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생각 : 책을 보고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어요.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 언젠가 죽기 때문에, 늘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죽음을 반가운 손님으로 받아들이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감동적이에요.


나[연의]의 생각 : 할아버지는 참 좋으시겠어요. "저도 이모 보고 싶은데..." 아내 잘 만나시고 하늘나라에서도 잘 지내세요.


[아빠]의 생각 :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챙겨가는 물건들은 비록 그쪽에서는 필요없는 것들 뿐이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고 기다렸기에 두려움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 할아버지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생각하게 됩니다.



 학교 과제로 나오는 [가족과 함께 하는 독서] 중 이번에 <여행 가는 날>을 함께 읽게 되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손님을 기다리고, 그 손님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할아버지. 이것저것 챙겨서 좋은 날 떠나는 할아버지는 사실은 저 세상으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독자들은 처음에는 이러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지만 낯선 손님과의 대화 속에서 무언가 보통의 여행이 아님을 알아가게 되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우리는 여행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동화임에도 죽음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룬 <여행 가는 날>. 이번 페이퍼에서는 [아빠]의 생각에서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가볼까 합니다. 


"걱정 말거라. 나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란다." <여행 가는 날> 中 

 

 <여행 가는 날>은 두 가지 면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책입다. 하나는 '뽀얀 안개같은 손님'으로 표현되는 저승사자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할아버지의 자세입니다. <신과 함께>의 저승 3차사로 알려진 저승사자의 존재는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공포의 신(神)이지만, <여행 가는 날>에는 마치 '꼬마유령 캐스퍼'처럼 친근하게 등장합니다. 친근한 여행 동반자로서의 저승사자를 통해 독자들은 죽음이 결코 두려운 존재만은 아님을 깨닫습니다.


 명신손님처럼 멀리 낯선 땅에 깃들어 있으면서 긴 여행을 통해 이 땅을 찾아오는 신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어둠의 신 저승사자다. 그들은 저 멀리 저승 황천에 살면서 인간 세상으로 훌쩍 건너와서는 수명이 다한 사람들을, 또는 신의 노여움을 산 사람들을 왈칵 붙잡아서 아득한 어둠의 땅으로 데려간다. 한번 그네들에게 붙잡히면 꼼짝없이 모든 것을 다 잃어야 하는 공포의 대상이 저승사자다.(p134)... 망자를 잡아가는 삼차사는 일직사자와 월직사자, 강림도령이라 돼 있는데, 강림도령의 활약이 두드러진다.(p180) <살아있는 한국 신화> 中


 "이제야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단다." 할아버지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어요. 손님이 왔으니 할아버지는 이제 먼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해요. 뽀얀 안개같은 이 손님은 할아버지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러 왔답니다. <여행 가는 날> 中


 또한, <여행 가는 날>에서 할아버지의 모습은 낯선 손님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손님을 기다렸다는 할아버지의 말 속에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Marcus Tullius Cicero, BC 106 ~ BC 43)가 <노년에 관하여 Cato Maior de Senectute> 했던 죽음이 편한 것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 그것은 우리 나이의 사람들을 가장 불안하고 걱정스럽게 하는 것 같네. 죽음이 노년에서 멀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토록 오래 살아오면서도 노인이 죽음은 무시되어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네. 왜냐하면 죽음이 영혼을 영생할 어떤 곳으로 인도한다면 죽음은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네.(p78)... 내가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치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육지를 발견하고는 항구에 입항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네.(p81) <노년에 관하여> 中


 또는 남겨진 이들에게 미안하다는 할아버지의 말 속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 ~ 1986)가 <노년 La Vieillesse>에서 말한 '죽음은 주변인에게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보부아르가 말한 죽음에 대한 주변인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죽음 앞의 인간 L'homme Devant la Mort >에 자세히 나오지만, 이미 여러 페이퍼에서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짚고만 넘어가겠습니다.


