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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를 걷어내고, 지금이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시선을 수련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에게 배움은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수단일 뿐이다

몽자각으로 무장한 사람은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도, 그것이 꿈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자신은 이미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자각몽을 꾸는 자신이 아직 꿈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요가 수련자는 자신이 되어야만 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매일 정진하는 자다.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군더더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 제거가 ‘이욕’, 즉 ‘욕심 떨어뜨리기’다. 그 후 해탈을 위해 용맹정진 하는 ‘연습’을 경주해야 한다. ‘이욕離慾’과 ‘연습’은 요가 수련의 두 기둥이다.

동요하는 생각을 고요하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도달하려고 애쓰는 ‘연습練習’이며 다른 하나는 달아나려고 애쓰는 ‘이욕離慾’이다. 결국 연습과 이욕이 모두 필요하다. 만일 요가 수련자가 하나를 소홀히 하고 다른 하나에만 집중한다면 그 수련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오히려 위험하다.

요가 수련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비범하고 고유해진다. 삼매로 진입한 요가 수련자는 일시적 쾌락에서 점차 멀어지고 평온한 신적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삼매 상태를 외부에서 얻지 않고 심연에서 기억해낸다. 따라서 삼매로 진입하는 기쁨을 얻는다.

인간은 두 종류다. 이들은 욕망에 따르는 ‘짐승 같은 인간animal human’과 승화된 자신을 열망하는 ‘신적 인간divine human’이다. 신적 인간은 어제까지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과거의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미래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현재 자신의 모습에 투영하며’ 지금 이 순간을 정교하게 다듬는다. 이 전략적인 노력이 바로 연습이다.

지속이란 요가 수련을 자신의 일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정하는 마음이다. 지속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신적인 불꽃, ‘이슈바라??vara’에 온전히 승복하는 행위로 감동적인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끊임없이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요가 수련자는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단계인 사트바를 넘어서, 외부 자극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우주를 탄생시킨 원칙이 존재하는 단계, 그 우주에서 소우주로 사는 인간이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삼매경은 최고도의 마음 집중 상태다. 마음은 세계 최고의 양궁선수가 활을 들고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려 보내기 위해 한껏 당겨진 활시위를 무아의 상태에서 놓아버리는 순간의 긴장이자 동시에 여유다. 그것이 일념이다.

일념은, 인간이 그 분야에서 스스로에게 만족스럽고 그래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어울리고 감동적인 결과를 도출하려는 유일한 도구다. 인간은 깊은 곳을 두려워한다. 사실은 깊은 곳을 두려워하는 자신이 두려운 것이다. 그 길을 막는 괴물은 바로 자신이다.

영겁이란 시간의 흐름은 환영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뇌에 떨어진 브라흐마 신의 뇌에서 나온 섬광의 순간이었다. 그는 일념을 통한 순간 안에서 가장 완벽한 지팡이를 만들어냈다. 자신의 마음속으로 퇴거하여, 적당한 나무를 찾아 완벽한 지팡이를 만드는 과업만이 거룩하다. 그런 행위는 인생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초월하는 북극의 오로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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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란 새로운 지식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수정하기 위해, 타자의 생각을 내 시선 안으로 수용하는 수고다. 아무리 교육을 통해 객관적인 시선 훈련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시선은 여전히 내가 아는 세계 안에서만 잠정적인 진리다.

요가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무엇인가. 인도의 베단타 철학은 요가를 합일이라고 가르친다. 이 정의는 분명 요가의 다양한 정의 중 하나지만 파탄잘리의 정의와는 정반대다. 그에 따르면 요가는 오히려 분리다. 즉, 요가는 인간의 원래 모습인 참자아를 세상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다. 파탄잘리의 정의에는 합일이 없다.

고대 인도인들은 자아를 표현하기 위해 산스크리트어 아트만을 사용한다. 아트만이란 단어에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의미가 숨어 있다. ‘경험적 자아’와 ‘초월적 자아’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인간이 진아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이 무명 속에서 안주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모른다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 안에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진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어리석다는 말이다. 따라서 깨달음은 자신 안에 진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신은 개념이다. 신은 인간의 삶을 통해 자신의 지문을 남겼다. 그 지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본연의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고 그것을 위해 주어진 삶 안에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자가 곧 신이다.’

