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마치 유(類) 아래 있는 종(種)들처럼 이 거대한 세상을 여럿으로 나누어 분류합니다만, 이 거대한 세상이야말로 올바른 관점으로 우리를 알기 위해 들여다봐야 하는 거울입니다.

어떤 동기가 우리를 움직이는지, 우리 안에 있는 그처럼 다양한 충동의 원인은 무엇인지 말해 줘야 합니다. 아이의 오성을 촉촉히 적셔 줄 첫 번째 가르침은 아이의 행동과 감각을 조절해 주고, 자기 자신을 알게 함과 더불어 잘 죽고 잘 사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더 현명하고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을 말해 주고 난 뒤에 논리학, 물리학, 기하학, 수사학이 무엇인지 말해 줘야 합니다. 아이가 어떤 학문을 선택하면, 이미 판단력이 형성되어 있으니 금방 습득할 것입니다.

우리의 교육은 지금 행해지는 교육과는 달리 엄격한 자애(慈愛)로 이끌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글의 세계로 초대하는 대신, 실로 끔찍스럽고 잔인한 모습만 보여 줍니다. 폭력과 강제는 치워 주세요. 내 생각에 좋은 천성을 그보다 더 심하게 퇴화시키고 멍청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매질을 해서 학문을 잔뜩 우겨 넣은 주머니를 아이들에게 주고 잘 간수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담아 두기만 해서는 안 되고 그것과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젊음이 우리 안에서 죽을 때 어떤 충격도 느끼지 못하지만 사실 그 죽음이야말로 쇠약해진 생명이 완전히 죽어 버리는 죽음, 노년의 죽음보다 본질적으로 사실상 더 가혹한 죽음이다. 비참한 존재에서 비존재로 떨어지는 것은, 한창 꽃핀 감미로운 존재에서 고생스럽고 괴로운 존재로 떨어지는 것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지속적인 고통거리,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는 고통거리일 것이다. 죽음은 어디에서고 닥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위험한 고장에서처럼 끊임없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야 한다.

죽음이 어디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어디서나 죽음을 기다리자. 죽음에 대해 미리 숙고하는 것은 자유를 예비하는 것이다. 죽을 줄 알게 된 사람은 예속을 모른다. 죽는 법을 아는 것, 그것이 우리를 모든 종속과 속박에서 해방시킨다. 생명을 잃는 것이 불행이 아님을 잘 알게 된 사람에게는 인생에 불행이란 없다

필멸의 존재들을 탄생시키는 작업을 홀로 영원히 수행해 가는 이 기관에만 자연이 어떤 특권을 주었다고 해도, 그것이야말로 자연이 행한 합당하고 나무랄 데 없는 작업인 셈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생식을 신성한 행위로 보았고 사랑은 불멸을 향한 욕망으로, 그리고 불멸의 다이몬 그 자체로 여긴 것이다.

요컨대 내 생각으로는 습관이 하지 않는 것도, 할 수 없는 것도 세상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들은 바대로 핀다로스가 습관을 세상의 여왕이요 여제라고 부른 것은 온당한 일이다.

습관의 권능이 가진 가장 강력한 효과는, 우리가 그것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으로 돌아와 습관의 명령이 합당한지 따지고 판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를 낚아채서 장악한다는 점이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잔인성과 포악함, 그리고 배신의 진정한 씨앗들이고 뿌리인 것이다. 그런 것들은 거기서 싹이 튼 뒤 이윽고 거침없이 줄기를 뻗으며, 습관의 손 안에서 무성하게 자라난다. 그러니 아직 어려서 그러는 것이라거나 별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못된 습벽들을 접어 두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교육 방식이다. 우선 여기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천성인데, 천성의 목소리는 아직 가녀린 까닭에 더욱 순수하고 분명한 법이다. 두 번째로 속임수는 금화 한 닢이냐 바늘 하나이냐의 차이에 따라 그 추함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가 추해서 추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른 덕성도 그렇지만 용맹에도 한계가 있다. 이 한계를 넘는 순간 우리는 어느덧 악덕의 길 위에 서 있게 된다. 이 한계를 잘 알지 못하면 용맹에서 무모함, 고집불통, 어리석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과오와 악의에서 비롯된 과오를 엄격히 구별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자연이 우리 내면에 새겨 놓은 이성의 법칙을 의식적으로 거스르는 것이지만, 전자의 경우라면 바로 그 자연을 우리 쪽 증인으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에게 그 같은 결핍과 결함을 넣어 준 장본인으로 말이다.

