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지어의 논문에서 동등한 단체가 자유롭게 협상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법적, 경제적, 사회적 합의인 '계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 계략을 가장 먼저 드러내는 부분이다. 설사 그런 '계약'이 존재했다는 물적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도처에서 상시로 발생한 성 착취와 극도의 폭력이 그런 계약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한 일은 놀라울 따름이다. 유엔과 국제 앰네스티가 "반인륜적 범죄"(4)로 인정한 역사적 사실에 '계약'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야말로 수치스러운 일이다.._ <르몽드디플로마티크, 3월호> , <역사를 모독하지 마라>(http://www.ilemonde.com)>


 얼마 전 하버드 미쓰비시 일본 법학 교수인 램지어 교수의 논문이 전세계를 분노로 몰아넣었고, 이에 대한 비판의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 3월호>에도 실렸다. 기사를 읽으면서 전에 읽었던 <제국의 위안부><반일 종족주의>를 떠올리면서, 위안부(성노예)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제국의 위안부>를 다시 읽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때에도 저자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지만,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의 여러 편의 비판의 글이 실린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는다>와 함께 비교해서 읽었다는 점일 것이다. 덕분에,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비판점을 늘릴 수 있었다.

 

 위안부의 불행을 만든 것은 민족 요인보다도 먼저, 가난과 남성우월주의적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였다. 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제2판 34곳 삭제판>,서문 - 다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 -, p33


 만약, <제국의 위안부>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위의 문장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저자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에서 민족의 문제를 제외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민족 요인보다 구조적, 제도적인 문제로 이 문제를 한 차원 끌어올린 후 이 차원에서 이를 강요한 강제성의 주체를 이분화한다. '현실적인 강제성'과 '구조적인 강제성'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현실적인 강제성'의 주체에 조선인 남자들이 포함되기 때문에, 조선인들 역시 이로부터 책임이 자유롭지 않음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서는 제노사이드(genocide) 측면에서의 문제를 지적한 다음 글을 살펴보자.


 '위안소'를 설치한 데에는 장병들의 성병 예방이라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일본인 창기보다 조선인 소녀가 '황군 장병들을 위한 선물'로 적당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또한 대일본제국의 성인 남자가 속속 죽음으로 내몰리는 가운데, 그의 '씨' 種 야마토 민족의 아이를 최대한 재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에 대해서는 민족 말살을 하더라도 상관없는, 아니 오히려 '민족 말살'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당시 병사들 사이에서 "조선의 젊은 여자를 모두 긁어모아 위안부로 삼아 조선 민족의 종자를 절멸시켜야 한다"는 발언도 공공연하게 나돌았다고 한다. _ 이시카와 이쓰코, <일본군 '위안부'가 된 소녀들>, p144


 '위안소' 설치를 통해 민족 말살을 생각했다는 이러한 인식이 보편적이었다면, 과연 저자가 지적한 '제국의 위안부'라는 용어가 설 자리가 있을 수 있을까. 민족 문제를 위안부 문제와 분리할 수 없다라면, 이후 전개되는 저자의 논리는 설자리가 없어지겠지만, 그 이후 논리에도 문제점이 있기에 계속 살펴보자. 


  일본군이 장기간 동안 전쟁이라는 '비일상'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병사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으로 '위안부'라는 존재를 발상하고 모집한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규제를 했다고는 하지만 불법적인 모집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집 자체를 중지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도 일본군의 책임은 크다.(p25)...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군의 수요를 자신들의 돈벌이에 이용하고 자국의 여성들을 지배자의 요구에 호응해 머나먼 타국으로 데려다놓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을 묻는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식민지주의와 국가와 가부장제의 강제성을 무엇보다 먼저 물어야 한다. 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제2판 34곳 삭제판>, p26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보려면 구조적인 강제성과 현실적인 강제성의 주체가 각각 누구였는지를 보아햐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의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제국의 위안부>는 두 개의 '강제성'이라는 공을 교묘하게 돌리며 대중의 시선을 끄는 광대처럼 보인다. 그리고 집요하게 '현실적인 강제성(조선인 협력자)'을 통해 '구조적인 강제성(일본제국)'을 지우려고 한다. 복권되는 것은 일본제국이고 면책되는 것은 식민주의 침략의 역사다. 심지어 그녀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이들에 대해서 "'가라유키상의 후예', '위안부'의 본질은 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다. _손종업 외,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p34


 <제국의 변호인> 저자 박유하는 얼핏 일본군의 책임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사실 읽다보면 극히 일부임을 알게된다. 거대한 범죄자의 '가해자'가 아닌 '자살방조죄' 정도의 책임을 일본의 국가 책임으로 인정하는 대신, 그는 가해자를 민간으로 떠넘긴다.  우리는 국가 부채를 민간 부채으로 떠넘기는 그런 얄팍한 정책을 위안부 문제의 논리에서도 보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시장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시민 사회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쇼와(昭和)시대는 과연 그러한 시대였는가? 이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답해준다. 


 사실 일본인들은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기 전부터 한국에 많이 건너와 살았다. 그중에는 속아 팔려온 소녀들이나 살길이 막막했던 가난한 여성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의 '이동'을 조장하고 묵인한 건 국가권력과 민간업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훗날의 '조선인 위안부'의 전신은 '가라유키상', 즉 일본인 여성들이었다. 그들 역시 가난한 시골처녀들이었고, 감언이설에 속거나 부모의 뜻에 따라 팔려간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인 위안부' 역시 가부장제와 국가의, '가난한 여성' - 사회적 역자에 대한 차별이 만들어낸 존재였다. 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제2판 34곳 삭제판>, p30


 무엇보다, 일본제국시대(1868~1945)에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시민'이 없었다. 그러므로, '계약'이라는 용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모든 개인(일본 국민과 식민지 백성 모두)은 천황의 '신민'이었으며, "일본 신민이 되는 데 필요한 조건은 일본 천황이 승인하고 명령한 법에 의해 결정"됐다.(5) 성별과 경제적, 인종적 요소가 그런 "조건"의 기초를 이루면서 개인의 특질에 대한 명확한 위계질서를 만들어냈다.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 그 요지다. 여성은 말할 것도 없으며, 일본 식민지의 여성과 미성년자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_ <르몽드디플로마티크, 3월호> , <역사를 모독하지 마라>(http://www.ilemonde.com)>


 1940년대 전시(戰時)체제 아래 일본은 강력한 국가 주도의 통제 사회였고, 이 안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은 총력전(總力戰)이라는 주장 아래 묻힐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해 가족을 부양하는 내용을 담은 저자의 현대판 <심청전> 주장은 그야말로 신파의 극치라 여겨진다. 이와 함께 저자는 정의기억연대에 의해 왜곡된(?) 위안부에 대한 이미지를 비판한다. <제국의 위안부>에서는 눈물짓고 미칠듯한 고통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을 조명하는 대신, 일본 군과의 로맨스 등을 그리며, 위안부 삶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본군의 동지'로서 '위안부', 제국의 일원으로서의 위안부 상(像)을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저자가 그려낸 '제국군'이자 '일본군의 동료'로서의 위안부 모습이 과연 진실이고, 이를 통해 전쟁을 여자로서 감내해야 했던 이들의 고통이 누그러질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오키나와 전투를 배경으로 한 <전장의 기억>의 내용으로 대신 답하고 싶다.


