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과 권력 - 개정판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강두식.박병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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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는 순간은 권력의 순간이다. 죽음을 목격하며 느꼈던 공포감이 사리자고 서서히 만족감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301


 엘리아스 카네티 (Elias Canetti, 1905~1994)는 <군중과 권력 Masse und Macht >에서 권력자와 군중 그리고 이들 사이의 권력에 대해 말한다. 카네티는 권력은 살아남는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여기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명연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필멸(必滅)의 인간이 불멸(不滅)의 존재로 되기 위한 열망. 아킬레우스의 욕망이 권력자에게 자리한다. 권력자는 죽음을 직면하고 더 많은  다른 이들의 죽음을 통해 더욱 강력해진다. 죽음을 통해 얻어지는 권력. 그것은 하나의 오르페우스 비의(秘儀)다.


 권력자는 가장 철저한 의미로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며 그 권력을 고수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권력은 사용함으로써 소모될 수 있는 실체라고 그가 느끼기 때문이며, 더 높은 권력자가 자신에 대한 존경의 행동으로서 권력을 아껴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소중한 실체를 보존해줄 가능성이 가장 큰 자세를 취하고 천천히 화석화한다. 그 어떤 변화도 위험할 것이므로 모든 변화는 그를 불안에 휩싸이게 만든다. 오직 모든 움직임을 양심적으로 피함으로써만 권력은 보호될 수 있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609


 권력자는 자신의 영생(永生)을 위한 타인들의 죽음의 예식을 행하는 제사장이다. 죽음의 제사장의 날카로운 칼은 태초의 말씀 이전부터 인간의 본성을 관통하는 칼날이다. 이 칼날은 예리하게 죽음의 희생양들을 향해 거침없이 내리꽂힌다. 그리고 이 성찬에 희생되는 불쌍한 어린 양(Agnus Dei)은 바로 군중이다.


 권력의 가장 깊은 핵심에는 비밀이 있다. 먹이를 기다리며 누워 있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은밀한 것이다. 잠복 중인 짐승은 숨거나 보호색을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비밀이라는 껍질을 쓰고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이러한 상태의 특징은 인내와 초조가 특이하게 혼합된 것이며, 그 상태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성공에 대한 기대도 강해진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공을 달성하기 위해서 감시자는 무한히 참을 수 있어야 한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391


 언어가 있기 전에도 명령이 있었다. 적어도 명령은 어떤 형태로든 인간 사회의 바깥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원시적인 형태의 명령은 언제나 도주를 유발한다. 도주는 외부에 있는 강한 짐승에 의해 약한 짐승에게 강요되는 것이다. 도주는 겉으로만 자발적일 뿐이다. 위험은 언제나 구체적인 형상을 지니며, 그 형상을 알아채지 않는 한 짐승은 도주하지 않는다. 두 짐승 사이의 힘의 차이는 도주 현상을 초래한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405


 군중은 접촉을 두려워하는 개인들의 집합이다. 개인들의 두려움은 밀집을 통해 무리 속에서의 안온함으로 바뀌게 되고 하나가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상태. 마치 종교 안에서 느끼는 평온함으로 종교가 빠르게 퍼져나가듯 군중은 우연적으로 확장된다. 그러면서도 군중은 방향성을 열망한다. 이때 군중에게 내려오는 권력자의 명령은 하나의 방향성이 되고, 명령이 주는 위압과 두려움은 빠르게 전염되며 군중은 권력의 지배 아래 머무르게 된다.


 군중은 생겨나는 그 순간부터 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가세하길 바란다. 성장하려는 욕구, 이것이야말로 군중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군중은 손에 닿는 모든 자를 붙잡으려고 한다. 인간의 형상을 가진 자라면 모조리 가담시키려 한다. 그래서 자연적 군중은 '열린 군중(die offene Masse)'이다. 이 군중의 확장에는 한계가 없어 여기서 '열린'이란 단어는 가장 완전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느 방향, 어느 곳으로도 다 열려 있다는 뜻이다. 열린 군중은 그 자체가 성장하는 한 존재한다. 성장을 멈추는 그 순간부터 열린 군중은 와해된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19


 군중에서는 명령이 그 구성원들 사이에 수평적으로 퍼진다. 명령이 본래는 위로부터 한 개인에게 하달되겠지만 명령을 받은 사람 곁에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명령은 즉각적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명령을 받은 사람이 두려움을 느껴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하면 다른 사람들도 순식간에 그 영향을 받게 된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415 


