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론의 핵심은 우리가 타고난 천부적 재능과 사회적 지위 모두가 도덕적 정당 근거가 없는 우연적인 것인 까닭에 그것들을 공동의 자산으로 간주하고 중립화하는 데서 정의에 대한 생각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 P43

그런데 형식적 기회 균등도 아니고, 실질적 기회 균등도 넘어서서 공정한 기회 균등까지 보장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여기에서 롤스는 우선 절차적 정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되 그 문제점을 ‘최소 수혜자 최우선 배려의 원칙‘을 통해 보완하는 전략으로 자신이 구상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한다. - P43

롤스는 ‘무지의 베일 the veil of ignorance‘을 통해 각자의 운명을 모르는 상태에서 가장 불운한 계층의 일원이 될 각오 아래 선택한 것이 바로 정의의 원칙으로서 정당화된다고 보았다.  - P48

이런 점에서 롤스의 정의론은 절차주의적 측면과 결과주의적 측면의 상호 보완을 통해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즉 기회 균등을 중심으로 수행되는 절차주의적 과정의 부족한 측면을 공정 분배라는 결과주의적 조정으로 보완함으로써 롤스의 정의론이 완성되는 것이다. - P60

"모든 사회적 가치들-자유, 기회, 소득, 재산 및 자존감의기반은 이들 가치의 전부 또는 일부의 불평등한 분배가모든 사람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한 평등하게 분배되어야한다."(《정의론》, 107쪽)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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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한국과 일본은 냉전 시기는 물론이고 그 이후도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공유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한일관계의 상당 부분은 한미일 관계로 구성된다. 따라서, 대미동맹의 공유가 한일관계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쳤는가, 또한 그것이 시기적으로 어떤 식으로 변화해왔는가에 중점을 두는 것은 한일관계의 분석에 있어 필수 사항이다.

한일을 사정거리에 두는 북한 핵미사일 개발, 일본인 납북 문제, 한일 국교 정상화 등 남북관계나 한일관계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는 한일관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후 중국의 대국화, 그리고 미국과 중국 관계가 대립으로 변화하면서, 한국과 일본은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이에 따라 미중관계 변화가 한일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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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직은 정의로운 상황에서 정의로운 단계를 거쳐 발생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 자체로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한편 존 롤스(John Rawls)는 공정한 상황에서 공정한 절차를 거쳐 합의된 내용은 그 자체로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의 주장은 절차적 정의관을 채택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러나 정의의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다.  - P50

 결국 노직이 정당한 권리에 근거한 배타적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면 롤스는 최소 수혜자의 이익의 개선을 고려하는 차등 분배를 주장한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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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과 권력 - 개정판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강두식.박병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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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는 순간은 권력의 순간이다. 죽음을 목격하며 느꼈던 공포감이 사리자고 서서히 만족감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301


 엘리아스 카네티 (Elias Canetti, 1905~1994)는 <군중과 권력 Masse und Macht >에서 권력자와 군중 그리고 이들 사이의 권력에 대해 말한다. 카네티는 권력은 살아남는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여기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명연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필멸(必滅)의 인간이 불멸(不滅)의 존재로 되기 위한 열망. 아킬레우스의 욕망이 권력자에게 자리한다. 권력자는 죽음을 직면하고 더 많은  다른 이들의 죽음을 통해 더욱 강력해진다. 죽음을 통해 얻어지는 권력. 그것은 하나의 오르페우스 비의(秘儀)다.


 권력자는 가장 철저한 의미로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며 그 권력을 고수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권력은 사용함으로써 소모될 수 있는 실체라고 그가 느끼기 때문이며, 더 높은 권력자가 자신에 대한 존경의 행동으로서 권력을 아껴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소중한 실체를 보존해줄 가능성이 가장 큰 자세를 취하고 천천히 화석화한다. 그 어떤 변화도 위험할 것이므로 모든 변화는 그를 불안에 휩싸이게 만든다. 오직 모든 움직임을 양심적으로 피함으로써만 권력은 보호될 수 있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609


 권력자는 자신의 영생(永生)을 위한 타인들의 죽음의 예식을 행하는 제사장이다. 죽음의 제사장의 날카로운 칼은 태초의 말씀 이전부터 인간의 본성을 관통하는 칼날이다. 이 칼날은 예리하게 죽음의 희생양들을 향해 거침없이 내리꽂힌다. 그리고 이 성찬에 희생되는 불쌍한 어린 양(Agnus Dei)은 바로 군중이다.


