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무들을 보았니?
나무들은 비썩 마른 가지들로만 이뤄진 것 같지만,
전혀 바싹 마르지 않았단다.
나뭇가지들은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눈'들을 살찌우고 있더구나.
'겨울눈'이라고 이름붙은 것들이 곧 새싹으로 변신하려고
무대 뒤에서 옷을 갈아입고들 있는 풍경이란다. 

독서실 오가는 길에서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도 한번 쳐다보기 바란다. 
오늘은 아빠가 고등학교 들어가서 배웠던 시 '봄비'를 한번 읽어 보자.
그러면서 '창의적 사고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볼게.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이수복, 봄비)

4연으로 되어있지?
넉 줄로 되어있는 한시를 <절구 絶句>라고 부르는데,
그 각 행을 기, 승, 전, 결구라고 부른단다.
기구는 일어설 起, 곧 상상력을 불러 일으킴을,
승구는 이을 承, 곧 첫번째 기구의 생각을 이어 나감을,
전구는 구를 轉, 좀 어려운데, 이제까지의 생각이나 표현 형식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게 아니라,
                      멀리뛰기에서 '구름판'에서 도약하듯, 상상의 양식을 '비틀어 보는' 의미를,
결구는 맺을 結, 당연히 생각이 전개된 것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구실을 하는 거야. 

이 시도 기승전결의 4단 구성으로 볼 수 있겠다.
4단 구성은 어쩌면 모든 문학의 '종결자' 노릇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을지 몰라.

1연에서 상상력을 불러 온단다.
봄비가 그치면 마음 속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게 아니라,
'서러운 풀빛'이 짙어올 거래.
도대체 화자에게 어떤 서러운 일이 있었던 걸까? 

2연에선 그 상상력을 이어서 더 넓게 펼치는 거야.
화자는 서러운데,
보리밭은 푸르게 변해가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종달새는 조잘거리며 생동감 넘치는 세상을 연출하겠지.
화자가 왜 서러운지 더 궁금하게 만드는 것 같지 않니? 

3연에서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흘러 나가는 듯 보이게 할까?
봄비가 그치면 시샘하며 벙글어져 피어날 고운 꽃밭을 배경으로
처녀애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새로이' 선다고 하고 있단다.
꽃이 피면 원래 여학생들은 몇 명씩 모여서 사진을 찍곤 하잖아.
그래서 어머니들 학창시절 사진 보면 꽃밭에 몇 명 모여 찍은 사진들이 다 있단다.
아빠들은 잘 없어. 아빠들은 돌 위에서 폼생폼사하던 사진들이 더 많거든. ㅋ
나는 서러운데, 그 이야기는 어디로 가고,
봄이 되면 꽃밭에 여학생들이 새로이 서서 사진을 찍을 광경을 상상해 본단다.  

여기까지는 상상이 펼쳐지긴 했지만, 도무지 뭔 얘길 하는겨? 이렇게 되고 있는데,
드디어 4연. 종결을 지어야 겠지?
화자가 '서러운 이유'도 등장하고,
꽃밭의 여학생들이 '새로이' 서는 이유도 등장하면서,
마치 폭포가 그 높은 절벽을 주저하지 않고 뚝! 떨어져 내리듯,
급전 낙하하는 연이란다. 

그 여학생들 또래의 임이 죽은 거잖아.
임은 영정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고,
그 사진 뒤에는 화안한 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데,
현실 속의 임 앞에는
봄이 되면 땅에서 피어오르던 아지랭이처럼,
향 연기만 가득 피어오를 뿐이니... 
생각이 갑자기 아득해지면서 먹먹해지는 느낌이야.  

1연에서 등장한 '마음 속 강나루의 서러운 풀빛'은
고려때, 시를 가장 잘 써서 김부식의 질투를 받아 죽게 되었다던 정지상의 시,
송인(임을 보내며)에서 등장하는 구절이란다.
사물에 화자의 감정을 <이입>한 구절로 유명하지.
정지상의 '송인'도 한번 감상해 보자.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정지상(鄭知常), 송인(送人)>

비 갠 긴 언덕 풀빛 푸른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할 것인가,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이규보의 파한집(破閑集) 수록>

이 시의 기구(제1행)에서 '봄비'의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의 서러운 풀빛'을 가져온 거야.
대동강 가의 가장 큰 도시가 '평양'이고 좀더 하류로 내려가면 '남포'란다.
임을 보내는데 왜 이렇게 펑펑 눈물이 날까?
속된 말로 하면 '뻥'이 좀 심하잖아.
대동강물은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더해져서' 영원히 마르지 않을 거라고 하니 말이야. 

인도에 가면 '갠지즈 강'을 '강가'라고 부르면서 인간의 고향, 어머니처럼 여긴대.
거기에 가면 좀 깨끗지 않은 물인데도 사람들은 성스러운 강물에 몸을 담그고 정화한다는구나.
그런데, 그 옆에서는 나무토막을 쌓아 놓고 시신을 태우기도 한대.
돈이 없어 장작이 부족하면 시신이 다 못타고 남는데, 그걸 짐승이 물고 가기도 한다더구만.
지금은 강물에 유골을 뿌리는 것을 '수질오염'을 우려하여 금지하고 있다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신은 화장해서 강에 뿌리는 것이 일상적이었단다. 

고려 시대는 불교가 왕성하던 시대였어.
불교에서는 고승들도 죽으면 화장해서 들판이나 강가에 뿌리곤 했겠지.
대동강 가에서 '영원한 이별'을 한 사람들의 눈물은 얼마나 슬픈 그것이었을까. 

이수복의 '봄비'의 이별처럼,
정지상의 '송인'의 이별 역시 '사별'이라고 아빠는 생각한단다.
인간들의 '이별'은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옅어지는 것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금세 잊기도 하는 거거든.
김소월의 '진달래 꽃'의 이별도 '사별'일 거라고 쓴 적 있지?
헤어지는 사람에게 꽃을 뿌리고는 밟고 가라는 상황은...
글쎄, 사별의 경우에나 시적으로 어울리는 거란 말이지.

정지상의 '송인'의 이별부터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이별을 계승한 시인으로,
섬세한 한국적인 정감을 '한(恨)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시인으로 이수복을 평가하기도 한단다. 

어제 '상상력'을 이야기하면서
관계적 거리가 '먼 것'을 연결하는 것이 '창의적 상상력'이라고 했던 기억 나니?
오늘은 어쩌면 한국 시 역사상 가장 '이질적인 것 - 그러니깐 둘 사이의 질적 차이가 큰 것'을
바로 은유법으로 가져다 붙인, 그런 시를 한편 읽어 보자.
우선,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을 읽고 이야기 나눠 보자꾸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 김춘수, 나의 하나님>

어떤 느낌이야?
혹시 교회다니는 친구라면,
이 페이지를 확 찢어버리고 싶을지도 모를 일 아닐까?
일반적인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이 아닌,
유일신으로서 절대자인 '하나님'이라고 불렀으니 기독교의 하나님인 것은 틀림이 없는데 말이지. 

이 시를 이해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이 시를 이해하려는 일도 의미가 없는 시란다.
전에 '꽃을 위한 서시'에서 '본질이나 의미 탐구는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이야길 한 적 있지?
우리는 겉보기(현상)만을 할 수 있을 뿐이지,
현상의 본질의 의미를 안다는 일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는 시였단다. 

그렇지만 시를 감상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창의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이니...
우선 이 시의 첫 구절.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이
신도들이 열렬히 믿고 따르면서 인생의 기둥으로 삼고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신성 모독일 수 있겠지.
그렇지만, 화자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신도요, 제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시작하는구나.
그러려고,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을 맨 앞에 얹었겠지?  

세 가지의 은유를 늘어 두고,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 것도 화자는 독실한 신자임을 강조하는 의미라고 볼 수 있겠다.
결코 나의 이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니다!'라고나 할까?

그 다음은 'A는 B다'와 같은 '은유'가 주주룩 나열되어 있다.
그걸 우선 도표로 그려 보자. 

하느님 당신은
= 늙은 비애(悲哀)
=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
=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 놋쇠 항아리
=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 순결(純潔)
= 삼월(三月)에 /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 연두빛 바람

이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할 수 없단다.
도저히 말로는 통하지 않는 지경이 있단다. 

부처님이 제자들을 모아 두고는 연꽃을 한 송이 손으로 들어 올렸다.
아무 말도 없이.
그러자 제자들은 멀뚱멀뚱 쳐다보기도 하고,
서로 마주보며 의아해하기도 했지.
그러던 중, 부처님의 제자 종결자인 '가섭'이 빙긋이 웃었다고 한다.
바로 '염화미소'라는 것이다.
말이 없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이심전심'의 지경이고,
언어가 없어도 소통이 가능했던 '불립문자'의 수준이었지. 