 이제 권력자는 군중을 지배한다. 권력자는 군중에게 명령으로 두려움을 재현할 수 있으며, 군중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빼내 줄 수도 있다. 권력자가 행하는 은밀한 죽음의 비의 속에서 군중은 권력자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군중은 영원히 권력의 지배 아래 놓여야 하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권력의 표현이 정점에 달하는 것은 사형 집행 직전에 사면령을 내릴 때이다. 교수대나 총살대 앞에서 사형을 집행하기 직전에 내리는 사면은, 사면을 받는 자에게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을 준다.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없는 것이 권력의 한계이지만, 오랫동안 보류했던 사면을 베풂으로써 권력자는 자신이 마치 이러한 한계를 초월한 것처럼 생각한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402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에서 권력자와 군중의 관계를 권력을 매개로 한 상하관계로 보지만, 이 관계는 바꿀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사슬에 묶여 자란 아기 코끼리가 성장한 후에도 그 사슬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자신의 힘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군중이 자신의 힘과 명령의 가시를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행동을 했을 때 권력관계는 무너질 수 있음을 저자는 보여준다. <군중과 권력>의 전체 얼개는 이런 도식으로 요약될 수 있지만, 이를 위해 제시한 여러 역사적, 인류학적 사례들은 설득력있게 독자들에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혼자서'는 제거할 가망이 없는 명령의 가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해방되기 위해 역전 군중이 형성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결해서 명령을 내렸던 사람들의 집단에 대해 반기를 든다(p438)... 신민들의 머리 위에 항상 매달려 있는 위협은 죽음의 위협이었다. 때때로 처형이 있을 때마다 이 위협은 해로워졌고 의심할 바 없는 확실성이 입증되었다. 이 위협은 단 한 가지 방법에 의해서만 사라질 수 있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439


인간이 접촉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군중 속에 있을 때 뿐이다. 이때는 두려움이 오히려 정반대의 감정으로 변한다. 이때 인간은 ‘밀집된 군중(die dichte Masse)‘, 즉 몸과 몸이 밀착되어 누가 누구를 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물리적으로 빽빽이 들어찬 군중을 필요로 한다. 군중에 놓이는 순간 인간은 닿는 게 두렵지 않게 된다. 이상적인 경우에 거기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 P18

역전은 계급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보다 더 많은 권리를 향유하는 그런 계급 구분이 한동안 계속되고, 이것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감지되다가 상황을 역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한다. 내부적 사건의 결과로서, 아니면 정복에 의해 정복자가 토착민을 지배함으로써 상위의 집단이 하위의 집단에 명령을 내릴 권한을 갖게 되는 새로운 사회적 계층이 형성된다. - P76

만일 쥐가 그 테두리를 뛰쳐나오면 고양이의 권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잡힐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기 전에는 그 권력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다. 고양이가 지배하는 공간, 고양이가 쥐에게 허용하는 희망의 순간들, 그러나 잠시도 눈을 딴 데로 돌리지 않는 면밀한 감시와 해이해지지 않는 관심, 그리고 쥐를 죽이려는 생각. 이것을 모두 합친 것, 다시 말하면 공간, 희망, 빈틈이 없는 감시와 파괴적인 의도를 권력의 실체, 좀 더 단순히 말하면 권력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다. - P379

명령 체계는 어디에서나 인정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군대에서 가장 명료할 것이다. 명령이 이르지 않는 문명 생활의 영역은 거의 없으며 우리 중에 명령의 주목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명령에 따라 오는 죽음의 위협은 권력의 화폐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화폐에 화폐를 더해 거부(巨富)를 축적하기는 너무나 쉽다. 만약 우리가 권력을 지배하려면 우리는 공공연하고 대담하게 명령을 직시해야 하며 명령으로부터 가시를 제거하는 수단을 찾아야만 한다. - P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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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3-09-25 06: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되다니 기쁩니다. ㅋㅋㅋ

겨울호랑이 2023-09-25 10:46   좋아요 1 | URL
^^:) 저도 이렇게 곰곰발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대의기구가 어려움에 빠질 때 국민이 나서서 대신 싸워주지 않으면 그 제도는 제대로 존립할 수 없다. 이런 일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면 대의기구는 도대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일이 이렇게 되면, 정부의 우두머리나 기습적으로 폭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당 지도자 누구라도 절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순간적인 모험을 감행할 경우, 대의기구는 대개 당장 전복되고 말 것이다.

