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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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의 평화론은 국제법이나 국제정치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공화국은 칸트의 역사철학 근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p223)... 각국에서 일어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은 국가들을 '위로부터' 봉(封)함으로써만 단절을 면합니다.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의 운동의 연계에 의해 새로운 교환양식에 기초한 글로벌 커뮤니티(어소시에이션)가 서서히 실현됩니다. 물론 그 실현은 용이하지 않지만 결코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 p225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 ~ )은 <세계공화국으로>를 통해 현재 인류가 직면한 과제 전쟁, 환경파괴, 양극화 문제를 해결한 유일한 길이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가 <영원한 평화>에서 제시한 '자연의 계획이 뜻한 인류의 완전한 연합'으로 가는 길임을 말한다. 그리고 쉽지 않은 그 길을 가기위한 여러 난제들과 해결방안이 본문의 중심을 이룬다. 그렇다면, 세계공화국으로 가는 길을 막는 장애는 무엇인가.


 국민국가는 세계자본주의 안에서 그것에 대응하며 또 그것이 초래한 모순들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자본제경제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반드시 경제적 격차와 대립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네이션은 공동체와 평등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자본제가 초래하는 격차를 해결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리고 국가는 그것을 다양한 규제나 세(稅)의 재분배에 의해 실현합니다. 자본제경제도 네이션도 국가도 각각 다른 원리지만, 여기서 그것들은 서로 보충이라도 하듯 접합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자본=네이션=국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 p16


 고진은 마치 그리스 신화의 머리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Cerberus)처럼 '자본=네이션=국가'의 구조로 이같은 어려움을 설명한다. 자본(資本)이 추구하는 독점을 통한 이윤, 국가가 갖고 있는 중앙집권적 권력은 근대민족주의가 제시하는 네이션(nation)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교집합을 갖는다. 자본의 이윤극대화라는 지대 추구는 국가의 안정적인 시스템 유지를 위한 권력과 충돌할 법도 하지만, 이들은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 이같은 서로 다른 체제의 공존(共存)이 가능한 것은 바로 상상속의 공동체 '네이션'을 통해서다. 네이션이 마치 보편종교와도 같이 이들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시하면서 이들은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어 시만과 국민에게 하나의 억압체로 작동한다. 고진은 이 구조가 존속하는 한 현재 인류가 직면한 과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바라본다.


 나는 최초에 소위 네이션=스테이트란 자본=네이션=국가라고 서술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시민사회=시장경제(감성)와 국가(오성)가 네이션(상상력)에 의해 엮여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보로메오의 매듭을 이룹니다. 즉 어느 하나를 없애면 무너지는 매듭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 p180


 그렇다면, 이들 보로메오의 매듭을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Magnus, BCE 356 ~ 323)가 끊어버린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처럼 만드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 부분에서 고진은 프롤레타리아의 양면성(兩面性)에 주목한다.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프롤레타리아.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는 잉여인력으로 화폐와의 교환과정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하지만, 소비(유통)과정에서 노동자는 화폐를 가진 소비자로서 매출을 좌우하는 주역이 된다. 심지어 그는 주식시장에서는 회사의 주인이 되기도 한다. 노동자 1명의 힘은 미약하지만, 그가 가입한 연기금펀드는 자본위에 군림한다. 이런 관점에서 고진은 생산관점이 아닌 소비관점에서의 변화를 말한다. 그리고, 그 같은 변화로 국가를 움직일 수 있다면 이상적인 세계공화국으로의 길은 열릴 것이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는 자본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자는 유통과정에서 소비자로서 나타납니다. 그때 그들은 자본에 대해 우월한 입장에 서게 됩니다(p161)... 소비자란 프롤레타리아가 유통의 장에서 나타났을 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비자 운동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고, 또 그와 같은 것으로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 p162


