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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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가 주고받은 편지와 더불어 여러 저작에서 뽑은 글들이 함께 실려서 "한 권으로 읽는 소로우" 역할을 하는 책. 번역자가 간만에 명상 서적 편집자 시절의 힘 좀 발휘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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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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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
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 모비딕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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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나오미 클라인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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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 경제학- 폴 새뮤얼슨의 20세기 경제학을 박물관으로 보내버린 21세기 경제학 교과서
케이트 레이워스 지음, 홍기빈 옮김 / 학고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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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뇌가 당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7과 1/2가지 진실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변지영 옮김, 정재승 감수 / 더퀘스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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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코디정(정우성)은 고려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변리사로 활동하는 분으로, 직접 이소노미아라는 출판사를 설립해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정초]를 정미현, 방진이와 함께 [굿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바 있고, 지금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아마도 그 선행적 정초로 기획된 것으로 보이는데, 먼저 서양철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번역 전반의 문제부터 지적하고, [비판] 번역에서 고려해야 할 번역어의 위상값을 행렬로 나타내고 분석 및 대안 제시를 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한다. 누군가는 응당 했어야 할 말을 했고, 교통정리가 필요한 사안이었으니 칸트 전공자 및 번역가라면 한번은 훑어볼 일이다. 

















또한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친근한 한국어로 번역한 새 [비판] 번역본이 나온다면 그것도 매우 기대되는 일이다. 다만, 이전에 출간한 [굿윌]처럼 이번에도 칸트의 원래 텍스트가 아니라 두어 종의 영역본을 바탕으로 번역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 독어와 영어의 구문이 다르다 보니 생기는 영역본의 어쩔 수 없는 한계도 있고, 영역본 번역자의 실수로 인한 오역도 있게 마련이다. 나도 지난 세기말에 최재희의 고색창연한(1962년에 처음 나왔으니 이 책에서 말하는 일본식 번역투 그 자체!) 번역이 싫어서 Norman Kemp Smith 영역본을 옆에 끼고 독어판을 더듬더듬 읽었던 적이 있는지라, 그 효용도 알고 그 한계도 조금은 안다. 대중들에게 읽히는 해설서 정도라면 중역도 나쁘지 않겠다. 허나 이런 류의 쉽고 친근한 소위 '대중번역'이 좀더 인정을 받으려면 역시 원래 텍스트를 바탕으로 작업함이 어떨까. 



한국에서 문맹은 사라졌다. 한국어를 못 읽는 한국인을 만나기 어렵다. 모두가 인터넷을 통해 쉽게 지식을 얻는다. 그런데 ‘문해력‘ 문제가 생긴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된 글을 읽는데 그 글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국인의 문제인가, 아니면 한국어의 문제인가? 철학의 경우 문해력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한국어로 쓰인‘ 텍스트가 흔하다. 그것은 철학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철학 번역 자의 한국어 탓인가? 나는 이런 의문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
철학 번역은 주로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자들이 한다. 대체로 박사 학위의 권위와 ‘원문‘ 번역의 권위를 내세운다. 그들이 번역을 잘했으면 이런 책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문 번역가가 철학 번역을 하는 경우도 있다. 번역가들에게 철학 용어는 통과하기 어려운 장애물이다. 그들은 사전을 참고하면서 다양하게 조사한다. 그때 사전이 그들의 작업에 곰팡을 일으킨다. 도대체 이 나라 철학 번역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문제의 원인은 간단하다. 한국인이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철학을 번역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 어디에선가 이런 반론이 들리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 서양 문물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일본 학자의 공헌이 컸다, 아니 매우 크지 않았던가? 일본어로, 일본식 한자로 철학 용어를 번역했다 해서 문제되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의 보급과 학문의 성장 면에서 고마워해야 하지 않는가? 좋은 반론이다. 맞는 말이다. 일본 학자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고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좋은 우리말을 찾기 위해 고생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다. 우리는 그런 의미있는 작업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고, 오히려 오류까지 세뇌당했으니, 좀 더 생각해 보면 그 반론이 부당해진다. 일본은 과학과 산업 분야에서 인류에 공헌한 인물들을 다수 배출한 나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나라에서 위대한 철학자가 배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물론 그들의 언어를 모범 삼아 철학을 공부한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 P30