대의정부를 운용할 만한 수준에 오른 사회라면 어디서든 시민이 일정 수준의 양심과 사심 없는 공공 정신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이 자신들의 계급 이익이 마치 정의와 일반 이익의 화신인 것처럼 착각하지 않을 만큼 지적 분별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현대 사회에서 대의정부는 점점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움직인다. 선거권이 확대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굳어진다. 그 결과 한 공동체 안에서 지적 수준이 최고에 한참 못 미치는 부류의 사람들이 주요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최상의 지성과 인품을 가진 사람이 수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밀린다 하더라도, 그가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느냐 여부에 따라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대의기구 속에 한 나라의 일류 지성 중 몇 사람만이라도 포진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들로만 채워진다 하더라도, 그리고 비록 그들이 여러 측면에서 대중의 일반적인 생각이나 감정과 다르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하더라도 이들 앞서가는 지도급 인사들이 전체 심의 과정에서 확실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부족한 점을 개인대표제가 보완해줄 수 있다. 현대 사회의 틀 속에서 가장 완벽하게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적 다수의 본능에 맞서 부족한 것을 보완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려면 지성을 갖춘 소수밖에 의지할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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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 3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42
샤를 드 몽테스키외 지음, 진인혜 옮김 / 나남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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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법은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고, 시민법은 소유권을 가져다주었다. 소유권에 관한 법으로만 결정해야 할 것을 자유의 법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자유의 법은, 우리가 말했듯이, 단지 국가의 지배권에 불과하다. 개인의 이익은 공익에 양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91


 앞서 논의에 이어서 샤를 드 몽테스키외 (Montesquieu Charles Louis de Secondat, 1689~1755)는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 3-3>에서 나라들 사이의 관계를 규제하는 만민법,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를 확립하는 정치법, 시민들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시민법이 서로 충돌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정치법의 규칙으로 결정해야 할 때, 시민법의 규칙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만약 국가의 소유권에서 유래하는 규칙과 국가의 자유에서 비롯되는 규칙을 혼동하지 않는다면, 모든 문제의 핵심이 보일 것이다(p93)... 계승 순서를 확정하는 것은 지배 왕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지배왕가가 있는 것이 국가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상속을 규정하는 법은 개인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시민법이다. 왕위계승을 규정하는 법은 국가의 이익과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법이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93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사안에 따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국제법, 헌법, 민법의 적용 부문이 서로 다르며 이들은 서로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법의 규칙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을 때 법은 지나친 자유와 목적에 맞지 않게 되는 두 극단을 오가게 되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중용'의 정신이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중용(中庸)의 정신이 입법자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선(善)은 도덕적 선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두 극단 사이에 있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229


 몽테스키외의 정체는 플라톤(Platon, BCE 427~348)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E 384~322)와 달리 확정적이지 않다. 풍토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宗敎)와 정체(政體)가 자리하기에 여기에 부합하는 최선의 정체는 저마다 다르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풍토에 따라 자리할 수 있는 종교가 결정되고, 종교의 성격에 따라 더 적합한 정체가 결정된다. 전제정체는 이슬람교에 더 적합하고, 제한된 정체는 기독교에 더 적합하지만 보다 독립적인 개신교에는 공화정체가, 가톨릭은 군주정체가 더 어울린다.


 풍토에 토대를 둔 종교가 다른 나라의 풍토와 몹시 충돌할 때, 그 종교는 그 나라에 수립될 수 없었다. 그곳에 도입되어도 곧 사라졌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경계를 정해준 것은 바로 풍토인 듯하다. 그러므로 종교는 특수한 교리와 일반적인 종교의식을 갖는 것이 거의 언제나 적당하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45


 기독교가 2세기 전에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뉘는 불행한 분열을 겪었을 때, 북쪽의 민족은 개신교를 선택하고, 남쪽의 민족은 가톨릭을 유지했다. 북쪽 민족은 남쪽 민족이 갖지 않은 독립정신과 자유정신을 갖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텐데,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없는 종교는 그런 지도자가 있는 종교보다 독립적 풍토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25


 법에 의한 통치(法治)가 이루어지지 않는 전제정을 제외한 군주정체와 공화정체는 법을 필요로 하는데 법의 지향은 바로 훌륭한 자질을 보존하고 계승시켜 국가의 힘을 보다 강대하게 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적절한 법의 규칙 적용이며, 입법의 정신 - 중용 - 이다. 몽테스키외는 이러한 자신의 논거를 로마와 프랑스 역사의 여러 사례를 통해 뒷받침한다.


