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땅은 지금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다.
가장 무서운 자연과의 전쟁.
인간의 오만은 높은 바벨탑을 쌓아 올려 하늘에 도전하지만,
하늘의 뜻은 그 바벨탑에 벼락을 떨어뜨리지. 

인간의 거만함은 자연의 흐름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그래서 인간이 정말 겸손해야 함을 일본 지진 사태를 보면서 느낀다. 

오늘은 한국 전쟁 중,
가난의 극심함을 심리적으로나마 이겨내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서정주의 시를 한 편 보자.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서정주, 무등을 보며>

'남루'는 '누더기'야.
가난은 '누더기'다. 이런 은유를 썼다.
그럼, 둘 사이에 유사점을 찾아야겠지. 

1연에서 또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는
<갈매빛(진녹색) 등성이를 드러내고 선 여름 산>같다고 했어.
우리들(전쟁으로 누더기를 입고있는 사람들)의 본질은 당당한 멋진 사람이란 거지.

누더기를 입고 있으면 사람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누더기가 그 사람의 본질, 멋진 본성을 가릴 수는 없는 것처럼,
가난도 그 사람의 본성을 가릴 수는 없단 이야기야.  

청산이 난초를 기르듯,
인간은 제 새낄 기른다.
힘들다고 난초를 내쳐버리지 않는 청산처럼,
전쟁기 가난하다고 새끼를 버릴 순 없다. 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먹고 살 것이 없는 극빈의 시기.
너무 배고픔이 극심하지만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곡식.
목숨이 가다가 휘어지는 가지처럼 지친 때가 오면,
더러는 앉고, 누워서
서로 바라보며 의지하며 살 일이다.
마치 박재삼의 <흥부 부부상>을 읽는 것처럼,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부정적 현실(가시덤불, 쑥굴헝)에 놓이더라도
우리는 호젓이 묻힌 <옥돌>같은 존재다.
'청태(이끼)'가 끼었다고 옥돌을 버리지 않듯,
우리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전쟁 중의 극심한 궁핍도 의연하게 이겨내자는 <의지>가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 중 자식을 잃기도 하고 놓치기도 하였지만,
제 자식을 고아원에 버리기도 하였다.
극심한 가난은 인간을 무심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절제된 감성으로 부정적 현실을 이기려는 의지가 돋보이는 시.
구체적인 대상(무등산)을 보면서 그 산처럼 의지의 한국인이 되려는 마음을 먹은 거겠지.   

 

<무등산 서석대 瑞石臺, 상서로운 돌이 있는 높은 곳>

'무등 無等'이란 뜻은 불경에서 자주 보이는 말이야.
대등한 것이 없는~ 이런 뜻이지.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그래서 <최상급>의 표현으로 쓰는 말이란다.
최고의 산, 최고의 명산. 무등산. 
사진의 서석대는 기둥 모양(주상)의 돌조각이 갈라져있다 해서 <주상절리>라고 부르는 지형이야.

그러나 30년 전 광주에서 군부의 쿠데타로 시민들이 죽어갈 때,
무등산은 '오르지 못할 산 無登'으로 일컬어 지기도 했어.
산으로 피할 길도 다 막아버리고 젊은이들을 학살했던 무서운 과거가 담긴 말이지.
지금도 광주의 상징은 무등이란다.
무등산 수박, 무등 양말, 무등 경기장...
무등이 <최고>란 최상급의 의미를 가진다면 멋진 이름이겠지.

간혹 서정주가 살아온 삶을 보면,
저항정신보다는 순응적 삶이 두드러지다 보니,
<정신적 승리>로 보이는 이 시도 <사치>가 아닌가? 하고 비판할 여지도 있긴 해.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살자. 그래 놓고는 자기는 그 독재자 전두환을 엄청 숭상했거든.

다음엔 박목월의 시 <가정>을 읽으면서 가난하던 시절의 아버지 마음을 한번 살펴 보자.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가정, 박목월>

'지상'이란 말을 쓰니 왠지 화자가 지상 말고 다른 세계,
뭐, 하늘나라나 천국을 생각하며 쓴 시 같기도 하다. 
또는 아버지가 직장에서 퇴근해 보니
부엌이나 마루 밑 땅위(지상)에 아홉 켤레의 신발이 헝클어져 있는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지.  

