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시간은 칸트에게는 결코 경험적 개념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도대체가 개념이 아닐 뿐더러 경험적 표상도 아니고 한낱 순수한 직관들이다... "직관은 개별 표상(repaesentatio singularis)"으로서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다". 직관은 대상과 무매개적으로 또는 "곧바로(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개별 표상이란 여러 대상들에 공통적인지 않은 표상, 그러니까 하나의 특정한 대상 내지는 단 하나의 대상에 대한 표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시간은 개별 표상이다... 공간/시간은 감각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하고 "선험적"인 직관이다.(p37) <순수이성비판 1> 中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시간과 공간을 경험으로 인식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닌 정신이 직관하는 대상으로, 사물은 정신에 의해 감지될 때에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칸트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대강의 개념은 오늘날에도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시각(視覺)을 통한 정보 전달은 과학적으로 아래와 같이 뒷받침될 수 있다.

 

 색과 관련된 현상은 부분적으로 물리적 세계의 특성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나 색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 눈이 받아들인 외부의 정보(빛)가 두뇌를 통해 재구성된 결과이다. 물리학은 눈으로 날아오는 빛의 성질을 규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빛이 일단 우리 눈으로 들어온 후에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들은 광화학과 신경학, 그리고 심리학적 과정에 더 가깝다.(35-1)... 눈의 경우에는 세 개의 층을 이루는 세포들이 복잡한 계산을 수행하여 색을 분석한 후, 그 결과과 시신경을 통해 두뇌로 전달된다. 망막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생리학적 과정들은 외부의 자극에 두뇌가 반응을 보이는 첫 단계인 셈이다.(36-2)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1> 中



 [그림] 망막( 출처 : 위키백과)


 '본다'는 행위가 망막을 통해 '빛 light'으로 표현된 세상의 정보가 뇌에 전달되는 과정이라고 할 때, 우리가 오감(五感) 중에서 가장 신뢰하는 '시각(視覺) 정보' 는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직관인 '빛 light'을 통해 전달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정보의 약 70%가 '빛'이라 한다면. 칸트 철학에서 '빛'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하겠다.


 사실, 빛이 칸트 철학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고대 철학에서 로고스(logos)로 표현되는 '빛'의 중요성은 고대의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빛에 밝음과 긍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빛은 '선한 신'의 속성 또는 부분이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물과 흙으로 인간들을 빚은 다음 제우스 몰래 회향풀의 줄기에 감춰두었던 불을 인간들에게 주었다.(7장 1, p47)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中 


 이아페토스이 빼어난 아들은 그분을 속이고는 속이 빈 회향풀 줄기 속에다 감춰 지칠 줄 모르는 불의 멀리 보는 화광(火光)을 훔쳤다.(565 ~ 567, p71) <신들의 계보> 中


 불에 대한 가치 부여의 가장 중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악취 제거(deodorisation)인 것 같다. 냄새란 더없이 위선적이고 성가시게 자신의 존재를 강요하는, 원초적이며 거역할 수 없는 측질이다. 불이 모든 것을 정화한다면 그것은 불이 무엇보다도 악취를 제거하기 때문이다.(p187) <불의 정신분석> 中


 생명은 빛이었다.(요한복음 1:4)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이성적 존재들과 비이성적 존재들을 모두 살아있게 하는 그 생명이 아닙니다 .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말씀에 더해진 것으로서 첫 번째 말씀에 참여하게 돌 때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존재하게 되면, 그 생명은 지식의 빛을 얻는 기초가 됩니다.(p98) - 오리게네스의 <요한복음 주해> 中 -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눈먼 사람 앞에 지혜가 있지만 그의 눈에는 지혜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혜가 그의 앞에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지혜 앞에 없기 때문입니다.(p99) -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 복음 강해> 中 - <교부들의 성경 주해> 中


 이러한 빛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현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받아들여지면서 시간(time)과 공간(space)이 시공간(space-time)으로 통합되었고, 빛의 속도는 '절대 속도'로 인정되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과학의 천재들>은 기차 안에 두 개의 전구와 전구들 사이의 스크린이 놓예 상황에서 기차가 오른쪽으로 지난다고 했을 때 일어나는 경우를 예로 들며 상대성 이론의 개략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날아오는 두 빛이 속도가 달라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가설대로라면 빛의 속도는 같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빛이 스크린이 스크린에 닿으려면 더 오래 걸려야 한다. 따라서 오른쪽으로 가는 빛을 내는 왼쪽의 전구는 오른쪽의 전구보다 더 먼저 켜졌어야 한다. 두 개의 전구를 켜는 일, 즉 두 사건이 제2관찰자에게 있어서는 동시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동시성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이다. 동시성에 대한 이 같은 불일치를 불어오는 핵심적인 이유는 두 관찰자가 왼쪽으로 날아가는 빛과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빛이 둘 다 같은 속도를 가진다는 가정 때문이다.(p130) <과학의 천재들> 中


  '엠씨스퀘어'로 표현되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방정식은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환될 수 있으며, 광속 이상의 속도를 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직관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광속(光速)을 절대속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빛을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태도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에너지 E는 입자의 정지 질량과 같아진다. 이때 시간의 단위를 보통의 시간으로 바꾸면 다음 식이 얻어진다.  


 

 다시 말해서 질량과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같은 것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인 것이다. 즉 물체의 질량은 상수가 아니가 아니고 에너지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우리는 마지막 식으로부터 q가 1, 곧 광속에 접근함에 따라 E가 무한대로 발산함을 알 수 있다.(p107) <상대성이란 무엇인가> 中


 이와 같은 수학적(또는 과학적)판단에 대해 우리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받아들이는데, 이러한 판단의 근거를 우리는 <순수이성비판>안에서 찾을 수 있다.

 

 수학만이 입증들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수학은 개념들로부터가 아니라, 개념들의 구성, 다시 말해 개념들에 대응해서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직관으로부터 인식을 도출하니 말이다. 방정식에서 환산에 의해 증명과 함께 참값을 구해 내는 대수학자들의 수행방식조차도 비록 기하학적인 구성은 아니지만 기호에서 개념들을, 특히 양들의 관계에 대한 개념들을 직관에서 제시하는 아주 특별한 구성이다.(B762, p880) <순수이성비판 2> 中


 그렇지만, 이와 같은 수학적 판단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일까? 수학적 진리를 선험적이라고 말한 칸트는 같은 책에서 수학적 종합의 한계 역시 지적한다. 수학적 연결이 계열 외의 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칸트의 말을 통해 우리는 '빛의 절대성'에 대해서도 의심할 수 있지 않을까.


