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브 사회는 지배계급(전사 귀족) 내에서 서유럽식 규범에 점차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서유럽과 같은 조건적 토지 보유제(상급자에게 충성을 바치고 토지를 보유하는 일)나 법적 전통, 계약 이념(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하는 복종) 등은 잘 확립되지 않았다. 자유도시가 발달하기도 어려웠고 귀족에게 면세권이 없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유럽 일대 지배계급의 응집력이 서유럽보다 훨씬 미약했고, 귀족이 너무 광대한 땅에 흩어져 있어 왕조가 이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어려웠으며, 그 결과 훗날 귀족의 반동이 오래 지속되면서 근대적 국가조직을 창출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1차 대전에 얽힌 복잡한 사정은 이미 7장에서 다 얘기했다. 하지만 다민족국가 오스만제국이 결국 내셔널리즘 때문에 유럽 지역에서 밀려난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오스트리아가 자기네 역시 내셔널리즘으로 인해 붕괴될 것을 우려하여 자포자기 심정에서 상당히 의도적으로 전쟁 발발을 자초한 면이 있다는 지적은 여기에서 다시 해도 좋으리라.

헝가리는 동유럽에서 가장 개혁 지향적인 국가였다. 1956년 사건 이후 모스크바의 간섭이 있긴 했지만 시장경제를 도입하려는 노력과 개혁은 계속 진행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카다르의 충성심을 신뢰하며 헝가리 국내 개혁을 용인했다. 카다르 정권은 시장 지향적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소련식 계획경제를 폐지했다.

슬라브 농업은 쟁기와 윤작을 도입하여 생산성이 향상되었다(500년 무렵). 이에 따라 제조업(특히 은세공)이 가능해지고 더 부유한 인근 지역과 교역하면서 새로운 부가 창출되기 시작했다. 무슬림 칼리프들과의 노예무역이 슬라브족이 쌓은 중요한 부의 원천이었다(8세기, 중부 유럽에서 아랍 은화가 많이 발굴됨).

전반적으로 동유럽 지역은 군주와 기사 계급 간에 중간 단계의 영주권이 없고, 공권력도 제한되거나 분할되어 있지 않았다. 농민에 대한 영주의 권력이 단일 장원의 권력에 영역적, 인신적, 경제적으로 집중되었다. 농민은 순수 노예에 근접한 수준의 인신적 예속 상태에 있었다. 동유럽 모든 지역에서 지방 행정직은 세습제가 아닌 임명제였다.

동유럽의 곡물이 서유럽으로 향하는 곡물 무역이 시작되고(13세기 중엽), 독일의 팽창 등으로 인해 동유럽은 서유럽 문명에 더욱 긴밀히 연계되었다.

13세기 말부터 유럽 전역에 위기가 찾아왔다. 위기란 인구 정체, 기후변화, 흉작, 대기근, 흑사병 창궐 등을 말한다. 동유럽은 자유로운 상업도시 같은 위기 충격 완화 장치가 별로 없어 서유럽보다 타격이 훨씬 컸다(14세기). 자치권이 확보된 자유도시도 없고, 별로 잘 발달하지 못했지만 명목상의 도시 생활도 거의 사라졌다.

흔히 나치가 반유대주의의 온상인 줄 알지만, 사실 반유대주의는 그 이전에 이미 중, 동부 유럽 농민들 사이에서 훨씬 더 폭발적인 호소력을 지녔다. 이들에게 유대인은 자본가, 교육받은 전문직의 상징이었다.

크림전쟁(1854~1856년)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러시아제국 내에서도 근대화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재판 절차의 자유화, 젬스트보(농촌 귀족의 자치 기구)와 도시 자치회, 개병제 등이 도입되었다. 국가가 군대를 재조직하려면 농민을 귀족이 아닌 국가가 직접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령(1861년)을 선포하여 모든 농노는 인신적으로 해방되었다.

러시아의 공업화는 1890년쯤 정점을 이루며 직물업, 주로 군사력과 관련된 중공업, 운송 부문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러시아에는 예로부터 공업화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고 농업만으로도 살 수 있다는 주장이 분분하기도 했으나, 재무장관 비테Witte(재임 1892~1903년)는 공업화 수준이 낮으면 결국 국가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유럽을 따라잡기 위해 서유럽의 기술, 자본을 대거 유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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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 5 - 혁명 : 농지개혁부터 드루수스의 개혁 시도까지 몸젠의 로마사 5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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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와 희랍, 아시아이 국가들은 공식적인 독립과 사실적인 종속의 중간이라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들은 로마가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쉬리아 등과 벌인 전쟁과 전후 처리 과정에서 로마 패권의 영역 안으로 귀속되었다. 독립국가라면 그래야만 할 때 전쟁의 수고를 부담할 것이고 독립 유지의 이런 대가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다. 또 독립을 잃은 국가라면 상실의 보상으로 적어도 주변국들로부터의 안전을 보호국에게 보장받을 수 있다. 하지만 로마의 피호국가들은 독립도 안전 보장도 얻지 못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8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 1817~1903)의 <몸젠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 5>에서 우리는 제국(帝國)의 길로 가는 로마를 확인할 수 있다. 카르타고 전쟁에서 멸망의 위기를 겨우 넘겼던 이들은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일까.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등 한때 번영했던 도시와 국가들은 모두 잿더미로 만들면서, 지중해연안을 로마의 세력권으로 만드는 것에 성공한 로마시대가 새롭게 열린다.