이 시가 이뤄지게 된 배경을 먼젓번 '승무'의 스토리처럼 상상해 보는 일이
어쩌면 염화미소, 불립문자의 가르침을 얻어듣는 길이 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1974년 3월 27일 수요일 날씨 : 흐리고 꽃샘추위로 바람이 맵찬 날

나는 밤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학기 초라, 새로운 학생들을 받아서 가르치느라 매일이 고단합니다.
3월은 '프레시'한 신입생들이 들어와서 학교가 어수선합니다.
새싹은 언제나 그렇게 제맘대로인 것 같다는 생각을 시로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수요엘에는 대학 강의까지 저녁 시간에 겹쳐 몹시 피곤하였던 모양으로,
발바닥이 성냥의 황덩어리라도 된 듯, 불이 일 것처럼 화끈거립니다.

공자님은 주역을 가죽 끈이 세 번 떨어져 다시 묶어가며 읽으셨다지만,
내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읽고 있는 '릴케'의 시집은 다행히 떨어지지 않습니다.
릴케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릴케의 마음 속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끊어지지 않는 기도에 대하여 마음 속 가득히 감동을 느끼게 되는 이유로,
나는 릴케의 시집을 읽고 또 읽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 오셨다 갔는지도 모르는 뒤숭한 인간이지만,
릴케의 시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집니다.
사물 안에서 정확하고도 치밀하게 팽창하는 하나님의 존재가
익어가는 열매 속에서나
여물어가는 곡식 속에서 탄탄하게 보이거든요. 

잠시 쉬어가려 공원 구석 나의 낡은 벤치를 찾아갑니다.
그 벤치 옆엔 가로등이 있어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지만,
의외로 연인들은 가로등 저편에서 속삭이길 좋아하지요.
아뿔싸! 나의 낡은 벤치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벤치는,
어떤 늙은이가 가마니때기를 하나 덮고 이미 점령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들려주신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이를 당신으로 여기라고 하셨다던 말씀입니다.
저 벤치에,
자기 키보다도 짧은 벤치에,
자기 키보다도 훨씬 짧은 가마니를 덮은 늙은 거지에게도 예수님이 내려오신 걸까요?
아, 하나님. 당신은 <늙은 거지의 슬픔>과 함께 하여 주실 건가요? 

안식의 장소인 벤치를 도난당한 듯 빼앗긴 마음은 더 허전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마니 덮은 거지 노인 위에서
예수님, 당신을 만난 이후로 내 발은 화끈 거리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 속에 가득하셨던 당신은,
내 눈을 가로등 아래 활짝 팔을 펼치고 만세를 부르고 섰던
느릅나무 잎새를 우러러보게 하셨습니다.

늘 가로등 밑 벤치에서 릴케의 작은 글자들을 쓰다듬던 제가 안쓰러우셨던 걸까요?
그 가로등 아래 아직도 검은 빛의 느릅나무 그 속에서 당신은 웃고 계셨더랬어요.
아, 하나님, 당신은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으로
어두운 제 눈을 화안한 신록으로 개안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공원을 거쳐 돌아오는 늦은 밤.
구멍가게에서 환희 담배를 한 갑 사서 돌아설 때,
가게들은 문을 닫고 있는데,
내 셋방의 건너편 정육점엔 아직도 벌건 형광등을 켜놓고 있습니다.
아, 거기에는
그 벌건 형광등 불빛 아래에는
내 새끼손가락보다 굵직해 보이는 쇠꼬챙이에 꿰인 커다란 살점들이
굳어져서 덜렁거리지도 않고 매달려 있더군요. 

인간들이 제 배를 불리겠다고,
동물의 시신을 오래오래 보관했다가 먹어 보겠다고,
냉장고 안에 넣어둔 차가운 살점 위로 비치는 붉은 빛의 형광등은,
당신의 존재를 날마다 일깨워주는 교회 첨탑의 붉은 십자가의 불빛 그것이었습니다.
날마다 동물의 비린내를 떠올리던 그 붉은 형광등 조명을 불쾌해 하던 난,
십자가의 붉은 빛이 내 동공을 지나면서 경건함을 불러 일으키듯,
인간 욕망의 제물이 된 돼지의 넓적 다리를 위하여,
또는 소의 심장 옆 갈빗살이나 자유롭던 꼬리를 위하여,
하나님, 당신께서 거기 함께 하고 계셨음을 이제야 보았습니다. 

어젯밤의 내 발걸음과
오늘밤의 내 발걸음은 똑같은 길을 따라 지나온 것이었는데도,
어젯밤에 앉았던 공원 벤치와, 릴케의 시와, 정육점의 붉은 빛 속에선 당신을 만나지 못했지만,
오늘밤 빼앗긴 나의 벤치 덕분에,
<늙은 비애> 위로,
그 벤치를 이불처럼 덮고 있던 <신록의 느릅나무 새싹> 사이로,
정육점 붉은 빛에 얼어 붙은 <커다란 살점>그 빛으로 당신은 제게 오셨습니다. 

아니, 당신은 날마다 제게 오신 것이지만,
그래서 저를 일깨우고 가르치고 옳은 인간으로 살도록 이끌어 주려 하셨지만,
학생들이 우러러보는 실력파 교사로,
대학 강단에까지 선다는 우월감으로,
시인 릴케를 사랑하는 시인이라는 잘나빠진 욕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외면했던 저를 발견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
진정으로 저의 발걸음을 따라서 하나 하나 제 발자국을 따라서
어디에나 함께 임해주셨던 당신의 진심을,
인간의 죄를 대속하려 모든 고통을 짊어지신 예수님 덕택으로, 
죄 사함을 받았지만 당신을 믿지 못했던 저 자신을 그래도 사랑으로 늘 안고 오셨던 당신의 진심을,
이제 십분의 일, 백분의 일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 릴케가 그토록 사랑하였던 러시아 여인 루 살로메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릴케가 모든 사랑을 바쳤으나 결국 완전한 사랑을 위하여 이별을 택한 슬라브 여인을...
릴케가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놋쇠 항아리'같은 슬라브 여인 루 살로메를 말입니다

나는 당신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꿈도 꾸고 싶지 않으며,
당신이 동의하시지 않는 어떤 소망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영광되게 하지 않는 어떤 행위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의 심장은 마리아 상 앞의 한 램프처럼,
아름다운 당신 앞에서 불타고 있습니다. <릴케, ‘루 살로메에게 보낸 편지’ 중>

아아, 하나님.
제가 그렇게도 완벽한 추구의 대상으로 삼는 시인 릴케의 심장을 사로잡아버린 이 여인,
루 살로메에게 바치는 릴케의 이 노래는,
어쩌면 하나님 당신께 바치는 릴케의 사랑과 존경의 표현은 아니었을는지요.
그리고 릴케가 결코 얻을 수 없을 거라고 비탄에 빠져 노래부른,
루 살로메의 마음 속에 가라앉은 <놋쇠 항아리>에는,
닦고 닦노라면 윤기가 반들거리는 놋쇠 그 안에 당신이 계셨던 것이 아니었을는지요. 

꽃샘추위의 바람이 길거리를 쓰다듬고 다니는 깊은 밤입니다.
하느님, 제 차가운 잠자리 곁에서도 함께 하심을 알게 해주신 오늘 밤.
제 기도는 오로지 당신을 위한 감사 뿐입니다. 
당신께 드리는 영광 뿐입니다.  

다음날.  날씨 : 오전에 봄비가 내리고 기온이 많이 올라 포근하게 느껴지는 날 

어제 늦게까지 찬바람을 쐰 탓인지, 삼월의 격무 탓인지,
침을 삼키기 힘든 통증에 깨어 새벽을 지냈습니다.
약국이 문을 열기를 기다려 진통제를 사고, 학교에는 하루 결근을 통보하였습니다.
약이 강했는지, 내가 약했는지,
하나님, 당신의 손길 덕분이었는지, 참으로 단잠을 푹 잤습니다. 

꿈 속에서 루 살로메가 릴케의 사랑을 받아들여 환하게 웃는 즐거움도 맛보았답니다.
슬라브 여인의 놋쇠 항아리는 릴케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고,
윤기가 반들거리며 즐거운 노래라도 부르는 듯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지요. 

좀 원기가 돋았지만, 담배 연기는 삼킬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당에선 주인집 아주머니가 풀린 날씨를 기념하여 송희 목욕을 시키나 봅니다.
송희는 이제 여섯살 난 아가씬데 나랑도 제법 친합니다.
샌샌님~ 하면서 제법 따라붙으면 뽀빠이라도 하나 얻어 걸린다는 재미를 느꼈나 보지요. 

봄비가 살푼 내린 대기는 세상을 더 윤기나게 합니다.
장독대 위에 조금 고인 연못에서도,
부불어 오른 처녀 가슴 같은 목련 나무 꽃봉오리에서도,
하나님, 당신은 반짝이는 웃음으로 세상을 가득 환하게 하십니다. 

