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은 ‘완전한 정의’의 기준이 없이도 사회적 결과를 얼마든지 평가할 수 있다는 것, 즉 정의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여전히 평가의 기준이 필요한데, 이를 뛰어난 철학자의 완벽한 공식에서 구하는 것은 연목구어이고 오히려 대중이 참여하는 공론의 역할에 기대야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자 센의 입장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불운과 맞설 때 다양한 종류의 자유가 수행하는 역할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궁극적으로 개인 행위주체agency는 이러한 박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중심이 된다. 동시에 각 개인들이 향유하는 행위주체의 자유는 주어진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기회에 의해 불가피하게 규정되고 제한된다. 이렇게 개인 행위주체와 사회적 제도배열arrangements 사이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다. 그로므로 개인적 자유가 중심이 된다는 사실과 함께, 사회적 영향력이 개인적 자유의 범위와 한계에 행사하는 힘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개인적 자유를 사회적 기여commitment로 간주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이 책에서 탐구하고 검토하려는 기본적인 접근법이다.

발전을 위해서는 부자유의 주요한 원인이 제거되어야만 한다. 그것들은 가난, 독재, 빈약한 경제적 기회와 체계적인 사회적 박탈, 공공시설의 방치, 억압적인 정부의 불관용 혹은 과도한 활동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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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반도체 투자 전쟁 - 글로벌 패권 경쟁이 가져올 거대한 기회
김영우 지음 / 페이지2(page2)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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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수요와 공급이 배분되어 왔던 반도체 공급망이 재편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냉전이 찾아왔고, 이러한 현상은 단기간에 해소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중국이 미국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간다 하더라도, 중국의 세계 재패의 꿈이 모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_ 김영우, <반도체 투자 전쟁> , p330/368

코로나 19 이후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미-중 양강체제의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부문이 바로 반도체 산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말 세계 금융 위기 상황에서 미 국채를 매입하며 세계경제의 구원투수로 등장했던 중국은 이제 더이상 '세계공장'으로 번 돈을 투자하는 '투자가'의 자리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내수 시장의 성장에 힘입어 예전처럼 대외무역에 의존하지 않게 되면서 중국은 스스로 서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한 노력의 상당 부분을 반도체에 투자해왔다.

코로나 19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진영에서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한 보조금 지급이 정책의 주요 방향이었다면, 중국은 철저하게 R&D 투자를 통해 체질 개선을 꾀했다. 반도체라는 고부가가치 산업 발전을 '생존 전략'으로 생각하는 중국과 이를 '안보 위협'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미국. 중국과 초격차를 유지하며 국제 글로벌 공급체인의 일부를 담당하는 한국 반도체 산업은 자국 내에 반도체 수직계열화를 완성하려는 미국의 압력으로부터도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위협 앞에 국가는 어떤 전략으로 대응할 것인가.

중국 칭화대학교에서 2021년 반도체 단과 대학을 설립한 것을 따라 국내 대학 반도체 학과 설립을 계획한 것만으로는 매우 부족하게 느껴진다. 보다 근원적인 전략 수립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게 된다...

포스트 코로나와 탈세계화(≒공급망과 교역 등이 위축), 양극화(≒10:90의 사회)의 거대 흐름 속에서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비대면), 환경 경제(≒저탄소)라는 메가트렌드를 모두 맞추기 위해서는 GVCs에의 지나친 의존을 피하고, 각자가 공급망을 자국 또는 경제블록 내부에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히 미래 산업의 핵심인 반도체 제조 등의 분야는 반드시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는 중국은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_ 김영우, <반도체 투자 전쟁> , p50/368

미국 반도체산업협회는 미국 내 제조 인프라가 없음을 지적했고, 미국 정부는 반도체 팹 구축에 대한 사상 최고 수준의 세제 혜택과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의 반도체 제조 굴기 정책은 설령 미국 기업이 아니더라도 미국 내에 신규 반도체 공장을 건설할 시, 경쟁국 대비 총소유비용 관점에서 충분한 경제적 메리트를 부여하는 정책입니다. _ 김영우, <반도체 투자 전쟁> , p251/368

모든 인프라 투자에는 명확한 목적이 있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지젠 다음 단계는 바로 ‘신비즈니스新商业’입니다. 중국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5G, AI, IoT 등 신형 인프라 구축에 힘을 들이는 이유는 제조업 기술 개조와 설비 업그레이드는 물론, 제4차 산업혁명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통신사의 5G 투자 목표는 미국이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_ 김영우, <반도체 투자 전쟁> , p118/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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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2-22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도체학과도 좋지만,
현재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위해서는
역시나 다시 물리나 광학 같은 기초
과학 투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장 돈이 되는 산업만 지원해서는
산업을 리드하는 자리에는 오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도체 산업 다음의 먹거리 개발이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점도 걱정이
네요.