 원로원은 사령관에게 카르타고 도시와 도시 외곽의 마갈리아를 철저히 파괴할 것과, 마지막까지 카르타고에 협력한 모든 지역도 남김없이 파괴할 것을 명했다. 또한 카르타고 땅을 갈아엎을 것을 명했다. 이는 이후로 법적 형태의 도시가 존립할 여지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는바, 카르타고 땅을 영원히 황무지로 만들어 주거와 경작이 일체 불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원로원의 명령은 그대로 시행되었다. 17일 동안 카르타고는 불탔고 폐허를 남겼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55


 희랍의 첫째가는 무역도시인 번영의 코린토스를 아무 동기 없이 파괴한 것은 로마 연보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원로원의 확고한 명령에 따라 코린토스 시민들은 구금되었고 목숨은 부지했지만 노예로 팔려갔다. 도시 성벽과 성채는 파괴되었다. 장기간 도시에 주둔할 의사가 없었을 때 불가피한 일이지만, 도시는 초토화되었고, 황폐한 폐허 위에 모든 재건 행위를 일체 금지하는 일반적 저주가 내려졌다. 도시의 일부는 시퀴온이 코린토스를 대신하여 이스트미아 축제의 비용을 떠맡는다는 조건으로 시퀴온의 영토가 되었고, 도시의 대부분은 로마 공동체의 소유로 선포되었다. 이리하여 한때 수많은 도시국가들로 가득했던 희랍 땅의 마지막 남은 소중한 보물, '희랍의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74


 로마에게 패권을 안겨준 카르타고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쟁이었지만, 두 전쟁의 성격은 달랐다.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지중해 전역이 전장이었던 카르타고 전쟁과는 달리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그리스와 아시아 일대에서 벌어진 마케도니아 전쟁을 거치면서 로마군은 빠르게 명성을 잃으며 심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원인은 상층부인 원로원의 폐쇄성과 하층부 자영농의 몰락에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체제 개혁의 필요성은 지속적으로 주장되었다.


 실현 가능한 유일한 방안은 이들 피호 국가들을 로마의 속주로 변신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실현 가능성을 더욱 높이는 방안은, 로마의 속주 정책을 크게 나누어 속주 총독은 오로지 군사 영역을 관장하고 주요 행정과 재판은 속주 공동체에 맡기거나 맡겨야 한다고 천명함으로서 과거 정치적 독립을 누리던 것들 가운데 계속해저 존립하는 것은 공동체 자유의 형식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누구도 이런 행정 개혁의 필연성을 모를 수 없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31


 만약 통치를 현안의 처리를 넘어서는 무엇이라고 한다면, 이 시대의 로마에 통치는 전무했다. 통치집단의 유일한 주요 이념은 오로지 그들 특권의 유지, 가능하다면 확대에 있었다. 국가는 최고 관직에 최선의 올바른 인물을 천거할 권리를 가지지 못했지만, 통치집단의 구성원 모두는 최고 국가관직의 출마 권리를 태생적으로 가졌다. 이 권리가 내부자들의 부당한 경쟁이나 국외자들의 합류로 결코 위축되지 않아야 했기에, 이들 당파는 집정관의 재선을 제한하거나 '신인'의 배제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롤 삼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04


 이러한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들이 유명한 그라쿠스(Gracchus) 형제들이다. 귀족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위해 호민관에 재직하며 개혁을 주도하다가 몰락한 애석한 인물들.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지만, 몸젠은 이들에 대해 다소 냉혹한 평가를 내린다.


