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가하라 전투(Battle of Sekigahara, 1600)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죽은 후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다이묘(大名)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는 곧 야심을 드러냈다. 1585년 정부를 관리할 5명의 부교(五奉行)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3~1600)는 곧 이에야스의 야심을 눈치채고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무단 혼인을 금지한 히데요시의 법을 어기고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들과 사돈을 맺어 무장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에 미쓰나리는 이에야스가 법을 어겼다고 고발하여 죄를 추궁했고, 그 결과 다이묘들이 양분되어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개됐다... 1600년 10월 21일 미쓰나리의 서군과 이에야스의 동군은 미노노쿠니(美濃國)의 세키가하라에 집결했다. 10만 명에 이르는 잡다한 구성의 서군은 내분으로 분열했고 훈련을 잘 받고 단련된 8만명의 동군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 동군은 그날이 다 갈 무렵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고 3만 명이 넘는 서군을 살해했다. 미쓰나리는 체포되어 처형됐다. 이 전투는 일본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투의 하나로 꼽힌다. 그 뒤 264년 동안 일본을 통치하게 될 에도 바쿠후(江戶幕府)가 탄생하는 무대였기 때문이다. _ 조지 차일즈 콘, <세계 전쟁사 사전>, p506/1247


 개인적으로 이번 대선의 전후 관계를 보면서 세키가하라 전투를 떠올리게 된다. 한편으로 한일전(韓日戰)으로도 인식되는 이번 선거에서 일본전국시대 전쟁을 소환하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기에 애써 무시했지만, '안철수-윤석열 단일화'라는 사건은 다시 세키가하라를 떠올리게 한다. 야마오카 소하치(山岡?八, 1907~1978)은 <도쿠가야 이에야스>에서 세키가하라 전투의 결정적 순간으로 마쓰오산에 주둔한  고바야가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秀詮, 1582~1602)의 참전으로 묘사한다.


[그림] 세키가하라 포진도(출처 : https://senjp.com/sekigahara/)


 아들 히데타다(德川秀忠, 1581~1632)가 결전 직전에도 합류하지 못해 미쓰나리의 서군에 비해 열세에 놓였고, 포진 위치도 좋지 않은 상황의 도쿠가와군은 고바야가와군의 내응을 약속받았지만, 그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도쿠가와는 고바야가와군을 향해 독촉의 사격을 가했고, 이후 고바야가와군이 서군진영으로 돌입하면서 전황은 결정된다. 전투에서 결정적인 5분이 대승과 대패를 가르는 것은 세키가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안철수-윤석열의 단일화는 도쿠가와의 총탄처럼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했고, 이제 유권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싸움에서 또 하나 승패의 열쇠를 쥐고 있는 고바야가와 히데아키 역시 마쓰오산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군사력과 마쓰오산의 전략적 위치로 보아, 만일 그가 동군으로 돌아서게 된다면 서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본진에서 계속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고바야가와가 결심을 하는 시각을 재고 있었다. 이 한 순간이 혼전의 균형을 어떻게 깨뜨리느냐는 갈림길인 것이다. 앞을 못보는 오다니 요시쓰구도 온 신경을 고바야가와의 반응 여하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이 총소리에 신경이 곤두선 것은 고바야가와 히데아키 자신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으나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기회주의적인 중립이 벽에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고바야가와는 비로소 정말 그렇게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드디어 고바야가와군의 총포대가 산 아래의 오다니군을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 동서 양군의 세력 균형이 결정적으로 깨어지는 순간이었다._ 야마오카 소하치, <도쿠가와 이에야스 22> 中


  오전6시. 사전투표를 하고 돌아왔다. 지난 2010년과 2014년에 이재명을 성남시장으로, 2018년에는 경기도지사로, 2022년에는 대통령으로 투표한 투표소의 모습이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새벽에 투표하는 이들이 주로 나이드신 어르신이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20대 청년들의 발랄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령대로 그들의 지지성향을 가늠하는 것이 섣부른 판단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분명 과거와 오늘의 투표장 모습의 차이임을 확인한다. 이런 변화가 지난 시간의 변화임을 생각해본다면, 87년 체제의 틀과 이러한 틀안에서 형성된 현재 정치구도가 얼마나 민의(民意)를 반영하지 못하는가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유기체의 성장은 반복되는 세포분열로 일어난다. 이때의 세포분열은 체세포분열잉라 불린다. 체세포분열은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의 엄청난 개수를 생각할 때 사람들이 흔히 추측하듯이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수정란은 두 개의 '딸세포'로 분열하고, 다음 단계에서 4개의 딸세포, 이어서 8, 16, 32, 64....개의 딸세포가 생겨난다... _ 에르반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p45


 성장을 위한 분열이 허락되지 않는 정치. 구체제의 틀은 우리에게 통합을 강요하고, 성장을 방해한다. 이제는 그 틀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지난 체제의 한계를 딛고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 하는 과정에서 터져나오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과거 서양의 68의 모습과도 같이 갈등과 분열로 표현되겠지만, 이를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유기체처럼) 사회의 성장 과정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는 선거를 통해 새롭게 선출된 권력이 만들어낼 구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며칠 사이에 급변하는 선거국면에서 두서없는 여러 생각들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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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2-03-05 1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찍 투표 하셨네요! 저도 7시반에 갔는데 생각보다 줄 길어서 놀랐어요! 역대 최고 투표율이 될 것 같네요..

겨울호랑이 2022-03-05 11:54   좋아요 1 | URL
햇살과함께님께서도 일찍 하셨군요. 어제 높은 투표율을 보니 아무래도 늦게 가면 고생할 듯해서 일찍 갔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아이폰 신제품 출시를 대기하는 줄만큼은 아니지만, 일찍 나와서 투표하는 이들을 (특히 20대) 보면서 줄을 섰지만, 흐뭇함을 느꼈습니다. ^^:)

갱지 2022-03-05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적절한 비교라고 생각되면서도 이래저래 찝찌입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네요-

겨울호랑이 2022-03-05 13:34   좋아요 1 | URL
갱지님의 말씀 충분히 이해됩니다. 저 역시 윤석열 후보와 일본 무속과 관련 기사,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에 등장한 인물들이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침략자들임을 생각했을 때 글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네요. 더 좋은 경우를 알고 글에 남았으면 좋았을텐데, 그 이상의 내용까지는 제 생각이 미치지 못해 매우 아쉽습니다...

