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고대에 대한 열정 - 슐리만 자서전
하인리히 슐리만 지음 / 일빛 / 1997년 10월
평점 :
품절


 어렸을 때 읽은 '트로이'와 관련된 <일리아드 Iliad>를 읽고 꿈을 키워오다가 미케네와 트로이 문명을 발굴한 슐리만의 자서전. 어렸을 적 자신의 꿈을 붙들고 이를 차근차근 준비하는 슐리만의 모습은 위인전으로 접했던 어린 시절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비록, 유럽 어족(語族)이 동일 계통이라 상대적으로 익히기 쉬웠던 이유도 있겠지만, 수십 개에 달하는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은 어린 시절 느꼈던 감동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사진] Heinrich Schliemann (출처 : https://www.scinexx.de/dossier/heinrich-schliemann/)


 아버지가 호메로스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활약이나 트로이 전쟁 때의 사건들을 감동적으로 들려줄 때 나는 언제나 트로이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따라서 아버지로부터 트로이가 완전히 파괴되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몹시 서글픈 생각에 사로잡혔다.(p20) <고대에 대한 열정> 中


 이 곳에서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사회의 최하층 사람들이었다. 나는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정신 없이 일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공부할 여유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p30)... 나는 호메로스의 시구 가운데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선율적인 그리스 어 리듬에 더없이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나의 불행한 처지를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p31) <고대에 대한 열정> 中


 나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열의를 불태우며 영어 학습에 몰두했다. 그리고 공부를 계속해 나가는 사이 자연스럽게 모든 언어를 쉽게 배울 수 있는 요령을 터득했다. 그 방법을 소개하면 일단 어학 공부는 해석에만 매달리지 말고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소리내어 읽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1시간씩 꾸준히 공부하고 언제나 흥미로운 대상에 대해 작문을 해 본다. 그리고 그것을 교사의 지도를 받아 내용을 암기한 뒤 다음 수업 시간에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외우는 것이다.(p37) <고대에 대한 열정> 中


 나는 언제나 지나친 흥분으로 잠을 충분히 잘 수 없었기 때문에 밤중에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이용해서 저녁에 읽은 내용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원래 낮 시간보다 밤에 훨씬 집중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반복 연습에는 효과적이었다. 나는 이 방법을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다. 어쨌든 나는 이런 방법으로 반년만에 영어의 기초지식을 완전히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방법으로 프랑스 어도 약 반 년만에 끝낼 수 있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나의 기억력은 1년만에 눈에 띄게 향상되어 네델란드 어, 스페인 어, 이탈리아 어, 포르투갈 어도 쉽게 배울 수 있었다. 이러한 외국어로 유창하게 이야기하고 쓰는 데 6주 이상 걸리지 않았다.(p38) <고대에 대한 열정> 中


 나는 이 저술을 끝내면서 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발굴을 통한 역사 연구가 앞으로 더 발달해 하루라도 빨리 위대한 그리스 민족의 어둠에 싸인 선사 시대가 남김 없이 밝은 태양 아래 드러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발굴을 통한 연구로 숭고한 호메로스의 시가 결코 허구가 아니라 실제한 사실에 근거한다는 점이 명백해지기를 바란다.(p157) <고대에 대한 열정> 中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7-11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1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1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1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1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1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4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4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작 뉴턴 한정판 세트 - 전4권
리처드 웨스트폴 지음, 김한영.김희봉 옮김, 이무현 감수 / 알마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1670년대 아리우스 주의자이자 연금술사 뉴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데카르트 수학(기하학에 대수학 접목)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정립한 뉴턴은 당대 정통으로 받아들여지던 유클리드 수학자로부터 이단아로 취급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뉴턴은 여러 면에서 비주류였음을 알게 된다.여기에 가톨릭교회의 철학이 기하학인 유클리드 수학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한, 연금술을 통해 금을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뉴턴의 모습에서 후대 남해(South Sea)주식과 연관되어 많은 자산을 잃을 기질이 있었음도 짐작해본다. 전체적으로 우울한 과학자 뉴턴의 모습 이면에 숨겨진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시기 뉴턴의 삶은 기본적으로 신학과 연금술 연구로 이루어졌다.(p323)... 뉴턴이 보기에 그리스도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우상숭배이고, 근본적인 죄악이었다.(p226)... 1675년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뉴턴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아리우스파가 되어 있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신과 인간의 중보자이고, 그를 창조하신 아버지에게 종속된 자였다.(p227)「제2권」중

