는 구도에서 '기개'로부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이 구도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말한 혼의 세 부분과 관련한 논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같은 측면에서 저는 이성으로서의 이(理), 욕구로서의 기(氣) 그리고 이들과 결합하는 기개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연상이 다소 엉뚱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전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리뷰에서 언급한 이러한 제 생각, 추측이 정확하게 플라톤, 맹자의 사상을 짚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수오지심=패기/기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 인간의 본성을 크게 이성과 욕구로 보고 이들로부터 논의를 진전시킨 동서양의 철학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세부적으로, 플라톤(BCE 428 ~ 348)과 맹자(BCE 372 ~ 289)라는 거의 같은 시기를 살았던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이성과 욕구에 대해 가졌던 생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화두로 던져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사상에 사용된 용어의 정의가 정확하게 일치되지 않았고, 이들 사상이 철학자 자신의 생각이기보다 후대의 해석이 반영된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만.


 이상으로 <역사의 종말> 리뷰 하단의 판단 근거를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이와는 별도로 개인 서재에 올린 글에 대해 엉뚱하다고 지적하신 부분은 위의 논의와는 또 다른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개인 서재는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이고, 타인에게 상처와 같은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이러한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의 근거와 관계없이 개인의 서재에서 이러한 생각의 월경(越境)이 크게 지적받을 부분은 아니지 않나 여겨집니다. 물론, 학문의 정합성을 요구하는 학술지에서 이러한 상상은 곤란하겠지만요. 리뷰에는 다 올리지 못했지만, '이-사단'을 연결시키고 '기개-수오지심'을 연결시키면서 '과연 사단(四端)을 이(理)로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봉과 퇴계의 오랜 논쟁을 먼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내용을 긴 답변 끝에 참고로 올려봅니다.


 너무 글이 길어졌습니다. 김민우님 덕분에 글을 쓰면서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덕분에 정치사상가 하비 맨스필드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의 사상 특히 thumos에 대해  플라톤, 후쿠야마의 그것과 비교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김민우님, 좋은 하루 되세요!



 니체의 말처럼, 하나의 민족을 선과 악의 개념을 공유하는 도덕적인 공동체로서 정의한다면 민족과 민족이 만들어낸 문화는 혼 속의 '패기' 부분에 기원을 두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인정받기 원하는 욕망은 종교와 민족주의라는 매우 강력한 두 가지 정열의 심리적 기원이기도 하다. 종교와 민족주의는 '패기'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 두 정열에는 커다란 힘이 주어져 있다. _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 p320


 맹자가 말하는 인간은 그 애초의 출발점 자체가 생리적 인과체계가 아니라, 선의지로 충만되어 있는 도덕적 인간 Moral Man이다. 어린애가 우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무 전제 없이 출척怵惕하는 심사가 심사가 생겨 반사적으로 달려가는 것은, 이미 기나긴 역사를 통하여 도덕적으로 단련되어온 인간이다. 유자입정을 바라보는 인간은 사회화된 인간이며 언어화된 인간이며 역사회된 인간이며 도덕화된 인간이다. 다시 말해서 유자입정의 순간에 비공리적, 무전제적 선의지가 발동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無惻隱之心 非人也). _ 도올 김용옥, <맹자, 사람의 길(상)> <공손추 상>, p256


 "측은지심 惻隱之心'은 '측은함'이라는 감정을 노출시키는 심적 현상일 뿐이다. 측은지심이 곧 인 仁이라는 덕 德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내재화되어 있는 덕의 '단 端, tip'일 뿐이다. 따라서 '단 端'은 인이라는 덕이 표현된 심적인 현상이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감정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단 四端'은 기 氣가 아니라 리 理라고 말하는 후대의 논설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_ 도올 김용옥, <맹자, 사람의 길(상)> <공손추 상>,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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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3-02-03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thumos에ㅜ대해 더 자세히 언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플라톤의 thumos는 계속 자료를 찾고 있었는데, 덕분에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제 비아냥거림에 이렇게 생산적이고 친절하고도 품위있는 답변을 남겨주신 겨울호랑이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비 맨스필드의 thumos에 대해서는 국내 번역된 글ㅇ 중에는 제대로 다룬 것이 없을 겁니다. 저도 How to Understand Politics 이라는 에세이를 읽고 알게 된 것인데, 저도 thumos와 관련해 그의 의미 있는 언급을 인용하는 게 겨울호랑이님의 수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 같아 옮겨놓겠습니다.

