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학에는 ‘비용과 이익의 불일치 현상‘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한국 재벌들에게 특히 통용되는 비정상적인 경영 상황을 가리키는 용어다. 한국의  재벌 오너들은 사업이 크게 성공하면 이익을 충분히 누린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사업에 크게 실패했을 때, 그 비용 역시 오너가 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도덕적 섭리에도 맞고, 경영학 이론에도 맞다. 비용과 이익이 일치해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재벌들은  성공의 이익은 충분히 혹은 관대하게 누리는 반면, 실패에 따르는 비용은 거의  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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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5 - 사상과 문화 3.1운동 100주년 총서 5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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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초에 신채호는 잡지 <천고 天鼓>에 실은 글에서 "우리는 평화행복을 기구하는 바이지만, 강적 제거와 동양의 평안 도모는 '유혈' 두 글자를 떠나서는 이뤄낼 수가 없다... 적과 혈전을 벌일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어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여, 혈전을 통해서만 일제 타도와 동양평화의 길트기가 가능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p42)... 한용운은 인간에 대한 종교적 성찰에 바탕을 두고 인간 생명의 존립 조건으로서 '평화'를 표상했다. 즉, 인간다운 행복한 삶은 평화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평화를 지켜야 하며,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실천의지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것은 생명 있는 인간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75

3.1 항쟁은 비폭력 저항 활동이었는가. <3.1운동 100년 : 5 시상과 문화>는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알려진 3.1 항쟁의 뒷면을 보여준다. 독립 항쟁의 방법론에서 서로 다른 인식을 가진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 ~ 1936)과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 ~ 1944)처럼 3.1 항쟁안에는 여러 층의 다른 성격이 저항이 있었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로 다른 목소리가 한데 어울어져 식민통치의 성격을 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전기(轉機)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3.1 항쟁의 의의 중 하나를 발견한다.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에서는 1919년을 전후하여 3.1항쟁을 만들어낸 시대 정신과 이를 공유했던 당대의 문화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영원히 '동포'가 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인종론의 틀을 견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는 데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약점을 폭로한 것이 바로 3.1운동이었다... 어쨌든 일본은 인종이라는 틀을 유지하면서도 조선인을 민족으로 '동화'시키는 전망을 갖지 못한 채 '문화정치'로 돌입했다. 그리고 민족 간의 차별이 온존되면서 오히려 조선인의 민족의식이 확대되어 갔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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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세트 - 전5권 3.1운동 100주년 총서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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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과거, 현재, 미래를 바라보는 이들이 도시와 농촌, 한반도와 간도 지역에 걸쳐 벌인 민주적이고 근대적인 평화를 지향한 움직임이었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과거 군주에 대한 연민을 갖는 유림의 세력이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이었다면, 스페인 독감과 세계대전 전후 국가 권력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경제적 어려움과 차별을 동시에 느꼈던 자본가와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로서, 베르사유 조약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유학생과 지식인들은 미래를 바라보는 이들로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무능한 국가 권력인 일본 제국주의를 심판한 항쟁이 3.1항쟁이라 여겨진다.

개인적으로 3.1항쟁이 위대한 점은 개인적으로 제국주의자들의 민낯을 드러냈다는 것에서 발견한다. 계몽주의에 입각해 무지한 식민지 주민들을 ‘이성(理性 reason)‘의 힘으로 이끈다는 것이 제국주의자들의 주장이라면, 평화롭게 이성에 호소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폭력으로 제압하면서 그들 스스로 감정에 사로잡힌 야만인에 불과함을 스스로 폭로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계몽의 주체와 대상이 뒤바뀌게 되버린 것이다. 상대가 더이상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무도한 폭력집단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이후에는 이제 우리의 저항을 정당 방위라 부를 수 있을 것이기에, 이러한 비폭력 저항운동이 갖는 의미는 더없이 크다 하겠다. 비록 그 자체로 완성된 독립을 가져오지는 못했다는 점은 아쉽지만 이를 한계점으로 바라보거나 실패한 저항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느껴진다.

3.1운동 100주년 총서를 통해 위와 같이 항쟁의 의의를 정리해본다. 이제 막 5권을 읽은 후라 해당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순서겠고, 아직 1권 메타역사는 읽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성급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3.1항쟁이 어떻게 역사 속에 기억되어 왔는가는 내용 정리 후에 읽는 것이 나을 듯하여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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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14 0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인적으로 3.1운동의 의미를 독립투쟁이 계급적 관점을 가지게 된 것에 두고싶어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폭이 굉장히 넓어지고, 독립투쟁의 주체 역시도 대중이라는 의식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죠. 5권이나 되는 저 책들을 시작하기에는 굉장히 고민이 되는데 그래도 겨울호랑이님의 글로 어떤 내용인지 대략 윤곽은 잡을 수 있었습니다. 천천히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겨울호랑이 2021-03-14 07:10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바람돌이님께서 말씀하신 부분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이처럼 3.1운동의 의의와 그 파장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연구 또는 대중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다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3.1운동 100주년 총서가 두께도 그렇지만, 그리 재미있는 책도 아니라 선뜻 추천드리기는 망설여집니다. 시간 되실 때 도서관 등에서 빌려 보시면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
 