송희 년은 물이 뜨겁다는 둥 온갖 소리를 재잘대면서,
목욕통 안에서 떠들어 대고 있나 봅니다.
미닫이 문을 열고 잠시 내어다 보니,
아, 하나님.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목욕통 위로
우리 귀연 송희가 하마나 찬바람에 다칠세라...
화안한 햇살을 가득가득 머금고,
대낮에도 옷을 홀라당 벗고도 너무도 즐거운
뽀얀 속살마다 여리디 여린 순결
함으로 가득찬 송희의 온몸 위로
당신은 가득 뿜어져 내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릴케를 읽으면서도 날마다 그의 고독을,
예술가의 외로움이 뿜어내는 표독스런 언어의 표창들을,
저는 마치 하나님의 은총인 양 자랑하곤 했던 지난 날들을 돌아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어젯밤과 오늘 아침 사이에 제게 내려 앉으셨던 그 모든 순간을
제가 감히 시로 쓸 수 있을까요? 
제 연필의 흑심 위로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의 손을 함께 얹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나의 하나님 

                                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시가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이라고 상상한다면 어떨까?
각자가 만들어낼 수 있는 <나의 하나님> 스토리는 다양하겠지.
그렇지만, 창의적 상상력이란 이렇게 머~얼~~~리 떨어진 것들을,
그 거리를 뛰어넘는 <관계 부여>에 성공하는 일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수학 시간에 배웠던 '뫼비우스의 띠'의 원리를
소설에 넣어 봤던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어느 이동통신 회사의 로고처럼 말이다.  

아빠가 상상하려고 했지만,
저 날짜의 요일이 뭔지는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하겠기에
인터넷에서 '요일 찾기'를 검색해서 알아본 거란다.
이렇게 세상은 상상만으론 안 되는 거고,
연구해야 할 것도 많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 1974년 3월 27일의 요일을 알아보게된 원리... 


 

1. 1974년의 뒷부분 2자리 '74'를 취한다. 
2. 74를 4로 나누어 몫인 '18'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3. 월건수표에서 3월의 월건수 '4'를 취한다.
4. 날 수가 27일이므로 '27'을 취한다.
5. 앞의 네 수를 모두 더하면 '74+18+4+27=123'인데 이 수를 7로 나누어 몫(17)은 버리고 나머지 '4'를 취한다.
                                         (만약, 나머지가 0이면 7을 취한다.)
6. 세기수표에서 1974년은 '0'이다. 이 수를 5.에서 구한 나머지 '4'와 더하여 '4'를 얻는다. 
7. 요일수표에서 4에 해당하는 요일은 <수요일>이다.


댓글(2) 먼댓글(1)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낮에나온반달 2011-02-1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 위의 글이 글샘님만의 <나의 하나님>이란 말이지요?
늘 감탄하지만 또 한번 더 감탄!

봄은 아직이지만 겨울 기운도 스러진 요즘같은 환절기...건강하셔요.

글샘 2011-02-19 17:22   좋아요 0 | URL
도무지 가르칠 수가 없을 때, 제가 쓰는 방법이죠. ^^
 

어제에 이어 조지훈의 시를 살펴 보자.
우선 지지난해 수능에도 등장했던 '승무'를 보자.
이 시는 정말 유명한 시여서 줄줄 외울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란이 깎은머리
박사(薄紗)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닢 닢새 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하늘 한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여저 감기우고 다시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 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조지훈, 僧舞>

뭐, 교과서에도 실려서 다들 알고 있는 조지훈의 승무란다.
익숙한 시인데, 학생들에게 이 시를 이해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더구나.
그래서 아빠는 이 시 수업하기 전에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단다.
애들이 다들 긴가민가 하고 듣는데, 사실은 지어낸 이야기야.

화자는 30대 중반쯤의 신문 기자쯤 됩니다.
절간에 어떤 스님과 승무에 대한 취잿거리를 만들 일이 있어서 절에 하루 묵습니다.
초저녁에 개울에 나가 땀을 식히고 있는데,
조용조용한 걸음의 한 비구니를 만나죠.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이었는데,
저녁을 먹고 나서도 마음 속에 계속 비구니의 표정이 남아있습니다.
무슨 사연으로 스님이 되었을까...
괜히 마음 속이 짠해집니다.

그러다 밤이 이슥해서 부처님께 바치는 공양으로 '승무'가 펼쳐집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이 기자는 줌렌즈로 당겨가면서 승무를 촬영하곤 하는데요.

아,
승무를 준비하는 스님이 아까 그 비구니인 거예요.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왜인지...

얇은 비단으로 하이얀 고깔을 접어 쓴 모습,
뷰파인더로 보인 그 모습은 한 장의 나비였어요.
아, 중력의 지배에 개의치않고,
공기의 저항을 최대한 이용해 나풀거리며 공기 속의 계단을 찾아가는 나비 말이죠.  



스님의 두 뺨으로 불빛이 비치는데, 왠지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그 눈물은 여승의 눈물인지, 뷰파인더를 바라보고 끔쩍이는 기자의 눈물인지, 분간도 안 가지만요.

텅 빈 무대에 노란 촛불 둘이 말없이 녹고 있습니다.
고요,
원시적인 고요함이 지배하고 있어요.
아주 정적이죠.
뷰파인더 안에서 간혹 한들 흔들리는 촛불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정지한 상태 같습니다.

오동잎 잎새에 달빛이 비친 배경으로, 드디어,
승무가 시작됩니다.
긴 한삼자락을 휘감아 하늘을 가리웁니다.
어쩌면 나비처럼 중력감이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에요.
이제 뷰파인더에 스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아름다운 알록달록 의상에
화려한 손동작이 아름다웁게 가득 찼습니다.

그러다, 작가는 찍었어요.
새초롬하게 내민 외씨같은 버선발 한 쪽.
여승은 동작을 줄이고,
천천히 슬로우 슬로우... 데드 슬로우로...
여리게 여리게 피아니시모로...
먼 하늘 한개 별빛을 응시합니다.

작가는 다시 비구니의 얼굴에 초점을 맞춰요.
아~ 그러다 보고 말았어요.

그 이쁜 복사꽃 두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 맺힌 것을...
찰칵찰칵찰칵, 연속 사진으로 그 방울을 잡아내려 계속 찍습니다.
세상사에 시달린 한 가냘픈 인생이,
어쩌다 머리를 밀고, 번뇌를 별빛으로 보내는 승무를 추고 있는 것이냐!
아, 인생의 사닥다리는 어디에서 끊어져있는지 알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다시 동작은 이어집니다.
나어린 여승의 동작치고는 무척이나 유연하고 장엄해요.
그래서 그 동작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합장이라도 해야할 듯 한 느낌이랄까?

시간은 점점 흐르고 밤이 깊어 귀뚜라미 소리도 어디선가 들리는데요.
다시 스님의 모습으로 가득한 뷰파인더 안에는,
한 마리 나비로 정지한 여승의 모습이 잡힙니다.
처음의 나비와는 조금 다른 나비죠.

번뇌를 별빛에 의탁하고 난 후라서 그런 걸까요?
뭔지 모를 애상감에 젖어들게 만드는 장면입니다.

이런 이야기야. 어때?
조지훈의 승무,가 그림으로, 아니, 사진으로 가득 마음에 들어차지 않니?

이런 시를 그냥,
주제 : 승무를 통한 속세의 번뇌의 종교적 승화
이렇게 외워버리면 재미없잖아.

빈 칸을 조금 메워보고,
그러면서 시를 익숙하게 끌어안고 쓰다듬고 그 부드러운 언어의 결을 느끼는 거야.
그게 시를 읽고 감상하는 법이란다.

좀 느껴지니?
매끈거리면서 보들보들한
어쩌면 어린아이 젖살에서 나는 향기라도 맡아질 것 같은 시의 냄새가...  



아빤 이렇게 눈을 감고 마음 속 시각적 심상으로 시를 감상하다 보면,
시가 마음 속 가득 들어차는 것 같단다.
지어낸 이야기 부분을 읽고 다시 <승무>를 읽어 보렴.
왜 이 시의 주제가 <승무를 통한 속세의 번뇌가 종교적으로 승화됨>인지...
그 여승의 눈에서 굴러 떨어지는 눈물의 의미가
그 아름다움 속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의 <역설>이 어떤 마음일지 말이야. 

고와서 서러워라...
번뇌는 별빛이다... 이런 게 모두 역설적이잖아.
다음엔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하나 들어 보렴.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
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
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
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石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돌문이 생긴 곳들이 있겠지.
그 돌문을 보고 이 사람은 이런 상상을 한 거야. 

