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소중했던 것들 (볕뉘 에디션)
이기주 지음 / 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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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와 황현산을 번갈아가면서 읽는데,

확연하게 차이가 느껴진다.

이기주는 예쁜 말들에서 울컥하는 감정을 떠담으려 애쓰고 있지만,

내 마음의 시선은

세상이 마뜩잖고 불편하고 불쾌하고 내내 못마땅해 혀를 차는

부글거리는 분노에 휩싸인 황현산에 가까웠다.

 

황현산의 글에서는 지난 몇 년간의 우울과 분노가 오롯이 묻어났지만,

이기주의 글에서 눈에 띄는 '세월'이라는 단어조차

생각없음으로 보일 정도로

내 눈은 세상의 빛에 닳고 닳았던 모양이다.

 

당신의 눈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햇볕이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음에 햇살이 어른거리지 않으면

우린 언제나 겨울이다.(작가의 말)

 

우리가 살아온 계절이 겨울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요즘 '계엄령' 뉴스를 보면서 정말 두려웠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촛불로 계엄령을 겨우 막은 정도의 당랑거철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세월호 수장 뉴스 역시 가슴을 치게 만든다.

그런 뉴스를 애써 외면하려는 듯한 기자 출신 작가의 깔끔한 사진조차 나는 낯설다.

 

대부분 사람은 기운으로 사는 게 아니라

기분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요.(110)

 

어떤 약사의 말을 인용하는데, 역시 스트레스는 인체의 적이다.

지난 며칠간 나는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그야말로 기분이 최악이었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누가 쿡 찌르면 금세 울어버리고 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표를 내버리고 싶었고, 지구를 떠나고 싶었다.

스트레스를 이기는 것은 시간이지만,

갈수록 삶과 맞닥뜨리는 스트레스가 송곳처럼 날카롭게 짓처들어오면

삶은 속절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과연 나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이 조직에서 나를 지켜내야 하는가.(24)

 

직장인이라면 이런 우울을 떨쳐버릴 수 없으리라.

조직에서는 내가 잘한다고 즐거울 수는 없다.

조직원들은 늘 게으르고 마음에 안 들기가 쉽다.

결국 조직을 떠나는 시점을 고민하는 수밖에 없다.

 

이기주의 낱말들이

조금 더 세상 속의 사람들의 아픔 속으로 다가서면 좋겠다.

어쩔 수 없는 황현산의 글들처럼...

 

 

155. 이 글에서 '대갚음'이라는 말을 들었다. '되갚음'이라면 모르되, '대갚음'이라니...

그런데 찾아보니 '되갚음'이란 말은 없고, '대(對-)갚음'이 표준어라 한다.

마음이 조금 상한다.

맛있는 '무우'를 거두절미 '무'로 표준어 처리한 것처럼 서운하다.

 

85쪽. 천품의 한자가 틀렸다. 물건 품이 아니라 '稟' 여쭐 품, 자를 처야 한다. 기안 올릴 때 '품의'한다고 쓸 때는 여쭈어 본다는 뜻이고, 천품에서는 '내려받다'는 뜻이다. 하늘이 내린... 자질이라는 말이다. 편집자들이 젊어지는 것은 이런 한자에 무지한 것을 보면 아쉬운 점이다. 한문이 담고 있는 상형문자의 함축성에 맹하게 노출된 한글 세대도 한문 공부 좀 해야한다. 편집자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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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세탁소 - 정미경 소설집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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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작가의 작품집을 읽은 것은 처음인데, 무척 인상적이다.

툭 던지는 한 마디는 대체로 '화두'에 가깝다.

제목도 생뚱맞다.

원래 삶 자체가 생뚱맞고 당황스런 것이니,

게다가 나이든 몸으로 살아가는 일이야...

회의 중 방귀를 나뉘어 조심조심 뀌고 있는 상황에서,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210)"

소리를 듣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정미경 작가는 쉰 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뜬다.

삶은 그렇게 부정교합의 연속이다.

 

'남쪽 절'이라는 작품에서는 캄캄한 어둠을 걷는 설치미술을 만난다.

삶이 그런 것이라는 듯...