요가는 무엇을 ‘더하는’ 훈련이 아니라 본연의 자신을 찾기 위해 덜어내야 할 것을 덜어내고 굳이 필요가 없는 것을 제거하는 훈련, 다시 말해 ‘안 하는’ 훈련이다.

일상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습관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경계로 진입하는 경험이 엑스터시ecstas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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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성현들이 남긴 경전이나 신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정신과 육체, 생각과 행동을 하나로 여겼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정신은 육체를 통해 표현되며, 생각의 결과는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따라서 정신과 육체가 괴리하고 생각이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 훈련은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제3자의 눈으로 관찰함으로써 시작된다. 외부의 자극이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잡념이다. 생각이란 그런 잡념들의 생성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잡념의 원인을 유추하는 이성의 활동이다. ‘명상冥想’이란 외부 자극에 대한 나의 감각을 가만히 바라보는 행위다.

요가는 인간을 신적인 인간으로 승화시키는 신체?정신?영적인 훈련이다. 요즘 사람들은 요가를 유연체조 혹은 피트니스 훈련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요가는 마음을 개간하여 인간의 심연에 존재하는 원래 자신을 발견하는 운동이자, 그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혁명적인 운동이다. 다시 말해 요가는 삶의 주인을 교체하는 쿠데타coup d’Etat인 셈이다. 그는 이제 과거에 안주하지 않는다. 요가는 미래에서 온 듯한 멋진 나의 모습이 주인이 되어 현재의 나를 일깨우는 정신적?육체적 운동인 것이다. 즉, 영적인 유전자를 교체하는 마음 혁명이다.

요가 수련자가 수련을 통해 평정심을 반드시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 결과는 신에게 달렸다. 만일 그 결과가 수련자의 기대와 다르다고 해도 그것을 신의 뜻으로 여기며 담담하게 수용한다. 이처럼 수련자는 명성과 오명,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인생이란 소용돌이에서 겪는 다양한 상황을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을 때에야 그는 크리슈나가 말하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종교의 얼개는 ‘경전經典’이고 문명의 얼개는 ‘고전古典’이다. 경전은 종교의 핵심사상을 기록한 책으로, 처음에는 개별 종교의 창시자나 사상가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회자되던 어록을 일정 시기가 지난 뒤 글로 기록한 것이 경전이다. 종교 구성원들은 문전에 담긴 내용을 해석하여 삶의 지표로서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전통적으로 권위 있는 문장이나 내용이 무엇인지 열띤 논쟁을 벌인다. 이 논쟁 과정이 ‘해석解釋’이다.

생각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그것은 흐르는 물이나 공중의 대기처럼 혹은 바람에 흩날리는 풍선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인다. 생각의 특징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생각, 즉 잡념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생각은 인간의 감정, 지성 그리고 ‘나’라는 이기적인 자아가 실제의 삶에서 만들어낸 복잡한 결과물이다.

‘요가’라는 단어는 이중적이다. ‘결합’과 ‘분리’라는 상반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 자신이 생각하는 나’인가? 만일 운명적으로 주어진 환경에서 형성한 나 자신과 거기서 습득한 세계관을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지이며 불행을 초래하는 길이다. 세상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와 세계관이 무수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개체를 객관적으로 가만히 바라보는 연습이 요가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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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 팔일 새벽이었다. 나고 죽음의 근본 종자인 무명의 뿌리가 끊어지면서, 동쪽 하늘에서 샛별이 떠오르는 찰나, 활연히 깨달음을 얻어모든 법의 가장 높은 정각을 성취하였다. 이때 태자는 스스로 감탄했다.
"아! 기특하도다. 모든 중생들이 다 이와 같은 지혜와 덕을 갖추었건만, 다만 망상에 집착하여 스스로 체득하지 못하는구나. 만일 이 망상의 집착만 여읜다면 바로 일체지.자연지·무사지를 얻게 되는 것을!"이것이 곧,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성취하여 불타의 지위에 나아간 것이었다. 곧, 석가모니 부처요때는 삼십오 세 되는 해 이 월 팔 일이었다. - P75

