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에 질서를 부여하고 사유의 틀을 형성해가는 수단으로서 언어는 숨쉴 때 필요한 공기나 유영할 수 있는 바다 같은 역할을 한다. - P59

텍스트는 이미지에 흡수되고, 이미지는 텍스트에 단단히 고정된다. 의미는 경계를 넘나들며 전달된다. 그러나 항상 이런 방식으로 의미가 표현되었던 것은 아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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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것은 원인데, 순환의 지속적인 균등함을 방해하는 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원은 나누어질 수 없고 그 자체 중심과 시작과 끝을 이루며 순환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태라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론은 비례 개념을 신의 절대적 정체성에 의해 유도되는 형이상학적 정서와 연관짓는 경향이 있다.

비례를 신의 불가분한 완전성과 연결짓는 것은 복합적이며, 거기에는 모순의 씨앗이 담겨 있다. 그것이 바로 중세 미학이 양의 미학과 질의 미학 사이에서 해결을 요구받고 있는 문제이다.

모든 사물들이 현상계에서 자신들의 기능과 위치의 의미를 소진한다면, 그리고 본질을 통해 이 세계 너머에 있는 세계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물은 부조리하게 되라는 점을 중세 시대는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상징적 해석에는 기본적으로 본질과의 조화 및 본질에 대한 유추가 담겨 있다. 사실 하위징아는 상징적 해석을 본질의 면에서 사고하는 능력으로 설명한다. 상징과 상징된 사물은 추상될 수 있고 비교될 수 있다는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중세의 상징주의는 그런 식으로 그 세계의 미적 개념들을 표현해 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었다. 하나는 형이상학적 상징주의로서 세계의 미 속에서 신의 손을 식별해 내는 철학적 습성에 관련된 것이었다. 또 하나는 보편적인 알레고리로서, 이 세계를 신의 예술 작품으로, 즉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외에 도덕적, 알레고리적, 신비적 의미를 가진다는 식으로 보는 것이다.

판단의 일치를 보게 되는 아름다운 대상 속에는 객관적인 특질이 있지만, 미의 결정적인 요소와 표시는 시각적 감각을 수반하는 즐거운 동의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절로서 많은 근본적인 요점들을 명료하게 만들어 준다. 사물의 아름다움과 선함은 둘 다 형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동일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매우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형식은 그것이 어떤 욕구의 대상이 되는 한, 즉 현실화나 형식의 소유를 위한 갈망의 대상이 되는 한, 그 형식이 실재하는 한, 선함을 지닌다. 반면 미는 형식과 지식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보일 때 즐거움을 주는visa placent 사물들은 아름답다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시각으로 보면 즐거움이란 완전히 객관적인 사물들 속의 잠재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것이다. 즐거움이 미를 규정하거나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미 드러난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이제는 아퀴나스의 미에 대한 세 가지 규준, 즉 완전성, 비례, 명료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실체적인 형상보다는 구체적 실체의 특징으로 여겨질 때에만 완전한 의미를 획득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사실 〈비례〉라는 용어의 여러 가지 의미들 속에서 이런 견해의 여러 예증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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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I - 개정판 현대사상의 모험 16
칼 포퍼 지음, 이한구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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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마술적 사회나 부족사회 혹은 집단적 사회는 닫힌사회라 부르며, 개개인이 개인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회는 열린사회라 부르고자 한다. 닫힌사회는 하나의 유기체에 그대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닫힌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반(半)생물학적 유대에 의해 함께 묶여 있는 사회이다... 열린사회는 이와 반대로 유기체적인 특성이란 없는 추상적인 사회이다. 이 사회는 인간 상호 간의 직접적인 접촉이 거의 없는 비인격적 사회라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_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1> , p283


 칼 포퍼 (Karl Riamund Popper, 1902~1994)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 1 :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ume I: The Spell of Plato>에서 계(界)의 경계에서 질량과 에너지 이동이 자유로운 개방계(open system)와 이에 반대되는 에너지 교환만이 가능한 폐쇄계(closed system)라는 과학의 개념을 사회학에 접목시킨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보다 많은 정보와 자유, 평등이 균일하게 보장되는 열린사회를 거부하고, 소수에 의한 권력추구를 열망하는 이들, 그들이 바로 포퍼가 지적하는 열린사회의 적들이다.


