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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I회장 <사도어서>에서 자신의 수업에 대해 쓰신 것은난으로 괴로워하는 문하를 격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난을받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죄장을 소멸하고 성불의 경지를 확립하는 때다.‘ 라는 것을, 자신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참으로 고마우신 본불님이십니다.
모리나카 본불님이라 해도 인간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과거세부터 숙업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불님이신데 숙업이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묻는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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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그 죄장을 소멸하면, 앞에는경애의 확립이 있습니다.
성불이라는 위대한사이토 이 <개목초>의 일절은 대원과 ‘수업‘의 관계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SGI회장 그렇습니다.
대원을 세우신 대성인께서는 「대난(大難)은 바람 앞의 먼지와같으니라」(어서 232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원에 근본을 둔투철한 경애에서 보면, 숙업의 유무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가령 어떠한 고난과 수업이 있다 해도 대원의 생명은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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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는 물에 담구어 두드리면 검으로 되고, 이것이 니치SG회장내 성인대성인의 불법은 시를 불에 담구어 쳐서 칼을 만드는 것과불법에서 설하는 수업의 핵심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단련하기 위한 신앙이며 종교라는 것입마이너스의 최장을 제로로 되돌린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수업을 응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이너스의 최장을 크게 플러스로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숙업전환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만인의 생명에 내재한 불성입니다. 불성을향한 철저한 신은 ‘숙의 응시‘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단련하는 장이 대난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괴로워하고 있을 때가 가장 깊어질 때인 것입니다.
대성인께서는 사도유죄의 결론으로 결국은 천(天)도 버리시고당하여라. 신명身命)을 바칠 뿐이로다」(어서 232쪽)라고도제외치셨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하늘에게도 버림을 받았다 해도 나는내가 믿는 길을 당당히 걷는다. 결연히 일어선 생명은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다. 그런 강한 생명을 구축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관점으로 보면 대난은 죄장을 소멸하기 위한 계기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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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번민하고 있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으스대는 느낌과 같은것입니다.
SGI회장 물론 진지하게 고민하며 자신을 주시하는 것은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만으로 그치거나 흐지부지 끝난다면 관념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에게는 만인을 구제하려는 대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응시했고, 마침내 그 구극의 생명이 열렸습니다. 숙명전환의 정확한 방도를 모든 문하에게 아니, 일체중생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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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I회장 그렇습니다.
숙업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고, 숙업에 정면으로 대응하여극복해감으로써 불게佛를 용현하게 됩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깊이 파고 들어가기 때문에, 구식론으로 말하면 ‘구식심왕진여의 도‘를 개발할 수 있습니다. 이 법리를 떠나서는육근청정이나 인간혁명은 없습니다. 이를테면 성숙하지 못한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숙업을 주시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만의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해방되었다면 다음에는 숙업으로 괴로워하는사람들을 구제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결론적으로 불법은인류의 수업을 주시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행화라는 성불을 향한 궤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자신도 자신의 숙명전환을 위해 투쟁하면서 한편으로 벗의숙명전환을 위해 진력한다. 그것이 바로 학회 활동입니다. 또한 그것이 궁극적인 불법의 정도인 것입니다.
사이토 그 어느 누구보다도 니치렌 대성인이야말로 철저하게 자신의 수업을 깊이 응시하신 분입니다. 그것은 참으로대단한 일입니다.
모리나가 대성인의 번민은 어중간한 인텔리가 빠지기 쉬운 ‘번민을 위한 번민‘ 과는 전혀 다릅니다. ‘번민을 위한 번민‘은 단순한 자기 만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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