아이고, 아이가 아홉이나 되니 참 많기도 했다.
현관, 들깐(다용도실)에
시인의 가정에 저녘 무렵
치수가 다른 아이들 신발이 우루루 모인 풍경. 좀 정겹지만,
가난하던 시절, 배고픈 시인이 먹여살리기엔 너무 많다. 

아빠인 시인의 신발은 19.5문(요즘으로 치면 250센티쯤)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온 아버지 시인의 길은 시련의 길, 배고픔의 길이겠다. 
그 아빠의 신발 옆에 6.3문의 막내둥이 신발.
고 귀여운 앙징맞은 크기는 아버지 신의 1/3 크기다. 참 귀엽다.
그 귀여운 신을 상상하면 아버지의 고달픈 삶도 금세 따스해 지는구나. 

검정 고무신이란 만화처럼 수십 년 전 한국은 최빈국 중의 하나였단다.
그 시절엔 정말 살찐 사람을 부러워하던 시대였어.
돼지라고 안 놀리고 '사장님'이라고 놀렸거든.
학교엔 살찐 아이들이 별로 없었고 말이야. 

미소하는, 웃는 얼굴을 보래.
여긴 <천상>이 아닌 <지상>이고
<얼음과 눈>의 시련이 가득한 세상이야. 

가엾은(연민한) 삶의 길은 시련투성이일 뿐이지. 

아홉 마리의 강아지, 강아지 같은 것들은 <귀여운 아이들>이겠지.
아버지는
<굴욕과 굶주림과 추위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란다. 

여기는 천상이 아니라 지상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아버지는 <어설픈 존재>라는구나.
인생은 무엇이든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란 이야기 여러 번 했지? 

아이들을 제대로 벌어 먹이지도 못하는 아버지는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어설픈 아버지>로 여긴다.
그렇지만... 

마지막에서 <미소하는 내 얼굴>은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모습이다.
비록 가난하지만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잘 드러나 있지.
가난하다고 아버지의 사랑까지 가난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야.

이 시와 흡사한 시로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도 있어. 읽어 보렴.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는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1연에서 <바쁘고 굳세고 바람같이 만나기 힘든> 속성을 가졌던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 곁에 있고, 마음 약하고, 부드러운> 아버지가 된다고 했다. 

바쁘고 굳세고 바람같던 아버지들은 열심히 일하느라 보여준 모습이었고,
집에서의 아버지는 그저
<어린것들을 위하여 / 난로에 불을 피우고 /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일 뿐이다.
아이들이 추울까 <저녁바람에 문을 닫고 /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대.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이 된대.
전쟁이 나거나 시위가 있으면 제 자식이 다칠까 걱정이 되잖아.
일본에서도 부모들이 얼마나 자식 걱정 많이 했겠나 생각해 보면 될 거야.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가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아이들은 아버지의 <전부>란 이야기지.
함께 살아갈 장소, 사람이란 이야기. 

<굳건해 보이는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박목월의 <가정>에서처럼,
<얼음과 눈의 벽>에 사는 사람,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걷는 사람,
<어설프>지만 꿋꿋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아버지는,
그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외롭다.
겉으로는 올빽머리 근육빵빵 슈퍼맨처럼 보일지라도,
폭탄 제조자, 감옥 교정공무원, 술집 주인은 모두 터프해 보이는 이들이지만
이들은 모두 <바쁘고 굳세고 바람같은> 사람들이어야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순수한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의 깨끗한 피로 인하여
씻김을 받는다.
그들이 비록 아무리 험악한 일을 하는 존재라 하여도,
아버지로서 아이를 볼 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으로 변하게 됨을
<씻김>, 곧 <세례>를 받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자식들이 있어 극복할 수 있는 아버지의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지.