Redman 2023-02-03 10:46   좋아요 1 | URL

기개는 본성상 복잡하다. 때때로 기백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개인의 고유한 자아를 좋음과 연결시키는 영혼의 한 부분을 가리킨다. 기개는 동물의 신체를 지닌 인간이 고유의 특색을 지키려는 맹렬한 방어를 드러내며, 실제적 혹은 잠재적 위협에 직면하여 동물이 발끈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일 경우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변화를 향한 갈망보다는 차라리 경계의 반응에 가깝다. 동물이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전면적으로 공격할 경우 이성은 선을 넘는다.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기개의 역설이며, 명백한 모순을 보여준다. 인간 동물로서, 당신은 자신의 삶을 비난할 수 있으며 사과하고 수치를 느낄 수도 있다. 수치는 기개로 인해 느끼기 때문이다.

Thumos is by its nature complicated. Sometimes tranlsated as spiritedness, it names a part of the soul that connects one‘s own to the good. Thumos represents the spirited defense of one‘s own characteristic of the animal body, standing for the bristling reaction of an animal in face of a threat or a possible threat. It is frist of all a wary reaction rather than eager forward movement, though it may attack if that is the best defense. The reason ofthen goes too far when the animal risks its life in all-out attack in order ro preserve itself. To risk one‘s life to save one‘s life is the paradox of thumos, the display of an apparent contradiction. As a human animal, you can condemn your life and say you are sorry and ashamed, for shame is due to thumos.
(중략)
기개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동물성을 본다. 왜냐하면 인간(특히 남성)은 종종 개가 짖고 뱀이 쉿쉿 거리며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히 여기서 우리는 또한 인간적 동물의 인간성을 본다. 인간은 위협에 발끈할 뿐만 아니라 분노하기도 하는데, 다시 말해 근거, 심지어는 원칙, 원인에 대해서도 반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분노한다. 당신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다면, 그 행동을 정당화할 근거를 찾는다. 당신은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는 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근거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좋든 나쁘든, 깊이 숙고하였든 당연하게 받아들였든 근거가 없다면 억울하다고도 느낄 수 없다.

In thumos we see the animality of man, for men (and especially males) often behave like dogs barking, snakes hissing, birds flapping. But precisely here we also see the humanitu of the human animal. A human being not only bristles at a threat but also gets angry, which means reacts for a reason, even for a principle, a cause. Only human beings get angry. When you lose your temper, you look for a reason to justify your conduct; thinking out the reason may take a while after the moment of feeling wronged is past, but you cannot feel wronged without a reason - good or bad, well considered or taken for granted.

Redman 2023-02-03 10:51   좋아요 1 | URL
아 그리고 맨스필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thumos를 중요하게 언급합니다! 마키아벨리의 animo도 thumos로 연결짓죠. 레오 스트라우스를 사숙한 제자이니 아마 이건 스트라우스의 견해를 모방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겨울호랑이 2023-02-03 10: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김민우님께서 하비 맨스필드의 내용을 알려주신다면, 후에 그의 책을 읽을 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김민우님, 즐거운 하루와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3-02-03 10:54   좋아요 0 | URL
하비 맨스필드와 관련해서 좋은 소개와 번역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저도 김민우님으로부터 많이 배워갑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

Redman 2023-02-03 14:35   좋아요 1 | URL
하비 맨스필드를 읽어보신다면 먼저 <정치철학 공부의 기초>를 권합니다. 맨스필드를 위시한 스트라우스주의자의 정치철학 관점이 유려한 문장으로 잘 서술된 책입니다.
그리고 맨스필드는 마키아벨리와 토크빌로 중요한 연구를 많이 남겼는데, <마키아벨리의 덕목>(제가 서평도 썼습니다) <Machiavelli‘s New Modes and Orders> 꼭 읽어볼 책입니다. VSI 시리즈로 나온 토크빌 입문서인 <Tocqueville>도 좋습니다. <남자다움>이란 책은...마사 누스바움이 쓴 서평을 읽어보니 굳이 안 읽어도 되겠다 싶어서 권하지는 않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02-03 17:11   좋아요 1 | URL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김민우님 좋은 하루 되세요!
 

