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책, 모비 딕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 / 저녁의책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지구 행성에서 너와 내가』를 읽고 알게 된 책이다. 원제는 『wHY READ MOBY-DICK?』, '왜 모비 딕을 읽는가'이다. 어쩌다 한국판의 제목은 『사악한 책, 모비 딕』이 되었을까. 책 소개를 읽지 않고 제목만 봤다면 그냥 스쳐 지날뻔 했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저자다. 너새니얼 필브릭. 멜빌이 '뮤즈'로 삼고 숭배했던 『주홍글씨』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과 이름이 같다. 저자도 적시하고 있는바다. 저자는 "이 책 자체만큼이나 이 책이 쓰이기까지 일어난 일들에도 관심이 많"았다. 『모비 딕』을 "여남은 번 읽고 관련된 사실들을 수집하고 연구한 저자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책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멜빌과 호손의 만남은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에서 '발견'했다. 호손에 대한 멜빌의 마음, 멜빌을 대하는 호손의 태도를 알 수 있었다. 멜빌은 숭배하고 호손은 마뜩잖아했다. 『사악한 책, 모비 딕』 에는 멜빌이 호손을 만남으로써 『모비 딕』이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설명되어 있다.


호손의 차분함에 영향을 받아 멜빌은 고래잡이를 주제로 한 평범한 피카레스크 소설을 쓰는 도중에 손을 멈추고 이 이야기를 호손의 단편에서 읽은 어둠의 힘의 관점에서 통째로 새로이 생각하게 되었다.

p.53


저자는 『모비 딕』을 이해하기 위해 두 작가가 주고 받은 "편지들을 꼭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멜빌은 책을 쓰는 동안 호손에게 그때 그때의 진행 상황과 자신의 상태 등을 써서 보냈던 모양이다. '사악한 책'을 써내는 동안 예술적 영감에 휩싸인 멜빌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국내에 두 작가가 나눈 서신의 번역본이 있는지 모르겠다.


호손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역작을 쓰는 동안과 다 쓰고 난 뒤 멜빌의 정신 상태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독자들에게 『모비 딕』만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을 만들어낸 개인적 예술적 힘을 이해하려면 이 편지들을 꼭 읽어야 한다.

p.111


멜빌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호손만은 아니었다. 저자는 셰익스피어가 『모비 딕』의 "진정한 시작점"이었으며 성서도 영향을 미쳤다고 쓰고 있다. 멜빌은 셰익스피어와 성서가 주는 고전의 힘과 호손의 문학적 영향력을 뱃사람으로서의 경험에 녹여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멜빌이 살았던 19세기 중반의 미국이 담겨 있다. 피의 폭풍을 10여년 앞둔 미국이다.


셰익스피어가 『모비 딕』에 비판적 영향을 미쳤고, 또 멜빌이 젊은 시절 태평양에서 한 경험의 프리즘을 통해 다시 상상한 성서도 이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p.69


『모비 딕』의 서사에는 미국의 형이상학적 청사진이 담겨 있다. 거의 내내 바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효과적인 비유와 은유를 집어넣어 1850년대 미국의 풍광과 정서를 담아냈다.

p.69


저자는 멜빌의 창작 과정을 따라간다. 소설의 모티브가 된 애식스 호 사건과 멜빌의 포경선 승선 경험을 말이다. 당시 포경선을 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고래 백과 사전이라고 불릴만큼 고래와 포경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이유도 밝혀준다. 『모비 딕』의 시작 부분은 소설의 도입으로 읽기 어려울 만큼 지리한 고래 관련 어원과 발췌문 등이 포함돼 있다. 이런 부분을 읽어냈을 때에야 『모비 딕』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서사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모비 딕』을 읽는다는 것은 포경선에서 여러 해 동안 강렬한 경험을 하고, 자기가 본 것 전부를 마음에 새기고, 7년쯤 더 지나 셰익스피어, 호손, 성서 등등을 읽고 흡수한 다음, 젊은 시절의 경험을 앞날에 공포할 목소리와 방식을 찾아낸 작가를 마주하는 일이다. 결국 바로 여기에서 『모비 딕』이라는 소설의 위대하고 탁월한 힘이 나온다. 그 힘은 그 자리에 있었을 뿐 아니라 자기가 보는 것의 경의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포용력있고 감수성 예민한 영혼을 가진 작가에게서 나온 것이다.

p.77


소설의 3분의 2 지점을 지나고 나면 독자들은 고래의 해부학적 구조와 고래잡이의 세부적인 내용을 낱낱이 알게 된다. 또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고래의 신비와 아름다움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나면, 멜빌은 에이해브와 모비 딕의 최종 대결을 당당하게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신빙성이 없고 과장되었다고 느껴졌을 최후의 대결이 그래서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보인다.

p.78


소설을 완성한 후 멜빌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반응을 마주한다. 불멸의 기억으로 남을 작품을 썼다고 생각한 작가를 알아보는 독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 필브릭은 『모비 딕』 이후의 멜빌이 "회의와 희망이 뒤섞"인 "극기심"을 찾았다고 말한다. 불멸의 책을 쓴 소설가가 마지막에 손에 쥔 것은 삶을 견디는 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것이 『사악한 책, 모비 딕』의 저자 너새니얼 필브릭이 밝힌 『모비 딕』을 읽는 이유라는 것이다.


『모비 딕』을 창작할 때의 흥분감이 가라앉고 나자, 멜빌은 사악한 신과 같은 에이해브가 아니라 실망을 품고 살아가는 법을 익힌 조용하고 과묵한 생존자에게 감동한다. 자신의 불멸성을 더이상 믿지 않게 된 사람에게(곧 보겠지만 멜빌은 그런 상태에 다다랐다) 삶은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게 삶이다.

p.126


결국 멜빌은 『모비 딕』에서 이슈메일이 지지한 입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은 것이다.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회의와 천상의 것에 대한 직관, 이 조합으로 신자가 되지도 불신자가 되지도 않고, 양자를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회의와 희망을 뒤섞는 데서 오는 구원, 짧고 터무니없고 부조리한 삶 앞의 온화한 극기심, 이것이 내가 『모비 딕』을 읽는 이유다.

p.130


역자 홍한별의 요약은 이 책의 내용과 의미를 한 단락으로 잘 정리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해봤다. 『모비 딕』을 바로 읽지 못하고 주변만 서성이고 있는 셈이다. 너새니얼 필브릭의 책이 아직 읽지 못한 벽돌 책 『모비 딕』을 읽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한편 『모비 딕』을 다루고 있는 또 다른 책 『모든 것은 빛난다』를 검색하고 있는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뿐만 아니라 저자는 멜빌이 『모비 딕』을 쓸 당시 미국의 상황, 위대한 작품을 쓰려는 멜빌과 그를 말없이 지켜본 작가 호손의 일화, 그리고 출간 당시에는 처참하게 실패했던 『모비 딕』이 훗날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과정 등을 엮어 넣으며, 『모비 딕』에 켜켜이 쌓인 깊고 다양한 의미를 읽어낸다. 덕분에 우리는 어떻게 『모비 딕』이 시대를 뛰어넘는 식견과 우주적 규모로 확장되는 정신을 담아낸 책이 되었는지도 알 수 있다.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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