 이것이 역사주의라 불리는 태도에 관한 간략한 설명이다. 역사주의의 핵심적 원리란, 역사는 특수한 역사적 법칙이나 진화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며, 우리가 이 법칙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운명을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주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단순한 형태는 선민사상에 의해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p13)... 유신론적 역사주의인 선민사상은 현대의 가장 중요한 두 역사주의 이론인, 파시즘의 역사철학과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이 공유하고 있다. 인종주의에서는 선택된 민족이 선택된 인종으로 대체되며,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에서는 선민이 선택된 계급으로 대체된다. _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1> , p14


 포퍼가 지적한 열린사회의 적들은 플라톤(Platon, BCE 427 ~ BCE 347)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다. 다소 거칠게 보수적인 측면에서 열린사회의 적이 플라톤이라면, 진보적인 측면에서의 적은 마르크스다. 플라톤의 역사의 법칙을 퇴행으로 바라보고 민주주의 정체에서 수호자 중심의 귀족정으로 되돌리려는 반동(反動)주의자라면, 마르크스는 역사의 법직을 진보로 해석하고, 자본이 갖는 필연적 모순에 의한 붕괴와 공산주의 사회를 꿈꿨다는 점에서 다른 방향성을 전망한 같은 역사주의자들이다. 이들 중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은 2권에서 구체적으로 다루도록 하고, 먼저 플라톤에 대해 살펴보자.


 플라톤과 헤라클레이토스 사이에는 유사성이 대단히 많지만,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반대로 플라톤은 역사적 운명의 법칙, 부패의 법칙은 인간의 도덕적 의지로 깨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확실히 부패로 치닫는 일반적인 역사적 경향과 모든 정치적 변화를 억제시킴으로써 정치 면에서의 더 심한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_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1> , p35


 플라톤은 정체(政體)에서 끊임없는 퇴행을 보았다. 완전한 이데아의 국가에서 귀족정,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으로의 끝없는 퇴보 속에서 스승 소크라테스(Socrates, BCE 470~ BCE 399)의 죽음을 지켜봐야했던 플라톤은 스승의 뜻과는 다른 의미로 부패와 타락의 확산을 막기위한 철인(哲人)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며 궁극적으로 폐쇄된 사회로의 지향을 선택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대신, 열린사회주의자 소크라테스의 목소리로 전달하는데, 후대 독자들이 플라톤의 대화면에서 때로 낯선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열린사회에 대한 신념과 인간에 대한 신념, 평등과 정의에 대한 신념과 인간 이성에 대한 신념에 가장 위대한 공헌을 한 자는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가장 재능 있는 제자였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얼마 안 가 그를 배반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신념은 공개적으로 도전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하였기 때문에, 플라톤은 그것을 닫힌사회에 대한 신념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_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1> , p284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진실로 지혜를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오만한 진리의 소유자이며 학식 있는 현인이었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요구하는 것은 현자지배인 것이다(p231)... 철인왕의 첫 번째 기능이며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국가의 창건자와 입법자로서의 기능이다... 철인왕의 주권 이론 배후에는 권력에의 추구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_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1> , p232


 우둔한 데모스(demos)에게 권력을 주는 것은 최종적으로 몰락에 이르는 길이기에 플라톤은 개인이 아닌 집단을 강조한다. 지식과 힘을 가진 소수에 의한 영속적 지배. 플라톤은 이러한 단절을 통해 끊임없는 역사의 퇴행을 막을 수 있음을 확신한다. 현실의 아테네 대신 라이벌 스파트타에서 가야할 과정을, 이제는 사라진 아틀란티스(Atlantis)에서 이데아(Idea)를 발견하면서, 플라톤은 열린사회의 적(敵)이 되버렸다.