이 시는 조지훈이 그의 고향 경북 영양 일월산 황씨 부인 사당에 전해지는 전설을 소재로 하여
풀리지 않는 원한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야.
그 전설의 내용은 이렇대.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처녀는 그녀를 좋아하던 두 총각 중 한 사람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신혼 첫 날 밤 잠들기 전 화장실을 다녀오던 신랑은 신방 문에 비친 칼 그림자를 보고 놀라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 칼 그림자는 다름 아닌 마당의 대나무 그림자였대요.
그런데도 어리석은 신랑은 그것을 연적(戀敵)이 복수하기 위해 숨어 든 거라고
그 그림자가 자신을 죽일 거라고 오해한 거였대요.
신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족두리도 벗지 못한 채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답니다.
결국 신부는 깊은 원한을 안고 죽었는데,
그녀의 시신은 첫날 밤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오랜 후에 이 사실을 안 신랑은 잘못을 뉘우치고 신부의 시신을 일월산 부인당에 모신 후
사당을 지어 그녀의 혼령을 위로하였답니다. (일월산 황씨 부인당 전설)

돌문을 보고 시인은 기다리던 여인을 떠올린단다.
<창의적 상상력>이란 가까운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먼 것을, 유사점을 발견하여 관계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창의적인 것이지. 

그래서 누구나 경치 좋은 곳의 돌문을 보고 '아, 경치 좋다~'하고 말면, 그건 꽝의적인 거지.
그 돌문을 보고, 전설 속의 <기다림>을 떠올리는 사람. 이런 게 창의적이야.
미래 세계에 가장 필요한 속성이라는 창의력. 

창의적 사고력에는 '논리적 사고, 관계적 사고' 등등이 있는데,
논리적 사고는 뭔가를 분류해서 늘어놓는 거래.
근데, 분류하는 데도 창의적인 분류가 필요하고,
관계를 맺는데도 거리가 먼 것의 유사성을 <유추>해 내는 능력이 창의적 논리력이 되는 거지. 

그렇게 보면,
미래를 준비하는 데 시만한 것도 없을 것 같구나.
시를 읽고,
이 시를 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한 건지... 생각해 보는 것이 창의적 사고력의 발단이거든.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 같은 구절도 멋지잖아.
다른 사람들은 절벽에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위의 부분을 보고 캬~ 하고 말 것을
시인은 전설과 관련시켜서 신방(新房)이 있는 계단 위를 상상하잖아.
거기 '검푸른 이끼가 앉'은 건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임이 오지 않았음을 연상시키고 말이야. 

상상 속 신방에서 촛불을 켜고 기약 없이 신랑을 기다릴 신부의 마음을 상상하는 시인의 눈엔
화강암 단단한 돌문이 얼마나 안타까이 보였겠니?
아, 저 돌문이 열리려면, 그 신랑이 와서 살포시 보듬어 줘야 할텐데 말이다... 이러고...
아이고, 짠한 사람 눈에는 짠한 사람만 보인다더니... 

천년이 지나도 눈감지 않는 데서 '한'이 서서히 응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길숨한 속눈썹의 방울 이슬은 상상 속의 신부가 기다림에 지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야.

'돌문이 있습니다'로 시작해서
중간 부분에 전설을 삽입하고
마지막 부분에 '돌문이 있습니다'를 반복하면서 아련한 여운을 만드는 효과를 만들고 있구나.

이 시에선 시인과 화자의 시점이 다르지.
화자는 신부의 시점이란다.
'당신'과 '저희'에 표시해 두었으니 한번 느껴 보렴.
당신이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신부, '나'의 슬픔을 말이야.

이 시의 주제라면 '석문을 보고 느낀 전설 속의 끝없는 기다림과 한, 풀리지 않는 원한' 같은 것이지.
이 시와 유사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 시로 서정주의 '신부'도 한번 읽어 보렴.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
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알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
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
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신부)

이 두 이야기에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꼬마 신랑의 어리석음과,
신부의 어리석을 정도의 기다림이 그런 것이겠지.
한 살이라도 어릴 적에 며느리를 얻어 들여야 식구가 늘어 노동력이 늘었던 농경 사회의 모습일 것이고,
삼종지도(三從之道, 어려서는 아비를, 혼인한 후엔 남편을, 늙어서는 아들을 따르라)를 지키라고 배운
어리석은 여성이 추구하던 바가 <현모양처>였단다.
그야말로 대가리에 아무 개념이 없는 바보 여자를 원했던 거지.
현모양처는 똑똑하고 지혜로운 여자가 아니란다.
그저 바보처럼 '소나 키우는 여자'라고 보는 편이 고전에선 가깝겠다. 

저 여성들이 결코 '지혜'나 '똑똑함'과 상관있어 보이진 않잖아? 

돌쩌귀는 여닫이문에 다는 경첩의 구실을 하는 것으로
문짝의 아래위로 톡 튀어나온 쇠를 박아 <수돌쩌귀>로 이름붙이고,
문틀의 위아래에에 홈을 파고 쇠를 넣어 <암돌쩌귀>로 이름붙인 부속품이란다. 

이야기가 들어있으니 <서사적>이라고 할 수 있지.
그 이야기의 시간 구조가 펄쩍 뛰는 부분이 문단을 바꾼 부분이 될 거야.
앞문단과 뒷문단의 마지막 부분은 '버렸습니다'로 반복되어서 대칭을 이루고 있단다. 

'매운 재'란 것은 '매캐한 냄새'가 나는 재가 되었음도 의미하지만,
'매울 렬(烈)'자를 쓰는 <열녀>를 상징하기도 한단다.
<열녀>는 한 서방만을 섬기기를 목숨걸고 지키는 어리석은 여성이 되라고 조선이 여자들에게 가르친 덕목이지.
그래서 남편이 병으로 죽고 여자 혼자 살면,
가족들이 며느리나 형수가 '자살'하기를 원하면서 미워했다고 그래.
'열녀'가 되면(자살해 주면) 국가에서 포상도 있고, 혜택도 있고 그랬다더구나. 

'초록 재와 다홍 재'는 신부의 의복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신부의 영적 존재의 신비로움을 떠올리게 하지.
이런 상상을 통해서 독자는 한 차원 상승된 전설을 시를 통해 접할 수 있는 거란다. 

산문시의 구조에 토속적 이야기가 들어간 시다.
'전통적 여인의 슬픈 정절' 정도면 주제가 되겠지?

암튼 시인의 눈을 통해 우리는 <창의적 사고력>, <창의적 판단력>을 배울 수 있겠다.
조지훈은 '지조의 시인'으로도 불리는데, 그가 쓴 <지조론>이란 수필의 덕을 보았겠다. 

세상에는 제 뜻을 굽히지 않는 절개를 가진 사람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는 변절자가 있단다.
그런데 옳음을 위하여 그름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지조'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익을 위하여 그름을 행하는 사람은 <악인>일 것이고,
'지조를 가졌던 자'가 '이익을 위하여 악인이 되는' 인간을 '변절자'로 보면 되겠지.
우선 조지훈의 '지조론'의 일부분을 읽어 보자꾸나.

신단재(申丹齋)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제 강점기라서)
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들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다.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談)의 한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 있는 백성을 속여 야당(野黨)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 교활한 지혜)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박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란
뜻이 깃들여 있다. <지조론(志操論) ―변절자(變節者)를 위하여, 1960년 3월 '새벽'지 수록>

일제 강점기의 단재 신채호나 만해 한용운처럼 꼿꼿한 지조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 글은 누구를 대상으로 쓴 것일까? 

야당의 투사에게 던진 말이다.
야당이라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체 하며 백성을 속이다가,
감옥에 가서 온갖 고통을 참고 견딜 힘도 없으니 싸우는 체만 하다가,
권력자가 미끼로 무슨 장관이나 무슨 특별위원회에서 일하라고 줄을 던지면,
잽싸게 낚아 채는 더러운 족속에게 던진 말이다. 

제대로 된 야당이라면, 여당(권력을 잡은 당)의 잘못을 엄하게 질책하고,
감옥에 가거나 고난을 입을 각오를 해야할 터인데,
슬그머니 저항의 대열을 이루는 체 하다가,
선거만 지나면 다시 부르조아의 전선으로 합류하고 마는 야당은 <지조도 없는 변절자>라는 말이다. 

아, 한국의 정당정치는 아직도 이렇게 부끄럽다.
물론 이 시는 요즘의 것이 아니라 1960년 3월,
4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이니 참 어둡던 시절이다.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다 했으니 그 당시 인사들이야 얼마나 한심했으랴.

세상은 변하는 것 같지만 또 이렇게 변하지 않기도 한다.
어제 오늘, 조지훈의 시 몇 편을 공부했다.
시를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지혜로운 사람들이 바라보던 창의적인 세상을 배우는 일도 재미있을 것임을 몇 번 강조했다.
그러니 그리 하여 보기 바란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랜만이지?
아빠가 일 주일간 다녀온 곳은 충북 청원군의 한국교원대학교란 곳이다.
원래 사범대학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교사들의 연수기관으로 쓰이고 있다.
물론 사범대학은 있긴 한데, 너무 시골이라 별로 인기는 없다. 

