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전집 5 - 테아이테토스 / 필레보스 / 티마이오스 / 크리티아스 / 파르메니데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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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b "소크라테스" 하고 파르메니데스가 말했답니다. "논의에 대한 그대의 열성은 감탄받아 마땅하오. 말해보시오. 형상들 자체를 형상들에 관여하는 사물들과 구분하는 이런 구분법은 그대 자신이 생각해 낸 것인가요? 그대는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같음과는 별도로 같음 자체 같은 것이 있으며, 그 점에서는 하나와 여럿과 방금 그대가 제논한테서 들은 모든 것이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나요?"... c "소크라테스, 다음과 같은 것들은 어떻소? 머리털이나 진흙이나 먼지나 그 밖에 더없이 무가치하고 하찮은 것처럼 가소로워 보이는 것들 말이오. 그대는 그런 것들 하나하나에도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과 다른 별도의 형상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처한가요?" "아니요" 하고 소크라테스가 대답했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보는 그대로이며, 그런 것들의 형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겠지요."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483


 플라톤(Platon, BCE 428 ? ~ BCE 348 ? )의 <파르메니데스 : 형상에 관하여 Parmenides>는 여러 면에서 인상적인 대화편이다. 다른 대화편에서는 자신만만하게 대화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특기인 산파술(Socratic method)을 통해 상대를 자신의 의도대로 몰아세우던 소크라테스(Socrates, BCE 470 ~ BCE 399)지만, 이번 대화편에서는 만만치 않은 상대인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E 546~ BCE 501)를 만나 시종일관 끌려다니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플라톤 철학의 사상적 기반인 이데아(Idea)론 자체가 흔들리는 충격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131b "아니지요" 하고 소크라테스가 말했답니다. "그것(형상)은 하나이자 같은 것이고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지만 그 자체에서 분리되지 않는 날(日)과 같으니까요. 그처럼 각각의 형상은 하나이자 같은 것으로서 모든 것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어요."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484


 형상(形相)의 세계인 이데아들과 이들의 모방으로 이루어진 감각의 세계. 소크라테스는 구체적으로 파르메니데스에게 이데아론을 펼치지만, 오히려 관여의 딜레마, 가분성(可分性)의 역설, 구분과 불가지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무엇이 형상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懷疑)가 제기된다. 그렇다면, 이데아의 존재는 부정되어야 하는가? 파르메니데스는 이에 대해서도 긍정하지 않는다. 이데아를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패러독스(paradox). 


135a "그렇지만 소크라테스" 하고 파르메니데스가 말했답니다. "형상들에는 이런 문제점들과 그밖에도 수많은 문제점이 내포될 수밖에 없소. 만약 사물들의 그런 형상들이 존재하고 누가 각각의 형상을 '어떤 것 자체'로 구별한다면 말이오.... b "그러나 소크라테스" 하고 파르메니데스가 말했답니다. "만약 누가 방금 언급한 문제점들이나 그와 같은 다른 문제점들에 주목한 나머지 사물들에는 형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개개의 사물을 위해 형상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사유가 향할 곳이 어디에도 없을 것이오."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494


 이런 상황에 대해 이후 대화편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청년 아리스토텔레스(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인물)를 상대로 하나(一者)의 특성에 대해 보다 깊은 논의를 이어간다. 


141e "따라서 하나는 하나가 되는 방법으로 존재하지 않네. 그렇다면 하나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에 관여할 테니까. 그러나 하나는 분명 존재하지도 않고 하나도 아닐세. 이런 논의가 믿을 만한 것이라면. 142a 그런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 자기에게 속하거나 딸린 것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하나는 이름도 없고 설명될 수도 없으며, 지식이나 감각적 지각이나 의견의 대상이 될 수도 없네."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513


 파르메니데스는 대화를 끌고 가면서 하나의 가설에 대해 여러가지의 연역(演繹)을 시도한다. 이러한 연역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가설의 참, 거짓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一者)안에 포함된 여러 모순이 드러나면서 더 혼란에 빠지게 된다.


162a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는 하나는 존재하는 것 같네. 만약 존재하지 않는 하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기 위해 어떻게든 자기 존재의 일부라도 포기한다면 그것은 곧바로 존재하는 것일테니까. 따라서 하나가 존재하지 않고 계속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려면, 자신이 존재하지 않도록 강제할 존재하지 않음의 존재를 가져야 하네. 이는 존재하는 것이 완전하게 존재하려면 존재하지 않음의 존재하지 않음을 가져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세. 그래야만 존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존재하지 않을 걸세. 존재하는 것이 완전하게 존재하려면, 존재하는 것의 존재에 관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에는 관여하지 않을테니까. 한편 존재하지 않는 것이 완전하게 존재하지 않으려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위해 존재하지 않음에 관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위해 존재함에 관여할 걸세.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에 관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함에 관여함으로,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만큼 존재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존재함에 관여할 걸세."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569


  대화편을 읽다보면 느껴지지만, 이데아론의 가장 큰 문제는 모든 개념의 형상화다. '없음'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통해 비로소 '부재(不在)'가 될 수 있다는 설명 구조 속에서 모든 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고, 언어로 표현되었다는 자체로 존재성을 얻으며, 이러한 존재성이 명사/주어로 나타나는 이데아의 세계에서 심지어는 대립되는 술어(術語)마저 흡수하면서 이데아론의 취약함을 스스로 드러낸다. 


