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우리에게 부, 명예, 생명, 건강까지 내려 주되, 어떤 때는 우리에게 해가 되도록 내려 주실 수도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모두 우리에게 언제나 이롭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이 병을 고쳐 주는 대신 우리에게 죽음 또는 병의 악화를 보내 주신다면, "당신의 막대와 회초리가 나를 위로하오니"(「시편」 22), 우리에게 마땅한 것을 우리보다 훨씬 확실하게 고려하는 그분 섭리의 이치에 따라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모자라고 흠이 있는 조건을 지녔으니 우리는 적어도 더 겸손하게 처신하고, 변덕을 더 억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오성에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자주 그릇된 것들을 받아들이며, 자주 판단을 번복하며 틀리는 바로 그 연장들을 가지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법률은 구속력과 관례에서 그것의 권위를 끌어낸다. 그러니 그것을 그 발생 근원으로 되돌려 파악하려 하는 것은 위험하다. 강물이 그렇듯이 그것은 굴러다니면서 비대해지고 고상해진다. 강물을 그 근원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라. 그것은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작은 물줄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이 늙어 가면서 그렇게 오만해지고 억세지는 것이다.

육체의 정념들 때문에 받는 충격과 동요도 우리 영혼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영혼 자체에 속하는 정념들이 주는 충격은 그보다 더하다. 그것들이 어찌나 영혼을 강하게 휘어잡는지, 영혼에겐 자체의 안에서 이는 바람 말고는 다른 추진력이나 움직임이 전혀 없고, 그 바람이 일지 않으면 마치 바다 한가운데서 바람이 도와주려 하지 않고 팽개쳐 버린 배처럼 꼼짝도 않으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파를 따라 그런 견해를 지지하는 이가 우리를 크게 폄훼하는 것도 아니리라. 영혼이 행한 가장 아름다운 행위 대부분이 그런 정념의 충동에서 나오고 또 그것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니까.

우리는 이성이 제거되거나 마비되었을 때 개선된다. 신들의 방에 들어가 우리 숙명의 흐름을 예견하는 두 가지 자연스러운 길은 광기와 잠이다. 이것은 재미있는 고찰거리이다. 정념 때문에 이성이 떨어져 나가면 우리는 유덕해진다. 광기나 죽음의 영상이 이성을 뽑아내 버리면 우리는 예언가나 점쟁이가 된다. 철학이 한 말 중 내가 이보다 더 기꺼이 믿는 것은 없다.

위대한 인물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우리 세계의 한계를 정해 놓았다. 고대 철학자들 모두 자기들이 놓쳤을 수도 있는 몇몇의 외딴 섬들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의 크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자연이 그 통상적 운행의 일정 기간에,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믿음, 판단, 견해 역시 가두는 것이라면, 그런 것들도 양배추와 마찬가지로 변화, 절기, 탄생과 죽음을 가진 것이라면, 하늘이 제 마음대로 그것들을 흔들고 굴리는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들에게 무슨 대단하고 항구적인 권위를 부여하겠는가?

우리 어리석음에 대한 증거들 중에서도 잊어서는 안 될 하나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인간이란 욕심을 내면서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낼 수 없으며, 향유는 그만두고 그저 상상과 소원으로라도 우리는 우리의 만족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생각더러 마음대로 자르고 꿰매 보라고 하라. 아마도 그것은 자기에게 적합한 것을 원할 줄도 모를 것이요, C 저를 만족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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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대가 "나는 거짓말을 한다."라고 말하고 그대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 결론에 이르게 하는 어법, 논리, 힘 등은 앞의 언술과 같다. 그런데도 우리는 진창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각각의 존재는 다른 것들의 자질을 모두 자기 자질에 결부시켜 인식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자질들을 확장하거나 줄일 수는 있지만 그게 전부이다.

"민중은 자기를 해방시켜 줄 진리를 찾고 있는데, 그들의 종교는 그의 안녕을 위해 속여야 한다고 생각한다."(아우구스티누스) 인간의 눈은 사물들을 제가 알아보는 방식으로밖엔 보지 못한다.