 토지 자본가들은 계속해서 자유민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를 고용했는데, 후자는 전자와 달리 군복무를 하지 않기 때무니었다. 그리하여 자유민 무산계급은 노예와 비슷한 수준의 가난으로 내몰렸다. 자본가들은 계속해서 품삯에도 못 미칠 정도로 저렴한 시킬리아 노예 곡물을 들여와 수도 로마의 시장에서 이탈리아 자유민 곡물을 밀어냈고,  결국 이탈리아 자유민 곡물은 이탈리아반도 전체에서 가격 하락을 겪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21


 몸젠은 그라쿠스의 개혁을 '토지 개혁이라는 이슈를 통한 대중의 지지로 호민관 지위를 활용한 독재정'의 시도로 바라본다. 농지개혁법 시행을 위해 호민관 재선을 추진하다가 죽음을 당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BCE 163 ~ 132)와 형이 추진한 정책과 식민도시 건설을 통해 현 위기를 타파하고자 했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 Gaius Sempronius Gracchus, BCE 154 ~ 121) 모두 폐쇄적 엘리트 통치를 대신한 새로운 체제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지만, 그들의 개혁을 자신들의 야망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점에서 몸젠의 평가는 신선하면서도 다소 박하게 느껴진다.


 그락쿠스 혁명의 본질적 오류는 한 가지, 다시 말해 당시 민회의 성격을 지나치게 빈번히 간과했다는 점이다. 지난날의 로마는 함께 모여서 함께 토론할 수 있던 도시국가 공동체였지만, 현재의 로마는 그 구성원을 하나의 민회에 모으고 그 민회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도록 할 경우 통탄스럽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결과에 도달하게 될 거대 국가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41


 민회라는 녹슨 장치를 선거와 입법에 활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충분히 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군중, 그러니까 민회, 사실적으로 대중 집회가 정부를 공격하도록 허용되고 이런 공격의 방어장치를 원로원은 빼앗겼을 때, 이런 소위 시민체가 자신을 위해 모든 부속물을 포함한 농지를 국고에서 빼내 처결하게 되었을 때, 무산자들에 대한 관계와 영향력을 얻은 어떤 자가 골목길을 몇 시간 지배하게 허락되어, 그의 계획에 주권적 인민의 의지라는 법적 직인을 찍을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인민자유의 시작이 아니라 종말이었는 바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에 이르렀다. 때문에 앞선 시대에 카토와 그의 동지들은 이런 문제를 결코 민회에 회부하지 않았고 오로지 원로원에서만 다루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43


 가이우스 그락쿠스는, 과거와 현재의 많은 선량한 사람이 믿었던 것과 달리 로마 공화정을 새로운 민중적 토대 위에 재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로마 공화정을 철폐하고, 지속적인 재선의 종신 관직으로, 형식적 주권체인 민회들을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관직으로, 그러니까 무제한적 권한의 종신 호민관직으로 공화정 대신 독재정을 이룩하고자 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73


 이러한 위기 속에서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왕 유구르타(Jugurtha, BCE 160 ~ 104) 전쟁은 공화정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 전쟁을 통해 로마 원로원에 의한 통치가 결코 철인(哲人)통치가 아닌 수많은 로비의 결과물임이 드러나면서 공화정에 대한 회의가 커지고, 병농일치(兵農一致) 체제가 무너지면서 전문 전투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개혁을 통한 과저 체제에 대한 연착륙이 불가능해진 이후 등장한 두 인물, 마리우스(Gaius Marius, BCE 157 ~ 86)와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BCE 138 ~ 78)은 다음 시대를 이끌게 된다.


 아프리카 피호국의 순치보다 중요한 것은 유구르타 전쟁의, 혹은 유구르타 반란의 정치적 결과들이다. 물론 흔히 너무 크게 부각되곤 한다. 무엇보다 정부의 모든 약점이 적나라하게 세상에 드러났다. 이제 공공연해졌고 소위 최종 판결된 바, 로마의 모든 통치귀족들에게 평화조약은 물론 거부권, 주둔 요새, 병사들의 목숨까지, 모든 것이 매매 가능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37


 일시적인 위기 동안 유일하게 등장한 새로운 요소가 있다. 그것은 군사적 능력자들과 군사적 권력이 정치혁명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마리우스의 등장이 직접적으로 과두정을 몰아내고 독재정을 세우려는 시도의 계기가 되었는지, 혹은 여러 유사한 사례들처럼 그저 권력의 특권을 향한 개별적 공격이었으며 이렇다 할 결과 없이 지나가버린 사건이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째 독재정의 씨앗이 싹을 틔울 때, 그 독재정의 수장은 가이우스 그락쿠스처럼 정치가가 아니라 군인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39


 공화정 국제는 무엇보다 시민이 병사요, 병사가 시민이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것이 군사제도의 혁명과 함께 사라졌고, 이제 병사 신분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새로운 군사훈련 교본이 직업적 검투사 교본에서 빌려온 군사훈련과 함께 도입되었다. 전쟁 복무가 점차 전쟁 직업으로 바뀌었다.(p297)... 만약 좀 더 중요한 문제에서 군대와 사령관의 이해관계가 반(反)국헌적 욕망에서 서로 일치할 경우, 어떤 법률이 전장의 소음 때문에 들리지 않는 일이 또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상비군이 생겨났고, 병사 신분이, 경호부대가 만들어졌다. 사회제도에서처럼 이제 군사제도에서도 미래의 독재정을 위한 기둥들이 이미 세워졌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98