 소녀상이 저항하는 모습만 표현하는 이상, 일본옷을 입었던 일본이름의 '조선인 위안부'의 기억이 등장할 여지는 없다. 그들의 또 다른 생활과 기억, 일본 군인을 간호하고 사랑하고 함께 놀며 웃었던 기억을 가진 '위안부'는 그곳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곳에는 군인을 자신과 같은 운명에 떨어진 가엾은 존재로 간주하고 동정했던 위안부도 물론 없다... '위안부'들은 그렇게 국가와 남성에 의한 피해자이면서 국가에 의해 '애국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던 이들이기도 했다. 그것은 분명 국가의 부조리한 책략이었지만, 외국에서 서러운 음지생활을 하던 그들에게는 그 역할은 자신에 대한 긍지가 되어 살아가는 힘이 되었을 수 있다. 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제2판 34곳 삭제판>, p31


 제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류큐는 식민지 지배를 받은 타이완이나 조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1898년에 이미 징병제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타이완이나 조선과 비교할 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가 말했듯이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은 근대국가라는 범주를 생각할 때 중요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p29)... 제도적인 동질화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일본인'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것, 바꿔 말해서 자기 마음속에 '일본인'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떠올리고 거기에 자신을 동일화시켜 나가는 과정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이 책에서 오키나와 전투를 거론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p29)... 대동아전쟁에 패배하고 오키나와 출신의 황군 병사는 전사함으로써, 결국 '일본인'이 되려고 하던 과정은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죽음도 아니며 '초(超)국가주의'의 죽음도 아니다. 무엇보다 생활의 죽음이며 부엌의 죽임인 것이다. 생활은 8월 15일로 단절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연속성은 생활의 죽음 가운데서부터 도출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기억 속에 전장 동원을 아로새긴 생활의 죽음은 과연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을까?_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p30 


 <전장의 기억>에서 저자 도미야마 이치로는 오키나와 사람이 된 류쿠인들이 진정한 일본인이 될 희망을 품고 참전한 태평양전쟁에서 자신들의 꿈과 함께 일상의 죽음도 함께 맞이했음을 말한다. 일본 내륙으로 직접 편입되어 직할령이 된 제1제국 신민이 그런 감정을 느꼈을 때, 차별받던 2등 신민 조선인들이 과연 제국의 동질성에 대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었을까? 결국 박유하가 그리고자 했던 잔다르크와 같은(?) 이미지의 위안부 상은 허상임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런 세부적인 사항에 담긴 왜곡과 거짓을 둘째로 놓더라도, <제국의 위안부> 안의 논리 자체가 모순을 가지면서 주장의 거짓임을 입증한다. 저자는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위안부의 일본 배상 책임과 관련해서는 '구조적 강제성'과 '현실적 강제성'의 논리를 통해 현실의 강제성 주체인 '민간(조선인을 포함한)'책임을 강조하며 일본에 면죄부를 주고 있지만, '제국주의'문제에서는 '현실의 강제성'과 '구조적 강제성'에 대한 책임을 묻는 문제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즉, 일본의 침략 문제에 있어서는 현실의 강제성 주체인 '일본'의 책임을 묻는 대신 '제국주의'라는 '구조적 강제성'의 주체인 서구 제국주의에게 책임을 돌린다는 점은 논리적 모순이라 지적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강자로서의 '제국'에 의해 상처를 입었던 우리가 구 제국(일본)의 죄를 다른 제국(네덜란드)와 연대해 또 다른 제국(미국, 영국 등 유럽)에게 물어온 방식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p297)... 문제는 네덜란드 여성과 '조선인 위안부' 역시 '적'의 관계였다는 점이다... 일본이 제국주의로 나선 것은 서양을 흉내낸 일이기도 하다. 일본의 대상은 아시아였고, 말하자면 아시아의 불행은 서양의 제국주의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그건 결과적으로 아시아의 침략이 되고 말았지만, 일본의 전쟁의 명분은 서양 제국으로부터의 '아시아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본은 졌고, 전후 일본과 한국은 함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적 냉전구조 속에 안주하게 된다.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제2판 34곳 삭제판>, p298


 결국, <제국의 위안부> 저자는 민족 문제와 분리할 수 없는 위안부 문제에서 민족 문제를 분리하고, 시장 경제가 성립할 수 없는 사회에서 계약의 자유를 언급하며, 구조적 강제성과 현실적 강제성의 논리를 통해 이를 일본 제국 내 문제로 물타기를 했다. 그렇지만, 한일 병합 조약(1910)이라는 제도적 강제에도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될 수 없었고, 때문에 '제국의 위안부'가 아닌 우군으로 포장된 '인종 청소 대상이자 피해자'였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가 <제국의 위안부>, <반일종족주의>에 인용되어 혐한 서적과 램지어 교수 같은 이들의 논리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비통한 마음을 버릴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논조의 글을 통해 진정한 '화해'를 이루고 싶었다는 저자의 글은 한홍구 교수의 답으로 대신하며 긴 글을 갈무리한다...


PS.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된 페이퍼 리뷰를 마무리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개념 사전의 주제는 <제국주의>와 <전쟁>으로 정해졌다...


<화해를 위해서>(2005)라는 책으로부터 8년이 지나도록, 그때 바랐던 "생산적인 논의"는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한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일관계를 둘러싼 상황은 그동안 기본적으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안의 견고한 기억들"에 "화해를 지향하는 균열"을 내보려 했던 8년 전의 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제2판 34곳 삭제판>,서문 - 다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 -, p5


 제(한홍구)가 박유하씨가 말하는 '화해'를 비판하는 근거 중 하나는, 제가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몫은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일 뿐이고, 화해란 베트남 사람들이 우리의 사죄를 받아들인 다음에 베트남 사람들이 먼저 제안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_한홍구, <자국의 가해 역사를 직시한다> <Q&A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 


위안부의 불행을 만든 것은 민족 요인보다도 먼저, 가난과 남성우월주의적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였다. 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제2판 34곳 삭제판>,서문 - 다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 -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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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3-28 11:3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항상 마음속으로만 댓글을 남기는데 오늘은 글로 남기고 싶어요.
언제나 매번 겨울호랑이님의 페이퍼는 감탄의 연속입니다.
그때 그때의 이슈와 잊지 말아야할 것들을 상기시켜주시니 많이 배우고 저를 각성시키고 있습니다.
매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니까요.~~
다만 표현을 다 하지 못하는거랍니다 ㅎㅎ
힘들었고 솔직히 보기 싫었지만 그래도 영화 ‘귀향‘을 보러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항상 일깨워주셔서 감사해요^^

겨울호랑이 2021-03-28 12:16   좋아요 5 | URL
감사합니다. 저 또한 현재와 연관된 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돌이켜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각의 강을 건너가 버리는 한 사람이라 그렇게 되지 않으려 부족하나마 노력해 봅니다. 이런 작은 노력에 페넬로페님께서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미미 2021-03-28 12: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두 책<제국의 위안부>와<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는다>를 함께 읽어보고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한홍구교수의 말이 슬프고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겨울호랑이 2021-03-28 12:26   좋아요 5 | URL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위안부 문제의 완성은 베트남 전쟁에서 이뤄진, 전쟁의 가해자로서 우리의 사과와 반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두 문제를 함께 국제사회에 제기하는 노력을 기울일 때 함께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국의 위안부>,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는다>를 함께 읽는 것이 즐거운 독서 경험은 되지 않겠지만, 역사의 배심원으로서 양 측의 주장을 듣는 유익한 경험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미미님, 유익한 독서 되세요! ^^:)

다다 2021-03-28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겨울호랑이님

당시 위안부가 된 가난한 여성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일본과 조선 민족이 무슨 큰 차이가 있었겠습니까? 둘 다 공범처럼 느끼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가난한 여성들이 위안부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조선인 민간업자의 역할이 큰 것이 사실이었고 조선인 누구 하나 구출을 시도하거나 그들에게 도움을 줬다고 한 얘길 들어본 적이 없네요. 오히려 가난에 등 떠밀려야 했으며 아비가 업자에게 딸을 팔아 넘기기도 했죠. 중요한 건, 생존자의 경험도 이처럼 동일하지 않은데, 수만명으로 추정되는 피해자들의 경험으로 확장했을 때 과연 그것을 단순히 ˝민족문제˝ 하나로 정형화할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해방이 되고 50년이 다 되도록 위안부 당사자의 용기있는 최초 발화가 있기까지도 피해자는 침묵과 억압의 세월을 감당해야 했죠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의 불행을 만든 것은 민족 요인보다도 먼저, 가난과 남성우월주의적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였다.˝라고 말씀하신 박유하 선생님의 입장은 충분히 동의가 됩니다

오히려, 정대협(현 정의기억연대)과 같은 위안부 지원단체가 초기에 드러난 증언과 기억을 선별하고 예외시켜 간 운동노선과 방식 덕분에 대다수 국민들의 위안부에 대한 인식과 상이 더 확장되고 풍성해지기보다 소녀상과 영화 귀향 등의 이미지로 굳어지고 쪼그라들었죠. 박유하 선생님은 그들이 예외시킨 기억과 목소리를 다시 복원했고, 정대협식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과 다른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나눔의 집 관계자 등등에 의해 고발당해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저는 애초에 위안부 지원운동이 피해당사자의 모든 경험들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국가주의-가부장주의라는 구조하에 벌어진 여성의 수난사라는 관점에서 그 사회적 맥락을 꼼꼼하게 추적하고 규명해나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맥락 위에서 전쟁과 냉전, 제국의 여성동원과 착취라는 걸 함께 다루고, 그래야 해방 이후에도 착취당하는 여성들의 삶까지 자연스럽게 들여다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상당수는 해방 이후에도 냉전체제하에서 다시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하여 재착취당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요. 대체 누굴 위한 해방이었을까요?