 OECD 최저 수준의 신뢰도를 자랑하는 국내 여론들 덕분에 외신들을 보며 영어 공부를 강제로 해야되는 상황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덕분에 '내가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기준을 세울 수 있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높아진 국가 위상 덕분에 이제는 국내 정치를 외신으로만 접해도 큰 흐름을 파악하는데 큰 지장이 없는 것을 보면 수십 년간 이어져온 언론의 독점(獨占)도 머지 않은 듯하다.


 2023년 연초 The Economist에서는 전임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재임 시 근무했던 정치권인사들에 대해 "The Economist explains"에서 'Why does South Korea pardon its corrupt leaders? 한국은 왜 부패한 지도자들을 사면하는가?'라는 주제로 상세히 세계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그 중 일부를 옮겨본다.


 Pardons are often motivated by power dynamics within the political elite, too. Convicted politicians often have powerful allies in parliament, who can encourage pardons. 


 때로 사면은 정치 엘리트들 간의 권력 역학에 의해 유발되기도 한다. 흔히 유죄 판결을 받은 정치인은 사면을 독려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동맹자들을 두고 있기도 하다.


 President Yoon is clearly a fan of Mr Lee, the former president he pardoned. He has stocked his team with staff from his predecessor's administration and adopted similar policies. But the president also pardoned several politicians involved in the corruption scandal that brought down Ms Park even though he had put them away when he was chief prosecutor under Mr Moon.


 윤 대통령은 자신이 사면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팬임이 분명하다. 그는 이전 행정부의 직원들로  자신의 팀을 꾸리고, 유사한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또한 문 대통령 아래에서 검찰총장 재직 당시 전임 박 대통령을 끌어내렸던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여러 정치인들도 또한 함께 사면했다.


 He may be hoping that the pardons will unify his conservative party, People Power, which is riven by infighting. Mr Lee and Ms Park still have enormous influence in conservative political circles. The president, a political neophyte and outsider, may also be hoping to smooth his entry into this elite.


 그는 이번 사면이 내부 다툼으로 분열된 보수정당인 국민의 힘이 통합되는 계기가 되길 원할 것이다. 전임 이 대통령과 박 대통령은 여전히 보수 정치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정치 초보이자 아웃사인더인 윤 대통령은 아마도 이들 정치엘리트 계층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기를 바랄 것이다.


Though no longer a prosecutor, Mr Yoon still paints himself as a crusader for justice. But his decision to free a guilty man may open old wounds. The convictions of the ex-presidents and their co-conspirators were historic moments for South Korean democracy, says Erik Mobrand of the rand Corporation, a think-tank. Far from unifying the country, upending more of these judgments could undermine faith in its institutions. 


 이제 더는 자신이 검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을 정의를 위한 십자군으로 덧칠한다. 그러나 죄인을 석방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아픈 기억을 들추는 것일지도 모른다. 싱크탱크인 랜드 코퍼레이션(Rand Corporation)의 에릭 모브랜드(Erik Mobrand)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들과 그들의 공모자들에 대한 유죄 판결은 한국 민주주의에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국민대통합과는 동떨어진, 잘못된 이러한 판단을 뒤집는 것은 국가 근간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관련기사] https://www.economist.com/the-economist-explains/2023/01/06/why-does-south-korea-pardon-its-corrupt-leaders 


 같은 사안에 대해 국내 언론들은 '사면의 대상이 누구인가?', '누구 측근이 어떤 조건으로 사면되었는가?'에 대해 중계방송을 하듯 취재에 열을 올렸지만, 정작 사면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 지적한 기사는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미처 못 읽었을 수도 있겠지만, 새벽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경매장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단순한 사실 나열 속에서 우리가 정작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점들은 슬며시 빠져나간 것은 아닐런지. 이런 어이없는 자신들의 보도보다 대중들의 무지를 지적하는 언론들에 대한 개혁과 함께, 21세기 대한민국 헌법 안에 존재하는 1789년 인권선언문 제16조를 통해 나타난 권력분립과 프랑스 대혁명 안의 법 안의 일반의지에 대한 논의를 무력화시키는 '사면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는 별도로 고민할 때가 아닐까.