요즘 아이들을 적게 낳는다고 하잖아.
그러니 사범대나 교육대가 점점 줄어들고 인기도 없다.
국가란 제도가 유지되려면 국민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처럼 국민이 급격히 줄어든다면
위기가 닥칠 날도 올지 모르겠다. 

오늘은 '청록파' 시인으로 유명한 조지훈 시인의 시를 몇 편 살펴 보자.
청록파 시인이 유명해진 것은, 독재정권 시절 워낙 비판적 시를 교과서에서 제거하다 보니,
교과서에는 별로 저항적이지 않은 시인들의 시로 채워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는 것이 아빠의 의견이다. 

우선 그의 '낙화'를 한번 읽어 보렴.
꽃이 지는 걸 보고 눈물이 나는 아저씨의 마음을...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 낙화)



이 시를 읽고 나면 입 안에 어떤 운율이 남는단다. 특히 중간 이후 부분...
뭐뭐가 뭐뭐하니 뭐라뭐라고... 이렇게 3음보의 7.5조가 입에 짝 붙는다.
7.5조의 음률은 일본에서 인기를 얻은 시들에서 쓰이던 것들의 영향을 받은 거지.
일본을 죽어라 싫어하는 교수들은 굳이 <3음보>라고 우기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 영향 받은 거를 변명할 필요는 없을 거로 보인단다. 

슈퍼마리오 같은 만화영화에 보면 '나는 나는 마리오 / 마리오 박사' 이런 구절이 나와.
바로 7.5조지.
일본 시 중에 '하이쿠'라고 해서 5.7.5의 짧은 시가 있단다. 

낙화란 시는 별 내용 없어.
그저 꽃이 지는 걸 보고 느낀 감상을 적은 거야.
1연에서, 낙화의 상황을 상정하고 있어. 그런데, 바람 탓은 하지 않는다. 자연의 섭리지.
2연에서 별이 스러지는 저녁이 되고 있다.(주렴은 구슬로 엮은 발이란다.)
3연에선 귀촉도(소쩍새) 울음과 함께 조금 감상적(센티멘탈, 슬픈 생각이 드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4연에선 촛불마저 끄고 싶단다. 꽃이 지는 모습을 더 감탄하려고...
5연에서 꽃지는 그림자가 뜰에 어리는 모습은 전통 한옥의 창호지에 비치는 모습같구나.
6연은 하이얀 미닫이 창이 우련(보일듯 말듯 은은하게) 붉게 비친다. 

7연은 은일사(묻혀사는 이)임을 드러내고,
8연에서 계속 묻혀 살고 싶음을 드러낸다. 아는 이 있을까 두렵다(저어한다)고 하니 말이야.
9연, 아~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더 설명하면, 옥에 티를 묻히는 꼴이 되겠구나.
근데, 아빠는 이 시를 조금 다르게 배열해 보고 싶다.
그러면, 마치 이 시는 3연의 연시조처럼 보일 수도 있거든. 아래처럼.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 낙화) 

가장 한국적인 노래의 형식이라면 '시조창'이 아닐까 싶어.
시조창은 노래로 부르던 거였더든.
가장 한국적인 배경인 창호지 바른 미닫이문 앞에서
붉게 비친 꽃이 뚝뚝 지는 모습.
그리고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화자는 '사라지는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삶의 비애'를 적고 싶었던 거겠지.
그게 주제지. '소멸되어 가는 것의 아름다움에 대한 슬픔' 이런 것.
이런 것이 한국적 은사의 체념과 달관의 멋이라고 한단다.
체념은 마음을 접은 상태고, 달관은 매달리지 않는 것이지.

먼저 읽었던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는
꽃의 떨어짐을 보면서 격정적인 슬픔을 노래했다면,
이 시에서는
꽃이 떨어짐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절제된 입장에서 노래하고 있단다. 

다음은 같은 화자의 '봉황수'란 시를 읽어 보자.

  벌레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鳳凰)
새를 틀어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泉)에 호곡(呼哭)하리라. (봉황수) 

한 연으로 이뤄진 시다.
제목이 '봉황수'이니 조선과 관련된 시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이성계가 세운 나라에 '조선'이란 이름을 내려 주었단다.
그리고 중국의 상징인 '용'보다 한 끗발 아래인 '봉황'을 조선 왕의 상징으로 쓰게 했다.
지금도 대통령 하사품 주변에 봉황이 그려진 것도 있단다.

   


<중국 자금성 태화전 용 조각>

'벌레먹은 둥근 기둥'과 '빈 바랜 단청'은 몰락하는 조선의 풍경이다.
둥근 기둥은 '궁전'이나 '왕가' 또는 '사찰'에나 쓰던 고급한 건축 양식이다.
조선 후기엔 조금 건방진 양반들도 두리 기둥을 쓰기도 했단다.
경주 양동마을 같은 곳에 가면 양반가에 둥근 기둥이 나타나기도 해. 

추녀 끝에는 새들이 둥주리를 마구 치지 못하도록 망을 설치하기도 한단다.
큰 나라 섬기던 사대주의로 용상(옥좌)엔 거미줄이 가득하다.
쌍룡 대신에 봉황새를 틀어올린 사대주의 조선이 망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이런 구절로 보면, 봉황은 울지 않는 새인 모양이다. 전설 속의 새.
그런데, 궁궐의 추석(궁궐 바닥을 깔던 돌조각)을 밟고 가는 화자는 울음이 난다.
궁궐에 신하들의 권위를 상징하던 패옥소리도 나지 않는다.
품계석 어디에도 화자는 몸둘 곳이 바이(전혀) 없었다. 

나라가 망해서 탄식하는 것을 '맥수지탄' 이라고 한단다.
원래 보리는 '춘궁기'를 지나서 자라기때문에
보리가 익자마자 베어 먹는 것이 정상이래.
그러다 보니, '보리가 쑥 자란 것(맥수)'은 곧 먹을 사람이 전쟁에서 다 죽고 나라가 망했음을 뜻하게 되었지.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아까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울고 싶어라>하던 화자는 이제 <곡을 하리라>고 하는구나.
봉황새(죽은 나라)야, 눈물이 속된 것만은 아니다.
이제 나라가 망해버린 이 마당에, 눈물이 속되다고 참지 말고,
꺼어이 꺼어이, 목놓아 울어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이런 의미겠지.
이렇게 두 시를 읽노라니,
자못 조지훈이 울음의 시인이 되기도 하겠구나.

이 시를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눠본다면, 선경후정이 되겠구나.
앞부분에선 퇴락한 궁궐 모습이,
뒷부분에선 쓸쓸한 화자의 감회가 드러니고 있어.
그러니 앞부분은 <사실>이 뒷부분은 <감상>이 드러난다고 봐도 되겠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길재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계워 하노라. - 원천석

이런 시조들 역시 맥수지탄(麥秀之歎)이 잘 드러난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은 조지훈의 시를 두어 편 시조들과 묶어서 살펴 보았다.
보통 시조를 '정형시'라고들 하는데
시조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노래>였단다. 시조창이라고 부르지. 

느릿느릿 부른 것인데, 종장 첫구절 석 자 부분은 악곡이 부르기 어렵고 변화가 많아.
그래서 글자를 석 자로 묶어 두었다고 그러더구나.
다른 부분은 얼마든지 글자 수를 바꿀 수 있지. 

내일은 조지훈의 유명한 시 '승무'와 '석문'을 한번 읽어 보자.
조지훈의 '석문'은 서정주의 '신부'와도 묶어서 읽을 만 할 거야.
오랜만의 강의나 너무 길어지지 않게 여기서 그만!


댓글(0) 먼댓글(1)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요즘 세계를 신자유주의 세상이라고 한다.
자유주의가 국가가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라면,
신자유주의는 국가간의 관계에서 기업의 이윤 획득을 국가가 끼어들지 말라는 것일 수도 있겠다.
물론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는 부유한 나라에 가서 힘든 노동을 떠맡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전에는 '국가의 1인당 국민 소득(GNP)'이라는 개념을 썼는데,
언제부턴가 '국가의 총 생산(GDP)'라는 개념을 쓰게 되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생산과 소비의 국가간 장벽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한국 기업은 노동력이 저렴한 중국으로 더 넘어 베트남으로 진출했으니, 그건 한국 국민의 소득은 아니지만,
한국의 생산에는 들어가는 것이다. 

무서운 것은 저런 계산 속에 무기가 수입되고, 전투기가 수입되는 것까지 포함된다는 것이지.
어쩌면 일제 강점기라는 <제국주의 시대>의 드러나는 폭력이 나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
일제나 독재처럼 드러나는 폭력은 때가 되면 민중의 저항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자유주의 경제 활동은 시나브로 민중을 메마르게 만들고 마는 세상이란다. 