레삭매냐 2022-03-05 14: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키가하라가 미노에 있는 장소
였군요. 미처 몰랐네요.

사이토 도산 이래, 미노가 쟁탈전
의 중심이었는데 결국 (일본) 천
하쟁패의 전장이었네요.

하도 부정 투표 타령들을 많이
해대서 본투표하려고 마음 먹었다
가, 오미크론의 기승이어서
어제 사전 투표 하러 갔다가 사람
들이 너무 많아서, 포기하고 돌아
왔네요.

본투표를 해야겠습니다, 수고하
셨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3-05 16:03   좋아요 1 | URL
세키가하라 전투가 관동(에도)와 관서(오사카)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그 중간에 위치한 미노 지방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입니다. 사전투표율이 높은 것이 어느 후보에게 유리할지는 모르겠지만, 높은 사전투표율은 본투표일까지 남은 기간에 극심하게 벌어질 네거티브를 방지할 것은 분명하기에 사전투표를 했습니다. 레삭매냐님 즐거운 주말되세요! ^^:)

페넬로페 2022-03-05 15: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번 선거를 세키가하라 전투에 비유해 쓰신 글에 감명 받습니다.
20대의 딸아이는 87년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더군요.
대선에서의 20대의 선택이 궁금해지네요.
자신의 삶들이 후퇴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선택이 중요한데 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3-05 16:14   좋아요 2 | URL
지금 기성세대에게는 경험으로 남아있는 사건들이 지금 2030세대에게는 한국전쟁이나 일제 시대만큼이나 실감이 안 되는 듯 합니다. 5.18 민주화운동, 1987 민주화운동 등이 대표적인 사건이 아닐까 하네요. 기성세대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뼈 속 깊이 각인된 모국어와 같은 일들이,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배워야하는 외국어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쓰는 ‘어쩔TV 저쩔Tv‘같은 용어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처럼요. 좀 더 많은 소통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 역시 그런 노력이 부족하기에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3-05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전투표를 했습니다만 저도 제 맘을 잘 모르겠습니다. ㅋㅋ
정권이 유지되어도 정권이 바뀌어도 크게 바뀌는 것이 없고,
역사가 조금씩 점진적으로 진보한다는 믿음도 없는데,
왜 투표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주말에 저 자신 행동을 곰곰이 차근차근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2-03-05 17:45   좋아요 2 | URL
사실 전업 ‘정치인‘과 이들 옆에서 기생하는 이들 외에 직접적인 이익을 보는 유권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를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더는 나쁘게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말자는 마음도 그 중 하나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렇습니다. 비록 각자의 시선이 달라 서로 다른 길을 지향하지만요... ^^:)

북다이제스터 2022-03-08 20:45   좋아요 1 | URL
어떤 정치와 국가에도 한가닥 작은 믿음조차 없는 저에겐 어려운 말씀이세요.
그럼에도 내일 선거결과가 궁금해지는 건 또 제겐 이상한 일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2-03-08 22:00   좋아요 0 | URL
어떤 시스템이나 사상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야 하는 도구임을 생각하면, 북다이제스터님께서는 저보다 한 수 위이신 것 같아요. 앞으로도 희망을 가졌다가도 실망하기도 하겠지만, 아직은 지켜보기보다는 한 걸음이라도 거야할 방향으로 가고 싶네요... 제가 아직은 철이 없나 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3-08 22:17   좋아요 1 | URL
피투표자가 투표자에게 투표하라고 난리치는 것이 뭐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
저만 이상한 것인가요? ^^

겨울호랑이 2022-03-08 22:20   좋아요 1 | URL
저는 별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만.... 피투표자 입장에서도 많은 표를 얻어야 대표성과 명분을 획득할 수 있을테니, 자신의 입장 강화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만.... 다른 뜻도 있을 수 있겟지만요... ^^˝;)

북다이제스터 2022-03-08 22:22   좋아요 1 | URL
예전과 다르게 후보자 두명에게 투표하라는 수십 통 자동 안내 전화받았습니다.
대체 제 전번은 어찌 안 건지… 승낙도 안 했는데 꼴이 자본주의 무서움과도 같습니다. ㅠ

겨울호랑이 2022-03-08 22:30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저도 선거기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많이 와서 아예 받지를 않았네요. 워낙 개인정보가 마케팅 정보로 많이 활용되는지라 참 그렇습니다...
 


 정의의 기초는 신의이다. 이는 말한 것과 계약한 것의 변치 않음과 진실됨을 뜻한다. 여기서 신의라는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 사람에 따라 이해가 잘 안 될지 모르지만, 용어들의 생성 과정에 대해 열심히 조사한 바 있는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말해진 것은 잘 이루어졌다는 데서 신의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하니 믿기로 하자. _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키케로의 의무론> , p31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106~BC43)는 로마를 대표하는 철학자, 정치가, 수사가다. 그는 나름의 정치철학과 이를 바탕으로 뛰어난 언변을 가가지고 철학가, 정치가로서 공화정 말기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는데, <키케로의 의무론>은 그의 정치철학이 드러난 책이다. 본문에서 그는 공화정(共和政)의 옹호자로서 덕(德)의 전형을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Marcus Atilius Regulus, BC307 ? - BC250)에서 발견한다. 카르타고의 포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강화조약의 거부를 강조한 그의 모습에서 키케로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에 반대되는 도덕적 선의 전형을 찾는데, 이러한 덕의 전형은 오늘날 우리에게 '검소하고 우직한' 로마인의 이미지로 남아있기도 하다.