화학 노트는 전개 순서가 중요하다. 그는 화학을 우연히 만나 그 불합리를 발견하고 나서도, 진지하고 ˝합리적인˝화학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아니, 출발은 진지한 화학이었지만 연금술이더 심오하다고 느끼고 상당히 일찍 화학을 포기했다.(p180)「제2권」중

ps. 미적분, 무한급수와 관련된 라이프니츠와의 논쟁 부분은 뉴턴 전기 작가의 국적이 영국임을 잘 나타내준다. 기회가 되면 독일인이 쓴 라이프니츠 전기도 읽고 싶어진다.

라이프니츠의 새로운 질문들은 「후서」를 쓰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뉴턴이 편지를 쓰기도 전에 라이프니츠가 직접 10월에 런던으로 건너와 10일간 머물렀다.(p145)... 라이프니츠는 「역사 Historiola」에 대해서는 메모를 했고, 메모는 라이프니츠가 영국 수학에서 배울 수 있는 주제라고 본 무한급수에 집중되었다.(p146)「제2권」중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7-04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04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작 뉴턴 한정판 세트 - 전4권
리처드 웨스트폴 지음, 김한영.김희봉 옮김, 이무현 감수 / 알마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케임브리지의 교육은 윤리학, 수사학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토대를 제공하는 묵직한 분량의 논리학으로 시작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삼각논법으로 전개되는 형식 논쟁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는데, 이 형식 논쟁이 교육과정과 시험의 기준이었다.(p158)...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비록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었지만 결코 헛소리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뉴턴은 엄밀한 사고의 표준들을 배웠고, 자연의 엄청난 다양성을 하나의 통일된 형태로 조직화하는 체계를 제공받았다.(p163) 「제1권」

뉴턴은 태양에서 나오는 보통의 빛은 단일한 성분이 아니며, 색의 현상들은 기존의 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균일한 빛의 변화가 아니라 이질적인 혼합체가 그 성분들로 분리되거나 분해되어 발생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p178) 「제1권」중

뉴턴은 이전의 연구를 수정해서 곡률을 새로운 방법으로 표현하고, 더 나아가 최대 곡률 및 최소 곡률의 점과, 곡률의 반지름이 무한해지는 변곡점을 증명했다. 그는 곡선의 방정식이 주어졌을 경우, 그 곡선의 면적이 다른 곡선의 면적과 주어진 관계에 있을 때 그 다른 곡선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p238) 「제1권」중

사과 이야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일화가 사과와 지식을 연관짓는 유대교-기독교의 전통을 암시하면서 계속 반복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과 이야기는 보편중력을 하나의 영리한 생각으로 취급해서 그 개념을 속되게 만든다.(p266)「제1권」중

자연철학에서 운동과 역학이 뉴턴의 주목을 끈 유일한 주제는 아니었다. 그가 후에 ˝유명한 색채 현상˝이라 부른 것도 그의 눈에는 똑같이 중요했다.(p267)「제1권」중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19-06-30 1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유인력 때문에 색체현상인 뉴턴의 ‘빛’ 중요성이 많이 간과 된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6-30 19:17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뉴턴의 중력이론과 함께 광학에 대한 이론이 뉴턴 우주관의 두 기둥임을 생각하면 ‘빛‘에 대한 뉴턴의 업적은 과소평가된 부분이 있다 여겨집니다. 다른 한 편으로 뉴턴의 광학은 보다 철학(종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프리즘을 투과한 빛의 색깔을 7색으로 정한 것도 성경의 영향이 있다는 의견도 있는 것을 보면 다소 비과학적이라 생각한 과학자들의 의견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예수 평전 - ‘진리’라 불리던 사악한 사제가 예수였을까?
조철수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엣세네 공동체 사람들에게서 '진리'라는 호칭을 얻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을 사제가 교만하게 되어 공동체를 떠났다는 말이다. 마음이 교만한 것은 공동체의 가르침에 준하지 않고 자신의 성경해석을 주장한다는 뜻이다.(p127)... '진리'라는 그 사악한 사제는 엣세네 공동체의 재판이 아니라 그들의 사악한 재판에 넘겨져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그가 선동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선동자는 죽어가면서 공포에 질려 있었으며 그의 살에 상처를 받아 시체가 되었다는 해석이다.(p128)  <예수평전> 中