 플라톤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동일시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개인주의를 극렬하게 혐오했고, 이를 분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혐오는 플라톤 철학의 근본적인 이원론에 뿌리박고 있다. 정치적 영역에서 개인이란 플라톤에게는 악 그 자체였다. 이리하여 국가의 이익이라는 오직 한 가지의 도덕적 기준이 등장한다. 이것은 집단주의나 정치적 공리주의의 법전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선이란 나의 집단이나 나의 부족, 혹은 나의 국가 이익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_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1> , p148


 <열린사회와 그 적들 1> 에서 저자는 플라톤의 역사주의에 기반한 반동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거부하는 퇴행적인 움직임을 비판한다. 부분의 최적화가 전체의 최적화를 보장해주지 않지만, 그 역도 마찬가지다. 개인과 전체의 유기적인 흐름에 대한 거부와 획일적인 접근이 갖는 위험성을 저자는 본문을 통해 분명하게 지적한다. 


 저자 칼 포퍼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riedrich Hayek, CH, 1899 ~ 1992)와도 많은 교류가 있었지만, 전체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열린사회와 그 적들 > 에서 보여준다. 신자유주의가 전체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일시한다면, 포퍼는 전체주의는 사회주의와 함께 보수적인 요소도 있음을 본문을 통해 보여준다. 파시즘과 사회주의는 동일한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 하이에크는 '그렇다', 포퍼는 '그렇지 않다'는 다른 대답을 내놓은 것이다. 과학자가 바라본 사회학.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이런 점에서도 한 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유토피아주의에는 플라톤적 접근법의 독특한 특성이 되는 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유토피아주의의 전폭성, 즉 돌멩이 하나도 그대로 두지 않고 사회를 전체적으로 다루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사회악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는 확신이며, 세상에 어떤 품위 있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비위에 거슬리는 사회제도를 완전히 근절해 버려야 한다느 확신이다. 그것은 비타협적인 급진주의이며, 탐미주의이며, 완전주의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비타협적인 급진주의이며, 탐미주의이며, 완전주의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지금보다 좀 더 낫고 좀 더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추함이 전혀 없는 세계, 참으로 아름다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이 있다. _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1> , p262


 우리가 플라톤으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은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그것은 잊어서는 안 될 교훈이다. 플라톤의 사회학적 진단이 우수했을지라도, 그 자신의 발전은 그가 대항해서 싸우고자 했던 악보다도 그가 추천했던 치료법이 더 나쁘다는 것을 증명한다. 정치적 변화를 억제하는 것은 치료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은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 천국에의 꿈은 지상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 _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1> , p330


역사주의의 핵심적인 원리란, 역사는 특수한 역사적 법칙이나 진화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며, 우리가 이 법칙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운명을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유신론적 해석, 즉 신을 역사적 무대에서 공연되는 연극의 작가로 해석함으로써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의 하나이다. - P16

플라톤은 국가를 인간 영혼과 비슷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국가의 질병, 즉 그 통일성의 분열은 인간 영혼 내지는 인간 본성의 질병에 대응한다. 국가 쇠퇴의 모든 전형적 단계는 인간의 영혼, 인간의 본성, 인간 종족의 각 쇠퇴 단계에 대응함으로써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도덕적 부패가 종족적 부패에 근거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플라톤의 자연주의에서 생물학적 요소는 결국 그의 역사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 P100

플라톤에게서는, 미래의 지도자를 선정하고 그들에게 지도력을 습득시키는 일이 교육의 과업으로 등장하며, 이를 담당하는 기구가 국가의 문교부라 할 수 있다. 순전히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을 플라톤의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제도이다. 이것이 권력의 열쇠를 쥐고 있다. 이런 이유 하나만으로도 적어도 고급 단계의 교육은 통치자에 의해 직접 통제되어야 한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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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7-31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1권만 번역되어서 기다리는 분들이 많은데 왜 아직도 안나오는 것일까요?
저도 1권만 갖고 있어요