 개인적으로 <몸젠의 로마사 5>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라쿠스 형제 개혁에 대한 몸젠의 평가다. 실패한 개혁가로서 후대에 여러 면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이들이지만, 몸젠은 그들을 '포퓰리스트(Populist)'로 규정한다. 물론 그들의 개혁 조치가 후대의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BCE 100 ~ 44)에 의해 상당부분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만약 그들의 개혁조치가 성공을 거두었다면 로마의 제정이 더 일찍 시작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편으로 수긍한다. 그렇지만, 역사에서 패자로 남겨진 그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 냉혹한 것은 아닐까. 못다 이룬 첫사랑이 생각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에 남는 것처럼,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들을 좌절시킨 정치경험 안에서 그라쿠스와 같은 이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은 허용되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피호 국가들은 우선 모든 국가와 전쟁을 할 능력이 안 되는 국가는 누구와도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피호 국가의 소유관계와 권력관계가 사실상 로마의 보장으로 존립하기 때문에 모든 갈등에 있어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웃 국가들과 호의적으로 해결하거나 아니면 로마에 판결을 요청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 P29

국가를 이탈리아반도에 국한하며 이탈리아 밖은 다만 피호 관계를 통해 지배한다는 카토 시대의 원칙이 지켜질 수 없음을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은 정확하게 이해했고, 또 이들은 이런 피호 관계가 아니라, 독립 공동체를 보장하면서도 로마 직접 통치의 관철이 필연적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 신 질서를 확고하게, 신속하게 , 일관되게 도입하지 않았다. - P98

칸나이 패자와 자마 승자의 아들과 손자가 아버지와 할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 원로원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다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확고한 부와 물려받은 정치적 지위를 가진 소수의 폐쇄적 가문들이 정부를 이끄는 곳에서, 이들은 위기의 시대에는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끈질긴 일관성과 영웅적 희생정신을 발휘했고, 평화의 시기에는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이고 느슨하게 국가를 운영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세습과 동료제에 있었다 - P103

이제까지는 국가를 구성하던 두 권력, 통치하고 조정하는 권력인 정부와 입법 권력인 민회가 법정을 나누어 지배했다면, 이제부터는 물질적 이해관계의 굳건한 토대 위에 단단히 결합된 특권계급을 형성한 자본귀족이 재판하고 조정하는 권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통치하는 귀족계급과 거의 동등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 P169

로마의 군사제도를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수정하는 일을 마리우스는 5년 동안 내리 집정관직을 맡은 동안 - 그가 임명 조건이 아니라 시대적 요구였던 무제한적 최고 명령권을 쥐고 있을 때에 - 착수하여 완성했는데, 이는 민중당파의 장군이 가진 비(非)국헌적 최고 명령권이 남긴 깊은 상흔으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았다. - P276

민중당파의 개혁가들을 쓸어버렸던 똑같은 폭력적인 처참한 최후가 이제 귀족계급의 그락쿠스에게도 찾아왔다. 여기에 깊고 슬픈 교훈이 놓였다. 귀족계급의 저항이든 유약함이든, 개혁의 시도가 같은 계급에서 시작되었는데도 개혁은 실패했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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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독일의 공업 발전은 주로 1850년대 이후 루르 지방 발전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1855년 무렵 루르 지방과 슐레지엔에 코크스 고로가 존재했다. 목탄 고로가 코크스 고로보다 많긴 했지만 코크스 고로에서 독일 선철의 50퍼센트가 생산되었다.

독일에서 강철 생산이 급속히 증가했다. 1865년 50만 톤 이하이던 연간 강철 생산량이 1913년에 5,000만 톤으로 증가했다. 1870~1913년에 독일의 강철 생산은 연평균 6퍼센트 이상 비율로 증가했고 1880년 이후 더욱 급속해졌으며, 1900년대에 영국의 강철 생산을 앞질러 1914년경에 영국의 2배, 프랑스의 3배 이상에 달했다.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 사이에 협조 체제가 강화되었다. 독일은 이러한 신산업 주도국이자 중심지였다. 이미 1870년대 초에 주식회사 자본금이 4년 만에 2배로 성장했다. 구산업(방직업)이 독일에서는 부차적이었다. 석탄, 제철, 철강이 독일 공업의 성장 동력 역할을 하면서 1890~1913년 사이에 철과 강철 생산량이 3~4배 성장했다.