 "아, 그렇지! 가는 길에 이 동전으로 통닭을 사 가자. 오랜만에 함께 둘러앉아서 먹으면 눈물 나게 맛있을 거야." "그런데 할아버지, 안 슬퍼요?" "슬프기는, 미안하지. 남겨진 사람들이 슬퍼할까 봐 그게 미안해."<여행 가는 날> 中 

 

노인에게 죽음은 더 이상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운명이 아니다. 죽음은 이제 임박한 것, 개인적인 사건이다.(p614)... 죽음은 사르트르가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라고 부르는 범주에 속한다. 우리는 노년을 이 범주에 넣었었다. 대자는 거기에 도달할 수도, 그것을 향해 자신을 투사시킬 수도 없다. 죽음은 내 가능성들의 외적인 한계이다... 내가 죽게 되면 그 죽음은 타인에게 죽음인 것이지 나 자신에게 죽음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타인들이 나를 보는 관점을 취하여 내가 늙는 것을 알듯이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 앎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며 외적으로 제기된 것이다.(p615)... 사실 죽음이 가까이 온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죽음은 가까이도 멀리도 있지 않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을 바란다는 것, 혹은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긍정의 의미다.(p617) <노년> 中


 <여행 가는 날>은 이와 같이 죽음을 잘 준비해서 맞이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준비된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연의]의 생각에도 살짝 언급이 되었지만, 사실 몇 개월 전에 연의는 이모를, 연의 엄마는 언니를 긴 여행으로 떠나보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책의 의미가 저희 가족에게 깊숙하게 와 닿습니다. 


 <여행 가는 날>에서 할아버지는 여행 끝에 헤어진 부모님과 아내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여행을 떠납니다. 마지막 페이지에서도 우리는 할아버지가 만남을 이뤘는지에 대한 답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가바드 기타 Bhagavadgita>에서 스승 크리슈나가 왕자이자 제자인 아르주나에게 한 이야기 속에서 할아버지 여행의 끝을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지향도 그곳을 향해야하지 않을까요.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 하루 죽어간다는 다른 말이기에.

 

 목숨이 끝나는 순간에 나만을 기억하며 육신을 버리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나의 지경에 이를 것이니, 거기에는 의심이 없느니라. 어쨌거나 목숨이 끝나는 순간 어떤 성질의 것을 기억하며 떠났거나 간에 틀림없이 그대로 되는 것이니, 쿤티의 아들아 그것은 일생을 거기 젖어 있었기 때문이니라.(p331) <바가바드 기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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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0-06-13 2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세계의 장례. 100만 번을 산 고양이 글을 일고 저도 구입해서 읽었어요. 죽음은 드러내지는 않고 잊고 사는 것 같아도 늘 우리 안 깊은 곳에 있는 질문이죠.

죽음을 소멸로 인식 한 아이와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있고, 하늘 나라에서도 잘 지내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세상을 대하는 반응이 확실히 다를 것 같습니다

저는 죽음이 소멸이라는 생각을 너무 어렸을 때 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왔어요

연의의 글을 한참 들여다보며 따뜻한 위안을 받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6-14 07:53   좋아요 2 | URL
나와같다면님 말씀으로부터 죽음과 고통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종교가 시작되었다는 말을 떠올려 봅니다. 사실 죽음 이후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인식을 벗어나지만,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의 자세가 조금 달라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2020-06-15 14: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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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5 19: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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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6 0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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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6 14: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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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폭동을 지원하는 것부터 위성국을 무장침략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에서 사용된 공산주의자들 방식의 대표적인 예로 1950년 한국 전쟁을 들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러시아식 훈련을 받은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략했다.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어느 면에서 한국 전쟁은 그 지역에 국한된 제한적인 전쟁(국지전) limited war였다... 한국 전쟁은 1953년 7월에야 끝났다.(p939) <전쟁의 역사> 中


  <전쟁의 역사 A Histoty of Warfare>의 저자 버나드 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1887 ~ 1976)가 한국전쟁에 대해 기술한 바는 적지만, 짧은 내용 안에 담긴 한국전쟁의 기원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해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 )는 한국 현대사에서 전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의 원인을 양측의 입장을 함께 제시한다.