그런데 오로지 민족주의라는 틀 속에 갇혀 소모적인 법적 논란만 벌이다가 피해자들의 경험들도 다 축소시키고 그렇다고 보상문제에 유의미한 성과를 낸 것도 아니고 제대로된 진상규명에도 실패하고, 그들의 운동노선과 방식을 비판하면 토착왜구니 매국노니 전국민적 마녀사냥이나 벌이는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MIO 2021-03-28 16:18   좋아요 2 | URL
정대협이 민족주의 관점에서만 문제를 읽었다면 이나영 같은 사람은 관심도 안 뒀겠죠. 여성주의 조류가 주가 되어 낸 책이 몇 권이고 세미나가 몇 번인데요. 다만 박유하가 접근하는 방식은 다양한 변인을 생각지도 않고 단순히 자신이 말하는 틀에 환원해 넣으려고 하는 것인데 어째 댓글 내용에서 비슷한 느낌이 읽히네요. “예외시킨 기억과 목소리”를 복원한 건 증언록 등을 통한 정대협이지 대단히 지엽적으로 맥락에서 벗어난 근거 부족 식민주의자들에게 유리한 사료를 일본 리버럴 입장에 맞춰 재가공하고 있는 게 박유하이고, 또한 그 거울상이 램지어입니다. 이상한 말씀으로 호도하려 하시는데 전 세계 여성학, 한국학계에서 받는 취급이 부당하다 느끼시면 멀쩡한 사료로 학술적인 주장을 부디 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는 정대협에 비판적이어서 받는 억압과 부당함이 아니라 오로지 박유하의 학술적 성과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하시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MIO 2021-03-28 16:34   좋아요 2 | URL
역사학자는커녕 역사학 전공하는 대학생들한테도 논거로 처참하게 깨지는데 법적 억압이니 마녀사냥이니 하는 거 너무 안타깝습니다. 박유하 본인이 연구윤리를 해태한 사례의 귀감이 된다는 사실만은 잘 알겠습니다. 나츠메 소세키 연구도 이상한 분석틀이나 쓰다가 문학과 결이 맞지 않았는지 전공과도 무관한 식민시대를 통찰하니 뭐니 하고 계신데 제발 기본은 갖춰주실 하는 바람입니다. 헛소리를 해도 우에노 치즈코 정도로만 적어주세요. 그럼 법원까진 안 가겠죠. 정대협이 피해자들 목소리를 줄인다고 하시지만 반대로 정대협이 명백히 낸 성과에 대한 학술적 검토 없이(완전한 무시죠. 그냥 존재하는 것이니 들여다보기만 해도 어떤 층위가,관점이 옳고 그른지 쉽게 나올 일인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인지.) 연구방향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성과를 후려치기하고 있는 건 박유하입니다. 물론 그래봤자 바뀌는 게 전혀 없죠. 사실은 사실로서 존재하니깐. ‘보상문제’에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며 들고 나오는 게 일본 극우의 청구권 미비 시각과 일본 리버럴의 2000년대 아시아재단 설립인데 둘 다 진싱규명이나 재발방지, 법적 당위성, 피해자중심주의를 모두 벗어나 있음을 모르는지 매일같이 같은 말씀만 하시더군요.

다다 2021-03-28 17:21   좋아요 1 | URL
미오님처럼 주장하는 사람을 하두 많이 봐서 놀랍지도 않네요. 이나영 교수님이 페미니즘을 대표하시나요? 페미니즘 안에도 다양한 차이와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미오님께 묻고 싶습니다. 박유하 선생님이 간과하고 있다고 보신 ˝다양한 변인˝이 무엇인가요? 미오님 생각은 하나도 안 보이고 박유하 선생님 폄하하는 목소리만 가득하네요.

목소리를 증언록으로 만든 건 정대협 증언 기록팀 연구자들이 맞지만 이후 정대협의 활동은 증언록과 그 때의 문제의식과 달리 자신의 노선과 다른 생존자의 경험과 목소리를 억압하고, 생존자의 목소리와 상을 선별하고 납작하게 만들어온 게 사실입니다. 자기들 뜻에 따라오는 할머니들만 앞세워서 운동했던 게 사실입니다 거기에 반하는 당사자들은 철저히 외면했지요.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세요. 전체 위안부 피해자 중 극히 일부인 200여 생존자들조차 뜻과 생각이 다 다르다는 게 국민기금 사태때 여실히 드러났는데, 그 목소리들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고, 국민들은 사실 잘 모르죠. 지원단체의 목소리가 피해생존자 전체의 목소리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실정이죠.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렇게 말했죠.

˝하는 일이 답답해요. 할매들은 다 죽어가잖아. 그런데 모금을 받지 말라. 그것 받으면 더러운 돈이다. 화냥년이다. 이런 귀 거슬리는 소리만 하더라고...˝-석복순 할머니

˝할머니들을 꼭두각시처럼 앞장세워 눈이 오나 비가오나 매주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열고 있는 수요집회의 진정한 뜻이 무엇입니까 일본은 한일협정으로 이미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배상은 끝났다고 하고 한국정부나 매국노 김종필은 입을 다물고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들의 속셈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수요집회를 지속해야 정대협이라는 배가 항해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국내에 있는 위안부할머니들이 한결같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수요집회를 꺼려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다시는 우리를 앵벌이로 삼는 노름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 가지 실례로 97년 2월 27일 ‘정신대 문제 어디까지 왔나‘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윤정옥이라는 당신들의 대표가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아시아여성기금을 받는다면 자원해 나간 공창이 되는 것‘이라고 공개석상에서 떠들어 댔던 일. 그것이 인권회복을 위한 발언이었나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을 세치 혀로 조잘된 윤정옥 같은 사람이 대표로 있는 정대협은 분명 책임도 지지못할 인권유린을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몇 년만 젊어 거동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다도 윤정옥 이년의 입에 주리를 틀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아울러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창이라는 말까지 듣게 된 그 기금이 당신네들이 주는 돈입니까....당신들이 뭔데 공창 운운하며 우리를 두 번 울리는 것입니까.˝ -심미자 할머니

˝정대협의 수요 시위도 무엇을 위해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처음도 없고 끝도 없이 무조건 ‘사죄하라‘,‘배상하라‘고 하면서 집회 횟수만 채우면 된다는 식이에요. 회담이 있어도 단체 사람들끼리만 해요. 엄연히 피해자들이 있는데, 왜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용수 할머니

MIO 2021-03-28 17:28   좋아요 2 | URL
심미자 할머니는 윤미향이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식의 서술을 하신 그 분이군요. 더러운 일 다 하면서 돈 보지 않고 몇십 년 그 자리에 있는 게 부귀영화인지 아닌지 운동가들은 다 아는데 위안부 피해자 몇몇을 이용해서 운동을 흔들고자 하는 세력은 물론 알 턱이 없지요.

이나영뿐 아닙니다. 비단 한국의 사회학,여성학 교수들뿐이 아닌 전 세계 젠더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해 세계주의적 관점에서 여성운동을 해오기도 한 게 정대협이고 이나영뿐 아닌 한국의 다양한 사회학,한국학,여성학 교수들 그리고 연구자들이 힘을 모았습니다. 반면에 박유하 교수는 이우연 같은 사람 목소리에 수렴하고 있더군요. 왜 이런 문제를 꺾으려 하는지 이해가 어렵습니다. 물론 기금 받으시려거든 받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운동은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의 온전한 회복과 더불어 진상규명, 재발방지, 법적 책임 인정이 선행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할진데 한두 분이 그건 모르겠고 돈이라도 받고 잊고 갈래 하는 것에 운동의 조류의 방향은 다만 그게 아니다는 반응을 피해자들을 ‘억압하고 납작하게 만든다’는 식의 한심한 평론은 받아들이기 곤란할 듯하네요.