 

100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모든 인간사를 대수롭지 않다고 하여 경멸하는 것,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다 참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불굴의 정신과 용기라는 덕의 속성이다. _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키케로의 의무론> , p239


 118 에피쿠로스학파 철학자들은 쾌락을 제공하고 고통을 제거하는 지식으로서 지혜를 그들의 체계 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무시하고 고통을 참기 위한 합리적인 수단으로서의 이헤 체계를 가르칠 때, 어떤 식으로든 용기를 설명한다. 쾌락의 절정은 고통의 제거와 일치한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정의는 그런 식으로 주장하면 흔들리거나, 아니 오히려 이미 기세가 꺾인 상태에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와 인류사회에서 현저하게 식별할 수 있는 저 모든 덕들도 역시 그렇다. 왜냐하면 우정은 말할 것도 없고, 선심, 돈을 막 푸는 것, 예의범절이 그 자체로서 추구되지 않고 감각적인 쾌락이나 개인적인 유익함을 위해서만 권장된다면, 이것들은 전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_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키케로의 의무론> , p254


  다른 한 편으로 그는 뛰어난 수사학자였다. 변호사로서 뛰어난 언변을 갖추고 있던  키케로는 전형적인 로마인의 생각을 담은 연설로 유명한데, 그에게 로마의 국부(pater patriae)라는 불멸의 명성을 가져다 준 사건 역시 BC63 카틸리나(Lucius Sergius Catilina, BC108?~BC62) 내란 음모를  파헤친 연설이었다. 그는 여러 면에서 뛰어난 로마 공화정의 우수한 정치인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뛰어난 능력과 사상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이기고 정계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정치 감각이 필요했던 것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82] 결론적으로 칭찬과 비난의 모든 원천은 덕과 악덕의 분류에 있다. 그러나 연설문을 전체적으로 맥락 잡아 구성할 때에는 다음의 사실이 부각되어야 한다. 어떤 이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길러졌는지, 어떤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성격이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중요한 일이 혹은 경이로운 뭔가가 일어났다면, 그리고 특히 그것이 신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뭔가라면 말이다. 그 다음으로 어떤 사람의 판단과 말과 행동은 앞에서 논한 바의 덕목에 걸어 부각해야 한다. 그리고 사건의 원인과 결과 및 사건 추이 경과의 경우는 '발견' 논고에 문의하면 된다. _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수사학> , p270


[83] 정책 연설의 목적은 유용성이다. 의사 결정과 의견 개진은 모두 이 유용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이에 따라 어떤 일이 실현 가능한지 아닌지와 어떤 일이 꼭 필요한지 아닌지를 정책 제안자나 반대자는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만약 뭔가가 실현 가능하지 않다면, 제안이 비록 유용함에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고, 만약 뭔가가 꼭 필요한 일이라면, 이는 나머지 일들은 물론 공적 활동에서의 명예나 실리 앞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p272)... [84] 그런데 실현 가능성을 따질 때, 아울러 얼마나 쉽게 실현될 수 있는지 여부도 검토해야 한다. 실현이 너무 어려운 경우 그것은 종종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필요성'을 검토할 때에는, 비록 절대적인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럼에도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중요도가 매우 높은 일은 종종 꼭 필요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_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수사학> , p272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 토론과 연설,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지키려 했던 키케로의 분투는 공동체의 '이익(uilitas)'이라는 목표를 지향한다. 또한 키케로의 로마는 '도덕적 아름다움(honestum)'으로 완성되어야 했다. 상충하기 마련인 이익의 문제, 상충하는 쌍방이 서로를 설득하지 못하는 이익의 합리성을 넘어선 것, 모두를 한자리에 불러 토론하고 타협하고 단합하고 발전하게 하는 것은 바로 '도덕적 아름다움'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이 좀 더 높은 수준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키케로는 말한다. 자기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불행으로 내모는 현실은, 온정적이던 사람들마저 더는 온정적일 수 없는 불행의 일상화를 초래할 것이며, 이런 현실은 불행 자체보다 훨씬 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을 것이라고. _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설득의 청지> , p7/268


  형과는 달리 현실적이었던 동생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Quintus Tullius Cicero, BC102~BC43)는 형의 이런 부족한 부분이 더 크게 신경쓰였던 듯 햇는지, 형에게 선거에 이기기위한 여러 수단들을 제시한다. 당신의 고귀한 이상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는 먼저 선거에서 이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투구(泥田鬪狗)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 이것이 담긴 책이 <설득의 정치>다. 독자들은 동생 키케로의 책을 통해 오늘날의 선거가 과거 선거제도의 충실한 재현임을 깨닫게 된다. 이점은 제20대 대통령선거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점에서 위로와 실망을 함께 갖게 된다. 


 여기가 어딘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당신이 누구인지를 항상 기억하십시오. 광장에 발을 내디딜때마다 매일매일 자신에게 되뇌어야 합니다. "나는 주변인이다. 나는 집정관이 되고 싶다. 여기는 로마다." _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선거에서 이기는 법> , p20/162


 당신에게 빚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이야말로 선거에서의 지지로 빚을 갚을 때라는 점을 꼭 상기시키십시오. 당신에게 빚진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지금 내미는 도움의 손길에 당신이 곧 보답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십시오.(p24)... 특권 계급의 인사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공을 들여야 합니다. 그들에게 당신이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그들 눈에 당신이 대중에 영합하는 사람으로 비쳐서는 안 됩니다. _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선거에서 이기는 법> , p26/162


 당신의 변론 덕분에 재판에서 승리한 사람들도 잊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명확하게 말해주십시오(p62)... 아주 작은 호의를 베푸는 것만으로도 당신을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를 당신 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을 지지하게 만들기가 한결 쉬울 겁니다. 지금 당신을 지지하지 않으면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어 공개적인 망신을 당할 거라는 사실을 이해시킵십시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당신을 지지해준다면 언젠가는 당신의 보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_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선거에서 이기는 법> , p64/162


 당신에게 의무감을 느끼는 부류에는 당신의 변론 덕분에 재판에서 승소한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이들은 당신이 아니었다면 재산과 명성, 때로는 목숨을 보존할 수 없었을 사람입니다. 그러니 당신 옆에 서서 따르라고 그들에게 당당히 요구하십시오. 신세를 갚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으니 반드시 당신과 동행하며 존재감을 드러냄으로써 보답해야 한다고 말하십시오. _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선거에서 이기는 법> , p105/162


 확실히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는 정치인에게는 친구가 많지 않을 겁니다. 항상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기대는 언제나 깨지기 마련입니다. 구름이 흘러가듯 상황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지키지 못한 약속은 대부분 잊히고 당신에 대한 분노도 희미해질 것입니다(p123)... 약속을 깬 결과는 불확실하고 그것으로 상처 입은 사람도 적습니다. 하지만 약속 자체를 거절할 경우 결과는 확실하고 더 많은 유권자들에게 즉각적인 분노를 일으킵니다. _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선거에서 이기는 법> , p125/162


 당신의 선거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당신에 대한 호감을 심어주는 겁니다. 하지만 원로원을 향해서든, 일반 대중을 향해서든 명확하고 구체적인 약속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애매한 일반론을 고수하십시오. _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선거에서 이기는 법> , p135/162


 뇌물은 때때로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문제가 발생하면 법정으로 끌고 갈 것임을 경고하십시오(p139)... 실제로 당신의 경쟁 후보들을 뇌물죄로 법정에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것만 알려주어도 충분합니다. 두려움이 실제 소송보다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_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선거에서 이기는 법> , p141/162


 동생의 조언 덕분인지 키케로는 BC63에 집정관에 당선하는데 성공하고, 같은 해 카틸리나 음모를 저지하면서 정치인으로서 정점의 자리에 서게 된다. 그렇지만, 이 성공이 후에 그의 발목을 잡게 되어 카틸리나 등을 재판없이 처형했다는 이유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인생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지금 당장의 호재가 사실은 악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과 함께 경계와 위로를 함께 준다.