겨울호랑이 2023-02-22 18:45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주력 산업이 반도체인 것은 맞지만, 그 이전 수십 년 전에 막대한 투자와 여러 조건들이 맞물린 결과임을 생각해 본다면 향후 수십 년 뒤의 갈 길을 먼저 고민하고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황금의 샘 2 - 석유가 탄생시킨 부와 권력 그리고 분쟁의 세계사, 최신증보판 황금의 샘 2
대니얼 예긴 지음, 김태유.허은녕 옮김 / 라의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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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PEC은 창설 초기에 단 두 가지 목적에만 주력했다. 첫째는 석유회사들이 일방적으로 주요 조치를 취할 때 조심하게 하는 것, 둘째는 석유업자들이 공시가격을 다시 내릴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OPEC이 초기 10년 동안 별로 비중 있게 보이지 않았던 데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이란을 제외한 모든 회원국에서, 지하에 매장된 석유자원이 이권자인 석유회사 소유였으므로 회원국의 통제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218


 대니얼 예긴(Daniel Yergin, 1947 ~ )의 <황금의 샘 The Prize>은 19세기 말 영국, 석탄, 산업혁명으로 상징되는 세계의 패권이 20세기 미국, 석유, 에너지 혁명으로 대체되는 역사를 다룬다. 1권에서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 ~ 1937)를 중심으로 한 석유 메이저(슈퍼메이저 Supermajor)의 역사를 주로 다루어졌다면, 2권에서는 여기에 대항하는 OPEC가 주도권을 잡은 20세기 후반까지의 석유 산업의 역사가 다루어진다. 20세기판 제국주의 열강들의 동인도회사라 할 수 있는 슈퍼메이저들의 압력에 대항하여 가격 주도권을 상실한 공급자들의 모임이었던 OPEC. 이들은 이떻게 석유의 가격결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에 대한 서구 열강들의 반격의 역사가 여기에 펼쳐진다. 1945년 전후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의 후유증은 매우 컸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아메리카 대륙을 제외한 세계 전역은 전장(戰場)이 되었고, 유럽의 열강들 또한 이러한 피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전후 복구를 위한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 무엇보다도 에너지원인 석유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석유 부족의 원인은 명백했다. 전후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데, 소비가 가공할 정도로 급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쉘사의 설명이다. 옥탄가 100인 전투기용 항공 연료가 아니라, 휘발유와 가정의 난방 연료처럼 민간 소비자들이 원하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정유소들을 재설계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자금과 물자가 필요했다. 또한 전 세계적인 철강 부족 현상도 문제였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46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유럽의 에너지 위기였다. 석탄 생산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생산성도 저조했고 노동 인력마저 와해되었다. 더구나 많은 나라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석탄 광부노조를 주도했다. 석유는 문제의 단편적 해결책에 불과했고, 산업용 보일러와 발전소의 석탄만 대체할 수 있었다. 석유는 분명히 유럽의 항공기, 자동차, 트럭들의 유일한 연료원이었다. 당시 미국 정보의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독되어 있었다. "석유 없이는 마셜 플랜이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66


 전쟁 기간 동안 배급제로 억제되었던 석유 수요는 종전 후 바로 폭증했고, 미국은 더 이상 에너지를 공급할 수 없었다. 여기에 더해 소련은 동유럽으로 세력을 뻗치고 새롭게 석유 자원을 확보하면서 빠르게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키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러한 상황에 서구 세계를 구원할 자원공급자가 바로 페르시아만 인근 중동국가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 열강들이 오스만 투르크를 해체시키기 위해 수많은 독립국가들로 분할통치했던 이들 지역이지만, 전후 이들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하게 커지면서 국제정치관계의 축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제 더이상 과거처럼 일방적인 가격 수용자(price taker)가 아니었다. 


