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이상을 이야기하면서, 1930년대에 도무지 이해받지 못할 짓을 한 시인이라고 이야기했다.
오감도라는 특이한 용어를 쓰면서 말이지.
오늘은 그의 작품 중 '거울'이란 작품을 살펴 보자.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 거울>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것은 큰 특징이라 보기 힘들어.
일본어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고,
일제 강점기의 책들 중에서 띄어쓰기가 없는 것도 많이 있었단다.
근대 이전의 책에서 띄어쓰기가 있는 다음엔
임금을 가리키는 '상(上)'같은 말이 나오곤 했지. 

거울 밖의 세계와 거울 속의 세계는 닮았지.
아니 똑같아 보이기도 한단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것이 많다.
그럴 발견하는 시인의 창의성, 한번 따져 볼까? 

우선 거울 속엔 소리가 없어. 여긴 있는데 말이야.
내 귀는 소리를 듣지만, 거울 속에도 귀는 있으나 듣지 못하지. 소리가 없으니...
나는 오른손잡이인데, 거울 속에선 반대지.

거울은 내가 비춰지지만 거울 속의 나를 나는 만질 수 없다.
만날 수 없는 <단절>의 역할을 거울이 하는 거야.
그렇지만, 또 거울 덕분에 나를 만나게 되었으니,
거울은 <소통>의 역할도 하고 있겠지? 

내가 거울을 보고있지 않을 때도, 거울 속엔 내가 들어 있어.
나는 거울 속 내가 뭘할지 모르지만
아마도 잘못된(나와 반대로 된) 일에 골몰하고 있을 거라는구나. 

거울 속의 나는 참나와 반대지만, 한편 똑같이 닮았지.
'참나'는 '거울 속의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답답하고 힘들단다.
그걸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다고 표현했어. 

이상의 <거울>은 <참 자아>와 <분열된 자아>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것이란다.
내가 살아가는 <참 자아>는 늘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비추어지는 것이기도 하지.
혼자 있을 때는 까칠한데 사람들은 부드럽다고 느낀다든지,
혼자 있을 때는 게으른데 사람들은 부지런하다고 여기기도 하지.
세상엔 <참 자아> 이외의 <분열된 자아>도 있는 거야.  

이상은 일제 강점기에 건축을 전공해서 공무원 생활을 하기도 했단다.
그렇지만 열심히 하려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세상은 엉망으로 돌아가기도 했지.
심지어 병까지 들어 요양하러 시골에 오래 내려가 있기도 했대.
<나>와 <거울 속의 나>는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느꼈던 혼란상이 잘 그려져 있는 시야.  

  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거울은 이렇게 세상을 똑같이 비춰주는 역할을 하면서,
사실은 따져볼수록 세상과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지.
거울에서 연상된 공포 영화도 많을 수밖에...

다음에 읽어주는 시는 이가림의 시란다.
그의 '유리창'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한번 살펴 보렴.
임은 부재하지만, 저편에서 오는 빛을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나는 느끼고 나는 보인다. 임의 눈동자가 말이야. 

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어때? 시적 화자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기대섰다.
처음과 끝이 대응되고 있지? 수미상응.
거기서 <모래알/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고 하고 있어.
유리창에서 모래알처럼 가슴 속에서 서걱거리는 이름을,
눈물 방울처럼 가슴 아리는 이름을 불러 보는 이는 이별의 슬픔을 또는
임의 부재를 서러워하는 마음이라 상상할 수 있겠구나.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이란 구절에서,
영원히 이별할 수 없는 당신을 땅에 묻은 날, 정도로 해석한다면,
임과 사별한 이의 슬픔이라고도 추측해 볼 수 있겟다. 

화자인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은 '사별한 임' 대신이겠지?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는,
정지용의 <유리창 1>에서와 같이 사별한 임을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거기서 떠올리는 상황인 듯.

어디선가 오는 이 투명한 이슬.
눈물이 주루룩 흐르는 느낌이구나.
유리창에 기대어 차가운 입김만 뿜고 섰는데,
물방울로 남은 그대의 이름,
이제 다신 만날 수 없는 그대의 이름을 하염없이 반복해 불러 보는 이의 마음을 상상해 보렴.  

이상의 <거울>은 '참 자아'와 '분열된 자아'가 어떻게 다른지를
곰곰 생각해 보는 시였다면,
이가림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는
사별한 임을 떠올리게 되는 공간으로서의 '유리창'을 만나게 되었다.
이가림의 다른 시 중에 이상의 <거울>을 떠올리는 시가 있다. 읽어 보자.

나를 보는 나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
무한한 반사의
환한 허공 속으로
뚫린 길 

없는 나를 찾아
그림자 하나
홀로 헤매고 있다 <이가림, 순간의 거울 3>

내가 나를 보는 상황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지.
그런데 그것이 무한 반사 되는 것을 보면,
엘리베이터 양면에 붙은 거울들이 반사하고 반사하는 모습 속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또는 제주도 '거울의 집' 안에 비친 삼각형 거울들에 비치는 나의 옆모습 뒷모습들...  

거울에 비친 <가짜 나>는 이렇게 많은데,
거기 <진짜 나>는 없다.
세상에는 <가짜 나> 또는 <분열된 자아> 내지는 <남들이 본 나>는 많지만,
정말 <나>는 어디 있을까?
<내 마음>이란 것은 어디 있을까? 

'없는 나'를 그 '숱한 나들'로부터 찾아내는 눈이 신선하다.
세상에 '없는 나'를 찾아서,
세상을 홀로 헤매는 그림자가 있다. 그 그림자가 현실의 '나'다.
자기가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은 어떤 인간인지 제대로 알기는 참 어려워보인다.
이가림의 '순간의 거울' 다시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이상의 '거울'과 함께. 

세상의 삶은 자기가 살려는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쓴 시가 있다.
<환목어>라고 한다. 우리가 <도루묵>이라 부르는 생선의 이름의 유래가 담긴 시다.

목어라 부르는 물고기가 있었는데
해산물 가운데서 품질이 낮은 거지.
번지르르 기름진 고기도 아닌데다
그 모양새도 볼 만한 게 없었다네.
그래도 씹어보면 그 맛이 담박하여
겨울철 술안주론 그런대로 괜찮았지.

전에 임금님이 난리 피해 오시어서
이 해변에서 고초를 겪으실 때
어가 마침 수라상에 올라서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해 드렸지.
그러자 은어라 이름을 하사하고
길이 특산물로 바치게 하셨다네.
난리 끝나 임금님이 서울로 돌아온 뒤
수라상에 진수성찬 서로들 뽐낼 적에
불쌍한 이 고기도 그 사이에 끼었는데
맛보시는 은총을 한 번도 못 받았지.
이름이 삭탈되어 도로 목어로 떨어져서
순식간에 버린 물건 푸대접을 당했다네.

잘나고 못난 것이 자기와는 상관없고
귀하고 천한 것은 때에 따라 달라지지.
이름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것
버림을 받은 것이 그대 탓은 아니라네.
넓고 넓은 저 푸른 바다 깊은 곳에
유유자적하는 것이 그대 모습 아니겠나. <이식, 환목어> 

목어(묵)가 푸대접 받다가,
임금이 피란왔을 때 대접을 받아 '은어'라 불렸대.
그렇지만 전란이 가라앉자 다시 '목어'가 되었단다.
(도로 묵이 되었다고 <도루묵>이란 이름으로도 불린대.) 

이 이야기에서 얻은 교훈을 마지막 연에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단다.
이름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필요하면 칭송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버리는 세태임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이지. 

목어는 원래 푸른 바다 깊은 곳에서 유유히 헤엄칠 뿐인데 말이야.  

인간은 원래 모두 <부처>라고 했잖아.
그런데 세상에서는 누구는 1등급이고 누군 9등급으로 나누기도 하고. 한우도 아닌데 말이지.
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평가>일 뿐임을 안다면 마음을 넓게 가질 수도 있겠구나. 

<환목어>같은 시는 세상을 '풍자'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필요하면 등용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금세 잊어버리는 세태를 비꼬려고 주워든 이야기니 말이야. 

자, 오늘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을 다룬 시들을 만나 보았다.
세상은 내가 보는 것처럼 한쪽 면만 가진 것은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어.
나와 다른 편에서 바라보는 시선도 있음을 깨닫는다면
세상이 불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배움도 얻을 수 있겠다. 

