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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의한 육지의 분리가 가장 중요하다. 분리의 영향은 분리의 정도에 달려 있다. 관건은 분리가 완전한지 아니면 불완전한지, 따라서 육지가 섬의 형태인지 아니면 반도의 형태인지 하는 것이다. 또한 관건이 되는 것은 분리하는 바다의 폭이다. 왜냐하면 협만이 좁은 경우에는 생물이 뛰어넘을 수 있으며, 이는 기후학적 영향을 거의 미칠 수 없다. 이런 것들은 그 원인을 지질적 현대에 두고 있는 현상, 따라서 기후와 인간 생활에 대해서는 큰 의의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동/식물의 분포에 대해서는 중요한데, 이는 종과 속 그리고 부분적으로 이른 과거로 그 기원을 소급할 수 있으며, 현재는 바다인 육지상에서 빈번히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p258) <지리학2> 中


[사진] Mediterranean Lingua Franca(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Mediterranean_Lingua_Franca) 


 알프레트 헤트너(Alfred Hettner, 1859 ~ 1941)는 <지리학 Die Geographie: Ihre Geschichte, Ihr Wesen und Ihre Methoden>에서 지리의 자연 분류에서 바다와 육지의 관계가 자연환경과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설명한 위의 이론은 기후가 생태계에는 영향을 미치는 반면, 인간 생활에는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헤트너의 이론은 역사(歷史)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이번 페이퍼에서는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 1985)과 데이비드 아불라피아(David Abulafia, 1949 ~ )를 통해 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지중해 지역의 삶을 포근하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매력적인 풍경에 의한 착각이다. 경작지는 부족한 반면 메마르고 척박한 산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강우량도 고르지 못하다... 이밖에도 지중해의 물은 항상 따뜻해서 대부분의 지역에서 섭씨 13도를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자원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p68)... 지중해의 생명선은 대서양과 연결된 좁은 해협이었다. 만약 제방을 쌓아 지브롤터 해협을 막아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중해는 십중팔구 염수호로 변할 것이고, 그 안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p69) <지중해의 기억> 中


 패르낭 브로델은 유고작 <지중해의 기억 Les-Memories de la Mediterranee>에서 지중해의 역사를 기후, 지리 등 자연환경과 연관지어 분석하는데 반해, 데이비드 아불라피아는 이러한 브로델의 관점을 비판하며, 인간의 역할을 보다 강조한다.

 

 브로델의 접근 방법에는 '모든 변화는 느리게 진행된다'는 것과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속박되어 있다'는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이 책은 두 가지 관점 모두에 반대되는입장을 취한다. 특정 시대를 고찰하여 지중해의 특성을 파악한 브로델의 수평적 역사 서술 방식을 지양하고, 시대에 따른 지중해의 변화에 주안점을 두는 수직적 역사 서술 방식을 지향하려는 것이다.(p24) <위대한 바다> 中


 이 책도 바람이나 해류의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보다는 지중해를 넘나든 인간들의 경험이나, 바다를 생계 수단으로 삼은 항구 도시 및 섬들에 거주했던 인간의 삶을 전면에 부각시키려는 것뿐이다. 인간의 힘은 브로델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던 것보다 한층 더 지중해 역사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p28)... 이렇듯 룰렛의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만, 회전 바퀴를 돌리는 것은 결국 인간의 손이었다.(p30) <위대한 바다> 中


 이러한 저자의 입장이 반영되어 <위대한 바다>에서 자연의 변화는 역사의 사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아불라피아의 지중해 역사에서 변수(變數)는 인간이고, 자연은 상수(常數 constant)다. 그런 면에서 <위대한 바다>는 의지를 가진 위대한 인간이 활동한 바다를 그려내는 역사책이라 할 것이다.


 브로델은 정치사를 '사건들(events)'로 치부하고 경멸에 가까운 조소를 보였다. 사건보다는 지형이 지중해 유역 내에 일어나는 일을 결정짓는 요소라고 보았다. 그는 지중해의 진정한 중요성은 다른 곳, 예컨대 지중해를 둘러싼 육지 지형과, 지중해를 오가는 사람들이 항로를 결정할 때 고려하는 바람과 해류 등 지중해 자체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p24) <위대한 바다> 中


 그렇지만, 서문의 브로델 비판에도 불구하고 문명(文明 civilization)의 초창기 역사에서 자연의 역할을 빼놓을 수는 없다. 초창기 풍부한 식량과 자원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교역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위대한 바다>에서도 피해갈 수 없는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바라본다면 브로델의 관점을 비판하고 인간의 역사를 강조한 아불라피아의 역사관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기원전 5000년 무렵의 이른바 중석기 시대, 도구를 만드는 기술은 착실히 발전하고 있었지만 축산, 도기, 곡물 경작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던 과도기에는 시칠리아 섬의 선사 시대인들의 식량이 도미류와 농어류 같은 바다의 산물로 바뀌었다.(p38) <위대한 바다> 中


 수백 년 동안 큰 변화가 없던 몰타 섬과 달리 시칠리아 섬은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각종 자원이 풍부한 데다 접근하기 쉬운 커다란 땅덩이다 보니 그런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리피리 제도에 흑요석이 흔한 것도 시칠리아 섬으로 사람들이 모여든 요인이었다.(p46)... 모르긴 해도 토로이는 아나톨리아 내륙 및 흑해와의 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주석의 주요 공급원이 되었을 것이다.(p53) <위대한 바다> 中


  이러한 비판에 대해 아불라피아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초창기에 인간은 자연의 영향을 받았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자연의 역할은 점차 비중이 약해졌고, 이제는 무시할 수준에 이르렀다는.