늘 가족을 아끼고 책임지려는 아버지의 마음.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나라>나 <민족>만큼 소중하고 무게가 큰 존재다.
박목월과 김현승의 생각은 비슷하지.
차분하고 조용한 어조로 아버지의 삶의 무게를 표현한 시들이다. 

글쎄. 아빠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니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 시대는 아빠의 직업으로도 먹고 살 만큼 벌 수 있으니 시대도 잘 타고 났고.
민우도 아빠가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 건지... 한번 생각하며 읽어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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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16 0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하시는 일을 하고 사니 행복한 일이라는 님이 좀 부러운 걸요.
오늘 페이퍼는 테드창이 떠오르네요~^^

글샘 2011-03-16 08:57   좋아요 1 | URL
저는 힘들다고 생각할 때, 저 아버지들을 생각합니다.
힘들게 지겨운 밥벌이를 하시는 아버지들을 말이죠. ^^
테드창은... ㅠㅜ 금시초문이라...

시간의안그림자 2011-04-01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지만, 아버지의 술잔에는 눈물이 고인다'는...
'아버지는 어슬픈 존재'라는...
마음이 시리고 여운이 흘러 내립니다^^ 이 지상에는 모성은 있지만, 부성은 없다고 말을 합니다. 왜 부성이 없다고 했는지.. 누군가를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살아 갈 수 있는 당신이기에 아버지의 존재는 어슬픈 존재라고 해도 위대하고 너무 크 보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희생이 있어 주었기에 오늘 우리들이 각자 자기의 자리에 안주하면서 살아 가고 있는 거 겠죠^^ 그런 것 같습니다. 많이 권위적이었고 엄했던 내 아버지와 지금의 내 남편이자 딸 아이의 아빠가 되어 버린 30, 40대 아버지를 들여다 봅니다. 아버지는 한결 같아 보입니다. 내 아버지가 왜 딸 자식한테 엄격했어야만 했는지, 30,40대 아버지란 이름 역시 그러하다는 시실과 현실을 보면서 아버지는 생명이 세상에 붙어 있는 한 가족들을, 자식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만 되는 자라는 사실을, 새대의 애환이 아버지들을 강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누군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야만 되는 자이기에 눈물을 흘러서는 않된다는 것을....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스스로 패배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인내하고 걸어 가야 되는 자라는 것을 알기에 마음으로 우는 사람이 아닐까요^^ 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을 사람답게도 만들어 주지만 사람에게 엄청난 댓가도 요구하는 곳이라니... 나이는 사람한테 지혜를 전해주지 않지만, 세월은 사람에게 지혜를 전해 주는 자 인 것 같습니다. 엄마의 죽음은 자식들한테 마음의 빈 자리를 만들어 주고 아버지의 죽음은 자식들한테 영혼의 빈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버지의 힘이 세상에서 큰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글샘 2011-04-03 10:56   좋아요 1 | URL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고 가시네요. ^^
반갑습니다.
 

지난 겨울 그렇게 춥더니 이제 완연한 봄날씨다.
누군가가 세상 이치를 '지나가리라'란 한 마디로 요약했다더니,
추운 겨울도 금세 지나가고,
따스한 봄도 또 지나갈 거야.
민우의 고3도 금방 지나갈 것이고, 젊음도 머지않아 다 지나간단다.
재미있게 사는 삶을 스스로 만들기 바란다.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는 시부터 한 편 읽고 시작하자.
오인태의 <냉이꽃>이란 시인데,
냉이꽃이 땅바닥에 납죽 엎드린 모습을 보고 거기서 의미를 찾고 있어. 

원래 인간의 언어는 부족해서 말로 뜻을 모두 표현하기 어렵대.
그래서 <모습> <상 象>을 내세워 뜻을 전달하려고 하지.
낮은 곳에 관심을... 이런말보다 <냉이꽃>이 보여주는 뜻이 더 강력함을 한번 느껴 보렴. 