근대적 화학공업이야말로 독일이 가장 성공한 분야다. 1870년대에 독일은 세계 화학제품 시장의 절반을 차지했다. 1차 대전 이전 약 25년간 독일 화학공업은 연평균 6.2퍼센트씩 성장했고 생산량은 10배 증가했다.

20세기 초의 독일 은행 제도는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었다. 제국이 통일된 후, 프로이센 국립은행이 모태가 되어 라이히스방크가 만들어졌다(1876년). 라이히스방크는 은행의 재원과 권한을 대폭 확대하여 은행권 발행을 거의 독점했다. 또한 통화 금융을 감독하면서 신용은행이 어려울 때 지원하기도 하고 독일의 금융 구조를 총괄하는 중앙은행의 역할을 했다.

독일의 기업은 급속한 수직적 결합의 전략을 채택했다. 예컨대 철공업에서 독자적인 석탄, 금속광산, 코크스 공장, 송풍로, 주물 및 압연공장, 기계공장 등을 확보했다. 독일의 공업은 총생산량에서만이 아니라 개별 생산 단위 면에서도 규모가 컸다. 20세기 초에 각 기업의 평균 생산량은 영국의 2배에 달했다. 기업 대형화와 업종 다변화로 기업 경영이 복잡해지자 경영 업무가 전문화, 조직화될 필요가 생겼다. 또한 독일은 영국과 달리 산업교육에 충실하여 과학, 경영 기술이 발달했고, 기업에 필요한 전문 기술과 경영 인력 공급도 잘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중간 경영조직을 착실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내셔널리즘이야말로 1848년 독일 중산층을 움직이는 가장 결정적 사안이었다. 독일인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은 독일 통일에서 제외한다는 원칙이 이때 세워졌다. 즉 대독일주의Grossdeutschtum(다민족 나라인 오스트리아 중심의 독일 통일 추구)가 아닌 소독일주의Kleindeutschtum(프로이센 중심의 통일 추구)가 채택되었다. 이로써 새 통일 헌법에서 오스트리아,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은 제외되었다.

비스마르크는 기존의 보수층이 자유주의 중산층이나 독일 통일 운동 세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또한 내셔널리즘이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프로이센 정부와 반드시 상충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제대로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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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독재정은 국민에게 커다란 불행이지만, 절대적 과두정보다는 덜한 불행이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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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 4 - 희랍 도시국가들의 복속 몸젠의 로마사 4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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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제 전쟁은 불가피했다. 로마는 로마건국 549년(기원전 205년) 마케도니아를 이웃으로 묵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가 아시아의 가장 좋은 땅과 중요한 희랍 식민 도시 퀴레네는 차지하고 중립적 무역 국가들을 탄압하고 권력을 확장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또한 이집트의 몰락과 로도스의 치욕과 정복이 시킬리아와 이탈리아의 무역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동부 지중해 무역을 두 거대 대륙 세력이 좌우하는 것을 로마는 좌시할 수 없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25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 1817~1903)의 <몸젠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 4>는 해상제국 카르타고의 손발을 끊고 서지중해의 패권장악하는 시기의 로마사를 다룬다. 로마는 제2차 카르타고 전쟁 이후 동지중해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Magnus, BCE 356 ~ 323) 사후 마케도니아, 이집트, 아시아에 위치한 희랍(헬라스, 그리스) 제국을 굴복시키면서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 시기 막강한 해군력을 가졌던 카르타고 해군을 격파하고, 명장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 ~ 183)과 결전을 벌이며 전략/전술적으로 더욱 완벽해진 로마 육군을 상대로 알렉산드로스의 후예들은 적수가 되지 못하고 굴복하고 만다.


 퓌드나 전투는 또한 동시에 원로원이 아마 이탈리아 바다 너머에서 소유지나 점령군을 갖지 않고 그 무수히 많은 속국을 단순한 정치적 우위로써 통제한다는 국가 원리를 견지하는 최후의 계기를 이루었다. 즉 희랍에서 발생했던 바처럼 속국들이 완전한 무기력 상태나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도 안 되었고, 마케도니아가 의미 있게 시도했던 것처럼, 반자유의 지위에서 완전한 독립으로 나아가서도 안 되었다. 어느 나라도 완전히 망해서도 안 되고, 자력으로 존립해도 안 되었다. 그리하여 정복된 적은 로마 외교관에게 적어도 동일한, 종종 진정한 동맹국보다 더 나은 지위를 가졌다. 그리고 패한 자는 재기시켜 주었지만, 스스로 재기한 자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이것은 아이톨리아, 아시아 전쟁 후 마케도니아, 로도스, 페르가몬이 다 겪은 바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148