 165d "따라서 만약 하나는 존재하지 않고 여럿이 존재한다면, 여럿은 반드시 같기도 하고 서로 다르기도 하며, 접촉하기도 하고 서로 떨어져 있기도 하며, 온갖 운동을 하기도 하고 온갖 방법으로 정지해 있기도 하며,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며,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텐데, 그런 것들을 빠짐없이 일일이 열거한다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는 쉬운 일일 것세."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579


 <파르메니데스>는 이처럼 플라톤 핵심 사상인 이데아론이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이러한 약점이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가 파르메니데스와 대화를 통해 드러났다는 점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다른 대화편에서 늙은 소크라테스는 젊은 제자들과 대화를 통해 이들을 불멸의 형상, 이데아 세계로 이끈다. 과거 자신이 인정했던 이데아론의 약점을 감추고서.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강조한 플라톤 사상 자체가 서양철학사 전반의 거대한 지적 사기극이라고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역시 시간 안에 존재하면서도 시간 밖에서도 존재하는 이데아의 모순이 소크라테스에게도 투영된 작가의 의도적 노림수라고 읽어야 할까. 여러 면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생각할 거리와 함께 혼란을 주는 텍스트임이 분명하다.


 152e "따라서 하나는 자신과 같은 동안 생성되기도 하고 존재하기도 하므로 자신보다 더 젋지도 더 늙지도 않으며, 자신보다 더 젊어지지도 않고 더 늙어가지도 않네."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544


 155c "이 모든 것에 따르면 하나 자체는 자신이나 다른 것들보다 더 늙기도 하고 더 젊기도 하며 더 늙어가기도 하고 더 젊어지기도 하는가 하면, 자신이나 다른 것들보다 더 늙지도 더 젊지도 않으며 더 늙어가지도 더 젊어지지도 않네. 그러나 하나는 시간에 관여하여 더 늙어가기도 하고 더 젊어지기도 하므로 반드시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관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하나는 존재하고 존재했고 존재할 것이며, 생성되었고 생성되고 있고 생성될 것이네."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550


 마지막으로, <파르메니데스>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 ~ 1976)의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의 연결 지점이라 생각될 수 있는 문장을 옮기는 것으로 글을 갈무리하려 한다. 존재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에 관여하는 하나(一者),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시간 안에 존재하지 않은 하나(一者). 이러한 모순된 성격이 시간 속에서 동시에 공존하는 지점이 '찰나'라면, 하이데거는 그 '찰나'를 바로 현재에 미래를 향해 기투하는 그 시점에서 포착한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해서는 <존재와 시간>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이로써 <테아이테토스> vs 러셀, <파르메니데스> vs 하이데거의 대진표가 짜여졌다.


 156d "그것이 변할 때 그 안에 있음직한 이 이상한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찰나 to exaiphnes 말일세. '찰나'는 거기서부터 두 상태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 같으니까. 어떤 것이 정지해 있는 동안에는 정지해 있는 상태에서 변하지 않고, 움직이는 동안에는 움직이는 상태에서 변하지 않기 때문이지. 대신 찰나라는 이 이상한 성질은 운동과 정지 사이에 잠복해 있고 어떤 시간 안에도 없네. 그래서 그것 안으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움직이는 것은 정지해 있는 상태로 변하고, 정지해 있는 것은 움직이는 상태로 변한다네."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553

166c "그렇다면 한 마디로 ‘만약 하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옳은 말을 하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로 하세. 하나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하나도 다른 것들도 자신들과 관련해서든 서로와 관련해서든 온갖 방법으로 모두 다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며,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같기도 하다고 말일세." - P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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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아이테토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6
플라톤 지음, 정준영 옮김 / 이제이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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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d 그렇지만 말이야, 그것들과 관련해서 다른 것들은 제법 이해하고 있네만, 사소한 어떤 것에 대해서는 난관에 봉착해 있네. 자네를 비롯해 여기 있는 이들과 더불어 검토해 봐야 할 게 바로 그것이네. 그럼 내게 말해 보게. 배운다는 건 배우게 되는 것들에 관해 더 지혜롭게 되는 것 아닌가?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78


 이렇게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 ~ BC 399)의 사소한 어떤 것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테아이테토스 Theaetetus>는 시작된다. <테아이테토스>가 던지는 질문은 "앎(지식)이란 무엇인가"이다. 젊은 테아이테토스와 문답을 통해 진행되는 논의에서 처음 '앎=지각'이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외부 자극을 일차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로부터 앎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최초의 논의다. 그렇지만, 이러한 명제는 곧바로 반박된다.