 현상들의 계열들의 수학적 연결에서 감성적 조건, 다시 말해 그 자신이 계열의 한 부분인 그러한 것 외에는 어떤 다른 조건도 들어올 수 없게 된다.(B558, p722)  <순수이성비판 2> 中


  '빛'은 고대로부터 지혜, 지식, 생명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상징에 우리는 수학이라는 이름으로 절대속도인 '광속'이라는 또다른 절대성을 부여한 것은 아닐런지...  문화와 떨어질 수 없는 우리의 인식이 부여한 빛의 절대성. 개인적으로 빛의 이러한 속성 함께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입자 타키온(tachyon)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림] What is a Tachyon particle anyway?(출처 : https://www.1e.com/news-insights/blogs/what-is-a-tachyon-particle-anyway/)

 

타키온 tychyon 광속(光速)보다 빠른 입자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예측에서 그 입자에 대한 명칭.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광속보다 빠른 입자는 없으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상대성 이론의 방정식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광속을 넘어설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아직 실증되지 않았지만, 타키온의 의미는 과학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고(思考)가 우리 문화(文化)의 영향을 짙게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주어진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특히, 그 근거가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되면서 과학(科學 science)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면 이를 논박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많은 것이 객관적으로 측정되고 정량화된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현실안에서 어쩌면 우리는 과학이라는 이름의 비과학적 사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과학의 출발이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방법론적 회의(methodological skepticism) 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보다 많은 것에 의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현재 수학적으로 공인된 방정식에서 상수(常數 a constnant)로 가정되었던 항목이 변수(變數 variable)로 바뀔 때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었고, 이러한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또한 비켜갈 수 없었다. 칸트 시대 당시 선험적이라 여겨졌던 뉴턴과 유클리드의 사상이 이제는 더이상 선험 지식이 아니라는 변화된 현실 속에서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비록 <순수 이성 비판>의 구체적 내용은 새로운 경험에 의해 바뀌었지만, 인식의 틀은 현대에도 유효하다는 사실 속에서 서양 철학에서 칸트가 차지하는 위상을 조금이나마 짐각하게 된다. 칸트의 사상이 워낙 큰 틀이었기에, 이러한 틀을 깨기보다는 보완하기 위한 방편으로 변증법(辯證法, dialectics)의 등장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수학의 진리가 사실은 우리 인식(또는 문화)의 산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과 열린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최근 읽은 책들 안에서 두서없이 나열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시간여행에 대한 뜬금없는 생각 


M이론에 따라 세상이 11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11개 차원이라는 이야기를 각 사건(event)마다 11개 좌표를 가진다는 의미로 본다면, 최대 4차원까지 통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7개 차원의 7개 좌표를 통제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나오지 않는한 웜홀(wormhole)을 활용한다 하더라도 시간 여행을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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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2 13: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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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2 14: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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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2 19: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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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2 19: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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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프로타고라스> 강독 첫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강독에서는 특히,소피스트의 역할과  아테네의 정체(政體)를 배경으로 새롭게 <프로타고라스>를 접근하여 새롭게 <프로타고라스>를 바라볼 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하 페이퍼에서는 강의 내용을 다른 책의 내용과 함께 정리해보려 합니다. 

 

 <프로타고라스>는 궤변철학의 영역에서 플라톤이 벌이는 경합입니다. 이는 변증술의 사용이라든가 시인들을 해석하는 일 등등에서 그가 더욱 유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대화편에는 이전의 대화편들에서와 같은 신랄함과 예리함은 없습니다. 이 대화편 역시 전적으로 일반인을 위한 것으로서, 궤변철학이 가장 긍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에서조차 그것에 대한 경의의 도를 낮추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중요한 대화편도 아닙니다.(p192) <플라톤의 대화 연구 입문> 中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의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다. <프로타고라스>에서 보여지는 다른 대화편에 비해 치밀하지 못한 구성,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5 ? ~ 410)을 압도하지 못하는 주인공 소크라테스( Socrates, BC 470 ~ BC 399)의 논변 등은 이러한 니체의 평가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지만, <프로타고라스>를 당시 정치상황과 함께 바라본다면 어떨까? 새로운 관점에서도 니체의 부정적인 평가는 유효할 것인가? 이를 알아 보기 위해 아테네의 민주정(demokratia)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이 부분은 로버트 달(Robert Alan Dahl, 1915 ~ 2014) 교수의 <민주주의 On Democracy>가 잘 소개하고 있어 해당 내용을 옮겨 본다. 

 

 아테네 정부는 복잡하여 여기에서 적절히 묘사하기가 곤란할 정도다.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모든 시민이 참여할 자격을 갖고 있는 의회(assembly)였다. 의회는 소수의 주요 관리들 - 장군들 -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공적 의무를 수행하는 시민을 선발하는 주된 방법은 자격을 갖춘 시민들은 모두 똑같이 선출될 확률을 가진 추첨제였다. 조사에 의하면, 보통 시민들은 정부의 가장 중요한 통치관으로 선출될 기회를 생애에 한 번은 가졌다고 한다.(p29) <민주주의> 中


 추첨제와 투표제에 의해 유지되고 되었던 아테네의 민주정에서 실권은 장군들(Strategos)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많은 아테네 젊은이들이 명예와 재물을 좇아가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민주정은 이러한 젊은 인재들의 공급이 화수분처럼 이어졌을 때 유지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궤변론자로 알고 있는 소피스트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던 이들이었을까? 