 1950년 6월의 전쟁 발발 상황에 대한 설명들 대부분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적을 향해 북한이 새벽녘에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한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전쟁은 1949년에 많은 전투가 벌어진 바로 그 외진 옹진반도에서 시작되어 몇 시간 후에 38도선을 따라 동쪽으로 확산되면서 개성, 춘천, 동해안에 이른 것이다.(p36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中


 공식적인 미국사에 따르면, 옹진반도에서는 제17연대 병사들이 1950년 6월 24일, 25일, 조용한 여름밤에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4시 정각에 너무나 급작스럽게... (대포와 박격포의 사격이) 굉음을 울리며 대한민국의 경계선을 침입하였다.(p364)... 북한의 공영 라디오 방송은 이와 다르게 발표했다. 남한 군대가 6월 23일 오후 10시에 은파산 일대를 포격하기 시작했으며, 곡사포와 박격포를 동원한 이 포격은 6월 24일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p36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中

 

 브루스 커밍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에서 1950년 이전에 남북간에 이미 많은 충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간적으로 옹진반도가 전면적인 한국전쟁 확산의 진원지라면, 시간적 배경을 올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한국전쟁의 기원의 참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전쟁의 기원>은 이러한 시간적 배경을 보다 상세하게 서술한다. 본래 2권으로 이루어진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중 1권을 번역한 <한국 전쟁의 기원>에서는 해방 정국을 중심으로 그 원인을 보다 상세하게 고찰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도올 김용옥(金容沃, 1948 ~ )의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사관(史觀)을 통하는바를 발견한다 .



  만주에서의 항일 활약상의 인식은 한국 공산주의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긴요한 것이다... 만주를 배경으로 한인이 이룩한 최소한의 성공도 항일운동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대전 후의 한국에서 영도적 지위를 확보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p71)... 이러한 만주에서의 경험에 있어서 특히 언급해야 할 다른 요소 하나가 유격대들을 살해하는 데 기꺼이 참가할 한인들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한인(韓人) 수백 명이 사병 혹은 하급장교로 토벌작전에 가담했다. 일본신문들을 이들 한인들 사이의 대결을 크게 보도한 바 있다... 1950년 6월의 실상은 일본인들이 바람의 씨앗을 뿌렸으며, 한인들은 거센 회오리바람을 거둬들인 것이다.(p72) <한국 전쟁의 기원> 中


 미국의 정책들은 개념과 결과에 있어서 식민 잔재의 완전한 재편성을 요구하는 한인들의 염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리 의도한 바가 좋았다 하더라도 이러한 염원을 대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무지와 과오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서의 미국의 실패의 본질인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 후의 첫 해는 한인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하나의 시련을 제공했으며, 그 속에서 새로운 통치체제가 그 자체의 이익에 입각한 논리를 전개시켰다.(p541) <한국 전쟁의 기원> 中


 일단 읽던 책은 마무리하고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전쟁의 기원을 정리하는 것도 의미있는 독서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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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5 14: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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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5 1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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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6 09: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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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6 14: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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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내주신 설계 의뢰 편지를 기쁜 마음으로 읽어보았어요. 오랜만에 직접 손으로 쓴 의뢰 편지를 받아서 그런지 가슴속에 등불이 켜진 듯이 따뜻한 기분을 느끼면서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보았습니다(p33)... 손으로 쓴 편지에서는 글쓴이의 체온과 숨결이 분명하게 전달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점을 느끼는 것이 설계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될 듯싶고요.(p34)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中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パン屋の手紙: 往復書簡でたどる設計依賴から建物完成まで >에서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 (中村 好文)는 빵집 주인 진 도모노리 (神 幸紀)로부터 빵 가게의 설계를 수락하면서, 그의 손 편지에 깊은 감동을 받았음을 밝힌다. 주택 건축가인 나카무라에게 주택의 의미는 단순한 생산품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신뢰의 축적물이기에, 정성어린 의뢰인의 손 편지는 더욱 남달랐을 것이다. 또한, 의뢰인 진에게도 자신의 집 옆에 있는 빵 가게는 소중한 곳이기에, 그 역시 간절하게 자신과 뜻이 맞는 이를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진의 마음은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 ~ 1965)가 잘 표현한 듯하다. 