내일부터 며칠간은 좀 푹 쉬자.
새 학기 시작할 때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도록.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에서도 '분열된 자아'가 등장하지만,
차이점이라면, 이상의 시에선 분열되기만 했던 것이,
윤동주의 시에선 <악수>를 함으로써 <화해>의 분위기가 보인다는 정도겠지. 

오른손잡이끼리 악수를 하면, 당연히 오른손끼리 잡아야 하는데,
그 아이는 반대니 악수를 할 수 없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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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2-2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거울속의 나도 유리창의 기댄 나도 어쨌든 "나"이고 나로서 사랑하고 싶고, 사랑하고 있다면 자기애가 심각한 수준인거요? 아무래도 시대를 걱정하기보단 일상을 즐기며 살고 있어서 이런가 봅니다~
거울이 보이지 않아도 그속에 나는 있고, 오른손이라 악수를 못해도 마주 웃어줄수 있으니 행복하게 삽니다~

글샘 2011-02-28 21:40   좋아요 0 | URL
일상 속의 '나'도 시대를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대 속에 있겠지요.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사신다니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듣는 일이 하도 드물어서요. ^^
저도 요즘 날마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
 

아침에 같이 차 타고 가는데,
창밖에 봄이 온 것처럼 온 세상이 환하더구나.
나무는 아직 새카맣게 보이지만,
지난 토요일이 雨水였단다.
더이상 눈이 오지 않고 비가 온다는,
얼어붙은 대동강(패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 

바야흐로 봄이다.
곧 화창한 햇빛과 함께 꽃들이 홍수처럼 밀려올 것이다.
동양 철학에서 봄을 '태양'의 계절이라고 한단다.
여름을 '소양'이라고 하고.
여름이 '양'의 기운이 더 많아보이지만, 사실은 봄이 더 많대.
여름은 이제 시들어 가는 거지. 

사람이 패기있고 의욕적인 시절도 생각해보면 꽃피기 전인 너희때가 아닐까 싶어.
아직 무엇이든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오늘은 성실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김동환의 '북청 물장수'는 읽는 맛이 상큼한 시란다.
마치 봄냄새가 가득한 냉잇국을 후루룩 마시는 기분이야.
한번 읽어 보렴.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 물을 솨-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김동환, 북청 물장수>

수돗물이 일반화되기 이전.
도시엔 이렇게 물장수가 많았단다.
매일 물을 길어다 넣어 주고 얼마를 받았겠지. 
그들은 어머니들이 아침에 밥하기 전에 물을 부어주고 가야했을 테니,
얼마나 부지런했겠니. 

새벽마다 꿈이 아직 현실로 넘어오기도 전에,
솨~ 찬물을 붓고 가는 물장수.
그가 사라질 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이유는 뭘까?
물장수가 멀어져가는 걸 생각하면서 그의 발걸음이 내 가슴을 디디고 가는 건,
그이의 물 붓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일 거야.
화자의 애정이 잘 담겨 있지.  

북청 사람들 중에 서울 지역에 물을 대주는 이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청신(맑고 신선한)한 새벽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이지.

'물에 젖은 꿈'은 새벽의 신선한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거야.
아직 잠이 덜 깬 이른 새벽에 물을 날라다 붓는 물장수에 대한 화자의 애정이 담긴 표현이지.
마지막 연에서 날마다 기다려진다고 하여 애정이 더 강조되고 있단다. 

주제는 '북청 물장수에 대한 신선한 감각과 그리움' 정도가 될 거야.
무슨 일을 하든 즐겁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일을 맡겨도 힘들다며 핑계로 일관하는 투덜이도 있단다.
북청 물장수는 비록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을 하진 않지만,
오히려 험한 일이기도 하지만,
신이 나서 흥겹게 일을 하는 멋진 사람으로 보이는구나.
시인 김동환은 '국경의 밤'이란 서사시로 유명한 사람이다. 
다음에 더 살펴볼 기회가 있을 거야. 

제 고향 떠나 서울에서 물장수 하는 북청(함경남도 동해안) 사람들의 외로움도 컸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동환의 시에서는 서글서글 일 잘하는 그들의 모습이 유쾌하게 그려졌다.
다음엔 고향을 잃고 외로워하는 김소월의 시를 몇 편 보자.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三千里)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리(三千里)
삭주구성(朔州龜城)은 산(山)을 넘은 육천리(六千里)요

물 맞아 함빡히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山)
밤에 높은 산(山)

삭주구성(朔州龜城)은 산(山) 넘어
먼 육천리(六千里)
가끔가끔 꿈에는 사오천리(四五千里)
가다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리워
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南北)으로 오며 가며 아니 합디까

들 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밤쯤은 어디 바로 가 있을 텐고
삭주구성(朔州龜城)은 산(山) 넘어
먼 육천리(六千里) <김소월, 삭주구성(朔州龜城)>

삭주 구성은 평안북도 군청 소재지로  화자가 가고 싶고 그리워하는 공간이란다.
화자의 고향인 모양이지.

1연은 고향 삭주구성의 멂을 표현한 것이다.
화자가 가기엔 너무 먼 거리감이 생생하지.

2연의 '물 맞아 함빡히 젖은 제비'는
고향엘 가다가 비에 걸려 돌아오더라는 이야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자신의 처지도 비 만나 고향에 못 가는 제비와 같다는 것이지. 동병상련.
제비는 비 만나 못 가고,
화자는 높은 산(山), 높은 산(山) 때문에 못 가고... 

3연에서는 6천 리 거리를 가지 못하지만,
가끔 꿈에는 4,5천 리라도 가다 오곤 한다는 이야기.

4연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실함을 노래하고 있다.
'새들'도 집이 그리워 오며 가며 하더라마는
인간인 화자는 집이 그리워도 오갈 수 없는 아쉬움. 

5연에선 '구름'도 밤엔 고향 가까이 어디쯤 갈 수 있을 테지만,
내 고향 삭주구성은 산이 가로막은 먼 육천 리... 거기 있어 가지 못한다는 아쉬움 가득.
한국은 제주에서 백두산까지가 3천 리밖에 안 되는데,
육천 리라고 표현한 것은 <심정적 거리감>이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겠다.

이 시도 소리내어 읽어 보면 7.5조의 운율감이 느껴지는 부분도 많단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에서도 그런 운율을 찾은 적 있지.
일제 강점기엔 당연히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동환의 '산너머 남촌에는'을 보면, 7.5조가 확연히 드러난단다.
소리내어 운율만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南)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김동환, 산너머 남촌에는>

잃어버린 고향은 <산너머 남촌>이란 이상향으로 소생했다.
7.5조의 운율과 함께 희망차고 활기 넘치는 산너머 남촌이 멋진 그림으로 살아오는 시다.  

다음엔 김소월의 '나그네' 설움을 읽어 보자. '길'이란 유명한 시다.

어제도 하룻밤
나그네 길에
까마귀 까악까악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십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집도
정주 곽산
차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김소월, 길>

1연에서 ‘어제도’라고 표현하여 유랑생활이 계속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구나.
3,4연까지는 차가고 배가는 내 고향엘 나는 못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그네의 설움. 

그러다 올려본 하늘엔,
기러기가 잘 가고 있다.
공중엔 길 있어 잘 가는가?
아, 얼마나 고향엘 가고 싶으면 고향 가는 기러기가 저리도 부러울까.  

6연에서 기러기에게 아예 하소연을 한다.
당신은 고향엘 그리도 잘 가지만,
나는 열십자 복판에 섰소.
열십자는 4거리잖아. 어디로 가야할지 나는 모르겠다는 이야기지.
고향엘 가지 못하는 외로움.
이런 부조리가 어디 있겠니?
그렇지만 식민지와 도시화는 사람을 부조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 일쑤였단다.

마지막 연에서 <갈래갈래 갈린 길 길~>에서는 같은 음운이 반복되면서 재미를 주는 곳이지.
갈래갈래 갈린 길이 저렇게 많지만,
내가 갈 길은 바이(전혀) 없다는 절망적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어.

이 시의 운율 역시 7.5조라고 볼 수도 있고, 3음보로 볼 수도 있단다.
갈 고향 잃은 화자의 서러운 처지를 하소연하는 문체로 표현하고 있지.
김소월이 이렇게 '나라 잃은 민족 전체의 비애어린 삶'을 주제의식으로 표출한 시는 제법 된단다.
'엄마야 누나야'도 그렇고, 문학 교과서에 실렸던 '초혼'도 그렇게 볼 수 있지. 