 

휘어진 모퉁이에서 핸들을 꺾을 때마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놀란 숲이 팔을 들어올려 휘청,

얼굴을 가렸다.(63)

 

운전하다 보면,

밤 헤드라이트 불빛에 비치는 세상은 현실과 다름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작가처럼 적기는 쉽지 않다.

이렇게 삶의 속살을 만나는 일이 잦은 사람은 삶이 더 고단할 것 같기도 하다.

 

탈북한 예술가가 남한에서 겪을 생경함은

어찌 생각하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겪는 곤란과도 오십보 백보다.

 

"그 사람은 외로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야.

외로움을 무척 좋아하지."

외로움이란 고독과는 달리 취향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고이는 느낌일 텐데.(178)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를 감각적으로 그린 부분도 일품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통계 내기 좋아하지.

그런데 진짜 중요한 걸 알려주는 통계는 없어.

그건 각자의 몫이겠지.

일생동안 행복했던 순간, 사랑 때문에 가슴 조였던 순간,

혼자 눈물 흘렸던 시간, 그런가.

그러고 보면 내가 나인 순간이 얼마나 될까.(180)

 

'남쪽 절'에서나 '프랑스식 세탁소'에서나,

그 제목들은 뜬금없는 상관물(오브제)들일 뿐이다.

나, 라는 존재 역시 다른 자들에게는 그렇게 하나의 오브제일 뿐이라는 듯...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나를 파괴한다.

 

달리는 말의 등에 채찍질하며 그 귀에 속삭였네.

말아, 제발 천천히 달려 다오.(작가의 말)

 

삶이 그렇게 허망하게 달려가버릴 것임을,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것임을 작가는 예감했던 것일까.

스스로 파괴하는 줄 알면서

그 풍요로움의 단맛에 집착한 삶에 대하여...

이런 작가가 가버렸다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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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 - 생텍쥐페리 잠언집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송혜연 옮김 / 생각속의집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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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어린왕자 외의 책들에서도 좋은 구절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사막은 원래 확실한 것은 주지 않는다.

그 안에 있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막에 가면 인간들은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이끌려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 중, 168)

 

어젯밤에 러시아와 스페인이 16강전을 하는데,

피파 랭킹 70위라는 러시아가 8강으로 올라갔다.

연장 끝에 무승부여서 승부차기를 하는데, 어떤 선수가 찰 때 왠지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 공은 키퍼가 막아냈다.

나중에 있었던 경기를 보니, 덴마크와 크로아티아가 승부차기에서

열 개의 공 중에서 무려 5개를 키퍼들이 막아냈다. 굉장하다.

 

승부차기도 실력이라 할 수도 있으나,

우연이 더 크게 작용할 수도 있다.

러시아라는 나라의 심장에서 그 큰 외침 속에서 공을 차는 선수의 마음은 졸아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한국전에서 스페인이 승부차기에서 지고 돌아갔듯이... 하필이면 또 스페인이다.

 

별을 따라가며

길손이 산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어느새 별이 길을 안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성당에서 돈을 받고 의자를 빌려주는 사람도 마찬가지.

의자를 내주는 데 너무 열중하다 보면

자기가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인질 편지, 146)

 

교사도 그렇다.

학생 지도에 너무 열중하다 보면,

학생이 한 우주라는 것을 망각할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향해 가느냐 하는 것이지,

어디에 도착하느냐가 아니다.

인간은 죽음 이외의

그 어떤 곳에도 도착하지 않는다.(사막의 도시 중, 130)

 

냉철한 통찰이다.

어제 허무한 부고를 들었다.

애써 아이를 길렀던 한 어머니가, 쉰의 나이에 암으로 소천했다.

정말 고생했고, 이제 아이가 성장했으니 잘 살아갈 모습만 보길 바랐는데...

 

인생 허무하다.

무엇을 향해 가는가 하는 지향도 허무하긴 마찬가지다.

오늘 처한 일을 너무 열심히는 말고,

잘 넘길 일이다.

 

내일 태풍이 온다 한다.