 설계 의뢰자와 건축가 사이에는 무엇보다도 서로의 마음이나 입장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하는 신뢰관계가 쌓여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손으로 쓴 편지가 큰 도움이 되었다.... 담백한 마음으로 편지를 주고받은 행위를, 하나하나 돌을 쌓아올리는 석조건축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별다른 특징이 없는 돌이지만 그것들이 쌓이고 나면 견고하고 존재감이 있는 건물이 된다.(p6)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 머리말 - 中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소유의 안전하고 영구적인 집에서 안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꿈이 도저히 실현 불가능할 때, 사람들은 감정적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한다. 자신의 집을 짓는다는 것은 마치 유언을 남기는 것과 흡사하다(p235)... 내 집을 짓는 때가 왔을 때, 그것은 석공이나 기술자의 시간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에서 최소한 하나의 시 詩를 짓는 시간이다... 왜냐하면 집은 경력의 완성이며... 생활로 인해 많이 늙고 지쳐 류머티즘과 죽음... 그리고 가당치 않은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는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p237) <건축을 향하여> 中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더라도 좋은 시절이 없는 것처럼, 이들의 작업기간에도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한 번뿐이었지만, 이들의 작은 어긋남은 건축 철학과 관련된 부분이었기에 큰 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처음의 만남처럼 편지를 통해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


 그동안에 주고받은 편지를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설계나 공사 내용에 대해서 의견이 대립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딱 한 번 사소한 갈등이 있었던 것 외에는 대체로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점차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신뢰관계가 착실하게 구축되어갔다.(p5)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 머리말 - 中


 저는 건축가이니 역시 구조, 성능, 사용하기 편리한 정도나 내구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기능성이나 합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이와 같은 기능성이나 합리성이 뒷받침된 건축이야말로 '아름답다'는 신념이 제 속에 있고요... 여기서 잠시 멈춰서서 생각해보면, 혹시 도모노리 씨와 마리 씨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분위기의 건축' '화장의 건축'이 아닐까 하는 점이에요. 이런 관계로 저는 '오래된 느낌' '소박한 느낌' '작은 집다운 모습'을 내기 위해 연출하는 것 역시 본말전도가 아닐까 생각해요. 이것도 일종의 '화장'이기 때문이죠. 이 점을 확실하게 이해해주었으면 해요.(p132)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中


 건축가의 건축철학과 의뢰인의 방향이 맞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충분히 내보이며, 이해를 구한다. 오해를 풀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더 신뢰관계를 다져가는 모습 속에서, 짧은 건축기간이 인생의 축소판임을 깨닫게 된다. 결혼을 통해 부부가 되어 각자의 삶을 지어내는 것도 긴 건축작업이기에, 각자의 삶의 철학을 이해하고 대화를 통해 완성해 가는 것이 부부에게 주어진 미션(mission)이 아닐까.