 <세계공화국>에서 고진은 프롤레타리아의 이중성에 주목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는 것으로 생각된다. 큰 틀에서 보자면 고진은 근대가 의미하는 이전 시대와의 단절의 극복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근대 이전의 언어와 근대 이후의 언어가 달라지고,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e)가 분화하며, 민중과 그들의 대표가 나뉘면서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 공화정의 뜻하는 바가 달라지면서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고, 새로운 것이 이들을 대체하는 과정이 근대화의 큰 흐름이었다면,  이를 극복하고 본연의 의미를 찾는 것이 바로 세계 공화국으로 가는 큰 방법론이 아닐까를 생각해 본다. 이에 대해서는 저자의 다른 책들 <트랜스크리틱>, <역사와 반복>, <네이션과 미학> , <세계사의 구조>를 통해 더 깊게 들어가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마르크스가 생각하기에 대표하는 자(언설)와 대표되는 자(경제적 계급들)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근대국가를 특징짓는 보통선거에 의한 대표제(의회)의 특질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계급들이 자신들의 원래 대표에 등을 돌리고 보나파르트에게서 그들의 대표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 p135

우리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프랑스혁명에서 주창된 자유/평등/우애는 세 가지 교환양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자유는 시장경제에서의 상품교환, 평등은 국가에 의한 재분배, 우애는 호수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본=네이션=국가로 귀결되는 것이었습니다. - P189

자본과 국가 중에 어느 쪽이 근원적인가라는 물음은 우문(愚問)입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기초적 교환양식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또 상호의존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한쪽이 다른 쪽을 전면적으로 폐기하는 일은 없습니다. 국가 없이 자본주의는 없으며, 자본주의 없이 국가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국가와 자본의 ‘결혼‘이 생겨난 것은 절대주의 국가(주권국가)에서입니다. 제국주의 문제는 그곳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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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는 세계자본주의 안에서 그것에 대응하며 또 그것이초래한 모순들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자본제경제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반드시 경제적 격차와 대립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네이션은 공동체와 평등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자본제가 초래하는 격차를 해결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리고 국가는 그것을 다양한 규제나 세(稅)의 재분배에 의해 실현합니다. 자본제경제도 네이션도 국가도 각각 다른 원리지만, 여기서 그것들은 서로 보충이라도 하듯 접합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자본=네이션=국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 P16

그런데 ‘생산‘은 일반적으로 폐기물을 무시하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성만이 평가됩니다. 헤겔과 같은 철학자가 파악해온 생산이란 그와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헤겔의 사고를 관념론이라고 공격한 마르크스주의자는 실은 생산을 유물론적으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생산이 폐기물을 수반한다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생산을 충분히 긍정적으로만 파악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 것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또는 계급지배라고 말입니다. - P40

 화폐와 신용에 의해 짜여진 자본제경제시스템은 경제적 하부구조이기는커녕 신용에 의해 존재하는 종교적 세계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것을 국가나 네이션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언뜻 보면 이데올로기적 또는 관념론적으로 보이지만, 자본제와 마찬가지로 기초적인 교환양식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이데올로기나 표상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근대의 자본제경제, 국가, 네이션은 기초적인 교환양식의 변형과 접합에 의해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것입니다. - P43

또 절대왕정은 세(稅)의 재분배에 의해 일종의 ‘복지국가‘를 가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국가의 실체인 상비군과 관료기구는 시민혁명(부르주아혁명)에 의해 인민주권이 성립된 후에도 존속합니다. 즉 약탈재분배라는 교환양식은 근대국가의 핵심으로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럼 호수적 교환(A)은 어떨까요?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에서농업공동체는 상품경제의 침투에 의해 해체되었지만 다른 형태로 회복되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것이 네이션입니다. 네이션은 호수적 관계를 기본(base)으로 한 ‘상상의 공동체입니다.  - P49

이상을 정리해보면 세계사는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중앙집권적 제국이 먼저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성립하고, 그바깥(주변)에서는 중핵 문명이나 제도를 받아들여가면서도 중심부의 집권적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고전고대적인 도시국가와 제국, 그리고 그 주변에 봉건적이라고 불리는것이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머지않아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이 상비군과 관료기구를 갖춘 절대주의국가입니다. - P75