 전후 석유산업의 질서는 두 가지 토대 위에 세워졌다. 하나는 중동에서 조업하는 대형 석유회사들 사이의 기본적 관계를 규정한 1940년대의 석유 협정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석유회사들과 산유국, 그리고 정부 간의 석유 이권 및 계약 관계였다. 이 두 가지를 토대로 세계 석유 질서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다. 대형 석유회사와 소비국 정부들은 이익 반분 원칙을 따르지 않을 경우 발생할 결과를 우려하여 그것을 준수할 수밖에 없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183


  슈퍼메이저들과 산유국들의 이익배분구조는 50:50으로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다만, 이러한 안정은 1960년대 후반 석유 수요가 공급을 초월하고, 미국의 베트남전 패전 등으로 힘을 상실하면서 깨졌다. 가격 결정권이 중동 산유국들로 넘어오면서 이제 슈퍼메이저 대신 OPEC가 석유 시장의 지배자로 등장한다. 이들은 강력한 공급량 조절을 통해 1973년과 1978년 2차례에 걸친 오일 쇼크(Oil Crisis)를 통해 자신들의 변화된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이란-사우디, 이란-이라크의 내부 갈등과 북해 유전, 멕시코 유전 등 비OPEC 지역의 유정(油井) 개발, 선물(futures) 거래라는 금융 거래 등으로 과거와 같은 위상을 더는 갖지 못하게 된다.


 전후戰後의 중동 석유 질서는 미국과 영국의 지배력 아래에서 형성되고 유지되었다. 1960년대 후반, 양국의 정치적 힘은 퇴조했고 이는 석유 질서의 정치적 기반 역시 약화되었음을 의미했다. 미국은 월남의 실패로, 수년 동안 돈은 돈대로 들고 인기가 떨어져 진창에 빠진 신세가 되었다.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반미주의가 풍미하고 이는 제국주의, 신新식민주의, 경제적 착취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294


 세계 전역의 수요가 한정된 공급량을 놓고 경합했기 때문에 시장가격은 공식가격을 상회했다. 이는 20년간에 걸친 과잉생산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결정적인 변화였다. 오랫동안 시장가격은 만성적인 과잉 생산을 반영해 공식가격을 하회했고, 이것은 기업과 정부 간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되었다. 수출국들도 이 새로운 파도에 편승하고자 했다. 공식가격과 시장가격의 차익이 기업에 흡수되는 것을 손놓고 보지는 않았다.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336


  우리는 흔히 시아파의 나라 '이란'과 주변국들의 갈등을 이스라엘에 효과적으로 대항하지 못하는 아랍의 분열 문제로 아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이는 진실의 절반에 불과하다. 사우디-이란의 경쟁 관계는 과거 아람코, 앵글로-이란, 걸프=쉘로 대표되는 대규모 유정 개발 조약 시기부터 시작된다. 이후 이란이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0 ~ 1989)가 정권을 잡은 후 혁명 수출을 두려워하는 사우디 왕조와의 대립이 진행형이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경우는 다수의 시아파 시민들을 소수의 수니파 후세인 정권이 지배하던 이라크 정권이 서방세계의 지원을 받으며 일어난 전쟁으로 이의 배후에는 유전 지대의 귀속 문제가 자리한다. 결국 이들 사우디-이란, 이란-이라크 갈등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알리(Ali ibn Abi Talib, 601 ~ 661)의 불행으로 부터 시작된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문제의 본연에는 정치와 경제적 이권 문제임을 파악하게 된다. 


 두 나라 사이에는 많은 갈등 요인이 있었다. 사우디는 아랍 종족으로 수니파 회교국이었고, 이란은 아랍 종족이 아니며 시아파 회교국이었다. 양국은 중동 지역 및 산유국들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고, 영토 확장의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석유 생산량을 두고 경쟁하면서 양국 간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질투와 의심을 키워나갔다. 석유 생산은 바로 부富를 의미했고 부는 힘, 영향력, 존경이었기 때문이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231


 이란 국왕은 1968년 이라크의 실권을 장악한 비종교적인 바스당 체제를 적대시하고 있었다. 이라크와 이란 양국의 최대 현안은 샤트 알 아랍, 이라크 영내를 흐르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과 이란 영내의 하천 몇개가 만들어낸 삼각주 지대를 둘러싼 문제였다. 샤트 알 아랍 수로는 120마일에 걸친 양국의 국경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샤트 알 아랍의 삼각주지대에 건설된 아바단 정유소를 보유한 이란으로서는 페르시아 만으로나가는 중요한 길목이었지만, 그렇다고 유일한 출구는 아니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516