 소피스트 Sophist란 원래 '현인(賢人)' 또는 '지자(知者)'를 의미하였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가장 중요한 과목은 변론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신(一身)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 선(善)을 도모하고, 언론이나 행위에서도 유능한 사람이 되는 길'을 청년들에게 가르친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한 자인 체하는 기술만을 가진 데 불과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밝힌 것이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中


 정리하면, 소피스트는 민주제도 하에서 인재공급을 담당하던 민주정의 중추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던 이들이었다. 이에 반해, 우리가  <국가 Politeia>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또는 플라톤)이 추구하는 정체는 철인(哲人)에 의한 정체다. 결국,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피스트에 대해 비판적인 주장을 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바로 민주정을 비판하는 <국가>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흔히 '소크라테스의 역설'이라고 부르는 철학적 입장들, 즉 덕이 곧 앎이라거나(知德合一) 개별 덕들이 사실은 동일한 하나의 것이라거나 (德의 單一性) 누구도 자신이 아는 것과 달리 행동할 수 없다거나(자제력 없음의 불가능성)하는 입장들에 대한 본격적인 논증이 제시되는 곳이 다름 아닌 <프로타고라스>이다.(p24) <프로타고라스> 中

 

 그렇다면, 이들이 펼치는 논쟁 주제인 '교육(敎育)을 통해 덕(arete)를 기를 수 있는가?' '덕은 단일한가?' 등은 바로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논쟁으로 정리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프로타고라스>는 프로타고라스로 대표되는 민주정과 소크라테스로 대표되는 철인정치체제의 체제간 논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프로타고라스>를 바라봤을 때, 왜 처음에 이 대화편이 이해가 안되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된다. 민주정치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소크라테스보다 프로타고라스 논리가 더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정치철학으로서 <프로타고라스>의 구체적 모습은 다음 수업에 소개될 것이기에 기대감을 품고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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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4 1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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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4 13: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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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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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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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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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05: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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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14: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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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연휴를 마치고 플라톤(Platon, BC 427 ~ BC 347)의 <티마이오스 TImaios>에 대한 강의를 청강하고 왔습니다. 플라톤의 우주론(Cosmology)가 담긴 <티마이오스>를 읽었지만, 상당히 어려운 대화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강의를 듣고 나니 조금은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 강의 자료와 함께 개인적인 내용정리도 함께 올려 봅니다.(이하 반말)


 <티마이오스>는 화자인 티마이오스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다른 대화편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티마이오스>의 우주론 역시 티마이오스의 입을 빌려 설명되는데, 우주론은 크게 다음의 내용으로 진행된다.


1. 존재와 생성/소멸


 티마이오스에 따르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사유'와 '합리적 설명'이 가능한 반면, '생성'되는 것은 '소멸'되는 것이며, '감각'과 '의견'에 의해 파악된다. 그렇다면, 생성된 것이 분명한 우주는 소멸되는 것이며,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그렇지만, 최상의 아름다움을 가진 필멸의 존재)


 그러니까 제 판단으로는 먼저 다음 것들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존재하는 것(to on aei)'이되 생성(genesis)을 갖지 않는 것은 무엇이고, '언제나 생성되는 것(to gignomennon ari)'이되 결코 존재(실재)하지는 않는 것은 무엇인지 말씀입니다. 분명히 앞엣것은 '합리적 설명(logos)'과 함께하는 지성에 의한 앎(이해)(noesis meta logou)'에 의해 포착되는 것으로서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aei kata tauta on) 것'인 반면에 뒤엣것은 '비이성적인 감각(aisthesis alogos)'과 함께 하는 의견(판단 doxa)의 대상으로 되는 것으로, 생성/소멸되는 것이요, 결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데, 생성되는 모든 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원인이 되는 어떤 것에 의해 생성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원인 없이는 생성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7d - 28a) <티마이오스> 中


 그렇지만, 데미우르고스는 완벽한 존재를 모상으로 우주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주는 생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우주는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무질서에서 질서가 있는 상태로 이끌리게 된다. 정리하면, 우주는 생성된 필멸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형상'의 모상이기 때문에, 카오스(Chaos)에서 코스모스(Cosmos)로의 변화된다. 그리고, 이 우주는 몸통과 혼을 가진 존재이며,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음에 이어진다.


 그런데 무엇을 '만드는 이(匠人, demiourgos)이건 간에, 그가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바라보면 이런 걸 본(paradeigma)으로 삼고서, 자기가 만드는 것이 그 형태(모습 idea)와 성능(dynamis)을 갖추게 할 경우에라야, 이렇게 완성되어야만,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됩니다.(28b) <티마이오스> 中


 이 우주(Kosmos)가 과연 아름답고 이를 만든 이(demiourgos) 또한 훌륭하다면, 그가 영원한 것(to aidion)을 바라보고서 그랬을 것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우주는 바로 그렇게 해서 생겨났기에, 그것은 합리적 설명(logos)와 지혜(phronesis)에 의해 포착되며 '똑같은 상태로 있는 것'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점들이 이러할진대, 이 우주가 어떤 것의 모상(模像 : eikon)일 것임이 또한 전적으로 필연적입니다.(29b) <티마이오스> 中


 이 우주를 구성한 이(ho synistas)는 훌륭한(선한 : agathos) 이였으니, 훌륭한 이에게는 어떤 것과 관련해서도 그 어떤 질투심이든 이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그는 질투심에서 벗어나 있어서, 모든 것이 최대한으로 자기 자신과 비슷한 상태에 있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그것을 무질서 상태(ataxia)에서 질서 있는 상태(taxis)로 이끌었습니다. 질서 있는 상태가 무질서한 상태보다는 모든 면에서 더 좋다고 생각해서였죠.(29e -30a) <티마이오스> 中


 2. 우주의 몸통


 우주는 물체적인 것으로 시각적인 '불'과 촉각적인 '흙'을 재료로 한다. 그렇지만, 이들을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비례'라는 질서가, 중간재료로 '물'과 '공기'를 필요로 한다. 결국, 불, 흙, 물, 공기의 비례적 관계에 의해 우주의 몸통이 구성되는 것이다.


 생성된 것은 물체적인 것이며 볼 수도 있고 접촉할 수도 있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불 없이는 어떤 것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될 수 없고, 단단한 어떤 것 없이 접촉할 수 있는 것으로 될 수도 없지만, 흙이 없고서는 단단한 것이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신은 불과 흙으로 우주의 몸통을 구성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셋째 것 없이 이들 둘 만으로는 훌륭하게 결합될 수가 없습니다. 양쪽 중간에서 결합해 주는 어떤 끈(desmos)이 생겨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끈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은 자신도 묶여진 것들도 최대한 하나로 만드는 것이겠는데, 이 일은 등비 비례(analogia)가 그 성질상 가장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31b)... <티마이오스> 中


 우주의 몸통은 실상 입체적인 형태로 되는 것이 적절하거니와, 입체적인 것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것은 결코 하나의 중항(mesotes)이 아니라, 언제나 두 개의 중항입니다. 바로 그래서 신(神)은 물과 공기를 불과 흙 사이의 중간에 놓고서, 이것들을 가능한 한, 그것들이 서로에 대해 같은 비례 관계를 갖게 하여... 천구(ouranos)를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것으로 구성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리고 수에 있어서 이와 같은 네 가지인 것들에서 우주의 몸통이 그 비례 관계로 인해 조화를 이룸으로써 생겨났으니..(32c) <티마이오스> 中


3. 우주의 혼(魂)


그렇다면, 우주의 혼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우주의 혼은 동일성과 타자성, 그리고 기본적 존재(ousia)의 결합을 통해 혼(魂)으로 결합된다. 그리고, 데미우르고스는 이들을 잘라내어 운동을 만들어 내는데, 이들 중 '타자성 운동'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행성의 움직임이 이루어진다.