  그렇지만. 이에 대해서도 반론이 가능하다.  문명 초기 좋은 기후와 환경이 위치한 곳에 이미 인류 문명의 포석이 끝난 상태에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주변지역으로 확장이 일어났다고 본다면, 결국 인류 문명은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같은 존재가 아닐런지. 기후의 영향으로 발생한 문명과 이의 확산 발전은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 ~1823)의 차액지대론으로 보충설명한다면 반론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정리하자면, 지중해 역사에서 자연(또는 기후)의 영향을 배제한<위대한 바다>의 아부라피아 관점보다는 이를 통해 역사를 설명하고자 한<지중해의 기억>의 브로델 관점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한 나라에 사람이 처음 정착할 때는, 기름지고 비옥한 토지가 풍부해 매우 적은 부분만이 현재 인구의 부양을 위해 경작되면 되거나, 아니면 그 인구가 지배할 수 있는 자본으로써 실제로 경작될 수 있기 때문에 지대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점유되지 않은 토지가 풍부하고 따라서 누구나 원하는 대로 그것을 경작하기로 선택할 수 있는 때에는 아무도 토지의 사용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p71)... 사회가 발전하면서 2급 비옥도의 토지가 경작되면 1급 질의 토지에서 즉각 지대가 발생하며, 이 지대의 크기는 이 두 종류의 질적 차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p72)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에 대하여> 中


 보나파르트는 처음부터 몰타 섬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1797년에 그가 아직 총재 정부에서 일하고 있을 때, "우리의 주 관심사는 몰타 섬"이라고 하면서 우호적인 기사단장을 확보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글을 상사들에게 보낸 것도 그 점을 말해 준다... 나무와 식수가 부족한 것을 모르고 보급 기지로서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의 이 견해는 매우 정확한 판단이었다.(p773) <위대한 바다> 中


 또한, 개인적으로 브로델의 역사관에 더 끌리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역사의 변인(變因)을 외부에 두었을 때 역사의 보편성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다른 환경에서  문명의 차이가 나타났고, 이러한 차이가 문명으로 표현되었다는 브로델의 관점과는 달리, 아불라피아와 같이 인간(또는 문명) 속에서 역사의 변인을 찾는다면, 자칫 선민(選民)사상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심정적으로도 별로 끌리지 않는다. (실제로 아불라피아는 유대계 영국인이다.) 


 사실 지중해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지구에서 가장 큰 땅덩어리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유럽-아프리카-아시아가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대륙에 갇혀 있는 꼴이다. 이 거대한 땅덩어리는 그 자체로 지구라고 할 수 있으며, 처음부터 상품과 인간이 교류되었던 땅이기도 하다. 인류는 이렇게 세 대륙이 하나로 연결된 땅에서 역사라는 드라마를 공연해왔다. 또한 이 땅은 중대한 교환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p73) <지중해의 기억> 中


 '지중해의 정체성'을 규정하거나 지중해의 어떤 물리적 특성이 인간의 경험을 형성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지중해 역사를 몇 가지 공통 요소로 묶으려 하는 것은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지중해의 기본적 통합성을 주장하려는 그런 시도야말로 지중해 유역과 섬들에 거주했거나 또는 지중해를 오간 사람들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통합성을 찾기보다는 다양성에 주목해야 한다.(p947)... 지중해 역사의 통합성은 역설적이게도 변화무쌍한 가변성, 상인과 유랑민들의 이산, 오래도록 고생에 시달린 이븐 주바이르나 펠리스 파브기 같이 겨울이 닥쳐 해상에서 발이 묶이지 않기 위해 서둘러 바다를 건너려 한 사람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p956) <위대한 바다> 中


 개별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변수가 역사의 절대 변수인가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역사의 시간에서 어느 요인이 더 큰 영향을 미쳤는가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지중해의 기억>애서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간 역사'와 <위대한 바다>는 '독립한 인간의 역사'를 확인하게 된다. 어느 역사가의 관점에 동의하는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역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우리의 시야를 넓게 해준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지중해는 역사 초기부터 이러한 불균형, 즉 자신의 운명 전체를 결정한 원동력의 목격자였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남분의 차이 그리고 수준의 차이를 보이면서 마침내는 문명간의 뚜렷한 갈등으로 비화된 동서의 차이가 바로 지중해의 운명을 결정한 원인이었다.(p115) <지중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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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다르네스여, 그대는 상황을 잘 몰라서 우리에게 그런 조언을 하시는 것이오. 그대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그런 조언을 하시니 말이오. 그대는 노예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아도, 자유가 무엇인지는 전혀 경험해보지 않아 그것이 달콤한지 아닌지 모르신단 말이오. 그대가 자유를 경험했더라면 우리에게 창 뿐 아니라 도끼를 들고 자유를 위해 싸우라고 조언했을 것이오. <역사 제7권 135> 中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5 ~ BC 425)가 그의 저서<역사 Histories apodexis>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페르시아 전제정으로부터 그리스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규정한 이후, 후세 서양사가들은 이러한 구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이 역사를 바라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유럽'이 형성되었다고 해석하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이오니아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을 '이민족'이라 불렀다... 마라톤 전투는 아태네 뿐만 아니라 전 그리스에 중요한 교훈을 일깨워주었다. 강대국에 대한 굴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테네인들은 이후에도 누차 강조하게 되겠지만 대왕의 군대도 격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거인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자유는 끝내 지켜질 것이었다.(p339) <페르시아 전쟁> 中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여 정복하려 한 과정은, 크세르크세스가 잡동사니 테러국이라 칭한 나라들의 독립을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테네인들은 어쩌면 외국인 왕의 백성이 되어 아테네 고유의 민주주의 문화를 발전시킬 기회를 영영 갖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스 문명의 특징이 된 여러 가지 요소들도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마터면 서구는 독립과 생존을 위해서 싸운 최초의 전쟁에서 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구 the West'라는 실체 자체를 탄생시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p34) <페르시아 전쟁> 中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가의 설명과는 달리 페르시아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도 심지어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 ~ BC 404)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크세토폰(Xenophon, BC 431 ~ BC354)의 <헬레니카 Hellenika>에서는 페르시아를 동맹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는 테바이와 아테나이의 모습이, <페르시아 원정기 Anabasis>에서는 페르시아 용병으로 고생하며 퇴각하는 그리스 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서구(Europe)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 없게 들린다.

 

"전우들이여, 내가 지금 상황에 괴로워하더라도 여러분은 놀라지 마시오. 퀴로스는 내 친구가 되어, 조국에서 추방당한 나의 명예를 여러 가지 다른 점에서도 높여주었을 뿐더러 내게 1만 다레이코스를 주었소. 그리고 나는 그 돈을 받아 내 개인 용도를 위해 빼돌리거나 탕진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썼소.<페르시아 원정기 제1권 제3장 (3)> 中


 테바이인들은 어떻게 하면 헬라스의 패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만일 페르시아 왕에게 사신을 보내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사실을 알고 아테나이도 티마고라스와 레온을 파견했다... 조약 내용이 알려지자, 레온은 왕이 듣는 데서 "맙소사, 이제 아테나이 인은 왕 대신 다른 우방을 구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소"하고 말했다. <헬레니카 제7권 1:33 - 37> 中


 그렇다면, 당대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아이스퀼로스(Aeschylos, BC 525 ~ BC 456)의 <페르시아인들 Persai>에서는 다리오스의 입을 빌려 살라미스 전쟁의 패배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아이스퀼로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패배는 휘브리스(hybris 오만)의 결과로 해석된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일단 교만의 꽃이 만발하면 미망(迷妄)의 이삭이 패고, 

 그것이 익으면 눈물겨운 수확이 시작되기 때문이오.