박목월의 '나그네' 역시 이런 유랑민의 허전한 마음을 그린 시로 보기도 한단다.
나그네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초혼'을 한번 읽고 마치기로 하자.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招魂)>

이 시는 한 연을 4행으로 가지런하게 배열한 단정한 시다.
혼을 부르는 '고복 의식'이 드러나 있지.
망자의 혼을 세 번 부르는 것은 절절한 그리움과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1연에서 <이름이여!>를 네 번이나 반복하고 있구나.
간절하게 고인을 부르는 소리로 '초혼제'의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부서진 이름', '헤어진 이름', '주인없는 이름'
이런 것으로 고인이 된 당신을 상정하고,
'부르다가 내가 죽을 것 같은 이름'으로 화자의 아픈 마음을 표현했다.  

슬픔이 전혀 절제되지 않고 있지.
슬픔이 절절하게 표출되고 있어서 화자의 절규가 잘 드러나는 시란다. 

2연에선 끝끝내 마저하지 못한 한 마디 말을 외친다.
'사랑했다고' '사랑했다고...'  

3연의 '서산 마루에 걸린 붉은 해'는 <하강>의 이미지를 갖는다.
죽음의 시는 이렇게 <하강>의 이미지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단다.
사슴도 슬피 우는 것은 <감정 이입>이 되겠다.
사슴은 그저 우는 것이지만, 화자가 슬프니 이입된 감정이지.
'떨어져나가 앉은 산'이 화자의 현재 위치다.
무덤 가에 갔는지도 모르겠구나.
거기서 목놓아 그대를 부른다. 

4연의 설움에 겹도록 부르는 소리가 반복되는 것 역시
복받친 감정이 거칠게 여과되지 않고 그대로 표출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대를 부르는 소리는 그대에게 가지 못하고 비껴간다.(빗나간다.)
나는 여기 땅에서 그대를 부르고,
그대는 거기 하늘에 있는가?
그 사이가 너무 넓다는 건, 그만큼 거리감을 실감한다는 이야기다. 

5연에서 망부석 설화처럼 '슬픔이 응결'되어 <돌>이 될지라도,
나는 절절하게 그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사랑했다고, 진정 사랑했노라고... 

죽은 임에 대한 사랑의 노래이기도 한 이 시는,
망해버린 조국에 대한 애국의 노래일 수도 있단다.

이 시에서 <죽음>은 혼백이 사라짐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화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못해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을
그대가 돌아오면 들려주고 싶다는 절규로 소리친다.
물론 그 소리는 그대에게 갈 수 없다.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어 그런가. 비껴갈 뿐이다.

이 시에서 그려진 고복 의식, 곧 '초혼(招魂)'이라 불리는 이 의식은
사람의 죽음이 곧 혼의 떠남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여 이미 떠난 혼을 불러들여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려는 간절한 소망이 의례화된 것으로서,
사람이 죽은 직후에 그 사람이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지붕이나 마당에서 북쪽을 향해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즉, 초혼은 죽은 사람을 재생시키려는 의지를 표현한 일종의 '부름의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운율 역시 3음보로 이뤄져 있지만,
격렬한 감정이 표현되는 구절은 2음보로 이뤄져 있기도 해서 감정에 충실하고 있다. 

현대인은 모두 고향을 잃은 존재라고들 하더라마는,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있는 곳이 모두 고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란다.
어린 시절에 오래오래 한 곳에서 살면 평생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있을 수 있겠지만,
유목민처럼 고향이란 것이 마음에 없더라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도 있는 일이지. 

다만, 유목민의 생활에선 더욱 에티켓과 명확한 이해타산이 계산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수십 년을 바라봐서 말하지 않아도 아는 농경 부족의 습관보다는,
매순간 새로 만나 정확한 표현이 발달한 유목 부족의 습관이 유리할 때도 많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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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 민우야.
바야흐로 봄이 오는구나.
이제 너는 학교로서는 최고 학년인 고3이 될 순서고.
이제까지 학교를 11년간 다닌다고 고생 많았다. 

마지막 한 해를 정말 성실하게 잘 보내길 바란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지난 19년간 참 여러 번 이야기했을 것 같구나.
한국 사회가 열린 사회라면 아빠가 시 특강을 했을 때,
그렇게 부정적 현실에 대한 저항 이야기도 많이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밝지만은 않기 때문에,
또,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진다고 그것이 손쉽게 이뤄지지 않는 시대기 때문에,
너희는 한층 고민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
이것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최대한의 공통적인 의견이 아닐까 해.
나는 어디쯤 와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갈 건지...
이런 것이 철학이고,
그것이 바로 고전이고, 문학이고,
결국, 책에 쓰인 것은 다들 그런 것들이란다. 

오늘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 시들을 몇 편 소개할게.
우선, 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본 김광균의 '노신'을 읽어 보자.

시(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갯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거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김광균, 노신>

'노신'은 중국어로 '루쉰'이라고 읽는다.
루쉰은 중국의 정신적 스승으로 일컬어지던 분이다.
중국이 일본에 패망하던 어렵던 시절,
꼿꼿한 정신으로 중국인의 멍청한 정신 상태를 꾸짖던 분이기 때문이지.
루쉰의 소설로 "아큐정전"이란 작품이 있다.
'아큐'란 바보는 늘 '과거에 나는 잘났던 인물이야. 우리 집안은 대단한 집안이지.'이렇게 착각을 일삼는 놈이지.
얻어맞으면서도 '나는 똥이야. 나를 때린 저놈은 똥을 때린 거지.' 이렇게,
바보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정신적 승리>라며 좋아하던 바보란다.  

근대 중국이 그랬다는 비유지.
마치 조선이 왜구에 불과하던 일본이 통일국가가 된 후 서구 문물을 받아 들이고,
급기야 조선과 중국을 침범하는데도,
왜놈들, 쪽바리들, 이러면서 무시하기만 하다가 망해버린 것을 꾸짖는 거야. 

화자 김광균은 젊은 나이로 '시인'이란 직업이 못마땅하다.
가족을 먹여살리기도 어렵기 때문이지
서른 먹은 화자는 <시를 믿고 살기 어려워서> 잠을 못 잔다고 그래. 

멀리 기차의 기적소리 들리고,
아내와 어린 아기는 잠이 들었는데, 창밖엔 눈이라도 쌓이나 봐. 

시인이란 사람은,
어디 잡지사 같은 데서 책을 만드는 일을 도와주며 살겠지.
근데, 그 일이 그닥 쉽지만은 않구나. 

무수히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이런 구절에서 보면,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이 나지 않니?
실제로 뺨을 얻어 맞거나, 돌팔매를 맞은 것은 아니겠지만,
먹고 산다는 것.
그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일제 시대에 말이지. 

그래서 혼자 등불을 켜고 일어나고, 담배를 피워 물어.
그건 내적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는 과정이지.
혼자서 온갖 고민을 다 하는 거야.
가족을 먹여살리기 어려운 가장의 비애. 그런 거. 
그러노라면, 쓸쓸한 고뇌로 오장육부,
창자를 쓸어내리는 고통이 느껴지지. 

그런 고통스런 밤이면,
중국의 '루쉰'을 떠올리게 된다는 거야.

온 세계가 제국주의의 고통으로 울고 있는 시절.
상하이의 '호마로' 어느 뒷골목에서
루쉰은 홀로 쓸쓸히 등불 아래서 시를 썼겠지.
물론,
고통스런 마음으로 가득한 삶이었겠고 말이야. 

그러면,
마치
루쉰이 나에게 속삭거리듯,
등불아래서 그이의 목소리를 듣는 듯,
혼자서 이런 느낌을 갖게 된단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옛날 중국에서 근대화를 위하여 고통을 이기며 견뎌냈다.
너는 지금
한반도의 어려움 속에서 시인으로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어려움처럼
너의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나도 상심했었으나 이겨냈든, 너도 상심을 이겨내기 바란다. 

이런 동병상련의 마음을,
거기서 얻는 힘을 나타낸 시가 바로 <노신>이리라. 