이용수 할머니께서 그 사태를 일으키고 결국 내놓으신 제안 이미 다 하고 있는 건데 본인 민주통합당 공탈과 대비되는 윤미향의 배지 때문이었을까요? 그 분이 말씀하신 모든 내용은 여성가족부,외교부,학계,대한변협뿐 아니라 특히 정의협에서 이미 성실히 이행하고 있는 내용이었는데 왜 결이 다른 듯이 말해 사태를 과장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자 했는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의문이 있죠.

그리고 왜 제 목소리는 없냐구요? 제 목소리따윈 이미 반영된 20년의 사회운동과 역사학적 성과가 그것을 반영하고 있고 이에 대한 반동적 성격으로 튀어 나온 게 박유하 글기 때문이죠. 저의 의견이 나올 겨를이 없어요. 연구의 무게란 그런 것입니다.

다다 2021-03-28 17:29   좋아요 1 | URL
사실은 사실로서 존재하니깐. ‘보상문제’에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며 들고 나오는 게 일본 극우의 청구권 미비 시각과 일본 리버럴의 2000년대 아시아재단 설립인데 둘 다 진싱규명이나 재발방지, 법적 당위성, 피해자중심주의를 모두 벗어나 있음을 모르는지 매일같이 같은 말씀만 하시더군요

->위안부 문제를 ‘여성문제‘로 공식화한 고노담화는 93년에 나옵니다. 읽어보셨는지요?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이 사안은 당시의 군의 관여한 상황에서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게 상처를 입힌 문제이다. 정부는 이 기회에 다시 그 출신지를 불문하고, 소위 종군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경험하고 심신이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

MIO 2021-03-28 17:33   좋아요 2 | URL
코노 관방의 전체적인 투는 좋았지만 그게 법제화나 이후의 정책방향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2008년, 2013년 아베나 그 바보 총리의 우매한 발언이 나와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하는 거 아닙니까? 유엔 인권위 리포트와 배상문제 논문만 수십 개를 읽었는데 겨우 들고 오는 게 최근 망언 일삼는 코노 타로 아버지의 유명한 성명이라니 기가 막힐 따름이네요. 박유하 교수는 역사학도 모르고 법도 잘 모르는데 왜 그 두 분야가 얽힌 위안부 문제에 그렇게 연구윤리도 지키지 않은 채 당당하게 처신하는지 하늘도 모를 일이네요.

다다 2021-03-28 17:48   좋아요 2 | URL
미오님 피해자중심주의 운운하시는데, 피해자가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지원단체 역사성과 무게 운운하면서 일부를 전체처럼 과장하지 말라시는데, 정작 누가 당사자를 우롱하나요? 운동은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고 하셨는데, 오만함 쩌는 말씀이네요. 피해자 지/원/단/체는 애초에 왜 생겼을까요? 그 성립취지와 성격을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NL의 대의와 이념에 피해자들을 꾸겨넣어 합리화하기 위해 생긴 게 아니라면요.

글구 정부의 ‘공식입장‘은 정치인 개개인들이 망언한다고 바뀌는 게 아니에요. 가령 518에 관한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이 박근혜 정부에서 정부관료 개개인이 불만을 내비치며 망언한다고 뒤바뀌지 않아요. 아베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노담화-무라야마담화를 뒤엎지 못합니다. 일본이 무슨 아베 독재국가입니까

저는 윤미향 의원을 미오님처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안부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정대협과 다른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가 학문적 토론과 대화의 방향이 아니라 고발사태로 번진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것입니다.

미미 2021-03-28 17:51   좋아요 3 | URL
안녕하세요 다다님

각자가 같은 책을 읽고도 느끼는 바가 제각각인데
다다님도 주장하시는 내용을
다다님이 읽으신 책을 토대로 다다님의 페이퍼나 리뷰로 주장하시는 게 어떨까 싶네요.

다다 2021-03-28 18:29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미미님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에 페이퍼를 써 보도록 할게요.

MIO 2021-03-28 19:09   좋아요 2 | URL
˝운운˝에 황당하네요. 박유하 씨인가요? 역사학 배우는 학부생들한테도 맥도 못 추는 분을 왜 이렇게 뭔가 있는 것처럼 포장하시는지. 황당해서 결국 폰 대신 키보드 잡고 길게 적습니다. 헛소리에 달아드리는 건 이게 마지막입니다.

1) 피해자가 저렇게 말씀하는데 과장하지 말라고 했다고요? 피해자 일부가 원하는 방향이 법치와 인권 증진의 방향과 다르다면 당사자성을 무한정 주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게 단순히 정의연, 정대협의 결론으로 읽히시면 진짜 사회운동 아무것도 모르시는 거고요. 피해자 지원단체는 지원만 하는 게 아니에요. 단순 금전적 지원만이 목적이면 아시아기금 당연스레 받았겠지요. 그렇게 한 건 끝났다는 셈 치면 되나요? 역사학계, 여성학계에서 그걸 비판하는 이유가 뭡니까? 해결이 된 게 없으니까 그렇잖아요. 그거 받으면 뭔가 해결되는 줄 아시는 분들 많아서 좀 웃기네요. 그렇게라도 해야 기반이 깔린다는 생각 또한 같습니다. 일본 리버럴도 비현실적 주장하는 데에 이골이 났지만, 이건 더 하네요. 국제법적 기저에 대해 완전히 모르고 계시니 그런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는 합니다만.

2) 정부의 ‘공식입장‘은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이건 ICJ 판결까지 원용할 문제도 아니고 한심한 거예요. 심지어 국제법상 조약에 준한다고도 보는 2015년 ˝합의˝도 쉽게 뒤집히는데 무슨 효력을 따집니까^^ 너무 모르셔서 할말 잃음. 다다님은 국제법에 관해 전혀 문외한이시다 보니 공식 입장이 망언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둥 말씀하시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조약인지 신사협정인지 해석할 때 정부요인의 발언, 일관성, 사료, 협상과정, 준비문서 등 VCLT에 근거해 하나하나 다 따집니다. 게다가 코노-무라야마 담화의 실질적인 정책 반영이 전혀 되고 있지 않아요. 그냥 문서와 지나간 역사만 남은 것입니다. 그때의 기억이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될지언정 그게 일본 ˝정부˝가 지금 하는 국가행위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겁니다.

3) 그리고 아베 독재냐고 물으시는데 정치학자들은 일본을 독재 국가로는 보지 않지만 완전한 민주국가로도 보지 않죠. 민주당, 사회당, 자유민주당의 역학관계를 분석하는 국내정치 전공 연구자들은 더더욱 그리 판단하고요. 단적으로 RSF index라도 확인하시면 그런 황당무계한 질문은 하지 않으실 듯합니다. 이야기하다 보면 대충 상대가 어느 정도 알고 계신지 파악이 가능한데 아쉽지만 좀.. 그렇네요. 피해자 운운하시며 이상한 말씀 이제 그만하시면 좋겠습니다.

4) 죄송하지만 학술적 가치가 없는 책을 들고 와서 논문으로 말해야 한다느니 학문적 토론과 대화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느니 하는 건 좀 그렇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박유하 씨의 말은 이미, 그것도 최근 20년 동안은 더욱이, 연구를 통해 실증되었던 것으로 충분히 반박이 되었고요, 사실 반박할 것까지 없습니다. 어디 이상한 신문사 자유게시판에 자주 올라오는 영구기관 된다는 헛소리에 학계가 굳이 반응하나요. 이에 반박하는 글을 또 내면 중복된 연구잉 뿐인걸요. 이미 있는 연구인데. 그러니 학부생들이 그거 읽고 박유하 교수 비판을 하죠. 거기에 대답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학문적 대화.. 멀쩡한 사료와 사실관계를 1차적으로 사용하셔서 전공자에 준하는 연구서를 가져오세요. 그래야 김부자 교수 선에서 안 끝나죠. 학술적 의미가 전혀 없으니 피해자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이고 명예훼손 혐의를 받으니 법적 판단을 구하게 되는 겁니다. 학술서인 척 하지 마세요. 그에 맞는 평가를 받는 거잖아요. 주석 쓰고 형식 맞추면 다 연구인가요. 체리피킹이 램지어에 뒤지지 않는데 대체 어떤 평가를 기대하시는 거예요.

