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당신의 정념이 너무 강렬하다면 그것을 분산시켜 버리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내가 가끔 해 보니 쓸모가 있었다. 그것을 여러 개의 욕망으로 잘게 부수고, 원한다면 그중 하나가 나머지를 이끌고 지휘하게 두라. 그러나 행여 그가 당신을 지배하고 군림하려 들까 염려스러우니, 그것을 나누고 한눈 팔게 하여, 약화시키고 붙들어 놓으라.

자연은 이처럼 덧없음이라는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서 일해 나간다. 우리의 고통에 대한 최상의 의사로서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은 시간이며, 시간은 우리 상상력에 다른 일거리들을 연이어 제공함으로써 아무리 강력한 것이었을지언정 처음의 느낌을 해소하고 부셔 버리며, 주로 이 방식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내 행동의 대부분은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보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어떻든 나 스스로 그 길로 간 것이 아니라 [풍속을 따라] 이끌려 간 것이며 외적 이유들에 의해 그리 간 것이다. 왜냐하면 불편한 것들만이 아니라, 아무리 추하고 악하며 피할 수 있는 일들마저도, 어떤 조건과 상황에 의해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친절에 대한 고마움의 정도는 전적으로 친절을 베푼 자의 의도가 무엇이냐에 관련된다. 친절과 관련된 다른 사정들은 말이 없고 죽은 것, 우연한 것일 뿐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자기 전부보다 여자가 주는 얼마 안 되는 것이 여자로서는 더 비싼 대가일 수 있다. 어떤 일에서는 희소성이 그 가치를 더한다면 바로 이 경우가 그럴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적은지는 살피지 말라, 대신 그것을 가지게 된 사람이 얼마나 소수인가를 보라. 화폐의 가치는 주형(鑄型)과 주조 장소가 어디냐에 따라 달라진다.

호기심은 만사에 두루 사악한 것이지만, [배우자의 부정이라고 하는] 이 일에서도 파괴적이다. 어떤 약도 증세를 악화시키고 더 심각하게만 만드는 병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보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로 인한 치욕은 주로 질투에 의해 증대되고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에 대한 복수는 우리를 치료해 주기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다.

나로서는 누가 나더러 훌륭한 항해사라거나 대단히 검박하다거나 혹은 아주 정결하다거나 하는 찬사를 보낸다면 조금도 고맙지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누가 나를 배신자라거나 도둑 혹은 주정뱅이라고 부른다 해도 [내 이야기가 아니니] 조금도 언짢아지지 않을 것이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잘못된 칭찬에 배가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나를 보고 있고, 배 속까지 나를 연구하며 내게 속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더 정확히 알려져 있기만 하다면 칭찬을 덜 받아도 나는 기쁘다. 내게는 어리석다고 보이는 것을 지혜로움이라고 여기며 사람들이 나를 현자로 생각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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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동하면서 행동 그 자체 말고 다른 과실을 추구하지 않으며, 먼 나중의 결과와 목적을 거기에 연결시키지도 않는다. 각 행동마다 저 나름의 한 판 시합을 하는 것이니, 그럴 수 있다면 매번 과녁에 딱 맞히게 되기를!

그러나 이해관계와 사적 정념에서 비롯한 모질고 가혹한 마음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듯, 의무라고 불러서는 안 되며, 사악하고 배신하는 행위를 용기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 폭력과 증오로 기우는 자기들의 성정을 그들은 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진실의 길은 하나이고 단순하며, 개인적 이익과 자기 사업의 편익을 따르는 길은 이중적인 데다 고르지 않고 제멋대로이다. 인위적 자유로움을 꾸며서 해 보려는 경우도 이따금 봤지만,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

세계는 영원한 널뛰기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쉴 새 없이 흔들린다. 땅도 코카서스의 바위들도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모두가 함께 흔들리고 또 각자 따로 흔들린다. 항구성마저 더 느슨한 동요일 뿐이다. 나는 나의 대상을 고정시킬 수가 없다.