니시 아마네는 ‘철학‘이라는 단어를 발명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시간, 공간, 이성, 긍정, 부정, 명제, 개념 등의 단어도 발견했거나 발명했다. 니시 아마네의 이런 발명품은 현대 한국어에 잘 편입됐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 그것도 백수십 년 전의 옛 일본인이다. 서양 정신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하여 그것을 일본에 제대로 전파한 사상가도 아니었다(그는 서양의 물질적인 성과에 주목했으며, 메이지 정부에서 군사 조직 정비에도 힘쓴 인물이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수많은 철학 용어를 발명해 냈다. 일본어처럼 한자어를 사용하는 우리들은 ‘당분간‘ 그 혜택을 누렸다. 일본 사람이 일본어로 가르친 지식이 몇 세대를 이어 오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 나라 철학 지식의 뿌리를 일본 학자들이 심었다는 데 이의 제기를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서양의 학문은 일본인 이 만든 언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존경해야 하는가? 철학을 공부하는 우리 한국인에게 학문의 즐거움은 드물다. 학문의 고통은 있다. 고통을 지불해야 겨우 얻는 즐거움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 고통의 유래가, 한국인이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철학을 공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과연 즐거운 일일까? - P31

선험, 우유, 규준, 질료, 실재, 소여, 심성, 각지, 도상, 도식, 선취, 외연, 내포, 격률(준칙)이라는 단어는, 각각 a priori, accident, canon, matter, reality, data, mind, apprehension, schema, image, anticipation, extension, intension, maxim에 해당하는 일본식 번역이다. 선천, 우연, 규범, 재료, 실체, 데이터, 머리, 탐색, 윤곽, 이미지, 예감, 크기, 세기, 좌우명으로 바꿔 번역하는 것이 평범한 한국어에 더 어올린다. 정신, 영혼, 지각, 통각, 이념, 실체는 각각 spirit, soul, perception, apperception, idea, substance를 이상하게 번역한 일본식 용어이다. 영, 정신, 감지, 지각, 이데아, 본질로 번역하여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데 통각을 지각으로 변경하는 것이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지각을 perception의 번역으로 광범위하게 사용해 온 까닭에, 오류 정정이 오히려 ‘업계‘에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니, 차선택으로나마 ‘자의식‘으로 바로잡는 것이 좋다(자세한 내용은 해당 단어 편에서 다시 설명한다). Apperception은 결국 자기 의식이기 때문이다. 지성(오성), 변증, 종합, 현상은 understanding, dialectic, synthesis, appearance의 일본식 번역이며, 그 의미가 모호하다. 각각 지능, 모순, 연결, 겉모습으로 번역하는 것이 알아듣기 쉽고 적확하다. 그렇지만 역시 여러 세대를 거듭한 오랜 언어 습관은 쉽게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아마도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만약 서양 사람들 앞에서, object, representation, appearance, imagination, illusion, ideal이라는 단어를 배열해 놓는다고 가정하자. 단어마다 의미상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 뜻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옛 일본 학자의 기예는 이런 식이다. 각각 대상, 표상, 현상, 상상, 가상, 이상이라고 번역했다. 쓸데없이 ‘상‘이라는 단어를 붙임으로써 의미상 간격이 좁아졌고, 따라서 필요 이상으로 모호해지며, 헷갈리게 된다(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좋지 않은 번역이다). - P32