5) NL 드립에 좀 웃었네요. 정의연 정대협이 NL의 표상이라고 보는 시각은 정말 박유하 같은 분들이 세상을 읽어내는 방식과 너무 유사해서 웃기고, 이러한 단체들이 사적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그런다는 식이라 또 웃기고, 한편으로는 모든 문제를 민족주의로 환원한다고 악마화하는 듯해서 또 웃기네요. 이런 분들이 들고 오는 ˝화해˝가 피해자 분들과 완연히 동떨어진 것임을 피해자 분들 또한 잘 알고 계십니다. 다다님께서 말씀하신 논리는 여기에 맞겠군요. 이런 문제는 박유하 이우연 류석춘 포함 일부 이상한 사람들이 망언한다고 역사가 뒤바뀌지 않아요. 묵묵히 갑니다.

다다 2021-03-28 20:17   좋아요 1 | URL
길게 썼지만 지웁니다. 학계 좋아하시고 많이 배우신 미오님, 앞으로 들러 많이 배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덧)앞으로는 박유하 선생님 책 직접 읽어보시고 말씀하세요. 안 읽었다는 거 티나요 ^^

겨울호랑이 2021-03-28 22:00   좋아요 3 | URL
안녕하세요? 다다님. 오후에 가족 모임이 있어 다녀와서 보니 제 서재가 말 그대로 ‘주전장‘이 되버렸네요.^^:) 다다님께서 말씀하신 부분과 관련하여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MIO님께서 제 이상으로 정리를 잘 해주셨기에 부언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다만, MIO님께서 언급하시지 않은 <제국의 위안부> 내의 한계점, 문제점에 대해 짚고자 합니다.

다다님께서는 ‘국가주의-가부장주의라는 구조의 수난사 관점‘에서 접근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위안소 설치‘라는 문제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벌어진 ‘태평양 전쟁‘의 수행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주체는 ‘일본 제국주의‘가 될 것이며 그 수뇌는 일왕과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 군부세력이 되겠지요. 이른바 ‘천황제‘라는 거대한 가부장적 제국의 구조에서 조선인들은 하부에 위치했음도 분명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위안부>안에서 저자는 제국주의, 가부장제에 대한 구조적 비판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구조적 비판 대신 ‘현실적‘ 주동자라는 이름 하에 ‘조선인 남자‘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고 있습니다. ‘제국‘이라는 거대한 가부장제 시스템의 정점에 선 ‘일본인 남자‘에 대한 비판을 저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보지 못했습니다.이는 박유하 자신이 말하는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의 끝을 감히 일왕에게까지 밀어 붙이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또한, 제가 본문에서 언급하다시피 그는 과거 ‘적‘이었던 ‘네덜란드‘ 위안부와 ‘조선‘의 위안부가 같이 서는 것에서도 불쾌함을 표시합니다. 이 역시 ‘제국‘의 틀안에서만 가능한 생각이겠지요. 그는 끝까지 ‘제국‘이라는 구조에 대한 비판 대신 ‘일제에 협력한 조선인 남자‘를 가해자로 지목합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을사늑약 때 늑약을 강제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 비판해서는 안되고, 을사오적만 욕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조선인 남자‘에 대해서도 말을 하자면, 나라를 빼앗기는 문제에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있을까요? 이는 마치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도둑은 잘못이 없고,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은 가족이 범인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런지요?

이런 이유로 저는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 제국주의에 면죄부를 주는 논리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볼 것을 말하지만, 이 비판을 끌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민족의 관점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모든 문제에서 ‘일본‘을 지워버리는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는 제국의 변호인 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편, 안신권 소장 문제는 최종 법적 판단이 나올 때까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그가 파행 운영으로 고발당했다는 사실이 위안부의 진실과는 연관성 없는 문제라 여겨지네요... 다다님, 의견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MIO 2021-03-28 21:12   좋아요 2 | URL
다다님 티나기는요. 저는 박유하 씨 저서 『화해의 위안부』 포함 번역서나 언론 기고글도 상당수 읽었고 「역사문제연구」지에서 수준 낮은 논쟁을 한 것까지 아낌없이 시간을 낭비해온 사람입니다. 제 주 연구분야인데 아무리 졸저라도 사실관계 이상하게 꺾은 게 몇 개나 되는지는 세어 봐야죠. 다다님께서는 앞으로는 공부하셔서 저는 비꼬되 피해자들 우롱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어디에 몸담고 있는지 끝까지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겨울호랑이님께서 워낙 글도 그렇고 댓글로 잘 정리를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저도 잘 들어오지는 않는데 우연히 글이 보였고 이렇게까지 쓸데없는 글이 길어질 줄은 몰랐네요. 지저분하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호랑이님 건강하시고 편안한 저녁 되세요.

다다 2021-03-28 22:20   좋아요 1 | URL
다다님께서는 ‘국가주의-가부장주의라는 구조의 수난사 관점‘에서 접근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접근해 보겠습니다. ‘위안소 설치‘라는 문제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벌어진 ‘태평양 전쟁‘의 수행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주체는 ‘일본 제국주의‘가 될 것이며 그 수뇌는 일왕과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 군부세력이 되겠지요. 이른바 ‘천황제‘라는 거대한 가부장적 제국의 구조에서 조선인들은 하부에 위치했음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위안부>안에서 저자는 제국주의, 가부장제에 대한 구조적 비판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구조적 비판 대신 ‘현실적‘ 주동자라는 이름 하에 ‘조선인 남자‘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고 있습니다.(일본인 남자에 대한 비판은 저는 책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박유하는 자신이 말하는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의 끝을 감히 일왕에게까지 밀어 붙이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국의 위안부 부제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입니다. 식민지 지배를 모르거나 부정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구조적 비판 대신 조선인 업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박유하 선생님은 이전의 책 <화해를 위해서> 라는 책에서 ˝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그들이 수입을 얻었는가 아닌가, 즉 ‘공창‘인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위안소라는 장소가 ‘국가‘의 묵인-공인하에 만들어지고 운영된 장소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일본의 ‘국가‘로서의 보상이 필요한 이유˝라고 이미 쓰고 있습니다. 또한 ˝제국의 위안부˝ 책 중 <가해자는 누구인가>에서 ˝ 물론 그러한 ‘국민동원‘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국민총동원‘이라는 형태로 전 국민을 전쟁협력자로 만들었던 일본의 파시즘과 제국주의다. 하지만 ‘위안부‘라는 존재 자체는 결코 일본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운동은 ‘위안부‘문제의 원인을 단순히 근대 이후의 일본 제국주의에서만 찾으려 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일본 책임을 면피하자고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였던 영국과 미국, 독일도 위안소를 운영했고, 심지어 해방 후 한국에서도 위안소가 운영되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특수성만을 부각하고 민족 단위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는 일은 그 단위에 포함되지 않는 또 다른 피해자와 가해자를 은폐하고, 민족 내부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제대로 보는 일을 방해하게 됩니다.

또한, 겨울호랑이님은 모든 책임을 조선인 남자에게 뒤집어 씌운다고 하셨지만, 전 조선인 남자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읽었습니다.

또한, 제가 본문에서 언급하다시피 그는 과거 ‘적‘이었던 ‘네덜란드‘ 위안부와 ‘조선‘의 위안부가 같이 서는 것에서도 불쾌함을 표시합니다. 이 역시 ‘제국‘의 틀안에서만 가능한 생각이겠지요. 그는 끝까지 ‘제국‘이라는 구조에 대한 비판 대신 ‘일제에 협력한 조선인 남자‘를 가해자로 지목합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을사늑약 때 늑약을 강제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 비판해서는 안되고, 을사오적만 욕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타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조선인 남자‘에 대해서도 말을 하자면, 나라를 빼앗기는 문제에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있을까요? 이는 마치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도둑은 잘못이 없고,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은 가족이 범인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런지요?

-> 적이었던 네델란드 위안부와 조선의 위안부가 같이 서는 것에 대해 불쾌함을 표한다고 하셨는데, 어디서 그런 느낌을 받으신 건지, 제가 읽기엔 네델란드 위안부와 조선의 위안부의 위치와 경험이 각기 다르다고 읽었는데요. 또한 나라를 빼앗기는 문제에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있을까라고 물으셨지만 지배계급과 수탈당하는 민중의 입장이 꼭 같을까요? 또한 가부장제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경험이 동일할까요?