 누가 법을 만들 것인가? 누가 입법자로서 공동체에 대해 결정을 내릴 것인가? 그런 사람은 단 한 사람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민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이익에 반대되는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인(私人)이나 개인에 다시 지배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인민 전체만이 자신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본질상 비개인적이어서 오직 모든 사람의 이익에 일치하는 것만을 원할 수 있는 일반 의지만이 법을 제정할 수 있다(P227)... 개인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부가 되고, 그의 의지와 일반 의지는 하나의 동일한 의지가 된다. 일반 의지를 따를 때 그는 단지 자기 자신에게 따를 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동의에 따라 공동체에 구속되었고 그 구성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의지가 일반 의지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따르는 법률에 참여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국가 안에서 개인의 자유라는 문제는 해결된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228


 로베스피에르는 이 원칙이 인권선언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사전에 올바른 질문부터 해야 옳다고 주장했다. 로데크의 주교 콜베르 드 세뉼레가 일어나 자기가 마련한 안을 내놓았다. “시민들의 권리는 오직 권력을 슬기롭게 분배해야만 보장할 수 있다.”  그 뒤 계속 원안 제24조로 돌아가 토론하고 심의한 뒤 결국 ‘선언문’의 제16조를 확정했다. 몽모랑시 백작은 제6위원회의 안을 모두 심의했지만 인권선언문에 한 가지 조항을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온갖 폐단이 생기고 세대가 바뀌고 이해관계도 바뀌면서 인간이 구축한 모든 법을 수정할 필요가 생기기 때문에 한 나라의 인민은 언제나 헌법을 다시 보고 개정할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를 행사하는 평화롭고 합헌적인 수단을 지정해두는 것이 옳다.” _ 주명철, <프랑스 혁명사 2 : 1789 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 , p285/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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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칭성을 가진 물체는 몇 가지 조작을 해도, 예를 들어 회전시키거나, 거울에 비춰 보거나, 한 부분을 바꿔치기해도 처음과 같은 모양을 갖는다. 예를 들면, 메노라 양쪽 끝에 있는 똑같이 생긴 초를 서로 바꾸어 끼워도 아무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또 십자가를 거울에 비춰 보아도 원래의 십자가와 다를 바 없다. _ 리사 랜들, <숨겨진 우주> , p241/623


 톰 리들과 해리 포터.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이들은 대칭성을 갖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분면에 위치한 많은 공통점을 갖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갖는 태생, 능력, 성향, 외모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지킬박사와 하이드 처럼 선(善)-악(惡)의 축을 중심으로 반대편에 위치한다. 때문에 이들은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이이기도 하다.


 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곧 애써 끔찍한 미소를 지어냈다.

"그렇단 말이지. 네 어머니가 너를 구하려고 죽었다. 그래, 그건 강력한 반격 마법이지. 이제 알겠군. 결국 너한테는 특별한 게 전혀 없었어. 있지, 난 궁금했어. 너랑 나 사이에는 이상하게 닮은 점들이 있잖아, 해리 포터, 너도 분명 알아챘을 거야. 둘 다 머글 집안의 피가 섞인 데다, 고아에, 머글 손에서 자랐지. 아마 위대한 슬리데린 이후 호그와트에 입학한 파셀마우스는 너와 나 둘 뿐일거야. 우린 심지어 생긴 것도 어딘지 비슷해....... 하지만 어쨌거나 네가 나한테서 살아남은 건 그저 군이 좋았기 때문이야. 내가 알고 싶었던 건 그게 전부야." _ J.K. 롤링,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 p361


 이러한 대칭성의 특성은 J.K 롤링( J. K. Rowling, 1965 ~ )보다 물리학자인 리사 랜들(Lisa Randall, 1962 ~ )이 보다 상세하게 잘 설명해주는 듯하다. 랜들은 저서 <숨겨진 우주 Warped Passages: Unraveling the Mysteries of the Universe's Hidden Dimensions>에서 대칭성을 활용해서 우리는 보다 쉽게(최소한 한 개 이상의 변수를 줄이면서) 우릭가 속한 세계를 설명할 수 있음을 설명한다.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톰 리들이 해리 포터의 움직임을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갖는 대칭성 때문일 것이다. 