 <황금의 샘 2>에서는 1990년대 걸프 전쟁까지 석유를 둘러싼 국가, 기업들의 합종연횡(合從連衡)을 볼 수 있다. 국가 이익 앞에서 영원히 굳건할 것으로 보이는 미국-이스라엘, 미국-일본의 관계가 흔들리는 모습, 석유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감산(減産) 협정을 어기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비정한 외교관계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석유 위기와 함께 대두된 대체 에너지 개발 문제가 이미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던 화두였음을 생각해볼 때, 최근 강조되는 기후위기와 이에 대한 대첵으로 RE100에 대한 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겠다. 그 이면에 포스트 페트로(Post Petro)시대의 에너지 패권에 대한 정치적 야욕은 과연 없다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이에 대한 현재 우리의 준비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추가로 던지게 된다. 


 이제 책 전반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황금의 샘>은 석유의 역사를 통해 '도전-응전'이라는 경제사의 일면을 확인시켜 준다. 석유의 역사는 단지 한 상품의 역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석탄에서 석유로의 주력 에너지원의 변화 과정에서 보여지는 정치적 문제, 대중문화 및 소비사회로 정의되는 20세기 문화사, 석유 결제 대금을 둘러싼 달러 패권이라는 경제 문제 등 석유는 모든 분야에서 깊숙히 관계한다. 저자는 이러한 석유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문제 - 기후 위기, 대체 에너지 문제, 중동 문제 -등의 배경과 전망 등을 상세히 풀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가격 인센티브와 안보에 대한 동기부여가 OPEC 이외의 지역에서 석유 개발을 촉진하고 있었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이 새로운 지역들이 세계 석유 공급 체계를 전환시킬 수 있었다. 이런 움직임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가는 데에는 신규 석유생산지 3곳이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알래스카, 멕시코, 북해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은 모두 1973년 석유 파동 이전에 발견되었다. 하지만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반대와 기술적 장애, 시간이라는 단순한 요인, 에너지 프로젝트에 요구되는 긴 준비 기간 등의 이유로 개발되지 못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453


 석유산업 구조 개편의 핵심은 '가치의 공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가치의 공백'이란 회사의 주가가 회사 소유의 석유 및 가스 매장량의 시장 가치를 정당하게 반영하지 못함을 가리키는 용어다. 주식 가격과 자산 가치의 차이가 크다는 것은 기업에게 치명적이다. 새로운 경영 방식을 통해 과거의 경영이 하지 못했던 '주주들의 가치' 증대를 도모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탐사에 의해 석유를 1배럴 추가하려면. 기존에 운영되는 자산을 구입하는 것에 비해 2~3배 이상의 비용을 투입해야 했다. 멕시코 만이나 텍사스에서 탐사를 하는 것보다 뉴욕의 증권거래소에서 석유를 구하는 것, 즉 평가절하된 회사를 매입하는 편이 훨씬 저렴했다. 여기에서도 '주주들의 가치'가 추진력이 되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547


자국에서 소비하는 석유의 99%를 수입하는 일본은 가능한 한 최저가격을 선호할 것이라 예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가격이 너무 낮을 경우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대체에너지 부문의 투자를 줄여서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결국 새로운 취약성을 노출해 또 다른 위기를 몰고 올 수 있다. 둘째, 석유는 일본의 수입품 중 상당부분을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낮은 가격은 막대한 일본의 무역수지 흑자를 더욱 확대할 것으로 보였다. 이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와의 심각한 갈등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일본의 석유업계와 정부는 대체로 8달러가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 P600