 그(우주를 구성하는 이)는 불가분적이고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존재(ousia)와 물체들에 있어서 생성되고 기본적인 존재, 이들 양자에서 그 중간에 있는 셋째 종류의 존재를 혼합해 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는 동일성(he tautou physis) 및 타자성(he tou heterou physis)과 관련해서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것들의 불가분적인 것과 물체들에 있어서 가분적인 것의 중간에 있는 셋째 종류의 것들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셋인 이것들을 갖고서 이 모두를 하나의 형태(idea)로 혼합했는데, 동일성과 섞이기 힘든 타자성은 억지로 조화를 이루게 결합했죠. 그리고는 [이것들을] 존재와 함께 섞어서, 셋으로 하나를 만들고, 다시 이 전체를 그가 적절한 부분들만큼 나누었지만, 나뉜 각 부분은 동일성(tauton), 타자성(thateron) 그리고 존재(ousia)로 혼합된 것입니다.(35a -35b <티마이오스> 中


 그는 혼합된 것, 즉 거기에서 그가 이것들을 잘라 냈던 그것을 이렇게 해서 어느새 마저 마저 써 버렸습니다. 그리고서 그가 이 전체 구조(systasis)를 길이로 둘로 가르고서, 그 둘을 'X' 모양으로 중점이 서로 교차하도록 한 다음, 그 각각이 원형으로 하나를 이루게 구부렸습니다. 이것들이 [처음의] 그 교차점과는 반대편에서 또 한 만나게 한 거죠. 그리고선 그것들을 같은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회전하는 운동으로써 에워싸서는 이들 원(kyklos) 가운데 하나는 바깥쪽 것으로, 다른 하나는 안쪽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바깥쪽 운동을 '동일성의 운동(phora tes tautou physeos)'이라 부르고, 안쪽 운동은 '타자성의 운동(phora tes thaterou physeos)라 불렀습니다. 그는 동일성의 운동은 평면으로 오른쪽으로 돌게 하되, 타자성의 운동은 대각선으로 왼쪽으로 돌게 하지만, 주도권은 동일성과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회전[운동](periphora)에 주었습니다.(36c) <티마이오스> 中


[사진] 타자성과 동일성의 궤도(출처 : <티마이오스>)


 4. 시간


 본래 형상은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생성된 존재는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데미우르고스는 시간을 만들어내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지만, 필멸의 존재들은 시간을 인식할 수 없다. 때문에, 데미우르고스는 시간을 인식시키기 위한 수단을 추가적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별(star)'이다. 


 본(paradeigma)이 살아 있는 영원한 것이듯이, 그는 이 우주도 그처럼 가능한 한 그런 것이도록 만들어 내려고 꾀했습니다. 그런데 그 살아있는 것의 본성은 영원한 것이어서, 이를 생성된 것에 완전히 부여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는 어떤 영원(aion)의 모상(eikon)을 만들 생각을 하고서, 천구에 질서를 잡아 줌과 동시에, 단일성(hen) 속에 머물러 있는 영원의 [모상], 수에 따라 진행되는 영구적인 모상(aionion eikon)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chronos)이라 이름지은 것입니다.(37c) <티마이오스> 中


[사진] 행성의 운동(출처 : <티마이오스>)


 본이 영원토록 있는 것인 반면에, 천구는 그것대로 일체 시간에 걸쳐 언제나 '있어 왔고' '있으며'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생겨나도록 하기 위한 시간의 창조(genesis)와 관련되는 신의 이러한 숙고와 의도로 해서 태양과 달 그리고, 떠돌이별들(행성들 astra planeta)이라는 이름을 갖는 그 밖의 다섯 별(달, 태양, 수성, 금성, 화성)이 시간의 수치들의 구별과 수호를 위해 생겨났습니다.(38b) <티마이오스> 中


 결국 <티마이오스>의 창세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데미우르고스는 '영원한 존재인 형상의 모상'으로서 '우주'를 만들었기에 우주는 생성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생성된 것으로서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의 질료는 4원소(불, 흙, 공기, 물)이며, 우주의 혼은 동일성, 타자성과 기본적 존재의 혼합으로 만들어진 회전 운동으로 구성된다. 다만, 이러한 우주의 혼과 몸통은 유한한 것(그렇지만, 매우 긴)이기 때문에, 우주는 '과가-현재- 미래'라는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며, 시간을 알기 위해 별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다소 황당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티마이오스>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다른 곳에 있다(고 강의에서 말했다.) 그것은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이 말하는 바가 '인간이 우주와 같이 혼을 가지고 운동을 한다면 질서있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티마이오스> 강의에서는 여기까지 강의되었지만, 이에 대해서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인 <파이드로스 Phaedrus>라는 연결 고리를 가지고 조금 더 생각해보자.

 

 <티마이오스>의 대화는 <국가 The Republic>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최선의 정체(政體)가 무엇인가?'를 묻는 <국가> 다음에 '우주(宇宙)'론이 나오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국가'가 지향하는 바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이 될 것이다. 영혼의 불멸을 주장한 <파이드로스>의 내용을 중간에 넣는다면, 이 관계는 더 명확해진다. 우주의 혼은 질서있는 회전 운동을 한다.(티마이오스) - 인간도 혼이 있으며, 이 혼은 불멸한다.(파이드로스) - 인간들이 모여서 질서있고 조화롭게 살아간다면, 우리도 생성되었지만, 영원한 형상의 존재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치 우주처럼(국가).  이것이 강의에서 말하는 도식이었다고 정리해본다.