152c 뜨거운 것들이나 그런 모든 것들에서 나타남과 지각은 동일하네. 그것들은 각자가 지각하는 그대로 각자에게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일세. 그러므로 지각은 언제나, 있는 것에 대한 것이며, 앎인 한에서 틀리지 않는 것이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92


 누군가에게 '큰 것'이 다른 이에게는 '작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을 때, 우리는 '큼'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무엇을 안다'에서 그 무엇이 상대적인 양태로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이 제기되며, 이 과정에서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90/485 ~ BC 415/410)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가 함께 비판된다. 참된 앎이 지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오는가?


157a 그 자체가 그것 자체로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들은 서로 간의 교섭 속에서 생겨나 움직임을 통해 온갖 것들로 된다고 말일세. 그들이 말하는 바로는, 작용을 가하는 쪽에 대해서도 작용을 받는 쪽에 대해서도 그것들을 따로따로 취해서 어떤 것으로 있다고 단정적으로 사유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일세.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01


 182b 그 어떤 지각에 관해서든, 이를테면 봄에 관해서나 들음에 관해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대체 봄이나 들음 자체 속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을 보지 않음이라고 하기보다 봄이라고 불러서도 안 되며, 어떤 것을 지각 아님이라고 하기보다 다른 어떤 지각이라고 불러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나와 테아이테토스는 지각은 앎이라고 말했습니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56


 이제 참된 앎은 추론에서 온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된다. 그렇지만, 모든 추론이 '앎'인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와 테아이테토스에 의하면 오로지 참된 판단만이 우리가 대상을 제대로 알게끔 하는 것이며, 거짓된 판단은 '무지(無知)'에 다름아니다. 마치 새장 안에 새를 넣어 우리가 소유하듯이, 우리가 상기를 통해 영혼이 알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참된 판단에 의한 추론이다. 또한, 단순히 '이름'만 가질 수 있는 요소들과는 달리 '이름'과 함께 '서술'될 수 있는 복합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서술'만이 참된 앎을 표시할 수 있는 것이며, 서술 될 수 없는 것은 앎(지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인식될 수 있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요소에 의해 서술 될 수 있는 특징이 있고,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된 것들은 참된 앎인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하면서 <테아이테토스>는 아포리아(Aporia)로 막을 내린다. 이 아포리아는 무엇인가?


186c 몸을 통해 영혼에 이르는 모든 경험들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태어나자마자 자연적으로 지각하게 되어 있지만, 그런 경험들을 있음과 이로움의 측면에서 헤아린 결과는 그런 것이 누구에게 생기게 되더라도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애를 쓰고 교육을 받아야 가까스로 생기게 되지 않겠나? 앎은 경험들 속에 있지 않고, 그런 경험들과 관련된 추론 속에 있는 것일세. 추론 속에서는 있음과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나, 경험 속에는 그게 불가능한 것 같으니까.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65


199e 맞아요, 소크라테스 선생님. 우리가 새들을 '앎'으로만 놓았을 때 아마 그건 제대로 한 게 아닐 겁니다. '모름'들도 영혼 속에서 함께 여기저기 날아다닌다고 놓았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사냥하는 자는 어떤 때는 '앎'을 붙잡고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어떤 때는 모름을 붙잡기도 하는데, 거짓된 판단은 '모름'에 의해 하게 되는 것이고 참된 판단을 '앎'에 의해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어야 했습니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95


 202c 복합체들은 인식될 수 있는 것들일 뿐만 아니라 서술될 수 있는 것들이면서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들이네. 그러니까 누군가가 어떤 것에 대해 설명 없이 참된 판단을 취할 때면, 그의 영혼은 그것에 관해 참된 생각은 하고 있는 것이나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닐세. 설명을 주고받을 수 없는 자는 그것과 관련해서 앎이 없는 자이니까. 반면에 설명을 추가로 얻은 자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고, 앎에서 완벽하게 되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00


 그것은 지각으로부터의 개별적 인식이 추론에 의한 보편적 인식과 합치되는가를 검증했을 때 비로소 참된 앎의 과정이 완결된다는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참된 앎이란, 이데아(idea)와 같은 형상에 대한 인식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리적인 세계(가상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될 것인가? 그렇다면, 참된 앎이 아닌 것이 아니지 않은가?


 209c 내가 생각하기로, 테아이테토스의 이런 들창코의 상태가, 내가 목격한 다른 들창코의 상태와 차이가 나는 어떤 것을 새겨 주고서 기억상을 남겨 주기 전까지는, 테아이테토스가 내 안에서 판단의 대상으로 되지는 못할 것 같네. 그리고 자네의 모습을 이루는 다른 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세.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17


 209d 이보게, 설명을 추가로 포착한다는 게 차이성을 판단하라는 게 아니라 인식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라면, 앎에 관한 설명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런 설명은 그것 참 즐거운 것이기도 할 걸세. 그러니 앎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차이성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이라는 답변이 제시될 것 같네. 우리가 앎을 찾을 때, 차이성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그런 것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을 앎이라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일세.  그러므로, 테아이테토스, 앎은 지각도, 참된 판단도, 참된 판단에 덧붙여진 설명도 아닐 것이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18