그러므로 이것이 고인 줄 알고 그 원인인 집을 끊고, 별을 얻기위하여 도를 닦는 것이니라.만일 사람이 이 사성제를 알지 못하면 해탈을 얻을 길이 없다.
‘성제‘라는 말은 진실하여 틀림없다는 뜻이니, 고는 정녕코 이 삶의 존재요, 집은 정녕코 이 고의 원인이며,  멸은 정녕코 이 고를 여읜 결과요, 도는 정녕코 이 멸에  이르는 길이니라."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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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신 인안나 - INANNA, THE FIRST GODDESS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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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획득한 하늘과 땅의 기득권을 다 버리고 선택한 모험이었다. 어느 누구도 다시 목숨 붙여 돌아오지 못하는 사지를 향한 지나친 욕망이었다. 인안나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녀는 하늘과 땅에서는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랑과 풍요의 여신이지 전쟁의 여신으로 맹위를 떨쳤지만, 저승에 내려가자마자 송장이 되었다. 마지막 들숨과 날숨도 떨어졌다. 죽은 것이다... 죽은 자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산 채로 저승 원정 길에 오른 일도 최초의 사건이었고, 그곳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것도 최초의 사건이었다. 아니, 최초의 기적이었다. _ 김산해, <최초의 여신 인안나> , p81/179

김산해의 <최초의 여신 인안나>는 수메르 신화의 진정한 주인공 여신(女神) 인안나에 대한 이야기다. 죽음으로의 여행 끝에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부활하여 승리자가 되었다는 '메시아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우리는 이미 고대 신화에서 발견하며 놀라게 된다. 이와 함께 인안나에 녹아있는 올림푸스 신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책을 읽는 다른 재미가 된다.

인안나의 저승 여행은 끝이 났고, 그의 사랑도 끝났다. 그리고 진정한 승리자는 인안나였다. 그는 하늘의 여왕이었고, '큰 땅' 저승에서 살아 돌아온 여신이었다. 그것은 수메르 만신전에서 전례 없던 위업이었다.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한 인안나는 가장 위대한 신이 되었다. 아울러 그녀는 이승과 저승의 운명을 결정하는 거룩한 신이 되었다. 그래서 두무지는 비록 저승으로 붙잡혀 가지만, 인안나가 정해준 그의 운명으로 반년 동안 죽었다고 다시 부활하여 이승에서 나머지 반 년을 보내는 삶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_ 김산해, <최초의 여신 인안나> , p122/179

바람을 피는 남편을 벌하는 장면에서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 '메'를 엔키로부터 훔쳐가는 장면에서는 헤르메스, '메'를 통해 지혜를 통치하는 면에서는 '아테나', 사랑을 관장하며 인간 길가메시에게도 마음을 빼앗긴다는 점에서는 '아프로디테', 실질적인 이승의 지배자라는 점에서는 '제우스', 지혜의 신 엔키를 술에 취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디오니소스', 저승으로부터의 귀환 이후에는 죽음마저도 관장하는 '하데스'가 결합된 인물이 인안나임을 생각해본다면 여신 인안나가 얼마나 강력한 신이며, 신들의 원형임을 알게 된다. 이런 면에서 인안나가 수메르 신화의 주인공이고, 빛나는 '아폴론'와 같은 존재가 분명하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아폴론'과 같은 인안나가 아닌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와 같은 '엔키'다.