공포는 참으로 기이한 정념이다. 의사들은 어떤 정념도 공포만큼 빠르게 우리의 판단력을 평정 상태에서 몰아내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사실 나는 공포 때문에 분별을 잃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아무리 침착한 사람이라도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끔찍한 혼란을 겪는 게 분명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8-09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10 0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잘 제어하여 다루지 못한다. 그 일엔 나 자신보다 우연이 더 많은 권리를 갖고 있다. 주변 상황, 동반자, 하다못해 내 목소리의 떨림까지도 내가 나만을 위해 캐내어 사용하려 할 때 얻어 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 정신에서 이끌어 낸다.

과감하고 의연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를 위협하는 불행이나 난관으로부터 힘 닿는 한 스스로를 지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 의미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불시에 그런 일들이 덮쳐 올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를 불행으로부터 지켜 줄 수 있는 정당한 방법은 모두 허용될 뿐 아니라 칭찬받을 만한 것이다. 그리고 의연함의 능력이란 주로 대책 없는 난관을 끈기 있게 감당하는 것에서 발휘된다.

불행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 오직 우리의 판단 때문이라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좋은 일로 만드는 것도 우리 능력에 달린 것으로 여겨지니 말이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면 왜 우리가 주인으로서 그것들을 다스리지 않을 것이며,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조절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불행 또는 고통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자체로서 불행이나 고통이 아니고, 단지 우리 생각이 그 사물에 그런 성질을 부여한 것이라면 그것을 바꾸는 것도 우리에게 달려 있다.

고통을 겪을 때 우리가 그토록 안달하게 되는 것은 가장 큰 만족을 마음에서 찾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요, 마음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마음만이 우리의 조건과 태도를 관장할 수 있는 지상권자인데 말이다. 육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한 가지 행보, 한 가지 자세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돈 많은 사람은 모두 인색하다. 플라톤은 육체적 또는 인간적 자산을 이렇게 정렬했다. 건강, 아름다움, 힘, 부. 그리고 그는 말했다. 지혜의 조명을 받기만 하면, 부란 눈먼 것이 아니라 아주 통찰력 있는 것이라고.

여유와 궁핍은 각자의 견해에 달렸다. 부도 영광도 건강도 그 소유자가 그것들에 부여한만큼만 아름답고 즐거운 것이다. 각자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이다. 행복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바로 그럴 때에만 믿음이 알맹이를 갖게 되고 현실이 된다. 운수는 우리에게 이롭지도 해롭지도 않다.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 재료와 씨앗을 제공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은 우리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사건들이 덮쳐 올 때, 우리를 얼어붙게 하는 저 눈앞이 아득하고 말문이 막히며 귀가 먹먹한 혼미 상태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사실 불행의 충격이 극에 달했다고 하려면 온 영혼을 뒤흔들어 영혼으로부터 활동의 자유를 앗아 가야 할 것이다.

생생하고 불에 굽듯 최고조의 열광 상태에서는 탄식을 늘어놓고 생각을 펼쳐 놓을 수 없다. 그럴 때는 영혼이 깊은 상념에 짓눌리고, 육신은 사랑으로 녹초가 되어 기운이 쑥 빠져 버린다. 바로 그 때문에 때로 쾌락의 제단 바로 앞 계단에서, 그토록 시의적절치 않게 연인들을 덮치는 뜻밖의 침체가 야기되고, 극도로 뜨거운 열정의 힘이 오히려 그들을 얼어붙게 하는 것이다.

닥쳐올 일에 대해 우리는 전혀 힘을 쓸 수 없고, 심지어 지난 일에 대해서보다 더 속수무책이니, 사람들이 늘 미래의 일에만 급급한 것을 나무라며, 현재의 복을 붙들어 그것에 만족하라고 가르치는 이들은 인간의 과오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편안하게 제 집에 머무는 적이 없고 늘 저 너머로 나가 있다. 두려움, 욕망, 희망은 우리를 미래로 집어던지며, 지금 있는 것을 느끼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올 일, 심지어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의 일에까지 정신을 팔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힘과 수단을 넘어서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 일의 결과나 이행은 완전히 우리 능력 밖의 것이고, 우리 능력 안에 있는 것은 정녕 우리의 의지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의 모든 원칙들은 의지에 근거를 두고 세워진다.

사람들은 기억력과 이해력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것이 나를 훨씬 더 불리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부당하다. 경험에 비춰 보면 오히려 빼어난 기억력이 한심한 판단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