 결국, <테아이테토스>에서의 논의는 참된 앎이 지각과 추론과 서술을 통해서 형상과 질료의 차이성을 밝히는 것이라는 결론과 이 결론 안의 순환구도 속에서 논의가 마무리된다. <테아이테토스>에서의 미진한 결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참된 앎'이 가리키는 바에 대한 존재론적 논의는 <파르메니데스>와 연결되며 서양 철학사에 인식론과 존재론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이들 책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테아이테토스>를 정리한 이번 리뷰와 함께 이에 대한 답은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이,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답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 ~ 1976)의 답으로 정리한 페이퍼로 짝을 맞추려 한다.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에게는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 70 ~ BC 19)와 같은 스승이 있었다면, 러셀과 하이데거는 인식론과 존재론이라는 지옥을 안내할 스승이 되줄것인가. 개인적으로는 베아트리체와 같은 존재가 더 좋겠지만, 세상일은 자신의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이니 불만은 없다...

177e 이름을 말하지 말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을 바라보게 해야 하니까요. 그 이름으로 무슨 대상을 가리키든 간에, 나라는 확실히 그 대상을 겨냥해서 입법을 하며, 모든 법을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것들로 제정합니다. 나라가 그 법을 자신에게 가능한 한 이로운 것들이라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한에서 말입니다. 나라가 다른 어떤 것을 주시하고서 입법을 할까요? 우리는 입법을 할 때, 나중의 시간에 법이 이로운 것들로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제정하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장차‘라고 하면 제대로 말하는 것이 될 겁니다. - P146

189a 어떤 것을 만지는 자는 하나의 어떤 것을 만지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인 한에서는 있는 것을 만지는 것이지? 하나의 어떤 것을 판단하는 자는 있는 어떤 것을 판단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있지 않은 것을 판단하는 자는 어느 하나도 아닌 것을 판단하는 것이네. 어느 하나도 아닌 것을 판단하는 자는 아예 판단조차 하지 않는 것이네. 그러므로 있지 않은 것은 판단할 수는 없네. 있는 것들과 관련해서든 있지 않은 것 자체를 그것 자체로 해서든 말일세. 따라서 거짓된 판단을 하는 것은, 있지 않은 것들을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거짓된 판단이란 없네. - P171

205c 일차적인 것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들이 합성되는데, 그런 일차적인 것들에 대해선 설명이 없으며, 그 까닭은 일차적인 것들 각각 그 자체가 그것 자체로 비복합적인 것이고, 또 그것과 관련해서 ‘있다‘라는 말이나 ‘이것‘이라는 말을 적용해 말하는 것조차, 그것과 이질적인 다른 것들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옳을 수 없으며, 그래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일차적인 것들 각각은 설명이 없는 것으로, 그리고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 된다고 한 것 말일세.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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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디에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어찌 《파르메니데스》를 무시했겠습니까? 실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우리가 《파르메니데스》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탐구를 한 적이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 견해를 항상 고수했다고 전해집니다. 한번 올바르게 형성되면 불변할 게 확실한 개념들을 소크라테스를 통해 알게 되자, 그는 그러한 개념들을 감각적인 것에 연관시켜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즉 개념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다른 존재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숭고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엄청난 영향입니다. 존재란 없고, 영원한 생성은 영원한 비존재 안에 있습니다.

이데아를 인정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을 야기합니다. 그 반대는 철학에 더욱 곤란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아직 젊을 때 흔히 무용하다고 여겨지고 요설로 일컬어지는 변증술을 익힐 것을 권합니다.

이 변증술적 방법은 훈련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데아론이 회의주의로 와해되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참된 생각을 우연히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물론 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에게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다만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참입니다. 정견을 이성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성의 개념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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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극장 2 - 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 하이데거 극장 2
고명섭 지음 / 한길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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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형이상학에서는 결국 존재자가 존재의 척도이자 목표이고 실현이 된다. 존재자가 존재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자를 전제하고서 이 존재자의 공통 성격으로 존재를 도출하거나, 아니면 그 존재자 전체의 근거이자 원인으로 최고 존재자를 찾거나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자 전체가 존재에 대해 우월하다는 것에 입각해 존재자 정체를 사유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 시대 이래로 니체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모든 사유는 형이상학적 사유다." 이것이 이 강의를 해나가는 하이데거의 근본 원칙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295


 고명섭의 <하이데거 극장 1>의 주제가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 ~ 1976) 의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이라면, <하이데거 극장 2>의 주제는 <니체 Nietzsche>다. 영원회귀를 통한 생성으로부터 어떤 고정된 상태로의 수렴, 권력의지라는 무한동력을 통한 변화로부터 정지상태로의 회귀는 예술과 진리에 대한 의지 양 방향으로 나타나고 이들은 서로 대립한다. 초감성적이며 보편적인 세계와 감성적이며 개별적인 세계. 니체에게 진리와 예술, 진(眞)과 미(美)는 대립한다.