하늘의 땅의 여왕, 전쟁, 풍요, 다산, 완전하고 다양한 여성성, 여성적인 삶의 원리, 여성들의 수호천사, 품위 있고 당당한 부인, 수많은 도시와 왕들의 수호신, 금성(金星) 등으로 상징화된 여신들의 본바탕에 자리를 잡고 있던 진정한 여신이 있었다. 인안나였다. _ 김산해, <최초의 여신 인안나> , p5/179

엔키는 지혜의 신으로 '메'의 원래 주인이다. 그러다가, 인안나에게 속아 '메'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인안나를 축복하는 넓은 아량을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인안나가 저승에서 죽음을 당했을 때, 유일하게 인안나를 돕기로 결심하고 그가 부활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그가 최고신이 될 수 있게 만든 것도 바로 엔키다. 그런 면에서 수메르 신화에서 빛나는 양(陽)은 여신 인안나지만, 이러한 양을 만들어 낸 음(陰)은 남신 엔키라 할 수 있겠다. 마치 음(陰)에서 양(陽)이 나온다는 <도덕경 道德經>의 내용처럼. 고대 수메르인들도 이러한 생각을 했었을까. 고대 수메르 문명에서 '태음력(太陰歷)'을 사용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달'을 관장하는 엔키는 마치 주(周)나라의 주공(周公)처럼 왕은 아니지만, 고대 수메르 문명의 중심에 서 있는 신(神)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 않았을까. 인안나가 지배하는 코스코스(Cosmos)를 잉태한 카오스(Khaos)를 상징하는 것이 엔키의 다른 모습은 아닐까를 생각해본다. 실제로, 고대 수메르 신화에서 엔릴이 대홍수로 인간을 멸망시키려 했을 때, 몰래 이를 막아선 것도 엔키였음을 생각해본다면, 그에게서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면모도 찾을 수 있다.

"내 권능을 걸고 말하노라. 내 신성한 성전을 걸고 말하노라. 네가 가지고 간 '메'는 네 도시의 거룩한 성소에 남아 있을 것이다. 사제장이 그 거룩한 성소에서 찬송하며 일생을 보내도록 하겠다. 네 도시 사람들은 번영을 누릴 것이다. 우루크 아이들은 기쁨이 넘치리라. 우루크 사람들은 에리두 사람들과 동지로다. 우루크는 위대한 곳으로 부활하리라!"(p44)... '메'의 전 주인 엔키는 역시 큰 신이었다. 그는 비록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을 여신에게 빼앗겼지만 새로운 지배자를 축복해 주었다. 하여 그는 패자이면서도 여신의 영원한 웃어른으로 남게 되었다. _ 김산해, <최초의 여신 인안나> , p51/179

이와 함께 <최초의 여신 인안나>와 <길가메쉬 서사시>를 함께 생각해보게 된다. 두 서사시 모두 '여행과 '죽음''을 주제로 하지만, 불멸의 신과 필멸의 인간이라는 존재의 차이가 있기에 여행의 결말을 달라지게 된다. 여행 끝에 죽음을 정복한 신(神) 인안나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는 길가메쉬. 그가 느꼈을 '허무'가 고대 지혜문학의 주요 주제와 연관된다는 점도 이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최초의 여신 인안나>는 현재 우리에게 거의 잊혀진 여신(女神)에 대한 이야기다. '양(陽)'을 상징하는 여신의 이야기도 분명 흥미롭지만, '음(陰)'을 의미하는 남신의 이야기도 이에 못지 않다. 마치, <주역 周易>에서 하늘의 기운이 땅으로 내려오고, 땅의 기운이 상승하면서 교감하며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며, 최고의 괘로 꼽는 '지천태(地天泰)' 괘(卦)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고대 수메르 신화에는 존재한다.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는 이러한 조화를 되살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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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9-16 0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보통 아시아권에서 양은 남성이고 음은 여성인데.. 같은 아시아초기 문명인데도 중국 문명과는 또 다르네요. 하긴 지금의 중동쪽이니 같은 아시아라고 하기도 그러네요….

겨울호랑이 2022-09-16 09:23   좋아요 1 | URL
기억의집 말씀처럼 신화 안에서 고대 수메르 문명과 고대 중국 문명의 차이를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차이가 생긴 원인을 여러 면에서 생각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인류 문명의 모계사회 전통이 인안나 신화에 표현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듯하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에서 ‘음양‘ 사상이 선진시대 이후 ‘오행‘과 ‘태극‘과 결합하며 절대성을 부가하기 이전에는 보다 상대적인 개념이었던 것과 같은 흐름 속에서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개인적인 추측일 뿐입니다. ^^:) 기억의집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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