핼버스탬은 전후 한국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1945~48년의 미군정을 단 한 문장으로 언급한다. 그 전쟁의 잔혹한 학살과 미국의 소이탄 공습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다. 대신 한국은 "고래싸움에 등 터진 새우"였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이는  한 무리의 지도자를 가진 하찮은 나라였다. <콜디스트 윈터>는 미국 특유의 통속적인 장르에서 최고의 책으로 꼽을 만하다. 이 책이 설명하는 전쟁은 한국이나 그 역사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고작 두세 명의 한국인을 언급하며, 한국인과 중국인이 훨씬 더 많이 참여했던 전쟁에서 미국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선한 편과 악한 편에 관한 1950년대의 고정관념들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_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118


 데이비드 핼버스탬 (David Halberstam, 1934 ~ 2007)의 <콜디스트 윈터 The Coldest Winter>에 대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 )의 평가는 비판적이다. 미국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한국전쟁'이며, 한국전쟁에 정작 한국은 없다는 커밍스의 비판은 충분히 납득된다. 그렇지만, <콜디스트 윈터>에는 다른 한국전쟁 관련 책들이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이 담겨있다는 점에서는 비판이 지나친 부분이 있어 보인다. 


 한국전쟁에는 단층선(斷層線)이 있었다. 단층선의 한 면은 야전부대가 직면하는 전장의 위험과 현실의 세계고, 다른 면은 안일한 명령만 쏟아내는 도쿄 사령부에 있는 환영의 세계였다. 단층선은 군단과 사단 사이에도 있었다. 군단은 도쿄 사령부에서 스며 나오는 맥아더 장군의 열의를 느끼고, 사단은 적의 공격에 노출된 연대와 예하 부대의 취약성을 느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76/1912


 <콜드스트 윈터>에서 저자는 한국전쟁의 단층을 말한다. 이 단층은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틈이 아니라, 미군(美軍)을 구분하는 선이다. 이 선의 한 편에는 장진호(長津湖)에서 혹독한 추위와 중공군과 싸워야 했던 야전군인이 있다면, 다른 편에는 워싱턴 행정부와 싸우는 정치군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 ~ 1964)가 위치한다. 도쿄 책상 위에서 전황을 내려다보며 아시아의 맹주로 처신하는 맥아더와 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 1884 ~ 1972)의 대립을 생생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영웅으로 알려진 맥아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콜디스트 윈터>는 분명 나름의 가치가 있는 책이다. 


 트루먼과 맥아더는 동일한 선상에서 같은 목표를 바라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들이 치러야 하는 전쟁에 대해서도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국가 자산을 투입해야 하는지 생각이 전혀 달랐다. 1950년 6월 25일부로 대통령과 장군으로서 이들의 삶이 함께 엮였다. 미국 역사에서는 보기 드물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통제하지 못해 대통령의 위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맥아더는 대통령직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적으로 자신의 위상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342/1912


 사실 여러 해 동안 맥아더가 자신의 추종자들을 현혹했던 한 가지 비법은 진실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입장이나 대의명분에 도움이 될 때에만 진실을 인정했고 자기가 추구하는 목표에 방해가 될 때에는 가차 없이 저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로 그 점이 맥아더의 발목을 잡는 덫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이 옳다는 식이었지만 막상 진실과 견주기 시작하자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1666/1912


 다만, 커밍스의 관점에서처럼 한국전쟁을 내전의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면, <콜디스트 윈터>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 빠진 책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전쟁의 성격을 내전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콭디스트 윈터>의 관점은  그와 다르다.


 기억해야 할 점은 한국전쟁이 내전이었으며, 진정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순전히 한국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이었다면 식민주의와 민족 분단, 외세 개입으로 초래된 엄청난 긴장을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비극은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전 상태로 돌아갔을 뿐이며, 그저 휴전을 통해 평화를 유지했을 뿐이다. _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72


 <콜디스트 윈터>에서 저자는 한국 전쟁을 다소 복합적으로 바라본다. 미국과 서구 세계에게 한국전쟁은 '축소된 세계대전'인 반면, 북한, 중국, 소련의 관점에서는 '내전'이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전쟁에 대한 입장 차이는 전선이 고착상태에 빠진 이후 마무리를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된다.