 

전쟁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전쟁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즉 전쟁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억제했을 뿐 아니라, 또한 전쟁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사실 전쟁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처음으로 가능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자본주의와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조건들이 처음으로 전쟁에서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_ 베르너 좀바르트, <전쟁과 자본주의> 中


 1910년대 후반 조선인 지주와 상인의 자본 축적과 여기에 힘입은 무역회사 설립 붐이 제1차 세계대전 전쟁특수와 이것이 촉발한 물자부족과 가격 폭등, 투기라는 식민지 본국 일본 경제와 동일한 시스템의 작동에서 기인했다는 것은 1920년 갑작스럽게 시작된 '전후 불황 도래'의 상황에서도 재차 확인이 가능하다.(p34)... 갑작스럽게 전후 불황이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회사의 존망이 위태로울 정도로 큰 규모의 손실이 단기간에 발생한 것은 선물 투기 때문이었다. 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 p37


 조선에서도 전 세계적인 독감 유행 양상과 비슷하게 1918년 3월에 처음 독감이 발생해 1918년 9 ~ 11월까지 두 번째 유행이 이어졌으며, 마지막 세 번째 유행은 1919년 1월부터 봄까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p50)... 1919년 당시 도별 인구수를 통해 1,000명당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살펴보면, 식민지 조선 전체에서도 1,000명당 441명의 환자와 8.2명의 사망자가 나와 1918년 독감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 p56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에서 보여지는 1919년 전후 사회상은 극심한 혼란 그 자체였다. 1918년부터 세계적으로 유행한 스페인 독감의 유행과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인한 전쟁 특수의 종결로 갑작스럽게 닥친 경제 불황은 식민지 조선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특수는 조선인 지주와 상인 등 부르주아지의 성장을 가져왔다. 그리고 일부 일본의 정치, 사회 세력이 3.1운동의 원인으로 인정한 이른바 '무단통치'에 의한 억압과 차별은 조선인 부르주아지의 민족주의도 성장시켰을 것이다.(p42)... 물론 (노동자의) 명목임금은 올랐다. 그러나 전쟁특수와 함께 가파르게 상승한 물가는 명목임금의 상승을 상쇄한 것을 넘어서 실질임금을 줄였다. 결국 조선인 내부에서도 전쟁특수는 부의 격차를 키웠으며, 폭등하는 생활물가는 식민통치에 대한 기층민의 분노를 가중시켰을 것이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 p43


 비교우위(比較優位)에 있는 일본 본토는 제조업이, 식민지 조선에서는 상업 자본이 발달하게 되면서 조선의 경제는 외형상 성장한 듯 보였다. 그렇지만, 명목소득은 증가하였으나, 실질소득은 오히려 감소하는 화폐환상(monney illusion) 현상이 일어나 중산층은 붕괴되고 소득의 양극화 현상은 더 심해지게 되었다. 한편, 조선 자본가들은 산업자본가로서의 성장을 바랬으나, 일본 본토의 이익을 우선한 조선총독부에서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조선인 자본가들은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결국, 경제적으로 전쟁특수로부터 소외된 하층민(프롤레타리아)과 국가권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조선의 자본가들(부르주아) 모두 불만을 갖고 있는 상황. 마치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삼부회의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상황이 1919년의 식민지 조선 사회 모습이었다. 


 조선인 자본가들은 조선총독부에 보호장려책을 요구했다. 그런데 조선인 자본가들은 국가의 보호장려책이 산업 진흥의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것이라 인식하고 있었다. 즉, 산업자본가로의 성장이, 특히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는 국가적 보호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인식했던 것이다.(p128)... 아무리 조선인 자본가들이 보호장려책을 요구해도 조선총독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1921년 개최된 조선산업조사위원회, 1923년 이입세 철폐를 내용으로 하는 관세 개정 등의 사안에서 잇달아 보호장려책의 관철이 무산되자, 조선인 자본가들은 물산장려운동을 펼쳐나갔다. 민중의 자각에 의한 사회적 경제운동을 통해 조선인 경제를 진흥시키려는 노선으로 전환한 것이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 p129