 '분위기의 건축' '화장의 건축'이란 말을 들으니 가슴 한구석이 찔립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의 질문은 깊은 의미가 담긴 말이 아니라 나카무라 선생님이 설계한 건물의 그 부분이 좋다는, 결국 표충적인 질문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엄하게 지적해주시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나카무라 선생님과의 사이에 틈이 생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오히려 나카무라 선생님의 감각에 가까워지고 싶고 더욱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지요.(p135)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中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를 통해서 결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면, 다른 한 편으로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시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전염병의 확산으로 인해 맞게 된 비대면(Un Contact)의 시대. 이 사태 이후에 분명 사회는 5G를 기반으로 자율주행, 드론을 활용한 무인택배, 사물인터넷(IoT), 로봇을 활용한 제조업, 의료제도 개편 등의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가 우리에게 긍정적일까? 현재까지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이 언택트 사회에서 유일하게 이득을 보는 존재는, 매년 베르사유궁에 초대되는 IT 스타트 기업과 대기업인 셈이다. 아직 인터넷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인구도 수백만 명이나 되지만, 전 세계가 '초연결 사회'로 진입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에릭 슈미트 전 구글 회장은 지난 5월 10일, 그는 미국 CBS 뉴스 방송에서 "코로나 사태로 인한 자가격리 기간 동안 우리는 10년을 앞서 성장했다. 이제 인터넷을 쓰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중요해졌다. 인터넷 없이는 일도,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만약, 그러한 삶이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다면, 우린 다른 길을 살펴봐야할 것이다.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에서는 자신의 꿈을 혼자 힘으로는 이룰 수 없기에, 건축가의 힘을 빌려 함께 만들어가는 의뢰인과 건축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건축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분업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그가 작업을 수행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단순한 이기심이 아닌, 감정(sentiment)의 발로라는 사실은 자본주의의 기원을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 ~ 1790) 의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보다 먼저 쓰여진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으로 올라가야함을 일깨운다. 이들 두 권의 책을 종합해서 보면, 애덤 스미스에게 이기심은 타인의 동감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인간이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행/불행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요인, 원리가 인간의 본성 속에 명백히 내재하여 있다... 타인의 슬픔을 보고 슬픔을 함께 느끼는 감정의 존재는 증명을 요하지 않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고, 그 사람이 얼마나 선하냐 유덕하냐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본원적 감정의 하나이다.(p672) <도덕감정론> 中


 인간은 항상 다른 동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단지 그들의 선심에만 기대해서는 그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가 만약 그들의 자애심(自愛心, self-love)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발휘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자기가 그들에게 해주기를 요구하는 일을 그들이 자기에게 해주는 것이 그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들의 도움을 얻으려는 그의 목적은 더 효과적으로 달성될 것이다.(p18) <국부론 (상)> 中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고려에서 그는 활과 화살의 제조를 그의 주된 업무로 삼게되며, 그리하여 그는 일종의 무기 제조자가 된다. 그는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기에에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노동생산물 중 자기 자신의 소비를 초과하는 잉여부분 모두를 타인의 노동생산물 중 자기가 필요로 하는 부분과 확실히 교환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각자로 하여금 특정 직업에 종사하여 그 특정 직업에 적합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과 자질을 개발하고 완벽하게 만들도록 장려한다.(p19) <국부론 (상)> 中


 아직도 코로나 19의 확진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가져온 변화가 우리에게 더 큰 위협이 된다면, 우리는 인간과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국부론>의 빵집 주인의 이기심에서 발현된 사회적 분업이 산업화, 자동화라는 극단으로 치닫는 현실에서 우리는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동감(同感)과 우리의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코로나 19가 던져준 이러한 물음에 대해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에 담긴 삶의 모습은 이에 대한 답을 넌지시 던져주는 듯하다.

 

 가장 개인적인 것은 한 사람이 간직한 자신만의 비밀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가장 개인적인 것은 개인이라는 테두리를 부수고 나눔을 요구하며, 나아가 나눔 자체로 긍정되기 때문이다. 그 나눔에서 공동체가 비롯되고, 그 나눔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p40) <밝힐 수 없는 공동체> 中