 미국과 서구 세계에서 한국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국경을 넘어 일방적으로 공격한 '침공'이었다. 때문에 예전에 히틀러의 침공을 막지 못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던 쓰라린 역사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점은 중국과 소련 그리고 북한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전쟁을 시작한 시점에서는 1945년에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국경처럼 그은 38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몇 달 후 미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들의 관점에서 6월 25일에 자행한 북한의 남침은 중국에서는 막 끝났지만 인도차이나에서는 진행 중인 것과 동일한 '끝나지 않은 내전'에 불과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144/1912


 분단 상황이 사회와 문화마저 분열시켰으며 남과 북 어느 쪽이든 모두 비통한 시대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이는 엄청난 내부 분열을 불러와 한국전쟁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국경을 넘어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도발 이상의 의미였다.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십수 년 동안 쌓였던 내부 분열과 모순 그리고 오랜 정치 갈등이 터져 나온 위험한 상황이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192/1912


 <콜디스트 윈터>는 한국전쟁에서 휘브리스(hybris)에 빠진 지도자들과 이들이 저지른 실수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마치 점수만 보면 8-7 케네디 스코어로 진행되는 야구경기에서 막상 내용을 놓고보면 끝없는 실수로 벌어진 타격전 하이라이트를 보는 듯하다. 어쩌면 이러한 부끄러운 실수들이 당사자들에게 한국전쟁을 잊도록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전쟁은 어떤 식이든 일종의 계산 착오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양측 군대가 내린 모든 결정이 하나같이 잘못된 계산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우선 미국은 극동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시킴으로써 다양한 공산주의 세력이 행동을 개시하도록 자극했다. 결국 소련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김일성에게 남한을 침략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은 이번 전쟁에 발을 디디면서 인민군의 저력을 무척 과소평가했으며 각지에서 미군의 승전 나팔소리가 연이어 들릴 거라는 부푼 기대를 안고 있었다. 그 후에는 중공군의 경고 신호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38선 이북으로 밀고 올라가는 무모함을 보이기도 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1713/1912


 그렇지만, 잊혀진 전쟁이 남긴 유산은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다. 냉전 이후 경찰국가 미국의 역할을 결정지었다는 점에서도, 그리고 1953년 판문점 체제의 영향이 동아시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후 유럽 질서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세계전쟁으로서의 영향력을 한국전쟁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판문점 체제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추구한 자유주의적 평화 기획이 귀결된 궁극적인 제도적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판문점 체제는 중국의 개입 이후 부과된 정치적 압력하에서 한국 문제의 궁극적인 정치적 해결을 유예시킨 군사 정전 체제였다. 그리고 판문점 체제는 미국과 이승만의 협상의 산물로서, 한미 군사 동맹 체제 아래에서 경제 발전의 모델을 전시하려는 아이젠하워 근대화 정책의 대표 사례였다. 좀 더 일반화하자면, 판문점 체제는 칸트식 초국적 법치가 지향했던 보편적 영구 평화나 보편적 정의와는 거리가 먼, 특수한 상황에서의 안보, 특수한 동맹 체제하에서의 경제 발전이라는 매우 분명한 홉스적 기획의 산물임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_ 김학재, <판문점 체제의 기원> , p843/1282 


 독일의 재무장은 모두를 불편하게 하고 스탈린의 예기치 못한 반응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귀중한 자원을 재무장에 쓰기를 원하는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무방비 상태의 대결 대신으로 중립이 지닌 매력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똑같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합리적인 반사실적 가정이다. 거의 일어나지 않을 뻔했기 때문이다) 실로 최근 유럽사의 윤곽은 매우 달라 보였을 것이다. _ 토니 주트, <전후 유럽 1945~2005 1>, p207/706


 그렇지만, 한국전쟁이 잊혀져서는 안될 이유는 이러한 세계적 영향력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현재까지 분단체제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도 아니다. 지도층들의  실수와 대립으로 결정된 전쟁과 국토의 양극단까지 전선이 움직이면서 발생한 수많은 민간인 희생이 '잊혀진 전쟁' 뒤에서 조용히 묻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기억해야 한다. 노근리 사건과도 같은 수많은 희생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적어도 우리는 한국전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음 페이퍼에서는 이러한 수많은 단층을 가진 복합적인 성격의 전쟁인 한국전쟁이 왜 발생했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미국인이 가장 모르는 것은 그 전쟁이 섬뜩하리만큼 지저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민간인 학살의 더러운 역사가 끼어 있는데, 북한을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로 보는 미국의 생각과 달리, 그 최악의 범죄자는 겉보기에 명백히 민주주의 체제였던 동맹국 남한이었다. 영국인 저자 맥스 헤이스팅스는 공산주의자들의 잔학 행위 때문에 국제연합이 한국에 "오늘날까지 지속된 도덕적 정통성"을 부여했다고 썼다. 그렇다면 남한의 잔학 행위는? 오늘날 역사가들은 남한의 잔학 행위가 훨씬 더 많았음을 알고 있다. _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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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이 1950년 6월이 되기 여러 달 전에 남북간의 분쟁을 재래전의 차원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이제 소련 문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남한에서 결말없이 진행되는 유격전에 지쳤기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1949년에 발생한 남쪽의 여러 차례의 도발을 구실로 삼아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했을 것이다(p38)... 옹진전투는 6월 25일 오전 3~4시 경 시작되었다. 최초의 정보 보고서는 어느 쪽이 전투를 시작했는가에 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나중에야 공격 부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경경비대 제3여단의 일부였고 오전 5시 30분 막강한 제6사단이 이에 합류했다고 알려졌다. 미국의 공식역사에 따르면, 거의 동시에 철원 남쪽 38도선에 주둔한 조선인민군이 남한군 제7사단 제1연대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제7사단은 무너졌고, 조선인민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이 기갑여단을 동반하여 밀고 들어와 서울을 향해 기세 좋게 진격했다. 그러나 남한의 자료에 따르면, 제17연대가 옹진반도에서 반격을 가했으며 해주를 점령하고 있었다. _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p39 