석유의 역사는 승리의 파노라마와 비극적이고 값비싼 희생을 치른 오류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또한 인간성의 고귀한 면과 비열한 면을 모두 보여준 하나의 무대였다. 창조성 ·헌신 · 기업가정신 · 독창성 · 기술 혁신이 탐욕 · 부패 · 맹목적인 정치적 야심 ? 폭력 등과 함께 존재했다. 석유는 물질세계를 지배할 힘을 부여했다. 석유는 농약이나 연료로 형태를 바꾸어 인류의 의식주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또한 세계 정치와 경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인류는 많은 피를 흘렸다. 석유를 손에 넣어 부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싸움은 석유가 중심적 위치를 유지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문명의 모든 측면은 석유의 현대적이고 매혹적인 연금술에 의해 변화되어왔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이 바로 석유의 시대다. - P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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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1-15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오래전에 읽었어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겨울호랑이 2023-01-15 19:50   좋아요 1 | URL
저는 이번에 알았는데 이미 90년대에 고려원에서 초판이 출간된 책이네요. 지금도 저자의 직관이 유효한 것을 보면 시대를 앞선 책이라 여겨집니다.^^:)

서니데이 2023-02-07 2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3-02-07 22:5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
 

그는 한 가지 포인트를 덧붙였다. "역사를 통해 자원의 흐름에 대한통제는 전략적 중요성을 가졌다. 중동 국가들은 중요한 에너지원에 대한통제권을 주장함으로써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서방에 대한 발언권을 되찾게 될 것이다." 플랙은 자신이 현 상황을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죄악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 P330

세계 전역의 수요가 한정된 공급량을 놓고 경합했기 때문에 시장가격은 공식가격을 상회했다. 이는 20년간에 걸친 과잉생산 시대의 종언을고하는 결정적인 변화였다. 오랫동안 시장가격은 만성적인 과잉 생산을반영해 공식가격을 하회했고, 이것은 기업과 정부 간의 관계를 불편하게만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되었다. 수출국들도 이 새로운 파도에 편승하고자 했다. 공식가격과 시장가격의놓고 보지는 않았다.
- P336

석유 금수조치가 절정에 달했던 12월에는 일일 1,580만 배럴만 생산함으로써,
시장 공급 물량은 일일 500만 배럴이 감소되었다. 당시 미국에는 이에 대처할 여유 능력이 전혀 없었다. 6년 전인 1967년의 6일전쟁 때 여실하게증명되었던 석유와 정치의 중대한 역학 관계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된 것이다. 미국의 석유 여유 능력은 전후 에너지 위기 때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서구의 에너지 여유분 확보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제 미국은 세계 석유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중요한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란을 필두로 한 산유국들은 생산량을 일일 총 60만 배럴까지 증산할 수 있었다.  - P372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했을 만큼의 부를 축적한 수출국들은 어지러울 만큼 엄청난 지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산업화, 사회간접자본, 서비스, 생필품, 사치재, 무기, 낭비, 매수 등온갖 종류의 지출이 난무했다. 눈덩이 같은 지출과 함께 모든 항만에서는 선박들이 하역하기 위해 몇 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온갖 물건과 서비스를 팔려는 장사꾼들이 서방 공업국에서 석유 수출국으로 몰려들었다.
호텔에서는 방을 구하려고 아우성이었고, 정부 관료들을 만나려고 그들의 사무실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석유 수출국에 팔 수 없는 물건이란 없었다. 무기 거래는 그중 규모가 큰 사업이었다.  - P404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다른 중요한 형태가 있었다. 이윤은 상류 부문인 원유와 천연가스의 생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미국이나 북해 지역에서 한 회사가 보유한 매장량의 가치는 석유 가격과 함께 상승했다. 정유업, 수송업, 주유소 등 하류 부문의 경우, 1973년 이전에는 연평균 7~8%의 소비 증가를 기대하며 투자되었다. 그러나 실제 소비 증가는 이에 따르지 못했으므로 하류 부문의 능력은 필요를 넘어섰다. 예를 들면 유조선단의 3분의 1이 과잉 상태였다. 중동원유에 대한 지분 손실과 함께, 이러한 상황은 국제 석유회사들이 유럽에 건설했던 대규모하류 부문 투자에 대한 적정성과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 P442

가격 인센티브와 안보에 대한동기부여가 OPEC 이외의 지역에서 석유 개발을 촉진하고 있었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이 새로운 지역들이 세계 석유 공급 체계를 전환시킬 수 있었다. 이런 움직임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가는 데에는 신규 석유생산지 3곳이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알래스카, 멕시코, 북해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은 모두 1973년 석유 파동 이전에 발견되었다. 하지만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반대와 기술적 장애, 시간이라는 단순한 요인, 에너지 프로젝트에 요구되는 긴 준비 기간 등의 이유로 개발되지 못했다.
- P453