그렇다면 화폐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상품 5만이 등가형태에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런 ‘단순한 가치형태‘에서시작하여 확대된 가치형태, 다시 ‘일반적 가치형태‘ 그리고 화폐형태로 발전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보여주었지만, 화폐는 말하자면 상품 가 다른 모든 상품에 대해 배타적으로 등가형태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즉 한 상품만이 다른 모든 상품과 교환가능하게되었을 때 출현하는 것입니다.  - P85

니체의 생각은 보편종교의 출현이 주술=호수적 교환을 폐기하고 화폐에 의한 교환이 지배적이 된 시점에서 생긴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가치형태론으로 제시한 것은 그 과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즉 단순한 가치형태에서 시작하여 일반적 등가형태 또는 화폐형태가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 P105

이처럼 보편종교는 상인자본주의. 공동체 · 국가에 대항하여, 호수적(상호적)인 공동체 즉 어소시에이션을 지향하는 것으로서나타났던 것입니다. 같은 것을 불교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상인과 여성 사이에서 퍼졌습니다. 후에 여성을 죄 많은존재라고 여기는 게 불교라고 생각되게 되었습니다만, 그것은 불교 이전부터 있던 수행자들의 통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 P108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절대주의 국가에서는 그때까지 상호 대립하고 있었던 다양한 세력이 억압되고 전제적 주권자의 신민으로서 동일화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의 폭력성이 분명해집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절대주의 국가질서는 새로운 경찰기구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경찰폭력이라는 관념이 성립합니다. 그러나 시민혁명 이후 국가질서는 더 이상 노골적인 폭력에 의해 유지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국민에 의한 자발적 동의와 복종에 의해 유지됩니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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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6
가라타니 고진 지음, 윤인로.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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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책에서 도덕과 윤리라는 말을 구별하려고 했습니다. 칸트는 일관되게 도덕적 실천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그가 도덕적이나 실천적이라는 말로 뜻하고자하는 것이 통상적인 의미와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것을 윤리라고 부르고 도덕이라는 말은 통상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즉 도덕이라는 말을 공동체적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윤리라는 말을 '자유'라는 의무와 관계하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당부의 말씀을 드리자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승인된 정의가 아닙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윤리 21> , p14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 ~ )은 <윤리 21>에서 '전후(戰後) 책임' 문제,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 문제에 대해 논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도덕(道德)과 윤리(倫理)를 분리하고, 윤리를 자유(自由)와 연결시키며, '자유로운가'로부터 비로소 책임(責任) 소재를 논한다. 그렇다면, 고진에게 도덕과 윤리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좋은 사원이 되라, 좋은 아버지가 되라는 것이 세상의 도덕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에 반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그와 같은 도덕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으로 오랜시간 괴로워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의무'에 반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윤리 21> , p102


 고진은 <윤리 21>에서 도덕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범으로, 윤리를 보다 인류적 차원에서의 기준, 가치로 바라본다. 칸트의 무조건적인 정언명령(定言命令)에 따라 생겨난 자유와 이러한 자유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는 (결과적으로) 몰랐다고 할지라도 (동기적으로) 책임이 있다. 고진이 <윤리 21>에서 결과적으로 인지(認知)여부를 문제시 하지 않는 것은 인지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관계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관계성을 걷어버린 후 고진은 직접적으로 '윤리-자유-책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묻는다. 고진에게 이들은 하나의 집합(set)이다.


 '자유'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현실에서 행한 일을 "자유로워지라"는 의무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꿔 말하면 '책임'은 바로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윤리 21> , p116


 칸트는 확실히 "자신의 격률이 보편적인 법칙에 합치하도록 행동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본래 그것은 행위지침이 아닙니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우리는 행위에서 자유(자기원인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하려고 해도 잘못을 저지르고, 원하는 대로 실현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도 우리가 그 일에 책임감을 갖는 것은 실제로는 자유가 아니어도 자유인 것처럼 간주할 때입니다. 칸트의 "우리는 행위자 스스로가 이런 행위 결과의 계열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한 것처럼 간주해도 좋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저지르곤 합니다. 그렇다면 몰랐을 경우에는 책임이 없을까요 그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책임이 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윤리 21> , p80