  전면전으로서 한국전쟁(1950~1953)의 시작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반도와 철원일대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로 시작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 이면에 어떤 배경이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 자체를 아는 것보다 중요할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72주년을 맞아 남침(南侵)인가, 북침(北侵)인가에 따라 이념을 규정하는 것보다 전쟁의 기원을 차분하게 들여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전쟁이라는 물이 끓었을 때, 누가 99도에서 100도로 온도를 올렸는가보다, 100도까지 물의 온도를 올리는데 남북은 물론, 미,소,중 등 세계 각국의 기여를 아는 것은 한국전쟁의 전체적인 모습을 이해하는 것과도 통하는 면이라 여겨진다. 6월말까지 얼마나 정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한국전쟁의 기원과 여유가 된다면 휴전까지 살펴보려 한다...

 

 1950년에 발발한 전쟁의 기본적 문제들은 해방 직후 불과 3개월 내에 이미 뚜렸해졌다. 그 결과로 농민반란, 노동분쟁, 게릴라 전쟁 및 38선 전역에 걸쳐서 일어났던 공공연한 무력충돌 등을 통하여 결국 10만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 이 모든 것이 표면적인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일어났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싸움의 성격은 내부적이며 혁명적인 것이었고, 1945년 직후에 시작되어 혁명과 반동의 논리하에 진행되었던 것이다. 1950년 6월의 전통적 전투의 개시는 이 전쟁이 다른 방식으로 계속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_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1>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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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6-17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의적절한 페이퍼입니다^^ 저는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읽을 시간이 없을 것 같고 그 대신 북한현대사와 한국 현대사의 군에 대해서 살펴볼 계획입니다^^ 박명림 선생님 책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브루스 커밍스 책은 언제나 참고할 책이고요~^^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6-17 11:0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브루스 커밍스 책은 예전에 읽었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아 이번에 다른 책들과 함께 정리해볼까 싶습니다. 항상 책을 진득하게 읽질 못하고 시류에 따라 갑자기 훅 들어오는 주제들에 눈이 가는 독서를 하는 것 같네요 ㅜㅜ 거리의 화가님 좋은 하루 되세요!

바람돌이 2022-06-17 1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학교 다닐때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은 그야말로 필독서!
그때 당시 읽을 때는 진짜 충격적이었어요. 역시 학자는 계속 연구를 하고 있군요. 이렇게 다시 연구하고 화장한 책이 나와있는줄은 몰랐습니다.

실제로 한국전쟁 이전 1년동안 38선 부근에서의 소소한 교전횟수가 500여차례가 넘는걸 보면 전쟁의 개전을 북침 남침 하나만으로 규정짓는건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6-17 13:52   좋아요 1 | URL
해방 후 현대사에 있어 브루스 커밍스의 책은 이미 고전이라 생각됩니다. 한국전쟁 해석에 대한 그의 저작이 미친 영향력을 생각하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함께 듭니다. 바람돌이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해방 후 전면전으로 확전되기 전까지 이미 내전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한국전쟁을 보다 국제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바람돌이님 ,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6-17 1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브루스 커밍스 책 오래전에 읽고 충격 받았던 기억 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6-17 13:54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브루스 커밍스라는 선구자 이후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좋은 연구들이 나오고 있어, 보다 전쟁의 실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레이스님, 좋은 하루 되세요! ^^:)
 


