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는 이와 돌봄을 받는 이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상호의존성에 근거한 돌봄은 타자를 위한 돌봄뿐 아니라 자기돌봄(self-care)도 요청한다. 타자를 돌본다는 것은 곧 세계 네트워크에서의 자기 위치와 역량을 질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자기돌봄 역시 타자를 위한 돌봄에 연계되거나 그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돌봄의 자원은 어떻게 분배되고, 돌봄을 받을 자격은 누가 결정하며, 그 인프라를 구축하고 유지·관리하는 이는 누구인가? 우리는 끈질기게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업화된 디지털 장치가 돌봄 자원을 사유화하는 문제 외에도, 주지하다시피 돌봄노동은 가족 같은 사적 영역 내에서 여전히 비가시화·저평가되어 여성, 노인, 이주노동자 같은 집단을 착취하거나, 호혜적인 정치적 돌봄의 성격을 잃고 시혜적인(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자선으로 쉽게 대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돌봄은 실존적 돌봄으로서, 죽음이 있으리라는 것을 앞서 보고 유한한 시간 속에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되돌아보고 질문하며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존재는 죽음이라는 비존재 및 시간의 유한성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토대에 대한 불확실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 돌봄들은 위계적이거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종속되어 있다기보다는 협업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쿠라, 유피테르, 텔루스를 중재하고 권한을 나누었던 것이 시간의 신인 사투르누스였음을 상기해보자. 시간은 단선적이지 않으며 여러 돌봄의 시간은 서로 얽히고 의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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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는 두 종류의 지정학적 구조물, 즉 공간적 봉쇄에 입각한 구조물과 공간적 운영으로 뒷받침되는 구조물의 혼종화를 목격중인 듯하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는 시장 접근성과 민영화에 대한 마땅한 강조와 함께 이 두 가지 변종을 조장한다

미래에는 국가 축소와 국경 통제를 비롯한 공간 운영이 중시될 가능성이 크다. 내부적으로는 국가가 공공 조달 부문에서는 후퇴하면서 치안 유지 활동과 감시 같은 분야에서는 확장될 가능성이 크다.

카를 슈미트 같은 저자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법, 정치, 주권, 비상사태 사이의 관계를 탐구했다. 예외적인 것에 대한 슈미트의 관심은 주권자를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정상적인’ 것에 대한 규제가 아니라 ‘예외적인’ 것의 시행이라는 믿음에 입각했다

감정과 정동은 조작될 수 있다. 미디어 보도는 사람들을 흥분하게 할 수 있고, 정치 지도자들은 왜곡하고 과장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으며, 대중은 공포와 두려움에서 희망과 평온에 이르기까지 여러 감정에 관여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1810년 에스파냐제국에서 독립한 아르헨티나의 경우 측량과 인구조사는 국가정체성 형성에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상상된 공동체’라고 부른 것을 창출하는 과정은 다양한 형태를 취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19세기 후반에 국민의식을 만들어내기 위한 이른바 ‘애국교육’의 도입이었다.

정체성과 영토는 국민국가의 맥락 안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국가 영토는 국가정체성의 제조와 재생산을 위해 외견상 안정적 플랫폼으로 기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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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투자와 숙련된 인력, 사상의 특정한 흐름을 장려함으로써 자국의 주권이 침해되도록 기꺼이 허용한다. ‘공유 주권(pooling sovereignty)’ 같은 표현은 국가와 정부가 자국 영토를 언제나 절대적으로 배타적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국가는 복수의 경계를 소유하고 있으며 세계은행, 국제연합, 글로벌미디어 기업,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rnization, WTO)가 지구적 행위를 형성하는 데 각자 일익을 담당하면서 거버넌스는 더 지구적이고 다중심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고 보는 시각이 이제는 일반적이다.

여기서 심화(intensity) 개념이 중요한데, 국제적 경계와 배타적 주권을 초월하는 능력을 보유한 흐름과 쟁점에 국가가 갈수록 적응해야 한다는 증거가 쌓이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과 쟁점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지구 기후 변화, 인권, 마약 밀매, 핵무기에 의해 인류 절멸의 가능성 등이 포함될 것이다

지정학적 경쟁과 경제적 지구화 사이의 연결고리는 상당한 논쟁거리다. 일각의 평가에 따르면 국가의 위상은 이런 지구적 경제와 정치 질서의 강력한 요구 조건 때문에 점차 퇴색되었다.

국가는 궁극적으로 전후 경제·정치 질서를 창조했고 미국은 이 점에서 가장 중요했다. 더욱이 재산, 과세, 투자 관련 법은 초국적기업의 활동을 규제하고 보호한다. 지구화가 지구적 정치 질서를 비롯한 ‘정세(state of affairs)’를 바꾸어온 방식을 조명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변형된 국가(transformed state)’라는 개념이 더 유용하다.

지정학 저자들은 E. H. 카(E. H. Carr)와 케네스 월츠(Kenneth Waltz) 같은 현실주의의 거두를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암묵적으로 다수의 현실주의자와 유사한 세계관의 모델을 가지고 작업한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자국의 안보 상태에 집착하던 라틴아메리카의 장성들에게 현실주의적 세계관은 국가 안팎의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과 위험으로 가득한 지정학적 상상력과 잘 맞아떨어졌다.

현재의 지구적 정치 체제는 자연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가 국제 정치에 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그것, 다시 말해 이야기일 뿐이다. 어떤 서사는 다른 서사보다 분명히 더 중요하고 미국 대통령과 러시아 대통령 같은 어떤 개인은 세계가 어떻게 느껴지고 해석되는지를 결정하는 데 특히 목소리가 크고 확연히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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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관계에서 핵심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의 취약성, 유한성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감각하고 더불어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것. 고통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잠재해 있으므로 그 아픔이라는 감각을 통해 자신을 넘어 타인의 어려움을 염려하고 돌보는 것. 자신과 타인을 동일선상의 연대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

돌봄을 사적 영역으로 제한하지 않고 공적 영역으로, 다양한 양상과 다양한 관계로 넓혀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타인의 고통이 너무나도 요란하고 너무나도 생생하게 표현되는 통에 그 고통을 멈추고 싶어지는 충동은 타인의 고통을 끝내 버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하려고 달려드는 기세로 발현될 때가 많은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바로 고통이 공감에서 기인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을?때로는 성가심의 형태로, 때로는 불안의 형태로, 때로는 동정의 형태로?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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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지정학이 영토, 자원, 입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비판적 접근은 인적(人的)인 것과 물리적인 것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지정학’을 생산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지정학이 실제로 세상을 바라보는 유혹적인 방식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지정학이 흔히 단순화와 객관화를 취급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지도가 한몫을 담당한다. 대중적인 심장부(heartland), 축(pivot), 원호지대(arc), 접경지대 같은 프레이밍 도구도 마찬가지다.

지정학(geopolitics)에서 ‘지(geo)’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의 과제는 어디선가 사건이 항상 벌어진다고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지리적인 것이 인간사에 개입하는 다채로운 방식에 관해 사고하는 것이다.

이 지정‘학’(‘science’ of geopolitics)은 지구의 자연 지리라는 ‘사실’(대륙과 대양의 배치, 여러 나라와 제국을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으로 구분)에 입각하여 국제 정치에 관한 ‘법칙’을 상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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