 무한한 생성, 무한히 반복되는 권력의지로서 세계 곧 존재자 전체는 동일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동일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 흐름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상, 동일한 상태도 단 한 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반복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다. 세계 곧 존재자 전체가 권력의지이므로, 다시 말해 무한한 생성으로서 힘들의 바다이므로 그 무한한 생성은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무한한 생성은 최종 결과만 보면 결국 동일한 것이 영원히 회귀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동일한 것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무한한 생성은 무한한 생성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는 어떤 '고정된 상태'에 귀착하게 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252


 니체에게 플라톤-기독교적 진리는 가상이고, 예술은 생 자체를 긍정하는 참된 진리다. 그렇지만, 니체에게 진리는 그 자체로 오류이기 때문에 생의 욕구를 통한 새로운 지평에서 참된 세게와 가상 세계 모두 소멸되고 남는 것은 무(無)가 된다. 니체의 인식은 여기에서 머무르게 되고, 하이데거는 이 지점에서 니체를 '최후의 형이상학자'로 비판한다.


  니체에게 '진리를 향한 의지'는 플라톤과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세계', 초감성적인 것을 향한 의지다.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에서는 그 초감성적인 세계야말로 '참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그래서 그 '참된 세계'를 향한 의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의 세계에 대한 부정이 된다. 그러나 예술은 바로 이 세계, 이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세계, 늘 바뀌고 변하는 이 현실의 세계를 고향으로 삼는다. 니체에게는 바로 이 세계가 본래적이며 유일하게 참된 세계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264


 참된 세계가 제거됨과 동시에 참된 세계를 척도로 하는 가상 세계도 제거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세계는 '가상 세계'가 아니라 그냥 '세계'다. 그러므로 세계 곧 존재자 전체와 대립하는 것은 '참된 세계'가 아니라 '무'일 뿐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가상 세계와 참된 세계의 대립은 '세계'와 '무'의 대립으로 환원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극한의 지점에서 니체가 '호모이오시스 곧 일치로서 정초된 진리'의 최후의 형이상학적 변화 앞에 선다고 말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319


 어떤 이유로 하이데거는 니체를 '최초의 근대인' 페트라르카가 아닌 '최후의 중세인' 단테와 같은 위치에 놓았을까. 하이데거는 니체의 '무'에 '없음'과 함께 '없음'이라는 존재, '무존재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플라톤 이후 니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논의는 존재자를 존재로 정의하는 순간, 또다른 존재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잡힐 듯 빠져나가는 존재의 의미. 니체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비판지점이다. 프로이트의 구도로는 형이상학에서 정의하는 것은 의식으로 드러나는 부분이지, 무의식으로 감춰져 있는 영역을 넘어설 수 없고, 이것이 근대 형이상학의 한계가 된다. 마치,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에 만리장성 넘어 침입해왔다가 유유히 사라진 유목민족처럼, 라인강 건너 슈바르츠발트의 검은 숲속에서 로마 제국의 변경을 위협한 게르만 민족처럼 존재자로 드러나지 않는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고대 중국과 로마 제국의 오랜 고민이었던 것처럼, 형이상학의 오랜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하이데거는 무라는 것이 존재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무가 곧바로 '아무것도 없음' 곧 '단적인 무'를 뜻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의 무에는 '존재'도 들어있다. 다시 말해 무는 '존재'가 현성하는 방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여기에 니체의 형이상학이 '완성된' 니힐리즘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340


 그렇다면, 존재를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실존 - 자기를 앞질러 있음-을 통해 새롭게 정의할 수 없는 은폐된 존재의 비밀, 알레테이아가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한다. 실수의 범위 내에서 정의할 수 없는 식에 대해 복소수의 범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숨겨진 허수의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이처럼 알레테이아는 실존적 상황에서 비로소 온전하게 그 전모가 나타난다.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의 비은폐성 안으로 존재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런 비은폐성이야말로 존재 자체다." 이 대목에서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의 에포케(epoche)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에포케는 '억제/자제'라는 뜻과 함께 '시대/시기'라는 뜻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이 말을 존재가 자신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그 '역사적 국면'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존재의 에포케는 은닉된 방식으로 형이상학의 국면 국면을 형성한다. 그 형이상학의 마지막 국면이 바로 니힐리즘이 극한에 이르는 시기다. 이 마지막 시기에 주체성의 형이상학은 완성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395


 <하이데거 극장 2>에는 이외에도 하이데거이 후반시기의 삶이 그려진다. 나치와 관련된 이야기 등 여러 흥미있는 이야기들은 각자의 몫으로 돌리기로 하고, 후반기 주저 <니체>의 큰 흐름을 대강 살피는 리뷰는 이상으로 갈무리하자...