 카르타고 전쟁이 진정한 지중해의 패권을 가리는 승부였다면, 이후 희랍 제국과의 전쟁은 기존의 동맹관계를 맺었던 주변국과의 관계가 지배-복속의 관계로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 전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 로마는 비로소 '평등한 동맹의 중심'에서 '패권국(覇權國)'으로 불평등한 관계로 정치/경제적 이익을 로마로 집중시키며 제국의 출발을 알린다. 저자 몸젠은 로마의 헤게모니(hegemony)는 결과적으로 주어졌지만, 본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며 본문의 여러 곳에서 변호(?)한다. 로마는 주변과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에서, 마케도니아가 아테나이에서 로마의 안보를 위협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어쩔 수 없이 그들과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사실이 그럴까? 

 

  로마가 지중해 서부의 정복 후에는 곧바로 동부를 복속시키려 했다고 종종 사람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로마가 이 시기에는 결코 지중해 나라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고 아프리카와 희랍에서 위험하지 않은 이웃들을 가지는 것만으로 만족했다는 사실은 우둔한 편견이 없다면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24


  로마인들은 항상 자신들이 정복 전쟁을 추구한 적이 없으며 언제나 자신들이 공격받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상투적인 언명이 아니었다. 로마가 승전 후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의 자기 이익을 위한 절제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 예컨대 히스파니아의 보유, 아프리카에 대한 후견 책임의 인수, 특히 전체 희랍인에게 자유를 부여한다는 이상적인 계획 모두가 이탈리아 정책에 반하는 심각한 오류였다는 사실은 명백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원인은 한편으로는 카르타고에 대한 맹목적인 공포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훨씬 더 맹목적인 희랍의 자유를 향한 열정이었다. 로마는 이 시기에 특히 정복욕을 입증해 주지 않고 오히려 매우 합리적인 정복혐오를 보여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150


 제1차 카르타고 전쟁의 경우 시칠리아의 마메르 용병들의 참전 요청으로, 마케도니아 전쟁에서는 아테나이의 참전 요청으로 부득이하게 참전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전쟁의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할 것이다. 이들 사건에서 훗날 일본이 1931년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을 명분으로 만주로 관동군이 침략해 들어간 만주사변(滿洲事變)이나 1937년 루거우차오(盧溝橋)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켰던 사례를 떠올린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로마의 오랜 동맹국 아테나이를 필립포스가 침략한 것을 알리기 위해 아테나이 사절단은 이미 로마로 갔고, 원로원이 이 사절단을 환영하는 모습에서 필립포스는 자신의 앞날이 어떨지 명확히 보았다. 그리하여 필립포스는 곧바로 로마건국 554년(기원전 200년) 봄, 희랍에 있던 군사령관 필로클레스에게 아티케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도시 아테나이를 분쇄하라고 명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29


 이렇게 마케도니아 전쟁 결과 동지중해의 패권 또한 로마에게 넘어가게 된다. 마케도니아 전쟁 후 적대국이었던 마케도니아, 아시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은 카르타고와 마찬가지로 로마와 불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 형성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랜 기간 제2차 카르타고 전쟁에도 흔들림없이 로마를 배신하지 않았던 라티움 동맹은 물론,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도 평등은 무너지고 불평등한 관계가 성립되며 사회 전반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평등'에 대한 위협, 그것은 '자유' 때문이었다.


 수동적 로마 시민권의 철폐 그 자체는 비난할 것이 못될 뿐더러 동기 면에서도, 나중에 언급할 다른 사항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중간의 매개 고리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라티움 공동체들과 여타 이탈리아 공동체들 간 격차 소멸은 훨씬 더 우려스러웠다. 로마 권력의 토대는 이탈리아 내에서 라티움 민족의 차별적 우위였다. 라티움 도시들이 친족 공동체인 강력한 로마의 우월한 지배에 참여하지 못하고 이제 본질적으로 로마의 신민으로 생각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모든 이탈리아인이 이런 상태를 더는 참지 못하게 되면서, 로마 권력의 토대는 무너졌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179


  옛 시민체 내부에서는 무제한의 평등이 지배했다면, 새로운 국가체제는 처음부터 시민의 권리, 시민이 가진 사용/수익권에서 특혜를 누리는 원로원 가문들과 여타 시민 대중과의 구별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토지귀족의 폐지와 시민 평등의 형식적 확정으로 새로운 귀족이 형성되었고 그에 상응하는 반대당파도 형성되었다(p152)... 그러나 이 내적 발전은 큰 전쟁들과 전승에서 무기의 소음 때문에 들리지 않았고, 그 형성 과정은 로마 역사 중 다른 어떤 과정보다 눈에 띄지 않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153