 고진은 이러한 구도 속에서 전후 일본의 책임 문제를 거론한다. 일본 제국의 테두리에서 모두가 도덕적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규범을 준수하며 위로부터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며 각자의 책임을 부인하며, 책임은 아래로부터 위로 (bottom up) 끊임없이 전가되었다. 그리고, 전후 냉전(冷戰) 구도 아래에서 일왕 - 일본 제국의 모든 죄를 짋어진 어린 양 - 은 '면죄부'를 받으며, 전후 일본은 아무런 책임을 묻지도, 지지도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전후 첫 수상은 황족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淵宮秘였는데, 그는 수상으로서의 첫 라디오 방송에서 '일억총참회'를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전쟁의 책임을 일부 지도자 탓으로 돌리지 말고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짊어지고 반성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최고지도자의 책임을 전혀 묻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의 책임을 묻는 것이 가능할까요. 전후 도쿄재판에서 전쟁범죄에 대해 책임추궁을 당한 군인, 정치가 다수는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했습니다.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명령이 천황의 이름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이 명확합니다. 그런데 그런 천황이 면책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모두가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것을 '무책임의 체계'라고 부르고 그 원인을 해명하려고 했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윤리 21> , p158


 예를 들어 나는 소를 죽이지 않지만 비프스테이크를 먹습니다. 나는 군사적·경제적 제국주의에 반대하지만, 그것을 통해 얻는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자기가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라는 차이는 괄호에 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는 인간이 죄가 많다는 이유로 모든 인간을 용서합니다. 실제로 간음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실제로 죽이는가 죽이지 않는가라는 차이는 절대성 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윤리도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윤리 21> , p113


  가라타니 고진은 <윤리 21>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의 이론을 바탕으로 일본의 전쟁 책임이 일왕에게 있음을 규명한다. 이와 함께,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세계사적 사건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함께 말한다. 세계사 구조에서의 재검토. 이에 대해서는 그의 다른 저작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종군위안부 문제도 옛날부터 있었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에서 나온 페미니스트운동이 제기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무시되었기 때문에 직접 일본에 가져와서 일본의 페미니스트가 일거에 커다란 문제로 만든 것입니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의 남성(가부장제)도 비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기존에 문제가 되었던 한일관계의 연장선상에서 다루어졌지만, 거기에는 이질적인 물음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여성의 관점에서 전쟁을 재검토하는 것, 세계사를 재검토하는 것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윤리 21> , p188


 역사의 재검토revisionism라는 것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는 없었다, 남경대학살은 없었다와 같은 사고가 리비저니즘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책임'을 소거하는 방향에서 이야기되는 재검토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의미에서 역사의 재검토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배 하에 있었던 자의 눈에 비친 역사가 있고, 여성의 눈에 비친 역사가 있고, 동성애자의 눈에 비친 역사가 있습니다. 아직 그것들은 소리가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서서히 침투하는 것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윤리 21>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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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23-03-20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같은 시대에 이 책에 나오는 아무런 책임을 묻지도 지지도 않는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이 와 닿네요

겨울호랑이 2023-03-20 20:35   좋아요 0 | URL
네, 책이 나온 시점인 90년대보다도 후퇴한 역사인식과 대응에 많이 어두운 요즘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에서 도덕과 윤리라는 말을 구별하려고했습니다. 칸트는 일관되게 도덕적 실천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그가 도덕적이나 실천적이라는 말로 뜻하고자하는 것이 통상적인 의미와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것을 윤리라고 부르고 도덕이라는 말은 통상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즉 도덕이라는 말을 공동체적 규범이라는의미로 사용하고, 윤리라는 말을 ‘자유‘라는 의무와 관계하는의미로 사용합니다. 당부의 말씀을 드리자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승인된 정의가 아닙니다.  - P14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도덕성 · 윤리성과 만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키르케고르라면 윤리A와 윤리B라고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는 세상(공동체)이 부과한 선악의 기준입니다. 다른 하나는 도덕성을 ‘자유‘에서 찾는 사고입니다. 칸트가 제기한 사고는 후자입니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동일한 도덕성, 책임, 자유라는 말이 대립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 P38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원인을 찾으면 부모, 학교, 환경, 현대사회와 같은 것으로 소급하게 됩니다. 그결과 그런 행동을 한 이의 책임을 묻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그렇게 되면 갑자기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인이 어떻든간에 그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요. 그 결과 여러 원인에 대한 해명은 잊히고 맙니다. 원인을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원인은 철저하게 추궁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사자의 책임문제와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 P44