오늘 살펴볼 일제 강점기의 <전원 시인> 신석정을 염두에 두고 시작하다 보니 무겁게 시작했다. ^&^
신석정의 가장 순수한 시, '어린 짐승'을 한번 읽어 보자.
옛날엔 교과서에도 실렸던 시였단다.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작은 짐승)

난이는 어릴적 화자의 친구인 모양이다.
아담과 이브가 순수하던 시절에는 옷벗고 살아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고 하더라.
근데, 선악을 구별하게 되는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부끄러워 몸을 가렸다고 하지.
'구별'이란 것은 인간을 순수하지 못하게 하는 측면도 많다는 생각이 들어.
전에 고은 시인의 '어둠'이 <순수와 평화의 경지>라고 한 '눈길'이란 시도 있다고 했지? 

난이와 화자는 어린 시절, 바다가 잘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서 자주 놀았던 모양이다.
이런 시를 <전원>적이고 <목가>적이라고 그래.
시골 이야기고, 목동의 이야기란 이야기지.

반복되어 등장하는 푸른 바다는 서해의 <부안 앞바다>란다.
지금은 새만금방조제가 들어서서 갯벌은 다 벌판으로 변해버린 땅이지.
신석정씨가 지금 살아온다면, 고향 앞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할지도 모르겠다.
이 시의 주제는 <어린 시절의 평화와 순수에 대한 동경>이 되겠다.
어른이 되고 보니 어린 시절의 평화로웠던 생각이 아름답게 떠올랐던 거겠지.

1930년대 식민지 치하의 암울한 현실에서
전원에 의탁해 나름의 울분을 삭이며 저항을 모색했던 시인의 땀과 회한이 그의 시에는 잘 드러나.

김기림은 그를 두고 "현대문명의 잡답을 멀리 피난한 곳에 한 개의 에덴을 음모하는 목가 시인"이라고 평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이 그의 시를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음엔 그의 '들길에 서서'를 읽어 보자.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어니......(들길에 서서)

화자는 자신과 푸른 산을 같은 위치에 놓고 견주어 보았다.
푸른 산에게 구름이 있듯,
자신에게도 푸른 하늘이란 <이상과 희망>이 있다는 거다.
희망이 솟구친다.
옛말에도 <청운의 꿈>이란 말도 있다.
청춘의 젊은 시절에 하늘까지 솟고 싶은 꿈을 이르는 말이리라. 

산삼은 '풍기 인삼' 같은 산삼 말고, <산의 삼림>을 뜻하는 것이다.
산에 나무들이 하늘향해 가지를 뻗듯, 화자도 하늘향해 두 팔을 펼칠 기상이 남아있다.

푸른 산도 산맥으로 지구를 딛고 살고,
화자도 연약한 다리로 부단히(부절히) 도는 지구를 딛고 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일제 강점기. 뼈에 저리도록 슬픈 생활이다.
그러나, 그 슬픔마저 좋단다. 역설적 표현이지.
뼈저리게 슬픈 걸 좋아할 리가 없잖아.
푸른 별, 곧 이상과 희망을 생각하면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비록 현실은 뼈저린 세상에 두 연약한 발 딛고 서 있지만... 

이 시의 주제는 <굳센 삶의 의지와 이상 추구> 정도면 되겠지.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별을 바라보며 살려는 굳센 마음의 다짐이 잘 드러나 있단다.
일제 강점기가 가장 가혹하던 1939년 정도의 시야. 

다음은 그의 아주 유명한 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보자.
맞춤법은 '아십니까'가 옳지만, 그 시대엔 한글 맞춤법이 없던 시대니 그러려니 하고 읽어 보자.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 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로이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이 시를 세 부분으로 나누는 일은 식은 죽 먹기지?
노란 색 칠한 부분이 반복되니 말이야.  

그 첫부분도 역시 세 연으로 이뤄져 있어 총 9연으로 된 시구나.
첫부분에서 역시 중간 부분은
<아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그 나라가 나온단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거기 가서 비둘기를 그리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냈다. 

두번째 부분에서도
<염소, 옥수수, 바다 물 소리 들리고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나라가 나온다.
일본 놈들때문에 못살겠으니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겠지.
거기서 이젠 <어린 양>을 기르자는구나. 

세 번째 부분에서
<비둘기 날고 꿩도 울고 은행잎이 날리는> 그 평화로운 나라가 나오고,
과수원에서 새빨간 능금을 따잔다. 

'또옥 똑' 따는 일은 얼마나 느릿하고 평화로워 보이느냐.
민우도 나중에 아빠가 할아버지가 되어 기르고 있는 과수원에 아이들이랑 놀러 와서,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고 싶은 생각이 드니?
만약 그렇다면...
지금 사는 게 너무 힘들다는 것일 수도 있는데... (아님 말고 ㅋㅋ) 

이 시는 <어머니>라는 청자를 상정하고 <독백>을 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어.
그 어머니와 <이상향, 탈속적 세계, 평화로운 곳>에 가서 살고 싶은 것이지.
현실 세계가 너무 부정적이어서 그런 것이다.
이렇게 다툼을 싫어한 사상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노자>다.
노자는 춘추전국 시대의 피바람을 부정하며 <다투지 말라!(不爭, 부쟁)>이란 주제를 내세웠지.

이 시는 전체적으로 첫부분의 <자유로운 삶>
가운뎃부분의 <순결한 삶>
마지막 부분의 <보람있는 삶>에 대한 소망이 잘 드러났다고 보면 되겠다.
주제는 바로 그런 삶, <이상향의 자연에 대한 동경>이라 보면 되지. 

신석정의 시 중에 그 어두운 시대가 검게 강물로 흐르는 시가 있다.
'어느 지류에 서서'를 읽어 보자.
'지류'는 본류에 흘러들기 전에 흐르는 작은 강을 부르는 말이겠지.
화자의 선 곳이 '중심'이 아닌 '주변, 지류'임을 일컫고 있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어느 지류(支流)에 서서)

강물의 흐름은 보통 <역사>의 상징으로 많이 본단다.
첫 연에서는 (강물아래로) (강물아래로) (한줄기어두운) (이강물아래로)가 반복되는
AABA 구성이 보인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새야 새야 파랑 새야
가시리 가시리 바리고 가시리... 

이렇게 자주 등장하는 패턴이지. 

어두운 강물, 검은밤, 은하수...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상징이겠다.
2연의 '낡은 밤'과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도 마찬가지다.

3연은 다시 반복이 나오고, 드디어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시절로 친다면 <해방>이 가까운 시간에,
자신은 '본류'가 아닌 '구석'에서
다시 푸른 하늘, 해방의 밝은 햇빛을 우러러보겠느냐는 한탄이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어두운 시대였다. 

그러나, 이런 암울함은 조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월드컵 열릴 때, 궁금했던 것은,
한국, 일본, 중국 등은 <국가>가 출전하는데,
<아일랜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는 <클럽>이 출전한다.
지금은 UK(United Kingdom of England)라고 하지만,
아일랜드 사람에게 '잉글리시맨'이라고 부르는 일은,
해방 전의 조선인이게 '일본놈'이라 부르던 일처럼 기분 나쁜 일이라는구나.  

그 아일랜드 출신 중에 '예이츠'란 시인이 있었대.
그의 <이니스프리의 호수섬>을 한번 읽어 보자.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나뭇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들이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으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빛
한낮엔 보라빛 환한 기색
저녁엔 홍방울색 날개 소리 가득한 곳.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예이츠, 이니스프리의 호수섬> 

화장품 브랜드에도 '이니스프리'가 있다.
자연주의~나 비슷한 의미로 붙인 이름이지. 

이 시가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와 유사하지 않니?
벌들이 윙윙대는 숲 속과 평화로운 곳.
아, 나라잃은 것들의 마음은 지구 반대편 아일랜드 사람이나
동쪽 끝의 조선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아일랜드의 시인이 읊조린 노래를 들었을 때, 조선의 시인이 눈물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거야. 

이니스프리는 시인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호수 속에 있는 작은 섬이란다.
이 곳은 히스꽃이 보라빛으로 피어나고 한낮에 햇빛을 받아 이 꽃들이 호숫가에 비침으로써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섬으로 시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래. 

 

                                                               <히스 꽃>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城)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 여섯 해가 지내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噴水)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꽃덤불)

이 시도 역시 일제 강점기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태양>을 의논하던 거룩한 이야기는 물론 <독립>에 대한 것이고,
그것은 '태양을 등진 어두운 곳'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지.

달빛이 비오듯 환하게 쏟아지던 밤.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잃어버린 조국을 슬퍼했겠지.
언제쯤이면 우리 하늘에 온전한(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냐고...
해방의 그 날은 언제나 오는 거냐고... 
가슴이 터지도록 답답해 했더랬지.

그러는 동안에 목숨을 잃어버린 벗도 있고,
먼 타국으로 망명한 벗도 있고,
몸과 마음을 판 배신자들도 생겼단다.

