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과 나토가 벌인 합동 작전 그리고 국경을 넘는 파키스탄의 군사적 조치들로 아랍, 체첸을 비롯한 전 세계 곳곳에서 모인 해외 전사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알카에다 수뇌부 또한 도주하거나 살해당했다. 하지만 아프간과 파키스탄에서 온 탈레반은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기술로 무장한 미국과 유럽의 침략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시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시간을 갖고 있다." _ 팀 마샬, <지리의 힘> , p585/660


 지난 8월 31일. 미군과 NATO군의 아프가니스탄 완전 철수가 이루어지면서 '제국의 무덤'이라는 아프가니스탄에 매장된 제국(帝國)이 또 하나 추가됐다.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2001년 개전 후 빠르게 승기를 잡았던 서구 연합군이었지만, 결국 전쟁의 최종 승리는 탈레반 차지가 되었다. 19세기 영국, 20세기 소련, 21세기의 미국을 차례로 물리친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지만,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멸망에 이른 제국이 있으니, 바로 아케메네스(Archaemenes) 왕조의 페르시아(Persia)다. 


 다레이오스(다리우스 3세, BC 380~ BC330)를 구금한 이는 기병대장인 나바르자네스, 박트리아의 태수 베소스, 아라코티아와 드랑기아(Drangia)의 태수인 바르사엔테스(Barsaentes)였다.... 다레이오스를 구금한 자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따라잡힌다면 다레이오스를 넘겨주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하려 했다. 그리고 만약 추격을 받지 않으면 가능한 대로 대군을 모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한동안 베소스가 지휘권을 행사했다. _ 아리아노스, < 알렉산드로스 대왕 원정기 Anabasis Alexandrou>, p168 


 박트리아((Bactria)) 태수 베소스가 다리우스 3세를 인질로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Magnus, BC356~ BC323)에게 협상을 제의하지만, 거절당하고 다리우스 3세의 칼로 찌르고 도주하면서 다리우스 3세가 숨진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알렉산드로스였지만, 황제의 숨통을 끊은 것은 현 아프가니스탄 지역 태수 베소스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제국의 무덤 첫 안장 국가가 페르시아라는 것이 큰 무리는 되지 않을 것이다.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지도] 아프가니스탄과 주변국들(출처 : 구글맵)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2021.9월호에서는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여러 각도에서 분석한다. 정확하게 20년 전인 2001년 9.11 테러의 배후로 알 카에다(al-Qaida)를 지목하고 아프가니스탄에 폭격을 개시하며 시작된 전쟁은 개전 며칠 만에 탈레반을 무력화시키고, 해를 넘기기 전에 아프가니스탄의 새 정부를 수립하면서 전쟁은 조기 종식되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지원받기 쉬운 남부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숨어들어갈 수 있었다.


 

 국제법이 박살났다. 미국은 아무런 승인도 없이 아프가니스탄에 먼저 폭격을 쏟아부었다. 국제연합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국제연합은 2001년 9월 12일부터 12월 20일까지 만장일치(러시아와 중국 포함)로 관련 결의안들을 가결시켰다. 이제 이 전쟁은 정당방위나 침략국에 대한 무력사용의 범주를 벗이났다. 이것이야말로 '테러와의 전쟁'이었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1.9月, <아프가니스탄, 미국의 실패와 혼돈>, p29


 마치 마오쩌둥의 홍군(紅軍)이 국공내전(國共內戰) 당시 농촌을 근거로 세력을 확장한 것과 같이 탈레반 역시 농촌에 자리잡을 수 있었고, 같은 이슬람국인 파키스탄의 지원으로 세력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현정부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 결국 탈레반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재점령이 가능했다는 것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탈레반은 카불에서 점점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다른 진영들과 달리 종족적 잠론을 모두 거부하면서, 아프가니스탄 민족주의의 옹호자를 자처했다... 탈레반의 전략은 중앙정부의 결함을 해결해서 공공 서비스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탈레반은 시골 지역에 자리잡고, 주지사, 판사, 학교 교육 담당자와 보건 담당자, 비정부기관 관련 담당자들과 함께 그림자 정부를 건설했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1.9月, <중앙정부의 '결함'을 파고든 탈레반의 '해결사' 전략>, p33