이런 이유로 저는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 제국주의에 면죄부를 주는 논리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 아, 이건 정말 논리적 비약, 보이지 않는 의도 추정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기존의 역사관으로 다소 낯선 사실과 주장에 대해 섣불리 재단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지식인을 말하다 [제국의 위안부]법정에서 1460일 이라는 책도 시간이 되시면 함께 읽어보시길 간청드립니다

다다 2021-03-28 22:30   좋아요 0 | URL
미오님) 말씀 가려가며 하세요. 피해자를 우롱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니요. 박유하 선생님 사태는 박유하 선생님과 피해생존자 할머니 분들간의 싸움이 아닙니다. 박유하 선생님과 기존 지원단체/연구자와의 싸움이지요.

겨울호랑이 2021-03-28 23:17   좋아요 1 | URL
제가 올린 글까지 올리게 되면 글이 길어지게 될 것 같아 다다님 글 중 필요 부분만 올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박유하 선생님은 이전의 책 <화해를 위해서> 라는 책에서 ˝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그들이 수입을 얻었는가 아닌가, 즉 ‘공창‘인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위안소라는 장소가 ‘국가‘의 묵인-공인하에 만들어지고 운영된 장소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일본의 ‘국가‘로서의 보상이 필요한 이유˝라고 이미 쓰고 있습니다. ...

-> 정확하게 저는 다다님과 같은 지점에서 박유하를 비판합니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위안소‘라는 장소의 성격이 아니라, 위안소에 들어가야 하는 이들이 국가 폭력에 의해 강제로 들어가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박유하는 이들이 이미 ‘창녀‘라는 전제 하에 자신의 논리를 펴고, 그 이전에 자발적으로 제국을 위해 자원했다는 전제 위에 성립하는 논의입니다. 위안부가 강제로 연행된 피해자들이라는 인식은 이같은 전제에 최소한도 담겨있질 않습니다.

또한, 겨울호랑이님은 모든 책임을 조선인 남자에게 뒤집어 씌운다고 하셨지만, 전 조선인 남자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읽었습니다.

-> 그럴습니다. 조선인 남자도 위안부 문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심지어 전후에 태어난 저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을 느낍니다. 아니, 더 나아가 저는 다다님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책임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의 피해에 대해 우리 사회는 제대로 알고 아픔을 보듬지 못했으니까요. 그렇지만, 돈 몇 푼 선심쓰듯 던져주고 ‘난 책임없다‘라고 외치는 일본 극주주의자들의 망언과 행태를 보면서 그들을 비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다님은 조선인 남자들이 위안부로 끌려나가는 여인들을 구하지 못했음을 비난합니다. 그렇다면, 강제징용 당해 일본군으로 끌려나간 아들을 구하지 못한 어머니들도 비난을 받아야 합니까?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을 빼앗겨야 하는 부모의 심정은 없고, 오로지 자식을 팔아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가족의 모습이 과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모습입니까? 이 점에서 박유하는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적이었던 네델란드 위안부와 조선의 위안부가 같이 서는 것에 대해 불쾌함을 표한다고 하셨는데, 어디서 그런 느낌을 받으신 건지, 제가 읽기엔 네델란드 위안부와 조선의 위안부의 위치와 경험이 각기 다르다고 읽었는데요.

-> 위안부 문제가 가부장제만의 문제라면, 남성의 폭력에 짓밟힌 여성만의 문제라면 ‘네덜란드‘나 ‘조선‘과 같은 국적이 문제가 될까요? 다같이 남성의 위력에 의해 짓밟힌 가부장제의 희생자일텐데요. 거대한 시스템의 문제라고 지적한 박유하의 관점에서도 이는 모순입니다.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강조한 마르크스의 주장에서 잘 드러납니다만, 체제 혁파에서 ‘국가‘라는 전제를 넘지 못한 박유하의 논리는 ‘좌파‘의 방법론을 사용하면서 ‘우파‘의 전제를 사용하기에 그 한계와 모순이 드러난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이 점에서 위안부 문제에서 ‘민족‘ 관점을 제외할 것이 아니라, 적극 포함해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음을 박유하의 논리가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다님 생각에 위와 같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덧붙여 추천하신 책도 담아가겠습니다. 다다님, 의견을 들려주시고 책을 추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다 2021-03-28 23:20   좋아요 1 | URL

겨울 호랑이님, 마지막으로 답글 답니다.

강제로 연행된 피해자를 박유하 선생님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창녀라는 전제 하에 논리를 펴고 자발적으로 제국에 자원했다는 전제 위에 성립하는 논의라고 하셨는데, 그 어떤 말도 박유하 선생님은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식 자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발적 매춘부˝라는 네이밍은 기존 지원단체 관련자 및 일부 연구자들이 고발 전후로 그들이 악의적으로 왜곡해서 만든 논리입니다.

일본군에 의한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징집이 아닌 경우, 즉 협박과 유인, 취업사기 등의 기망행위 등 위법적인 수법으로 피해자를 모집한 다음 상시적 감시 또는 감금상태를 유지하면서 일을 시키고 피해자로 하여금 맡은 일의 선택과 맡은 일에서 벗어날 자유를 박탈한 상태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강제연행˝에 대하여 박유하 선생님은 ˝구조적 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직접적/물리적인 강제력을 행사하여 징집하는 강제동원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죠.

설령, 매춘부라면 피해자가 아닙니까? 도리어 묻고 싶네요.


˝그럴습니다. 조선인 남자도 위안부 문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심지어 전후에 태어난 저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을 느낍니다. 아니, 더 나아가 저는 다다님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책임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의 피해에 대해 우리 사회는 제대로 알고 아픔을 보듬지 못했으니까요. 그렇지만, 돈 몇 푼 선심쓰듯 던져주고 ‘난 책임없다‘라고 외치는 일본 극주주의자들의 망언과 행태를 보면서 그들을 비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다님은 조선인 남자들이 위안부로 끌려나가는 여인들을 구하지 못했음을 비난합니다. 그렇다면, 강제징용 당해 일본군으로 끌려나간 아들을 구하지 못한 어머니들도 비난을 받아야 합니까?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을 빼앗겨야 하는 부모의 심정은 없고, 오로지 자식을 팔아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가족의 모습이 과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모습입니까? 이 점에서 박유하는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네 맞습니다. 저도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망언과 행태를 비판합니다. ‘위안부로 끌려나가는‘ 이라고 표현 하셨는데, 위안부 증언집을 다시 읽어보시길 희망합니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정대협이 위안부의 목소리와 상을 납작하게 만들었다고 제가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와 강제 징용 문제를 같이 섞어버리면 곤란합니다. 자식을 팔아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다다 수정: 생존을 구가하는) 가족은 일제뿐 아니라 해방 이후 현대 한국 사회 일반에도 흔히 보이는 가부장제의 문제였습니다. 가난한 여공들의 삶과 몸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했던 여성들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착취하며 사고 있는가라는 오늘날의 반성으로 연결되어야 그런 아픈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아베가 무릎꾾고 사죄하고 법적 책임과 배상을 한다 하더라도 말이죠. ​

기존 연구서나 내용의 주장을 반복하지 않거나 그것과 다른 문제의식에 기초해서 책을 서술했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섣불리 매도하는 것은 한 학자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넘는 폭력입니다.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하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우기면서 한 개인을 이지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발, <제국의 위안부>이후의 박유하 선생님 책도 읽어주시길 간청드립니다. 박유하 선생님 책은 이영훈 교수의 <반일종족주의>나 램지어 교수의 입장과 결이 다른 책입니다.