그리움에 낮게
흐느껴 본 사람만이
볼 수 있으리라 냉이꽃
엎드려 고개 숙이면
낮은 자리 거기
그리움이 또 하나의
그리움을 불러 마침내
수천 수만의 그리움이
함께 손잡아
질긴 사랑으로 어우러진
냉이꽃 볼 수 있으리라
수렁처럼 절망해 본
사람만이 볼 수 있으리라
엎어지고 밟혀
마침내 절망의 끝에서
절망의 뿌리까지 손톱으로
파헤치다 보면 거기
하나의 절망이 수많은
절망의 잔뿌리를 뻗쳐
서로 일으켜 세우는 봄
억센 희망으로 피어있는
냉이꽃 볼 수 있으리라 <오인태, 냉이꽃 3>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냉이는 땅바닥에 납죽 붙은 식물이야.
그 꽃은 아주 작고 보잘것 없단다.
그렇지만, 그 꽃의 존재가 없다면 냉이는 계속 번식할 수 없겠지. 

그 냉이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세상을 힘겹게 견뎌온 사람이래.
그리움에 낮게 흐느껴본 사람. 

낮게 흐느끼다
엎드려 고개 숙여 보면,
낮은 자리 거기
그리움이 또 하나의 그리움을 부르고
마침내 수천 수만의 그리움이 함께 손잡아 사랑으로 어우러지게 하는 냉이꽃.

이렇게 낮은 시선이 서로 사랑으로 손잡게 하는 깨우침을 준단다.
냉이꽃 그 보잘것 없는 식물이 말이야. 

그 뒤엔 비슷한 말이 등장하지. 

수렁은 물구덩이지.
수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처럼 절망해본 사람은,
엎어지고 밟히고 절망의 끝에서 절망의 뿌리까지 좌절해본 사람은,
절망은 절망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절망들이 잔뿌리를 뻗쳐 서로 일으켜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 

그래서 봄이 되면,
절망한 존재들, 납죽 엎드린 존재들도,
서로 부축하면서 <억센 희망>을 가지게 된다는,
냉이꽃 보잘것없는 꽃과 뿌리를 통해서,
보잘것 없는 존재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깨우침을 보게 되는 거야. 

관조라고 했지?
지난 시간에 주역이란 책에서 <혁명>이란 말이 나온다고 했는데,
아까 한 이야기,
인간이 말로 모두 표현할 수 없어 <상>을 쓴다고 했던 것도 주역에 나오는 이야기란다. 

   
  글은 말의 내용을 남김없이 표현할 수가 없고,
말은 뜻을 남김없이 표현할 수 없다...
성인은 상을 세워 뜻을 남김없이 표현하였다. (계사전)
 
   

관조적 시를 쓰는 시인도 상(象)을 세워 뜻을 표현하는 사람이라 보면 되겠지? 



냉이꽃이란 시는 낮은 곳에서 바라본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드러내려는 시였단다.

다음엔 곽재구의 <20년 후의 가을>이란 시를 한번 감상해 보자.
민우가 20년 후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직장도 잡았을 거고, 결혼해서 아빠도 되어 있을까?
기술자가 되었을 수도 있고, 회사원이나 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한번 읽어 보면서 20년 후,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의 심정으로 삶을 느껴 보렴.

내 어릴 적 산골 학교 미술 시간에
나는 푸른 크레용으로 옥토끼 모양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고 그 안에 울긋불긋 우거진
단풍잎과 맑은 시내를 그렸었다.
산머루향이 교실까지 날아들던 오후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처녀 선생님은
가을 산꽃이 지고 해으름이 일고
그 가을내 나는 선생님의 눈물방울과 같은
단풍잎과 맑은 시냇물 속에 뛰놀았지만
돌아서서 눈물 훔치던 선생의 뒷모습과
나를 쳐다보던 충혈된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 단풍잎은 지고 세월은 가고
이제는 선생이 된 내 앞에서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그림을 그린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슬픔의 푸른 크레용으로
둘러친 동강 난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이들은 평상의 얼굴로
반쪽의 땅 위에 단풍잎을 채우고
나는 충혈된 눈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눈을 뜨고 모른다며 살아온 날들이 가슴 후비는 날
가만히 손가락으로 그려보는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래 나는 이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내 손으로 그린 내 땅 안에 허름하게 시든
단풍잎 하나 떨구는 것을 거부하면서
끝내는 잊혀진 옛 선생님의 눈물마저 되살아나
동강 난 눈물방울들이 산과 바다와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뒤덮었다.<곽재구, 20년 후의 가을>