 공세가 시작되기 전부터 전국 75개 지구가 탈레반 통제하에 있었고, 탈레반은 주로 농촌 지역을 관할했지만 대부분의 다른 지역에서도 활동했다. 탈레반은 모습을 감추지도 않았으며, 여성 인권의식이 없는 일부 국민의 시각에서 그들은 부패한 정부 권력보다 더 올바르고 때로는 더 나은 방식으로 지역을 통치했다...  탈레반은 여러 도시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국가 전체를 고립시켰다. 도시 간의 주요 통신선을 단절시키고, 30개의 국경검문소 대다수를 점령했으며, 정권의 수입원을 끊고 공급망 중에서도 특히 식량 공급을 통제했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1.9月, <탈레반의 속전속결 아프간 장악, 그 비책은?>, p2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무리한 군사공격, 부패 무능한 정부, 농촌에 근거하여 지방정권화한 탈레반의 세력보존 등이 미군의 철수와 거의 동시에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 수중으로 넘어간 여러 이유들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것이 전부일까? 단순한 절차적 실패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없는 것일까?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배에는, 서구권의 각종 실패가 집약돼 있다. 우선, 미국이 베트남전 이후 그 어떤 무력 충돌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군사적 실패다. 또한 '테러와의 전쟁'이 더 해롭다는 점이 드러났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실패했다. 새로운 정권들의 심각한 부패, 참정권에 대한 불신 확산 측면에서 도덕적 실패이며, 침공을 한 사람이 결정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실패다. 현지 정부들이 무너지고 축출해야했던 세력들이 단기간에 최고 권력을 차지할 상황이므로 정치적으로도 실패한 것이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아프가니스탄, 미국의 실패와 혼돈>, p29


 이에 대해서는 <지리의 힘 Prisoners of Geography: Ten Maps That Explain Everything about the World>의 저자 팀 마샬 (Tim Marshall)이 중국 지인과 나눈 대화가 답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자유, 평등, 인권이라는 이른바 서구의 가치들을 깃발에 걸고 자신에 이익에 맞게 행동하면서 '근대화'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상대에게 무리하게 강제하려 한 모든 행동들이 지난 세기 많은 비극들의 진정한 원인은 아니었을까. 강대국이 심판자의 입장에서처럼 이들을 단죄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힘의 논리'가 국제질서에 존재하는 한, 언제든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은 재현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나는 인권이라 부르는 것들이 중국에 전면적으로 도입되었을 경우 어떻게 폭력과 사망이 만연하게 된다는 것인지를 묻는 내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에게서 엄중한 훈계를 들어야 했다. "당신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문화에서 당신들의 가치가 먹힐 거라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겁니까?" _ 팀 마샬, <지리의 힘> , p69/660 


 미군 철수 후 한 달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아프가니스탄 소식은 이제 거의 들리지 않느다. 대신,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주변국들의 치열한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 새롭게 국제 뉴스에 올라온다. 


관련기사 : https://www.ytn.co.kr/_ln/0104_202109250521499096


 

인도가 참여한 쿼드(Quad) 정상 회담이 오늘 아침 뉴스에 등장했다. 쿼드의 성격이 대(對)중국 포위망임을 생각해본다면, 자연스럽게 인도의 라이벌이자, 중국의 우방인 파키스탄을 떠올리게 된다. 이 두 나라가 아프가니스탄의 동쪽과 남쪽의 인접국임을 생각해본다면,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둘러싼 미-중 양 강대국의 새로운 그레이트 게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과거 영국의 거문도 점령(1885)이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벌어진 것처럼,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그레이트 게임의 여파로 '한반도 정전선언' 제안에 대한 답으로 '한국의 쿼드 참여 희망'을 답으로 받은 우리의 상황은 아프가니스탄의 일이 결코 우리와 무관한 사건이 아님을 일깨운다...