 오전 11시 40분경, 4.19 그날의 중요한 전기가 마련됐다. 오전 11시경 동국대생 2,000여 명과 성균관대생 3,000여 명이 교문을 나서 오전 11시 40분경 국회 의사당에 이르렀다. 그런데 서울대생들이 그곳을 점거하고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때 "동국대는 경무대로 가자"는 고함과 함께 동국대생들이 중앙청, 경무대 쪽으로 향했다. 서울대 사범대생들과 동성고 학생들, 성균관대생들 등 학생 1만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시위의 성격이 이때부터 확 바뀌었다.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들이 세종로를 지나면서 새로운 구호가 나왔다. "이승만 물러가라", "독재 정권 물러가라", 바로 이것이었다. 시위대의 표적은 경무대였다. _ 서중석, 김덕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 , p87/168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와 무차별 발포로 '피의 화요일'이 되버린 1960년 4.19 그 날. 부정선거와 독재정치를 규탄하던 이들은 혁명을 통해 독재자의 하야(下野)를 이끌어내며, 일단 혁명의 목적 중 하나를 달성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하려는 앞선 세대의 노력으로 한국 민주주의는 보다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거에는 부정선거가 아니면 집권할 수 없었던 세력이 이제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제도는 성숙했으나, 민의(民意)는 쇠퇴했다고 봐야할 것일까. 4.19혁명 당시 젊은이 또는 어린이들이었던 현 70, 80대와 87년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던 50, 60대 상당수가 보수화되었다는 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일까.


 4월혁명 50주년을 맞아 <4월혁명 사료 총집>이 나왔는데, 편집위원장으로서 그것을 만드는 데 관여했다. 거기에 중요한 사료가 있다. 연세대 4월혁명 연구반에서 1960년에 만든 목격자 수습조사서다..  그 중 하나가 "이번 4.19 사태를 가져온 동기는 뭣이라고 생각하나", 이것이다. 그것에 대한 응답을 보면 '독재 정치(독단적인 일당의)', '자유당 정부의 실정', '일당 독재', '정치적 부패', '경제적 불평등', 이런 것들이 들어가 있다. 부정 선거는 이보다 꼭 많은 게 아니더라. 부정 선거나 마산의거에 자극받아 4.19를 일으켰다고 보는 것보다 오히려 이게 더 많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15부정선거와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 전체의 상을 보여주는 것이자 그것에 대한 전반적인 단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바로 이런 상태에서 두 차례에 걸친 마산의거, 그리고 4.19, 4.26이 일어난 것이다. _ 서중석, 김덕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 , p99/168


 4.19혁명은 바로 뒤이은 5.16 쿠데타로 너무도 빨리 무너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혁명의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기득권 문제는 4.19혁명이 미완의 혁명임을 생각하게 된다... 


 민석홍 서울대 교수가 이승만 정권 붕괴 직후 4월혁명이 혁명인 이유 중 두번째로 든 것이 특권층 문제였다. '4월혁명은 특권적인 재벌이나 기업가층 몰락의 바탕을 마련했다.' 무서운 말이다.... 말하자면 돈을 많이 번 자들이 정상적으로 돈을 번 게 아니라는 광범위하고 강력한 국민 의식, 서민층의 불만이 쌓여 있었고 이게 4.19 때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으로 발동된 것이다. 그러면서 부정 축재자 처벌을 들고나와서 허정 과도 정권이나 장면 정부를 무척 애먹이게 된다. _ 서중석, 김덕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 , p102/168


 사실, 특권층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기에 4.19혁명의 한계로 규정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기득권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오언 존스 (Owen Jones, 1984~ )의 하층 계급의 문제를 다룬 <차브>와 특권계층의 문제를 다룬 <기득권층>두 권의 책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민주적 혁명, 즉 기득권층이 착복한 권력과 권리를 평화적 수단을 통해 되찾는 일을 오랫동안 미뤄지고 있다. 그러한 혁명은 기득권층의 성공으로부터 배울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공격적인 사상투쟁이야말로 승리의 열쇠임이 증명되었다. 기득권층은 영국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얻은 바가 없다. 이는 여론조사가 지속적으로 보여주는데, 예컨대 대다수의 영국인은 부자증세를 원하고 공공 및 공익사업을 이윤창출 목적으로 전환하는 조치에 반대하며 정부 주요기관에 대한 신뢰도 심각하게 낮다. 그러나 기득권의 비공식적 구호처럼, '대안은 없다'는 감각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 체념하게 하고 저항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엄청난 이념적 승리임이 드러났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p276/310 