그러다 드디어 1910~1945년의 36년간의 식민지 생활이 끝났다.
그렇지만, 해방이 되었다고 새 세상이 온 것은 아니지.
다시 되찾은 조국의 이 하늘엔
아직도 겨울밤 달이 차갑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이룬 것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연합군이 일본을 궤멸시켰고,
결국 조선을 반으로 나눠가지는 데 합의했기 때문이지.
돌아오는 봄에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가슴가득 안고
어느 아늑한 꽃덤불에서 마음 편하게 지내고 싶다는 바람을 담은 시다. 

군사독재 정권이 무너지면 새세상이 올줄 알았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더라.
일제 강점기에 돈을 가지고 있던 친일세력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땅부자고 알부자다.
그 시대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독립군의 후손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버림받고 살고 있고 말이야. 

이 시는 1946년 6월에 쓴 시라고 한다.
광복을 맞은 기쁨과 새로운 민족국가 수립의 과제를 간절히 노래했지.
이 노래에 담긴 <차가운 겨울밤 달>은 결국 <한국 전쟁>을 일어나게 하고 말았단다.
아직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눈물 속에 살고 있고 말이야.

신석정은 그 어둡던 시대에 이렇게 시로써 작은 등불을 밝히려던 시인이었단다.
누군가는 배신을 하고, 누군가는 도망을 하던 그 시대에 말이지.
자. 이제 일주일 뒤에 만나자~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립간 2011-02-14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질문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여쭤보고 싶었던 것인데요. 보통 시를 쓸때, 제목을 쓰고, 시인을 쓰고 그 다음에 시 내용을 쓰는데요. 글샘님께서 시를 인용할 때는, 제목을 시 맨 뒤에 괄호 안에 쓰십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글샘 2011-02-18 21:48   좋아요 0 | URL
음... 그건 특별한 이유가 아니구요.
시를 한 편 감상할 땐 시 제목이 맨 앞에 있기도 하지만,
시를 여러 편 해설할 땐, 저처럼 맨 뒤에 제목과 시인을 두기도 합니다.

세실 2011-02-17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으십니까.' 마치 극존칭같은 느낌이예요. 맘에 드는데요.
이니스프리가 그런 뜻이었군요. 아 가고 싶어라 이니스프리~~

글샘 2011-02-18 21:4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시는 눈으로 읽어선 맛이 안 납니다.
입으로 읽어 봐야 '알으십니까'같은 멋스런 느낌이 살아 나죠.
공무원에게 이니스프리는 좀... ㅋㅋ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아닐까요?
화장품 가게나 가시든지... ㅎㅎ

세실 2011-02-19 10:29   좋아요 0 | URL
오홋 그나저나 이니스프리 화장품도 알고.ㅋㅋ
뭐라구욧!! 간다구욧. 퇴직금 받아서..히

글샘 2011-02-19 11:13   좋아요 0 | URL
음... 퇴직금 받아서 아일랜드로 날아가시려면...
건강을 젤 먼저 챙기셔야 할 듯 싶네요. ㅎㅎ
지금은 건강해 보이셨지만, 그리고 관계적 성격은 좋아보이긴 했는데요.(관상쟁이 ㅍㅎㅎ)
세실 님이나 저나 '일'에 대한 성격은 좀 별로인 것 같더라구요.
이니스프리 가시려면, '선배'를 본받진 못할지언정(아마, 그이는 이니스프리 가고도 남을 듯)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이 시간을 잘 살펴야 겠단 생각입니다.

2011-02-17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8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원도에는 뜻밖에 1미터가 넘는 폭설이 내렸다 한다.
자연은 이렇게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변화를 보이기도 하는데,
인간은 그런 걸 보고 이상기온이라는 둥, 기상이변이라는 둥 난리를 부리지만,
자연 앞에 인간은 좀더 겸허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음 주는 아빠가 1주일간 연수를 가야 해서 집을 비워야겠는데
스스로 할 일을 꾸준히 하기 바란다.
아빠의 문학 수업도 일 주일은 휴식이다.  

오늘은 다사로운 인간성에 대한 시를 몇 편 읽어볼까 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떨 때는 한없이 초라하고 잔인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무한하게 넓은 마음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우선 복효근의 '석쇠의 비유'를 읽어 보자. 

꽁치를 굽든 돼지갈비를 굽든간에
꽁치보다 돼지갈비보다
석쇠가 먼저 달아야 한다
익어야 하는 것은 갈빗살인데 꽁치인데
석쇠는 억울하지도않게 먼저 달아오른다
너를 사랑하기에 숯불 위에
내가 아프다 너를 죽도록 미워하기에
너를 안고 뒹구는 나는 벌겋게 앓는다
과열된 내 가슴에 너의 살점이 눌러붙어도
끝내 아무와도 아무 것과도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고독하게 알고 있다
노릇노릇 구워져 네가 내 곁을 떠날 때
아무렇지도 않게 차갑게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나는
너의 흔적조차 남겨서는 아니 되기에
석쇠는 식어서도 아프다
더구나
꽁치도 아닌 갈빗살도 아닌 그대여
어쩌겠는가 사랑은 떠난 뒤에도
나는 석쇠여서 달아올라서
마음은 석쇠여서 마음만 달아올라서
내 늑골은 이렇게 아프다 (복효근,  석쇠의 비유)

제목이 '석쇠의 비유'이니, 석쇠에 고기를 굽는 상황을 보고 뭔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관찰한 후에 깨달음을 얻었느니 <관조>라는 건 이제 알아 듣겠지? 
작가는 '토란 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의 작가란다.

꽁치나 갈비를 굽기 전에 석쇠가 <먼저> 달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다음엔 <억울하지도 않게> 달아오른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사실 좀 억울하다는 이야기다.
굽는 건 꽁치와 갈비인데, 왜 석쇠는 필요도 없이 달아 오르지?
석쇠는 좀 희생정신이 강한 넘인 것 같지?   

농담 하나 할까? 
당구장에서 배울 수 있는 4대 정신이 있대.
다이(당구대)의 넓은 마음,
다마(당구공)의 둥근 마음,
큐대(막대)의 곧은 마음, 그리고
초크(큐대 끝에 미끌림을 방지하기 위해 바르는 것)의 희생 정신. 
뭐, 당구를 쳐본 사람이라면 금세 알아듣겠지만,
당구에는 이렇게 일본어도 많이 있단다.
암튼 희생 정신을 생각해 보자는 거지. 초크처럼 ㅋㅋ  

숯불 위에서 '아픈 나'는 석쇠다.
내가 아프다~고 했으니, 석쇠가 의인화되어 있구나.
너를 죽도록 미워하기에 너를 안고 뒹굴고 나는 벌겋게 앓는다고 했는데,
앞에서는 사랑한댔다가, 이번엔 미워한댔구나.
정말 미운 건 아니겠지?
너(고기)가 제대로 익도록 하기 위해(성숙, 발전하도록 하기 위해)
나(석쇠)는 벌겋게 달아올라 앓아야 하는 희생이 필요하다. 

석쇠가 과열되어 고기가 눌어붙는 일도 있다.
그렇지만, 석쇠는 그저 희생할 뿐, 고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고기와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석쇠의 고독이다.  

근데, 여기서 과학적으로 보자면 좀 어색한 게 있다.
프라이팬이라면 이 시의 의도가 제대로 먹힌다.
프라이팬이 고기를 익히는 원리는 과학에서 배운 <열의 전도>니깐.
고체를 통하여 열이 전달되는 원리를 '전도 현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석쇠 위에서 고기를 익히는 것은,
숯에서 나온 열기가 고기에 바로 전해지는 것이다.
마치 태양열이 인간에게 바로 전해지듯이 말이야.
그런 열을 <복사열>이라고 한다.
전도는 고체라는 매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전도는 매체가 없이도 전해지는 것이니 다른 거지.
그치만, 뭐 여기서 희생정신을 고귀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과학적인 검증은 요정도로 마치자. 

고기가 잘 구워져 식사가 끝나면,
희생한 석쇠는 다시 고기의 흔적을 지우고 식는다.
고기를 사랑하지만 고기의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석쇠의 사랑은 그래서 아프다.
식어서도 아프다. 

이 석쇠와 같이 일방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퍼붓는 사랑이 정말 큰 사랑이지.
이런 사랑은 뭐가 있을까?
부모의 사랑이 그런 거란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잘 되기만 빌어주는 사랑.
선생님의 사랑도 유사한 면이 있지.
매년 제자들이 잘 자라서 둥지에서 날아오르기를 빌어주는 어미새같은 사랑. 

더구나,
그대는 꽁치도 아니고 갈빗살도 아니다.
그대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석쇠처럼 달아올라서
당신의 무엇 하나 소유하지 못하는 존재인데,
이제 당신은 나를 떠난다.
사랑이 떠난 뒤에
혼자 남은 석쇠의 늑골(갈비뼈)는 허전하고 아플 수밖에 없다. 