처음에 화자는 어린 시절의 미술 시간을 이야기해.
우리나라 지도를 그린 화자.
산골학교라 산머루 향이 날아들던 소박한 교실에
처녀 선생이 있었는데, 웬 일인지 눈물을 훔치던 뒷모습이 기억에 남는대.
충혈된 눈동자와 함께 말이야. 

세월이 흘러 화자는 이제 선생이 되었고,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미술 시간이야. 

아이들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분단된 조국에 단풍잎도 그리고 시냇물도 그리겠지.
아~
화자는 충혈된 눈으로 아이들을 보는구나.
그러면서 예전에 그 처녀 선생이 왜 화자의 그림을 보며 눈물지었던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눈을 번히 뜨고도 굳이 모른체 하려 애쓰며 살아온 날들이 가슴을 후비는 날.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대하여 관심갖지 않고 무심히 살아오려던 날들.  

그러나 아이들이 그 반토막난 땅에만 이쁘게 단풍잎 고운 색을 칠하는 걸 보고
화자는 눈물이 어린다.
눈물방울조차 동강나버려 마음이 아프다. 

분단된 조국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단풍잎 하나 제대로 그리는 것을 거부하면서,
어찌 통일을 꿈에나 그릴 수 있겠는가. 

잊혀진 옛 선생님의 눈물마저 되살아난 그날,
20년 전의 가을이 되살아난 그날.
아이들에게 20년 후의 가을에는 어쩌면 동강난 국토가 이어져 있으려나?
아이들의 천진난만 웃는 얼굴에
조선 천지 온 산과 온 바다에
화자의 아픈 눈물방울만 동강나 가득찬다. 

<받들어 꽃>이란 시집에 수록된 이 시는
<받들어 총>이란 군인식 경례를 비꼰 것처럼,
통일에 대하여 무심한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시야.

"언젠가 꼭 돌아올 아름다운 그날들을 부끄럽게 맞이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진실로 아름다운 그날의 시 한 편을 꼭 쓰기 위하여"
시를 쓴다는 곽재구 시인은 우리가 흔히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삶들을 아름답게 형상화해 내어 새롭게 일깨워 준다는
평을 받고 있단다.

시인이 바라는 <꼭 돌아올 아름다운 그날>이 통일의 날이기도 하겠지?
20년 후의 가을이면, 정말 통일이 되고, 한국이 평화로운 나라가 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도, 북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도 사라지고,
<유나이티드 코리아>나 <코리아>로 새로 날 수 있을까?
이 시를 읽으면 그런 기대가 살살 피어오른단다.

다음엔 오세영의 시, <겨울 노래>를 읽어 보자.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이제는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지금은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릴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오세영, 겨울 노래>

이 시를 읽으면 성철 스님의 '화두'가 생각나.
첨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셨어.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사물을 세상을 <바로 보마> 하는 김수영의 <공자의 생활난>과 같은 거지. 

그 담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고 하셨대.
인간이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일 거야. 

그런데 돌아가실 때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셨어.
어찌 보면 말장난인 것 같지만,
산은 산으로 거기 있고, 물은 물로 거기 있으며,
인간은 그것을 어찌할 수 없는 무상한 존재라고 가르치신 건지도 모르지. 

산이 저기 있어.
눈에 산이 뻔히 보이지.
화자는 '산자락을 덮고 자'는 사람이야.
그렇지만 산이 되진 않지.
산과 동화되지 않는 것이 불만인 것일까? 