 로마 원로원은 해외 속주로부터 저렴한 가격으로 곡물을 수입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다. 오늘날 미국이 석유와 달러를 연동시킨 '페트로 달러(Petro-Dollar)'를 기반으로 트리핀 딜레마(Triffin's Dilemma) 문제를 풀 해법을 찾아낸 것처럼, 과거 원로원들은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보다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한다. 주변부를 수탈해서 중심부로 부를 집중시키는 그들의 의도는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하도록' 해서 빨대효과를 유발했으며, 농토에서 유리되기 시작한 시민들에게 '노동없는 사회'를 실현시켜 정치적 무관심을 만들어냈다. 초창기 근검/절약하던 전통과는 달리 스포츠에 열광하는 생각없는 대중의 원형을 우리는 이 시기에서 발견한다.


 이탈리아의 해외곡물 수입에 유리하도록 속주들에게 수출 금지가 부과된 것으로 보인다. 시킬리아로부터 상당량의 곡물 수출이 로도스에게 특별한 혜택으로 허락된 것 말고는, 통상 속주의 곡물 수출은 이탈리아로만 자유로웠고 그리하여 해외 곡물은 모국 로마의 독점 상태에 있었다... 이로써 이탈리아 곡물 생산의 이익 원천이 완전히 없어졌고 그리하여 이탈리아의 곡물과 곡물 경작지가 거의 무가치하게 된 사실을 너무나 명백하게 알 수 있다(p232)... 로마 원로원 무리는 선의의 경신(輕信)으로 저렴한 곡물가에서 참된 인민의 행복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스키피오가와 플라미니누스가 사람들에게는 희랍인들을 해방하거나 공화정적 왕권 통제를 행사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이렇게 소규모 토지 소유가 참된 순이익을 더 이상 내지 못한 이래, 농민들은 가망 없이 몰락했다. 이탈리아 농민의 토지가 매입 또는 포기에 의해 대규모 토지 소유로 병합되는지는 시간 문제였을 뿐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233


 계속적으로 조여오는 신의 채찍과도 같은 한니발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군중심리를 활용하여 원로원은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며, 이른바 우민정책(愚民政策)을 실행한다. 희랍 세계 정복 전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아 제공되던 서커스는 검투경기였고, 희랍세계 정복 뒤에는 메난드로스( Menandros, BCE 342 ~ 291) 등의 희극(정치색이 배제된)으로 바뀌어 간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네로(Nero, ACE 37 ~ 68)시대 콜로세움에서 행해졌던 검투경기가 전형적인 황제정의 문제라 여겨지지만, 실상을 알고보면 원로원 정치라는 내각제 제도에서 그 기원을 발견하게 된다.


 조금은 리뷰의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지만, 황제정과 원로원정 이들 중 어느 것이 더 다수의 뜻에 부합하는 정체(政體)일까.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E 106 ~ 43)가 그토록 칭송했던 원로원의 공화정을, 콜로세움에서 민의(民意)에 따라 검투사의 생사를 결정해야 했던, 민중의 눈치를 봐야 하는 황제정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만 하고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자.


 아폴로 제전의 첫 축제에서 시민들은 축제 중에 징집 명령을 받았다. 이탈리아 특유의 미신적 공포는 병적 흥분상태에 빠졌고, 시뷜라 신탁과 예언을 유통시키고 그 내용으로 대중을 모으려고 그런 공포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민들에게 엄청난 희생을 기대해야 했던 정부가 의도했다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한 번 양보한 것은 계속 그렇게 된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192


 나라는 현저하게 쪼그라들었고 자유 시민들의 공동체는 해체되어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으로 분화되었다. 시민과 동맹세력들을 살육하고 황폐화시킨 것이 우선은 카르타고와의 두 장기전이었지만, 로마의 자본가들 역시 하밀카르나 한니발처럼 이탈리아 인민의 힘과 수를 감소시키는 데 기여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258

 

 문학사가는 로마 희극 작가들의 주목할 만한 재능은 인정할지라도 그들의 번역 작품 목록에 예술적으로 의미가 있거나 순수한 업적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역사적/풍속적 판단은 필연적으로 훨씬 더 가혹할 것임에 틀림없다(p326)... 정부에 의한 연극 규제의 정치적 중립성과 도덕적 위선은 로마 국민이 무서운 속도로 해체되는 데 상당 부분 기여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328