PS.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속에서 <도덕감정론>, <국부론>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다면, 빵집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田舍のパン屋が見つけた「腐る經濟」>는 주제면에서 좋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하겠다... <자본론> 리뷰를 채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페이퍼를 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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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6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6 2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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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대부분 백인종에게만 세계 헤게모니를 쥐어 주고 다른 인종, 특히 니그로 인종은 백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데 만족하거나 모든 것을 정복하려고 행진하기 전에 죽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암묵적인 그러나 명료한 현대 철학을 받아들인다. 이 철학은 바로 아프리카 노예 무역과 19세기의 유럽 확장이 낳은 산물이다.(p232)<니그로> 中 


  W. E. B. 듀보이스 (William Edward Burghardt Du Bois, 1868 ~ 1963)는 <니그로 The Negro>에서 흑인은 역사와 문화, 능력이 없다는 20세기 초반 미국사회의 편견이 잘못된 것임을 밝히면서 인종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저자인 듀보이스에 의하면 인종주의 편견의 기원은 제국주의 시대의 노예제도에서 비롯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아프리의 베냉 지역에 존재했던 다호메이(Dahomey) 왕국이다. 


[지도] 19세기 다호메이 왕국(출처 : https://www.britannica.com/place/Dahomey-historical-kingdom-Africa)


 흑인에 반하는 현대인의 이른바 '본능적인' 편견은 무엇이라 말인가? (p139)... 우리는 피부색에 대한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편견의 원인을 신체나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을 현대 니그로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에서 찾아야 한다.(p141) <니그로> 中


  17세기 다호메이왕국의 번영은 노예무역의 활성화와 궤를 같이 한다.  다호메이 왕국은 지리적으로 베냉 협로라는 한계로 인해 국가 발전에 제약을 가지고 있었으나, 같은 시기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은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1664년까지 후추, 금, 상아가 기니 지역의 주된 무역품으로 다호메이 왕국이 무역에서 소외되었다면, 1672년 이후에는 노예가 새로움 무역품으로 떠오르면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게 된다. 이러한 다호메이 왕국의 노예무역에 대해서는 칼 폴라니(Karl Polanyi, 1908 ~ 1964)의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 Dahomey and the Slave Trade: An Analysis of an Archaic Economy >의 내용을 따라가 보자.

 

 다호메이 사회를 커다란 긴장으로 몰아넣은 역사적 사건은 경제영역에서 벌어졌으며, 또 그 시작은 외부에서 비롯되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번창하기 시작하자 노예무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는데, 이것이 다호메이에 바로 인접한 기니 해안을 강타하였던 것이다. 이 시간이 낳은 충격은 아주 독특하였다.(p61)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 中


 플랜테이션 농장은 엄청난 이윤을 낳아주었고, 서인도제도는 왕실과 최고위 귀족들의 사적 재산이 되었다. 이제 이를 위해 노예를 조달하는 것은 '절대적 필요'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농장에서 거두어들여야 할 작물의 양은 엄청났으며, 이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노예노동이 꼭 필요했다... 다시 말하자면 국제경제에서의 변화가 큰 물결을 일으켰고, 이 물결이 대서양을 건너서 불과 20마일 길이로 펼쳐진 아프리카의 어느 해안 지역에 몰아닥친 것이다.(p63)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 中


 칼 폴라니는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에서 지리적 어려움과 아프리카에 진출하기 시작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다호메이 왕국이 노예제도를 통해 축적된 부를 활용하는가를 보여준다. 노예무역과 인신공양으로 악명높은 다호메이 왕국에 다소 우호적인 칼 폴라니의 시각에 대해 비판점도 많지만, 이에 대해서는 책의 리뷰로 넘기 여기서는 간략하게 내용만 취하자. 다시 <니그로>로 돌아가서, 듀보이스는 노예확보를 위한 인간사냥이 가족과 국가의 약화라는 참혹한 결과가 아프리카에 주어졌음을 지적한다.