 그대들은 이런 과오들과 이에 대한 벌을 보고

 아테나이와 헬라스를 기억하고, 차후에는 누구도

 자신의 현재 분복(分福)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탐하다가

 자신의 큰 복마저 엎지르지 않게 하시오. (820 ~ 827) <페르시아 인들> 中


 <페르시아인들> 속에서 페르시아 왕은'세계정복'을 꿈꾸는 야망가의 모습이 아닌 단순히 '막대한 부'를 원하는 탐욕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로부터 <페르시아인들> 속에서 당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침략이 탐욕에 의해 일어난 결과로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당대인들의 인식 속에서 '페르시아 전쟁'은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이 그러하듯)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부(富)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자유민주정 VS 전제정'의 구도로 이 전쟁을 바라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로 이제는 <페르시아 전쟁>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굳이 이 전쟁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더라도, 이 전쟁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의미의 실마리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322)의 <정치학 Politika>을 통해 그리스 폴리스(Polis)를 살았던 여성과 노예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헬라(Hella) 공동체는 결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여성임과 노예임은 자연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런데 비(非)헬라스 사람들에게서는 여성과 노예가 동일한 지위를 가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연적으로 지배하는 어떤 것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공동체는 남성 노예와 여성 노예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시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헬라스인들이 비헬라스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주 그럴듯하다 <정치학 제1권 5 - 9>中


 페르시아는 전제 군주정으로서 1인 군주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평등(平等  Equality)한 사회였다. 그렇다면, 오히려 페르시아 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자유와 평등'의 대결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자유'를 이데올로기로 내세운 집단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에서, '자유'는 전체의 자유가 아닌 소수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면에서도 다른 해석이 가능할 듯 하다. 즉, 오늘날 소수 글로벌 대자본에 의한 체제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  neoliberalism)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해석은 어떨까. 


 톰 홀랜드(Tom Holland)의 <페르시아 전쟁 Persian Fire>를 훒어보다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을 두서없이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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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0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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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0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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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2 1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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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2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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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17: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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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18: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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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앞에서 1차 대전의 원인 또는 발생 배경을 두 가지 관점 또는 수준에서 논의하였다. 1차 대전 발발 당시까지의 국제 관계 속에서 배태한 기본적 갈등 구조, 즉 영국과 독일의 대결구조의 형성과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본 것이 그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발발의 도화선이 된 발칸 지역의 정치 상황과 그것을 통해 표출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갈등 구조의 검토였다.(p149) <1차 세계대전의 기원> 中 


 <1차세계대전의 기원>에서 저자 박상섭 교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영국-독일의 갈등과 함께 각각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로 대표되는 '범(凡)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충돌에서 찾고 있다. 이를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1차 세계대전은 여러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 사건이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당시 세계 질서를 주도하던 영국에 대한 독일의 도전이라는 점으로 요약된다. 즉 그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언급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세계 질서를 주도하던 두 최강국의 대결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단순히 두 국가의 충돌로 그치지 않고 그 두 국가에 의해 지탱되던 권력 배분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p55) <1차 세계대전의 기원> 中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1866),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1)을 통해 제국으로 도약한 독일은 이후 급속한 산업화를 통해 새로운 유럽의 맹주로 영국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영국이 위협적으로 생각한 것은 늘어난 독일의 철강 생산량도, 아프리카의 카메룬, 나미비아 등으로 진출한 독일식민지도 아니었다. 그보다 영국이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독일 해군(海軍)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유럽의 군비경쟁(軍備競爭)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바로 건함(建艦) 경쟁이었는데, 그 중심에는 해군과 관련한 두 강대국의 대립이 놓여 있었다.


 영국이 민감하게 받아들인 독일의 위협은 식민지 갈등이라는 지엽적인 문제보다는 기본적으로는 영국이 그동안 3세기에 걸쳐,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는 거의 한 세기 가량 중단 없이 누려온 해상 패권에 대한 독일의 도전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p60)  <1차 세계대전의 기원> 中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1813 ~ 1907)으로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웠던 영국이었지만, 그들에게 중앙아시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국 유지를 위한 해양력(海洋力)이었기에, 영국은 러시아와도 기꺼이 손을 잡을 정도로 해군력은 영국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결전이   독일과 덴마크에 걸쳐 있는 유틀란트(Jutland) 반도에서 벌어졌다.


[사진] 유틀란트 해전(출처 : 위키백과) 


 이른바 유틀란트 해전(Battle of Jutland, 스카게라크 Skagerrakschlacht(독))은 해전사에서 최대의 해상 조우전이자 최후의 순수한 해상 조우전이 될 터였다. 두 나라 해군이 만들어낸 비참한 광경은  전투에 참여한 자들의 기억을 떠나지 않았다... 유틀란트 해전은 해전사에서 가장 많이 기록된 전투이며 학자들 간에 가장 큰 논쟁의 대상이었다. 공식, 비공식 역사가들은 두 함대 사이의 교전을 거의 분 단위까지 세세하게 묘사하고 분석했지만, 무슨 일이 왜 벌어졌는지, 실로 그 결과가 영국의 승리였는지 독일의 승리였는지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p388) <1차 세계대전사> 中


 치열한 전투였지만, 전투에 대한 평가가 모호한 것은 유틀란트 해전만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성격 자체를 규정하는 것 역시 이전 전쟁과는 달리 어려움이 있는데, 이는 이 전쟁이 국가 총력전(總力戰)의 성격을 가진 최조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총력전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를 살펴보기에 앞서 1차 대전의 다른 기원인 '범슬라브주의-범게르만주의'가 발칸 반도에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중왕국 체제 안에서 자치권을 누리던 헝가리의 영토 안에는 세르비아인이나 크로아티아인 같은 남슬라브계 소수민족과 루마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헝가리의 차별 정책은 대단히 가혹하여 인접한 루마니아와 세르비아와의 첨예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민족국가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의 국내 정치는 바로 국제정치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p108) <1차 세계대전의 기원> 中


 총력전이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철도(鐵道 railroad)'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세기 유럽의 도시가 농촌을 정복하는 도구로 활용되었고,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KTX를 통해 지방중소도시 경제권을 붕괴시키고 있을 정도로 (빨대 효과) 철도는 지금도 경제적으로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철도의 위력은 당시에는 현재보다 위력적이어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전투 인력의 공급(supply)을 담당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공급된 인력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을 처리한 것은 맥심 기관총(Maxim gun)으로 대표되는 현대 무기였다. 막대한 인력의 공급과 수요의 접점에서 쌓여가는 것은 전사자와 부상자였으며, 전선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참호전(塹壕戰  trench warfare)의 모습이었다.