 기득권을 보호하는 또다른 장치는 대중의 분노가 사회의 상부가 아닌 최하층에게로 굴절되는 현상이다. 언론과 정치인들은 저소득 노동자에게 임금을 적게 지불하는 고용주를 향해 분개하기보다, 호사스런 생활을 한다는 실업수당 청구인들 쪽을 시샘하게 만든다. 연금을 보장받을 수 없는 민간부문 노동자는 여전히 연금이 보장되어 있는 공공부문 노동자를 부러워하도록 선동당한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p27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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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들은 법을 잘 지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할 뿐, 현실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처음부터 법률문제는 '포기가 곧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법률문제에 시달려본 구술자 중에는 판검사들이 변호사를 통해 돈을 받는다고 믿고 변호사에게 거액을 건넨 사람도 있습니다.(p233)... 시민들이 이런 고통을 겪는 동안 법조인들이라고 해서 그들만의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실비, 휴가비, 전별금 등이 관행이었던 시절에도 판검사들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법시험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신성가족의 일원이 된다 해도 가야 할 길은 멀기만 했습니다. (p234)... 의사소통이 단절된 틈바구니에서 자라난 브로커라는 직업도 애환이 많았습니다. 법대 졸업생으로 청운의 꿈을 품고 또는 가정형편 땜누에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건만, 기본급으로는 생활이 너무 어렵고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235/276


 내일이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지난 5년 동안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고, 그중에서도 사법개혁은 언론개혁과 함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지만, 문제점만 깊이 인식했을 뿐 아직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해결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는 사법부 문제, 이 문제를 이번 페이퍼에서는 여러 권의 책을 통해 대략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은 법으로부터 소외된 시민들, 핵심 엘리트 집단에 소속하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법조인들, 언제 잡힐지 모르면서도 살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브로커 집단들을 묘사하며, 법의 이해관계자들 모두가 불행한 현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의 기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우리나라 법조계의 제도적, 물적/인적 토대는 모두 일제시대에 마련되었다. 이 간단한 사실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프랑스와 독일의 법제를 받아들인 일본은 이를 그대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했다. 조선시대까지 유지되었던 전통적인 법과 제도는 대한민국의 형성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일본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제도와 개념이 식민지에 제대로 정착할 리 없었다. 개념과 현실의 틈새에서 고문, 조작, 과장, 각종 뒷거래가 독서벗처럼 자라나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만큼 모든 기반이 허약했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75/526 


 김두식의 다른 책 <법률가들>은 사법부 문제의 기원을 찾아가는 책이다. 일제 하 이른바 근대제도의 정착과정에서 전통과의 단절과 갑작스러운 제도의 이식은 혼란을 가져왔으며, 이러한 혼란이 가라앉기 전 더 빨리 찾아온 해방은 사법부를 비롯한 극심한 혼란을 가져왔다. 일본이 남기고 황급히 떠나고 남긴 자산이 남한 내 부의 불평등 시초였다면, 사법부에서 이법회 문제는 학문과 권력에서의 불평등 시초였다. 1945년 해방으로 중단된 조선변호사시험 응시생 전원에게 합격증을 배부한 '이법회'문제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공정성 문제의 기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에 이들 수험생들이 시험에 응시해 합법적으로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기간동안 자격없는 이들에게 주어진 기득권의 문제는 법조계에 대한 일반의 '불공정'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적산(敵産)은 점령지대 안에 소재하는 적국 소유 또는 적국국민 소유의 재산을 말한다. 승전국인 미국 입장에서는 조선에 있는 일본재산은 모두 미국 것이었다. 승전국에 귀속된다는 의미에서 '귀속재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조선인 입장에서 보면 '적산'은 일제가 식민통치 기간 동안 수탈한 우리 재산이었다. 여기에서 수많은 혼선이 빚어졌다... 한동안 적산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였다. 적산 처리는 남한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갈리는 첫 분기점이었다. 정치적 힘이 곧장 경제적 힘으로 연결된 계기이기도 했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163/526


 일제시대 시험에 붙은 사람들을 법원에서 내쫒는다고 해서 일제유산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법조계만큼 해방전후 구분이 의미없는 분야도 없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의 경성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미 몇차례 운을 띄운 이법회 문제다. 이법회는 유태흥 대법원장이 말하는 '열패고(劣敗苦)'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36/526


 이법(以法)은 문자 그대로 '법대로' 하자는 의미였고, 자신들의 문제를 법으로 풀겠다는 의지를 보인 작명이었다. 이법회 회원들의 요구사항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이렇다. "이법회원들은 변호사시험 중단의 책임은 일본국 정부나 조선총독부나 시험위원회에 있다는 것이고, 만일 끝까지 시행하였더라면 응시자 전원이 합격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하여, 조선 불성취의 책임을 수험생 측에 전가시킨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고집하며, 응시자 전원에게 변호사시험 합격증서를 교부하라고 요구하였다 한다."(p438)... 이들의 실체가 중요한 이유는 그 숫자 때문이다. 1945년도에 합격증을 받았다고 알려진 106명은 22년 동안 시행된 이전의 전체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 총수에 육박하는 엄청난 규모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38/526