 

카슈미르는 인도-파키스탄의 비대칭성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분할 당시부터 인도의 국력이 압도적이었다. 영토와 인구 등 모든 면에서 월등했다. 그 비대칭적 분할체제는 파키스탄의 경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동맹 노선을 표방하며 '대국 大國 외교'를 추구했던 인도와는 달리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세력 균형을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동맹 정책을 추진했다. _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2> ,p350/970


 '중국'과 '파키스탄'의 '철의 형제'는 역사적 산물이다. 파키스탄은 비고산권 중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가장 먼저 승인한 국가 중 하나였다. 양국이 국교를 수립한 해는 1951년이다. 보답으로 중국은 핵무기 등 민감한 기술을 전파해 주었다.... 이제는 21세기 실크로드의 첫 삽을 뜨는 모델하우스가 되었다. 중국개발은행(CDB)과 중국공상은행 등은 금융을 지원하고, 기간산업을 담당하는 기업들은 인프라 사업을 펼치는 첫 번째 훈련장이 된 것이다. '철의 형제'는 '전천후 동반자'가 되었다. _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1> ,p206/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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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1-09-25 13:30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대통령이 유엔 연설에서 한국전쟁 종전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물밑협상이 진행되고 있음을 직감하였어요. 다음날 뉴스에서 미국의 반응 역시 긍정적이더군요. 종전의 당사국 입장에서 어떻게 대응할런지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때마침 겨울호랑이 님이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1-09-25 15:28   좋아요 4 | URL
저 역시 어제 북측과 미국에서 나온 긍정적 반응에 기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다만, 오늘 아침에 쿼드 정상회담에서 한국도 함께 하길 바란다는 미국의 반응은 마음에 걸리네요... 단순한 희망인 것인지, 아니면 부드러운 압력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쉽지 않은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거서님, 평안한 주말 되세요. 감사합니다.^^:)
 

  황태연(黃台淵)의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 Confucian Philosophy and the Origin of the Western Enlightenment>은 서구 근대의 출발점을 르네상스( Renaissance)와 종교개혁(Reformation)이전의 공자(孔子, BC 551 ~BC 479)의 유가(儒家)철학에서 찾는다.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유럽 세계보다 이미 먼저 근대화를 이룩한 중국 문물이 유럽으로 전해지면서(西遷) 비로소 유럽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책의 주된 요지다.


 이 책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으로 개시되는 서양 근대문명의 유교적 기원에 대한 탐색과 규명은 서구 계몽주의, '근대유럽', 그리고 보편사적 근대가 공자철학과 극동의 정치문화에서 유래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적/베버주의적 근대이론의 오류를 극명해 '새로운' 근대이론을 수립하는 출발점이다._ 황태연,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상) >, p13


  그렇지만, 아편전쟁(鴉片戰爭, 1839 ~ 1842)로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중국의 근현대사를 생각해 볼 때,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선뜻 동의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일례로 자본주의를 생각해보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 ~ 1920)나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와 같은 사상가들은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꽃피울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자유로운 시장경제와 프로테스탄티즘과 같은 자본주의 정신을 들고 있는 반면,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는 이러한 사상과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달되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 대해 저자는 '미발달'이 아닌 '다른 안의 선택'이라는 관점으로 비판한다.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라는.

 

중국에서 대공업자본주의가 불가능하게 된 이유는 일단 매뉴팩처 생산의 경제적 한계와 질곡을 혁신기술로, 즉 정교한 역학적 자동화기계로 분쇄, 돌파하는 또 한 번의 기술혁명을 일으키지 - '못한' 것이 아니라 -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한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다른 길은 다름 아니라 '자호 字號(브랜드) 상인 주도의 광역 네트워크 자본주의'였다. 공장제는 기술혁신에 기초한 노동절약적 생산방식인 반면, '자호상인 주도의 광역 네트워크'는 경영혁신에 기초한 자본절약적 생산, 분배방식이다. 이 다른 선택의 원인은 중국인들의 완전한 사회해방, 인구폭발과 노동력과잉, 중국 상품에 대한 유럽의 수요의 소멸로 인한 중국시장의 축소 등이었다._ 황태연,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상) >, p531


 저자는 결코 동양이 서양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선 선진 문명이었고, 서구 문명은 '동방의 빛'을 통해 무미몽매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책 전편을 통해 서술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기존 서구 중심의 근대관이 아닌 새로운 근대관을 제기한다.