시인 김광균이 가족을 부양하기도 힘든 상황을 당했던 거 같다.
그 때,
중국의 힘겹던 세월을 부득부득 이겨낸 '루쉰'을 생각하며
힘겨운 세월을 이겨낸 화자의 심정을 잘 나타낸 시로 보인다. 

이번에도 먹고 살기 위하여 교사라는 직업을 택한 어떤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정희성, 길>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지낸 세대는
자식이 떵떵거리는 권력을 가지거나 적어도 지식인으로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처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국가에서
4년제 대학은 무조건 보내야 한다는 통념이 생겼을 것이다. 

자식이 공부를 잘 하는 경우에,
부모는 자식이 법관이 되거나, 좋은 대학을 나와서 여러 친구와 함께 사업을 하길 바랐던 것이 흔했다.
돈없는 사람도 높은 권력을 잡기 쉬운 것이 법관이었고,
돈만 많이 벌면 또 세상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어쩌다 보니,
국문과를 가서 시를 읽고 쓰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국어 선생이 되어
높은 권력자가 되지도 못했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지도 못했다.

아니, 거꾸로 나이 마흔이 되었는데도 아직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시절.
옆 자리에 누워 자는 아내도 화자의 처지를 비웃는다.
참 삶은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화자가 서러운 것은
법관이 되거나 돈을 못 벌어서만은 아니다.
화자가 미친듯이 공부를 했으면 법관이 되었을 수도 있고,
화자가 미친듯이 사업을 했으면 돈을 벌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화자의 현실에서 서러운 일은,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니?
세계에서 '행복 지수'를 따져 보면,
가난한 나라가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많단다.
방글라데시는 최빈국 중의 하나지만, 늘 행복은 최고 지수를 얻곤 하지.
그건, 모두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함이 멸시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한국도 전쟁 이후가 지금보다 더 행복한 세대였는지 몰라.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 '자살률 1위, 출산저하율 1위' 이런 불행한 국가거든. 
행복하지 않은 거지. 죽고 싶고,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세상.
어떻게든 세상 사는 일에 적응하는 일에 길들지 않은 화자에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고,
노엽다는구나. 

화가 날 수밖에 없지 않겠니?
그래서 아내에게 말한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아내에게, 울지 마라.
법적으로 잘못하지 않고,
그저 평범한 교사로 살고 싶은 게 화자의 꿈이지만,
그렇게 살기 참 어렵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옳은 것을 옳다고 가르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면, 감방엘 가던 시절이 한국에선 먼 과거가 아니었거든. 

그래도 화자는 마음은 단단히 먹는다.
어쩌겠는가.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서,
화자의 마음을 비겁한 곳으로 돌리려 해도,
화자는 꼿꼿한 마음으로.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시야.  

제목인 '길'은 '인생'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지.
이 시의 화자에게 '길'은
교사로서의 '인생'이었다고 보면 될 거야.
아빠도 그렇지만, 옛날 시절의 선생님은,
꼿꼿한 정신의 상징처럼 여겨졌단다.
절대로 더러운 일에 공감하지 않는 선비 정신을 가진 존재.
큰 돈을 벌러 떠났다면 그 뜻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을,
아이들과 이런 저런 일로 소일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
권력도 돈도 손에서 놓친 사람들. 그런 존재. 

그래서 선생님들의 삶은 어쩌면 권력도 돈도 놓쳐버린 패배자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아빠는 아직도, 교사가 가져야 하는 자존심 하나를 믿고,
어리석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 시가 바로 '길'이란 시야.
아빠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한단다. 

민우가 어떤 삶을 살지 모르지만,
아빠는 나의 살아온 길에 대하여, 나름대로 만족한다.
시대를 잘 만나, 먹고 살 만하고, 아빠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말이야.
물론, 정말 아이들과 즐겁게 수업하고 열정적인 교육활동을 펴기엔 학교가 답답한 구석도 있지만,
아빠가 살아온 삶에 대하여 아빠는 나름의 자존심과 행복을 느끼고 있거든. 

세상은 남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닌 거 같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
그것만큼 아름다운 일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아빠는 나이가 들수록 자주 하게 된단다.
다음엔 박재삼의 <흥부 부부상>을 읽어 보자꾸나.
아빠가 하던 이야기와 상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욕심이 없는 웃음의 아름다움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내고
손발 닳은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들아.

가난 속에서도 서로 위로하던 웃음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박재삼, 흥부 부부상>

자, 여기서 흥부 부부는 어떤 존재로 거론되냐면 말야.
엄청 가난한 사람들이잖아. 그치?
근데... 그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 

가난한데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가난하다고 이야기하는 건,
글쎄, 과연 어떤 것이 부유한 거고, 어떤 것이 가난한 건지 생각해 봐야 한단 거야. 

엄마 아빠가 어리던 시절, 한국은 전쟁을 겪고 난 후였단다.
그래서 유엔의 원조도 받고, 거지같이 살던 시대였어.
새옷을 사입기도 힘들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힘들었지.
돈이 없으면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어려웠단다.  

이 시에서 흥부 부부가 박을 가르기 전,
그 상황을 생각해 보자고 한다. 

흥부 부부가 왜 박을 가르려 했지?
제비가 <보은표>, 곧 은혜를 갚는 박씨(報恩瓢)를 가져다 줬고,
그 박이 쑥쑥 자랐고,
근데, 배가 고파 죽겠고,
박 속이나 파서 죽이나 쒀 먹자고 켠 거거든. 

근데,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생각해 보래. 

그건, 배가 아무리 고파도,
부부 사이의 정,
초코파이 없이도 다사롭게 나눌 수 있는 정에 대한 이야기잖아.
그건, <금 덩어리>나 <황금 벼이삭>같은 금전적 문제를 초월한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단다.
흥부 부부가 <웃음의 물살이 깨끗하게 반짝이던 그것>이 중요하다는 거지. 

앞의 <황금 벼이삭이 문제랴>는
돈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고,
뒤의 <확실히 문제다>는
믿고 사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는 이야기지.
똑같은 <문제>란 단어도,
앞의 것은 '노 프라블럼'이고, 뒤의 것은 '썸씽 굿'이란 이야기야. 

이 정도 했으면 2연은 그냥 휘리릭~~~ 넘어간다.
욕심없어도, 아름답다.
노 프라블럼.
가난해서
떡방아 찛을 것 없는 집(백결 선생 전설도 있잖아.)도
방아 찧을 것도 없는 집에서 거문고로 둥~더덩~ 울리는 음악도
곡식 있는 듯이 들어 주고 말이지,
손발 닳게 고생하던 사람들도,
같이 웃으며 서로 빤히 사정 알던,
거울에 비친 것처럼 사정을 뻔히 알던 사람들끼리
더 가지고 못 가진 것에 대하여 자랑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던 것처럼,
노 프라블럼!!! 

언더스탠드???
이런 생황이 이해가 가니?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던 웃음,
동병상련의 처지.
웃다가
서로 불쌍한 맘에
서로 눈물을 나눴겠지.
그 눈물은? 뭐로 비유되었다고? 그래. 구슬. 

이 흥부 부부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사람일까?
그건 아니겠지?
흥부 부부는 가난해서, 먹을 게 없어서 박을 탔던 사람들이었으니 말이야.
그들이 추구했던 행복은, 바로 <정신적인 것>이었겠다.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이런 부분을 읽어 보면, 히야~ 시인은 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둘이서 박을 타다가 서로 하도 불쌍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치자.
그러다가 금세,
두 부부의 얼굴에 맞닿은 눈물을 느끼고는,
서로 부끄러워하여
물살들이 서로 부딪혀서 반짝이는 빛을 내듯,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웃음을 짓는 그 웃음,
그 본웃음의 물살.
그런 흥부 부부의 웃음의 물살을 생각해 보자. 

가난하지만,
서로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는 사랑의 마음들이 지어내는
본웃음 물살. 
이것이야말로 <확실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확실한 문제>는
삶의 의미,
과연 부유한 삶만이 삶일까?
이런 <삶의 의의>를 따지는 시가 이 시가 되는 것이다. 