 이와 함께, 해방 직후 한국전쟁은 또 다른 불행을 가져온다. 1961년 위청룡 검찰국장의 죽음에서 드러나듯, 조금이라도 북한과의 연계성을 의심받을 경우 좌익으로 몰려 인사상의 불이익은 물론, 생명의 위협까지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법률가들. 한국전쟁 이후 이들 앞에 펼쳐진 세상은 반공(反共)을 국시로 한 군사정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군사정부에 협조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으로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위청룡의 죽음에 대해 완벽한 진실을 알 수는 없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위청룡의 인생은 크게 보면 두가지 이유로 망가졌다. 첫째는 삼팔선 이북지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고, 둘째는 해방후에 너무 늦게 남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는 평남 평원에서 태어나 평양 지방법원에서 서기로 일했고 거기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조만식 선생을 흠모해 북한 검사가 되었고 오래되지 않아 밀려났다. 남쪽 사람들은 겪지 않았을 일이었다... 위청룡은 북한의 무모한 대남공작과 그에 맞서는 남한의 무리한 수사 사이에 끼어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억울한 법률가였다. 별이 저절로 굴러 손에 들어오던 시대였으나 동시에 누구도 안정하지 못한 시대였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28/526


 그렇지만,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군사정권의 압력에서도 과거의 사법부는 자신들의 사찰에도 너그러운 그들의 후배들과는 달리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사법파동을 위해 양심을 가진 판사들이 사직서를 던져가며 저항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법부는 인혁당 사건(1964), 동백림 사건(1967) 등을 거치며 서서히 몰락해 갔음을 우리는 한홍구의 <사법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법파동은 사법부 스스로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력에 맞섰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도였지만, 사법파동의 허망한 결말은 오히려 사법부로 하여금 저항의지를 잃게 만들었다. 이범렬에 이어 홍성우, 김공식 등이 법원을 떠나고, 1973년의 법관 재임용 심사로 평소 권력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던 법관들이 다 잘려 나가면서 법원은 힘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유신 이후에는 중앙정보부원들이 대놓고 판사실을 들락거리게 된 것이다. _ 한홍구, <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 p69/384 


 한홍구는 같은 책에서 박정희의 유신 정권 아래에서도 끊임없이 저항해온 사법부가 몰락한 결정적 계기를 '대법원장 비서관 뇌물 사건'으로 바라본다. 여러 검사와 판사, 변호사가 파면과 사임, 제명을 당한 이 사건을 통해 판사와 검사는 독립된 사법부가 아니라 안기부의 통제를 받는 기관으로 전락하는 굴욕의 역사가 1980년대 사법부의 역사였다. 


 1983년 1월 14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업자에게서 뇌물을 받고 부하에게서 상납을 받은 '전' 철도청장 안창화의 구속을 발표했다. 이때 검찰은 유태흥 대법원장의 '전' 비서관 강건용(이사관)이 "구속 중인 형사피고인을 보석으로 풀려나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피고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뇌물 액수가 크다는 데 있지 않았다. 강건용이 구속될 때만 아무도 이 사건이 일파만파 번져가 검사 두 명의 파면, 서울지검장과 서울지검 남부지청장의 인책 사임, 부장판사 두 명의 사임. 변호사 세 명의 제명 등 사법사상 전무후무한 파문을 낳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을 통해 안기부는 검찰과 법원에 대한 확실한 힘의 우위를 과시했다. _ 한홍구, <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 p147/384


 <법률가들>, <사법부>에 서술된 사법부의 지난 역사는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법조인들과 사법파동 이후 남은 판사들의 권력지향적 모습, 1987년 민주화 이후 국정원으로 축소된 권한을 대신한 검찰권력의 대두로 요약된다. 그 사이 진정으로 시민과 법 앞에 공정성을 위한 저항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움직임은 '잔 속의 태풍(A Storm In The Teacup)'에 불과했던 것이 민과 법조인들 사이의 채울 수 없는 틈을 만들지 않았을까. 자신의 눈을 '무지의 베일'이 아닌 선글라스로 가린 법조인들의 모습은 정의로운 판관(判官)이 아닌 기름부음을 받은 왕(王)의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 또한 당연할 것이다. 법에 기댄 권위자에 의한 통치.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시민들의 삶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면 '아주 많이' 좋아진 것은 재벌과 검찰이었다. 과거에는 독재자가 정보기관이나 권력기관을 서로 견제시켰고 재벌의 힘도 상당히 통제했다. 그러나 철저하지 못한 민주화는 민주공화국 대신 삼성공화국과 검찰공화국을 불러왔다. 재벌의 불법행위를 단속해야 할 검찰은 재벌에 의해 관리되는 '떡찰'이 된 지 오래다. 통제받지 않는 두 권력, 삼성과 검찰의 결탁은 진정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이제 검찰개혁은 한국 민주주의의 존망을 가름할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_ 한홍구, <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 p354/384