그렇다면, 과연 <티마이오스>를 정치철학이라고 볼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전에 먼저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과연 플라톤과 그리스 철학만의 고유한 사상일까 부터 살펴보자. 발터 부르케르트(Walter Burkert, 1931 ~ 2015)의  <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Babylon, Memphis, Persepolis>에 따르면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오리엔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카드 문헌에서도 생성 혹은 창조(바누), 파괴(훌루쿠), 존재(바슈)의 세 개념이 만물을 포괄하고 지배하는 체계 속에 결합된 것을 볼 수 있다.,,, <에누마 엘리시>는 신이 파괴나 생을 명할 수만 있다고 가정하는 것인데, 파르메니데스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그리스어로 변형된 옛 천지창조론은 새로운 토대를 이루었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외양을 넘어 합리적인 논증으로 드러나는 '존재'의토대이다. 훗날 플라톤은 이 논증에 아프리오리 개념이라는 수학적 기초를 놓았다.(p94) <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中


 그리스의 창조론이 오리엔트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천문학 역시 오리엔트 영향을 받았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고, 천문학의 목적 역시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 천문학 역시 지배층들의 지배수단이었다고 바라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문명화의 길로 접어들던 한 종족이 시대적으로 틀림없이 농사를 지었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곳에 우리 스스로를 놓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며, 대부분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언제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농작물을 거두어들이고 풀을 베어내는지'를 꿰뚫은 사람들만 진정으로 성공했을 것이다. 처음에 그런 지식을 얻는 유일한 수단은 천체를 관측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p17) <천문학의 새벽> 中


 그런 의미에서 하늘을 읽고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은 정치 행위였다는 사실은 이집트에서만 확인되는 사실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맹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수양할 것과 천리를 알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을 보면 동양에서도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 정치수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孟子曰 盡其心者는 知其性也니 知其性則知天矣니라

存其心하여 養其性은 所以事天也요

天壽에 不貳하여 修身以俟之는 所以立命也니라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그 마음을 지극히 하는 사람은 그 본성 本性을 알게 되니 그 본성을 아는 사람은 그 천리 天理를 알게 될 것이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본성을 수양 修養하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요, 요사 夭死하는 것과 장수 長壽하는 것에 의심하지 않고서 몸을 수양하여 천명 天命을 기다리는 것은, 자기의 본성을 잘 수양하여 기다리는 것이다." <맹자 진심장구 상 孟子 盡心長句 上> 中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국가>라는 정치철학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은 무리한 설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는 별도로 플라톤과 비슷한 시기에 맹자(孔子, BC 372 ~ BC 289)가 멀리 떨어진 동양에서 '천명 天命'을 강조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로운 지점이라 여겨진다. 또, 멀리 플라톤과 맹자 시기까지 거슬러갈 것도 없이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 1995) 철학의 지향점이 정치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정치철학이 철학의 종착점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글이 매우 길어졌기에, <티마이오스>와 여기에서 파생된 여러 이야기가 담긴 이번 페이퍼를 서둘러 마무리한다.... 


PS. 창조신인 '비슈누'와 파괴의 신 '시바' 그리고 분신인 '크리슈나'가 등장하는 <마하바라따>를 생각하면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인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는 다음 기회로 일단 넘기자... 이렇게 곁가지로 새니 책 한 권 제대로 읽기가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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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7 0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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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7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황금모자 2019-02-17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은 박홍규에 관련된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추천해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19-02-17 15:58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플라톤의 대가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황금모자님의 추천을 받게 되니 반드시 읽어봐야겠습니다. 황금모자님 감사합니다!^^:)

AgalmA 2019-02-17 18: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은 목적론적 지향, 즉 인과적 사고가 사실상 우리 사고의 브레이크 혹은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하라리도 지적하듯이 농경생활은 그 지역에서 그 작물이 재배된 우연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지 인간이 농경을 위해 그 작물을 재배한 것이 원인은 아니었죠. 물론 후대에서는 목적 달성을 위해 많은 걸 벌이고 있긴 하지만요. 그러나 정작 처음의 목적과는 다른 경로의 발전도 많죠. 원자폭탄이 만들어진 과정이라든지, 실험 중에 우연히 만들어진 것들이 다른 문제에 도움이 되는 경우(탈모 문제를 연구하다 만들어진 비아그라 같은ㅎㅎ;;)도 많고.
인간은 인과적 사고를 하는 특성이 있어 원인 결과를 따질 수밖엔 없긴 하지만, 그런 식의 사고 때문에 이해하기 너무 큰 것에 ‘이것은 신이 만든 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식도 나온 것이라 참...

요즘 마르쿠스 가브리엘 <나는 뇌가 아니다> 읽으면서도 한숨을 계속 쉬었는데요. 그는 신경과학이 인간을 뇌로 설명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과학적 설명을 한계로만 치부하며 철학적 관점을 고수하려는 확증 편향 아닌가 싶은 대목이 참 많아요. 인간은 뇌의 어느 부부만 잘못되어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교란을 많이 받잖습니까. 여기서 ‘진짜 그‘는 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상적인(?) 본질적인(?) 그‘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모든 게 그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성적‘, ‘주관/객관‘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사고 모형일 뿐입니다. 합리적 설명을 위해 다양한 관점을 받아들이고 톺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인간의 사고가 불완전하다는 걸 누구나 아는 만큼.

겨울호랑이 2019-02-17 18:40   좋아요 3 | URL
^^:) AgalmA 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에 생겨난 이유가 있다는 말은 우리 삶을 부품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말로 기억됩니다만, 인간은 ‘뇌‘가 아닌 ‘위‘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인간은 배고프면 살 수 없다는 그의 말 속에 현실이 잘 녹아있다 여겨집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요. 우리 안의 유전자도 그걸 원할 거라 넘겨짚어봅니다 ^^:)

2019-02-18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8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완전한 행복이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지 간단하게 보여 주겠다. 너에게 너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너 자신을 소유하고 있다면 너는 네가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어떤 것, 운명의 여신이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p70) <철학의 위안> 中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Torquatus Sererinus Boethius, AD 480 ~ AD 524)는<철학의 위안 The Consilation of Philosopy>에서 완전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찾아간다. 보에티우스가 스콜라(Scholar) 철학 선구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론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철학의 위안>을 읽을 때 느낀 즐거움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철학의 위안>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내용 안에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보려 한다.