댓글창 어지럽혀서 죄송합니다. 겨울호랑이님 미오님 좋은 밤 되세요 :)

겨울호랑이 2021-03-28 23:53   좋아요 2 | URL
다다님께서 남겨 주신 글이 제 서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와 다른 생각을 하시지만, 그래도 자신의 생각을 펼쳐주셨으니까요. 비록 제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그 점 감사드립니다. 다다님께서 마지막 답글이라고 하셨으니, 제 생각보다는 제가 이해하기 힘든 <제국의 위안부> 속 글을 올립니다. 이 글 속에서 다양한 위안부의 상을 봐야한다는 주장과는 달리 편집되어 만들어진 소위 ‘가라유키상의 후예‘로 정형화된 위안부의 모습 속에서 저는 피해자 위안부의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본군과 위안부의 관계를 회사원 부부로 비유한 아래 글에서 친일 작가 모윤숙의 <어린 날개>를 떠올리며 전율을 했습니다만, 이같은 인식이 담긴 <제국의 위안부> 안에서 강제 징용의 아픔을 발견할 수 있다면 제 인식과 그 인식의 틈은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주둔 부대의 일원‘이자 ‘부인 같은 느낌‘이었다는 위안부들. 사실은 이것이 조선인 위안부에게 요구된 역할이었다. 남자들로만 구성된 군대에 투입되어, 회사에서 일하는 남성을 여성이 집에서 일하며 다시 회사로 나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역할을 맡았던 것처럼, 군인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거기에 필요한 갖가지 보조작업을 하도록 동원된 것이 위안부였다.(p57)... 국가가 일본인을 비롯한 ‘제국의 위안부‘에게 맡긴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남자들로만 구성된 군대에 투입성적 착취를 당하면서도 죽음을 앞둔 군인을 ‘후방의 인간‘을 대표하여 ‘전방‘에서 ‘위안‘하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역할. 말하자면 ‘위안부‘에게는 신체적 ‘위안‘뿐 아니라 정신적 ‘위안‘까지도 요구되고 있었다.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p61


다다 2021-03-28 23:53   좋아요 1 | URL
겨울 호랑이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고정되고 정형화된 피해자상은 없다는 말씀 드립니다. 이미 읽으셨을지 모르겠으나 <김지은입니다>도 추천드립니다.

좋은 밤 되세요 :)

겨울호랑이 2021-03-28 23:54   좋아요 1 | URL
다다님, 좋은 밤 되세요 ^^:)

다다 2021-03-28 1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덧붙여, 박유하 선생님 고발을 주도한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은 지금 피해생존자 후원금 횡령과 사기 혐의로 고발당해 나눔의 집에서 직위해제된 상태죠. 나눔의 집에 계신 몇분의 할머니들에게 ˝이거 보세요. 박유하가 할머니들을 매춘부라고 했대요~일본군과 동지라고 했대요~˝하며 충격을 던져 놓고 법률자문 변호사에게는 ˝할머니들이 참 고통스러워하니 법적 대응을 준비해 달라˝고 제안하며 소송을 강행시킨 안신권 소장은 정말 치졸하기 짝이 없습니다. 안신권 소장 말대로 할머니들이 직접 책을 읽기 힘든 상황이었다면 오독의 가능성을 가지고 저자가 직접 해명 할 기회를 갖거나 함께 대화할 기회를 충분히 가져야지, 그런 중재조차 하지 않고 법적 고발부터 한 건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3-28 17: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위안부 문제가 네 탓(일본)인지 내 탓(우리나라)인지 이분법만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사안이 아닐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3-28 20:32   좋아요 4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한 인간의 인권이 무참하게 짓밟힌 수많은 사건의 귀책사유를 어느 누구의 일방의 잘못으로 말하기는 분명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할머니들 앞에서는 모두가 죄송할 따름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작은 않은 이(또는 국가)가 이를 은폐하고, 사과 후에도 곧바로 망언이 이어지며 이를 뒤엎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n번 사과해도 n+1번 이어지는 망언이 이어져도 이에 대해 재발 방지 노력이 이어지지 않는 현실은 독일의 나치 청산과 비교될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문화정치‘  역시  기만술책이었다면,  더 큰  성과는 따로 있었다. 독립운동 진영의 인식과 사고와 태세를 크게 바꿔놓으면서 크나큰 자신감을 갖게 하고 정대한 노선으로 나아가게 한 것. 그 이상으로 조선 민중 속의 수많은 3·1의 자아들이 새로운 자각과 결기를 통해 의열투쟁의 주체로, 폭력의 담지자로 기꺼이 나서게끔 한 것. 그것이 3·1운동의 실질적 성과이자 숨겨진 성공이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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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은 단순 만세시위로 그친 것이 아니고, 초기부터 서북 지방의 여러 중소도시와 농산촌 지역에서 그랬듯이, 서울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지방에서 '전민항쟁'처럼 되어간 것이다. 3.1운동 종식 후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독립운동 진영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폭력노선과 그 방략에 의탁하는 정도가 눈에 띌 만큼 커진 것이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37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에서 가장 크게 눈에 띄는 점은 '비폭력 평화 운동'이라는 우리의 편견을 깨뜨린다는 점이다. 서울을 제외한 전국에서 '평화 시위 -> 강제 해산 -> 폭력 대응'의 양상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는 점에서 3.1 항쟁을 '비폭력 저항 투쟁'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3.1항쟁을 '평화를 지향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평화 平和'라는 단어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서 가능하다.


 오늘날 평화연구는 '평화'가 강대국의 국제법적인 조약, 안보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세계시민주의에 의한 식민지/약소민족의 자결권과 해방의 문제를 다루는 역사가 포함되었고 평화를 만들기 위한 문화와 사상, 인권으로서 '평화권'에 대한 것까지 확장되었다. 100년 전인 1919년 3.1운동 시기 한국인들의 '평화'사상을 '전쟁이 없는 상태의 평화' 개념을 넘어서 인간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없는 '적극적 평화', 인권으로서의 '평화권' 개념을 적용해 살펴볼 수 있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57


 요컨대 3.1운동 시기 사상과 실천에서 시대와 함께하던 한국 지성들의 '평화'는  베르사유조약 같은 정치적 협상으로 얻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평등과 민주, 민권의 평화라는,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로서의 평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식민지민의 세계시민의식을 담은 평화사상이자 적극적 평화, 생명과 평등의 평화를 지향한 평화사상이었다. 식민지민의 독립을 위한 저항운동은 그러한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실천이었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81 


  이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 ~ 1909)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 1879 ~ 1910)의 <동양 평화론 東洋 平和論>과 맞닿은 지점으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 ~ 1936)과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 ~ 1944)의 사상이 민족(民族)이라는 용광로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21년 초에 신채호는 잡지 <천고 天鼓>에 실은 글에서 "우리는 평화행복을 기구하는 바이지만, 강적 제거와 동양의 평안 도모는 '유혈' 두 글자를 떠나서는 이뤄낼 수가 없다... 적과 혈전을 벌일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어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여, 혈전을 통해서만 일제 타도와 동양평화의 길트기가 가능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p42)... 한용운은 인간에 대한 종교적 성찰에 바탕을 두고 인간 생명의 존립 조건으로서 '평화'를 표상했다. 즉, 인간다운 행복한 삶은 평화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평화를 지켜야 하며,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실천의지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것은 생명 있는 인간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75


 <3.1운동 100년> 기념 총서들을 읽으면서, 결국 논점은 3.1항쟁이 '성공'했는가, 아니면 '실패' 했는가로 귀결됨을 깨닫는다. 과거로부터 축적된 역량이 '고종 사망'이라는 사건을 통해 민족적으로 발현되었고, 이후 새로운 저항의 방향을 찾았다는 것이 '성공'했다는 논거가 될 것이다. 이에 반해, '실패'의 논거는 결과적으로 저항의 결과 독립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이며, 이는 주도층의 부재와 역량의 미숙을 들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뒤에 각각 사회주의 혁명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다시 계승, 분화되는 것도 이미 1권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3.1운동은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독립선언과 평화적 만세시위만으로 독립이 곧 성취될 것을 기대한 민족 대표의 턱없는 낙관과 막연한 희망이 큰 오산이고 실패라면 실패였을 뿐이다. 조선 민중이 보여준 폭력적 직접행동의 격한 기세에 일제가 사실상 굴복해 통치정책을 바꾼 것이 3.1운동의 직접적 성과였다. 그러나 '문화정치' 역시 기만술책이었다면, 더 큰 성과는 따로 있었다. 독립운동 진영의 인식과 사고와 태세를 크게 바뀌놓으면서 크나큰 자신감을 갖게 하고 정대한 노선으로 나아가게 한 것, 그 이상으로 조선 민중 속의 수많은 아(兒/我)들이 새로운 자각과 결기를 통해 의열투쟁의 주체로, 폭력의 담지자로 기꺼이 나서게끔 한 것, 그것이 3.1운동의 실질적 성과이자 숨겨진 성공이었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p51 


 <3.1운동 기념총서>를 통해 이제껏 알지못했던 3.1항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새롭게 알게된 사실들은 내 자신에게 또다른 역사의 층(層)을 만들어 주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주어지는 과제들은 자신의 부족함과 함께 갈 길이 멀다는 것도 함께 일깨운다. 책을 읽을 수록 부족함을 느끼는 것.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을 우리 모두의 공통된 느낌이 아닐까도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읽은 단재 신채호의 <독사신론>에 관한 글과 3.1 항쟁의 희생에 대한 우리의 기억과 관련된 글을 옮기며 글을 마무리하자... 