 플라톤(Platon, BC428 ? ~ BC348)은 초기에 <국가 정체 Politeia>를 통해 철인(哲人)에 의한 정치를 주장했지만, 후기에는 <법률 NOmoi>에서 법률에 의한 지배로 그의 통치철학으로 사상의 변화를 말한다. 이러한 변화가 사람에 의한 이데아의 실현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법률(法律)이라는 시스템의 구축으로의 변화라고 한다면, 오늘날 스스로 권력화한 사법부의 모습은 법률에 근거한 법률가의 정체에 다름 아니다.


 5권 473d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이 : ho philosophos)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basileus) 또는 '최고 권력자'(dynastes)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지혜를 사랑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 권력'(dynamis politike)과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 : philosophia)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kakon paula)은 없다네. _ 플라톤, <국가 정체> , p365


4권 712a 일체의 권력(dynamis)에 대해서도 똑같은 주장(원칙)이 마찬가지로 타당합니다. 곧, 최대의 권력이 한 사람에게 있어서 지혜로움(phronein) 및 절제 있음(마음이 건전함)과 한데 합쳐질 때, 그때에 최선의 정체(나라 체제 : politeia he ariste)와 그런 법률의 탄생이 실현을 보지, 그 밖의 방법으로는 결코 그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p315)...  722e 정말로 nomoi(법률)인 것들, 바로 이것들을 우리는 국법이라 말하는데, 이것들의 전문(前文 : prooimion)은 일찎이 아무도 말한 적이 없으며, 설사 그걸 지은 사람이 있었더라도, 그게 햇빛을 보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참주적 지시로 언급되었던 것, 즉 자유롭지 못한 자들로 우리가 말한 의사들의 지시들에 비유되었던 것, 이것은 절대적인 법(nomos akratos)으로 여겨지고요. _ 플라톤, <법률>, p246


 스스로 신성가족화하고, 이러한 신성가족에 저항했을 때 어떤 대가가 따르는 지는 우리는 지난 사건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과거와는 달리 올림푸스로 가는 길이 '사법고시'라는 외길이 아닌 '로스쿨 law school'이라는 여러 길이 났음에도 이 여정에 오를 수 있는 이들은 최소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선택된 이들이라는 현실속에서 우리는 보다 진지하게 이러한 사법부의 문제에 대해 장단기적인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법부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다음 문제 중 하나임이 분명하지만, 이 문제를 풀게 될 지 아니면 시험지까지 도로 빼앗기게 될 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우리의 못다한 숙제를 마저 하기 위해서라도 내일 3월 9일 선거와 선택은 우리에게 중요할 것이다...


 저는 법원이나 검찰에서 가족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바로 이 신성가족을 떠올립니다. 법원 신성가족의 일원이 되러면 사법시험이라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판사직 진입이라는 더 좊은 관문도 통과해야 합니다... 돈과 압력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가족 내부의 청탁은 변호사들의 청탁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됩니다. 변호사들의 청탁은 어떤 순수의 탈을 써도 결국은 돈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117/276


 이 거대한 가족구조 안에서 혼자 깨끗한 척해봐야 검찰 분위기가 바뀔 리가 없고, 싸가지 없다고 찍힌 검사 꼴만 될 뿐입니다. 그 검사가 싸가지 없는 이유는 이 거대한 신성가족을 무시하고, 그저 '현재 검사인 사람만 검사'라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가치를 무너뜨린 사람에게는 호적에서 파내는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게 마련입니다. 신성가족은 프리미엄도 누리지만, 그에 따른 의무도 준수해야 합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130/276


이 모든 문제는 변호사와 의뢰인, 변호사와 판검사들 사이의 소통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변호사와의 안면이 왜 중요합니까? 판검사들이 일반적으로 법정에서 오가는 공식적인 이야기에는 신경을 덜 쓰고, 뒤로 안면 있는 변호사가 전해주는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237/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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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은) 이어 "이런 분들이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서로 경쟁해서 원칙 있는 정치를 펼쳐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 노 후보의 발언 직후 연설장에 않아 있던 정 대표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으며 노 후보는 발언 직후 연설장 분위기가 미묘해지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대해 정 대표는 노 후보 발언 직후 종로 4가 한 음식점에서 국민통합21 주요 당직자들을 소집해 긴급 대책회의를 갖고 "노 후보가 단일화 정신을 훼손한 채 이미 대통령이 된 것을 전제로 전횡을 하는 듯한 졸렬함을 드러냈다"며 지지를 철회키로 의견을 모았다. _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 편 : 노무현 시대의 명암 2>, p318/642


 오늘 새벽의 안철수-윤석열의 단일화 뉴스는 선거(사전투표) 전날 이뤄진 전격적인 선언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이로부터 2002년 12월 18일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결렬화를 떠올리는 듯하다. 선거에 미칠 파급력면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단일화 성사와 파기는 원심력과 구심력처럼 서로 다른 방향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조금은 다르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정치인 안철수의 '새정치' 여정의 끝에서 20여년 전 홍사덕(洪思德, 1943~2020)의 무지개 연합을 떠올리게 된다.