 <몸젠의 로마사 4>에서 희랍 도시국가들이 복속되는 과정 중에 비운의 명장 한니발은 도피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의 죽음이 애석하게 느껴지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가 바알 신 앞에서 한 맹세는 그의 죽음 이후 지켜졌다고 생각한다. 한니발의 군대는 자마에서 전멸했지만, 그가 승자 로마를 향해 던진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의 사과'는 <일리아스>에서 파리스의 트로이에게 멸망의 비운을 던진 것처럼, 로마 공화국의 기반을 송두리째 붕괴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가 남긴 공포는 공화국 로마가 다시는 이전 체제로 돌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 수백년 동안 수많은 로마시민들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고, 훗날 원로원 의원들 스스로 황제의 제관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넘기는 기반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승리라 생각한다. 마치 13세기 유럽 기사들의 중장갑 사이로 칼날을 집어넣어 그들을 무력화시켰던 몽골기병처럼, 한니발의 복수는 예리하게 공화국 로마의 약한 고리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로마 제국을 상대로 이 정도의 승리를 거둔 이는 기독교의 사도 바오로(Paulus, ACE 5 ~ 67)가 있을 뿐이다. 다만 바오로의 기독교는 정신적으로 제국의 사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최초 외부생물체였다가 세포로 흡수되었다는 점에서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를 떠올리게 한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이제 <몸젠의 로마사 5>에서는 한니발이 던진 불화의 싹이 조금씩 자라게 될 것이다...


 당시 막 시작된 선동이 개입된 상태에서, 정부 또는 개별 관리가 정한 시장가격보다 싼 이런 예외적이지만 아마도 매우 빈번했던 곡물 분배가 이후 곡물법들의 맹아가 되었다. 그러나 해외 곡물은 이런 예외적 통로로 소비자에게 도달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이탈리아 농업을 해쳤다. 해외 곡물이 이탈리아반도로 흘러들어 반도 생산물의 가격을 낮춘 것은 이미 자연스러운 사태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230


 사실상 그 전투(퓌드나 전투)가, 문명화된 나라가 전장에서 로마와 동등한 강국의 지위에서 로마와 대립했던 마지막 전투였다. 그 후의 모든 투쟁은 반란이거나 로마-희랍 문명권 밖에 있던 이민족, 이른바 야만인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148



주권체 민회의 근시안적 결정은, 로마가 승전을 통해 얻은 광범위하고 난해한 대외 관계들을 처리하는 데 민회가 부적합한 기구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민회는 국가 운영에 엉뚱하게 개입하여 필연적인 군사 조치들을 변경했고, 더욱 심각한 것은 민회가 라티움 동맹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 P31

에우메네스는 개인적으로 로마로 가서 원로원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그때 원로원은 양심의 가책을 받은 듯 급작스레 왕들이 이제는 로마로 올 수 없다고 결정하고, 에우메네스에게는 브룬디시움으로 이 원로원 결의를 알려주기 위해,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의하기 위해, 또 그가 떠나기를 로마인들이 바란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재무관을 한 명 보냈다. 왕은 오래 침묵했다. 그는 어중간한 자유 동맹의 시대는 끝나고, 무력한 복종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깨달았다. 로도스인들에게도 상황은 유사하게 전개되었다. - P140

역사적 정의는 여기에서 밀집방진에 대한 로마 군단의 군사적 우월함이 아니라 고대 민족들간의 필연적인 사태 발전이 좌지우지했고, 그리하여 순전한 우연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불변의 운명이 실현된 것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 P150

원로원의 통치가 타락할 수 있다. 하지만 인민 집회들은 통치능력 자체가 아예 없다. 본원 시민 집회를 사악한 다수가 지배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민회에서는 통상 저명인사의 언사가, 명예의 큰 외침이, 곤궁함의 더 큰 외침이 청허되었고 심각한 중상과 명예훼손이 회피되었다. 일반적으로 대중은 자신의 의지 없이 가장 가까운 충동에 따르기에 경솔과 우연이 결정했던 것이다. - P213

로마 발전의 정점은 문학이 없던 시기이다. 로마 민족성이 해체되고 희랍적/세계시민적 경향이 관철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그러한 경향에 뒤따라 로마에서 문학이 등장했다. 그리하여 원래부터 어쩔 수 없는 내적 필연성에 따라 희랍적 토양 위에 있었고 특수한 로마적 민족의식과 확연히 대립하고 있었다. - P294

무엇보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 문학적 효과는 시대적 경향으로 대체된다. 직접 일상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철저히 정치적 문제보다 사회적 문제에 주목한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의 내적 결론에서 동시대의 정치적/철학적 급진주의와 일치했고 옛 아티케의 민족성을 해체시키는 새로운 세계시민적 인도주의의 최초 최고의 사도였다... 아티케 신(新)희극은 에우리피데스를 희극에 옮긴 것 말고는 한 일이 없다. 그리하여 결국 옛 헬라스가 새로운 헬라스에 양보할 수록 이 시인의 명성과 영향력은 점점 더 올라갔고, 이집트나 로마 같은 외국에서 대체로 희랍 문화는 직간접적으로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규정되었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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