우리가 쓰지 않는 일본식 단어가 한국 철학번역의 족쇄이다. 서양 사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발생한 엉터리 번역도 있다. 그런 족쇄를 차고도, 관례를 존중한다는 안일한 명목을 내세우면서, 지난 백 년 동안 편안하게 여긴 결과가 오늘날의 철학번역이다. 한자를 이용해서 단어를 발명하는 좋지 않은 버릇도 앞에서 살펴본 일본식 기예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자들의 언어 수준을 고려하지 않는 오만함을 추적하다 보면 결국 전근대적인 문화를 만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은 멀지 않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지닌 언어 문화가 다르다. 일본의 경우, 당장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도 그 말을 사용한 ‘선생‘을 존중하는 한편, (설령 더 좋은 선택이 있을지라도) 그 단어를 자신의 언어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문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인들은 자신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싫어하고, 더 알기 쉬운 말이 있다면 옛것을 낡은 것으로 간주하는 데 머뭇거림이 적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땅의 학자들은 한국인의 언어 문화를 외면한 채 일본식 단어를 그대로 계승한다. 마치 일본인처럼 한자어를 조립하는 버릇에 여전히 중독돼 있다. 어째서 평범한 한국어에서 단어를 찾지 않는가? - P33

‘선험적‘은 ‘선천적‘이라는 단어보다 나을 게 없는 번역어이다. 반세기 전에 사용하던 단어가 요즘 유행하는 단어보다 더 좋은 번역이라니, 당대의 철학자들이 부끄럽다. 그런데 근래 한국칸트학회는 a priori를 라틴어 음역 그대로 ‘아프리오리‘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학회의 ‘필수 표기법‘임을 당당하게 발표했다. 오늘날 철학자들이 사회에서 얼마나 멀리 격리되고 말았는지를 대표적으로 증거하는 사례이다. 이 단어의 위상은 다음과 같다. 명확, 불명확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4점), 칸트를 전공한 학자들에게는 무리 없는 단어일 것이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아는 척하면 욕만 먹는다(4점), 원문을 음역했으므로 출발 언어와 도착 언어의 의미가 일치했다(0점). 그러나 귀찮아서 번역하지 않은 셈이고, 소통을 포기한 번역이다(4점). 아프리오리 번역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선천‘이라는 단어가 학문적이지 않아서 싫고, ‘선험‘은 transcendental의 번역어로 사용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나 타당하지 않다. 도무지 채택할 만한 번역어가 아니다. - P78

새로운 단어를 접해 그걸 기억하는 것도 철학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걸 소통의 규범으로 삼고자 한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철학 죽이기‘이다. 이런 대가가 한국인에게는 큰 손해이지만, 칸트 학회 소속 철학자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것 같다. 철학을 컬트화하면서 철학자가 살고, 칸트를 죽이면서 칸트 전공자가 옷깃을 세우는 그런 기이한 일로 비쳐진다. 칸트 철학에 제대로 입문한 다음에, 철학 용어의 즐거움을 누려도 좋을 일이다. 그러나 그 입문을 방해하는 용도로 쓰여서는 안 된다. 제법 무리 없이 의미를 전할 수 있는 ‘선천적‘이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그걸 외면하고 평범한 한국인이 알 수 없는 저 국적 없는 단어인 ‘아프리오리‘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은 학자가 자기 지식을 독자에게 강요하려는 엘리트의 욕망에 불과하다. 지식 공유가 문화로 자리잡은 이 시대에 극소수의 사람끼리 대화할 수 있는 단어로 칸트 철학을 독점하고 싶은 욕망은 시대에 한참 뒤쳐진 발상이다. 특히 다른 책은 몰라도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그런 발상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a priori는 <순수이성비판>에서 800회 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독자들이 알지도 못하는 ‘아프리오리‘라는 단어를 800번이나 반복해서 번역한 <순수이성비판>을 상상하면 내 마음이 다 아프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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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대북, 조선의 경성, 만주의 대련 신경 등지에 세워진 일본 제국 시기의 건축물과 건축가 집단, 당시의 건축 자재 생산 및 수송 등에 이르는 제반 사항들을 심도 깊게 연구 고찰한 책으로, 저자의 2008년작인 日本植民地建築論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일제 시기 건축을 다룬 국내 저작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대만과 만주의 건축까지 섭렵할 뿐만 아니라, 건축가들의 학맥 인맥 관계 등등 '내부의 사정'을 알 수 있다.
읽다 보니 만주국에서 조선은행이 은행권도 발권하면서 꽤나 세력을 키웠던 것으로 나오고, 당연히 대련, 봉천, 장춘 등지에 지점도 세우고 했던데, 당시의 지점들은 한국은행이 중국 정부로부터 돌려받을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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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소개글을 보면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학인이 유교/유학을 공부하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자의 오래된 가르침이 현대에도 가치가 있음을 밝혀주고 뭐 그러면서 독자로 하여금 꼼짝없이 기존의 관념을 타파하지 않을 수 없게 해버리는 꿀잼(?)을 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
대학을 자퇴한 뒤 인문학 공부 모임에서 동양철학 공부를 시작하고, 그러다가 몇 명의 친구들과 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접고 하는 과정을 적어나간 젊은이의 에세이 쪽에 가까웠다. 간혹 나오는 논어 구절에 대한 풀이나 공자와 제자들에 대한 시각의 날카로움은 역시 학문 공동체를 직접 만들고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이라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언젠가 저자의 체험에서 나온 통찰이 좀더 깊이 쌓인 작업물을 보고 싶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는다. 한 귀퉁이를 들어주었는데 남은 세 귀퉁이를 헤아리지 않으면 다시 일러주지 않는다."
계발(啓發)의 어원이 되는 이 문장은 교사로서 공자의 교육관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이다. 신분 구분이 있던 시절, 공자는 파격적으로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이면 신분에 차등을 두지 않고 다 받아주었다. 오히려 그의 기준은 ‘얼마만큼 공부에 진심이냐‘에 있었다. 마음에 무언가가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을 어찌 펼치면 좋을지 모르는 제자들에게 공자는 창구를 내주었다. 이것이 계발(啓發)의 ‘계(啓)‘다. 계(啓)는 손으로 문을 열어주는 모양이라, 이 문장에서는 왕성하지만 나올 방법을 몰라 분주하기만 한 것이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주는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발(發)‘은 활을 당겨 쏘는 모양으로, 곧이라도 터져 나올 듯하지만 아직 미숙하여 안달 나 있기만 한 것의 활시위를 당겨주는 모습이 떠오른다. - P128