우리가 바라듯이 우리 영혼의 조건을 돋보이게 하려면 단순하고 순수한 천연 상태에서도 이미 영혼들은 모두 박식하다고 전제해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영혼은 육체 안으로 들어오기 전, 육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상태에서도 박식했을 것이다. 육체에서 나간 뒤에 그렇기를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영혼은 육체에 들어와서도 그 지식을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이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았던 것을 기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던 것처럼. 그러나 우리 각자는 그것이 틀린 말임을 경험으로 입증할 수 있다.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조건을 위로해 주려고 늘 이런 모순된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영혼은 필멸이거나 불멸이다. 필멸이면 고통을 모를 것이요, 불멸이면 점점 나아질 것이다." 그들은 ‘더 나빠지면 어쩔 것인가?’ 하는 다른 가지는 절대 건드리지 않고, 사후에 닥쳐올지 모르는 고통에 대해서는 시인에게 맡겨 둔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좋은 패를 자기 것으로 갖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를 연장하려고 노심초사한다.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것을 준비해 두었다. 신체의 보존을 위해서는 무덤이 있고, 이름의 보존을 위해서는 영광이 있다.

요컨대 고대인들의 정신이 지닌 자유와 대담성은 철학과 인간학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여러 분파를 만들어 냈고, 그 각각은 제 주장을 펼치기 위해 저마다의 판단과 선택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살며, "고정되고 한정된 몇몇 견해에 매여 끌려가는 나머지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까지 옹호해야 할 판이 되었고"(키케로), 처세의 압박과 명령 때문에 교양을 쌓고, 학교들도 이젠 하나의 모델만 따르며, 동일한 교육, 한정된 학과밖엔 다루지 않게 된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어떤 화폐가 더 무겁고 값이 나가는지는 문제 삼지 않고, 각자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통용되는 바에 따라 그 값어치를 받아들입니다. 진정한 가치를 따지지 않고 통용 가치만 따지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그런 식으로 값이 매겨집니다.

기초가 결여되면 그의 논증은 땅에 떨어진다. 토론과 탐구가 궁극의 목표로 삼는 것은 오직 원칙들이다. 그것들이 나아가는 길을 이 목표가 붙들어 주지 않으면 끝없는 불확실성에 빠질 것이다. "한 사물이 다른 것보다 더 이해되거나 덜 이해될 수는 없다. 모든 사물에는 각각 하나의 이해 방식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인간의 시선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깊은 심연에 잠겨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그럼 직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그들의 판단력이 이런 징후보다 저런 징후에 기우는 경향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들은 자기네 판단력으로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은 금하면서도 그런 경향은 인정했던 것이다.

사물이 제 모습, 제 본질 그대로 우리 안에 깃들지 않으며 제 힘과 권위로 거기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경험한다. 만일 그 자체로 들어온다면 우리 모두가 그것을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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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참과 거짓이 있고, 우리에겐 그것을 탐구할 능력은 있지만 그것들을 판정할 시금석 같은 것은 없다고. 따지고 들 것 없이 세상의 질서가 이끄는 대로 자신을 맡겨 두는 편이 우리에겐 더 낫다. 편견에서 벗어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평정을 향해 놀라운 진전을 이룬 것이다.

인간 조건의 골칫거리는 흔히 우리 생각에 가장 진실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우리 삶에 가장 유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장 대담한 학파들, 에피쿠로스파, 퓌론파, 신아카데미아파도 종국에는 국가의 법에 허리를 굽히지 않을 수 없다.

멸할 인간의 모든 만족은 멸할 수밖에 없다. 저승에서 부모, 자식, 친구들을 알아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저승에서도 우리가 여전히 그런 기쁨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지상적이고 유한한 즐거움 속에 있는 것이다. 저 지고하고 거룩한 약속들을 어떻게든 상상해 볼 수는 있더라도, 그 위대성에 합당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을 정하는 것은 재판관이고, 재판관은 자기가 명하는 고통만을 형벌로 친다. 벌받을 자가 제 마음대로 집행하는 형을 재판관이 벌에 속한다고 여길 리 없다. 신의 보복은 그의 정의와 우리의 고통, 그 모두에 우리가 동의하지 않아야만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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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우리는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미(美)가 무엇인지 모르는 게 사실인 것 같다. 미의 무슨 본래적 형태가 있다면 불이 뜨겁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에 대한 공통적인 인식이 가능할 터인데, 우리는 우리 인간의 아름다움에도 가지각색의 형태를 상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우리 멋대로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한다.

이 방면의 대가들이 사랑의 열병에 대한 치료제로서, 갈구하는 대상의 몸을 샅샅이 맘껏 보라고 처방하는 것, 애착을 냉각시키려면 사랑하는 것을 실컷 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진실로 새겨 볼 가치가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 것으로 여기는 자산이란 공상적이고 허황된 것, 지금은 없는 미래의 것으로,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장담할 수 없는 것들이거나, 이성, 지혜, 명예처럼 사실과 달리 우리 멋대로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들이다. 그러고서 우리는 실제적이고, 사용 가능하고, 구체적인 장점은 동물들 몫으로 돌린다. 평화, 평안, 안전, 순진, 건강, 그렇다, 자연이 우리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값진 선물인 건강을 말이다.