 출근을 앞두고 제20대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일을 불과 하루 앞두고 나온 안철수-윤석열의 전격단일화 선언 뉴스를 접했다. 키케로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연설가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을 보면, 이에 못미치는 현실 정치인들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페이퍼 첫 문장처럼 '정의의 기초는 신의다'라는 기본 명제까지 깨뜨리는 모습은 좀 지나치지 않나 싶다. 무슨 장난질을 펼치더라도 대부분 유권자들은 이미 마음을 정한 상황이기도 하지만, '국민의 뜻과 열망'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벌이는 막장극을 보며 현혹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들의 쇼가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투표가 끝나면 분명 어느 한쪽에서는 '위대한 국민의 선택'이라 할 것이고, 다른 편에서는 '저희가 잘못 했습니다'라고 메세지를 낼 것이라는 사실.. 키케로의 <카틸리나 탄핵연설> 앞부분을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더는 현혹되지 말자.


 1.1 카틸리나,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인내를 남용할 것인가?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의 광기가 우리를 조롱할 것인가? 어디까지 당신의 고삐 풀린 만용이 날뛰도록 놓아 둘 것인가? 팔라티움 언덕의 야간 경비, 도시의 보초병, 인민의 공포, 모든 선량한 시민의 회합, 빈틈없는 경호 아래 개최된 오늘의 원로원, 이곳에 참석한 위원들의 표정을 보면서 당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가? 당신 계획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을 느끼지 못하는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짐으로써 당신의 음모가 이미 좌절된 걸 보지 못하는가? 어젯밤에, 그저께 밤에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를 불러 모았는지, 어떤 계획을 꾸몄는지, 당신은 우리 가운데 누가 모를 것으로 생각하는가? _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설득의 정치> <카틸리나 탄핵연설>, p7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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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선거를 3개월 앞둔 프랑스에서는, 이번에도 좌파가 패배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막상 선거가 닥치면 좌파의 다양한 분파가 단합할 것이라고 가정해보더라도, 좌파 구성원 간에 남아있는 공통분모가 없다. 따라서, 좌파의 패배를 점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세금제도, 퇴직 연령, 유럽연합(EU), 원자력 존속 여부, 국방정책, 미국, 러시아, 중국과의 관계 등 핵심 사안들에서 서로 대립하는 이 다양한 좌파 분파들이 어떻게 연합해 국가를 이끌 수 있겠는가? 극우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직도 좌파를 결집시키는 유일한 공통분모다. 지난 40년간 프랑스에서 '좌파'가 집권한 세월은 20년에 달한다(1981~1986, 1988~1993, 1997~2002, 2012~2017). 그런데 그 동안 극우는 꾸준히 입지를 다졌다. 다시 말해 극우의 부상이라는 위험을 저지하기 위해 좌파가 취한 전략은 처참히 실패했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2.1> <좌파는 왜 패배하는가> 中


 2022년도 4월에 프랑스 대선이 있어서인지 최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기사의 상당량은 선거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덕분에 거의 같은 시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러 시사점을 던져준다. 2022년 1월호 기사 중 <좌파는 왜 패배하는가>는 사회주의 세력이 쇠퇴하는 여러 원인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과거 유럽에서 자본주의의 폭주를 막았던 대안으로 사회주의의 위상과 업적을 생각한다면 '언제나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좌파'라는 제목은 관심을 끈다.   

 

서유럽에서 사회주의가 지난 100년간 얻은 주요 성과는 자본주의를 문명화한 것이다.(p610)... 사회주의자들은 복지 제도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계몽주의의 진정한 계승자들이고,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수호자들이었다. 그들은 투표권이 제한된 시절 투표권을 확대하기 위해 싸웠다. 다른 어떤 정당보다 일관되게, 일찍부터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구체제의 견고한 권리와 특권을 폐지하기 위해 싸웠다. 그들은 인종 차별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모든 투쟁을 지지했다. 사형 제도 폐지와 동성애 합법화, 낙태의 비非범죄화에 중요한, 때로는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_ 도널드 서순, <사회주의 100년> , p611 


 지난 30년 동안, 좌파와 대중 유권자들이 멀어진 것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에서 비롯됐다. 정치적으로는 공약 불이행에 대한 배신감, 경제적으로는 3차 산업의 확대, 자본화, 세계화 때문이다. 이념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 사회학적으로는 교육받은 계급들의 능력주의 찬양, 인류학적으로는 계산적이고 상업적인 합리주의로 인한 삶의 다양성 와해 때문이다. 또한 지리적으로는 대도시의 주변 지역 잠식, 문화적으로는 사회 투쟁에 대한 상류층의 투쟁 때문이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2.1> <좌파는 왜 패배하는가> 中


  <좌파는 왜 패배하는가>의 기사는 그 원인을 좌파가 이전까지 여러 차례 정권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실패한 것에서 찾는다. 정책수행을 위한 재원 확보를 위해 우파와 타협할 수 밖에 한계점. 그것은 좌파가 갖는 한계점이기도 하다. 헌법에 보장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지속적인 정당활동과 차기집권을 위해서 이들의 개혁안은 한계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점은 그들의 개혁에 대한 기대감을 실망감으로 바꾸면서 좌파와 대중들의 분리가 시작된다고 기사는 분석한다. 


