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세계를 없애버리면 ‘가상 세계’, 곧 이 현실, 이 현상 세계만 남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도 사라져버린다는 것, 이것이 니체의 통찰이다. 참된 세계, 신의 세계, 절대자의 존재를 통해 우리는 이제껏 이 현실 세계의 삶에 의미를 구했고 이 삶에 가치를 부여했는데, 그 참된 세계가 사라지면, 이 세계의 의미도 가치도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앙이고 공포이고 저주다. 니체의 철학은 바로 여기서 다시 출발하는 철학이다.

니체의 주장은 "도덕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내가 철학자들에게 선악의 저편에 서고, 도덕 판단이라는 환상을 뒤로 넘겨버려야 한다고 요구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요구는 나에 의해 최초로 정식화된 통찰, 도덕적 사실이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에서 비롯된다."《우상의 황혼》, ‘인류를 ‘개선하는 자들’’, 1절

니체가 머릿속에 그리는 자유로운 인간은 자유롭게 삶을 음미하고 즐기는 단순하고 소박한 자유인이 아니다. 니체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인간은 잔인한 전사다. 그는 복지에 반대한다. 천민과 약자를 계속 살려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호전성과 잔인성이 니체 철학을 구성하는 주요한 정조임을 부정할 수 없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짤막한 말로 니힐리즘의 본질을 집약적으로 드러냈는데, 그때의 니힐리즘이란 "초감성적인 것의 지배력이 쇠퇴하고 소멸함으로써 존재자 전체가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상실해가는 저 역사적인 과정"을 말한다.

《안티크리스트》에서 흥미로운 것은 니체가 실존 인물 예수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데 반해, 예수의 가르침을 종교로 세운 바울로에 대해서는 한없이 적대적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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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주의가 어떤 것인지 대략의 윤곽을 보여주는 것으로 니체가 존경했던 문화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의 서문을 들어볼 수 있다. 부르크하르트는 서문에서 이 책의 서술 내용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관점에서 본 해석일 뿐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니체에게 진리란 무엇인가. 니체는 유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란 그것 없이는 특정한 종의 살아 있는 존재들이 더 이상 살지 못할, 그런 오류의 한 양식이다." 이 문장에서 니체는 진리란 일종의 오류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어떤 진리도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일 수 없기 때문에, 실상 어떤 관점에서, 어떤 해석에서 진리로 받아들여진 것,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오류의 일종인 것이다. 그런데 이 오류가 우리 삶에 필수 불가결한 것, 절대적으로 유용한 것이어서 진리로 간주되고 신봉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데카당스란 무엇인가? 니체에게 데카당스란 강한 인간에게서 힘을 빼앗고, 약한 인간을 승리하게 만드는 모든 경향이다. 강자의 권력의지를 부식시키고 부패시키는 약자의 도덕, 약자의 사상이 바로 데카당스의 핵심이다. 퇴폐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문란하고 비도덕적인 삶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이고 양심적이고 선한 삶이 데카당스의 핵심에 들어 있다. 결정적으로 그것은 기독교의 최고 덕목인 ‘연민’, 곧 약한 자들을 껴안는 마음이다.

니체가 말하는 우상이란 무엇인가.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우상’을 가리켜 "이상을 표현하는 내 단어"‘서문’, 2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니체는 사람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우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모세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를 우상으로 섬겼듯이 지금 사람들이 이상을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상이 우상일 뿐임을 폭로하는 작업은 어찌 보면 전 생애를 관통하여 니체가 했던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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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모순은 니체 사상의 특징이다. 우리는 거의 언제나 니체의 어떤 판단에 대해서도 정반대의 판단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겉으로 보면 그는 모든 것에 관해서 두 가지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니체로부터 마음껏 인용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니체는 권력의지를 바그너를 통해서 처음 직접 관찰했으며, 거기서 얻은 인식을 물리학적·우주론적 세계 일반으로 넓혀 체계적으로 이해해보려 분투했다. 1880년대의 유고들은 그런 분투의 흔적이다. 그러나 결국 니체는 권력의지를 보편적 체계로, 일종의 형이상학적 체계로 세우는 데 실패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믿었다. 니체의 무시무시한 언어들은 우리 내면의 어두운 동굴 속 불 뿜는 용을 거꾸러뜨리고, 우리 안의 신화적인 힘에 호소력을 발휘해 그 힘을 밖으로 불러낸다. 니체의 언어를 통해 디오니소스의 귀환과 부활은 낡은 신화에서 벗어나 생생한 현실이 된다.
그리고 이 귀환과 부활의 반복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 권력의지다. 권력의지는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를 출렁이게 하는 힘들의 관계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부활로 삶을 이끌어가는 무한한 재생의 동력이다.

요약하자면, 니체의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는 백승영에게 이르러 ‘생성의 영원회귀’로 나타난다. 동일한 것을 생성, 즉 영원한 변화와 변전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들뢰즈가 주장한 ‘차이의 영원회귀’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세계의 관점이 아닌 우리들의 관점에서 영원회귀는 하나의 선택(의지)을 요구한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로서 우리 역시 생성과 소멸의 반복하는 운동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구체적으로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건강한 변신을 이루는 것은 중요하다

니체는 자서전에서 《선악의 저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책은 본질적으로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은 근대 학문, 근대 예술, 심지어는 근대 정치마저도 제외하지 않으며, 그 밖에 근대의 반대 유형인 고귀한 긍정의 유형에 대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이 후자의 의미로 보자면 이 책은 ‘고귀한 자들’을 위한 학교다."