 <예수 평전>의 저자 조철수의 관점은 새롭다. 일반적으로 인간 예수의 생애는 바리사이(Pharisees) 파와 많은 갈등을 일으킨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쫓는 사건 후 사두가이(Sadducees)파들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어, 결국 로마인들에게 넘겨진 후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예수 평전>에서는 예수와 갈등을 일으키는 주된 집단은 에세네 파(Essenoi)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가 아닌, 에세네 파의 구원자(Messias)인 예수. <예수 평전>에서 그려지는 예수의 모습이다. 


 '진리'라고 불리는 사악한 사제가 속임으로 공동체를 설립한다고 해석하는 엣세네 해석자의 관점을 예수의 전기에서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엣세네의 성경해석자들은 예수가 사악한 사제며 거짓 메시아임을 성경에서 입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하바국서에서 그 실마리를 잡아 예수가 유다의 입맞춤으로 붙잡히게 된 과정부터 십자가형에 처해져 죽을 때까지를 해석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p136) <예수평전> 中


 <예수 평전>은 에세네 파와 '진리'라는 이름의 사제가 만든 에세네 공동체의 분열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예수가 '진리'를 강조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가 에세네 파 출신의 사제임을 주장하면서 신약성서의 복음서를 탈무드, 미드라쉬와 에세네 파의 전승 기록을 통해 해석한다.



[그림] 에세네 생명의 나무(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139682025918538049/)


 예수 당시의 이야기로 생각해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수가 자신을 '에메트(진리)'라고 부르는 점이다. 복음서에 전해진 한 이야기에서 이런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여러분이 내 말에 서 있으면 여러분은 진리(에메트)안에 내 제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여러분을 (속박에서) 풀어줄 것입니다.(요한 8 : 31 ~ 32) <예수평전> 中


 예수는 '진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고 바리새와 사두개뿐 아니라 엣세네와 성경해석에 있어 서로 다른 견해로 자주 논쟁을 했다. 엣세네의 성경해석자는 하바국서를 해석하며 '진리'라고 불리는 사제를 주목하고 그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엣세네 공동체는 자신들을 유다 지파의 자손들이라고 불렀다. 엣세네 사람들은 토라를 공부하는 노고와 엣세네 창시자인 '의로운 교사'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심판의 날에 구원 받을 것이라는 해석이다.(p126) <예수평전> 中


 저자는 이러한 해석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내용이 사실은 '토라에 대한 지식'의 은유적 표현임을 밝힌다. 본문에서 묘사된 예수의 모습은 율법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랍비의 모습이다. 다만, 폐쇄적인 에세네 파의 해석을 비판하고 개방성을 강조하는 차이만 있을뿐, 책속의 예수는 유명한 랍비 아키바(Akiva, AD 50 ~ AD135)의 수준으로 그려졌다.


 밀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식을 뜻한다. 초기 유대교 현자들은 이러한 지식은 토라 공부를 함으로써 습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p633)...  밀 빵을 먹어보지도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학교에 다닐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학교에 다닐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토라에 무뢰한이 될 수밖에 없다.(p634) <예수평전> 中


 '생명의 물'은 토라의 가르침이다. 사해문헌에 나오는 '생명수의 우물'과 비슷한 표현이다. 초기 랍비 유대교의 문헌에도 생명의 물은 토라(하느님의 가르침)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낱말로 사용된다. 예수가 말하는 생명의 물도 토라를 뜻하지만 그 토라는 바리새나 엣세네처럼 모세오경뿐 아니라 모세오경에 대한 성경해석을 포함한다.(p267)... 초기 유대교 문헌에서 빵은 종종 토라를 은유하는 낱말로 사용된다. 사람들에게 빵을 먹였다는 이야기는 토라를 가르쳤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p281) <예수평전> 中