이 시가 탄생했던 1960년대는 참 가난했던 시대였다.
유엔의 원조를 받던 시대.
그렇지만, 그 가난했던 시대의 가족은 <흥부 부부>처럼 <행복>을 느끼기도 했던 것이고,
정말 가난하다고 해서 <행복>을 모르겠는가? 하면서 삶의 의의를 나누던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예전 어떤 싹퉁바가지 없던 광고처럼,
당신이 어떤 아파트에 사는가가 당신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가난을 무능력으로 취급하던 시대는 아니었던 거다.
이 시의 주제는 바로 <가난한 삶의 애환과 소박한 행복, 가난한 삶의 애환과 그 정신적 극복.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는 소박한 인간상> 이런 것들이었다고 보인다. 

민우야.
세상은 참 복잡하고 끝없이 가지가 많아 보인다.
그걸 누구랑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답도 여러 가지일 것 같구나. 

나는 행복하다, 아니다를 혼자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늘 주변 사람들과 얽히고 설킨 속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미치고 싶었을까? 

아빠는 만약에 내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많단다.
그 때는, 독립 투사가 되기보다는 아마도 정신병자가 되었을지 모른단 생각을 해봤어.
그런 시대적 상황을 글로 쓴 사람이 아마도
'이 상'이란 작가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김해경'이란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이상' 곧, 이상한 놈, '싸이코'란 별명을 쓴 거잖아.
지금은 '정지훈'이가 '비'란 이름을 써도 문제가 없지만,
80년 전에 <싸이>란 이름을 쓴 '이상'은 확실히 <문제 작가>임에 틀림 없었지. 

니네가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하다고 하는 지 몰라도,
나는 일제 강점기에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 얼라리요~ 헐~
이런 시가 바로 <오감도>란 생각이 들어.
우선 <오감도의 1호>를 한번 읽어 보자꾸나.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 오감도- 시 제1호> 

이 시는 절대로! 수능에 날 수 없는 문제란다.
해석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그렇지만, 이상이 왜 이런 시를 썼을지는 상상해 볼 수 있지 않겠니?
그 시대의 문제작이었으니 말이야.
이상이 이런 시를 쓴 것은,
확실히 그것은 <문제>였거든.  

<오감도>란 어휘는 한국어에 없단다.
<조감도>는 있지.
새가 하늘에서 <부감 : 날면서 내려다 보기>하는 듯 그린 그림을 <조감도>라고 그래.
그럼, 오감도는?
언어 유희일 수 있어.  

너희 인간 사는 세상?
족까지 말라고 해~ ㅋ
니들이 알긴 뭘 알아? 

일본 넘들? 조선을 먹었다고?
니들도 족까지 마~ 일본은 뭐, 만 년 간대니?
이렇게 하늘서 내려다본 새의 시선에서 인간 세상의 미약함을 비웃는 시선이었는지도 모르지.
근데, 왜 <조감도>를 <오감도>로 바꿨냐고? 

아, 일본 넘들도 <조감도>는 뭔가 하느님의 시선이잖아.
그러면, 일본 넘들을 비판하는 <하느님의 뜻>일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러니깐, 새 조(鳥)자에서 작대기 하나 떼고, 까마귀 오(烏)자를 쓰면
뭐, 무슨 뜻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잖아.
미친갱이란 뜻의 <싸이코>란 이름으론 도저히 방송에 출연이 불가하니깐, <싸이>라고 쓴 넘이 부른 노래 알아?
<완전히 새 됐어>거든.
원래 <완전히 좆됐어>라고 욕으로 노랠 만들었는데,
그럼 당연히 방송 불가거든.
그래서, '새 조'자를 응용해서,
<완전히 새 됐어>로 바꿔서 성공했지. 

천재 시인 <이 상>을 그대로 본딴 것이
'싸 군'의 '오나전 새 됐어'야.
시대는 바뀌었지만, 아이디어는 같지. 

이 시에서 13인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하는 이가 많아.
그치만, 13일의 금요일이 예수가 죽었다는 이도 있고,
제목의 <까마귀 오>자와 연계하여 불길하다는 이도 있고 그래.
사실,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ㅋㅋ 
아마, 세상 사람들아,
엿 드실래요? 이런 의미였는지도 몰라. 

이 시에서 생각할 점은
<무서운 아해>야. 

자, '무서운 아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건, <무섭게 보이는 아이>란 뜻과, <무서워 하는 아이>란 뜻으로 볼 수 있어.
중의적이지.
이 13인의 아해는 무서워 보이는 아이기도 하고,
무서워 하는 아이기도 해. 

자, 오감도.
조감도야.
하느님의 시선에서, 즉,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니,
세상은 참 요지경이지. 웃기거든. 

일본 넘들이 조선 넘들을 잡아 먹고 아웅다웅 하고,
조선 넘들 중에도 일본넘 앞잡이들이 동족을 괴롭히고 그런단 말이지.
웃기지 않겠어? 하느님 입장에서? 

조선 넘이 조선 넘을 괴롭히고,
조선 넘이 조선 넘을 무서워하고 말이지.
'무섭게 보이는 넘'이 곧 '무서워 하는 넘'이고 말이야.
이건 뭐,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란다.
국가 간의 관계나, 인간 간의 관계나 똑같고, 다 다르지. 

길은 막다른 골목이나 뚫린 골목이나, 모두 적당하다고 그랬지?
일제 시대에도 힘겹게 살았고,
지금은 해방된 세상인데도 살기는 힘겹단다. 

막다른 골목, 일제 강점기에 모든 아해들은 <두렵다>고 그랬겠지?
그러나 뚫린 골목,
아해들이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세상은 <두렵다>고 볼 수 있어. 

세상은 늘 불안의 요소를 안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고 볼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이런 시들을 <모던>하다고 한단다. 현대적이라고.

띄어쓰기를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한국어나 일본어는 명사를 중심으로 조사가 붙은 형식이어서 띄어쓰기가 큰 의미가 없으니
이런 양식이 가능한 거란다.
영어같은 경우는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신선한?' 양식은 실험이 불가능해.
'Tobeornottobethatisaquestion.'같은 글은 이해가 불가능하잖아.
'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은 누구나 이해하는 글인데 말이지.  

오늘은 '인간의 삶'과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를 몇 편 봤다.
민우도 이제 곧 어른이야.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
아빠랑 이렇게 시를 통해 이야기나눌 수 있는 삶이 되면 좋겠다는 게
아빠가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이유란다.
사랑하는 아들,
이렇게 쓸 수 있는 데는, 그런 모든 것이 들어간 마음이 작용한다는 거.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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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란 이름을 기억하니?
아빠가 처음 선생님이 되었던 해.
1989년 여름, 아빠는 친구들과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밤이면 무더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라디오를 켜놓고 책을 읽으며 뒹굴곤 했단다.
근데 라디오에서 '기형도'란 시인이 죽었다면서 매일 시를 읽어 줬어. 

그 해 여름은 참 무서운 해였단다.
선생님들이 모여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는데,(이게 선진국엔 다 있는 거거든.)
빨갱이들이라고 텔레비전에서 마구 매도를 하고,
1500여명을 해직을 시키고 그랬어. 

그 어둡던 시절과 딱 맞춰서 기형도의 어두운 시들을 들으면서
아빠는 친구들 모르게 누워서 눈물을 흘렸단다.
이런 어두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미워서 눈물을 흘렸고, 
그런 시대에 선생을 하게 된 것이 싫어서 눈물을 흘렸어.
결국 나는 군대엘 가서 해직은 되지 않았지만,
지금도 기형도 시를 읽으면 그 당시의
눈물 가득한 먹먹한 스물 네 살의 젊은 가슴이 오롯이 되살아 나곤 한단다. 

전에 기형도의 '엄마 걱정'을 읽은 적 있지?
'찬밥'처럼 방에 담긴 아이. '내 유년의 윗목'을 기억하는 가엾은 아이.
그가 어른이 되었으니 얼마나 어두울까. 
그의 유명한 시들만 몇 편 살펴볼게.
그의 시집 제목은 <입 속의 검은 잎>이란다. 
'입' 속에 '잎'이 있을 리가 없지?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언어유희지.
'입' 속의 '혀'를 '검은 잎'으로 비유했어.
곧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죽은 혀.
발언하지 못하는 죽은 언론과 죽은 문학에 대한 풍자겠지.
우선 그이 <질투는 나의 힘>을 읽어 보자.
영화 제목 <복수는 나의 것>도 이 시의 패러디겠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는데,
시를 잘 써서 '현상 공모'는 늘 1등을 했단다.
그래서 응모해 놓고 발표도 되기 전에 술값을 다 쓰곤 했단 이야기도 있어. 

