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이 문제는 일본 측에서는 영토 문제이지만 한국에는 영토 문제라기보다도 역사 문제였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원래부터 일본 고유의 영토였던 것을 1905년 시마네현이 영토 편입을 선언함으로써 법적으로도 영유권이 명확해졌는데도 불구하고 1952년에 이승만 정권이 불법 점거를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에 대해 한국 정부에 따르면 원래부터 한국 고유 영토였던 것을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의 첫걸음으로 억지로 자국 영토로 편입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과 동시에 당연히 한국의 영토로 되돌아온 것으로 본다.

한일관계는 냉전 시기와 같이 비대칭이지만 상호 보완적으로 협력하는 관계에서 대칭적인 관계로 변용해왔다. 따라서 냉전 시기 남북 분단 체제하의 체제 경쟁에서 한국 우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일본의 안전보장, 경제에도 이익이 된다는 관계는 그것을 실현함으로써 그 사명을 다했다.

한국과 일본은 안전보장상의 공통이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협력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경우, 대립을 억제하는 메커니즘을 실행으로 옮긴다. 양국이 함께 실행하는 경우도 있고 한쪽만인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함으로써 대립은 표면화하지 않고 억제된다. 하지만 그러한 인센티브가 실행되지 않을 경우, 바꿔 말하자면 양국의 안전보장상의 이익에 괴리가 보이거나 외교정책 방향에 갈등이 보이게 되면 한쪽 또는 양국 모두 대립을 억제하고 관리하는 메커니즘을 실행시키지 못하게 된다. 그 메커니즘을 실행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국내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의 대칭화가 문화의 상호 침투 현상을 촉진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거의 무관심이었던 한국문화에 일본 사회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해하게 된 것도 확실하다. 그것은 상당히 바람직하고 또한 한일관계의 미래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같은 ‘정의’라는 가치관에 대해서도 일본에서는 ‘약속이나 합의를 지킨다’라는 것과 같은 ‘절차적 정의’가 상대적으로 중시되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약자, 피해자를 포함하여 관계 당사자가 납득하고 동의했다는 의미에서 정의에 부합한다’라고 보는 ‘실질적 정의’가 상대적으로 중시된다.

이렇게 한일 협력의 ‘성지’였던 경제와 안전보장에서의 한일대립이 발생한 것은 한편으로 한일 간의 역사 문제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커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뿐만 아니라 대북 인식과 미중관계 인식을 둘러싼 한일의 괴리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외교나 안전보장 분야에서 한일의 괴리가 역사 문제를 풀어가려는 양측의 의욕을 저하시키며 나아가서는 역사 문제를 둘러싼 마찰을 격화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외교·안전보장의 괴리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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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체제’의 기본은 안전보장과 경제협력, 간단히 말하자면 ‘안보 경제’였다. 원래, 한일교섭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던 식민지배 기간에 한일 간에 이전된 경제적 가치의 원상 복귀를 꾀하는 방법으로 청산을 시도한 것이었다. 또 그것에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을 입혀, 그것을 수단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항하여 한일의 안보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렇듯, 안보와 경제를 우선함으로써 역사 청산은 미흡하게 매듭지어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경제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일본에서 원재료나 기계, 부품 등의 수입이 늘어났으나, 일본에 대한 공업제품의 수출이 수입과 비례하여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일 무역 적자는 날로 증대되었다.

일본 정부나 기업은 자국의 산업구조 고도화에 따른 국제 분업 체제의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중화학공업 육성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에 대한 이해도가 비교적 높았다.

더욱이 한일의 경제협력이 한일 각자의 정부 여당 세력을 직·간접적으로 강화한다는 역학도 성립되었다. 한일 협력으로 한국의 경제성장에 박차가 가해진 것은 결과적으로 정권의 실적을 올려 정통성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1970년대의 한일관계를 형용할 때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말은 ‘한일 유착’이다. 이것은 부패를 동반한다는 의미에서 비판적으로 쓰이는 말이긴 하지만, 1970년대의 한일관계가 1960년대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긴밀하였는가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다.

한일관계가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협력이 쉬운 측면도 있었다. 1980년대까지와 같이 한국이 비민주적인 체제였기 때문에 한일 협력에 대한 저항을 상당 정도 억제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원만한 한일 협력이 가능했다. 또 한일 협력의 성과로 한일 간 국력 격차가 좁혀졌다고 일본이 그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다. 서로 비대칭적이었던, 바꿔 말하면, 서로 너무도 달랐던 점이, 상호 협력에 따른 손익계산에 관해, 누릴 이익에는 민감했지만 부담할 비용에는 그다지 민감해야 할 필요성을 없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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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분단 체제는 1948년 이후로 70년 이상 일관되게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격변했다. 그중 하나가 1970년대 초반, 미중 화해나 중일 국교 정상화 등으로 중국을 둘러싼 국제관계가 크게 변용한 것이다.

미중 화해, 중일 국교 정상화는 한국에 있어서는 ‘내 편’이었던 미일이 갑자기 ‘적’이었던 중국과의 화해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한미?한일관계에 동요가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북한에 유리하게, 한국에는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인식되었다.

이러한 ‘한미의 불협화음’은 안전보장 면에서도 경제적인 면에서도 한일의 접근을 재촉하게 되었다. 1970년대의 한국의 방위산업 육성을 포함한 중화학공업화를 둘러싼 한일 협력은 그 상징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원래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으나, 1960년대는 한국의 성급한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우려를 지닌 미국의 경제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중화학공업화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는 어려웠다.