 나아가, 책은 예수가 강조한 많은 내용이 남을 위하는 사랑이 아닌, 고도로 계산된 내용임을 당대의 문헌을 통해 논증한다. 마치, 노자(老子)의 '무위(無爲)'가 목적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예수의 가르침이 사실은 당대 시대에서 볼 때 가장 현명한 처신이었음을 저자는 밝힌다. 


 예수가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을 주라고 말하는 배경을 '솔로몬의 재판'과 비교해서 읽어볼 수 있다. 속옷을 훔쳐갔다고 고소했지만 그것을 입증할 증거나 증인을 찾지 못한 경우에 재판관은 그 속옷을 반으로 잘라 나누어 가지라고 판결을 낸다면 그 속옷은 속옷의 가치가 없어진다...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자기 겉옷을 준다고 한다면 재판관은 누가 양심적이며 그 속옷의 주인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p363) <예수평전> 中


 본문을 읽다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평전(評傳)'이라는 말처럼 여기에 묘사된 예수의 모습은 인간 예수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신약성서 내용만을 근거로 예수의 삶을 복원해 나간다. 당대 다른 역사적 기록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전승된 복음서(gospel)를 탈무드와 미드라쉬 해석을 통해 재조명한다는 것이 인간 에수의 삶을 바라보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이 책에서 밝힌 것은 인간 예수의 모습이 아닌  복음서 사가들의 관점과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영지주의(gnosis)로 향하게 된다. 출발이 '예수가 에세네 파 출신의 사제였다'는 가정에서 출발되기 때문에, 결국 예수와 에세네 파의 대립은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치환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저자의 해석은 예수 사후 로마 제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던 예수 운동(또는 초기 기독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히 교리 해석상의 차이가 아닌, 예수 가르침 안에 무엇이 당대인들에게 다가왔던 것일까?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아쉽게도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엣세네 문헌에서 '빛과 어둠'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단락에서 빛의 자식들이 어둠을 물리치는 힘은 '하느님의 진리'에 있다... 요한복음서나 고린도후서, 요한계시록 등에서 읽어볼 수 있듯이 '빛과 어둠'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엣세네의 언어에 익숙한 것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를 '진리'라고 부르는 점은 '진리'의 핵심이 어둠을 물리치는 힘/권능에 있다는 엣세네의 규례와 비교해 볼 수 있다.(p739) <예수평전> 中


 이와 같이 이 책은 인간 예수의 삶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책이지만, 인간 예수와 예수 공동체의 사회적 영향에 대해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 한계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또, <신약성서> 중 복음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이에 대한 해석을 하는 모습에서는 '신앙고백'이라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영지주의 복음서와 같은 결론에 이른 느낌을 받게되어 조금은 혼란스럽다. 위와 같은 부분은 아쉽지만, 독창적인 저자의 시도와 당대 사회의 모습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나름의 소득이라 생각하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amGiKim 2019-04-21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수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잘못알고 있는 예알못들이 문제라 봅니다. 퀴어축제때 우리에게 무차별 폭력을 예수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그들 말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04-21 10:57   좋아요 1 | URL
Nam Gi Kim님의 말씀을 들으니, ‘예수는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사랑하고 존경할 수 없다‘던 마하트마 간디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 역시 기독교(가톨릭) 신자인만큼 다른 이들에 대한 배타적인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부분에서 정말 초기 교회가 지향했던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더 고민해야겠지요. 마침 오늘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한 ‘부활절‘입니다. 성탄절보다 더 의미가 있는 오늘, 부활의 의미에 대해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19-04-21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1 1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9-04-21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 님의 이 글을 읽어보니 제가 요즘 읽고 있는 『로마제국 쇠망사』 생각이 납니다.