연 구분이 없는 시라서 서술어가 종결형 어미를 쓰는 곳에서 나눠서 다섯 부분으로 읽어 보자.
첫 부분에선 시를 쓰게된 계기가 드러나 있어.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점을 상정하고 있지.
나이든 눈으로 본다면 스스로는 '어리석게도 너무 많이 기록'했을 뿐인 시인일 것 같대.
지금 자신의 시에 스스로 만족하지만, 미래의 눈으로 보면 아닐 거란 생각이지.
젊었던 시절,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워 너무 많이 써댔다는 반성을 하는 부분이야. 

두번 째 부분에서 자신에 대한 성찰이 드러난단다.
자신을 '어슬렁거리는 개'에 비유했으니 '보잘것 없는 존재'로 본 것 같지?
지칠줄 모르고 뭔가를 했지만, 제대로 한 것은 없고 '머뭇거렸을 뿐'인 것처럼 반성하게 될 거란 이야기지.
아직도 미래의 시점에서 자기를 본다면 그렇다는 이야기야. 

세번 째 부분에서도 자기 반성이 들어 있다.
자기 시를 돌아보니 '탄식'뿐이어서 한심하대.
젊은 자신이 살아온 날들은 참 실망스러운 것이었고,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바보스런 것이었지.
희망에 가득차서 열렬하게 적었던 시들을 돌아보노라니,
잘 사는 사람에 대한 질투,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에 대한 질투,
자신보다 똑똑하고 글 잘 쓰는 사람에 대한 질투, 질투, 질투들...
자신이 희망했던 바는 온통 질투 뿐이었다고 회고할 거래.
그래서 화자는 미래에 읽을 수 있도록, 자신의 글을 평가하고 있어.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화자의 반성이 압축적으로 효현되고 있지.
화자의 삶을 회고하고 성찰해 보니,
타인의 삶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 지나지 않았음을,
지나친 질투로 똘똘 뭉친 것이었음을 반성하고 있는 시지.
그런데 제목에서는 '질투만이 나의 힘'이라고 했어.
시를 읽어보면 질투는 '부정적'으로 그려지는데, 그것을 '힘'이란 긍정적 요소와 매칭시켰으니,
역설적 표현이 되겠구나. 

마지막 부분은 화자가 정말 열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했음을 표현했어.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지.
늘 자신보다 나은 누구, 현재보다 나은 미래만을 위하여 꿈을 꾼 자신밖에 없음의 발견.
누구보다 바쁘게 살고 있었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님을 반성하는 시란다.
좀 우울하지만, 아름다운 생각 아니니?
정말 바빠 보이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고 살기 쉬운 게 인생이니 말이다.

다음엔 그의 '빈 집'을 읽어 보자.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는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기형도에게 세상은 온통 '빈 집' 투성이였는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엄마를 기다리던 '빈 집'에 홀로 엎드려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오지 않던 엄마를 걱정한 것처럼,
어른이 된 기형도에게도 '우리집'은 오지 않았다.
사랑을 잃고 그는 쓴다. 

짧았던 밤. 그는 사랑을 했고, 이제 그 사랑을 잃었다. 
모두에게 안녕을 고한다. -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것들에게...
안개와 촛불들, 흰 종이들과 눈물들.
한 때는 그녀와 나의 것들로 착각했던 그것들은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일 뿐이다.

그리고 이제 문을 잠근다.
이룰 가망없는 그의 사랑은 '빈 집'에 갇힌다.
김기덕 같은 이의 작품을 만들게 해주는 모티프가 될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텅 빈 시상이 가슴을 저민다.
김기덕의 '빈 집'은 낮에는 사랑이 없고 사람이 없는 텅빈 집을 상상 속에 밀어넣은 영화다. 

기형도의 '빈 집'은 절망과 폐쇄의 공간이다.
모든 열망을 상실한 후의 공허한 내면의식이 반영된 정서적 공간이라 보면 되겠다. 

이 시에서 사랑을 잃어버린 행위는
연인과의 그것이기도 하고, 인생이나 세상에 대한 열정일 수도 있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자신은 '질투했을 뿐'임을 깨달았듯,
사랑을 잃고 그는 세상을 향한 문을 닫는다.
혼자 '빈 집'에 스스로를 가둔다.
그의 영혼은 메마르고 쓸쓸하다.

그의 작품들은 우울한 기억과 회상들로 가득하다.
개인적 경험이기도 한 이것들은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였다.
그의 시에는 좌절, 불안, 허무, 불행, 죽음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이 기괴한 시어들을 일컬어 '그로테스크(기괴한 건축 양식에서 나온 말)'라고 부른다.

마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떠올리는 그의 시 '안개'를 읽어 보자.
이 시를 기형도가 유명해 졌다고 한다.
암울하고 전혀 내일이 보이지 않던 1980년대 독재 시대가 잘 반영되어 있단다.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기형도, 안개>

이 시의 '안개'는 자연 현상이라기보다는 '공장에서 뿜어진 매연'이기 쉽다.

1문단에서 샛강에 안개가 끼는 것은 외부와 경계를 짓는 것으로 읽으면 될 거야.
3문단을 먼저 보면, 다시 샛강에 안개가 낀다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어.
안개는 명물이고, 여공들은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공장으로 간대.
제법 밝고 경쾌한 어조로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반어법>이란다. 

공장으로 가득한 가난한 사람들의 그 읍 사람들은
늘 매연 가득한 대기 속에서 살아가면서 햇볕을 쬐지도 못한다.
여공들은 건강미를 잃고 얼굴은 허옇게 뜨고, 아이들도 자라기 전에 공장엘 가야 한다.
이렇게 부정적인 현실을 <명물이고, 아름답고, 무럭무럭 자라 공장엘 간다>고 썼으니 반어지. 

2문단에선 '안개의 군단'이 지배하는 부자유한 도시를 형상화하고 있다.
온통 우울하고 답답하다.
사람이 겁탈당하고, 얼어죽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이렇게 썼다.
안개가 자욱한 세상에 사는 것은 사회적 책임이다.
가난하게 공장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책임이 가장 크다.
대기업과 재벌들은 정치가와 짜고 큰 이득을 얻는다.
그리고 다시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다시 이득을 얻는다.
이 톱니바퀴 속에서 '난쟁이'들은 나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개인적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라고 표현한 것도 <반어>다.
그것을 개인의 불행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구조적인 사회의 문제라는 속뜻이 강하게 비친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내들은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비판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감옥에 갇혔기가 십상이다.
경찰은 무조건 기업가의 편을 든다.
국가도 무조건 기업가의 편을 든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이런 말은 국민을 괴롭히는 나라라는 뜻이다.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나라에서는 인삿말도 '부자되세요~'가 되었다.
이런 나라는 세상에 잘 없단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헐~
돈이 곧 인격이 되는 무서운 곳이 '안개낀 도시'다.
비판하는 자들은 조용히 사라지고,
모든 문제는 <개인적인 불행>일 뿐이다.

이 시는 산업화로 인해 파괴되는 자연과 삭막해지는 인정에 대한 고발의식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시와 비슷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시가 있어 한편 소개할게.
바로 이성복의 '그 날'이다. 우선 읽어 보렴.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 날>

이성복은 어려운 비유나 상징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그저 '그 날'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씩 주워섬기고 있다. 

그 날 일어난 사건 목록을 만들면 아래와 같다. 

1. 아버지는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학교갔다
2. 어머니의 다리는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노닥거렸다  
3.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4. 역전엔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어린 여자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5.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6.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7.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8.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9. 새 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10.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11.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이렇게 적으나 마나 한 일들로 가득한 날이 '그 날'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는 '그 날' 사람들은 아프게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사장과 다투고, 어머니는 다리가 붓고, 가난한 여인들은 몸을 팔았다.
잡초뽑는 여인들과 집 허무는 사내들의 가난은 삶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이 시의 백미는 마지막 두 행이다. 
그토록 세상이 고통스러웠던 그 날,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마치 기형도가 <개인적 불행일 뿐>으로 치부하는 것과 같다.
세상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다고 소리치지도 아픈 이를 위해 치유하려는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세상은 <무사했고> <완벽했고 없는 것이 없었다>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표현은 모두 <반어법> 되시겠다.
세상은 아프고 엉망 진창이다.
그런데 무사하다, 완벽하다, 안 아프다 했으니 '반어'지. 