 '송대 이래의 중국적 근대성의 서천 西遷'이라는 가설이 옳을 것으로 입증되려면 중국에서의 '근대의 발단'이라는 사실이 비교역사학적으로 증명되고 이론적으로 논증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사적(보편사적) 의미를 갖는 - 한국/중국/일본의 역사학에서 보통 '근세'라고 불리고 서양에서 '초기근대(the early midemity)'라고 불리는 - 보편사적 의미의 '초기근대'가 진정 중국에서 최초로 개시되었는가? 앞서 여러 번 시사했듯이, 제국주의시대 일본이 동양사학자 나이토고난(內藤湖南)은 1920년대에 이미 이 물음에 대해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해놓은 바있다. 그는 중국이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시기, 특히 송대(960~1279)에 일어난 심원한 변혁을 "근세의 발단"으로 규정했다. 이것이 그의 이른바 '송대 이후 근세설 宋代以後近世說'이다._ 황태연,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상) >, p473


 일단 유의해야 하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송대에 인류역사상 최초로 발단한 '근세'가 공자철학 및 송대의 순수한 유교정치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송대 근세를 개창한 북송 대개혁가 왕안석의 신법과 개혁정책에 대한 '정학 正學'운동 주도세력의 정치사상적 영향은 "심대했기" 때문이다._ 황태연,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상) >, p473


 구체적으로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에서는 중국의 정치철학이 유럽으로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점을 송(宋)대 이후로 바라본다. 저자는 특히 당대의 정치가 왕안석(王安石, 1021 ~ 1086)의 개혁을 나라 전체의 구조를 변화시킬 정도의 혁명으로 평가하고, 이 개혁안 안에서 '보편적 근대성'을 발견한다. 이는 나이토고난과 같은 관점이지만, 저자는 이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간다.


 나이토고난이 중국의 근대화 노력이 송대 이후 쇠퇴했다고 평가하는 반면, 황태연 교수는 청대에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오랜 기간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었음을 강조한다. 또한, 중국문화의 전파가 세계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극동지역이 강한 영향을 받았기에, 오랜 기간 극동 아시아 전체가 유럽보다 여러 면에서 앞서 있었음을 강조한다.


 나이토고난의 송대이후근세론을 수용하되 그의 원/명/청대 노쇠설을 버리고 청대까지 중국이 계속적 발전론으로 수정해야 한다. 이 수정된 역사관에 따라 중국의 역사시대 구분을 세계적 차원에서 재조명하면,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근세'는 '근대'와 구분되어 '초기근대(early modernity)'로 재再정의된다. 그러면 '근세'는 '근대의 전기 前期'로 이해되는 반면, '근대'는 '높은 근대(high modernity)'로 바꿔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중국의 명/청대와 17~19세기 조선을 '근세'(즉, 낮은 근대)의 '마지막 단계'(최후단계) 또는 '성숙단계'로 규정한다._ 황태연,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상) >, p524

 

 극동아시아의 근대화와 관련한 저자의 관점은 구한말 대한제국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잘 드러난다. 이 책들에서 우리는 곧 나라를 빼앗길 껍데기뿐인 제국이 아닌 일본 다음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역동적인 '대한제국 大韓帝國'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는 또다른 관점의 구한말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정리하도록 하자.

 

이상의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과연 서구 근대 정신인 계몽(啓瞢)의 빛(light)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답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빛의 기원은 서구 문명 내부인 그리스 로마 문명이 아닌 외부에서 왔으며, 그 뿌리는 공자를 비롯한 유가 철학이라는 것이 책의 요지다. 이러한 주장이 낯선 것이 사실이지만, 근대 철학자인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 ~ 1716)나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 ~ 1754)가 중국 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고려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동양철학과 서구 근대 사상을 비교하며 음미한다면, 이러한 노력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저자는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에서 개략적으로 전개한 논지를 보다 세부적으로 <근대 영국의 공자숭배와 모럴리스트들>, <근대 프랑스의 공자열광과 계몽철학>, <근대 독일과 스위스의 유교적 계몽주의>에서 펼치는데, 아직 여기까지는 선뜻 손이 미치질 못하고 있다. 최대 1,000 페이지에 달하는 책들이어서 적지 않은 페이지의 부담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이 모두 긴밀한 관련이 있기에 큰 흐름을 잡고 세부 차이점을 위주로 정리하면 불가능한 작업은 아닐 듯하여 추후 계획으로 추가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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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6-13 23: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1000페이지...흡
여기에 댓글 달 실력은 안되고...
애들 말로
그냥 짱입니다!^^