아이를 아무리자유롭고 평화주의적으로 키워도 공격성은 남습니다. 중요한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물론 인식한다고 해서 사태가 바뀔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잘못된 대처나 환멸이나 좌절은 없어질 것입니다. 요컨대 책임이라는 것과 인식이라는 것을 구분하여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 P54

칸트는 확실히 "자신의 격률이 보편적인 법칙에 합치하도록 행동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본래 그것은 행위지침이 아닙니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우리는 행위에서 자유(자기원인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하려고 해도 잘못을 저지르고, 원하는 대로 실현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도 우리가 그 일에 책임감을 갖는 것은 실제로는 자유가 아니어도 자유인 것처럼 간주할 때입니다. 칸트의 "우리는 행위자스스로가 이런 행위 결과의 계열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한 것처럼 간주해도 좋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저지르곤 합니다. 그렇다면 몰랐을 경우에는 책임이 없을까요 그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책임이 있습니다. - P80

좋은 사원이 되라, 좋은 아버지가 되라는 것이 세상의 도덕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에 반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그와 같은 도덕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으로 오랜시간 괴로워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의무‘에 반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P102

예를 들어 나는 소를 죽이지 않지만 비프스테이크를 먹습니다. 나는 군사적·경제적 제국주의에 반대하지만, 그것을 통해 얻는 생활수준을 누리고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자기가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라는 차이는 괄호에 넣어야합니다. 그런데 종교는 인간이 죄가 많다는 이유로 모든 인간을 용서합니다. 실제로 간음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실제로 죽이는가 죽이지 않는가라는 차이는 절대성 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윤리도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 P113

 ‘도덕법칙‘을 알고있어도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행할지 어떨지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거기에 자유로운 의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자유의지로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우리가 모르는 원인들에 의해 규정되고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자유로워지라"는 도덕법칙을 알고 있는 것처럼 간주할 때에만 존재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정말 몰랐는가‘와는 무관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여러 원인들을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헤겔처럼 실제로 있었던 일을 합리화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 P118

그런데 그것은 정말로 ‘죽은 대중의 목소리‘ 일까요. 천황의 전쟁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입니다. 그것은 죽은 자의 의지를 대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 P133

야스퍼스는 뉘른베르크재판을 ‘형사적 책임‘의 문제로 간주하고, 그 다음으로 정치적 책임, 도덕적 책임하는 식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그렇게 간단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형사적 책임‘을 충분히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후 일본의 ‘전쟁책임론이 항상 애매하고 불투명하게 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 P153

오늘날 사료적으로 명확한 사실은 전쟁 시기의 천황은 단순히 꼭두각시 인형도 평화를 애호하는 입헌군주도 아니었고 도리어 전쟁과정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천황 자신이 지위보전을 위해 그것을 획책했습니다. 전쟁 말기 그것은 ‘국체의 수호‘로 표현되었는데, 결국 천황제와 천황개인의 지위 수호가 당시 권력의 최대 목표였습니다.  - P157

전후 첫 수상은 황족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淵宮秘였는데, 그는 수상으로서의 첫 라디오 방송에서 ‘일억총참회‘를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전쟁의 책임을 일부 지도자 탓으로 돌리지 말고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짊어지고 반성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최고지도자의 책임을 전혀 묻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의 책임을 묻는 것이 가능할까요. 전후 도쿄재판에서 전쟁범죄에 대해 책임추궁을 당한 군인, 정치가 다수는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했습니다.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명령이 천황의 이름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이 명확합니다. 그런데 그런 천황이 면책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모두가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것을 ‘무책임의 체계‘라고 부르고 그 원인을 해명하려고 했었습니다.  - P158