간혹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는 일이 있다.
그 아비에게 이 시를 보여주면,
석쇠의 늑골을 마음 속 깊이 공감하며 느낄 지 모르겠다.
선생님들도 졸업식장 단상 위에서
졸업생 대표가 읽는 '졸업사'를 들으며 그런 마음을 느낄 수도 있겠고... 

이 시는 이별의 상황에서
당신과의 추억 하나 남지 않는 상황에서,
나 혼자 달아 올랐다가 식게 되어
서글퍼진 화자의 상황을,
고기구울 때 달아올랐다가 식어버리는 석쇠에 비유한 것이란다. 

주제는 '석쇠에서 떠올린 사랑과 이별의 의미' 정도면 되겠지?
이번엔 임의진의 '마중물'을 읽어 보자. 

우리 어릴 적 펌프질로 물 길어 먹을 때
'마중물'이라고 있었다

한 바가지 먼저 윗구멍에 붓고
부지런히 뿜어 대면 그 물이
땅 속 깊이 마중 나가 큰 물을 데불고 왔다

마중물을 넣고 얼마간 뿜다 보면
낭창하게 손에 느껴지는 물의 무게가 오졌다

누군가 먼저 슬픔의 마중물이 되어준 사랑이
우리들 곁에 있다

누군가 먼저 슬픔의 무저갱으로 제 몸을 던져
모두를 구원한 사람이 있다

그가 먼저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기에
그가 먼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꿋꿋이
견뎠기에 (임의진, 마중물)

지금은 수돗물이 콸콸 나오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렇지만 불과 2,30년 전만 해도 집안에서 겨울에 뜨거운 물이 한정없이 나온다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외국인들은 한국처럼 성냥곽같은 아파트를 좋아하는 성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수돗물 받으려고 밤새 양동이를 바꿨던 괴로움을 겪었던 사람들,
연탄 가스에 중독되어 학교나 회사를 쉬어야 했던 사람들,
좁은 방에 두꺼운 파카를 입은 채, 얼음어는 방에서 잠을 청해야 했던 사람들,
그이들에게 아파트처럼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은 오래 바라던 공간이었을 수도 있다.  

수돗물은 어딘가 수돗물 공장에서 지하 배관을 통하여 각 가정으로 보내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물'과 '펌프'는 지표 밑을 흐르는 지하수를 찾아서,
거기다 파이프를 묻어 두고 물을 조달하는 방식이었다.
우물에서는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렸고,
펌프는 '펌프질'을 몇 번 해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했다.
그런데 펌프질 하기 전에 펌프통에 물을 한 바가지 미리 부어야 했는데,
그 물을 '마중물'이라고 불렀다. 

뭔가 나오게 하려면 '마중물'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또 뭔가 의미를 발견했겠지.
역시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관조'가 되겠다. 

시어도 '데불고(데리고) 왔다', '오졌다(흡족했다, 만족스러웠다)'는 등의 사투리를 정겹게 쓰고 있다.
마중물은 땅속 깊이 마중 나가 큰 물을 데리고 오는 물이다.
펌프질을 하면 처음엔 그저 슉슉 소리가 나면서 아무 것도 나오지 않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펌프 손잡이가 묵직하게 무게감이 느껴지면서
물이 뿜어져 나오곤 했다.
그 무게가 오졌다는 유쾌한 순간의 표현이 멋지다. 

마중물에게서 배운 인생의 교훈은 <먼저 슬픔의 마중물이 되어준 사랑>이다.
사람이 동그라미라고 할 때, 제각기 따로 노는 원이기만 한 것은 아니겠지.
동그라미들은 서로 겹치고, 그 물결무늬들이 서로 간섭하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
외로이 따로 선 동그라미에게 <먼저 마중물이 되어준 사랑>은 따스한 인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 마중물이 '슬픔의 마중물', '슬픔의 무저갱'으로 표현되었다.
인생의 슬픔이 극심할 때, 마중물이 되어 슬픔의 지옥에서 구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무저갱(無底坑)은 '바닥이 끝없는 동굴'이란 뜻으로,
악마가 벌을 받아 한번 떨어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한다는, 그 밑 닿는 데가 없이 깊다는 구렁텅이란다.
인생에서 그런 큰 어려움을 겪었을 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그런 사람을 '마중물'에 비유한 것이다.

슬프고 아픈 현실에서,
그는 먼저 눈물 흘렸고, 현실을 꿋꿋이 견딘 존재였다.
그래서 지금 화자는 슬픔을 이겨낼 힘을
그에게서 얻고 있다.
그의 존재가 마중물이 되어서 말이야. 

세상의 어려움에 모두들 무릎 꿇을 지경으로 힘들다고들 하지만,
세상에는 또 그렇게 소중한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전에 아빠가 권해준 '산동네 공부방'이란 책에서도,
어떤 수녀님이 가난한 동네(부산 감천동)의 공부방 도우미가 되어,
그 힘겨운 아이들의 자라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는 이야기가 있지. 

세상에 비빌 언덕이 하나도 없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아 보이는 부모와 웬수가 되어 사는 아이들도 세상엔 많단다.
소년소녀 가장들처럼 정말 힘들게 사는 아이들도 있고.
그들에게 마중물이 되어주신 수녀님 이야기는 참 감동적이었단다.  

 

<한국의 마추픽츄, 부산 감천동>

만약에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고 했다면,
마중물이란 시와 연관지어 쓰면 멋진 글이 나오지도 않을까 싶다. 

이번엔 좀 마음 쓰라린 시를 한 편 소개할게.
우선 읽어 보렴.

광온(狂溫)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 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새끼 얼굴 한번 만져 보자. 하게.  (어떤 네티즌,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작년에 어떤 용광로 기사가 죽은 사건이 있었다.
인터넷 기사 내용은 이렇다.

*새벽에 일을 하다 실족해 용광로 쇳물에 빠져 숨진 29살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한 네티즌의 조시(弔詩)가 심금을 울리고 있다.
충남 당진군 환영철강에서 근무하던 김 모(29)씨는 7일 새벽 2시께 용광로 위에서 작업을 하다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
김 씨는 사고 당시 지름 6m의 전기 용광로턱이 걸쳐 있는 고정 철판에 올라가 고철을 끄집어 내리려다
중심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 씨의 한 동료는 "김 씨가 5m 높이의 용광로 위에서 고철을 넣어 쇳물에 녹이는 작업을 하던 도중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고 말했다.
당시 용광로에는 섭시 1천600도가 넘는 쇳물이 담겨 있어 김 씨의 시신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은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에 망연자실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업체 관계자 등을 상대로
안전관리 소홀 여부 등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김 씨의 안타까운 죽음은 통신사인 연합뉴스가 첫 소식을 전한 뒤, MBC 등 일부 언론이 보도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묻혔다. 그러나 한 네티즌이 트위터에 올린 조시가 인터넷을 통해 퍼져 나가면서
김 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정웅재 기자
http://www.vop.co.kr/2010/09/09/A00000318761.html 

 

이런 것이 문학의 기능이란다.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니?
하다 못해 다 타버린 잿덩어리라도 보아야 고인이 죽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용광로 속 시뻘건 쇳물은 섭씨 1,600도가 넘는다고 하니, 사람의 살이나 뼈는 금세 타버리고 말 거잖아.
나중에 고인의 뼛조각 몇 개를 찾았다는 뉴스도 났지만, 정말 황당한 죽음이었을 거야. 

이 조시(죽음을 위문하는 시)는
인정이 메마른 현대인들의 가슴에
촉촉한 봄비가 되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였단다. 

알지도 못할 공장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마음 아픔을 공감하는 계기를 준 시.
문학이란 이렇게 신문기사보다 더 큰 공감을 얻기도 하는 것이지. 

아빠의 시 해설을 들으면서 민우도 좀더 마음이 넓은 사람,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존재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길 바란다.
물론 아빠고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게.
내일 저녁에도 여유가 있으면 한 편 쓸게.
혹시 바쁘면, 일 주일간 휴식~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잘잘라 2011-02-17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쇳물은 쓰지 마라..
한 글자 한 글자 녹아서 쇳물이 됩니다.
한 마디 한 마디 어머니 아들의 얼굴이 됩니다.
얼굴도 모르는 그 청년의, 그 어머니의 도려낸 심장을 만지는 것 같습니다.
슬프고 슬픈 시요, 달래고 달래도 달랠 길 없는 마음입니다.
어쩌자고.. ㅠㅠ

글샘 2011-02-18 21:52   좋아요 0 | URL
정말 아픈 시죠.
방금 운전하고 오는데... 영도 한진중공업 앞에 천막치고 농성하는 노동자들을 봤습니다.
오늘은 안추워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경찰들은 기업가 눈치보느라 가득 모여서 망이나 보고...
세상 참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