후회란 우리의 의지를 부인하는 일이요, 상념들의 변덕일 뿐이며, 그것은 우리를 온갖 방향으로 끌고 다닌다. 후회는 후회하는 자에게 지난날의 미덕과 순결을 부인하게 만든다.

가장 고매한 영혼은 가장 많은 다양성과 유연성을 지닌 영혼이다. "여기 대(大) 카토에 대한 고개 끄덕일 만한 증언이 있다. 그는 무슨 일에나 마찬가지로 적응할 줄 아는 유연한 정신을 지니고 있어서, 그가 맡게 된 일이 무엇이든 이 사람이야말로 오직 이 일을 위해 태어난 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티투스 리비우스)

우리는 민중과 더불어 살고 그들과 거래한다. 만약 그들과의 교제가 우리에게 짐스럽고, 지체 낮은 평민들에게 우리를 맞춰 가기를 경멸한다면 ? 그러나 이들 평범한 하층민들은 가장 섬세한 사람들만큼이나 견실한 경우가 흔하다 ? (어떤 지혜건 공통의 바보스러움에 맞추지 못하는 지혜란 따분하거니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에도 남들의 일에도 참견하려 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적인 일이건 사적인 일이건 그 사람들과 함께해 풀리는 법이다.

우리는 항상 [죽음의 순간에] 다른 것을 생각한다. [저 세상에서의] 보다 나은 삶의 희망이 우리를 지탱해 주고 든든하게 만들거나, 혹은 우리 자식들의 능력, 혹은 우리 명성이 미래에 빛날 일, 혹은 이 삶의 고통이 사라지는 일, 혹은 우리 죽음의 원인이 된 자들을 위협하는 복수극을 떠올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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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UM(숙명)에 관한 논쟁도 우리의 여러 다른 논쟁거리 가운데 섞여 든다. 그리고 미래의 일들과 우리의 의지까지 결정적이고 불가피한 필연성에 결부시키려고 우리는 여전히 해묵은 논리에 의지한다.

신중하고 분별 있게 벌을 내려야 벌을 받는 사람이 더 잘 수용하고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 반면 벌주는 사람이 노여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으면 벌받는 자는 정당하게 처벌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행동과 말이 함께 간다면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조화이고, 말이란 행동이 따를 때 가장 권위 있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나는 부인하고 싶지 않다

분노란 저 혼자 장구 치고 북 치며 부풀어 오르는 정념이다. 그릇된 이유로 흥분한 나머지, 누가 우리에게 정당하게 반박하거나 변명을 제시해도, 진실 자체에 대해, 그리고 엉뚱한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린 일이 얼마나 많은가?

정념은 밖으로 표출됨으로써 약화된다. 감정의 화살촉이 안을 향해 꺾이게 하기보다 밖으로 작용하게 하는 편이 낫다. "밖으로 드러나는 결함은 가장 가벼운 것들이다. 그것들이 건전한 척하는 외양 뒤에 숨어 있을 때 제일 위험하다."(세네카)

모든 여성과의 관계를 딱 끓고 사는 것이 아내와 함께 모든 면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보다 아마 더 쉬울 것이다. 꼭 알맞게 절제하며 풍요 속에 사는 것보다 가난하게 살 때 더 근심 없는 나날을 보낼 수도 있다. 합리적으로 쓰는 일이 아주 없이 지내는 것보다 더 고달프다. 절제는 고통을 겪는 것보다 더 힘이 드는 덕목이다.

많은 탁월한 인물들이 그랬듯이, 남을 위해 삶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은 마음이 위대하다는 증거요. 늙은 생명(그것의 가장 큰 이점은 얼마나 더 살 것인가에 대한 조바심이 없고, 목숨을 보다 하찮게 여겨 더욱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오.)을 보존한다는 것은, 그 봉사가 지극히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달갑고 기쁘고 유익하다고 생각된다면 특별한 선행이 되는 것이오.