 <철학의 위안>은 여러 가지 의문들 - 보에티우스는 기독교도였는가? 정말 그가 기독교였다면 투옥과 죽음에 임박한 시간에 마땅히 그의 가장 큰 위안이 되었어야 할 신앙에 대한 언급이 어찌하여 <철학의 위안> 속에 전혀 없는가? -로 둘러싸여 있다.(p14) <철학의 위안> 서문 中


 <철학의 위안> 속에서는 우리가 행복이라고 여기는 요소들을 차례로 제시하며, 이들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음을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는 플로티노스(Plotinus, AD 203 ~ AD 270)의 <엔네아데스 The Enneads>의 철학을 이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일종의 파라독스(paradox, 逆說)이며 나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것은 행운보다 불운이 인간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이다. 행운은 항상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소로 너희를 속인다. 반면에 불운은 변화함으로써 그 참된 모습인 변덕스러움을 드러내기 때문에 항상 진실하다. 행운은 인간을 속이지만 불운은 인간을 깨우쳐 준다(p91) <철학의 위안> 中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그런(고통스러운) 것들이 그때마다 그들의 경우와 똑같은 모습으로 비춰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 그러면 고통이란 어쩌면 우리 영혼의 나약함과 관련된 것이리라.(Enn, I 4, 8)


 <철학의 위안>에서는 불운이 행운보다 유익할 뿐 아니라, 재물과 권력은 '결핍'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이들로 인한 행복은 완전한 행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철학의 위안>에서 말하는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이란 일단 손에 넣게 되면 바랄 나위 없는 최고의 선(善)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좋은 모든 것들의 완성이며 자신의 좋은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거기에 뭔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행복일 수 없다. 거기에 내포되어 있지 않고 뭔가가 부족하다면 여전히 그것을 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모든 좋은 것이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상태이며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길을 통해 도달하고자 애쓰는 목표임이 분명하다.(p98) <철학의 위안> 中


 단테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 '베르길리우스' 나 플라톤 대화편에서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역할을 <철학의 위안>에서는 의인화된 '철학'이 수행한다. 그리고, 여신 '철학'은 화자인 보에티우스를 산파술을 통해 행복의 정의로 끌고 나간다.


 만물을 창조하신 신(神)은 선(善)하다는 것이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신보다 더 선한 것은 생각할 수 없으며, 선은 그 어느 것보다도 우월하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신의 선함이 완벽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의 이성(理性)은 신이 그토록 선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준다.(p133) <철학의 위안> 中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참되고 완전한 행복이란 자족적(自足的, self sufficient)인 인간, 강한 인간, 존경 받기에 합당한 인간, 영예롭고 유쾌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행복입니다... 자족, 강함, 존경, 영예, 유쾌는 모두 같은 것이므로 그것들 중 어느 하나를 진정으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행복이야말로 참된 행복이라는 것을 저는 조금의 의혹도 없이 알고 있습니다.(p129)... 만물의 아버지에게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초석(礎石)이 놓이지 않을 것입니다.(p130) <철학의 위안> 中


  <철학의 위안>에서는 결핍이 없는 진정한 선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며, 진정한 선은 바로 신(God)에서 찾을 수 있음을 말한다. 결국, <철학의 위안>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신(神)=선(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결론의 뿌리를 <엔네아데스> 이전 플라톤(Platon, BC 427 ~ BC 347)의 <향연 Symposion>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철학의 위안>과 고대 그리스 철학을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은 영혼을 신(神)과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하게끔 이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Enn, I 6, 6)...  참된 지혜가 존재요, 참된 존재가 지혜인 셈이다... 이때 지혜는 [많은] 이론적인 것들로부터 종합해 낸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하나이다.(Enn, V 8, 5)


 우리는 이미 신과 행복이 하나이며 동일한 것임을 증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神)은 선(善) 그 자체에서만 발견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p138) <철학의 위안> 中


  그는 아름다운 바로 그것 자체를 알게 되는 거죠. 친애하는 소크라테스, 인간에게 삶이 살 가치가 있는 건 만일 어딘가에서 그렇다고 한다면 바로 이런 삶에서일 겁니다. 아름다운 바로 그것 자체를 바라보면서 살 때 말입니다.... 순수하고 정결하고 섞이지 않은 아름다운 것 자체를 보는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난다면, 즉 인간의 살이나 피부나 다른 가시적인 허접스레기에 물든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단일 형상인, 신적인 아름다운 것 자체를 그가 직관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떠하리라고 우리는 생각합니까?(211 d ~ 212 a) <향연> 中


 다음으로 <철학의 위안>은 중세철학의 어느 부분과 맞닿아 있을까? 우리는 이를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 ~ 1109)의 <모놀로기온 Monologion>의 신 존재 증명 앞 단계에서 하나의 선(신)을 가정하는 논증과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 ~ 1471)의 <준주성범(그리스도를 본받아) 遵主聖範 De Imitatione Christi>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육체의 감각으로 체험하고 정신의 이성으로 분별할 수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무수히 많은 선(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 다른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되는 하나의 선한 것 unum aliquid, per quod unum sint bona quaecumque bona sunt 이 존재한다고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각 사물들마다 다른 선이 존재하는가? <모놀로기온 Op.p.14(p17)>


 <하나>에게는 [자기 바깥에 달리] 선(善)이 없으니, 그 밖의 어떤 것을 원하는 일이 없다. 오히려 <하나>는 초-선(超-善)으로서 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선이니, 물론 다른 모든 것들이 <그>에게 참여할 능력을 갖고 있는 의미에서 선이다.(Enn, VI 9, 6)


 모든 조성된 선한 것을 네가 다 가졌다 할지라도 다행하고 복될 수가 없고, 오직 모든 것을 조성하신 하느님 안에 너의 모든 복이 있고 모든 낙이 있다. 세상을 사랑하는 미련한 자들이 무엇이라 하고 어떻다고 찬미한다고 그것이 행복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착한 신자들이 희망하는 그것, 천상적 생활을 하는, 마음이 조촐하고 경건한 영혼들이 어떤 때에 맛보는 것, 그것이 참된 행복이다... 주 예수여,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에 나와 함께 하소서. 인간의 모든 위로를 즐겨 사양하는 그것이 내게 위로가 되게 하여 주소서. <준주성범 제3권 16장> 中


 이처럼 <철학의 위안>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함께 중세철학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종합해 본다면, 보에티우스와 그의 저서 <철학의 위안>을 둘러싼 여러 논란(보에티우스는  기독교도였는가? 왜 <철학의 위안>에는 신앙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가?)에 대한 간접적인 답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충분히 긴 시간 간격을 두고 볼 때, 지질학은 종(種)이 모두 변화해온 것을 뚜렷이 밝혀 주며 더욱이 종은 나의 이론이 요구하는 방법에 의해 서서히, 그리고 점진적인 방법으로 변화해 왔음을 명백하게 선언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연속되는 지층에서 나오는 화석유물이 서로 시간적으로 매우 떨어져 있는 지층에서 나온 화석보다 훨씬 더 서로 밀접한 유연관계를 갖는 것에 의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p457) <종의 기원> 中