이란 국왕은 1968년 이라크의 실권을 장악한 비종교적인 바스당 체제를 적대시하고 있었다. 이라크와 이란 양국의 최대 현안은 샤트 알 아랍,
이라크 영내를 흐르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과 이란 영내의 하천 몇개가 만들어낸 삼각주 지대를 둘러싼 문제였다. 샤트 알 아랍 수로는 120마일에 걸친 양국의 국경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샤트 알 아랍의 삼각주지대에 건설된 아바단 정유소를 보유한 이란으로서는 페르시아 만으로나가는 중요한 길목이었지만, 그렇다고 유일한 출구는 아니었다. - P516

호메이니와 측근은 세속적인 사회주의자 집단인 바스당 자신들의 증교적 신념에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바스당 운동을 ‘인종을 차별하는 아랍주의 사상‘이라고 공격했다. 호메이니는 여기서 더 나아가 ‘난쟁이 파라오‘라는 신랄한 용어를 구사하며 후세인을 비난했다.
사담 후세인에게는 호메이니의 비난을 두려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라크인의 절반 이상이 시아파 교도인 데 반해 바스당은 비종교적인 체제로 소수인 수니파 교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시아파가 가장 신성시하는 성지인데, 이란에서 오는 시아파 교도들 사이에 동요가 심해지고 있었다. 1980년 4월에 발생한 부수상 암살미수 사건을 빌미로 후세인은 이라크 국내에서 가장 이름 높은 시아파의지도자를 처형하라고 명령했고 더불어 그의 누이까지 처형했다.  - P520

OPEC의 최전성기는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OPEC 회원국도, 산업계도, 서방측의 석유 소비국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카터 정권도 함께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미 카터는 이란에 의해 대통령 재임 중 마지막 굴욕을 맛보고 있었다. 테헤란의미국 대사관에 감금되어 있던 인질은 그가 대통령직을 물러날 때까지 석방되지 않았다. 뒤를 이어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의 넘쳐흐르는 자신감과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신뢰감은 카터에게 붙어다니던 ‘심기 불편 보다 유권자의 마음을 훨씬 강하게 사로잡았다. - P528

세계 석유시장과 석유 가격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악성 인플레이션이 서방 세계의 경제뿐 아니라 전체 사회 구조를 위협하고 있었다. 미국의 연방준비국은 과도한 긴축금융 정책으로 대응했고, 이에 따라 이자율이 급등해 최고 21.5%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긴축금융과 석유가격 상승으로 산업계의 자금이 고갈되었다. 결과적으로 1980년과 1982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불황이 두 번 닥쳤고, 그중 1982년이 더 심각했다. 경제 활동이 수렁에 빠져들자 선진 공업국에서의 석유 수요는 계속감소했다. 개발도상국들이 유가를 상승시킬 중요한 신규 수요원이 될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개발도상국 역시 선진국의 경제 침체에 따른타격으로 동반 침체에 빠져들었고, 따라서 석유 수요는 늘지 않았다. - P533

게다가 에너지 경제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초반과 1940년대 중반에 그랬던 것처럼 에너지 부족에 대한 공포는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유전의 개발이 촉진되었고 그 결과 공급 과잉이 초래되었다. 이런 패턴은 석유 가격이 배럴당 34 달러가 되고, 더 높은 가격 인상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대규모 신규 개발은 OPEC 외부에서 일어났다. 멕시코, 알래스카, 북해의 생산 시설 증강은 제2차 석유 파동 와중에 이루어졌다. 이집트 역시 주요 석유수출국이 되었고 말레이시아, 앙골라,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국가들이 생산국과 수출국의 작은 부분으로 참여했는데, 전체적으로는 이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기술 혁신 역시 개발과 생산, 운송 능력을 증진했다.  - P533

석유산업 구조 개편의 핵심은 ‘가치의 공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가치의 공백‘이란 회사의 주가가 회사 소유의 석유 및 가스 매장량의 시장 가치를 정당하게 반영하지 못함을 가리키는 용어다. 주식 가격과 자산 가치의 차이가 크다는 것은 기업에게 치명적이다. 새로운 경영 방식을 통해 과거의 경영이 하지 못했던 ‘주주들의 가치‘ 증대를 도모할 수있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탐사에 의해 석유를 1배럴 추가하려면.
기존에 운영되는 자산을 구입하는 것에 비해 2~3배 이상의 비용을 투입해야 했다. 멕시코 만이나 텍사스에서 탐사를 하는 것보다 뉴욕의 증권거래소에서 석유를 구하는 것, 즉 평가절하된 회사를 매입하는 편이 훨씬 저렴했다. 여기에서도 ‘주주들의 가치‘가 추진력이 되었다. - P547