니체의 핵심 사유인 권력의지 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그의 민주주의 비판은 분명한 논리적 일관성이 있다. 민주주의는 확실히 약자들의 반란을 통해 성립한 제도이며, 약자들을 주인으로 만들어내는 제도이다. 니체는 약자가 아니라 강자가 지배해야 하며 강자를 약자로부터 보호하고 키워내야만 초인의 창출과 진정한 창조 활동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약자의 세상을 만든 민주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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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은 나비처럼, 비눗방울처럼 가볍게 이 대지 위를 춤추며 다니는 존재다. 바로 그런 초인을 지향하는 차라투스트라 니체의 가장 큰 적이 바로 그의 실존을 아래로 잡아당겨 한없이 무겁게 만드는 ‘중력’이다.

그토록 위험한 텍스트가 왜 그토록 매혹적인 텍스트가 되는가? 그 위태로운 발언들이 그려내는 이미지들이 우리 내부의 어떤 원시적 영역에까지 파고들어 거의 야성적인 힘을 깨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길들여진 무기력증을 깨뜨려 내면 저 깊은 곳의 생명력을 들쑤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생명력, 그 야성적인 힘을 제어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 된다. 그것을 제어하지 못할 때 니체의 텍스트는 파괴의 교과서가 된다

니체는 보통 선거라는 형식으로 드러나고 관철되는 평등한 자들의 지배를 초인의 탄생을 근원적으로 말살하는 사태로 인식한다. 바로 이 평등한 대중이 지배하는 민주주의, 평등주의 시대야말로 최후의 인간의 시대인 것이다. 이 시대를 혁파하지 않으면 초인은 창출될 수 없다. 초인은 오직 평범함의 대척점에 있는, 대중과 평등의 불구대천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니체가 강조하는 것은 ‘삶은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다. 니체는 삶이 자기를 극복하는 데에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가치들이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삶 자체를 구렁에 빠뜨린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자기 극복의 최대의 적은 이 평등화한 대중 사회라는 니체의 진단이 문제인 것이다. 니체는 이 진단을 그냥 한 번 하고 만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므로 니체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반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기 쉽다.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나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가 니체의 목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삶의 자기 극복과 초인의 탄생을 목적으로 삼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민주주의·평등주의 이념과 가치들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을 뿐이다. 따라서 반민주주의도 반평등주의도 니체에게는 수단의 지위에 머무른다.

권력의지는 날것 그대로 관찰하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패배시켜 지배자로 군림함으로써 이웃 민족들에게 두려움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드러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다시 말해 만물의 척도이자 의미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니체의 설명을 따르면, 권력의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타자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에서 관찰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분출과 충돌 때문에 이 세계에 평화가 없고 갈등과 혼란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는 의지 자체를 없앰으로써 불교적 열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제시했다. 반면에 니체는 권력의지를 삶을 창조하고 전진시키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의지는 어떤 경우에도 부정되어서는 안 되고 또 부정될 수도 없는 삶의 본질이자 목표이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불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모든 것의 비밀을 파헤쳐 그 본질, 그 실체를 알아내고자 하는 의지는 그 자체로 선한 욕망 아닌가. 그러나 니체는 이 진리 의지란 것이 세상 모든 것을 생각을 통해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자 하는 의지, 다시 말해 나의 이해 능력으로 장악하고자 하는 의지임을 폭로한다. 그렇게 사유 능력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은 그 대상을 내 의지 아래 굴복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리 의지는 그러므로 지배 의지이고, 권력의지다

니체의 권력의지는 언제나 생명체 안에서, 혹은 생명체와 더불어 이야기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니체의 권력의지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우주 전체의 본질로서 제시된다. 이것은 인간을 우주로 투사한 발상이다. 반면에 니체는 쇼펜하우어식 우주 이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라고 하는 이러한 나의 디오니소스적인 세계, 이중적 관능이라는 이러한 비밀의 세계, 이러한 나의 선악의 저편의 세계, 이는 순환의 행복 속에 목적이 없다면 목적이 없으며, 원환 고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선한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의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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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는 길로트를 무한히 존경하고 흠모했지만, 아내가 되어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거절의 근본 원인은 그녀 스스로 결혼을 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고 느꼈다는 데 있었다. 루의 정열적인 조숙한 지성은 미성년의 육체 속에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더 근원적인 것은 그녀의 본능적인 독립심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그가 아무리 사랑할 만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자유와 독립을 제약하는 족쇄가 된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느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채찍을 든 이 장면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개입될 때 두 사람의 관계가 즉각 권력관계로 바뀐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해도 좋다. 사랑의 권력관계상 니체는 분명히 약자였고 루는 강자였다.

《즐거운 학문》은 육체적 고통 속에서 정신의 아찔한 고양을 경험하면서 쓴 책이었고, 그 책으로 6년의 자유정신 탐험이 일단은 완수된 셈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루 살로메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니체는 이 편지에서 분명히 "더는 외롭게 지내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듯 고백한다.

단순히 글 자체의 분위기나 스타일의 독특함을 넘어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독일어 산문의 최고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서술 형식과 언어 수준은 이전의 니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이 작품은 철학적 의도 아래 구상된 것이지만 완전히 문학 작품으로 쓰여 있다."

"일체의 글 가운데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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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3-29 2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3-29 22:45   좋아요 1 | URL
아, 최근 <하이데거 극장>을 낸 고명섭 작가께서 쓴 책인데, 니체의 인생과 작품을 알기 쉽고 재밌게 알려주는 책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