 여기에 더해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알려진 1918년 스페인 독감(Spain Flu)가 닥치면서 사회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일본 제국 내에서도 조선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더욱 심했는데, 조선총독부의 방역 실패와 조선인에게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모습은 민중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일본이나 타이완의 독감 방영 활동과 비교해도 식민지 조선에서 시행된 방역 활동은 소극적이었다. 특히 일본과 타이완에서 시행되었던 예방접종이나 마스크 보급 같은 활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p66)... 또한 조선에서 독감으로 인한 환자와 사망자가 많은 것을 조선인들의 관습과 미신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방역당국에서는 조선인들의 환자 발생이나 사망률에 대해 조선인들의 문제로 책임을 전가했으며, 이러한 책임 전가는 독감에 대한 방역당국의 소극적 대응과 더불어 방역당국에 대한 불신 및 불만을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 p70


 이처럼 식민지라는 억압된 환경 속에서 경제불황과 대규모 전염병 유행이라는 위기를 맞은 조선 사회에서 '잃어버린 10년'을 생각하며, 과거를 그리워한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라를 잃어버린 서러움과 함께 더 열악해진 삶의 조건이 이들을 만세 현장으로 이끈 것은 아니었을까. 이들에게 '대한 독립 만세!'라는 외침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다른 표현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본다면 3.1 항쟁의 구호 안에는 추상적인 이념뿐 아니라 민생(民生)에 대한 외침의 의미도 담겨있음을 깨닫는다.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를 읽으며 예전에 읽었던 무라야마 지쥰(村山 智順, 1891 ~ 1968)의 <조선의 점복과 예언> <조선의 귀신>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의 민간 신앙을 미신으로 치부하고 이로 인해 조선이 근대화될 수 없다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수백 만의 신(神)을 믿는 신도(神道)의 나라 일본에서 우리 나라를 미신을 믿는다고 폄하하거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일왕을 절대군주로 만들었던 나라에서 근대화를 말한다는 것 모두가 가소롭기 그지 없다. 무라야마 지쥰이 조선의 민속을 잘 정리해 준 것은 고맙지만, 민족 문화에 대한 평가는 사양하게 된다. '근대화(近代化, modernization)'라는 말은 적어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입에 담을 단어는 아닌 까닭이다.


 조선의 민중은, 옛부터 그들의 생활에 작용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자의 존재를 믿어왔다. 이는 조선의 민간에 예나 지금이나 천지자연 내지 목석충어 木石蟲魚의 정령이 모두 인생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귀신신앙의 강고한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이 귀신에 대하여 주력을 미치므로써 그 힘을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 무격 巫覡의 활약이 성하였으며, 또한 널리 보급되어 왔다... 조선의 민중은 이렇게 점복과 연계하여 그 긴 사회생활을 영위해왔고, 이로써 점복신앙을 내용으로 하는 강력한 전통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대개 자력갱생적 기력의 왕성함이 결여되었다는 이야기이고, 이 기력이 성하지 못하므로 전통의 힘에 속박되어 운명관/숙명관의 인생관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까닭은 아닐까.... _조선총독부촉탁 무라야마 지쥰(村山 智順), <조선의 점복과 예언>


 일본에서 법률에 의거하지 않고도 천황이 입법권을 위임할 수 있다고 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요컨대 국가 주권을 인민이 갖거나 군주와 인민이 나누어 가진 서구 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천황이 유일한 주권자이므로, 제국헌법 제정 당시 영토가 아니었던 내지 이외의 영토에 헌법을 적용해 그대로 통치할지 말지는 제국의 주권자인 천황의 의사 표명에 달렸다는 것이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 p140





 



1910년대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식량 및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철도 및 기타 사회기반시설을 정비하고, 육지면/소/쌀/누에고치의 개량에 착수하는 등 조선을 식량 및 원료 공급지로 만들기 위한 사업을 추진했다. 또한 1920년에는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해, 제1차 세계대전 시기 급속도로 진행된 일본의 공업화에 따라 급증한 도시 노동자계급에게 저렴한 식량을 공급하고자 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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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4 - 공간과 사회 3.1운동 100주년 총서 4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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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4 : 공간과 사회>에서 191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진 배경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과 1918년 전 세계에 유행한 '스페인 독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으로서 일본은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러한 전쟁특수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의 인식과는 다르게 경제호황인 상황에서 이미 10년 전에 멸망한 나라의 독립을 외칠 수 있었을까? 또한, 세계적인 질병의 유행으로 많은 인명피해를 낸 직후 상황에서 거대한 시위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을까?

우리에게 인식된 1910년대 전후 한국사회는 농토개혁으로 빼앗긴 농민 또는 지식인/학생들의 활동이 거의 전부지만, <3.1운동 100년 4 : 공간과 사회>에서는 전쟁특수로 급성장한 상업자본과 도시의 노동자 역할에도 주목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에 대해서도 함께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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