[사진] 프랑스 협궤철도(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346917977523721498/)


 특히 독특한 것은 기차 기계인데, 이것은 선로와 차량을 결합해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독립체를 형한다. 그 기계는 사람들이 가득 찬 객차를 이끌고 사람들이 살고 일하는 도시와 마을을 통과해 사람들을 빠른 속도로 이동시킨다. 여객 철도 시스템은 일상생활 외부에 국한되지 않고, 공업, 노역, 보안의 장소로부터 벗어나 있다. 철도  기계는 농촌을 일정한 속도로 통과하면서 매우 충격적인 방식으로 일상의 사회생활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변형시킨다. 처음으로 기계가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 경험의 전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비록 북미보다는 유럽과 일본에서 훨씬 특징적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농촌을 무미건조하게 만들고 정복하는 과정에서 철도는 자연, 시간, 공간의 기존 관계를 재구조화한다.(p179) <모빌리티> 中


 1830년대에 시작된 유럽 철도망의 건설은 도보와 말을 이용했을 때보다 부대의 이동과 보충을 어쩌면 열 배까지도 더 빠르게 함으로써 전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철도가 등장하기 이전의 병참은 언제나 무계획적이었다. 또한 동시에 융통성을 허용하기도 했다... 철도는 평시와 마찬가지로 전시에도 엄격한 운행표를 작성할 필요가 있다. 아니 평시보다 더 엄격해야 한다.(p44) <1차 세계대전사> 中


 기관총, 독가스, 철조망으로 대표되는 제1차 세계대전의 비참한 전투 현장에서 19세기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전반을 관통하는 인간 이성(reason)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무너지게 되었고, 이러한 절망감 속에 전쟁에 대한 짙은 회의는 빠르게 번져나가게 된다. 이미 1917년 즈음에는 거의 모든 나라의 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같은 해 미국의 참전으로 전쟁은 급속하게 종결을 맞이 하게 된다. 

 

 이제 전선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전선이 교착되어 적군과 아군이 마구 뒤섞였고, 아군의 거점들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병사들은 굶주림, 갈증, 추위, 눈과 비, 수면 부족, 배설물과 부패한 시체에서 풍귀는 악취 등 온갖 고통을 다 겪었다.(p283) <사생활의 역사 5> 中

 

 병사들은 어떻게 4년 이상을 '버틸 수' 있었을까?... 마지막 가설은 모든 병사들이 민족주의 윤리에 의해 움직였다는 것인데, 당시의 민족주의는 알사스와 로렌의 상실로 한층 더 격화되어 있었다. 진짜 '애국교'라고 할 만한 것이 생겨났다. 민족주의는 우파와 좌파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였다. 오로지 극소수 좌파만이 이러한 가치에 이의를 제기했다. 1914년 국제 협력 체제의 완전한 붕괴는 바로 이러한 민족주의로 설명된다.(p287) <사생활의 역사 5> 中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은 컸고, 전승국들은 승리에 대한 배당을 나누어야 했다. 영국의 경우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견제를 위해 중동 지역에는 독립에 대한 약속을, 유럽에서의 전쟁 수행을 위해 인도에서의 자치 약속을 했지만 이들에 대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민족자결주의(self-determination)는 패전국의 지배지에서만 적용되는 원칙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었다는 사실은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1916년 초에는 아랍 비밀결사 지도자인 아지즈 알 미스리가 외교언어인 프랑스어로 쓴 서신을 키치너에게 보냈다. 그가 개진한 내용은 이랬다. 영국은 아랍인들에게 완전하고 참된 자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지 않는 한 아랍어권 중동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영국의 지배도, 보호령도 아니다(non pas une domination ou un protectorat)... 키치너와 그의 부하들이 아랍의 지지를 절박하게 원하면서도, 후세인이 원하는 대가는 지불하려 하지 않고 위조화폐만 남발하는 속임수를 쓴다는 것이었다.(p281) <현대 중동의 탄생> 中


 저(간디)는 이미 자치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자치는 무기의 힘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폭력은 인도의 땅에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영혼의 힘에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P168)... 어떤 영국 성직자의 생각을 제가 다시 표현하자면, 자치 아래 무정부 상태가 질서 잡힌 식민 통치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 고상한 성직자가 생각하는 자치의 의미와 제가 생각하는 인도의 자치는 다릅니다. 우리는 배우고 가르쳐서 영국의 통치든, 인도의 통치든 폭정을 몰아내야 합니다.(P169) <힌두 스와라지> 中


 1919년 3.1운동 100주년을 한 달 정도 앞두고, 간략하게나마 제1차 세계대전을 정리하는 페이퍼를 작성해본다. 계몽주의(啓蒙主義)시대로부터 이어져온 인간 이성(理性)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던 제1차 세계대전 The first World war). 이 전쟁이 큰 전쟁(大戰)으로 역사에 남지 않고, '제1치' 라는 수식어를 달게 되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류가 이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국제 정세와 이를 알지 못한 1919년 우리 조상들은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 2019년 3.1 100주년을 맞는 우리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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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30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30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9-02-01 2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로필 사진을 보니, 그 사이 귀요미가 아주 많이 컸네요.
그 때보다 훨씬 예뻐진 것 같기도 합니다.
겨울호랑이님, 설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9-02-02 00:34   좋아요 1 | URL
네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처음 봤을 때보다 몇 배 커진 것 같아요. 다만, 머리 크기는 거의 변화가 없이 몸만 커져서 귀여운 맛은 사라지고 조금 예뻐진 것 같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요. 서니데이님께서도 설 연휴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카알벨루치 2019-02-01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연의와 온 가족과 함께 멋진 시간들 연휴에 보내시고 재충전하시고 오소서 ^^

겨울호랑이 2019-02-02 00:34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한 연휴 되세요. 감사합니다!^^:)