 권력의 가장 깊은 핵심에는 비밀이 있다. 먹이를 기다리며 누워 있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은밀한 것이다. 잠복 중인 짐승은 숨거나 보호색을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비밀이라는 껍질을 쓰고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이러한 상태의 특징은 인내와 초조가 특이하게 혼합된 것이며, 그 상태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성공에 대한 기대도 강해진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공을 달성하기 위해서 감시자는 무한히 참을 수 있어야 한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391


 언어가 있기 전에도 명령이 있었다. 적어도 명령은 어떤 형태로든 인간 사회의 바깥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원시적인 형태의 명령은 언제나 도주를 유발한다. 도주는 외부에 있는 강한 짐승에 의해 약한 짐승에게 강요되는 것이다. 도주는 겉으로만 자발적일 뿐이다. 위험은 언제나 구체적인 형상을 지니며, 그 형상을 알아채지 않는 한 짐승은 도주하지 않는다. 두 짐승 사이의 힘의 차이는 도주 현상을 초래한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405


 군중은 접촉을 두려워하는 개인들의 집합이다. 개인들의 두려움은 밀집을 통해 무리 속에서의 안온함으로 바뀌게 되고 하나가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상태. 마치 종교 안에서 느끼는 평온함으로 종교가 빠르게 퍼져나가듯 군중은 우연적으로 확장된다. 그러면서도 군중은 방향성을 열망한다. 이때 군중에게 내려오는 권력자의 명령은 하나의 방향성이 되고, 명령이 주는 위압과 두려움은 빠르게 전염되며 군중은 권력의 지배 아래 머무르게 된다.


 군중은 생겨나는 그 순간부터 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가세하길 바란다. 성장하려는 욕구, 이것이야말로 군중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군중은 손에 닿는 모든 자를 붙잡으려고 한다. 인간의 형상을 가진 자라면 모조리 가담시키려 한다. 그래서 자연적 군중은 '열린 군중(die offene Masse)'이다. 이 군중의 확장에는 한계가 없어 여기서 '열린'이란 단어는 가장 완전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느 방향, 어느 곳으로도 다 열려 있다는 뜻이다. 열린 군중은 그 자체가 성장하는 한 존재한다. 성장을 멈추는 그 순간부터 열린 군중은 와해된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19


 군중에서는 명령이 그 구성원들 사이에 수평적으로 퍼진다. 명령이 본래는 위로부터 한 개인에게 하달되겠지만 명령을 받은 사람 곁에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명령은 즉각적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명령을 받은 사람이 두려움을 느껴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하면 다른 사람들도 순식간에 그 영향을 받게 된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415 


 이제 권력자는 군중을 지배한다. 권력자는 군중에게 명령으로 두려움을 재현할 수 있으며, 군중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빼내 줄 수도 있다. 권력자가 행하는 은밀한 죽음의 비의 속에서 군중은 권력자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군중은 영원히 권력의 지배 아래 놓여야 하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권력의 표현이 정점에 달하는 것은 사형 집행 직전에 사면령을 내릴 때이다. 교수대나 총살대 앞에서 사형을 집행하기 직전에 내리는 사면은, 사면을 받는 자에게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을 준다.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없는 것이 권력의 한계이지만, 오랫동안 보류했던 사면을 베풂으로써 권력자는 자신이 마치 이러한 한계를 초월한 것처럼 생각한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402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에서 권력자와 군중의 관계를 권력을 매개로 한 상하관계로 보지만, 이 관계는 바꿀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사슬에 묶여 자란 아기 코끼리가 성장한 후에도 그 사슬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자신의 힘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군중이 자신의 힘과 명령의 가시를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행동을 했을 때 권력관계는 무너질 수 있음을 저자는 보여준다. <군중과 권력>의 전체 얼개는 이런 도식으로 요약될 수 있지만, 이를 위해 제시한 여러 역사적, 인류학적 사례들은 설득력있게 독자들에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혼자서'는 제거할 가망이 없는 명령의 가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해방되기 위해 역전 군중이 형성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결해서 명령을 내렸던 사람들의 집단에 대해 반기를 든다(p438)... 신민들의 머리 위에 항상 매달려 있는 위협은 죽음의 위협이었다. 때때로 처형이 있을 때마다 이 위협은 해로워졌고 의심할 바 없는 확실성이 입증되었다. 이 위협은 단 한 가지 방법에 의해서만 사라질 수 있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p439