 대칭성은 예술과 건축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개입이 없는 자연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당신은 물리학에서 대칭성을 종종 보게 된다. 물리학의 목표는 서로 다른 물리량들을 연관지어 관측에 기반한 예측을 하는 데에 있다. 이 과정에서 대칭성은 자연스럽게 어떤 역할을 한다. 물리계가 대칭을 갖고 있다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적은 관측값에 기초해 계를 기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동일한 성질을 갖는 두 물체가 있을 때, 한 물체의 움직임을 이미 측정했다면 곧바로 나머지 하나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도 알 수 있다. 두 물체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 물체도 같은 식으로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_ 리사 랜들, <숨겨진 우주> , p243/623


 빈 공간에서는 모든 방향이 동등함을 말해 주는 회전 불변성(rotational invariance)이나 모든 위치가 동등함을 말해 주는 병진 불변성(translation invariance) 같은 여러 대칭성들이 보존된다. 하지만 실제 공간, 즉 우주는 비어 있지 않다. 별이나 태양계 같은 구조가 특정한 위치에 특정한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대칭성은 완벽하게 보존되지 않는다. 대칭성은 원리적으로 모든 곳에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어디에나 있을 수는 없다. 대칭성은 반드시 깨질 수밖에 없다. 다만 세계를 기술하는 물리 법칙 속에 잠재되어 있을 뿐이다. _ 리사 랜들, <숨겨진 우주> , p259/623


 그렇지만, 바로 다음에서 랜들은 이론과는 달리 실제 세계에서 대칭성은 깨어질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확률적으로 이길 확률이 50%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실제 확률 50%를 보장해줄 수 없듯이.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톰 리들과 해리 포터의 깨어진 대칭성은 선택(Choice)에서 나온다. 출생(Birth)와 죽음(Death) 사이에 위치한 것이 선택인 것을 생각하면, 선택은 우리 인생(Life)에서 무한의 자유도(freedom of degree)로 가지게 하는 결정적인 변수인지도 모르겠다.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하나를 취한다면, 이 부분을 갖고 싶다. 다른 부분은 독서를 하는 이들의 몫으로 남겨두도럭 하자.


 "기숙사 배정 모자는 너를 그리핀도르에 넣었다. 이유는 너도 알고 있어. 생각해 보려무나." " 모자가 저를 그리핀도르에 넣은 건 단지......." 해리가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슬리데린에 넣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인데요......." "바로 그거야." 덤블도어가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너와 톰 리들의 큰 차이점이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건 말이다, 해리, 우리가 가진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선택이란다." _ J.K. 롤링,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 p382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미나리마 판이 갖는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책의 팝업 일러스트레이션에 숨겨진 여분의 차원이라 생각한다. 리사 랜들의 <숨겨진 우주>에서는 여분의 차원을 중력의 세기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미나리마 판 일러스트레이션의 숨겨진 차원은 추상적인 상상의 세계를 시공간과 보다 긴밀하게 연결시켜 준다는 점에서 에드워드 홀 (Edward T. Hall, 1914 ~ 2009)의 <숨겨진 차원 The Hidden Dimension>에서 고정 형태의 공간에 반대되는 반고정 형태의 공간과 가깝다 생각된다.


 여분 차원 이론의 흥미로운 면들 중 하나는 각각 다른 규모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결론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이론들에서 중력은, 말려 있는 차원보다 짧은 거리, 즉 곡률이 너무 작아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작은 규모에서 보이는 행동과, 차원이 보이지 않거나 비틀림이 중요해지는 커다른 규모에서 다른 행동을 보인다. 이로써 우리는 여분 차원이 결과적으로 우주론에서 발견되는 수수께끼 같은 성질들을 해결해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_ 리사 랜들, <숨겨진 우주> , p536/623


 고정 형태의 공간은 개인과 집단의 활동을 조직하는 기본적인 방식 중 하나로서 인간이 지구상에서 움직일 때 행동을 지배하는 물질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감추어지고 내면화된 구도를 포함한다. 건물은 고정 형태를 표현하는 하나의 패턴이지만 또한 특징적인 방식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마을, 도읍, 도시의 배치, 그리고 사이사이의 시골 풍경도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화하는 계획을 따른 것이다. _ 에드워드 홀, <숨겨진 차원> , p164


  우리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우리를 만든다는 말에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면서 쓸데없는 일만 벌이는 '누군가'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미나리마 판 <해리 포터> 시리즈는 우리의 추상과 작가의 세계를 보다 긴밀하게 연결시키며 작품 몰입도를 높여준다. 2차원 면에 표현된 텍스트의 내용을 3차원의 시공간에 표현한 예쁜 책. 미나리마판이 갖는 매력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듯하다.