  프랑스에서 대머리왕 카롤루스의 나약한 정신은 나라도 똑같이 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형제인 독일인 루도비쿠스와 그를 계승한 몇몇 사람들은 더 훌륭한 자질을 가졌으므로, 그들 국가의 힘은 더 오래 유지되었다. 아니, 어쩌면 독일 국민의 차분한 기질, 그리고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들 정신의 불변성이 프랑스 국민의 기질보다 그런 추세에 더 오랫동안 저항할 수 있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400


 이처럼,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삼권분립에 대한 주장만을 담고 있지 않다. 정체와 관련하여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는 다르게 자연 풍토까지 고려한 최선이 아닌 최적의 정체를 말하고, 이를 위해 플라톤의 <법률>에서처럼 중용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는다. 또한 이러한 논거를 뒷받침 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의 <신국론 De civitate Dei>과 같이 로마와 프랑스 역사를 갖고 온 점은 자못 흥미롭게 다가온다. <법의 정신>과 함께 이상의 책들을 읽는다면 보다 깊이 있는 독서가 되리라 생각된다...

기독교는 단순한 전제정체와는 거리가 멀다. 복음서에서 온화함이 그토톡 권장되고 있으니, 기독교는 군주가 벌을 주고 잔인함을 행사하는 전제적인 분노와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인간적이다. 그들은 법을 만들려는 의향이 더 많고, 자신들이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p22)... 기독교 덕분에 통치에서는 정치법을, 전쟁에서는 만민법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제대로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 만민법 덕분에, 우리는 승리를 해도 패배한 민족에게 생명, 자유, 법, 재산과 같은 중요한 것들을 그대로 남겨준다. - P23

종교에 관한 정치법의 근본 원리는 다음과 같다. 나라 안에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일 것인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을 때는 새로운 종교를 정착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가 나라 안에 정착하면, 그것을 관용해야 한다. - P60

법의 문체는 간결해야 한다... 법의 문체는 단순해야 한다(p243)... 법은 미묘해서는 안 된다(p245)... 충분한 이유 없이 법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p246)... 법에는 순수함이 필요하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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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저서를 토대로 그의 철학을 정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의 철학이 안고 있는 수많은 내부적인 모순과 변화무쌍한 전개를 집필 시기에 따라 다양한 각도에서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이러한 방식을 상당히 경계했던 철학자다. 그가 탐구했던 것은 오히려 아름다움이나 선, 정의, 단일성이나 다양성과 같은 수학적인 개념과 보편적인 언어였다.

플라톤의 철학은 인간의 행위나 사유, 존재의 영역을 높거나 낮은 두 단계로 양극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탄생한 것이 ‘존재와 변화’, ‘하나와 다중’, ‘영원과 시간’, ‘참과 거짓’, ‘학문과 견해’, ‘선과 악’ 같은 대조적인 개념들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이상적이면서 일반적인 삼각형뿐이다. 이상적인 삼각형은 항상 삼각형 자체와 일치하며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도 변화를 모른다. 아울러 이를 토대로 하는 공식들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주관적 의지에 좌우되지 않는다.

묘사와 평가를 내용으로 하는 문장 속에 사용된 표현들이 일차적으로 지시하는 이상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플라톤이 상대주의와 거리가 먼 의미 체제를 안정적으로 확립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여기서 플라톤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들 중에 하나가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즉 담론과 지식의 안정성은 이들이 다루는 대상의 안정성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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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체제는 한국전쟁 거치고 휴전상태로 굳어지면서 체제화되었다고 봐야 옳을 것 같습니다. 한국전쟁이 중요한 것은, 분단이 하나의 체제가 된다는 것은 상당한 안정성을 갖게 된다는 얘기거든요, 그게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일정한 안정성을 지니게 된 겁니다.

그래서 분단과 분단체제는 구별할 필요가 있고요. 그렇게 해야 어떤 학자의 말이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분단 자체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건지 판별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분단 자체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것은 내가 약간 비아냥조로 말한 후천성분단인식결핍증후군이라고 해도 별로 할 말이 없을 거예요.

베스트팔렌체제란 것은 인류의 정치·국가의 역사상 극히 한정된 시기에 한정된 지역에서 통하던 체제였고, 1차대전이 벌어지면서 그 원래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국제연맹을 만들자고 그랬잖아요,

보통 우리가 체제를 이야기할 때 핵심요소로서 경제체제를 이야기하면, 정치체제는 다시 따져야 되겠습니다만, 재산권 문제를 봐야 되고 그다음에는 거버넌스를 봐야 합니다. 거버넌스라는 건 우리가 시장이냐 계획이냐 할 때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자원분배 시스템을 반드시 다루게 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통상 소유제도를 보통 체제의 핵심요소라고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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