인간이 접촉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군중 속에 있을 때 뿐이다. 이때는 두려움이 오히려 정반대의 감정으로 변한다. 이때 인간은 ‘밀집된 군중(die dichte Masse)‘, 즉 몸과 몸이 밀착되어 누가 누구를 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물리적으로 빽빽이 들어찬 군중을 필요로 한다. 군중에 놓이는 순간 인간은 닿는 게 두렵지 않게 된다. 이상적인 경우에 거기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 P18

역전은 계급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보다 더 많은 권리를 향유하는 그런 계급 구분이 한동안 계속되고, 이것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감지되다가 상황을 역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한다. 내부적 사건의 결과로서, 아니면 정복에 의해 정복자가 토착민을 지배함으로써 상위의 집단이 하위의 집단에 명령을 내릴 권한을 갖게 되는 새로운 사회적 계층이 형성된다. - P76

만일 쥐가 그 테두리를 뛰쳐나오면 고양이의 권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잡힐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기 전에는 그 권력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다. 고양이가 지배하는 공간, 고양이가 쥐에게 허용하는 희망의 순간들, 그러나 잠시도 눈을 딴 데로 돌리지 않는 면밀한 감시와 해이해지지 않는 관심, 그리고 쥐를 죽이려는 생각. 이것을 모두 합친 것, 다시 말하면 공간, 희망, 빈틈이 없는 감시와 파괴적인 의도를 권력의 실체, 좀 더 단순히 말하면 권력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다. - P379

명령 체계는 어디에서나 인정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군대에서 가장 명료할 것이다. 명령이 이르지 않는 문명 생활의 영역은 거의 없으며 우리 중에 명령의 주목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명령에 따라 오는 죽음의 위협은 권력의 화폐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화폐에 화폐를 더해 거부(巨富)를 축적하기는 너무나 쉽다. 만약 우리가 권력을 지배하려면 우리는 공공연하고 대담하게 명령을 직시해야 하며 명령으로부터 가시를 제거하는 수단을 찾아야만 한다. - P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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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3-09-25 06: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되다니 기쁩니다. ㅋㅋㅋ

겨울호랑이 2023-09-25 10:46   좋아요 1 | URL
^^:) 저도 이렇게 곰곰발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대의기구가 어려움에 빠질 때 국민이 나서서 대신 싸워주지 않으면 그 제도는 제대로 존립할 수 없다. 이런 일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면 대의기구는 도대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일이 이렇게 되면, 정부의 우두머리나 기습적으로 폭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당 지도자 누구라도 절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순간적인 모험을 감행할 경우, 대의기구는 대개 당장 전복되고 말 것이다.

대의정부를 운용할 만한 수준에 오른 사회라면 어디서든 시민이 일정 수준의 양심과 사심 없는 공공 정신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이 자신들의 계급 이익이 마치 정의와 일반 이익의 화신인 것처럼 착각하지 않을 만큼 지적 분별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현대 사회에서 대의정부는 점점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움직인다. 선거권이 확대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굳어진다. 그 결과 한 공동체 안에서 지적 수준이 최고에 한참 못 미치는 부류의 사람들이 주요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최상의 지성과 인품을 가진 사람이 수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밀린다 하더라도, 그가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느냐 여부에 따라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대의기구 속에 한 나라의 일류 지성 중 몇 사람만이라도 포진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들로만 채워진다 하더라도, 그리고 비록 그들이 여러 측면에서 대중의 일반적인 생각이나 감정과 다르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하더라도 이들 앞서가는 지도급 인사들이 전체 심의 과정에서 확실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부족한 점을 개인대표제가 보완해줄 수 있다. 현대 사회의 틀 속에서 가장 완벽하게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적 다수의 본능에 맞서 부족한 것을 보완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려면 지성을 갖춘 소수밖에 의지할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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