 18세기 초 강력한 다호메이 왕국이 건설되었고, 지독한 전제 국가가 되어 19세기 초에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비슷한 왕국인 아샨티는 1719년에 정복을 시작해서 노예무역과 함께 발전했다. 이렇듯 서아프리카에서 국가 건설이 도시 경제를 대신하기 시작했지만, 이런 국가는 전쟁을 기반으로 세워졌고 인간 상품을 사고팔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장려했다. 토착 산업은 변화하고 와해되었고 가족의 유대와 정부는 약해졌다.(p154) <니그로> 中


 아프리카 대륙에서 많은 이들이 서인도 제도로 끌려가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은 칼 마르크스(Karl Marx , 1818 ~ 1883)가 <자본론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konomie>에서 설명한 시초축적의 역사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서인도로 갈 수 밖에 없다는 모습은 또다른 형태의 인클로저(Enclosure)운동으로도 비춰진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애서 '사탕수수가 사람들을 쫓아낸다' 로.


[그림]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아프리카 인(출처 : https://www.africanexponent.com/post/10712-the-bitter-history-of-african-slaves-and-sugar-production)

 

 시초축적의 역사에서는, 자본가 계급의 형성에 지렛대로 기능한 모든 변혁들은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것은, 많은 인간이 갑자기 그리고 폭력적으로 그들의 생존수단에서 분리되어 무일푼의 자유롭고 '의지할 곳 없는' 프롤레타리아들로 노동시장에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농업생산자인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은 전체 과정의 토대를 이룬다.(p981) <자본론 1-(하)> 中


 <자본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유럽 자본주의 발전 중 일정 부분은 아프리카 부의 강제이전이 될 것이다. 이와 함께 강제이주된 이들은 새로운 가족제도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들은 아프리카 전통의 제도 대신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 ~ 1895)가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에서 설명한 노예제의 산물로서의 '일부다처제'를 강요받는다. 아프리카 대륙의 수탈과 가족제도의 붕괴는 이들을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영화 <기생충>의 지하실로 안내한다.  


 일반적으로 아메리카 노예제도가 사회에 끼친 영향 가운데 가장 심각한 상황은 일부다처제의 니그로 가정을 새로운 형태의 일부다처제로 대체한 것이다. 니그로 가정은 이제 보호받지 못하고, 덜 효율적이며, 덜 문명화된 새로운 형태의 일부다처제로 대체되었다.(p187) <니그로> 中

 

 사실상 일부다처제는 명백히 노예제의 산물이었으며, 몇몇 예외적인 지위를 가진 자들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일부다처제는 부자와 귀한 신분의 특권이며 주로 여자 노예의 구입을 통해 충원된다. 인민 대중은 일부일처제의 생활을 한다.(p72)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6 -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 > 中


 이외에도 듀보이스는 <니그로>에서 노예제도로부터 시작된 아프리카와 흑인의 수탈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음을 담담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듀보이스의 담담한 서술은 독자들에게 흑인이 무지한 존재라는 편견이 얼마나 잘못된 오해인지를 일깨운다.  <니그로>안에 담긴 메세지는 가볍지 않지만, 듀보이스는 무겁게 말하지 않는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말하듯 편안하게 읽히는 짧은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아프리카, 빈곤, 인종 문제의 많은 부분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니그로>는 좋은 사회과학 입문서라 생각된다. 


PS. 개인적으로 <니그로>에서 언급된 시초자본 문제와 관련해서, 실비아 페데리치 (Silvia Federici)의 <캘리번과 마녀 Caliban and the Witch>를 떠올리게 된다. 수탈의 대상을 아프리카인이 아닌 여성으로 대치시켜 노예제도 이후의 자본주의 역사를 바라본 것이 <캘리번과 마녀>라 여겨진다. 이는 노동 문제, 인종 문제, 종교 문제, 성 문제 등 많은 문제가 '평등 平等'이라는 주제의 서로 다른  현상(現象 phenomenon)이라는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인클로저가 농민들로부터 공유지를 박탈했던 것처럼 마녀사냥은 여성들로부터 신체를 박탈했다. 따라서 신체는 노동의 생산을 위한 기계로 전락하지 않게 막아 주던 모든 예방장치에서 ˝해방되었다˝(p272)... 노예제가 폐지된 상황에서도 부르주아의 레파토리에서는 마녀사냥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식민화와 기독교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확장으로 인해 식민화된 사회의 신체에 획실히 이식되어 피식민 공동체 스스로 자신들의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박해를 실행하는 상황에 이르렀다.(p341) <캘리번과 마녀> 中