겨울호랑이 2023-07-31 13:52   좋아요 1 | URL
아, <열린사회와 그 적들 2>는 1989년에 번역이 되었네요. 1권은 현대 사상 신서로 개정판이 나왔는데, 2권은 구판으로 나와있어 지금 읽고 있어요. 곧 조만간 정리해서 리뷰 올리겠습니다 ^^:)

그레이스 2023-07-31 13:54   좋아요 1 | URL
^^
저도 구판은 있는데 이 판본 갖고 있으니 나올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핑계가 생기네요 ^^
어딨는지 찾아보기도 싫고 ㅋㅋ

그레이스 2023-07-31 13:55   좋아요 1 | URL
리뷰 기다릴께요

겨울호랑이 2023-07-31 13:55   좋아요 0 | URL
^^:) 네 그레이스님 마음 동감입니다. 구판은 여러 면에서 개정판에 비해 아쉽게 느껴지는게 사실입니다 ㅋㅋ
 
단일한 근대성 - 현재의 존재론에 관한 에세이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황정아 옮김 / 창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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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일한 근대성>은 근대성의 '단수성'을 설파하는 일이 아니라 다양한 근대성 담론에 대한 맑스주의적 해체작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근대성에 연루된 각종 자가당착과 내적 한계를 짚어가는 그의 분석에서 핵심은 앞서 말한 대로 근대성 담론은 근대성이라는 비유가 투사된 서사이며 그것도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서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_ 프레드릭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 <옮긴이의 말>, p272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1934 ~ )의 <단일한 근대성- 현재의 존재론에 관한 에세이 A Singular Modernity: Essay on the Ontology of the Present>는 옮긴이의 말에서 드러나듯, '근대성'에 담긴 일종의 모호성 또는 이중성을 지적한다. 저자는 근대를 먼저 '단절'로 규정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에 잘 나타나듯 근대 이전과 이후 단어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근대화의 힘은 단어의 의미를 단층(斷層)처럼 어긋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규정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동시에 반복되는 시대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 근대의 모호성은 드러난다.


 '근대'라는 용어에 우리 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핵심은 바로 이런 단절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부스(nonus)와 모데르누스 사이의, 새로움과 근대 사이의 구별이다. 모든 근대적인 것은 반드시 새롭지만 모든 새로운 것이 반드시 근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 _ 프레드릭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 , p26


 우리가 확인하고자 했던 바는 단절(break)과 시대(period)의 변증법이고 이는 그 자체로 연속성과 파열이라는 (다시 말해 동일성과 차이라는) 더 광범위한 변증법의 한 계기다. 후자의 과정은 스스로를 멈추거나 '해소할' 수 없고 계속해서 새로운 형식과 범주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이다. _ 프레드릭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 , p32


 프레드릭 제임슨은 '서사의 내재화'라는 개념을 통해 모더니즘 안의 차이와 반복을 드러낸다. 근대 이전 시기와의 단절을 선언한 2차 대전 이전의 전기 모던과 자기 회귀적인 후기 모던이 차이를 보여준다면, 모더니즘을 부정한 포스트 모더니즘이 사실은 직전의 후기 모더니즘의 부정이라는 일종의 시대의 반복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은 모호한 개념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단일한 근대성> 서두에서 '근대'(modern)라는 단어의 사용이 이미 5세기부터 있어왔음을 말한다. 빅히스토리에서 여러 차례의 대멸종과 이전과는 다른 생명체의 번성이 반복되어온 것처럼,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근대의 의미는 반드시 자본주의와 연관지을 수 없는 새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제기한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영어의 modenity를 근대성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현대성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고민에 다른 실마리를 제시한다...  