雨香 2019-02-04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차 대전에 대해서 공부하듯 읽었습니다. ^^ (꾸벅)
역사를 그냥 파편화하여 접하다 보니 1차대전과 3.1운동이 비슷한 시대였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아챘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2-04 20:12   좋아요 1 | URL
저도 이번에 1차 세계대전을 정리하다보니 세계사 흐름안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야함을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국가연합에서 유럽연합의 헌법을 제정할 때에는 특별히 중세와 근세 유럽 문화의 딸과 같은 각국의 고유 문화를 옹호하는 방법으로 공통 규범을 제공하도록 장려되었습니다. 이러한 통합 과정이 유럽연합의 헌법에 담겨 있는데, 그것이 바로 로마법의 전통과 게르만법, 보통법 Ius commune의 정신에서 유래합니다. 특히 로마법과 게르만법의 전통 외에도 보통법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개념에 주목할 만합니다.(p26) <법으로 읽는 유럽사> 中


 <법으로 읽은 유럽사>에서는 유럽연합(EU) 헌법의 정신을 로마법과 게르만법, 그리고 보통법에서 찾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각각의 법(法)의 기원과 법의 변천을 통해 유럽이 어떻게 규정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추천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된다.

 

 로마 교황청의 대법원인 로타 로마나의 변호사인 저자는 유럽법의 핵심에는 로마법과 교회법이 있으며, 이 두 요소가 중세에 보통법이라는 모습으로 통합되었음을 잘 설명하고 있다. <법으로 읽은 유럽사> 추천의 글 中


 로마법학은 당대에 구체적인 법 규범을 규정하는 학문이라기보다는 지성적인 학문, 즉 원칙과 이론의 총체로서의 '기록된 이성 ratio scipta'을 구성했습니다. 반면 교회법학은 그 원칙들을 현실에 확대 적용한 그 시대의 법 규범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중세 유럽에서 보통법이 태동하게 됩니다(p295) <법으로 읽는 유럽사> 中


  추천사에서처럼 <법으로 읽는 유럽사>에서는 학문으로서 정립된 '로마법'이 로마제국 멸망 후 게르만의 '관습법'을 만나 교회에 의해 '보통법'으로 종합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만, 책 중간에 삽입된 라틴어 법률 조항은 비전문가들의 읽는 속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면이 있다. 그래서, 이번 페이퍼에서는 법률 조항에 관련된 사항은 걷어 내고 로마법과 게르만 관습법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를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 1932 ~ 2016)의 <중세> 시리즈를 통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로마법의 정리 : 유스티아누스 


[사진] 유스티아누스 1세(사진출처 : 위키백과)


 <법으로 읽는 유럽사>에서 저자는 로마법은 원칙과 이성 그리고 보편적인 가치와 이상을 담은 형이상학적 원리가 담겨진 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상 로마법은 동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 대제(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AD 482 ~ AD 565)에 의해 〈칙법휘찬〉(Codex Constitutionum), 〈학설휘찬〉(Digesta, Pandectae), 〈법학제요〉(Institutiones)가 편찬될 때까지 통일된 법이 아니었다. 사고를 규정하던 로마법은 유스티아누스의 집대성 이후에야 오늘날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이라 부르는 법전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로마가 법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법의 내용이 시대를 초월해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와 이상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사법과 로마민법은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보장하고 보호하면서, 역사의 계속성을 유지해왔고, 로마법은 인류 보편의 이상을 향해 발전해나갔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한 법문화의 가치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p87) <법으로 읽는 유럽사> 中


 로마법은 늘 동일한 특성을 지니지 않았으며, 단 한 번도 법전으로 편찬된 적이 없었다.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결정적으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자, 동로마 제국에서는 로마 제국의 법률 자료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이후로 공표한 제국의 법률에 한정하기 때문에 지극히 일부만 편찬되었다. 그러나 6세기에 동로마 제국 황제인 유스티아누스는 법률뿐 아니라 로마의 판례까지 포함하여 많은 자료를 한데 모으면서, 매우 귀중한 법률 자산을 후세에 전해 주었다. 이것을 통해 유럽의 수많은 국가는 수백 년 동안 현행법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p114) <중세1 476 ~1000 : 야만인,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도의 시대> 中


2. 게르만 관습법


 동로마 제국에서 로마법이 정리되고 있을 때 서유럽에서는 게르만 민족에 의한 유럽의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게르만 민족의 전통과 관습에 기반한 통치가 서유럽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게르만 관습법의 전통은 오늘날 영미법(英美法, Anglo-American law)에 남아 있는 불문법(不文法)적 요소가 된다. 이러한 대륙과 다른 법체계로 인해 생긴 대륙-영국의 차이가 지난 2016년 브렉시트(Brexit)가 이루어진 100가지 이유 중 하나의 이유는 되지 않을까...


 로마에서는 법학자들이 구체적인 사건 해결을 위해 형성한 법규를 그 근거로 삼았다면, 영국에서는 법원이 사건 해결을 한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영국의 판례법 case law이 법원의 판결들로 구성된 사례라면, 로마의 사례법은 대부분 법학자가 이론적 논술을 위해 만들어놓은 사례인 것입니다. 고유한 가치와 사유 체계는 삶의 자리 sitz im Leben에 따라 형성되고, 법학도 그러한 삶의 자리를 떠나서 판단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p145) <법으로 읽는 유럽사> 中


 유럽의 보통법과는 달리 잉글랜드의 보통법은 학리상이 아닌 판례상의 모체를 공유하고 있었다. 유럽의 보통법과는 달리 잉글랜드의 보통법은 프랑스 혁명에 의해 생겨난 독점적인 입법의 사법체계에 대한 대안적인 본보기로서 근대성이 훼손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르렀다.(p251) <중세2 1000 ~ 1200 : 성당, 기사, 도시의 시대> 中


[그림] 봉건제도 (출처 : 위키백과)


 라틴족과 이민족이 설립한 왕국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제국에 이르기까지, 중세 유럽의 권력자들은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동일하고 보편적인 규칙을 자신이 지배하는 영토 전체에 적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등장한 법적 다양성은 중세 법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p233)... 중세의 법적 전통이 다양성을 지닌다는 점은 단순히 국가가 다양한 법을 제정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대의 법에서 관찰할 수 있는 특징은 관습이 가장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는 점이며, 이는 법제가 지역적 전통과 결합해 발전하는 원인이 되었다.(p236) <중세1 476 ~1000 : 야만인,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도의 시대> 中


3.  교회에 의한 보통법(Common law) 등장 


  다른 한편으로, 게르만 민족에 의한 서유럽 지배는 성(聖)과 속(俗)의 분리를 가져왔다. 세속적으로는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신앙으로 서유럽인들은 하나의 왕국(王國)에 속한 형제자매들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교회(敎會 Ecclesia)가 자리했다. 