 <철학의 위안>을 통해 '플라톤주의 - 신플라톤주의 - 중세 신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철학의 위안>이 '잃어버린 고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다만, 이대로 마치면 철학이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아래의 문장을 옮겨본다. 아마도 아래의 문장이 그나마 제목에 걸맞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어느 면에서든 현재 상태에 불만이 전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불안과 근심으로 가득 찬 것이 인간사(人間事)의 본질인 것이다. 인간사는 결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되지는 않는 법이며 또한 항상 변함없이 머물러 있는 일도 없다.(p68)... 운명의 여신이 내려준 운명을 받아들이기란 누구에게 있어서나 용이한 일이 아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그것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알 수 없으며 그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이 있다.(p69) <철학의 위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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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4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2-17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불안, 두려움, 공포도 우리가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필수적 감정이죠. 나침반이 동서남북이 다 있어야 지금의 위치를 알 수 있듯이. 부정적인 것을 적대시하며 ‘선‘을 최고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싶긴 합니다. 선-악을 나누는 종교적 관점과 사고의 결합이 ‘선‘의 위치를 이리 격상시킨 것도 같고.... 심리적으로도 이익적으로도 ‘선‘이 더 좋게 받아들여지는 건 이해가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일찍부터 음양의 조화를 말해온 동양철학은 참 깊은 혜안이죠.

겨울호랑이 2019-02-17 21:07   좋아요 1 | URL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최고선‘이 있다고 가정하고 모든 논의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서양철학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최고선‘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수‘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에, ‘최고선‘ 이 있다고 하기보다 ‘더 나은‘이 있다고 보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2019-03-04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8: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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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형은 죽음과 같다. 거기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의 평형은 클라우지우스의 열소멸, 즉 완전히 균일한 우주를 의미한다. 과학자들은 평형 상태에 관심이 있지만 그 외 세계에서의 평형 상태는 절대 종결을 의미한다. 모든 생명은 평형에서 벗어나 존재하고, 궁극적으로 태양에서 오는 끊임없는 에너지의 유입이 지구에 생명이 있게 한다.(p160) <모양> 中


 끊임없이 가용 에너지는 공급받는 계와 진짜 평형 상태가 아닌 어떤 불변의 정상 사태를 향해 변화해 가는 계에서, 열역학 법칙은 그 계의 최종 상태를 결정하기에 더 이상 충분치 않다. 다시 말하면 지속적인 에너지 다발(flux)이 평형에 도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p156) <모양> 中


  필립 볼(Philip Ball)교수의 형태학 3부작 중 <모양>의 리뷰에서 우리는 평형을 이루는 힘을 설명한 엔트로피(entropie)법칙과 이에 대항하는 끊임없는 에너지의 유입(influx)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주제를 철학적 관점에서 다룬 책은 없을까. 이러한 물음이 이번 페이퍼의 주제이며, 그 주된 답은 베르그손(Henri-Louis Bergson, 1859 ~ 1941)의 <창조적 진화 L'Evolution creatrice>로부터 찾을 수 있다.

 

 식물과 동물은 양분을 얻지 못하면 소멸한다. 왜냐하면 그때는 자기 자신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마치 큰 불길이 작은 불길을 그것의 양분을 소모함으로써 다 태워 버리고 소멸시키듯이, 소화의 근본적인 원인인 자연적인 열도 자신이 들어 있는 재료를 소모한다.(466b 29 ~ 32) <자연학 소론집> 中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oteles, BC 384 ~ BC 322)가 <자연학 소론집 Parva Naturalia>에서 동물과 식물을 비교, 대조하면서 수명의 길고 짧음 설명한 바 있다. 베르그손도 진화가 창조적 과정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동물과 식물로부터 출발해 '생명의 약동(elan vital))'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생명의 약동은 요컨대 창조의 요구로 이루어진다. 그 약동은 절대적인 방식으로 창조할 수는 없다... 생명의 약동은 거기서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는가?(p375)... 소화, 호흡, 순환계는 동물을 소제하고 수선하며 보호하고 가능한 외적상황에서 독립적이 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데 무엇보다도 동물이 운동으로 소비할 에너지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p376)... 그러면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섭취된 양분에서 생긴다. 왜냐하면 양분은 일종의 폭발물로서 이것은 스스로 축적한 에너지를 발산하기 위한 불똥만을 기다릴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식물이다.(p378) <창조적 진화> 中


 설명이 길어질 것 같으니, 버트런트 러셀(Bertrand Russell, 1872 ~ 1970)의 도움으로 빠르게 정리해 보자. 그에 따르면 베르그손은 <창조적 진화>에서 동물들 가운데 새로운 분기점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본능과 지성이 분리된 것으로 파악한다, 또한, 시간을 생명이나 정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특징으로 설명하고, 그중에서도 최고 상태에 이른 본능을 직관 intuition으로, 이와 관련된 시간을 지속 duration이 라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지속' 안에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은 통합되고, 그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인식한다는 것이 베르그손의 주장이다. 


 시간의 모든 순간들을 동일한 열에 놓고 본질적인 순간도 정점도 최고점도 인정하지 않는 과학에서 변화는 더 이상 본질의 감소가 아니고 지속도 영원성의 용해가 아니다. 시간은 흐름은 여기서 실재 자체가 되며 사람들이 연구하는 것은 흘러가는 사물들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로 과학적 인식은 그것을 완성하는 또 다른 인식을 불러내야 할 것이다.(p504) <창조적 진화> 中


  베르그손이 말한 생명체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유한하다. 이 개념을 이해할 때, 다음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본다. 즉, 생명체의 시간을 이루는 재료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재료가 되는데, 이들 재료는 서로 다른 양과 질을 가진다. 이처럼 재료가 반대되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는 필멸(必滅)의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닌지 적당히 버무리며  일단 '시간'을 마무리하고, 다시 생명의 약동으로 돌아가자.  