 그들은 오늘날 발전의 맨 앞자리에서 인간으로서 자신의 권리뿐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더 위대하게 만들고자 하는 이상을 위해 싸울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여성 해방, 세계 평화, 민주 정부, 부의 사회화, 인류애를 위하여.(p229) <니그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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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14: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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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16: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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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삶의 양식, 즉 다시 태어남의 부활양식을 나의 실존의 지평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의 삶의 지평에 받아들이는 사건, 그 사건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기쁜 소식"이요, 유앙겔리온이다!(p42)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中


 도올 김용옥 교수는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이전 여러 권의 기독교 관련 서적을 낸 바 있다. 이를 먼저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저자는 <기독교 성서의 이해>(2007)를 통해 성서가 정경으로 확립되는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성서 무오설(聖書 無誤說)을 비판하며, <요한복음 강해>(2007)를 통해서 영지주의(Gnosticism)에 대항하는 인간화된 로고스(Logos)의 모습을 밝히는데 중점을 둔다. 공관복음과 관련하여 <마태오 복음>와<루카 복음>에 전승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상의  Quelle(Q자료)를 기반으로 <큐복음서>(2008)에서는 예수의 어록(가라사대 문헌)을 다루고 있고,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도마복음>(2010)에서는 어록 자료 중심의 분석을 수행한다. 


 저자는 <큐복음서>와 <도마복음>의 공통된 말씀 자료 속에서 무엇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저자는 성서 텍스트를 일종의 '무대장치'로 해석한다. 보다 극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 성서의 자료들은 가공된 것이 많으며, 이 안에서 '인간 예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인간 예수'가 아닌 '메시아 예수' 또는 '십자가 위에 못박힌 예수'의 모습이 사도 바오로에 의해 강조되면서 기독교 교리가 성립되었음을 <도올의 로마서 강해>(2017)에서 설명한다.


 마가복음은 인류사상 최초로 등장한, 유앙겔리온이라고 하는 유니크한 문학장르이다.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선포하는 유앙겔리온의 선포자였다고 한다면, 마가는 예수의 삶을 선포하는 유앙겔리온을 창시했다... 전자가 예수의 십자가사건의 의미를 물었다면, 후자는 예수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한다.(p73)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中


  이와 같이 정리한 기독교 사상 체계 위에서 저자는 드디어 <마가(마르코) 복음>(2019)에서 인간 예수의 모습을 찾는다. 저자는 <바오로의 편지(바오로 서간)>들 외의 복음서의 원형을 <마가 복음>에서 찾으면서, 이로부터 인간 예수의 모습을 찾아간다. 불트만의 성서신학의 연구를 바탕으로, 안병무의 갈릴리 지평에서의 인간 예수를 찾아 최종적으로 우리 삶으로 가져오려는 12년에 걸친 저자의 노력을 우리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복음서의 끝이야말로 원점에서의 새로운 출발이다. 빈 무덤이야말로 1장 1절의 선포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빈 무덤이야말로 살아있는 예수님 말씀의 모든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안병무는 예수의 삶이 노자가 말하는 물과도 같다고 말했다. 예수는 물과 같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낮추고 무화 無化시킴으로써 모든 생명의 구주가 되었다고 했다. 마가의 마지막 빈 무덤이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우주적인 "빔", 곧 모든 생명의 근원, 끊임없이 회귀하는 반자도지동 反者道之動의 위대한 생명력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p605)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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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4 14: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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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4 18: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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