1970년대의 한일관계를 형용할 때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말은 ‘한일 유착’이다. 이것은 부패를 동반한다는 의미에서 비판적으로 쓰이는 말이긴 하지만, 1970년대의 한일관계가 1960년대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긴밀하였는가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미국, 북한과의 관계 등, 어떤 요인도 한일을 접근시키려는 쪽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미국의 한국 정책 변화는 미국이 빠질 경우 안전보장상의 우려를 한일이 공유토록 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1970년대는 냉전 시기 중, 한일이 가장 접근한 시기였지만, 그것은 정·재계 등 한정된 일부 엘리트 간의 접근에 그쳤고, 정부 간 관계, 경제 관계에만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한일이 비대칭적인 관계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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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체제’의 기본은 안전보장과 경제협력, 간단히 말하자면 ‘안보 경제’였다. 원래, 한일교섭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던 식민지배 기간에 한일 간에 이전된 경제적 가치의 원상 복귀를 꾀하는 방법으로 청산을 시도한 것이었다. 또 그것에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을 입혀, 그것을 수단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항하여 한일의 안보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렇듯, 안보와 경제를 우선함으로써 역사 청산은 미흡하게 매듭지어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반면 경제협력을 축적하여 안보를 확실하게 함으로써 역사를 둘러싼 대립을 해결한다는 낙관적인 기대도 있었다.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경제 원조가 필요했다. 따라서 원재료의 수입처는 주로 미국이었으며, 1차 생산품의 수출처는 주로 일본이었다. 그러한 무역구조는 국교 정상화 이후 크게 변화했다. 일본에서 원재료를 수입하여 그것을 가공한 뒤 주로 경공업 제품을 만들어, 미국 등에 수출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일본에서 원재료를 수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교 정상화에 따른 청구권 자금의 공여 때문이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일본에서 원재료나 기계, 부품 등의 수입이 늘어났으나, 일본에 대한 공업제품의 수출이 수입과 비례하여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일 무역 적자는 날로 증대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대일 무역 적자의 증대를 한국에서 일본으로 경제적 가치가 일방적으로 이전되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따라서 한국 정부는 이의 시정을 요구했다.

일본은 진정으로 한반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닌 한국 사회의 등신대를 세워놓고, 일본의 좌우 대립을 그대로 한반도에 투영한 셈이었다. 사회당이나 공산당 등의 좌파 세력은 한국이 아닌 북한 쪽에 조금 더 친근감을 표했다. 정부 자민당 등의 우파 세력은 반대로 한국 쪽에 정통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 중간의 정치 세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 등 과거의 역사 인식에 관한 문제의식을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는 점은 좌우 모두의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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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청구권 문제는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일본과 대한민국 간 협정(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양국 정부가 합의했다. 게다가, 청구권 자금은 한번에 현금으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10분의 1 정도의 경제적 가치를 10년에 걸쳐서 일본의 물품이나 역무로 제공하는 방식이 취해졌다. 구체적으로 무상 3억 달러는 3천만 달러씩 10년에 걸쳐 공여하고, 유상 2억 달러의 경우 2천만 달러씩 10년 동안 제공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한일 간의 대립 쟁점의 해결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의미에서의 ‘촉매catalyst’에 지나지 않았고, 한일 간의 대립 쟁점을 표면에 나서서 중재, 조정하는 의미에서의 중개자mediator, middleman가 되지는 않는다는 자세를 견지했다. 한일 양국의 국내에서 미국의 개입이 편향되어있다는 인상을 남겨, 반미감정을 분출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북한은 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을 실질화하기 위해 ‘식민지지배 잔재 청산’ 작업에 들어갔다. 다만, 적어도 출발점에서는 그러한 식민지배의 유제를 계승할 수밖에 없었다. 요약하자면 식민지지배의 유제를 계승하면서 그것을 청산하는 일이 과제가 되었다. 따라서 식민지지배 청산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었다.

한국전쟁에 따라 반공 진영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미국은 일본을 철저하게 ‘비군사화’시키겠다는 애초의 방침을 포기했다. 일본의 보수 정권도 그에 호응하여 경찰예비대를 창설하여 그것을 후에 보안대, 자위대로 개조시킴으로써 사실상의 ‘재군비’로 키를 돌렸다.

한일회담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식민지지배기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왕래한 경제적 가치에 관한 것으로 특히, 일본 정부나 개인이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적으로’ 이전한 경제적 가치의 내역과 그 총액을 금전적으로 평가한 후, 원상 복귀를 위한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전후 처리가 연합국에 의해 대일 배상 포기라는 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대일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곤란했다. 더욱이, 식민지지배가 식민지에 손해를 입힌 것이며, 그에 대해 보상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국제사회에 정착해 있을 리도 없었다.

그와 관련하여 또 하나 한일 간의 쟁점이 된 것이 1910년의 ‘병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법적 성격이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 사실로서 ‘병합’이 진행된 만큼 법적으로도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반면 한국 정부는 이 한국병합조약 및 그에 이르기까지 한일 간의 협정체결이 일본의 강제로 이뤄졌다는 의미에서 ‘병합’은 위법한 것이고, 따라서 지배 자체도 위법 상태가 계속되었던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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