 결정적인 것은 서사의 내재화(interiorization)다. 서사는 이제 예술작품 내부에서 도출될 뿐 아니라 작품의 근본 구조가 된다. 통시적이었던 것이 이제 공시적인 것이 되고, 사건들의 시간적 연쇄는 예기치 않게 다양한 요소들의 공존이 되며 이런 요소들이 행하는 재구조화가 마치 영화의 정지화면처럼 포착되고 정지된다. _ 프레드릭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 , p145


 고전적인 모던 내지 본격 모던은 재현 자체에 대해 반영적이고 자의식적이다. 대체로 그것은 재현이 내적 논리에 따라 자체의 반(半)자율적인 진로를 밟아가게 해주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재현이 스스로를 자신의 내용과 대상에서 분리하도록, 말하자면 스스로를 해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p227)... 내가 보기에 후기 모더니스트들에게 귀속되는 반영성은 이런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후기 모더니즘적 반영성은 모더니스트로서의 예술가의 지위와 관련되고, 예술에 관한 예술, 예술 창조에 관한 예술로의 끊임없는 그리고 자의식적인 회귀를 내포한다. _ 프레드릭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 , p228


 포스트모더니즘이 근본적으로 단절하려고 한 것은 후기 모더니즘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것과 단절함으로써 고전적 모더니즘이나 심지어 근대성 일반 내지 근대성 그 자체와 단절한다고 상상한다. _ 프레드릭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 , p241

단절과 시대의 변증법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핵심은 이중적인 움직임이다. 한편에서는 연속성의 중시, 곧 과거에서 현재로의 이음새 없는 이행에 대한 고집스럽고 확고한 강조가 서서히 근본적 단절에 대한 의식으로 바뀌고,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단절에 집중된 관심이 점차 그 단절을 하나의 자체적인 시대로 바꾼다. - P33

근대성의 비유는 리비도를 장전하고 있다. 즉 그것은 다른 형태의 개념들과는 잘 연결되지 않는 독특한 종류의 지적 흥분을 작동시킨다. 이는 분명 기쁨이나 열렬한 기대 같은 정서와 희미하게 연결된 하나의 시간적 구조로서, 현재의 시간 안에 약속을 응축해 넣고 현재 그 자체 안에 미래를 더 직접적으로 소유하는 법을 제시하는 듯 보인다. - P45

호르크하이머(Horkheimer)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Dialectic of Enlightenment)에 바탕을 두고 있는바, 여기에 따르면 이른바 지식과 과학의 진보라는 것은 일종의 낯설게하기이며 이는 이전의 합리성을 미신의 지위로 강등시키고 결국에는 실증주의라는 반(反)이론적 황무지로 보낸다. 그러고나면 이 새로운 설명의 관점이 훨씬 더 만족스럽고 이해가능한 과정을 통해 이른바 모더니즘적 혁신이라는 목적론의 토대를 구축한다. - P181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바는, 모던한 작가들에 있어서 그런 형식은 결코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한 마주침에서 실험적으로 발생해 결코 예단할 수 없는 구성물이 되어간다. 형식의 구조가 미리 알려질 때, 즉 주어진 또는 이미 선택된 내용의 날것 그대로의 경험적 요소들이 충실히 따라야 할 일련의 필수요건으로서 미리 알려질 때 동학의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 형식을 미적인 것의 자율성 또는 예술작품의 자율성으로 보아도 무방하지만, 이상이자 처방으로서의, 또 규제원칙이자 지고의 가치로서의 미적 자율성은 모더니즘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부산물이자 나중에 덧붙여진 관념이었다는 게 지금까지의 이 글의 주장이었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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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0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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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의 선진자본주의 국가에는 자뵨=네이션=스테이트라는 삼위일체 시스템이 존재한다. 먼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방치되면 반드시 경제적 격차와 계급대립으로 귀결된다. 그에 대해 네이션은 공동성과 평등성을 지향하는 관점에서 자본제경제가 초래하는 모순들의 해결을 요구한다. 그리고 국가는 과세와 재분배나 규칙들을 통해 그 과제를 해결한다. 자본도 네이션도 국가도 서로 다른 것이고, 각기 다른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서로를 보완하는 형태로 접합되어 있다. 그것들은 어느 하나를 결여해도 성립하지 않는 보로메오의 매듭이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 p31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1941 ~)의 <세계사의 구조 世界史の構造>는 '자본(capital)', '네이션(nation)', '국가(state)'의 긴밀한 연계로 얽혀진 현대 자본주의 사회 체제의 기원과 문제점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대안에 대한 논지가 담겨있다. 고진이 본문에서 '보로메오의 매듭'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복잡하게 얽힌 시스템의 본질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세계사의 구조>에서 고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주장에 주목한다. 고진은 헤겔의 <법철학>에 나타난 사회 구조를 파악하려는 관점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드러난 역사를 정신적인 것이 아닌 경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을 통해 시스템의 본질에 접근해간다. 