 

 교회는 법의 세계에 단순히 도덕적이거나 문화적 헤게모니로서 제한된 영향만 끼쳤던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그 자체로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법질서를 구축했으며, 교회의 규범들은 성직 제도의 구성만큼이나 종교적/윤리적 관점에서 신자들의 공동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고해성사와 연관되어 있었다.(p238) <중세1 476 ~ 1000 : 야만인,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도의 시대> 中


 교회법은 단순히 신앙공동체의 생활을 규정하는 도덕체계가 아니었다. 서유럽 전체가 거대한 신앙 공동체였던 중세에서 교회법은 제국의 법률과 같은 영향력을 가졌다.  교회의 이러한 영향력은 12세기에 동로마로부터 <유스티아누스 대법전>이 전파되면서 새롭게 변모하게 된다. 이 법전에 주석을 다는 것으로부터 유럽의 법학은 새롭게 태어났고 그 중심지는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 대학이 있었다. 


 교회법은 로마법, 게르만법과 함께 서구의 법 전통을 이루는 또다른 한 축으로, 교회법이 일반시민법에 끼친 영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방대합니다. 일례로 한국의 민사소송법도 교회법의 소송절차법에서 그 역사적 뿌리를 찾을 수 있지요.(p198)... 교회법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윤리신학에 바탕을 두다고 점차 법적 성격을 띠는 법제도로 발전했습니다. 그 가운데 원상회복, 무죄추정의 원칙, 기득권 보호, 다수결의 원리, 고리대금업의 금지, 계약 충실의 원칙, 소송 대리인 제도, 입법 사상의 형성, 불법 행위의 금지, 긴급 피난 등의 법제도는 오늘날의 법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p199) <법으로 읽는 유럽사> 中

 

 이론적인 전통의 정수가 집대성되어 있던 아쿠르시우스(Accursius, AD 1182 ~ AD 1260)의 위대한 작품에서 절정에 달한 주석학파는 그 규정과 원칙들을 글자 그대로 이해해야 하고, 그것들의 상관관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할 유효할 법률로 인식된 <로마법 대전>을 법학 교육과 연구의 중심에 두었다. <유스티아누스 대법전>의 여백에 작성된 주석들은 단어와 구문의 의미를 명확히 해 줄 뿐 아니라 주석, 즉 분석 중인 주제와 관련한 규정들을 포함하고 있는 다른 저작물의 출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다.(p248)... 교회법은 로마법과 동등하게 대학 교육 과목으로 등극했으며, 로마법과 더불어 보통법의 권위를 지닌 한층 강조된 법질서의 다원주의 속에 편입됨으로써 중세의 법체계에 골고루 스며들었다(p250) <중세2 1000 ~ 1200 : 성당, 기사, 도시의 시대> 中


4. 중세의 붕괴와 근대의 시작


  <법으로 읽는 유럽사>에서는 교회법이 후세에 미치는 영향으로 원상회복, 무죄추정의 원칙 등을 들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영향은 긍정적인 발전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비록 <법으로 읽는 유럽사>에는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무죄추정의 원칙 등 형사재판(刑事裁判)의 원칙등은 중세를 암흑으로 규정한 사건, 종교재판(宗敎裁判 Inquisitio)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反作用)이었다.


 

 정치 제도의 발전, 새로운 법학의 확립, 로마 교회의 활력적인 규정은 중세 후반의 사법 구조와 활동 변화에 기여하며 타성과 저항 사이에서 점진적으로 근대 유럽을 특징짓게 될 사법적 범례를 형성했다. 사법적 논쟁들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의 신명 재판이 점차 사라지며 게르만족의 전형인 세계관 Weltanschauung의 위기가 명백히 드러났고, 새로운 이성이 등장했다... 중세 후반기의 문명은 증거에 기초하는 공적 재판 형태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 책임을 밝히려는 노력은 심판의 결투와 연옥의 맹세, 그리고 심판이 무시무시한 도전에 임한 자의 육신에 자연 요인이 미치는 결과를 통해 드러난다는 끓는 물과 불타는 석탄, 뜨겁게 달구어진 쇠의 신명 심판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p238)... 심문 수단으로서의 고문을 거부하고 고백의 증거적 가치를 비판하는 것은 이단 심문에 대한 논쟁의 주된 주제였다. 논쟁은 로마- 교회의 전형에 대치되는 처벌 절차에 대한 계몽주의적 관점을 통해 최고조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즉 결백을 추정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양측의 형평성과 대립구도, 재판의 공개성과 구두 진행, 재판관의 제3자적 입장과 공평성에 근거하는 보장성 유형이었다.(p241) <중세3 1200 ~ 1400 : 성, 상인, 시인의 시대> 中 


[그림] 마녀사냥 (출처 : http://salem.wikia.com/wiki/Witch_Hunt_(Historical))


 '종교 재판'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바로 '마녀사냥(Witch Hunts)'일 것이다. 중세를 연상시키는 핵심적인 단어 중 하나인 '마녀(魔女)사냥'은 실상 1,000여년에 걸친 중세 기간 내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중세 후반기 알프스 이북의 게르만 민족의 세계관이 붕괴되었을 때, 사회 통제를 위해 이루어진 일련의 비합리적 행위는 중세(中世) 전체를 암흑의 시대로 규정하게 되었고, 이어지는 계몽시대(啓蒙時代 Siecle des Lumieres)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반의 종교 재판 역사에서 크게 주목할 점은 종교 재판관과 세속 재판관이 악마의 축제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렇게 유럽의 역사에 가장 어두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마녀와 마법사의 비밀 결사는 문화 구조이고, 복합적인 신화이며, 알프스 산 양쪽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가 점차 유럽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마녀사냥은 종교적인 요인때문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고 사회적-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으며, 개인적인 복수와 공공질서 회복과도 관련이 있었다.(p238)... 결국 마술을 믿는 신앙이 성공한 것은 불행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으며, 집단의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통제 수단이었을 것이다. 공동체는 마녀에게 타격을 가하면서 악의 원인을 막을 방법을 찾았다.(p239) <중세4 1400 ~ 1500 : 탐험, 무역, 유토피아의 시대> 中


 <법으로 읽는 유럽사>와 <중세>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오늘날 EU의 정신을 이루고 있는 EU 헌법의 근간에는 로마법, 게르만 관습법 그리고 이들을 아우르는 보통법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오늘날 근대 시민법의 형성에는 중세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새로운 과제를 확인하게 된다. 위에서처럼 법(法)이 제도(制度)를 만들고, 제도가 사상(思想)을 만들고, 사상이 역사(歷史)를 만들고, 역사가 오늘의 우리를 만들고, 오놀의 우리가 다시 법을 만든다면, 미래(未來)를 위해서는 오늘의 우리가 우리의 모습이 담긴 법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모처럼 개헌(改憲)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최근 완간된 <중세4>를 통해 중세 1,000년의 기간에서 고대와 근세의 접점을 보다 면밀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얻은 작은 수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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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2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22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H.카(Edward Hallett Carr, 1892 ~ 1982)는 <러시아 혁명 1917 ~ 1929 The Russian Revolution 1917 ~ 1929>을 통해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농업 국가인 러시아의 공업화 과정과 여기에서 빚어진 갈등을 밝히고 있다.