 하이데거는 '존재 사유'를 이야기한다. '존재 사유'는 존재자만을 사유하는 형이상학에 대립한다. 존재 사유를 통해 인간은 무곤궁성의 곤궁을 '존재 자체가 밖에 머물러 있음'의 운명으로 경험할 수 잇다. 존재 사유는 존재자만을 뒤쫓는 형이상학적 사유에 대립해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존재 사유는 이 형이상학적 사유를 지팡이로 삼아 자신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 존재의 진리가 환히 열리는 그 열린 터에 설 때 모든 존재자는 그 자신을 향해 해방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400



메모들에서 니체 자신이 논구한 가장 중요한 사상이 ‘권력의지‘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다. 하이데거는 이 두 가지 사상이 ‘존재자 전체의 존재‘를 부르는 두 가지 이름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권력의자가 존재자 전체의 존재 성격이라면 영원회귀는 존재자 전체의 존재 방식이라고 해석한다. 존재자 전체를 니체는 ‘세계‘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존재자 전체 곧 세계의 본질이 권력의지이며, 그 세계의 존재 방식이 영원회귀라는 것이다. - P246

이 세계 전체, 다시 말해 우주 만물을 포함하는 존재자 전체는 힘들의 바다다. 그 바다는 크기가 한정돼 있고 시간은 무한히 흐른다. 그 바다 안에서 힘들이 바닷물처럼 출렁거리고 요동치고 흘러 다닌다. 그런데 그렇게 끝없는 흐름과 요동은 그것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과거에 있었던 동일한 상태에 언젠가는 이르게 된다. 그것이 아무리 많은 시간과 세월이 걸린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 번은 동일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니체의 근본 발상이다. - P252

본질로서 진리는 하나뿐이다. 하나뿐이라는 것은 이 본질로서 진리가 모든 참된 것들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진리는 개별적인 참된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참된 것들의 보편적인 본질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보편적 본질로서 진리는 모든 참된 것들에 적용되기 때문에 ‘진리는 불변하며 영원한 것‘이라는 명제가 생기게 된다. 그런데 정말로 진리의 본질은 불변하며 영원한가? 하이데거는 본질을 개별적인 것들에 두루 일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사실로부터 ‘본질은 변할 수 없다‘는 명제가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본질이 변한다고 해서 그 본질이 두루 타당하다는 사태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P276

알레테이아 곧 그리스적 의미의 진리는 ‘비은폐성‘ 곧 존재자의 드러나 있음이다. 존재자의 드러나 있음이 곧 진리다. 그러므로 인식이란 그렇게 드러난 존재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리가 이미 드러나 있고,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리의 본질은 알레테이아이고, 그 알레테이아를 받아들이는 것이 인식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원적인 진리 개념 곧 ‘비은폐성으로서 알레테이아‘는 곧 망각됐고, 플라톤 이래로 점차로 인식이 진리를 규정하는 척도가 돼 근대에 들어와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한 것이 되고 말았다. - P308

니체의 ‘가치 사상‘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니체에게 모든 것의 근원은 권력의지다. 그러므로 가치도 권력의지가 설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권력의지는 가치를 설정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원근법적 전망‘ 곧 ‘관점‘(Perspektive)에 있다. 권력의지는 자신을 유지하고 고양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정립한다. 다시 말해 권력의지는 자기 유지와 자기 고양이라는 두 시점에 따라 전망하고 내다보면서 가치를 정립한다... 이 차기와 관련된 것 가운데 하나가 ‘도덕‘이다. 니체에게 도덕은 초감성적인 세계를 척도로 정립하는 가치 평가의 체계, 존재자의 생존 조건과 관련된 가치 평가의 체계를 의미한다. 이 도덕에서 초감성적인 것을 정립하는 모든 형이상학이 발원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 P352

니힐리즘을 본질적으로 사유하려면 형이상학을 떠나 역사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다시 말해 니힐리즘을 존재 역사의 시야에서 사유해야 한다. 존재 자체가 역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니힐리즘이라는 형태로 탈은폐한 것이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니힐리즘의 본질은 인간의 사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사태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존재 자체의 사태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니힐리즘은 인간 본질의 사태이자 그 본질이 나타난 것으로서 인간의 사태가 된다. 이것이 니힐리즘의 존재사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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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극장 1 - 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 하이데거 극장 1
고명섭 지음 / 한길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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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데거는 '물음의 형식적 구조'를 세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올바른 물음은 첫째, 물어지고 있는 것(das Gefrgte), 둘째, 물음이 걸려 있는 것, 다시 말해 물을 때 겨냥하는 것(das Befragte), 셋째, 물음이 밝히려 하는 것(das Erfragte)을 지니고 있다. 이 세 가지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물음의 형식적 구조'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첫째, 물어지고 있는 것은 물음의 대상 곧 '존재'다. 둘째, 물음이 걸려 있는 것은 그 존재를 해명할 때 본보기가 되는 존재자를 가리킨다. 그것이 바로 인간, 하이데거가 쓰는 용어로 하면 '현존재'다. 셋째, 물음이 밝히려는 것은 바로 '존재의 의미'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존재 물음의 목표라고 이야기한다. 요컨대 '현존재'를 분석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12


 고명섭의 <하이데거 극장 1>에는 전기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 ~ 1976) 사상과 이 시기 그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 중에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와의 사랑도, 카시러(Ernst Cassirer, 1874 ~ 1945)와 치룬 다보스 결투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개인적으로 <하이데거 극장 1>에서 하이라이트는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에 대한 해설이라 생각된다. 저자는 먼저 존재, 존재자, 존재의 의미를 설명하며 <존재와 시간>의 큰 틀을 설명한다.