겨울호랑이 2021-06-13 23:29   좋아요 3 | URL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이 다른 책들의 서론 격에 해당하는데,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큰 주제는 여기에서 거의 언급된 것 같아요. 다소 반복되는 느낌도 있지만,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역사적 반박‘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생각합니다. 책에 정말 많은 사상가들의 주장이 정리되어 있는데, 따라가기에도 벅차네요. 독자가 읽기도 힘든 책을 쓴 저자들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나리자 2021-06-14 11: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철학과 역사물의 향연!! 멋지십니다~
정말 쨩이세요!!

겨울호랑이 2021-06-14 11:22   좋아요 3 | URL
황태연 교수의 책들을 관통하는 주제가 ‘근대의 기원‘이고, 각 권들은 세부적인 논증과 역사속에서의 실재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해됩니다. 독자들이 본문에 언급된 사상가와 역사적 사실을 다 알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니만큼, 전체적인 흐름을 잡고 비교해 읽는다면,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독서를 자기 주도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집니다. 그런 면에서 바라볼 때 황태연 교수를 비롯한 석학들의 내공은 정말 엄청남을 느낍니다.^^:)
 

 

 1970년 1월 26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선 유진산이 유진오의 뒤를 이어 새 당수로 뽑혔다. 그러나 그것이 곳 1971년 대선후보의 보장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40대 기수들'의 도전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에 김영삼은 42세, 김대중은 44세, 이철승은 47세였다._강준만, <한국 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1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p95/350


 제1야당 국민의힘 당대표에 30대 이준석 대표가 선출되었다는 뉴스가 화제다. 헌정 사상 30대 당대표는 처음이라며 모든 뉴스를 블랙홀처럼 흡수해버리는 바람에, 대통령이 G7 회담에 초청되어 출국했다는 뉴스나 미 FDA에서 얀센 백신의 유효기간을 1.5개월 연장했다는 뉴스는 구석에서도 찾기 힘들었던 하루였다. 이른바 '이준석 현상'을 보면서 과거 1970년대 '40대 기수론'을 다시 보는 듯한 기시감(旣視感)이 느껴지는데, 이러한 감정이 나만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당시 53세였던 박정희는 이른바 '40대 기수들'의 도전에 대해 '어린애들과의 싸움'이라며 폄하하면서, 타협적인 유진산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를 원했다... 유진산도 박정희처럼 '40대 기수들'을 '정치적 미성년자', '구상유취(口尙乳臭)'라는 표현을 쓰면서 경멸감을 내비쳤지만, '40대 기수들'의 바람은 결코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다. '40대 기수들'의 유진산 비판은 큰 호응을 얻어 유진산은 전당대회를 2주일 앞둔 9월 21일 후보 경쟁에 나서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박정희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중앙정보부의 무능을 질타했고, "내가 김영삼이 같은 애송이와 어떻게 싸우라는 말이냐"라고 호통을 쳤다._강준만, <한국 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1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p96/350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1970년대 당시 유행했던 '40대 기수론'이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언론에서 열을 올리며 보도하 듯  30대 당대표의 선출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준석과 그가 속한 정당을 지지하지 않지만, 이로 인한 파장이 정치계에 긍정적인 영향이 미쳤으면 하는 마음이다. 새로 대표가 된 그가 그동안 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해 온 국민의 힘에게 자마전투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BC 235 ~ BC183)처럼 승리를 안겨다 줄지, 황산대첩의 왜장(倭將) 아지발도(阿只拔都, 1365~1380)처럼 패배를 안겨다 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과거 '40대 기수론'에 대항했던 박정희와 그로부터 50년이 지나 '30대 당대표'인 이준석이 박정희의 딸 박근혜의 키즈라는 연관성은 이런 기시감을 더하게 하는 요인이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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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6-11 19:2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혹시 신문에 투고 해보시죠.
시론으로...!

