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죽음은 당사자의 삶에 부합해야 한다. 우리는 죽기 위해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나는 항상 삶에 비추어 죽음을 해석한다. 그리고 누가 내게 물러 빠진 생애에 강렬해 보이는 죽음이 잇따른 이야기를 들려주면, 나는 그 죽음이 그의 인생에 어울리는 유약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덕이란 우리 안에서 생기는 선(善)의 경향과는 다른, 더 고상한 무엇인 것 같다. 저절로 잘 조절되고 천성이 훌륭한 사람들은 유덕한 사람들과 같은 길을 따르고 행동에서도 같은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덕에는 축복받은 천성으로 인해 온화하고 평온하게 이성이 이끄는 대로 자기를 맡기는 것보다 뭔가 더 위대하고 더 능동적인 울림이 있는 것 같다.

덕은 수월함을 친구로 삼기를 거절하며, 좋은 천성에 의해 조절된 발걸음이 저절로 향하게 되는 쉽고 순한 경사로는 진정한 덕의 길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진정한 덕은 쓰라린 가시밭길을 요구한다. 덕은 메텔루스101)가 겪은 것 같은, 그 꿋꿋한 행로를 좌절시키려고 운명이 즐겨 사용하는 외적 난관이나, 아니면 우리 본성의 무질서한 갈망과 불완전성이 야기하는 내적 시련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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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이 없어서 살해된 자가 있다지만, 갑옷의 무게에 눌려 옴짝달싹 못하거나, 반동으로 튕겨지거나 다른 이유로 상처를 입고 부러지는 등 불편한 갑옷 때문에 죽는 자도 그보다 적지 않다. 사실 우리 갑옷의 무게와 두께로 보건대 우리는 방어할 생각밖엔 없는 것 같고, 그것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다기보다 짐을 지고 있다는 편이 옳다.

이 책이 싫증 나면 다른 책을 집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지루해지기 시작할 때만 거기에 몰두한다. 새로 나온 책들에는 별로 매달리지 않는다. 옛날 책들이 내용이 더 풍부하고 힘찬 것 같아서이다.

비밀 행동은 감출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다 아는 일이나, 공적으로 그만큼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 일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결함이다.

물론 사물들을 보다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너무 비싼 값을 치르고 싶지는 않다. 내 계획은 남은 생애를 기분 좋게, 힘들지 않게 넘기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도, 설령 학문을 위해서라도 머리를 쥐어짜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도 말이다. 나는 책에서 소박한 재미를 느끼며 즐겁게 몰두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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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 깊은 사람은, 루스티쿠스가 동석한 사람들을 무례하게 방해하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남을 배려해서, 또는 다른 중요한 일을 중단하지 않으려고 새로 전달된 소식을 나중으로 미루었다가 들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자기의 개인적 관심사나 쾌락 때문에 미룬다는 것은, 특히 그가 공적인 임무를 맡은 사람이라면 식사 중이거나 나아가 취침 중이라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양심의 힘이란 이렇게 놀라운 것이다! 양심은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우리 자신을 고발하며, 우리 자신과 싸우게 만들어 다른 증인이 없어도 우리 자신을 우리의 반대 증인으로 세운다.

벌을 예측하는 자는 누구나 이미 그 벌을 받고 있고, 벌받을 짓을 한 자는 누구나 벌을 예측한다. 악행 자체가 스스로를 벌하는 고뇌를 만들어 낸다.

이성적인 사유나 교훈은 마음으로 기꺼이 다짐한들, 그것만으로 우리를 행동에까지 이끌어 갈 만큼 강력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에 순응하도록 실제 경험을 통해 영혼을 단련해서 조형해 놓지 않으면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혼은 행동해야만 할 때 필경 당황하고 말 것이다.

고통을 느끼려면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죽는 순간이란 너무 짧고 순식간이라 필연적으로 무감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의 언저리이다. 그리고 그 언저리에 발을 디디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남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은 그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더 많이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베푼 자가 은혜를 입은 자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작품이 감정을 지녔다고 가정한다면, 작자는 자기 작품을, 그 작품에게서 사랑받을 것보다 더 사랑합니다.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소중히 여기기에, 그리고 존재한다는 것은 움직이고 행동한다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나는 어리고 연한 영혼의 교육에서 행사되는 모든 폭력을 규탄합니다. 명예와 자유를 누리는 인간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인데 말입니다. 엄격함과 억압에는 뭔가 노예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을 통한 교육, 신중하고 노련한 가르침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은 힘으로도 결코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렇게 키워졌습니다.

노년엔 너무 많은 결함이 있고 너무도 무력합니다. 멸시당하기 꼭 알맞은 노년에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식구들의 애정과 사랑입니다. 명령과 두려움은 더 이상 무기가 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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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에게 확고부동만큼 어려운 것은 없고, 변덕만큼 쉬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세부적인 일들을 통해, 그리고 하나하나 따로따로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자가 진실을 말할 공산이 클 것이다.

모든 덕의 시작은 반성과 숙고이며 그 끝과 완성은 확고부동이라는 것은 데모스테네스의 말이라고 한다. 숙고를 통해 확고한 길을 잡는다면 가장 훌륭한 길을 잡을 것이다

덕이 원하는 것은 오직 덕 자체를 위한 덕행뿐이다. 가끔 우리가 다른 목적으로 그것의 가면을 빌려 오면 덕은 대번에 우리 얼굴에서 그 가면을 떼어내 버린다.

우리는 모두 조각들로 이루어진 데다 어찌나 종잡을 수 없는 복잡다기한 구조로 되어 있는지 조각들 하나하나가 매 순간 제멋대로 논다.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는 우리와 남 사이만큼의 차이가 있다.

밖으로 드러난 행동만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는 것은 사려 깊은 이해의 방식이 아니다. 속까지 탐사해 보고, 어떤 원동력에 의해 유발된 동요(動搖)인지 봐야 한다.

가장 자발적인 죽음이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다. 인생은 타인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다. 죽음은 우리의 의지에 속한다.

참을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자살보다 못한 죽음의 위협이 내 보기엔 가장 용납할 만한 자살 동기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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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한 결심으로 모욕에 대한 복수를 꾀하여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도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복수한 것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 영혼이 그 일을 다른 눈으로 보고, 그 일의 다른 면을 떠올리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기를, 청년은 스스로를 갈고닦을 줄 알아야 하고, 장년은 좋은 행실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하며, 노년은 민간 일이건 군사 일이건 모든 업무에서 물러나 어떤 직책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일이나 업무는 그저 우리를 긴장시킬 정도로, 그리고 반대편의 극단이랄 수 있는 저 나른하고 졸린 게으름이 가져오는 불편함에서 우리를 지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마련해 두면 된다.

이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 가운데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이 명성과 영광에 마음을 쓰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얻기 위해 재산이나 휴식, 목숨과 건강 같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재산을 포기할 정도이며, 그렇게 해서 아무런 몸도 실체도 없는 허깨비를, 순전히 말에 불과한 것을 쫓아다니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한 인간을 그처럼 그에게 고유한 것에 준해서만 평가하지 않는 것일까? 그는 많은 사람을 거느리며 멋진 궁전, 대단한 명망과 엄청난 수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를 둘러싼 것이지, 그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폭군을 정의하기를, 한 나라 내에서 제 맘에 드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는 자라고 했다. 그리고 흔히 그 때문에 악덕 그 자체보다 악덕이 드러나고 공표되는 것이 그들의 명예를 손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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