조용히 지나가길 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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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입에서 톡 프랑스어 - EBS FM RADIO, 프랑스어 회화 첫걸음
임한나 지음 / 문예림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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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쉬,독 프랑스어를 휘리릭 일독하고나서 보는 책. 역시 회화에는 다양한 상황에 따른 어휘들이 많다. 시디에는 대본 1, 강의 2장이 들어있다. 대본만 계속 들으면서 회화문을 외워야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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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가위바위보 문명론
이어령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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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을 읽으면, 해박함과 종합력에 감탄한다.

언어에 해박하고, 다종다양한 지식을 섭렵한 대학자의 면모가 뛰어난데,

그것들을 종횡무진 그물 엮듯 엮어내고,

그 그물망들을 총괄하는 '벼리' 역할을 하는 주제를 솎아내는 데 큰 힘을 볼 수 있다.

 

일본어로 먼저 출간된 책.

 

어떤 기러기도 선두에 섰다고 우월감을 갖거나

맨 뒤에 있다고 열등감을 갖지 않는다.(50)

 

중국의 문명을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역사였고,

일본의 신문명이 대륙과 반도를 침략한 것도 근대의 귀결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문명은 삼자가 협업하는 것으로 장래를 삼자는 의도의 책인 듯.

 

시대의 축은 완만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도구에서 신체로, 소유에서 접속으로, 실체에세 관계로 옮아간다.

탁월한 문명 비판이다.(275, 다카시나 슈지의 해설)

 

중국 대륙은 보에 가깝다.

손바닥은 넓음과 동시에 관용과 덕을 만들어낸다.

일본은 주먹이다.

여유보다는 긴장, 확대보다는 축소 지향이다.

한국의 가위는

밸런서의 역할로서 통합의 역할이다.(231)

 

불교의 원, 융, 회, 통과도 상통한다고 푼다.

 

순환관계가 원이고,

열린 손바닥과 닫힌 주먹의 가운데

반은 열리고 반은 닫힌 가위가 있다. 융이다.

혼자서 할 수 없어, 동시에 내는 회,

승부를 받아들이는 통.(85)

 

상징의 최고봉은 주역이 아닌가 싶다.

플라톤의 2원론에서 출발한 2개의 문명론보다는 당연히 3원론이 다양하고,

주역의 4원, 8원론이 더 다양하지만, 자칫 복잡하다.

 

일본 대한화사전에서

눈목변 740, 발족변, 670, 귀이변 217개에 비해,

손수변 1307개, 입구변 1458개의 한자가 발견된다.(86)

 

인간의 행동에서 손과 입이 그만큼 큰 역할을 한다는 근거다.

 

일본 문화는 국화와 칼의 이중성보다

'배'와 '우'의 이중구조에 그 특성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있다.

가위바위보는 '우'에 대한 '배'의 문화를 정확히 보여주는 것.(125)

 

배우에서 '배'는 희극, 코믹, 비속한 것을, '우'는 우아, 비극을 담당한다 한다.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책이라는 '국화와 칼'의 양면성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나타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칼의 민족이라기에는 패전 후 너무 피해자 코스프레로 일관하는 모습이 그렇다.

그들은 잘나갈 때는 '배'에 가깝고, 지면 바로 '우'가 되는 쪽의 해석도 일리가 있다.

 

가위바위보의 자르다, 감싸다, 치다의 역학관계는

승부 순환이다.

분별하여 자르는 지, 부드럽게 감싸는 덕, 적극적 공격의 체.(148)

 

문명은 변화한다.

순환하고 발전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것을 해설하기는 쉬워도 예측하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중국의 '굴기'(우뚝 선다)를 예측하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외교는 대결보다는 조화와 화해를 통한 상생이 중요할 듯 싶다.

섬나라 일본이 반도와 연결을 간절히 바라는 것 역시 필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박정희처럼 꼼수를 쓰는 독도 밀약의 독재자도,

쥐나 닭처럼 국익보다는 사익을 도모한 치사한 것들도 역사의 뒤켠으로 밀어버려야 한다.

김정은이 대화에 나선 것은 단순한 일도 우연한 일도 아니다.

필연적으로 세계의 중심으로 동아시아가 등장하게 되는 21세기를 예감하게 한다.

 

뒤편의 일본어 서적은 왜 붙여 두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괜히 책이 무겁고 값만 비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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