겨울호랑이 2021-06-11 21:2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 ^^:) 그렇지만, 아마도 제 부족한 글을 받아줄 곳은 제 서재와 저희 집 <가족신문>밖에 없을 듯합니다..

그레이스 2021-06-11 19:38   좋아요 4 | URL
충분히 훌륭하십니다.
강준만 반갑네요
인물과 사상 열심히 챙겨 읽었었는데..^^
이 책 자료가 많죠.
저는 책으로 갖고 있어요.^^

겨울호랑이 2021-06-11 19:43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저 역시 역사의 큰 흐름을 잡는데 좋은 책들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양이 만만치 않아서 도서관 대출과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그레이스님께서는 소장하고 계시다니 많이 부럽습니다.^^:)

붕붕툐툐 2021-06-11 21:19   좋아요 2 | URL
가족신문~ㅋㅋㅋㅋ 저도 그레이스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6-11 21:2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
 

 우산도(于山島) 독도의 옛 명칭은 우산도다. 1454(단종 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조에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의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00년에 반포한 '대한제국 칙령 41호'에는 관할 구역을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석도(石島)"라고 하였다. '죽도'는 울릉도 동북쪽 가까이에 붙어 있는 죽도이고, '석도'는 우산도로서 순우리말로 '독섬', '돌섬' 등으로 부르던 독도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_최선운, 민병준, <해설 대동여지도>, p180


 정병준(鄭秉峻, 1965 ~ )의  <독도 1947>은 독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주장이 1951년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맺어진 평화조약,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를 전후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상세하게 다룬 책이다. 독자들은 본문을 통해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역사'에 근거한 반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국제법'에 근거한 주장이라는 사실과 이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입장도 함께 알 수 있다. <독도 1947>에서는 조약 초안 작성 단계에서는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움직임은 패전국이었던 일본에 대한 배상책임을 보다 명확히 하려는 미국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


 1947년 1월 30일 로버트 피어리가 제출한 제1장 영토조항을 다룬 초안(Draft), 비망록, 지도 가운데 초안이 남아 있다. 비망록과 지도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문서의 제목은 "초안(Draft)"으로 되어 있다. 피어리가 만든 매우 간단한 2쪽짜리 문서는 이후 1947~1949년 국무부 대일평화 조약 초안 영토 조항의 원천이자 핵심이 되었다. 피어리는 대일평화조약의 영토조항 초안을 처음 작성할 때부터 제주도, 거문도, 울등도와 함께 독도(리앙쿠르암)를 "한국 근해의 모든 작은 섬들"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이다. 또한 피어리의 영토조항 초안은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독도(리앙쿠르암)를 한국령으로 표시한 미국측 초안으로 이어졌다. 특히 피어리가 일본통이며,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독도가 한국령으로 명확히 규정된 것은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다._ 정병준, <독도 1947>, p389


 그렇지만, 1949년 일본에 '매료된' 미국인 시볼드가 등장하면서, 조약의 내용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변경된다. '반공주의'와 '친일'을 가장 우선시한 시볼드에게 공산주의자인 재일한국인들'이 전후 일본의 불안요소라는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1878 ~ 1967)의 주장은 매우 의미심장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미국 내에서 받아들여지게 되고, 더 나아가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에 초청받지 못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독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이 시점에 발생했다.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일본에서 미 국무부의 대표이자 주일정치고문이었던 시볼드(William J. Sebald)는 초안에 대한 검토의견서에 독도가 1905년 일본령이 된 이후 단 한 차례도 한국의 이의제기를 받지 않아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폈다... 미 국무부는 현지공관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해서 1949년 12월 조약 초안을 수정했다. 여기에는 한일 주재 두 대사의 의견이 반영되어 한국의 대일평화협상 참가, 독도는 일본령이라는 조항이 새로 추가되었으나 조약 초안에는 전반적으로 시볼드의 친일적 견해가 대폭 반영되었다. 미 국무부가 독도를 일본령으로 잘못 표기한 이 초안의 존재는 이후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일본 영유권,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령으로 확인되었다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_ 정병준, <독도 1947>, p375