 모든 것들은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며 항상 움직임의 상태에 있다. 주변의 것은 이것에 맞춰 작동하거나 이에 거슬러 작동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는 곳을 옮긴 것들은 본래 주어진 것보다 더 오래 살거나 더 짧게 살지만, 반대되는 것들을 가지는 것들은 모두 어디에서도 영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재료라는 것은 곧바로 반대되는 것을 가지기 때문이다.(465b 25 ~ 32) <자연학 소론집> 中


 베르그손의 설명에 따르면 고체화(固體化) 되기를 거부하는 생명의 움직임이 '생명의 약동'일 것이다. 그리고, <모양>에 따르면 생명의 약동이 직면하는 방해 중 하나가 생명 외부에서 작용하는 엔트로피 법칙이 아닐까 여겨진다. 만약,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 ~ 1947)의 우주론(宇宙論)을 담은 <과정과 실재 Process and Reality>로 논의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 전체는 그 본질적인 점에서 에너지를 축적하고 다음에는 그것을 유연하고 변형가능한 관(管)속에 풀어 놓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이 관들의 끝에서 생명은 무한히 다양한 일들을 수행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생명의 약동이 물질을 관통하면서 단번에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약동은 유한하고 단 한 번 결정적으로 주어졌을 뿐이다. 약동이 나타내는 운동은 때로 빗나가고 때로 분열되며 항상 방해에 직면한다.(p379) <창조적 진화> 中

 

 진보의 기술은 변화의 한복판에서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이며, 질서의 한복판에서 변화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생명은 산 채로 미이라가 되기를 거부한다. 질서의 어떤 단조로운 체계 내에 오랫동안 정체하게 되면 정체하게 될수록 생기 없는 사회의 붕괴 소리는 그만큼 더 커지게 마련이다.(p641) <과정과 실재> 中


 <과정과 실재>에서는 서로 다른 대립자(對立者)들의 진보와 변화를 통해 실체를 파악하고 있는데, 이를 물리학적으로 설명한다면 <모양>에서 말하는 '엔트로피-반(反)엔트로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거기에 자리잡은 의식에 대해 어떤 가치를, 어떤 절대적인 실재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시간이 끊임없이 스스로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는 이 체계가 일체를 이루고 있는 예측불가능한 것과 새로운 것의 구체적 전체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지속은 물질 자체의 사실이 아니라 물질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생명의 지속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두 운동은 서로 연대하고 있다.(p498)  <창조적 진화> 中


 우리가 우주론을 구성함에 있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기쁨과 슬픔, 선과 악, 이접과 연접 - 일자 一者에 있어서의 다자 多者 the many in one -, 유동과 영속성, 이대성과 사소성, 자유와 필연, 신과 세계라는 궁극적인 대립자들이다. 이 목록에서 대립자들의 쌍은, 마지막 쌍을 제외하고는 직관의 어떤 궁극적인 직접성을 수반하는 경험 속에 있는 것들이다.(p645) <과정과 실재> 中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모든 생명체는 창조(creation)활동인 진화(evolution)를 하는데, 이러한 창조활동은 가장 발달한 본능인 직관을 통해 '지속'이라는 시간안에서 자신을 바르게 인식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반면, 생명체 외부에 적용되는 '엔트로피 법칙'은 이에 대해 대항력으로 작용하며 이들은 서로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우주적 평형은 이상의 힘들이 만들어낸 균형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PS. 베르그손이 말한 <창조적 진화>의 시간은 유한한 반면,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 ~ 1677)의 시간은 '영원한 상 아래서 sub specie aeternitatis'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영원(永遠)하다. <에티카 Ethica>에서 해당 내용을 옮기며 형태학 3부작을 다시 우려먹은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정신은 영원한 상 아래에서 인식하는 모든 것을 신체의 현재의 현실적 존재를 파악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상 아래에서 파악하는 것에 의해서 인식한다.(p354) <에티카 - 제5부 정리 29->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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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0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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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08: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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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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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16: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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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19: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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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2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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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2-04 1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테리 이글턴 <유물론>에서 읽은 관련 내용이 있어 참고하시라고 옮깁니다. 아직 리뷰로 정리할 시간은 없어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생기론적 유물론vitalist materialism의 전통에 속하며, 그 전통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에서 시작하여 스피노자, 셸링, 니체, 앙리 베르그송, 에른스트 블로흐, 질 들뢰즈, 기타 여러 사상가들로 이어진다. 당신이 이 전통에 설 경우에 얻는 혜택 하나는 이원론에 빠졌다는 나쁜 평판을 듣지 않으면서 정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나 에너지 형태의 정신은 물질 자체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전통은 일종의 비합리주의라는 질책을 받아왔다. 생기론적 유물론이 보는 실재는 불안정하고 변덕스럽고 끊임없이 변신한다. 관절염 환자처럼 뻣뻣한 범주들에 따라 세계를 분할하는 경향이 있는 정신은 이 끊임없는 흐름을 따라잡기 어렵다. 하나의 능력으로서 의식은 자연의 복잡성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서툴고 거추장스럽다. 과거에는 정신이 물질의 관성을 추월하곤 했다면, 이제는 변화무쌍한 물질이 정신을 앞지른다.

일부 생기론 학파들은 물질을 관념화하고 에테르화하는etherealize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그 학파들은 물질에서 고통을 제거하고 물질의 고분고분하지 않은 육중함을 외면할 위험에 처한다. 이런 온화한 관점에서 본 물질은 더는 아픔의 원천—우리의 프로젝트에 흠집을 내고 목표를 좌절시키는 자—이 아니다. 오히려 물질은 정신의 훌륭함과 유연성을 모두 가진다. 이것은 기이하게도 비물질적인 유형의 유물론이다.˝

겨울호랑이 2019-02-04 13:24   좋아요 1 | URL
^^:) 좋은 글을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에서 언급된 것처럼 데카르트 이래의 ‘이분법‘에 대해 스피노자는 반대에 서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서양에서 비합리주의적이라고 비판되는 학파는 물질과 정신을 분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양철학과 접점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여겨집니다.

AgalmA 2019-02-04 13:44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이 그들을 너무 호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지도요^^; 테리 이글턴은 스피노자, 베르그송, 들뢰즈의 생기론을 저 위의 일부 생기론으로 해석해 그들이 너무 관념으로 빠졌다고 비판적으로 보고 있어요. 이 책에선 그들에게 호의1도 없습니다. ㅜㄱㅜ (내 들뢰즈에게 흑흑...) 그래서 이 책은 반철학자인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데려오죠. 신체적 유물론, 인간적 유물론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의 이 이론이 정식 개념화될지는 미지수지만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유물론자인 테리 이글턴다운 스탠스지요.

겨울호랑이 2019-02-04 13:43   좋아요 1 | URL
^^:) 아마 AgalmA님 말씀이 맞을 듯 합니다. 그렇지만, 개똥철학자인 제가 생각하기에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형이하학적인 물질에 대해 너무 형이상학적으로 이념화시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정한 유물론이 되기 위해서는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과 실천철학이 연계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