 우리는 1990년 이후의 상황 하에서 칸트, 헤겔, 마르크스라는 고전철학이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재검토하는 것은 액추얼한 문제이다. 이 경우 우리는 칸트는 헤겔에 의해 극복되고, 헤겔은 마르크스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통념을 배척해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칸트를 각지의 자본과 국가에의 대항운동이나 코뮌이 나누어지고 대립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시 읽어야 한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 p427


 그렇지만, 고진은 <세계사의 구조>에서 철학자들의 논지를 그대로 빌려오지 않는다. 헤겔의 논지는 시스템의 구조를 파악하는데는 유용하지만, 이들의 관계성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것으로 비판되며, '생산양식'에 주목한 마르크스의 관점은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기에 부족함이 있어 고진에 의해 '교환양식'으로 바꾸어 해석된다. 이처럼 <세계사의 구조>에서 고진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논지를 '가로지르기(trans- )'를 통해 현재 문제를 해석하는데, 최종적으로 이러한 논의의 종점은 '초월적인' 칸트의 '세계 공화국'에 이른다.


 헤겔이 <법철학 강의>에서 파악하려고 한 것은 자본=네이션=국가라는 매듭이다.  이 보로메오의 매듭은 일면적인 접근(approach)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헤겔이 변증법적 기술을 취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헤겔에게 있어서는 이런 매듭이 근본적으로 네이션이라는 형태를 취한 상상력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 망각되고 있다. 즉 네이션이 상상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망각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매듭이 지양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전혀 보이지 않게 된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 p323


 칸트는 홉스와 마찬가지 전제에서 생각하고 있다. 홉스는 주권국가(리바이어던)에 의해 평화가 실현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평화는 국가 내부만의 것으로 국가 간에는 없었다. 한편 칸트는 국가 간의 평화상태를 창설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현된 상태가 세계공화국이다... '세계공화국'이란 국가들이 지양된 사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 차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국가와 국가 간에 경제적인 '불평등'이 있는 한,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 영원평화는 일국만이 아닌 다수의 나라에서 '교환적 적의'가 실현됨으로써만 실현된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 p335


  <세계사의 구조>에서 우리는 다양한 보로메오의 매듭을 만나게 된다.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현재 자본주의 구조와 이들을 나타내는 '감성-상상력-오성(지성)' 그리고 이들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마르크스-헤겔-칸트'의 주장까지. 그렇지만, 이들 보르메오의 매듭은 서로 정합(整合)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교환양식 A에서 교환양식 B로 옮겨갈 때, 유목상태에서 정주상태로의 변화를 해결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국가가 태어나듯, 이들은 다르지만 동시에 공통된 부분을 갖고 있다. 다르지만 같은, 조금씩 어긋난 구조 속에 생겨난 틈 사이에서 생겨난 균열을 예리하게 파고들어 잘라냈을 때, 고르디우스 매듭을 풀어낸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Magnus, BCE 356 ~ BCE 323) 처럼 문제를 풀어내고 '세계공화국'이라는 새로운 교환양식으로 옮겨갈 수 있을 것이다.


 전작 <트랜스크리틱>이 칸트, 마르크스, 헤겔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책이라면, <세계사의 구조>는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보다 많은 역사와 정치철학의 논의가 이루어지는 이 책은 <트랜스크리틱>을 통해 얻은 '비평'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다 깊게 하는 계기를 독자들에게 선물한다...