 이런 성공에도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폐지하지 못했고, 경제계획을 통해 자본주의를 이끌지도 못했다. 이 실패의 원인은 정치와 현대자본주의, 그 둘의 관계에 내재된 속성에 있다... 자본주의자들의 활동에 전부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아무리 커도, 그것이 자본주의에 악영향을 미쳐서 실업과 저성장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 권한은 억제될 수밖에 없다(p612)...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은 두 가지 뚜렷한 제약 내에서 자본주의를 규제하려고 했다. 첫째 제약은 자본주의 자체를 존속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둘째 제약은 민족국가로, 모든 규제의 틀에 법적 테두리를 제공했다. _ 도널드 서순, <사회주의 100년> , p613


 하지만 두 가지는 분명히 해둬야 한다. 첫째, 좌파는 단순히 좌파의 강령 실천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파의 강령을 실천했다. 둘째, 좌파가 타협을 최대한 연기하려 할 때마다(프랑수아 올랑드는 취임 첫날부터 그랬다) 좌파를 굴복시킨 것은 쿠데타도 외국 군대도 아닌 재정 질식이었다. 2015년, 당시 그리스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아테네의 봄과 프라하의 봄을 짓밟은 것은 탱크가 아니라 은행"이라고 요약했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2.1> <좌파는 왜 패배하는가> 中


 여기에 더해, 좌파의 세력구성은 수많은 '결'들로 구성된다. 좌파를 구성하는 여러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는 느슨한 연합구조를 갖는다. 현상을 타파하기 위한 동맹. 동맹을 위한 수많은 협상과 양보를 거치면서 최초의 개혁안에서 상당부분의 후퇴는 불가피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은 선거 때마다 이합집산(離合集散)이 반복되며 체계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와의 관계에서 1860년대 이후 한 세기 동안 두 가지 상호 보완적인 원칙이 유효했다. 사회주의는 언제나 좌파의 고갱이었고 좌파는 언제나 사회주의보다 그 범위가 넓었다. 사회주의자들이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수행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사회주의자들은 언제나 동맹자들을 필요로 했다 - 선거에서 겨룰 때나 정부를 구성할 때, 파업을 조직할 때나 공동체의 지원을 구축할 때, 선동을 수행할 때나 제도 안에서 활동할 때나 공적인 영역에서 자신들의 사상을 공언할 때나 언제나 그러했다. 1960년대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좌파 안에서 헤게모니를 잃고 다른 급진주의자들이 좌파의 정치 공간에 진입함에 따라 이러한 협상의 조건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_ 제프 일리, <더 레프트 1848 ~ 2000 : 미완의 기획, 유럽좌파의 역사>, p617


 이에 대항하는 우파 - 특히 극우파 - 의 논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자본주의'와 '민족주의'를 근간으로 자신들의 논리를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사유재산침해,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인종과 국가를 우선하는 정책을 주장하며 감정에 호소한다. 간결한 메세지와 애국심 등 감정에 호소하는 전략. 여기에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한 '언론장의 보수화'까지 더해지면, 우파는 선거에서 질래야 질 수 없게 된다. 개인적으로 좌파의 느슨한 연합은 '측정할 수 없는 이념들의 질(質)적인 연합'인 반면, 우파의 연합은 '측정가능한 이익의 양(量)적인 결합'이라는 차이가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이것은 선거철이면 재등장하는, 극우가 내세우는 모든 공약의 핵심이다. 또한, 프랑스에 과거의 명성을 되돌려줄 현자의 돌이다. 실업부터 공공적자, 주거에서 이민까지, 범죄에서 연금까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만병통치약이다. 이것은 바로 '국적 우선제'다. 국적 우선제 장점은 많다. 우선, 개념이 쉽고 단순하다. 또한, 자원이 부족한 위기상황에서 확산되는 국수주의적 반응을 자극함으로써 논쟁이 될 '예산' 없이도 부차적인 모든 관심사에 응용할 수 있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1.12> <극우파의 만병통치약, '국적 우선제'> 中


 사회는 하느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신비로운 '자연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사회는 인류에 의해서 창출되었다. 사회가 계속해서 진화할지 혹은 쇠락할 것인지는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사회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는 개인적 판단의 문제일 수 있지만, 죽음보다는 삶을, 고통보다는 행복을, 비참함보다는 후생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회를 수용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회가 존재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도 제한이나 유보 없이 수용해야만 한다. _ 루트비히 폰 미제스, <사회주의 2> , p251/390 


 주로 시청률에 발목이 잡혀 정치적 경제적 제약에 점차 구속됨으로써 보다 더 타율적이 돼가는 언론장은 (사회과학장, 철학장 등의) 문화생산장이나 정치장을 비롯해 다른 모든 장을 구속하려는 속성을 보인다. 그런데 장이란 내부에 다수의 힘이 존재하고 상호 간에 영향력을 미치면서 투쟁을 벌이는 공간으로서, 이 투쟁의 주된 목표는 힘의 장에 변형을 가하는 데 있다. 즉, 하나의 장에서는 장내 투쟁의 쟁점이 되는 것을 정당하게 점유하기 위한 경쟁이 존재한다. 언론장에서의 쟁점은 다름 아닌 대중의 관심이다. 대중을 얻기 위해,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요소들(속보, 특종, 독점 정보, 유명 인사 등)을 점유하기 위해 내부에서 끊임없이 경쟁한다. 재미난 점은 ‘자유의 전제조건’이라는 이 경쟁으로 인해, 상업적 통제 하의 문화생산장에서는 오히려 장의 획일화와 검열, 나아가 보수화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2.1> 피에르 브루디외, <특정 세계관은 어떻게 자리잡는가> 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기사는 프랑스 정치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문제점 등에 대해 지적하고 있기에, 오늘 우리 한국의 정치 상황과는 분명히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강의 기사 내용이 남의 이야기같지 않은 기시감(旣視感)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잘 모르겠다. 긴 페이퍼의 마지막은 '여론장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한 글을 옮기는 것으로 갈무리한다...