 고정 형태의 공간에서 중요한 점은 대부분의 행동이 형성되는 틀이라는 점이다. 윈스턴 처칠 경이 "우리는 건물의 모양을 만들고 건물은 우리의 모양을 만든다"고 말했을 때 지적한 것은 다름 아닌 공간의 그러한 측면이었다. _ 에드워드 홀, <숨겨진 차원> , p168


 ps. 글을 마치기 전에 떠오른 생각. '누군가'로 표현했는데, 그런 내 자신을 보니 <해리 포터>에서 볼드모트를 두려워하는 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굳이 '누군가'의 이름을 명확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은 이유를 엄밀히 하자면 두렵기보다는 짜증이 나기 때문이지만, 여기서 '누군가'는 윤석열임을 굳이 밝히며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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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3-01-06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리학에서의 대칭성은 인간의 양면성에 비견될 수도 있겠네요. 말씀처럼 차원의 추가는 사고의 풍성함을 가져오지만 그 이상의 차원을 생각하면 언제나 머리에 쥐가 날것 같아요. 리사랜들은 책만 어렵게 쓰는 줄 알았는데, 저번에 이비에스에서 얘기하는 걸보고 느꼈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딱히 설명이라는 걸 할 생각이 없구나- (:-)

겨울호랑이 2023-01-06 09:37   좋아요 1 | URL
갱지님 말씀처럼 차원의 추가는 고려해야 할 요소를 승(乘)으로 증가시켜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리사 랜들 교수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브라이언 그린, 미치오 카쿠 교수와는 달리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 되도록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편이라 여겨집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장점인 반면 그 명확함을 이해하기는 참 쉽지 않네요... ㅜㅜ

갱지 2023-01-06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랜들교수 머릿속에선 아마도 명징할 것으로...

겨울호랑이 2023-01-06 10:04   좋아요 1 | URL
^^:) 분명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니데이 2023-02-07 2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3-02-07 22:5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항상 감사합니다. 제가 처음 서재활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한결같이 꾸준하게 이웃을 배려하시는 서니데이님께 고마움과 함께 많은 것을 배웁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
 


 효율성이 일시적 가치라면 회복력은 특정한 조건이다. 효율성을 높이면 종종 회복력이 약화되는 것이 사실인데, 이를 해소할 수단이 되는 시간적 가치는 효율성이 아니라 적응성이다. 효율성의 핵심은 마찰, 즉 경제활동의 속도와 최적화를 늦출 수 있는 중복과 반복을 제거하는 데 있다. 하지만 회복력의 핵심은 적어도 본질적으로는 중복성과 다양성이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19/345


 제러미 리프킨 (Jeremy Rifkin, 1945 ~ )은 <회복력 시대 The Age of Resilience: Reimagining Existence on a Rewilding Earth>에서 기존의 '효율성'을 대신한 '적응성' 을 강조한다. 자연을 타자(他者)로 보고, 이로부터 인류 자신 - 정확하게는 중심부 위치한 존재 - 의 풍요를 위해 이용할 자원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끊임없이 부정적인 것을 외부화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면서 현재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된 관점이다.


 진보의 시대 전체를 이끈 시간적 지향의 근본은 '효율성'이다. 즉 천연자원의 착취와 소비와 폐기를 최적화하고, 그렇게 해서 자연 자체가 고갈돼도 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점점 더 빨리 증진한다는 임무다. 우리 개인의 시간적 지행과 우리 사회의 시간적 박동이 효율성이라는 원칙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지구의 지배적인 종으로 그리고 지금은 자연계의 파멸로 이끌었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6/345