 일제의 국권 침탈로 무너진 국가와 황제를 대신한 것은 민족이었다. 국가가 무너짐으로써 민족이 서게 되고, 민족의 중심에는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함께한 단군이 있었다. 단군은 민족이었고, 민족정체성의 상징이었다. 민족은 애국계몽가들의 단군 담론을 거쳐 단일민족이라는 민족공동체 의식으로 확장되었고, 신채호의 <독사신론>은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정립시킨 변곡점이었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285 


 제암리 학살사건과 유관순의 죽음이 민족의 희생으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과거사를 성찰하는데 기념에 앞선 절차라 할 수 있는 기억의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건과 진상의 규명보다 민족적 죽음과 희생으로부터 반일정서를 확인하고자 했던 문화가 오래도록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과정에서 개인의 죽음과 희생에 대한 기억이 사실상 소거되고 희생자들이 수치로만 기억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또한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민족 전체가 식민지배의 폭압을 견뎌낸 생존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355 


독립운동 진영의 인식과 사고와 태세를 크게 바뀌놓으면서 크나큰 자신감을 갖게 하고 정대한 노선으로 나아가게 한 것, 그 이상으로 조선 민중 속의 수많은 아(兒/我)들이 새로운 자각과 결기를 통해 의열투쟁의 주체로, 폭력의 담지자로 기꺼이 나서게끔 한 것, 그것이 3.1운동의 실질적 성과이자 숨겨진 성공이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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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한국근현대사에 의미심장한 사건이자 계기로서 3·1운동은 줄곧 많은 이에게 주목받았고 수많은 논저가 나왔다. 그러나 3·1운동에 대한 기억과 역사 쓰기가 거족적인 항쟁‘, ‘민족해방운동사의 최고봉‘ 같은 수식어에 묻힌 채 고정관념으로 굳어지거나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과장되고, 때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 속에 밝혀지지 않은 많은 사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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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료집>은 국제연맹 제출을, <혈사>는 중국인들과의 독립운동 제휴를, <사략 상편>은 <사료집>을 계승해 이후의 독립운동사 서술을 각각 목표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사료집>과 <사략 상편>은 안창호와 김병조라는 인물을 통해 일정한 연속성을 강하게 지녔고, '외교독립론'적인 입장에 기반해 독립운동사를 서술했다. 그에 비해 박은식의 <혈사>는 비(非)미국중심주의를 표방하며 '무장투쟁론'적인 입장에서 쓰였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 역사서가 궁극적으로 대항했던 것은 일제가 생산해내고 있는 3.1운동상이었다... <사료집>과 <혈사>, <사략 상편>은 어느 한 저서가 압도적인 객관성을 지니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지닌 동시대성의 저작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53


  metahistory 메타역사. 역사에 관한 역사가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의 주제다. 우리는 <3.1운동 100년사>의 첫 번째 책에서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들을 만나게 된다.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사료(史料)도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는 것을 보면서 사관(史觀)에 따라 다르게 강조점이 찍히고, 왜곡된 역사상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역사에 대한 기억은 3.1항쟁을 마르크스(Marx) 사상 관점에서 해석한 관점 - 경제학자 안병직과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들 - 이다. 역사를 계급투쟁의 산물로, 필연적 단계 이행으로 이해한 이들의 관점에서 3.1항쟁은 실패한 투쟁에 불과했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제반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혁명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갖는 이들의 관점은 '정형화된 역사'와 '유물론 사관'이라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일제 시대에 본격적으로 갖추어진 SOC만이 근대화의 증거이고, 발전된 역사의 과정에 있다는 인식으로 흐르고, 결과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이 태어나게 된 것은 당연한 흐름이 아니었을까. 몇 년 전 논란의 베스트셀러 <반일종족주의>의 사상의 뿌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좌파'사상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경제학자 안병직은 남한에서 3.1운동의 원인을 계급론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했다. 안병직은 중국에서 개발된 민족자본론을 이용하여 3.1운동 참여 세력을 예속자본가 중 식민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손병희 등 소극적 친일파, 중소지주 및 상인 등 민족 자본가, 노동자/농민계층 등으로 분류하고 그들을 운동에 참여하게 된 지도 사상을 각각 '독립청원', '독립시위' , '독립쟁취'라고 규정했다. 이 중 '민족 대표'는 그 투항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3.1운동의 시작 단계에 운동을 포기했고, 그 이후는 각 지방의 지식인, 학생, 유력자에 의해 운동이 독자적으로 추진되었다고 서술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159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3.1운동을 '실패한 운동'으로 규정했다. 특히 전위조직의 부재와 토지개혁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던 점을 3.1운동이 실패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강조했다. 3.1운동은 반제투쟁 외에도 토지개혁이라는 반봉건투쟁이 병행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 3.1운동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전위당의 필요와 토지문제의 농민적 해결이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75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속에서 우리는 다른 하나의 왜곡된 기억을 발견하게 된다. 임시정부의 정통성 문제와 건국절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속에서 우리는 3.1혁명을 계승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 우파사상이며,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의 주장임을 확인하게 된다. 초대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이 아닌 '계승'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계승자'를 '건국자'로 만들고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좌파의 논리를 받아들이면서, '종북 좌파'로 매도하는 이들의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이것 또한 왜곡된 기억이 낳은 갈등이 아닐까... 


 '3.1운동에 의해 건립된 임시정부'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임정 법통성은 임시정부 시절부터 우파의 논리로 작동했다. 좌파가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할 때마다 우파는 임정 법통성을 방어논리로 구사했다... 이후 군사정부에 의해 삭제되었던 임정 법통성은 1987년 개헌을 통해 다시 헌법 전문에 들어갔다. 북한과 체제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정부 수립의 정통성을 임정 법통성에서 찾고자 했던 정치세력은 별다른 갈등 없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헌법 전문에 부활시켰다. 이처럼 임정 법통성이 우파와 반공주의의 합작이라는 점은 해방 정국부터 일관된 것이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108


 이승만 정부는 정부 수립 후 1949년 첫 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으로 발휘된 독립의 정신이 임시정부로 계승되어 마침내 '대한민국주국(大韓民國主國)'이 탄생했다고 했다. 정부 수립의 정통성과 임시정부 계승의 정신을 표방한 것은 그 후 역대 정부에서도 공통적으로 이어졌다... 이승만은 집권 후 첫 번째 기념사에서 3.1운동의 정신이 '반공의 3.1정신'으로 부활할 것을 주장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121


 

책을 읽다보면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읽어야 할 책들이 쏟아짐을 느낀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 식민지 근대화론과 관련하여 이영훈의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 vs 강만길의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을 담아둔다. 이에 더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3월호에 실린 램지어 교수의 주장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vs  고은광순외 <제국의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도 함께 담아둔다... 서로 다른 역사의 기억은  어떻게 우리를 바꾸어 왔는가. 역사의 힘에 대해 생각하면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기억이 구체화되어 있는 모든 장소들은 종교적, 정치적, 상징적 성격과 아울러 역사 및 족보 편찬의 성격을 띠기 마련이다. 그 기억의 주요한 측면들이 '유산(heritage)' 이라는 기호(記號) 아래 재편되어 나타나는 것은, 그런 기억이 펼쳐지는 바로 그 시대에 그것 자체가 스스로 시대를 초월한 하나의 의례처럼 표현되는 것에 관심을 쏟으며, 시간적으로 유한한 자신의 흔적을 초시간성 또는 초자연성의 낙인으로써 확증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기억 속에는 아직 민족은 없지만 민족적 신성성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것은 이후에 나타난 민족적 기억의 온갖 형태들에 그러한 성격을 물려줄 것이며, 또 그런 신성성이 그 기억에 영속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2 : 민족>, p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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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03-22 2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사와 기억이라면, 쑨꺼 선생의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중 ‘중일전쟁- 감정과 기억의 구도‘, 쑹녠선의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정두희 등이 참여한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김시덕 <일본의 대외 전쟁>도 추천합니다..ㅎㅎ

겨울호랑이 2021-03-23 06:12   좋아요 0 | URL
^^:) 김민우님 감사합니다. 평소 역사와 관련해서 많은 책을 읽으시는 김민우님께서 추천하시는 도서라 믿고 읽을 수 있겠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