또 화자는 '산그늘을 지고 사'는 사람이기도 해.
그렇지만 산과 동화될 수 없어.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저기 산이 있는데, 화자는 그 산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인간 존재임을 절절히 깨닫는다.
여기까지만 다시 읽어 보렴.
동화되길 원하지만 동화되지 못하는 화자가 느껴지는지.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는 분명 시끄럽게 재재거렸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분명 소란스레 달가닥거렸는데,
이제 오간데 없어. 

화자가 가던 길이 끝나고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과연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산까치나 다람쥐는 과연 있었던 것일까?
인간 세계의 길이 끝나, 산문의 길로 접어들었는데도 왜 진리는 보이지 않는 걸까? 

세상 이치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경지가 있다.
<언어 도단>이라고 한다.
언어가 끊겨 말로 할 수 없는 경지.
그럴 때, 성인은 <상>을 그려 보여준다고 한다. 
그 상을 한번 만나 보렴.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

어제 오늘 진눈깨비와 폭설이 가득 내려 세상은 흰색으로 꽉 찼다.
아니 꽉 차서 텅 비어 보인다.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다.
그렇지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다람쥐와 까치는 그쳐있지만, 또한 다람쥐와 까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  

불교에서 언어로 전달되기 힘든 것을 
언어를 세우지 않고 <불립문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기도 한다. <이심전심> 

빈 하늘 빈 가지에 홍시 하나 떨고 있는 풍경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거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다. 

어제는 종일 난초를 그리고(난을 치고)
오늘은 종일 물소리를 듣는 화자. 

그런다고 세상 사는 이치를 깨우칠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조용하게 마음을 가라앉힐 줄 아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듯 하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판단이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일 뿐임을 생각하는 것 같다. 

화자는 난을 치고 물소리를 들으면서 자연과 동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뭔가 세상으로 난 길을 뛰어넘어서 <높으면서도 좀 외로운 정신 세계>
즉, 고상한 마음 상태를 얻은 것 같지?
이렇게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놓여난 상태를 <달관>이라고 한단다.
세상 일을 뛰어넘어 보게 되는 경지를 일컬음이지.

동양화에는 가득 차는 맛보다는, 여백의 미가 있다고 하잖아.
이 시도 의미를 모두 이해하려는 '채움의 미덕'보다는
마음을 비우고 세상 만사 너무 지적으로 알려는 태도를 경계하는 것은 어떠냐?는 식의
'비움의 미덕'을 가지고 감상하는 맛도 특별할 거다.   

더 나이가 들면, 종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가 있을 거야.
종교적인 시는 많이 다루지 않지만,
인간의 나약함을 뛰어넘으려는 시도가 종교인 만큼,
종교의 기본 의미 정도는 자꾸 이야기할 기회를 가지도록 할게. 

오늘은 낮은 곳에서 보는 일과 깨달음을 나타낸 오인태의 냉이꽃과,
통일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미래의 눈으로 읽는 곽재구의 20년 후의 가을,
그리고 종교적 관조의 세계를 달관의 눈으로 쓰는 오세영의 겨울 노래를 이야기했다.

한 주일 시작이야.
힘 내서 또 재밌게 살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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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김수영의 <공자의 생활난>을 읽었는데,
글쎄 요즘 생활난을 겪어보지 않은 너희로서는 생활난에 대한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은 전쟁 이후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로 꼽히고 있었단다. 

'홀트 아동 복지 재단'은 전쟁에서 고아가 된 아이들을 입양시키기 위해
한국에서 탄생한 기관이었고,
1960년대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워낙 돈이 없어서 사업을 벌일 수 없자,
독일에 돈을 빌리려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기도 했어. 

거지같은 식민지는 오히려 부담이 되기에
한국전쟁때 일본을 부흥시켜준 것처럼
베트남전쟁을 기회로 한국을 부흥시켜준 미국의 힘도 작용했을 것이다.

거기에 조선시대부터 지식인이 되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던 전통을
아니 배우지 못하면 설움을 받던 전통을 이어,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열기가 대단했던 덕택에
한국은 <근대 공업 사회>로 들어서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와중에서 농촌은 파괴되고,
대도시의 삶은 빈민층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부동산 투기'와 '도시 개발'로 인한 땅부자가 생기게 되었지.
지금도 한국 땅의 55%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인구의 1%라고 하더구나.
한국 땅의 82%를 가진 사람은 5%밖에 안 되고... 