우리를 이렇게 눈멀게 만드는 것은 죽음과 고통에 대한 공포, 아픈 것을 참지 못하는 조급함, 낫고 싶은 광적이고 과도한 욕망,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물러터져서 조종당하기 쉬운 것은 순전히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대다수는 의학을 믿는다기보다 그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의학에 대해 불평하며 우리처럼 말하는 소리가 들리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어쩔 수 있나?" 하면서 결정을 내린다. 여하간 안달이라도 하는 것이 참는 것보다 좀 나은 치료법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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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9-07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꾸준히 열독하시는군요. 저도 에세1을 오늘 몇 장 읽었어요. 아침마다 읽고 하루를 시작해야겠단 생각을 했어요.
사례가 풍부하여 읽는 재미를 더하는 것 같아요. 인용한 문장도 명언처럼 빛나 보이더군요. 인용의 대가라 할 만해요.
읽다 보면 인간의 민낯을 보게 되어 인간에 대한 공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대단해요.^^

겨울호랑이 2022-09-07 18:27   좋아요 0 | URL
페크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에세>는 마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는 느낌을 주는 책이라 빠르게 읽기보다 행간 사이에 머물며 잠시 머무는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분량은 적지 않지만, 완독하는 재미보다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본받을 만한 데가 있거나 삶과 사상이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면 자기를 알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카이사르나 크세노폰이야 반듯하고 견고한 토대처럼 자기가 이룬 업적의 위대성을 기초 삼아 자기들의 이야기를 단단하게 세워 볼 만했다.

거짓말은 비천한 악덕이다. 한 고대인은 거짓말이 신을 멸시함과 동시에 인간을 두려워하는 증거라고 매우 수치스럽게 묘사했다. 거짓말의 가증스러움, 천박함, 파렴치함을 이보다 더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아이들이 애꾸눈, 절름발이, 사팔뜨기, 그 밖에 이런저런 신체적인 결함을 흉내 낼 때, 엄마들이 야단을 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그렇게 연한 몸이 그 때문에 어떤 나쁜 름을 갖게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쩐지 운수는 우리 말대로 되게 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픈 척하다가 병자가 되어 버린 예를 많이 들었다

우리 밖에서 우리네 병을 찾지 마세나. 병은 우리 안에, 우리 내장에 들어 있네. 게다가 우리가 병든 줄도 모른다는 것이 치료를 더욱 어렵게 하네.

나는 충동적이고 튀는 성정(性情)에서 나온 행동과 결단과 참을성에서 나오는 태도 사이엔 큰 차이가 있음을 경험을 통해 발견한다. 또 나는 우리가 못할 일이 없음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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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9-07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래에서 세 번째 문단. - 말이 씨가 되는 거군요.

겨울호랑이 2022-09-07 18:28   좋아요 0 | URL
언어에 힘이 있다는 또 다른 표현일아 생각합니다. 자기계발서 <시크릿>의 실증이 될까요? ^^:)
 

일이 다르게 돌아가면 거기에 맞춰 그를 그 자신과 모순이 되게 만든다. 우리 시대에 불법이라는 이유로, 그의 시대엔 합법적이었던 풍습을 그가 단죄한 것처럼 만든다. 이 모든 것이 격하고 강하게 주장되니, 해석하는 자의 정신이란 그만큼 강하고 격한 것이다.

인식되는 모든 것은 당연히 인식의 기능에 의해 인식된다. 왜냐하면 판단은 판단하는 자의 정신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가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자기 수단과 의지를 가지고 이 작용을 완수하는 게 당연하니까.

우리의 사고는 우리와 무관한 사물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중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감각은 무관한 대상 자체를 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제가 대상에게서 받은 인상들만을 품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에 대해 우리가 갖게 되는 생각이나 사물의 모습은 대상의 것이 아니고, 오직 그 사물이 감각에 남긴 인상일 뿐이다. 이 인상과 대상은 별개의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모습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것은 대상과는 다른 것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정녕 가장 주목할 만한 행위인 죽음에서 어떤 사람이 보인 침착한 태도를 판단할 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그 지경에 이른 것을 잘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벌은 악덕을 약화시키기보다는 자극한다. 벌은 선행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선행은 이성과 훈육의 작품이다. 벌은 단지 나쁜 짓을 하면서 들키지 않으려 조심하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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