 기자와 여론조사 기관은 TV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올라가자 자신의 영향력과 킹 메이커로서의 역할에 도취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자기중심적 본능에 무릎을 꿇었다. 시민들의투표 의사를 가시화하기 힘든 (어쩌면 실체조차 없는) 시기인, 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선거 6개월 전에 투표 의사에 관한 여론조사를 한다는 것은 더 기이한 역설이다. 이처럼 후보 선정이  인위적인 구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민주선거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다. 과연 언제까지 이 환상이 유지될 수 있을까? 표본의 대표성이 신뢰할 만하지 않고, 계산이 정확하지 않고, 선거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 때, 여론조사의 민주적인 이점에 대한 믿음은 사라질 것이고, 정당의 여론조사 담당자는 지쳐버릴 것이다. 그러나 여론조사에 대한 비판과 품질 하락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이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반대 방향에서 어떤 강력한 흐름이 이것을 막고 있음을 의미한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2.1> <누가 대선 후보를 선택하는가?> 中


 언론이 대중의 대화를 촉진시켜야 한다는 대화 저널리즘의 임무는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시민과의 소통, 즉 대화다. 사람들을 단순히 뉴스 소비자에 머물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언론은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논의 과정에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언론이 시민과의 만남과 모임을 갖고 그 과정과 내용을 기사로 다루어 공동체 구성원들과 나누어야 한다. 언론이 공동체의 대화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소외집단이나 개인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 주어야 한다. 언론은 전문 저널리스트들이 만들어 낸 정보를 유통시키는 통로의 역할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시민적 담론을 위한 장(場)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_ 월터 리프먼, <여론> , p1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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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대만과 중국 사이에 고조된 갈등은 모두 두 가지 원인에서 기인한다. 첫 번째는 대만해협 양안 관계의 지정학적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두 번째는 미중 대결에서 대만이 차지하는 위상과 관련이 깊다. _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21.10> <대만, '중국몽'의 모자란 퍼즐조각>


 시간이 조금 지나갔지만, <르몽드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2021년 10월호에는 최근 읽은 책과 함께 정리하고 싶은 내용의 기사가 있어 늦게나마 페이퍼로 정리한다. <도해 타이완사>를 읽던 중 마침 10월호에는 '중국-대만' 관련 기사가 떠올라 한번에 정리한다.  10월호 기사에서는 중국-대만의 갈등 요인을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한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는 중국과 '중국이 아닌 대만 독립'을 지향하는 현 여당인 민진당(民進黨)의 갈등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지정학, 역사적 문제등이 얽혀있어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네덜란드와 스페인, 정씨 정권을 거치면서 발전해온 타이완은 17세기 중반 동아시아로 진출한 유럽이 무역과 선교를 펼치는 거점이었습니다. 타이완은 지리적으로 명나라/청나라와 가까웠으며, 네덜란드/스페인 등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필리핀 그리고 일본 사이에 위치했습니다. 즉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항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동아시아 해역의 '사거리'라 할 수 있었습니다. _ 궈팅위 외, <도해 타이완사> , p129/434


 <도해 타이완사>에서는 일반적으로 중국의 섬이라고 생각되어 온 대만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본토, 인도네시아에 근거한 네덜란드, 필리핀에 자리잡은 에스파냐(스페인), 왜구(倭寇)로 알려진 일본 해적들의 각축장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지배를 받던 대만인들의 입장에서는 중국 역시 외세(外勢)에 불과했다. 오랜 기간 중국 가장자리에 있던 낯선 섬 대만이 중심지가 된 것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1887~1975) 정부가 쫓겨오면서부터다. 국민당 정부로부터 대만인들은 중국인으로서 살아갈 것을 요구받으면서, '중국인 vs 대만인'의 정체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 문제는 '국민당-민진당'의 이념 대립의 문제이기도 했다. 


 중국공산당과의 이념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와 국민당은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신성한 사명으로 삼는 본질주의적 민족주의에 널리 공감하며, 대만인들에게도 같은 사상을 주입했다. 중국 본토 출신자가 백만 명 이상, 다시 말해 섬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이후 대만이 민주화의 길을 걷는 동안, 어느새 중화민족주의는 새로운 사조와 거센 경쟁에 부딪힌다. 대만은 중국에 일부 문화적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실상 고유의 역사적, 정치적 도정을 지닌 별개의 국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이다. 정체성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조는 결국 대만에서 사상 처음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2000년 독립주의 성향의 정권이 들어서는 결과를 낳았다. _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21.10> <대만, '중국몽'의 모자란 퍼즐조각>


 중국의 일부임을 강조하는 현재 야당인 국민당과 그 반대편에 있는 집권 여당인 민진당의 대립은 대만의 국내 문제이기도 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이기도 하다.   1960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었던 미국은 '카리브 해의 쿠바', '지중해의 크레타/키프로스'와 같은 대만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고, 1970년대 중국과 수교를 통해 대만과 단교(斷交)를 하면서도 미국-대만-일본을 잇는 트라이앵글 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비밀리에 소수의 미군을 파병하면서 중국을 견제하는 한 방편이 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점(点)으로 연결되는 '해양 기지 제국'인 미국의 대(對)중국 전략에서 '대륙을 향한 항공모함'인 대만의 중요성을 고려했을 때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미국이 타이완을 원조한 배경에는 타이완을 반공(反共) 동맹으로 만들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습니다. 사실 미국은 타이완이 문화, 교육, 일상생활에서 미국식 삶의 가치를 받아들여 모든 영역에서 미국을 추종하고 미국이 제공하는 자원에 의존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_ 궈팅위 외, <도해 타이완사> , p385/434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지속되던 태평양 제도 신탁통치령이 종료됐다. 마셜 제도 공화국, 미크로네시아연방, 팔라오공화국은 미국과 '자유 연합 협정'을 맺어 주권 국가로 독립하면서도 미군기지용 부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됐다. 그러나 북마리아나 제도는 푸에르토리코와 유사하게 연방에 편입됐다. _ 대니얼 임머바르, <미국, 제국의 연대기> , p403/519


  대만문제가 국민당과 민진당의 정치 대립에서 '미중 갈등'으로 양상이 바뀐 것은 시진핑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이 표면화되면서 부터였다. '중국몽(中國夢)'이 추상적인 방향이라면, '일대일로'와 '중국제조 2025'는 구체적 움직임이었다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트럼프 정부와 이에 반격하는 미중간의 대립은 이 지역의 갈등을 가속화시켜 최근에 이르고 있다.