 

 애초에 마르크스는 선행하는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확립된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전한다고 예상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이런 토대가 발달하지 않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레닌은 경제적/정치적으로 후진적인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를 기대했다. 혁명이 곧바로 국제적 성격을 띨 것이라는 가정하에서만 이 딜레마를 피할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 자체가 경제적으로 후진적이고 수적으로 미약한 한 나라에서 혁명을 통해 도입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의 통일된 프롤레타리아트가 일으킨 혁명의 결과로 예상한 사회주의가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러시아 혁명은 혼성되고 양면적인 성격을 띠었다.(p273) <E.H. 카 러시아 혁명> 中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 ~ 1883)에 따르면 사회주의 국가는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2단계 혁명 단계를 거쳐야 했다. 그렇지만, 1917년 당시 러시아는 농업국가였으며, 마르크스의 혁명 도식에서 벗어난 국가였다. 이는 온건파인 멘셰비키(Mensheviks)와 볼셰비키(Bolcheviks)가 대립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멘셰비키가 부르주아 혁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레닌(Vladimir Ilyich Ulyanov, 1870 ~ 1924)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제 러시아 혁명과 내전을 거쳐 정권을 확고하게 장악한 레닌과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해야 했다.


 소련의 산업, 특히 중공업은 비효율적인 고비용 생산 부문인 반면, 농민 노동을 무제한으로 공급할 수 있는 농업은 상대적으로 저비용 생산 부문이었다. 자본이 최대 수익을 얻는 방법은 농업에 자본을 투자해서 수출용 잉여 농산물을 증대시켜 산업의 궁극적 발전을 위한 자본재를 비롯한 산업재 수입의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자본이 부족하고 미숙련 노동 잉여가 넘처나는 소련 같은 나라에서 합리적인 경로는 자본집약적인 자본재를 생산하는 산업이 아닌 노동집약적인 단순 소비재를 생산하는 산업에 우선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p165) <E.H. 카 러시아 혁명> 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소비에트 연방(이하 소련)의 현실은 산업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련 인구의 다수가 농민인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안은 경공업을 발전시키는 방안이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소련이 직면한 현실은 이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르크스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소련 내부에서 빠른 산업화와 국제적인 혁명의 확산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위해 이들에게 허용된 시간은 결코 넉넉한 것이 아니었다.  


 산업화의 첫째 조건은 농민이 도시와 공장에 필요한 식량을 임금 수준에 견디기 힘든 부담을 주지 않는 가격으로 공급하고, 농민 시장을 위한 소비재 생산에 전용되는 산업 자원을 최소한의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p196)... 공공연하게 공언된 둘째 조건은 노동의 생산성을 임금보다 빠르게 증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산업 팽창에 필요한 재원을 일부나마 산업 이윤 자체에서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p198)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산업화된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농촌은 저렴한 노동력과 식량을 꾸준히 제공할 수 있어야 했으며, 도시 노동자들은 임금 수준 이상의 생산성을 결과로 내어야 했다. 그리고, 이 구조가 선순환(善巡還)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농촌 생산력의 증대가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경공업 보다 중공업의 발달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소련은 경제 권한의 집중과 반(反)시장주의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 중, 둘째 요소인 반 시장주의가 소련 경제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전시공산주의는 두 개의 주요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편에는 중앙집중적인 통제와 관리, 소규모 생산 단위의 대규모 단위로의 대체, 통일된 계획 조처 등 경제적 권한과 권력의 집중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상업적/금전적 형태의 분배로부터 이탈, 무상이나 고정 가격의 기본 재화와 서비스 공급 도입, 배급, 현물 지불, 가정된 시장이 아닌 직접 사용을 위한 생산 등이 있었다.(p54)... 그런데 전시공산주의의 둘째 요소, 즉 '시장' 경제를 '자연' 경제로 대체한 것은 그런 기초가 전혀 없었다.(p55) <E.H. 카 러시아 혁명> 中


 통화는 또다시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떨어지고 있었다. 불확실성과 경계의 분위기 속에서 곡물은 가장 안전한 가치 저장물이었다. 비축물이 있는 농민들로서는 이 물건을 시장에 내놓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p186)... 신경제정책이 토대를 두었던 믿음, 즉 국가에 대한 자발적인 농산물 인도와 시장의 자유 판매를 결합한 체계로 도시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이미 산산이 무너졌다.(p192)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소련의 반 시장주의 정책의 실패는 다음의 내용을 통해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1985)는 그의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Afterthoughts on Material Civilization and Capitalism>를 통해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구분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브로델에 따르면 소련 지도부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소련 경제는 시작부터 문제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된다.

 

 레닌이 "제국주의(imperialisme)"라고 부르는 것(또는 달리 말하면 20세기 초에 새로 탄생한 독점자본주의)과 경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단순한 자본주의의 병존이 그것이다. 나는 갤브레이스와 레닌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내가 "경제(economie)" - 또는 시장경제 - 라고 부른 것과 "자본주의(capitalisme)"라고 부근 것 사이의 영역 차이가 새로운 모습이 아니라 중세 이래 유럽에서 언제나 지속되던 상수(常數)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산업화 이전 시기의 모델에 세 번째의 영역을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장경제라는 층의 옆에, 차라리 그 위에, 반(反)시장(contre-marche)의 영역이 있다. 바로 이곳이 자본주의의 영역이다.(p323)<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1, 교환의 세계 上> 中 


 국가는 언제나 계급 지배와 억압의 도구였다. 계급 없는 공산주의 사회와 국가의 존재는 양립할 수 없었다. 레닌은 직접 만든 경구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자유란 없다. 자유가 존재하게 된다면 국가란 없을 것이다."(p19)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자본주의와 구분되는 시장경제는 인류 역사를 통해 꾸준히 존재해온 양식이었기 때문에, 이를 부정한 1920년대의 소련 경제 정책을 결국 실패로 귀결되고 만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등을 추진하지만, 어려운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이러한 실패로 말미암아 1924년 레닌 사후 소련을 이끌게 된 스탈린( Iosif Vissarionovich Dzhugashvili, 1878 ~ 1953)은 국제주의를 포기하게 되었다. 국가를 부정한 마르크스 - 레닌의 이론 대신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E.H. 카가 서술한 소련의 1920년대는 마무리 된다.