불규칙하게 시어를 행갈이해서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소외당하는 자들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을 고발하는 일종의 <참여시>다.

부모는 고단하고 아픈데, 자신은 노닥거리고 여동생은 음악회를 간다.
이런 부조화가 시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데도, 전방은 무사하단다. 전쟁으로 대치중인 국가에서 할 말은 아니다.

없는 것이 없는 완벽한 국가인데도,
가난에 찌든 여성들은 창녀가 되고, 어린 여자애도 곧 창녀가 될 운명이다.
미래까지도 비관적이다. 

여동생은 사랑하는 이와 음악회를 갔는데,
화자는 자신의 잘 풀리지 않는 사랑이라도 있는 듯,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무서운 상상도 한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여성에 대한 분열증적 반응이다.
앞서가는 부츠신은 멋진 여자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어두운 시대지만,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빈다.
향락적인 사회 풍토에 대한 비판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한 문장에 모순되는 두 가지 주장이 담겼다.

병듦 = 가난 = 아픔 = 괴로움
아프지 않음 = 건강 = 즐거움

이렇게 상반되는 것들이 담겼으니 <역설>이 된다.
이성복의 <그 날>과 기형도의 <안개>에 담긴 세상을 <부조리한 세상>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고귀한 존재지만,
식민지 사회라든지,
인간보다 물질을 앞세우는 자본주의 사회 같은 곳에서는
인간이 돈과 권력 앞에 허리굽히는 일이 많다. 

알베로 까뮈라는 작가는 <이방인>이란 소설에서 식민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아,
식민지가 인간의 조건을 얼마나 <부조리하게> 만드는지를 고발한다.
정신 이상이 되어 햇빛이 번쩍거리는 것으로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 뫼르소는
일반적인 미친놈이 아니다.
그는 분명 미쳤지만, 사회적인 <부조리>가 그를 미치게 했다는 고발인 것이다.
이 시들의 주제 의식과 비슷한 면이 있어 까뮈를 잠깐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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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은입니다 2013-08-04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아버님하고 연배가 비슷하시고 자상하게 시대상황과 선생님의 경험담을 이야기형식으로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여러과목 특히 가끔 역사공부할때 느끼지만 아버지께서 약주를하시며 상기되신 목소리로 들려주던 근현대사의 장면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가 않더라구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날마다 해가 지면 어두워지고, 해가 뜨면 밝아진다.
해가 뜨기 전의 어둑한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해가 질 무렵의 흐릿한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박남수는 특히 아침의 또렷함을 사랑한 사람이다.
박남수의 시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잡아내려한 노력이 돋보인다.
누구나 귀찮다는 듯 게으른 하품을 물고,
아침을 먹고 직장으로 학교로 종종걸음을 치는 시각.
시인은 아침을 관찰한다.
그런 시 '아침 이미지'를 읽어 보렴.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物象)을 돌려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屈服)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아침 이미지>

어두울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다가,
아침이 되면 새가 보이고, 돌이 보이고, 꽃이 보인다.
그것을 시인의 관찰력은 <어머니인 어둠>으로 읽은 것이다.
그래서 어둠은 새와 돌과 꽃을 낳는다.
표현도 그저 한 줄로 늘어 놓으면 단조로우니,
'돌을 / 낳고'에서, 행을 바꿔버렸다. 
읽는 사람더러 좀 '긴장'하며 읽으라는 '강조'의 표시다.

아침이 오면 '어머니 어둠'은 온갖 물상(사물, 삼라만상 : 세상의 모든 것)을 낳고 나서,
스스로 사라진다. 그걸 굴복한다고 표현했으니 의인화를 심하게 했다. 

아침이 오면 물상들은 멈춰있던 자세에서 '어깨를 털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침이 오는 모습을 움직임을 통하여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려 노력한 것이다.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는 표현에서
아침은 건강한 생명력으로 삶에 활력을 주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아침이 되어 활기차고 밝게 돌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화자는 즐겁게 관찰하고 있다.
마치 잔치라도 벌어진 듯, 세상은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다. 

해님이 방긋 웃으며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
화자는 즐거워 죽는다.
황금색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모습은 마치 트라이앵글 소리라도 들리는 듯,
즐거운 울림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울러퍼질 듯 청각적 심상을 활용하여 그린다.
공감각적 심상이란 말을 여러 번 썼지?
보이는 태양(시각)을 울리는 소리(청각)로 표현했으니 시각의 청각화~ 되시겠다. 

아침이면 세상이 '개벽'을 한다.
개벽은 '천지 개벽'으로 세상이 처음 열릴 때를 나타낸다.
매일 아침 개벽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아침을 경건하게 맞는 화자의 경외감(존경과 두려움)이 잘 드러난 표현이다. 
이 '개벽'이란 시어에 화자의 감동이 <압축, 응축> 되어 있다보 볼 수 있단다.

이 시만큼 '아침의 신비와 활기'를 잘 관찰하여 쓴 시도 찾기 어렵단다.
'밝은 아침을 맞이하는 삼라만상의 생동감'이 오롯이 살아있어서,
독자의 기분마저도 상승시키는 효과를 노리고 있지.
매일 아침, 소가 도살장 끌려가듯 억지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 잘못살고 있는 거 아니니? 아침이 얼마나 신비로운 건데,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었던 아침이 지금이라고~~!!"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해. 

이 시의 특징적 시어는 <어둠>인데,
보통 '어둠'이 부정적 의미로 잘 쓰이잖아.
근데 이 시에서는 어떤 의미로 쓰였다고 했지?
그래. '모태(母胎)의 이미지'란다.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그래서 건강한 생명을 탄생하게 하는 잠재력 가득한 어머니의 이미지지. 

다음엔 그의 '종소리'를 읽어 보렴.
이 시에서도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현상을
그 청각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고 감각적 언어들을 동원하고 있단다.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종소리) 

이 시의 화자 '나'는 바로 '종소리'야.
종소리가 의인화된 것이지.
1연에서 '나는 청동으로 된 종의 표면에서 떠난다'고 했으니,
종소리가 마치 나비처럼 종의 표면에 붙어있던 것처럼 보이잖아.
그러다 기둥으로 종을 쿵! 치면 나비처럼 붙어있던 종소리가 비로소 떠난다는 거지. 

햐~ 상상력도 참 특이하지 않니?
세계적으로 한국에 전래된 종은 그 음색이 곱고도 울림이 오래 아름답게 멀리 퍼지기로 유명하단다.
그런 소리를 듣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공명이 일어 이런 시를 쓰고 싶었는지도 몰라.
한국 종은 신라시대로부터 이어지고 있는데, 구성도 독특하고 소리도 아름답대. 

표면에 수백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 붙어있던 새처럼
일제히 날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표현 자체가 장관이구나.
진폭(동그라미처럼 울리는)의 새가 되어 날아가는 종소리는 금세라도 화면에 잡힐 것 같아. 

광막한 울음 소리가 되어 날아가는 종소리.
멀리멀리 전달되는 종소리를 그리고 있는 1연. 

그런데 2연으로 넘어가면서 또다른 이미지를 얻어낸다.
종소리는 <청동의 벽>으로 이뤄진 <칠흑의 감방>에 갇힌 존재로 그려진다.
그 종소리는 울림과 동시에 '인종(참고 따름)'의 시간을 끝낸다.
자유를 구속하는 '역사'적 현실까지도 종소리와 연관지어 그려내고 있다.

3연에서 종소리는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날아간다.
들을 지나 꽃을 만나고 하늘로 오른다.
거기서 푸르름, 웃음, 악기 소리처럼 싱그러운 존재로 마음껏 표현된다.
지난 시간 이야기한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나는 자유다!"를 외치며 하늘 높이, 들판 너머 멀리까지 흘러간다. 

그러다 4연에서 부정적 시어가 등장한다.
2연의 '구속'인 '청동의 벽'과 '칠흑의 감방'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하지만,
'먹구름' 깔린 시대가 다시 도래할 수도 있다.
그러면, 멀리 나아간 종소리는 하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천둥소리)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되어 온 세상에 울려퍼진다.
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은 곧 '자유의 소리'가 온 세상에 고루 퍼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소리를 가루가 자욱하게 퍼져나가는 것처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이것도 청각의 시각화, 곧 공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단다.  