 존재는 존재자를 떠나 따로 있지 않고, 존재자도 존재를 떠나 따로 있지 않다.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인간의 존재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의 삶은 우리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존재 물음이 밝히려는 것이 바로 '존재의 의미'다.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의미란 '존재가 가리키는 바'를 뜻한다. 하이데거의 논의를 미리 앞당겨 이야기하자면, 존재의 의미는 '시간'이다. 인간을 예로 들면, 인간의 존재는 곧 시간을 사는 것을 뜻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13


 존재자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의미. 존재자의 존재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인간은 현존재로 지칭된다. 존재가 드러나는 곳이 인간이라는 현존재라면, 존재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는 존재자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 


 진정한 현상 곧 현상학적 현상은 칸트의 선험철학 지평 안에서 보면 '공간과 시간' 같은 직관의 형식을 가리킨다. 공간과 시간이 드러나 있어야 거기에서 존재자들이 존재자로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존재자들을 직관하는 이 감성적 형식은 곧 '공간과 시간'이야말로 진정으로 현상학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간과 시간이 바로 현상학적 현상 곧 존재자의 존재인 셈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31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가리켜 현존재(Dasein)라고 부른다(p314)... 하이데거가 다자인을 인간을 규정하는 말로 가져다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바로 '존재(Sein)의 거기(Da)'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란 존재가 드러나는 자리, 존재의 장소라는 뜻이다. 인간이란 정신도 아니고 의식도 아니고 주관도 아니고, 존재가 드러나는 자리 곧 현-존재(Da Sein)인 것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15 


 은폐되어 있던 존재는 존재자의 말을 통해 비로소 드러나게 되고, 현존재의 독특한 있음 - '실존'(Existenz) - 을 통해서 비로소 존재의 의미가 밝혀지게 되지만, 각기 다른 현존재가 모두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는 언제나 어디서나 각자 자기로 있다. 각기 다른 현존재는 다른 어떤 인간으로도 대체될 수 없지만, 이러한 실존은 세인에 의해 은폐되고, 비실존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는 왜 발생하는가? 하이데거는 '공동존재에 몰입'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삶이 모두 실존적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가 존재를 통해 온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는 존재자로서의 현존재가 독립된 모나드와 같이 폐쇄된 개체가 아니라 세인(世人, das Man)과의 관계 속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하이데거가 주목하는 로고스는 사태를 밝히는 말이다. 그런데 로고스는 말로써 드러냄이기 때문에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여기서 참, 진실, 진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가 알레테이아(aletheia)다. 알레테이아의 본래적 의미는 '사태 자체의 드러나 있음'이다. 동사형인 알레테우에인(aletheuein)은 '참말로써 사태를 드러냄'을 뜻한다. 그러므로 알레테우에인으로서 로고스는 '말을 통해 존재자를 은닉돼 있는 것을 말함을 통해 드러냄이다. 알레테이아는 '사태 자체가 있는 그대로 드러남'을 가리킨다. 그것이 진리의 일차적인 의미이다. '발언함 곧 판단함'에서 입증되는 진리는 이차적인 진리일 뿐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33


 현존재는 대부분의 경우에 이 공동존재에 몰입해 있는데, 그렇게 몰입해 있기 때문에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하이데거가 주목하는 사태다. 각각의 현존재는 공동존재 안에서 '자기 자신이 아닌 자'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 '자기 자신이 아닌 자'를 하이데거는 세인(das Man)이라고 부른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61


 세인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현존재. 비실존적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문제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죽음'을 통해서다. 존재자에게 근원적인 불안을 안겨주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세인은 '모호한 확실성'을 통해 진리를 은폐하고, 존재자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며 살아가고 있다. 알레테이아는 은폐되었다. 세인은 존재자의 유한성을 은폐하고, 존재자에게 비실존적 삶을 강요한다.


 세인은 말한다. "죽음은 확실히 온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이 '하지만'이라는 말로써 세인은 죽음에서 확실성을 빼버린다. '당장은 아니다'라는 이 해석을 통해 세인은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는다. 죽음은 '나중에 언젠가'로 미루어진다. 이렇게 죽음이 들이닥치는 그 '언제'를 규정할 수 없다는 뜻의 '무규정성'을 자기 편할 대로 해석함으로써 세인은 죽음의 확실성을 은폐하고 만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410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존재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현존재의 결단을 말한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죽음을 피하지 않고 직면했을 때, 존재자를 유한하게 만드는 시간의 한계성은 극복되고, 존재자를 통해 존재의 진리가 온전하게 드러나게 된다.