 이러한 관점은 최근 기후위기, 팬더믹 위기를 겪으며 위기를 경고한 다른 석학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는 이러한 위기에 대한 해법을 지난 수십년간 자신의 저작에서 일관되게 주장해온 내용과 연계해서 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3차 산업혁명 인프라는 중앙 집중형보다는 분산형으로 설계되었다. 이것은 사유화를 피해 개방적으로 투명하게 유지될 때 네트워크 효과를 최적화하며 가장 잘 수행된다. 네트워크와 플랫폼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모든 참가자가 더 많은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게 되기 때문이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193/345


 한계비용은 디지털 상호 연결로 더 낮아지지만, 공급자-사용자 네트워크의 지속적인 서비스 공급과 트래픽의 중단 없는 흐름으로 한계비용의 급격한 감소를 만회할 수 있다. 공급자-사용자 네트워크의 새로운 경제 시대에 지식 공유에서 에너지 공유, 차량 공유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제활동이 잠재적으로 서비스가 된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196/345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에너지원이 점차 고갈되는 상황에서 화석 연료 대신 녹색 경제가 대두될 것이고, 인터넷의 발달로 경제적으로는 향후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에서 소유 대신 공유경제가 대세가 되고, 정치적으로는 시민사회가 부상하며, 글로벌(global) 대신 로컬(local)이 활성화되면서 대량생산의 테일러주의 대신 소규모 다품종 생산이 보편화되고, 인간 가치가 높아지는 세상. 제러미 리프킨의 전작들에서 단편적으로 그려졌던 미래들이 '적응'과 '회복력'이라는 화두로 <회복력 시대>에서 묶인다.


 회복력 시대에는 모든 대륙에서 문자 그대로 수십억 가정과 수백만 기업, 크고 작은 수십만 지역사회가 일하고 거주하는 곳에서 태양광과 풍력을 붙잡아 만든 새로운 에너지를 마이크로그리드에 저장하고 글로컬 에너지 인터넷을 통해 공유할 것이다. 몇몇 지역에서만 풍부하게 발견되는 화석연료와 달리 태양과 바람은 분산된 에너지로서 모든 곳에 존재한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199/345


 생태 지역 거버넌스는 그 본질과 취지상 시장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이며 그 안에서 인간 주체가 자신이 몸담은 생태 지역을 구성하는 다른 무수한 주체에 끊임없이 적응한다는 사실은 거듭 강조할 만하다. 배타성이 아닌 포용성의 자유라는 새로운 개념, 다시 말해 인간 종을 넘어 우리의 동료 생명체들과 지구상의 다른 모든 주체를 포함하는 연결성은 생태 지역이 지배하는 미래의 결정적 역학이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232/345


 이런 면에서 <회복력 시대>는 저자 제러미 리프킨 미래학의 결산이라고 하겠다. 저자는 책에서 암울한 현실을 지적하면서도, 절망적인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긴박한 현재의 위기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가 더 명확해졌음을 책 본문을 통해 밝힌다. 그렇지만, 이와 함께 팬더믹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터져나오는 문제들 속에 새로운 길, 희망 대신 과거로의 회귀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저자의 주장이 과연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에너지원은 고갈되었지만, 리프킨의 전망과는 달리 원자력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는 현실,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디지털 공유 경제 대신 강화된 소유권과 통제로 인한 중앙집권과 불평등한 세상과 글로벌 공급체인으로 연결된 대기업 중심의 세상. 지난 시간동안 리프킨 전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세상은 움직여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상황에서 암울한 현재가 과연 변곡점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점을 개인적으로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회복력 시대>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저자 리프킨의 전망과 우리의 현실을 비교하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독자 스스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보다 의미있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진보의 시대에 평등은 자율성의 파생물로서만 가치가 있다. 자율성에 대한 신념이 전제되지 않고는 평등을 옹호할 수 없다. 스스로 자율적 행위자라고 믿는 만큼 평등을 요구할 것이며 그것이 다반사가 된다는 뜻이다. 모든 개인의 본질이 자율성의 추구라면 평등한 대우에 대한 욕구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p281)... 관계적 자아를 위한 회복력은 자립성과 자율성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에 대한 개방성과 취약성에서 비롯한다. 그것은 삶의 긍정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것에 대한 개방성을 의미하는데, 삶의 긍정적인 경험은 풍부한 관계망을 만들고 풍부한 관계망은 다시 회복력을 강화한다.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28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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