 시볼드의 권고 이후 국무부의 조약 초안 중 영토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사항 두 가지가 사라졌다. 첫째 일본의 영토를 명백히 특정하는, 경계선을 긋는 표시방법, 둘째 일본의 영토범위를 명확히 보여주는 첨부지도가 그것이었다. 이는 일본 외무성이 가장 바라 마지않던 바였다._ 정병준, <독도 1947>, p467


 사실, 한국의 조약 참가 반대 국가는 미국이 아닌 영국과 일본이었다. 일찍이 러시아를 상대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에서 우정을 나눈 두 국가는 단결하여 한국의 조약 참여를 반대했고, 이들의 반대에 한국의 참여를 주장하던 미국도 결국은 이들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다. 이로써 구한말 이후 거의 50여년 이상 일본의 침탈에 시달리던 최대 피해자는 조약 당사국이 되지 못하면서, 강화조약의 한계를 드러냈다.


 회의에서 한국의 (대일)조약 참가희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원래 (극동위원회) 11개국 이외 다른 국가들의 견해가 요청될 시점에 만약 한국 정부가 존재한다면, 한국정부의 대표가 한국측 견해가 피력할 기회를 부여받게 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만약 의견수렴을 하는 그 시점에 한국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국대표단에 자문역 한 명 혹은 여러 명을 참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1947년 8~9월은 한국에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파국으로 치닫는 마지막 순간이었으며, 언제 한국정부가 수립될지 가늠할 수 없는 시점이었다... 영국은 대일평화조약에 한국이 참가하는 것을 최후까지 극렬하게 반대한 국가였다._ 정병준, <독도 1947>, p394


 이와 함께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한 해 전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수립과 함께 한국전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을 커졌으며, 이로 인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에 대한 배상책임이 아닌,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전진기지로서 일본의 위상을 강화하는 조약으로 성격이 바뀐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일본의 지정학적/전략적 위상을 제고시켰다... 덜레스의 개인적 신념과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는 새로운 조약 초안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1947년 이래 미 국무부가 준비해왔던 대일징벌적 조약 초안과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조약 초안이었다. 덜레스의 요구는 첫째 간단한 초안일 것, 둘째 평화조약에 초점을 둘 것 등 두 가지였다. 국무부가 준비한 상세하고 복잡하며, 일본의 전쟁책임과 배상, 조약 발효 후 감시체제 등을 강조한 이전의 조약 초안들은 책상 위에서 치워졌다._ 정병준, <독도 1947>, p503


 포츠담 선언의 정신은 일본령에 포함될 섬들을 구체적으로 특정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1947년 이후 작성된 미 국무부의 대일평화조약 초안들에는 모두 일본령을 구체적으로 특정하고, 이를 표현하는 부속지도를 첨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1951년 4월 영국 외무성의 조약 초안과 부속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표현되는 방식이었으며, 기본적으로 포츠담 선언의 대일영토규정에 따랐던 것이었다. 그런데 1949년 11월 주일미정치고문 대리 시볼드가 일본의 심리적 불이익을 이유로 내세운 이래 일본령에 포함될 섬들을 특정하는 데 대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반대가 제시되었다. 그 배경은 미소냉전의 격화였으며, 결정적 계기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중공군의 참전이었다. 이러한 과정의 중간 결과물이 바로 1951년 3월 조약 초안이었다. 이는 일본령에 포함될 섬들과 일본령에서 배제될 섬들에 대해 구체적인 특정을 회피한 조약 초안이라고 할 수 있다._ 정병준, <독도 1947>, p521