여느 역사책과는 다르게, 『로마제국 쇠망사』에는 ‘초기 기독교의 발전 과정‘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유대인 민족종교와 신흥 그리스도교 사이에 있었던 ‘교리 갈등‘ 때문에 파생된 다양한 분파들에 대해서도 깊이있게 다루고 있더군요. 나사렛파, 에비온파, 그노시스파,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몬타누스파, 노바티아누스파, 에세네파 등등 문외한인 저로서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종파들도 참 많더군요.

이뿐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교부, 호교가, 사제들이었던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락탄티우스, 유스티누스 등등에 대해서도 여러 곳에서 굉장히 자주 언급하는데, 제가 ‘로마의 역사‘를 읽고 있는지 ‘교회사‘를 읽고 있는지 착각이 들 정도로 상세히 다루고 있어서 놀랍더군요. 관심이 있으시면 그 부분(제1권 15장 및 16장, 541쪽 ∼691쪽)을 한번 참고하셔도 유익하리라 믿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4-21 20:1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oren님. <로마제국 쇠망사>를 축약본으로만 접했는데, oren님 말씀을 듣고 보니 완역본 정주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를 탄압하는 주체에서 제국의 종교로 바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쇠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여겨집니다. 로마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복수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전체를 포용하는 세계 종교로서 기독교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역사학자인 기번의 답변이 기대됩니다.^^:)
 
돌베개 -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장준하 지음 / 돌베개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창세기 28장 10 ~ 15절에 나오는 야곱의 "돌베개" 이야기는 내가 결혼 일주일 만에 남기고 떠난 내 아내에게 일군 日軍 탈출의 경우 그 암호로 약속하였던 말이다. 마침내 나는 그 암호를 사용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고 하였다... 그 후 나는 "돌베개"를 베고 중원 6천 리를 걸으며 잠을 잤고 지새웠고 꿈을 꾸기도 하였다. 나의 중원 땅 2년은 바로 나의 "돌베개"였다. 아니, 그것이 나의 축복 받는 "돌베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p7)' 


 <돌베개>는 독립운동가,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 사회운동가였던 장준하(張俊河, 1918~ 1975) 선생의 삶 중에서 1944 ~1945년간의 일을 다룬 기록이다. 이 시기를 통해 일본군의 징용을 피해 광복군에 합류한 후 시안(西安)에서 OSS 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공 작전을 기다리다 광복(光復)을 맞이할 때까지 삶의 여정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러 해가 지자 거기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꿈을 꾸었다.(창세 28 : 10 ~ 12)'


 <창세기>에서 야곱은 그의 형 에사우의 축복을 가로채고 어머니 라헬의 고향 하란으로 자신의 외삼촌을 찾아 떠나게 된다. 하란으로 가는 도중 베텔이라는 곳에서 지친 야곱은 잠시 잠을 청하고 꿈을 꾼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었던 저자는 그러한 야곱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느끼지 않았을까.


 '내가 이 광야에서 벨 베개는 돌베개임을, 벌써 일군을 탈출하기 전 마지막 편지로 아내에게 말하였고 또 각오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제부터 내가 베어야 할 나의 돌베개는 어느 지점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가. 나의 고행은 어디서부터 정작 시작되어 어디까지 가야할 것인가.(p91)'



[지도] <돌베개>에서 저자의 주요 경로


 항일 대장정(抗日 大長征)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쉬저우(徐州)에서 충칭(重慶)으로, 다시 시안(西安)으로 2년 동안 이어지는 그의 여정 속에서 '못난 조상이 또다시 되지 말아야 한다', '돌베개'라는 말이 주문(呪文)처럼 이어지고 있다. 지쳐 쓰러질 듯한 상황속에서 저자를 버티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우리는 글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나의 희생으로 우리의 다음 대는 또다시 이런 고생에 시달리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대를 남기는 것보다 훨씬 보람된 나의 일생을 가졌다고 자부할 수 있으리라.(p226)'


