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김새나 체형 등 외적인 면이 먼저 떠오른다. 성격이나 취향, 가치관이나 생각 등 그 사람의 내면이 마음에 들거나 자신과 잘 맞아서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능력? 지위? 재산이나 배경 등 그가 가진 것들을 보고 마음에 드는 일도 있을 것이다. <루시 게이하트>의 ‘루시’- 이 소녀, 아니 스물한 살의 이 여자. 그녀가 사랑에 빠져버린 그 대상으로부터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랑이라기보다는 동경에 가까웠을 그런 감정은 아니었을까. 그녀가 서배스천으로부터 보았던 그 빛…. 책을 덮고 거리로 나섰는데 볕이 뜨거운 여름이다. 그럼에도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한겨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루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루시 게이하트>가 이토록 내 마음을 뒤흔든 이유는 무엇일까.
플랫강 유역의 작은 마을 해버퍼드에 사는 루시- 춤을 추고 스케이트를 타고 앞만 바라보며 발 빠르게 걸어가는 루시- 집은 부유하지 않지만 총명하고 재능 있는 루시가 이 마을에서만 살아갈 것 같지는 않다. 얼음을 지치는 루시 곁에 해리가 나타났을 때는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생각하듯이 루시와 해리, 이 둘은 모두가 인정하는 선남선녀 커플이로구나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해리는 루시를 자기의 여자로 점찍는다. 루시에 비해, 아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진 것이 많은 해리, 집안의 재력은 물론 젊고 튼튼하고 잘생긴 자신의 매력을 잘 알아 자기가 원하면 루시가 아닌 다른 여자와도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으리라는 걸 잘 아는 이 남자 해리.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게 깊은 짜릿함을 선사하는 여자는 항상 보는 루시, 교회 쥐처럼 가난하며 좀처럼 자기를 칭찬하지 않는 데다가 종종 비웃기까지 하는 루시뿐이다. 그녀와 함께할 때면 삶이 사뭇 달라진다. 해리는 루시를 갖고 싶다.
루시도 물론 해리를 좋아한다. 해리가 가진 싱그러운 매력을 잘 안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해리의 고백에 일순간 우쭐하기도 하지만 루시는 이 조그만 마을에서 그의 아내가 되어 그의 여자로 살아갈 생각은 딱히 없는 것 같다. 인생이, 운명이 어떻게 흐르느냐에 따라 그렇게 살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러나 루시는 생의 흐름 자체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아니다. ‘무언가를 지향하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루시에게 그 무언가는 피아노, 그러니까 음악이었다. 음악을 공부하러 시카고로 떠나는 루시. 재능은 있으나 무사태평해서 앞날을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는 소녀, ‘경력’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던, 음악은 자연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던 평범한 소녀 루시. 그런 그녀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서배스천이라는 이름과 함께. 서배스천의 공연을 본 순간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해리와 함께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즐거워하던 천진난만한 소녀가 아니라 한 예술가의 목소리에 감응하고 생의 진실을 깨닫는 여자가 된다.
이 표현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루시는 서배스천의 목소리를 듣기 전부터 그의 매력에 감응했기 때문이다. 그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그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 매력으로 다가온다. 서배스천은 젊고 잘생긴 해리와는 전혀 정반대의 사람이다. 결코 젊지 않은 중년의 남자, 표정도 어둡고 심각하면서 커다란 눈은 지쳐 보이고. 키가 크고 퉁퉁한, 덩치가 아주 큰 사람. 루시는 그를 보자마자 중얼거린다. “그래, 위대한 예술가라면 저런 모습이어야 해.” 서배스천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로는 그 무엇에도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전에는 결코 겪어본 적 없던 감정 때문이다. 루시는 서배스천이라는 한 존재가 내뿜는 새로운 매력에 빠지면서 그 이상의 것을 그때 깨닫는다. “사랑은 그저 말랑말랑한 감정이 아니라 비극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새카만 물처럼 인간을 집어삼키는 열정”임을 깨닫는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바깥세상이 어둡고 끔찍한 곳인 것만 같고 온 세상이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제대로 깨닫게 된 것 같다. 이 강렬한 감정을, 해리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비교할 수 있다면, 견줄 수 있었다면 루시에게 서배스천을 운명이라 말할 수는 없으리라.
그래, 처음에는 동경이라고 생각했다. 피아니스트가 반해버린 성악가- 음악으로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 음악으로 이어진 그들. 그러니까 분명 동경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루시의 마음은 아무래도 그것이 아닌 듯하다. 한 사람의 많은 것을 파괴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단지 동경이라 부를 수 있을까. 서배스천은 루시의 많은 것을 파괴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변과 재산에 일어난 변화로 인생이 바뀌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운명이란 감정과 생각에 일어난 변화”이다. 서배스천이 루시에게 그렇다. 루시는 고민한다. 그 사람이 나의 미숙하고 무지하고 그다지 총명하지 못한 면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그의 다정함 역시 꿈은 아닐까,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면 세상과 단절된 채 안개로 둘러싸인 산속의 외딴 언덕에 단둘이 있는 것만 같다. 그의 생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속 깊은 종을 두드리는 듯해서 듣지 못하는 것까지 전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와 보낸 몇 주가 그전까지 살아온 21년보다 더 풍요롭다고 느낀다. 처음 그의 목소리를 들었던 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고 그 전까지 자기의 손에 들려 있던 것들은 전부 하찮고 허무맹랑하다고 느낀다. 루시는 서배스천에게 장미를 보낼 권리가 있는 미지의 여자를 질투하고 심지어는 서배스천의 집사 주세페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내가 주세페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랴.
서배스천 또한 이 작고 어린 루시에게 자신의 마음을 끝끝내 숨기지는 못한다. 루시의 빨간색 깃털이 길 위로 동동 떠내려 오는 모습을 보면 설레고, 그 깃털이 보이지 않으면 낙담하고. 루시가 한 시간만이라도 옆에 있었다면 그토록 울적하지는 않을 텐데, 지루하고 숨 막히던 시카고의 아침이 루시 덕분에 감미롭기만 하다. 루시가 문을 두드리면 꼭 봄이 찾아온 것만 같다. 루시의 마음은 그가 지금껏 마주쳤던 수많은 위장된 감정들과는 사뭇 달라서 그 자체로 완전해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취할 필요가 없는 감정라고 믿는다. 때문에 그가 루시에게 너는 정말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단지 자라나는 과정이며, 인생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그리고 또한 나는 젊음의 싱그러움에 빠진 것일 뿐이라고 둘러대도 그의 마음이 사랑임을 모두가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짧은 포옹이 너무나 애틋하고 격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루시도 서배스천도 이것이 영원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안다. 그렇지만 이것이 한평생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아름다운 것은 오래가지 않는 법. 서배스천이 사라진 후 루시의 마음은 얼어버리고, 세상도 부서져 버린다. 기억으로 되살린 예전의 그 세상에서만 숨 쉴 수 있다. 그런 루시에게 생은 짧다고, 살아가는 것 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고, 봄에 힘든 일이 있을지언정 낙담하면 안 된다고, 너의 앞에는 긴 여름이 찾아 올 것이므로 할 수 있을 때 장미 꽃잎을 그러모아야 한다고 누군가가 충고한다 하더라도 그 말들이 그녀의 가슴속에 다가와 박힐 리가 없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어쩌면 루시에게는 여름이 펼쳐지지 않았어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그녀는 이미 인생의 장미 꽃잎을 한 번에 다 가졌었기 때문에. 온 마음을 바쳐 가질 수 있었던 그 장미 꽃잎을 다 가졌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