덧붙여 일본은 조선이나 대만, 만주 등을 식민지로 만들고동아시아 일대를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날 영국이나 프랑스등이 행한 식민지지배는 문제 삼지 않으면서 일본과 같은 ‘후진‘ 제국주의국가의 그것만을 ‘침략‘으로서 비난하는 것은 기묘하지 않은가. 사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서양의 식민지주의에 대한 책임이 문제시되는 시대가 머지않아 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으로 일본의 죄를 없애주는 것이 아닐뿐더러 서양 사람들의 원한이나 보복의 문제도 아닙니다. 세계사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국가‘에 근거하여 행동해온 지난 인류사를 반복해서는 안 되며, 그때 각 나라사람들은 각국의 행위를 주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P187

역사의 재검토revisionism라는 것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는 없었다, 남경대학살은 없었다와 같은 사고가 리비저니즘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책임‘을 소거하는 방향에서 이야기되는 재검토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의미에서 역사의 재검토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배 하에 있었던 자의 눈에 비친 역사가 있고, 여성의 눈에비친 역사가 있고, 동성애자의 눈에 비친 역사가 있습니다. 아직 그것들은 소리가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서서히 침투하는 것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P188

하지만 선진국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후진국에게 경제성장을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더구나 대재해는 환경오염에 책임이 없는 후진국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날 것이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합의‘를 필요로 합니다. 덧붙이자면 위기를 체험하는 것은 오히려 아직 태어나지 않은사람들입니다. 살아가고 있는 성인의 ‘행복‘만을 생각하고 그들사이에 이루어진 ‘합의‘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윤리성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타자와의 관계에도 존재합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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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이 어떤 고상한 주장을 떠들든 삶을 지탱하고 전진시키는 근본 원리는 힘, 힘의 느낌, 힘의 느낌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을 니체는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상해지고, 고귀해지고, 우월해지려는 인간의 의지도 역시 힘의 원리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일까. 니체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1881년 8월 6일을 기점으로 하여 니체 사상의 삶이 그 전과 그 후로 나뉜다. "그날 나는 실바플라나 호수의 숲을 걷고 있었다. 수를레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피라미드 모양으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옆에 나는 멈추어 섰다. 그때 이 생각이 떠올랐다."《이 사람을 보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절 이때 떠오른 생각이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에서 ‘전 유럽적 사건’이라고 지칭한 ‘동일한 것(동일자)의 영원회귀’ 사상이다. 니체의 나머지 삶은 이 사상을 해명하는 데 바쳐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원회귀 사상이 니체의 삶과 사유에 끼친 영향은 심대했다.

이 메모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문장을 뽑아내면, "오, 사람아! 너의 삶 전체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되풀이하여 다시 거꾸로 세워지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끝날 것이다"가 될 것이다.

영원회귀 체험 이전에 출간된 《아침놀》이 불완전한 책으로 느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새 책을 써서 영원회귀 사상을 제대로 알려보자. 그런데 이 과업을 떠맡게 되는 것이 1883년부터 쓰게 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고, 니체는 그보다 먼저 다른 책을 써 《즐거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한다.

니체가 신의 죽음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그것은 니힐리즘(허무주의)의 도래다. 신이 사라지면 신을 근거로 삼아 성립됐던 가치들이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삶의 의미를 지탱하는 토대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 니체의 진단이다. 신의 죽음이라는 사태는 이렇게 인간의 삶에 방향을 제시하고 살아갈 힘을 부여했던 것의 사멸을 의미한다.

지배자가 되고 소유자가 되어라. 그게 될 수 없다면 도덕 따위에 매이지 말고 정복자나 약탈자가 되어라. 이 대목을 윤리적으로 순화시켜 읽기에는 니체의 문장의 강도가 너무 세고 강렬하다. 이 문장들에서 니체가 나중에 강조하게 될 ‘권력의지’를 읽어내는 것이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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