 결국, 미국 국무부 친일파 관료의 등장과 한국전쟁 등의 외부 요인으로 샌프란시스코 회담에서 한국은 초청받지 못했고, 강화조약 역시 일본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여기에 더해 이승만 정부의 적절치 못한 대응 역시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즉, 이승만 정부는 '대마도 對馬島'의 한국 귀속을 주장하면서 '대마도-파랑도-독도'등 3개섬에 대한 영유권을 함께 주장한 것이다. 한국이 말한 3개 섬 중 대마도에 대한 주장은 실효 지배 중인 영토에 대한 정치적인 주장으로, 파랑도에 대한 주장은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섬에 대한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국제사회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독도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는 이들은 대마도, 파랑도에 대한 주장과 마찬가지로 독도에 대한 한국의 주장 역시 근거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부분은 외교적으로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한국정부가 가장 절박하게 생각했던 문제는 귀속재산 처리였으며, 영토문제에 있어서 대마도를 기각한 대신 새로 독도, 파랑도를 요구했던 것이다. 즉, 독도문제는 대마도 요구가 기각된 다음에 제기되었으며, 요구될 때에는 파랑도와 함께 제시되었던 것이다.(p750)... 한국정부는 정치적 주장이었던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이후 영토문제를 중시하지 않ㄴ았다는 인상이 강했다. 파랑도를 주장한 데서 드러나듯이 정부 스스로 명확한 확증근거를 갖지 못한 지역을 한번 주장해보자는 정도의 결의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_ 정병준, <독도 1947>, p763


 이처럼, <독도 1947>에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전후한 외교문서 분석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주장과 국제 사회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한 국가에 있어 중요한 영토 문제가 협상 당시의 국제 정세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과 함께 국력의 크기에 따라 자신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독도 문제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1947년 독도 조사대의 귀환 이후 울릉도/독도 조사활동의 결과는 다양한 방법으로 공개되었다. 이를 통해 독도는 재발견되었고, 대중적 관심의 표적이 되었으며, 독도에 대한 사회적/문화적 관심과 인식이 제고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조사대에 참석했던 학자들에 의해 이후 한국의 독도 인식/정책과 관련한 주요 학설과 논리, 증거/관련 자료의 발굴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_ 정병준, <독도 1947>, p142 


 저자는 글을 1947년부터 시작한다. 이는 비록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이후에도 독도와 관련한 첨예한 대립이 있어왔지만, 우리가 독도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1947년 독도 조사대의 탐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 였을까. 1947년 독도 조사 이후 국토의 막내 독도에 대한 관심이 대중적으로 퍼져 나간 것이 국제법의 한계를 이겨내고, 우리 국토를 지켜낸 힘이라는 것을 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독도 1947>로 지으면서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독도문제가 한일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한미/미일 관계에서도 폭발성을 지닌 문제임이 확인되자 미 국무부는 이 문제에서 자국의 위치를 결정자에서 중립자로 조정하기 시작했다. 덜레스가 애써 미국의 입장을 중립적 위치로 강조했음에도 미 행정부 내에서 한국을 비난하고 일본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_ 정병준, <독도 1947>, p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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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 연구한 모든 역사적 궤적은, 불평등구조가 얼마나 기존 정치제체 형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구래의 삼기능사회든 19세기에 개화했던 소유자사회든, 심지어 노예제사회나 식민사회라 하더라도, 일정한 유형의 불평등주의체제를 지속시켜온 것은  바로 정치권력의 조직화 양식이다.(p1067)... 정치체제의 또다른 측면, 즉 정치활동과 선거민주주의의 자금 측면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시급하다.(p1068)... 요약하자면 시민 각자에게 동일한 가치의 연간 바우처를 주자는 것으로,.. 민주적 평등 바우처의 핵심 목표는 평등주의적인 참여민주주의를 고무하려는 것이다.(p1070) _토마 피게티, <자본과 이데올로기>


 전작 <21세기 자본>에서 심화되는 경제의 불평등 문제를 지적한 피게티는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정치를 통한 해결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저작을 통해 비로소 <21세기 자본> - <자본과 이데올로기>로 이어지는 피게티의 정치경제사상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독일 이데올로기>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조합이, 경제학계에 어느날 혜성처럼 등장한 그에게 아킬레우스가 그토록 원했던, 그리고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야 누릴 수 있었던 불멸의 명성을 보장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독점자본과 부의 불평등이라는 공통된 시대의 과제를 다룬 두 경제학자들의 서로 다른 처방전을 대조해 보는 것은 분명 독서를 즐겁게 하는 또다른 방법이라 생각한다.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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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1 1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1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2 1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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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2 1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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