 네이션-국가는 네이션과 국가라는 이질적인 것의 결합이다. 하지만 그것이 성립하기 전에 실은 자본=국가, 즉 자본과 국가의 결합이 선행하고 있다. 이것이 절대왕권이다. 네이션이 나타나는 것은 그 후, 즉 절대왕권이 시민혁명에 의해 무너진 이후이다. 간단히 말해, 네이션이란 사회구성체 중에서 자뵨=국가의 지배 하에서 해체되어 가던 공동체 내지 교환양식A를 상상적으로 회복하는 형태로 등장한다. 네이션은 자본=국가에 의해 형성된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본=국가가 가져오는 사태에 항의하고 대항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자본=국가의 결락을 보충해서 매우는 것으로서 출현했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 p304

마르크스가 강조한 것처럼 상품교환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발생했다. 그곳에서 성립한 것은 일반적인 등가물(화폐)에 의한 교환이다. 국가는 이에 관여하고 있지 않다. 실제로는 국가와 법이 없으면, 상품교환이 성립하지 않는다. 즉 계약이 이행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는 화폐가 가진 힘을 불러오지는 못한다. 화폐는 국가에 의해 주조되지만, 그것이 통용되는 것은 국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다. 상품(소유자)들의 세계 속에서 형성된 힘에 의한 것이다. 국가나 제국(광역국가)이 하는 일은 화폐의 금속량을 보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화폐의 힘은 제국의 범위를 넘어서기에 이른다. - P47

미니세계시스템은 교환양식A에 의해, 세계=제국은 교환양식 B에 의해, 세계=경제(근대세계시스템)은 교환양식C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이것을 안다면 그것들을 넘어서는 세계시스템X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교환양식A의 고차원적인 회복에 의해 형성된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군사적인 힘이나 화폐의 힘이 아니라 증여의 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칸트가 ‘세계공화국‘이라고 부른 것은 그와 같은 세계시스템의 이념이다. - P66

화폐경제는 개인을 공동체의 구속에서 해방시키고, 제국=코스모폴리스의 인민으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급진적 평등주의‘는 공동체에 존재했던 평등주의, 바꿔 말해 호수적 경제와 윤리를 파괴해버린다. 즉 그것은 빈부의 격차를 가져온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보편종교가 등장하는 전제이다. 요컨대 보편종교는 제국형성 과정에서 교환양식 B의 지배하에 교환양식 A를 교환양식C를 통해 해체해갈 때, 이에 대항하는 교환양식D로서 출현한 것이다. - P207

네이션이란 상품교환의 경제에 의해 해체되어가는 공동체의 ‘상상적‘ 회복에 다름 아니다. 네이션은 말하자면 자본=국가에 결여된 ‘감정‘을 거기에 불어넣는 것이다. 헤겔은 <법철학 강의>에서 홉스적인 국가를 ‘오성적 국가‘라고 불렀다. 그것은 거기에 ‘감정‘이, 따라서 ‘네이션‘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이 생각하기에 자본=네이션=스테이트야말로 진정한 ‘이성적 국가‘인 것이다. - P312

우리는 호수적 원리의 고차원적인 회복을 소비=생산협동조합에서 보아왔다. 이제는 그것을 국가 간의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 국가연방을 새로운 세계 시스템으로 형성하는 원리는 증여의 호수성이다. 증여는 군사력이나 경제력보다 강한 ‘힘‘으로서 작동한다. 보편적인 ‘법의 지배‘는 폭력이 아니라 증여의 힘에 의해 뒷받침된다. ‘세계공화국‘은 이렇게 해서 형성된다 -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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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3-07-25 2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청나게 훌륭한 책인 듯 합니다 ^^
전 이 책 읽고 거진 보름 동안 충격에 잠 못 이룬 것 같습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3-07-25 23:10   좋아요 1 | URL
아, 북다이제스터님께 <세계사의 구조>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 느껴집니다.저도 철학-역사를 넘나들면서 의미를 해석하고 자신의 관점과 향후 전망을 제시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글이 정연하게 다가왔습니다. 다만, 세부적으로 조금 더 공부해야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다른 전집으로 보완해보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