이 시의 주제는 '종소리를 통하여 본 자유, 역사의 의미' 정도가 되겠지.
예전엔 이렇게 웅장한 목소리의 시를 '남성적 어조'라고도 했는데,
요즘엔 성차별 용어라고 구박받을 소지가 있어 그런 표현은 쓰지 않는단다. 

그리고 1,2연에서 도치법을 사용하여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는 것도 특징의 하나란다.
박남수의 '종소리'의 소리는 공간적으로 높은 곳까지 '상승'하고, 먼 곳까지 '팽창'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주제는 <해방>이란 이야기는 이미 했다.
아래서 지훈의 '범종'을 읽으면서 '소리의 이동 경로'와 '주제'의 차이를 생각해 보자꾸나.

무르익은 과실이
가지에서 절로 떨어지듯이 종소리는
허공에서 떨어진다. 떨어진 그 자리에서
종소리는 터져서 빛이 되고 향기가 되고
다시 엉기고 맴돌아
귓가에 가슴 속에 메아리치며 종소리는
웅 웅 웅 웅 웅……
삼십삼천(三十三天)을 날아오른다 아득한 것.

종소리 위에 꽃방석을
깔고 앉아 웃음짓는 사람아
죽은 자가 깨어서 말하는 시간
산 자는 죽음의 신비에 젖은
이 텡하니 비인 새벽의
공간을
조용히 흔드는
종소리
너 향기로운
과실이여! <조지훈, 범종(梵鐘)>

조지훈은 범종의 울림을 '향기로운 과실'에 비유하였다.
과실은 '열매'이니, 결실을 맺는 것이고,
과실과 종소리의 공통점은 바로 <정신적 성숙>에서 찾아낸 것이다. 
새벽에 텅빈 공간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얻게 되는 정신적 성숙이 <범종>의 주제다. 

이 시에서의 소리는 '응축→하강→확산→상승'의 단계를 거친다고 볼 수 있단다.
'무르익은 과실'처럼 응축하고,
허공에서 떨어지고,
터져서 확산되고 엉기고 맴돌고 메아리치고,
삼십삼천(온 세상)으로 날아오른다. 아득하게. 

꽃방석을 깔고 앉아 웃음짓는 화자는,
종소리를 들으며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시다.  

박남수의 시 중에서 더욱 관념적인 시로 여겨지는 시가 바로 '새'다.
송창식이란 가수가 노래로도 불렀던 유명한 시인데, 우선 읽어 보고 이야기하자.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새> 

마치 설명문을 쓰듯, (1)(2)(3) 이런 표현을 썼다.
그 문단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도 있겠다.
우선 (1)문단을 보자. 
바람의 여울터, 나무 그늘에서, 곧 자연 속에서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그것이 '자연'이다. 

동양에서 쓰던 자연은 지금처럼 '명사(원래 있는 존재)'적 의미로 쓰이지 않았단다.
노자의 사상에도 나오는 '무위자연'의 '무위'는 '유위'의 반대야.
'유위'는 인간이 억지로 지어내서 만드는 <인공, 문명>이고,
'무위'는 인간이 건드리지 않아도 이뤄지는 <자연>의 경지지.
곧, '무위'와 '자연'은 비슷한 말을 반복한 거란다.
'자연'은 '인간이 지어내지 않아도 그렇게 돌아가는' 상황을 표현하던 말이야. 

2연에서 새는 또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서로 사랑을 나눈다.
사랑해~ 이런 말은 얼마나 표현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겠니?
새는 그렇게 말로 지어내는 '유위'를 꾸미지 않고도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야. 

곧,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던 건방진 철학자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인간이 새와 비슷한 '미물'이자 '온전한 소우주'임을 가르치고 있는 시란다. 

(2)문단에서는 '새는 뜻을 만들지 않고, 억지로 사랑을 꾸미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1문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근대 정신에 일침을 가하는 것 같아.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니 '호모 루덴스'니 해서 지혜가 있다는 둥, 도구를 쓴다는 둥,
자기 종족이 자연 일반에 대하여 우월함을 내세우고 있잖아.
그렇지만, 새는 인간처럼 굳이 뜻을 만들어 말하지 않는대.
'무위 자연'의 실천이겠지. 

인간이 '유위'로써 지어낸 것이 뭘까?
지식을 쌓으려고 책을 만들고, 상대를 정복하려 전쟁을 만들었어.
전쟁에 유리하도록 화약을 만들고 총포를 만들어서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지.
그래서 '노자'라는 책에서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참상을 겪고 나서 딱, 이렇게 이야기했어.
'자연'은 만물의 어머니다. 지혜로운 존재다. 자연은 인간처럼 <다투지 않는다>.
인간들아, 제발, <다투지 말라 不爭>, please~~~. 

(3)문단은 조금 까다롭지만,
유사한 시들을 이미 다뤘으니 간단하게 살펴 보자꾸나.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나 신동집의 '오렌지'를 공부한 적 있잖아.
존재의 본질을 아는 것은 어렵다.
알려고 마음먹으면 그 순간 존재의 본질은 더 파악하기 어렵게 된다. 이런 것.  

포수는 '인간'이고, '유위'를 뜻해.
뭔가를 하려고 하는, 업적을 쌓으려고 하는 존재. 자연을 이기려는 존재.
그래서 포수는 '자연-새-순수'를 잡으려고 총(한덩이 납 탄환)을 쏜단다.
그렇지만, 포수가 매번 쏘아 맞히는 것은 '자연-새-순수'가 아니야.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는 포수가 이루려던 '유위'의 목적이 아니지.
결국 포수의 의도는 보기좋게 빗나가고 만단다. 

지금 대통령하는 이가 돈을 좀 긁어 모으려고 4대강 사업을 벌이고 있어.
온 강에 포크레인과 트럭을 동원해서 무슨 공사를 하는데,
결국 강물은 더 질이 나빠지고 그 피해는 후손들이 입게 될 거야.
목적이 돈이 아니라 정말 강물이 걱정되는 거라면, 그렇게 부랴부랴 공사할 이유가 없거든.
척 하면 삼천리요, 툭 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라고,
정치가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그처럼, 인간이 하는 일은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단다.
해운대나 광안리 백사장은 원래 모래밭이 꽤나 넓었단다.
그런데 사람들이 신발에 모래들어가는 걸 싫어해서 둑을 쌓고 시멘트로 포장을 해서 길을 냈어.
그리고 나서부터는 파도에 모래가 쓸려내려가고 말았단다.
해마다 모래밭의 폭은 좁아지게 되어서,
결국 매년 해수욕장 개장 전에는 비싼 모래를 사다가 퍼부어야 하지.
그럼 뭐해. 바다는 다시 모래를 쓸어내리는 걸. 

이 시는 '성북동 비둘기'처럼 '문명 비판적' 시선을 느끼게 하는 시란다.
'인간 문명'은 '자연의 순수성을 파괴'하는 것임을 '피묻은 새'로 섬뜩하게 그리고 있지.
자연은 그대로 두면 (1)과 (2)부분에서처럼,
아름답게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것이거든. 

인간이 자연을 개발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시선은 언제나 단기적 이익을 위한 거야.
장기적으로는 개발이 손해가 되기 십상인 거지.
그런 것을 에둘러 표현하는 시가 이런 것들이다. 

공부나 인생도 그런 것 같아.
단기적인 목적으로 공부하면,
예를 들어 중간고사 범위만 죽으라고 외우고 공부하면 자기한테 오히려 손해가 되는 그런 것.
민우가 살아갈 미래 사회는
기계화, 자동화, 게다가 세계화된 시대란다.
한국인들은 노동할 자리를 기계에 내주고,
임금이 낮은 곳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내주게 되겠지.
결국 한국인은 관리자가 되든지,
아니면 끊임없이 새로운 직업을 구하러 흘러다니는 존재가 될 것임은 불보듯 뻔한 일이란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거야.
세상이 어떻게 흐르는지 아는 것.
그래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자신을 준비시키는 것.
어차피 삶은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이런 거니깐.
한 가지 직업이나 한 가지 목표만 바라보고 달리다가
경쟁률이 너무 높아 포기하면 삶 자체를 포기할 수도 있게 된단다. 

부디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넓게 보고 많이 읽고 여러 가지 직업에 관심을 두기 바란다.
그리고, 늘 미리미리 준비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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