 결단성이란 양심의 부름에 따라 살겠다는 결의/결심을 뜻함과 동시에 그런 결단 속에 현존재 자신과 세계가 새롭게 개시됨, 새롭게 열려 밝혀짐을 뜻한다. 이 새로운 개시성(Erschlossenheit, 개시돼 있음, 열려 밝혀져 있음)이 바로 결단성이다. 개시성이라는 말이 닫힌 것을 열어 밝힌다는 뜻을 품고 있듯이, 결단성이라는 말도 닫힌 것을 열어젖힘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개시성(열려 밝혀져 잇음)을 바로 '근원적인 진리'라고 부른다. 개시성이 근원적인 진리인 것은 진리 곧 알레테이아가 비은폐성 곧 '은폐에서 벗어나 있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429


 결단이 진정으로 본래적인 결단이 되려면, 죽음으로 앞질러 달려가봄이라는 시험과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 죽음을 향해 앞질러 달려가봄은 모든 우연적이고 비본래적인 것들을 모조리 떨쳐내버리는 극한의 시험이고 시련이다. 이 시련과 시험을 통과한 결단성만이 진정한 결단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결단을 통해서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이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433


 현존재는 회피하는 방식으로든 마주보는 방식으로든 자신의 죽음과 언제나 대결하고 있다. 죽음과 언제나 대결하고 있다는 바로 이 사실에서 현존재의 전체성을 확보할 가능성도 생겨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407


 <하이데거 극장 1>에서 언급된 <존재와 시간>의 내용을 거칠게 정리했지만, 사실 많은 부분이 빠져 있어 리뷰에 언급된 내용만으로는 논리적 비약이 있는 듯한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한계점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뼈대 위에 <존재와 시간>에 대한 다른 해설서로 살을 입히면서 이해를 깊게 한다면, <존재와 시간>의 어려움도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


 글을 마치기 전에, 어제 있었던 이태원 할로윈 참사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154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한 이 참사를 접하면서 우리가 슬픔을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주변의 지인이 희생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죽음이 당장 우리에게 닥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의 일처럼 방관해야 할 것인가. 하이데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세인이 우리에게 죽음에 대해 침묵하고, 애도할 때라고 강요할 때라도 우리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고, 죽음을 당할 수 있었음에 대해 시간과 공간의 유한성을 넘어 공동존재로서 그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직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실존'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월호 사건을 통해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방송에 수많은 승객들이 죽음을 당했고, 애도할 때라는 말에 애도만 하다가 불과 몇 년만에 '지겹다'와 '시체팔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이 우리에게 지금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면, 우리에게 커다란 슬픔에 대한 직면을 하고자 하는 마음 또한 현존재의 실존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

현존재의 존재를 실존으로 이해할 때, 그 실존을 규정하는 범주들을 가리켜 하이데거는 특별히 ‘실존범주‘(Existenzialien)이라고 부른다. 실존범주는 일반 범주(Kategorie)에 맞서 현존재의 실존적 특성을 규정하는 개념을 말한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실존 양상을 규정하는 범주를 따로 적시해 실존범주라고 지칭한다. 또 이런 실존범주에 따라 인간의 실존을 분석해 들어가는 것을 ‘실존론적 분석‘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을 통해 밝혀지는 ‘존재의 의미‘는 결국 ‘시간성‘(Zeitlichkeit)으로 드러나게 된다. 시간성이란 ‘장래를 향해 자신의 가능성을 기투하고 이 가능성의 빛 아래서 과거를 반복하고 재해석하면서 현재를 열어 밝힌다‘는 현존재의 시간적 존재 양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 P322

현존재는 존재함과 동시에 세계를 열어 밝히고 그 세계 안에 세계 내부 존재자들을 품고 있다. 현존재가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은 현존재와 분리된 세계가 따로 있고, 인간이 그 세계라는 공간 안에 주관이나 의식으로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존재함과 동시에 세계를 열면서 세계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존재의 ‘세계 안에 있음‘은 주관과 객관의 분리 이전의 사태다. 인간이 세계 안에 있다는 이 원초적 사태에 근거를 두고서 그 위에서 주관과 객관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자신의 바깥에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 안에 있다‘는 말로 요약한다. - P345

‘세인‘은 ‘일상적인 현존재‘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제시되는 사람이지만, 그 세인은 아무도 아닌 자다. 그렇게 아무도 아닌 자에게 모든 현존재가 자기를 내맡겨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무도 아닌 자인 세인이 일상성의 실질적인 주체로, 주인으로 드러난다. 세인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현존재는 비자립적이고 비본래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다. 현존재가 본래적인 자기를 찾으려면 이 세인-자기를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된다. 비본래적인 세인-자기를 극복해 본래적인 자기를 찾는 것, 이것이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현존재의 과제다. - P365

‘실존‘이 ‘자기를 앞질러 있음‘ 곧 ‘자기의 가능성을 기투함‘을 가리킨다면, ‘현사실성‘은 ‘이미 안에 있음‘ 곧 ‘던져져 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세계 내부 존재자에 몰입해 있음‘에서는 ‘퇴락‘이 표현돼 있다. 하이데거는 이 세 가지 구조 계기를 죽음의 현상에서 그려본다. - P407

하이데거는 선택의 ‘비성‘에서 인간의 ‘자유‘를 찾아낸다. 자유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 가능성들을 향해 열려 있음을 뜻한다. 자유란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단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신의 몫으로 짋어짐을 뜻한다. "자유는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다른 가능성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을 견뎌내는 데 있다."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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