 그때까지 일국사회주의는 신경제정책의 연속으로 간주됐을 것이다. 신경제정책 또한 국제 혁명의 암울한 전망에 등을 돌렸고, 러시아 농민과의 동맹을 통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제 스탈린은 자급자족하는 러시아, 즉 근대화된 산업과 농업을 통해 변형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된 러시아라는 아주 다른 개념을 향해 더듬더듬 나아가고 있었다... 일국사회주의는 현홍적인 장기적 전망이었고, 바야흐로 경제 상황에서 감지되기 시작하던 여러 변화와 들어맞았다. 일국사회주의 이론은. 그 주창자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자급자족의 조건으로서 중공업 장려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이 이론은 후진적인 러시아 경제의 자원을 가지고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도 함축했다.(p119)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코민테른의 결정은 사실상 소련 공산당의 결정이었다. 이 결정을 외국 공산당에 강요할 수 있고 실제로도 강요했지만, 해당 국가에서는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대가를 치렀다. 노동자들은 동떨어진 외국의 권력이 자의적이고 때로는 전혀 부적절한 지시를 내리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 1920년대 말에 서구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수와 영향력이 쇠퇴하고 동조자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p267)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몰두는 스탈린에게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일국사회주의 덕분에 스탈린은 사회주의에 관한 주장들을 러시아 민족주의와 조화시킬 수 있었다. 소수민족이나 작은 나라에 대한 스탈린의 처리 방식에서 민족주의는 쉽게 국수주의로 변질됐다.(p251)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저자는 E.H.카는 <러시아 혁명 1917 ~ 1929>를 통해 소련의 신경제정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집단화는 토지 혁명을 완성했는데, 이 혁명은 1917년에 농민들이 지주 토지 강탈로 시작됐지만 오랜 경작 방식과 농민의 생활방식을 고스란히 남겨 높았다(p238)... 지난 12년 동안 농업은 여전히 경제 내에서 준 準 독립적인 고립지대로 남았고, 자체의 궤도를 따라 기능하면서 그 궤도를 변경하려는 외부의 모든 시도에 저항했다. 이것이 신경제정책의 본질이었다.(p239) <E.H. 카 러시아 혁명> 中


 농민국가에서 공업국가로의 변신과 국제 혁명의 필요성 때문에 빚어진 '농촌 - 도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 1920년대 소련의 경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소련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것이 1937년 이루어진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러시아 혁명과 우리 역사의 거리는 지리상의 거리보다 짧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진]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출처 : http://webzine.nuac.go.kr/tongil/sub.php?number=1779)


 이처럼 <러시아 혁명>은 우리에게 러시아 혁명 후 10여년에 걸친 소련의 경제사를 '도시 - 농촌'의 대립 관점에서 짧은 페이지임에도 불구하고 밀도있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특히 이 책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은 독립운동 당시 고려인 이주 사건 외에도 1960년대 이후 우리의 경제발전사의 모델을 제시하는 등 우리 역사에 미친 직간접적인 영향 때문일 것이다. 농촌의 억압을 통한 도시 발전과 중화학 공업의 육성 등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소련 경제사 속에서 우리 자신의 역사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최근 한계에 부딪힌 우리 경제의 문제점과 한계점 역시 이 안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지난 역사를 통해 현재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역사책을 읽는 이유라고 한다면, 비록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조금 넘겼지만, 이 책이 갖는 의미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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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24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에 반대하는 스탈린
이 레닌의 후계자가 된 것이 소련에게는
그야말로 대재앙이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공산주의 역사발전 이론에서 아직 공업화가
덜 된 러시아에서 PT혁명이 발생했다는 점도
넌센스가 아니었을까요. 사실 독일 정도 되는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났어야 하는데 반대로
파시즘 국가가 되어 버렸으니.

푸틴 짜르 시절에 마치 다시 예전 제정 러시
아 시대로 돌아갔다는 느낌이 드네요.

겨울호랑이 2018-08-24 14:30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물론 마르크스 혁명론이 절대 진리는 아니겠지만,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사회에서 ‘사회주의‘라는 결과만을 추구하다보니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 것 같습니다. 보다 사회가 나아지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문제 인식 공유가 먼저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2018-08-24 16: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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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4 17: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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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4 18: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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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4 19: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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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20: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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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2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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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2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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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2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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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2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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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7 1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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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8-27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님의 좋은 리뷰 잘봤습니다. 전 사회주의가 실패하지 않았다 봅니다. 오히려 4차 산업혁명이 기회가 될 수 있다 보고, 현실 사회주의는 쿠바도 있죠.

저 또한 스탈린을 비판하는 쪽에 가깝고, 레닌과 트로츠키보다 당연히 저평가하는 쪽이기는 하나 스탈린식 경제개발은 설사 트로츠키였다 하더라도 했을거라 봅니다. 내전으로 인한 경제 사정이 워낙 안좋았으니까요. 다만 일국사회주의와 국제사회주의라는 국제적인 측면에선 달랐을 거라 보고, 트로츠키의 경은 스타하노프 운동과 같은 짓은 안했겠죠.

참고로 전 사회주의자입니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제 심장을 뜨겁게 만드네요.ㅎㅎㅎ

겨울호랑이 2018-08-27 20:24   좋아요 1 | URL
^^:) 인류 사회가 지속되는 한 ‘평등‘과 관련한 논의는 계속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하나의 지향점을 제시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평가 역시 이르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주의의 많은 요소들이 ‘복지‘라는 이름으로 제도 안으로 들어올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마르크스를 ‘예언자‘로 생각하고 사회변혁의 공식 틀에 맞춰서 움직이려고 했던 것은 유물론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면서 베들레헴에서 예언자가 나와야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군요. 저는 성향이 보수적인 편이라 사회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회주의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어느 사상이나 이념도 분명 한계가 있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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