자국에서 소비하는 석유의 99%를 수입하는 일본은 가능한 한 최저가격을 선호할 것이라 예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가격이 너무낮을 경우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대체에너지 부문의 투자를 줄여서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결국 새로운 취약성을 노출해 또 다른 위기를 몰고 올 수 있다. 둘째, 석유는 일본의 수입품 중 상당부분을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낮은 가격은 막대한 일본의 무역수지 흑자를 더욱 확대할 것으로 보였다. 이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와의 심각한 갈등을야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일본의 석유업계와 정부는 대체로 8달러가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 P600

이라크는 폐쇄적인 경찰국가였으나 후세인이 목표하는 바는 명확했다. 페르시아 만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아랍 세계를 지배하고,
이라크를 석유 대국으로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세계적인 군사 대국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라크는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후세인이 일으킨 이란-이라크 전쟁이 5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채 교착 상태에서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1,800만 명의 국민 중 100만명이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후세인은 고유가 정책을 지지했고, 그것도 즉시 시행되기를 바랐다.  - P618

이 위기가 1990년대와 21세기에 미치게 될 영향은 엄청날 것으로 보였다. 만약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수중에 넣는다면 OPEC 생산량의20%와 전 세계 석유매장량의 20%를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주요 석유수출국들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을 위협하는 위치를 점하게 될것이다. 페르시아만의 패권을 장악한 후세인이 이란과의 전쟁을 재개할가능성도 높았다. 그가 또 다른 행동을 취해 경제적 이득을 확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 P621

 석유의 역사는 승리의 파노라마와 비극적이고 값비싼 희생을 치른 오류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또한 인간성의 고귀한면과 비열한 면을 모두 보여준 하나의 무대였다. 창조성 ·헌신 · 기업가정신 · 독창성 · 기술 혁신이 탐욕 · 부패 · 맹목적인 정치적 야심 • 폭력 등과 함께 존재했다. 석유는 물질세계를 지배할 힘을 부여했다. 석유는 농약이나 연료로 형태를 바꾸어 인류의 의식수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또한세계 정치와 경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인류는 많은 피를 흘렸다. 석유를 손에 넣어 부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싸움은 석유가 중심적 위치를 유지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21세기 문명의 모든 측면은 석유의 현대적이고 매혹적인 연금술의해 변화되어왔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이 바로 석유의 시대다. - P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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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독일 경제가 회복되는 데는 이 원조보다 독일 본래의 잠재력이 훨씬 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독일의 1948년 불변가격 자본 스톡은 전시의 파괴를 제하고도 1936년보다 10퍼센트 높은 수준이었다. 이는 독일 내에서 1930년대 말 이래 있은 투자 덕분이었다.

서독의 공공 부문은 대부분 나치 정권 시절부터 비롯되었다. 2차 대전 중 독일 합자회사 자본의 거의 절반이 직, 간접적으로 공기업 자본이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물론 기민당까지도 이를 추진했다.

서방세계의 복지국가는 부자에게서 세금을 거둬 가난한 자에게 이를 재분배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돼지저금통을 적절히 관리하는 기능을 했다. 즉 보험, 연금, 교육 제도 운영 방식을 통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인의 일생 동안의 소득을 적절히 조정한 것이다

합스부르그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부르고뉴와 네덜란드 귀족들에게 자극받아 행정 근대화를 추구했다. 인스부르그에 재무성을 창설하고 오스트리아 내 최초의 정부 자문 회의를 설치하는가 하면 대외 정책을 모색하기도 했다.

프로이센과 달리 합스부르그제국에서는 토지 귀족이 국가기구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불리한 개혁을 제국이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제국을 내적으로 취약하게 한 원인이었다. 문화적, 사회적으로 토지 귀족과 분리되어 있던 도시 출신 관료를 통해 제국이 귀족의 집단적 이해관계를 직접 침범하자 귀족들이 제각기 사나운 자기네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대에 제국은 반혁명의 보루였으나 제국 자체는 무기력했고 표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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