  '내가 자원한 것은 국내 공작이었다. 국내 공작의 목표는 결국 나의 죽음이다. 내가 나의 죽음을 지불하면 내 능력껏 그 대가가 조국을 위해서 결제될 것이다. 나의 각오는 한 장의 정수표다... 한반도에 대한 연합군의 공략은 일본의 본토 사수의 결의를 꺾자는 데 있는 것이다. 이 공략을 돕기 위해 경무기로 무장된 우리가 잠수함이나 낙하산으로 투입되어 우선은 첩보활동, 다음 단계로 정보 송신, 그리고 최종으로 유격대 조직 및 군사시설 파괴공작을 수행하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p289)'


 그렇지만, <돌베개> 속에 저자의 애국심(愛國心)만 표현된 것은 아니다. 저자는 힘든 중에도 자신의 주변을 살피며 당시 주변 정세를 예리하게 판단해간다. 또한 힘든 장정의 상황에서도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의 주인공 제갈량(諸葛亮, 181 ~ 234)의 사당을 찾아가기도 하고, 애국가(愛國歌)를 부르면서 통곡하는 저자의 모습이 표현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속에서 저자의 사람됨과 당대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후방도 아닌 전방지대에 사단장이라는 지휘관은 수십 명의 처첩을 거느리고 다니고, 박격포를 메고 가야 할 그 어깨엔 그 대신 지휘관의 처첩들의 가마가 올라앉는가 하면, 정규군의 모습이 아닌 이 미련한 중국국. 일군에게 밀리면서 또 홍군과 맞붙어 싸우며 떠다니는 유랑의 군대. 그런가 하면 일군은 점과 선만을 차지하고 타협도 해가면서 대륙을 들쑤셔놓는 그 약삭빠른 허세의 군대다. 이들의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얻는 공산군만이 진실로 공간과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p176)'


 '장제스군에게 막대한 양의 미제 신식무기가 공급되었어도 이 신무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정도의 한심한 병정들이었다. 그들의 무식은 신무기 활용을 해득하지 못했고, 분해, 결합과 같은 손질에서 병기 파괴 손실이 더 컸으며, 이들의 정신 상태에서는 중공군으로 넘겨주고 돈을 받는 일이 항다반사였다.(p211)'


  힘든 여정을 거쳐 충칭의 임정에 도착하지만, 분열된 임시정부의 모습 속에서 그는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저자의 좌절감 역시 <돌베개> 속에서 가감없이 표현되고 있다.


  '6천 리의 대륙횡단 끝에 찾아온 충칭도 채 석 달이 못되어 다시 떠나버리게 되었다. 충칭에 더 머무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학과 모욕같이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수했던 기대와 불같던 정열과 끓던 정의감은 안개처럼 차차 꺼져버리고 오히려 실망과 허탈감으로 우리가 괴로워해야 했던, 그 짧지 않은 석달을 묻어두고 새로운 결심을 했다.... 슬픔이란 아주 간단한 철학이요, 순진한 감정이었다. 심해의 풍랑 속에서 찾아온 등대불이 꺼져버린 그 순간의 실망이라고나 할까. 일군을 탈출해 찾아와 몸 바칠 곳을 찾아 헤매다가 시안에서 시작되는 한미 합동작전을 위한 훈련을 받기 위해 떠나는 우리 일행 30여 명은... 감정 없는 슬픔을 가숨에 담고 새로운 투쟁을 찾아가는 혁명의 철학을 새겨야 했다.(p276)'


  광복을 위해 투쟁했지만, 청년 장준하가 준비했던 광복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투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돌베개>는 존경받는 정치인, 사회운동가로서 장준하 선생의 사상(思想)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는 의미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돌베개>를 이웃분에게 선물받았기에 더욱 그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돌베개>를 선물해 주신 이웃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꿈'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청년 '장준하의 꿈'을 함께 짐작해보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았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나는 네가 누워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 : 12 ~ 16)'


PS. 원래 이번 리뷰는 두 명의 군인을 비교해서 작성하려고 했습니다. '일본군->광복군'으로 자신의 이력을 만든 장준하 선생과 '만주군->일본군'으로 변신해 간 다른 인물인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를 비교해 보려 했습니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먼저 리뷰를 올립니다. 나중에 여건이 되면 '두 군인(軍人)의 길'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2-17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7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1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1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1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