공자에게 계발이란 출세를 위한 것도, 명예나 재산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뜻은 있지만 자기 안에 갇혀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세상으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혼자서 안달복달하던 마음이 세상과 만나며 감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까 본래 《논어》에서 쓰인 ‘계발‘의 의미는 오늘날 자기 계발의 용법과 완전히 다르다. 오늘날 자기 계발의 초점은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 그렇게 하면 진짜 뭔가 달라질 거라고, 더 나은 내일을 살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내가 하는 말과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오직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주위 의 관계 없이 혼자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가깝다. - P129

공자의 충(忠) 역시 마찬가지다. 충(忠)과 서(恕)는 각각의 의미보다 이 둘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서(恕) 없이 충(忠)은 불가능하다. 상호성을 맞이한 뒤에야, 그러니까 이로운 상황이든 불리한 상황이든 나의 마음을 상대의 입장에 위치시킬 줄 안 뒤에야 자기 진실성은 가능하다. 공자식 자기 계발은 시장이나 상품성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비추어 보는 것, 우리가 서로에게 의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자장에서 성찰하고 움직이는 것, 그럼으로써 스스로에게 진실되고 충실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식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우리는 적극적으로 자기 계발을 해야 했다. 그것은 나만의 뛰어난 점을 부각해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간 내가 배워왔던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시장에서 우리는 판매되어야 했지만, 팔린다고 꼭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과를 내는 과정은 우리가 고립되지 않고 세상과 만나 감응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충실하고 서로에게 의지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매몰되는 대신 새로운 다른 길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가 글을 쓰고 세미나를 조직하는 과정은 서로에게 부단히 기대는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글이 완성될 때까지 성심성의껏 서로의 마감을 독촉했고, 매번 안경을 고쳐 쓰며 멤버들의 글이 골격을 갖추어가는 과정과 부적절한 표현을 수정하는 과정에 동참했다. 세미나 진행을 위해서는 다른 멤버들이 함께 움직여줘야 했다. 서로 겹치지 않는 시간대를 잡기 위해 양보하고, 커리큘럼을 함께 검토하며 책을 추천하고, 세미나 규모가 커지면 함께 들어가서 공동으로 튜터 역할을 하기도 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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