 수십 년간 미국은 중국을 에워싸며 중국이 가는 곳마다 존재했다. 미국은 중국이 원하는 곳마다 와서 그 옆자리를 차지하고 않아있는 양상이었다. 중국은 눈길을 주는 모든 곳에서 미국의 존재를 제거해야만 했다. 중국의 핵심 목표를 명확히 규정하고, 이제는 중국을 상징하는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중국의 정치체제를 강조하고, 남해의 섬들과 타이완에 대한 중국의 관심이 지극히 합법적임을 강력히 선언함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_  케리 브라운, <시진핀의 중국몽> , p95/158 


 호르무즈(Hurmuz) 해협과 아라비아 해로부터 말라카(Malaka) 해협을 통과해 중국 남부를 연결하는 해상 실크로드(Silk Road)의 부활이 '일대일로'의 두 목표 중 하나라 했을 때, 대만은 출발점 취안저우(泉州) 건너편에서 이를 견제할 수 있는 핵심 지역이라 하겠다. 지중해의 지브롤터 해협과 같은 대만에서 강대국들의 경제 이권과 민족주의가 부딪쳤을 때 나타나는 긴장. 그것이 오늘의 대만 문제가 아닐까.


 2019년 7월 9일, 미 의회는 대만에 대해 다목적 전투기 F-16V 66대, M1A2T 에이브람스 전차 108대, 스팅어 대공 미사일 250대, 그 밖에 각종 무기 판매를 승인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심지어 대만의 군수 수요에 조금 더 긴급히 대응할 수 있도록 '수요 평가 시스템'까지 개발했다. 2020년 11월, 4주간 대만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역사상 처음으로 대만 남부 쭤잉 해군기지에 미국의 (퇴역 군인이 아닌) 현역 해군이 파견됐다고 대만 해군 참모부는 확인'해줬다. 하지만 미 정부는 중국 전투기에 맞대응할 능력을 지닌 F-35 판매만은 끝내 거부했다. 역내 유일무이한 지정학 균형의 수호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_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21.10> <대만을 관할하는 미국의 은밀한 '대사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0월호에서는 대만을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지정학적 갈등이 다루어졌다면, 아직 배송받지 못한 11월호에서는 금융을 둘러싼 미중 갈등이 다뤄질 모양이다. 여기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는 다 읽고 나서 정리해야겠지만, 마무리 전에 킨들버거(Charles Kindleberger, 1910~2003)의 이론으로 미국과 중국의 현재 상황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오늘날 미중 대결이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의 표현이라면, 야심차게 출발했던 일대일로의 정체는 새롭게 강국으로 등장한 중국이 공공재(public goods)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한 킨들버거 함정(kindleberger trap)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자신들의 자금으로 자국의 자본재를 구입하도록 강제하면서 막대한 무역수지 적자로 달러 공급을 한 미국만큼의 역할도 수행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주변의 유목제국들과 공존을 위해 조공무역의 형식으로 평화를 샀던 대국(大國)이 지난날의 중국이었다면, 군사력,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주변을 압도하려는 오늘날 중국의 야욕이 유라시아의 교류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닌지. 저물어가지 않으려는 제국과 아직 떠오르지 못한 제국. 이들이 빚는 갈등 상황에서 새로운 핀테크(Fin Tech)를 둘러싼 금융패권 싸움을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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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1-11-02 16: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0월호, 11월호에 이런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니. 확인해봐야겠네요. 안 그래도 이번달에 도해 타이완사를 읽을 계획이라. 연계해서 읽을 포인트를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11-02 16:28   좋아요 1 | URL
저도 이번 10월호, 11월호의 제목들을 보면서 연재 소설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거리의화가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감사합니다^^:)
 

  우주비행이 평등과 '인류 및 각 개인의 완벽함'을 가져다준다는 키발치크의 화학이나 치올콥스키의 꿈, 그 어디에 표현되어 있었든, 자연의 구속을 뛰어넘으려는 권력의 의지(will to power)와 혁명의 의지(will to revolution)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의 로켓공학이 별난 전향자들이 목격햇던 우주비행의 부속물로 시작되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먼저 군사적 필수품이 되더니 후에는 경쟁하는 기술관료 체계의 시대에서 역동성의 상징이 되었다. _ 월터 맥두걸, <하늘과 땅 1>, p30


 월터 맥두걸(Walter A. McDougall, 1946 ~ )의 <하늘과 땅 The Heavens And the Earth: A Political History of the Space Age>은 나치의 V2 개발로 촉발된 미 - 소의 로켓 개발 경쟁사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특히,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Sputnik 1)의 성공이 가져온 충격과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최초이자 유일한 원자폭탄 보유국이라는 타이틀도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면서 위협받게 되었고, 급기야 1957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소련에서 발사되면서 미국은 일대 충격을 받게 된다. 이른바 스푸트니크 쇼크(Sputnik crisis)로 인해 미국의 과학기술 정책은 이후 '기술관료'에 의한 테크노 크라시(technocracy) 중심으로 바뀌면서 미-소 우주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퇴임연설에서 기술관료제를 향한 흐름을 가장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다. 그것은 현재 예언으로 읽히고, 그 구절들은 미래의 기억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메더리스처럼, 아이크는 '군산복합체'와 '과학기술 엘리트'의 성장에 따라 부과되는 경제적, 정치적, 심지어 정신적 위험을 경고했다. 대부분의 미국인이 회상하지 못하는 것은 아이젠하워가 불만족스러운 추세를 기술의 행진의 탓으로 돌렸지만, 스스로도 그런 추세에 맞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_ 월터 맥두걸, <하늘과 땅 1>, p441


 양립하는 냉전과 기술혁명에 의해 부과되는 위험은 도덕적이고 천하무적이었다. '좋은 시민들'은 고별연설이 경고했던 것처럼 군산(軍産)의 영향력이 언제 '부당하게' 또는 '잘못 준' 권력, '포획된' 공공정책이 되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이전에는 자율적이었던 과학적, 군사적, 산업적, 학술적 제도들은 그 자체가 국가 기술관료제로 점차 빠져들었다 - 아이크도 인정했듯, 기술관료제는 '절박한 필요'였다. _ 월터 맥두걸, <하늘과 땅 1>, p443