우리는 우리 몫으로 불안정, 우유부단, 불확실, 고통, 미신, 죽은 다음까지 포함해 닥쳐올 일들에 대한 불안, 야심, 인색, 질투, 시기, 무절제하고 광포하고 길들일 수 없는 욕망, 전쟁, 거짓, 배신, 비방 그리고 호기심을 갖는다. 끊임없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 헤아릴 수 없는 격정들을 대가로 치르고서 우리가 자랑해 마지않는 이 대단한 이성, 판단하고 인식하는 이 능력을 산 것이라면 정녕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과한 값을 치른 것이다.

우리의 행복이란 불행이 없는 것에 불과하다. 바로 그 때문에 쾌락을 최상의 가치로 삼은 철학 학파조차 행복을 단지 고통 없는 상태라고만 정의했다. 불행하지 않은 것, 그것이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다.

신앙은 우리가 얻어 낸 것이 아니라 순전히 다른 이의 너그러운 선물이다. 우리가 우리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우리의 추론이나 이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 부과된 권위와 명령에 의한 것이다.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우리 판단력의 힘보다는 허약성이, 우리의 통찰력보다는 우리의 맹목성이 도움이 된다.

자신의 판단에 대한 퓌론파의 이런 입장, 즉 판단도 동의도 없이 모든 사물을 받아들이는 곧고도 단호한 태도는 그들을 아타락시아(평정)로 이끈다. 이 아타락시아는 우리가 사물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견해와 지식이 주는 인상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동요에서 벗어난, 평화롭고 고요한 생활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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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심은 우리의 본성적이고 본원적인 병이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상처 입기 쉽고 취약한 것이 인간이요, 동시에 가장 오만한 것도 인간이다. 인간은 자기가 세상의 진창과 똥 가운데 살며, 우주에서 가장 활기 없고 무기력한 가장 나쁜 부분에 매여 못 박혀 있고, 하늘의 궁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마지막 계단에서 세 가지 조건) 중 가장 나쁜 조건을 가진 동물들과 함께 살고 있음을 지각하고 안다. 그러면서도 상상으로 자기를 달의 궤도에 올려놓고, 하늘을 자기 발밑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우리가 자의(自意)와 재주로 하는 일을 짐승들은 부득이한 선천적 성향으로 한다고 볼 명백한 근거가 전혀 없다고 나는 말한다. 같은 결과는 동일한 능력에 기인한다고 결론지어야 하며, 따라서 우리가 행동할 때 쓰는 바로 그 사고력과 방법이 동물들의 것이기도 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전혀 본성적 제약을 못 느끼면서 왜 그들에게만 그런 선천적 제약이 있다고 상상하는가?

우리는 평범한 일보다 기이한 일에 더 감탄하며 높이 평가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렇게 시간을 끌며 길게 늘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엔, 누구라도 우리와 함께 사는 동물들에게서 일상적으로 보는 것을 가까이서 관찰하면 다른 나라 다른 세기에서 수집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많은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운행은 언제 어디서나 여일하다. 그것의 현 상태를 충분히 이해한 사람은 모든 미래, 모든 과거에 어떠할지도 적확하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즉 소망, 믿음, 놀라운 사건들, 의식(儀式), 회개, 순교는 어느 종교에나 있다. 우리 진리만이 갖는 특별한 표지는 우리의 덕성이어야 할 것이다. 덕이야말로 가장 얻기 어려운 천상의 표지요, 진리가 만들어 내는 가장 값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성의 충고 없이 우리 마음에서 생겨나는 어떤 감정의 움직임이 있다. 어떤 이들은 공감이라고 부르는, 이유 없는 애정이다. 짐승들도 우리처럼 그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말들이 서로 친해져서 결국 따로 키우거나 따로 여행시키기가 괴로울 지경이 되는 것을 본다.

죽기 마련이고 허약해 빠진 것들이나마 우리가 가진 기능들이 우리의 거룩하고 신성한 신앙에는 아주 안성맞춤이어서, 천성적으로 죽기 마련이요 허약한 대상에 그것들을 사용하면 더없이 적합하다는 점은 그리스도인에게 큰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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