 각기 다른 이유로 '정치 자체의 위기'를 걱정하는 양대 세력에게 2000년 4월 13일로 예정된 제16대 총선은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4.13 총선을 염두에 둔 정치적 이합집산이 활발해진 가운데, 가장 먼저 주목을 받은 이는 뛰어난 언변과 수려한 용모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홍사덕이었다.(p38)... 홍사덕은 1월 8일자 <한겨레>인터뷰에서 "국운을 개척하는 심정으로 새로운 정치를 하기 위해 무지개 연합을 만든다"고 선언했고, 그 결과 1월 19일 '무파벌/지역타파/개혁신진'을 표방한 '무지개연합'을 공식 출범시켰다. 그러나 그는 출범식 선언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 전인 1월 27일에 한나라당에 입당함으로써 그의 홈페이지에는 격한 비판이 빗발쳤다._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 편 : 노무현 시대의 명암 1>, p39/618


 10년 넘도록 실체가 모호한 새정치를 표방하면서 여러 차례 번복하고, 단일화 이후 자신의 몸값과 안랩 주가를 올렸던 1,900억대 재력가 안철수와 20~30억이 없어 자신의 뜻을 접고 한나라당에 들어간 홍사덕을 직접 비교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도 생각하게 되지만, 적어도 국민과의 약속을 눈깜박할 사이에 뒤집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여겨진다. 안철수와 홍사덕을 통해 우리나라 정치에서 양당제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와 함께 다당제 정치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안철수의 재산을 생각하면 그에게 부족한 것이 돈은 아니었을텐데, 그럼에도 그가 독자적으로 완주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홍사덕의 무지개연합이 보여준 한계점은 한국정치에서 '돈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점이라면, 안철수의 새정치가 보여준 한계점은 무엇일까. 정치테마주로서 '안랩'의 주가 부양이 정치인 안철수가 아닌 경영인 안철수에게 더 중요했기 때문일까. 정말 잘 모르겠다...


 PS. 홍사덕과 기자들과의 대담 내용을 보면서 우리나라 기자들도 저런 깊이있는 질문을 할 때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되는 것을 보면 사회가 계속 발전해온 것만은 아닌 듯하다.


 정치가 현실인 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1주일 만에 뒤집어도 된다는 것까지 의미하진 않을 게다. 그와 같은 '변절'에 대해 홍사덕 자신이 내세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간이 조금 지난 뒤 홍사덕은 기자들과 주고받은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 : 자신이 생각하는 당을 만들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답 : 어림짐작 20억, 넉넉히 계산하면 30억이다.

 문 : 결국 20억이 없어서 한나라당을 선택한 건가?

 답 : 좋은 뜻 있는 사람에겐 돈이 따르지 않는 것이다.

 문 : 무지개 연합을 시도했지만 돈이 안 모여서 한나라당으로 갔다고 했는데, 한나라당으로 가니 돈 사정이 좀 풀리나?

 답 : 여기는 큰살림이니까 나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문 : 홍사덕 위원장은 말을 참 잘한다. 그런데 말솜씨보다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이다. 아무리 말솜씨가 좋다고 하더라도 할 말이 궁색하면 말같이 들리지 않는다. 무지개연합이라는 새 정치를 주창하다가 한나라당이라는 헌 정치를 하려 하니 요즘 당신이 하는 말이 말같지 않다는 생각 안 해보았나? _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 편 : 노무현 시대의 명암 1>, p4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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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2-03-06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당신이 하는 말이 말 같지 않다-
사이다:-).
현재 언론도 언젠가는 부패도가 내려갈 터닝포인트를 갖게 되지 않을까요. 막연하게라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3-06 12:50   좋아요 1 | URL
저도 2000년의 언론 기자가 이렇게 핵심을 잡아 이야기하는 글을 읽고 시원함과 함께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함께 느낍니다. 개인적으로는 MBC 100분 토론에서 유시민 작가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언론 현실에 대해 밝힌 생각에 공감하게 됩니다. 레거시 미디어가 개선되기를 바라기보다 뉴미디어에 의한 대체가 더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갱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