  1960년대 이후 미-소 양국의 우주시대는 이념의 대결장으로 전개된다. 1호 인공위성과 최초의 우주비행사의 타이틀도 소련에게 빼앗긴 미국은 이후 아폴로 계획(Project Apollo)을 통해 유인달탐험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승리로 끝나는 듯 했지만, 보다 시급한 현안에 들어갈 비용이 다수의 삶과 관련없는 사업에 투입되며 냉전(冷戰) 이후 우주전쟁 또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결국, 우주전쟁의 결말은 흐지부지되고 마는데, 월터 맥두걸은 <하늘과 땅>에서 '인류의 꿈'이 점차 기술관료라는 특정집단의 밥그릇으로 몰락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아폴로의 첫 번째 아이러니는 시간이 흐르면서 수단이 목적보다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수단 - 기술관료제 - 은 새로운 국가 의제 대부분의 항목에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말이다. 달에 가는 것은 기술적 문제였다. 그러나 차별이나 빈곤, 심지어 도시의 황폐화를 해결하는 문제는 그 성격 자체가 달랐다... 아폴로의 두 번째 아이러니는 이 가장 위대한 우주임무가 우주정치에서 우주기술의 역할을 형성하는데 중심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엔외기권우주조약(UN Outer Space Treaty)은 스푸트니크 1호 후 거의 정확히 10년 후에 발표되었는데, 미래 우주 비행의 환경을 국가 기술관료제들 사이의 경쟁으로 고착시켰다. _ 월터 맥두걸, <하늘과 땅 2>, p339


 오늘 국내 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우주발사체 '누리호'가 발사되었고, 목표 고도인 700km에 이르렀다는 점에서는 성공을, 3단 엔진의 조기 연소 종료로 인해 더미위성의 궤도 안착에는 실패했다는 점에서는 실패로 평가받는다. 비록, 절반의 성공이지만 평가받는 누리호 발사는 여러 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과학기술이 국력의 중요한 척도인 요즘 발사체 제조 기술의 보유는 정치적으로는 국제적 강력한 협상 카드를 갖는다는 것이며, 군사적으로는 강력한 전술/전략 무기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지난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로 'Peace Maker' 작전을 선보이고, 바로 어제 20일에 대통령이 서울 ADEX 개막식에서 FA-50 전투기를 타고 참석한 이후, 고도의 미사일 기술이 필요로 하는 발사체의 발사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어느 한 방향을 지향하는 메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루도록 하자.


 국가 전략의 토대가 되는 기초자료는 국익의 핵심적 요소이다. 이때 국익은 지도력과 국익에 대한 잠재적 위협에 의해 규정된다. _ 월터 맥두걸, <하늘과 땅 1>, p174


 

 20세기는 오늘날까지 네 번에 걸쳐 전쟁 기술의 중요한 혁신을 목격하고 있다. 적이 사용하기 이전에, 혹은 그것에 대한 방어 능력을 개발하기 이전에 그런 기술 혁신을 이룩한 국가는 잠정적이나마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p326)... 마지막으로, 핵무기와 발사 수단을 갖춘 국가들은 경쟁국들에 대해 어마어마한 기술적 우위를 지닌다. _ 한스 모겐소, <국가 간의 정치 1> , p327


 제공권을 보유한다는 것은, 자신은 자유롭게 비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반면에 적군이 비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공권을 장악한 국가는 적군의 항공 공격으로부터 자국 영토를 보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적군의 지상 및 해상 작전에 항공 지원을 방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항공작전은 적의 지상군과 해상군을 그들의 작전 기지로부터 차단시킬 뿐만 아니라, 적국의 내부를 폭격하여 황폐화시킴으로써 적국 군민의 육체적/정신적 저항선을 붕괴시킬 것이다. _ 쥴리오 듀헤, <제공권> , p39


 앞서 말한 여러 의미가 국가 차원에서의 의미라면, 어느 집단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절반의 성공을 거둔 나로호의 과제를 풀기 위해 보다 많은 전문가와 예산 투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에서, 기술관료제 중심으로 운영된 과거 미-소의 전철을 밟기 않기 위해서는 기술관료제에 대한 통제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미제스(Ludwig von Mises(1881 ~ 1973)의 말처럼 관료제 자체는 가치 중립적일지 모른다. 또는, 막스 베버(Max Weber, 1864 ~ 1920)의 말처럼 근대 국가에서 관료제는 필수적일지도 모르겠다. 관료제 자체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이를 통해 특정 집단에 권력이 집중화되는 것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폐해를 잊었을 때  '원전 마피아'의 악몽을 다시 꾸지 않는다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번 누리호 발사를 통해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누리호 과제가 주어진 것은 아닌지를 과거 미-소 우주경쟁사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근대의 거대 국가가 오랫동안 존속하면 존속할수록 그만큼 더 기술적으로 관료제적 기초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는 것, 게다가 근대적인 거대 국가가 크면 클수록 또 특히 더욱더 강대국이면 강대국일수록 또는 강대국이 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무조건 관료제적 기초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p52)... 무엇보다도 관료제화는 전문가 훈련을 받았으며, 또 끊임없는 실습을 통해 더욱더 자신을 훈련시키는 직원들에게 개별적인 일을 할당해, 순전히 객관적인 관점에서 행정 작업 분할의 원리를 실행할 수 있는 최적조건을 제공한다. _ 막스 베버, <관료제> , p6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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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0-22 0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인공위성 🚀 로켓발사 실패해서 안타깝네요. 고생한 과학, 기술자들 수고했는데...ㅠ

겨울호랑이 2021-10-22 07:43   좋아요 2 | URL
네.. 계획대로 다 이뤘으면 좋았을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시도에 많은 것을 이뤘다는 점에서는 분명 나름의 성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라 러시아에서는 로켓 연구진만 각각 2만 명 정도라는데, 이번 우리 연구진은 2백 명 남짓이었다고 하네요. 말 그대로 일당 백으로 이룬 성과이기에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것 같아요^^:)

mini74 2021-10-22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말 박수를 보내고싶어요. 다른 예산하고 비교해서 얼마안된다고 자꾸 과학자들이 나와서 강조하는 모습이 짠했어요. 이런 일에도 예산 타령, 실패하면 난리 ㅠㅠ 저희 아이 선배들이 외국 연구소로 가고 싶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기초과학 관련 연구비 타는 게 너무 어렵다고 ㅠㅠ

겨울호랑이 2021-10-22 09:50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미니님 말씀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응용분야에 대한 투자에 비해 기초 분야에 대한 투자는 매우 인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거 성장기에는 외화획득을 위해 응용분야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순수 학문 - 과학, 예술 등등 - 에 대한 폭넓은 투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투자가 뒷받침되었을 때, 다수에게 기회가 열리고 소수에게 권위가 집중되는 폐단이 막아지지 않을까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