세계 어디에도 없는 <아파트 열풍>이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이유는 이런 데 있을 거야.
뭐, 땅이 있어야 집을 짓지.
그러니 위로 위로 오를 수밖에. 

겉으로는 먹고 살 만하게 변해가는 것 같았던 한국 사회는,
속으로는 군사 독재가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었단다.
극장에서 상영하는 '대한 늬우스'에서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박정희가
모내기를 하고 농부들과 막걸리를 마시는 사진이 홍보되었으나,
사실은 으리으리한 집에서 양주를 마시는 파티가 맨날 연출되었다더구나. 

이런 시절, 군사 독재를 그만두고 민간에게 정치를 이양하라고 싸우던 이들은
법률 위반으로 감옥행이었고,
툭하면 사형 선고를 해버리곤 하였단다. 심한 경우엔 정말 죽이기까지 했어.
이런 시절, 저항이란 것은 곧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었을 거야.
김수영이 바라던 <푸른 하늘을> 한번 읽어 보자.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 푸른 하늘을>

이 시는 1960년 4.19 직후에 씌어진 시야.
1961년 5.16에 박정희가 탱크를 몰고 국회를 해산하고 독재를 시작하기 전이겠지. 

4.19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른단다.
혁명이란 것은 말이야.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부르는 걸 뜻한단다. 

혁명(革命)이라는 한자어의 출전은 주역이래.

天地而四時成 湯武 革命 順乎天而應乎人
: 하늘과 땅이 바뀌어 사철을 이루듯 탕, 무의 혁명은 하늘의 뜻을 따라 사람들의 요청에 응한 것이다. 

바꾼다는 뜻으로 쓰였지. 

혁명에 해당하는 영어 revolution은
라틴어 revolutio가 어원으로 "회전하다" 또는 "반전하다"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란다.
암튼 뭐가 크게 바뀐다, 뒤집힌다는 뜻이지.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시구에
반박을 가하는 것으로 시는 시작된단다. 

푸른 하늘을 휘젓고 다니는 종달새.
그 새는 자유로울 거라는 의미는 뭐, 크게 어렵지 않지?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은 이것저것에 구속되지 않잖아.
국민할매가 머리를 길게 기른다든지,
노홍철이 노랑머리를 한다든지 말이야. 

그 시인의 말은 <겉으로 드러난 자유>에만 주목해서 맘에 안 든대.
하늘을 나는 노고지리를 부러워할 거 없단 말이겠지.
그럼, 화자는 뭐가 문제란 걸까?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求)하였으나
그것은 작전(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공자의 생활난 중 일부> 

화자는 '발산한 형상'을 구한다고 했던 기억 나니?
자유롭게 살고 싶다던 화자의 희망 사항.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은
바로 '발산한 형상을 구하>는 사람일 거야. 

세상은 '자유로운 인간'을 구속하는 경향이 있단다.
전에 한번 이야기했지. 엔트로피란 말이 있다고.
사물은 질서정연한 쪽에서 흐트러지는 쪽으로 바뀌게 마련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권력자는 <치안>을 통해서 <질서>를 잡으려고 하게 마련이고 말이야. 

이 사이에서 뭔가가 부딪히지 않겠어?
권력자는 <치안>을 유지하고 질서를 잡으려 하고,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는 사람은 <자유를 누리려> 하고 말이야.
이 사이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단다.
프랑스의 유명한 '랑시에르'란 정치학자였어. 

<자유를 찾는 사람>은 안대. 뭘 아냐면 말이지. 

노고지리가 / 무엇을 보고 /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은 알아.
노고지리가 그저 푸른 하늘을 보고 아름답다고 노래하지는 않음을 말이야. 
노고지리가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는
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피의 냄새'가 섞인 투쟁을 하여야 함을 말이지. 

그래서 랑시에르는
권력자의 <치안>과 자유인의 <권리 주장> 사이에서
<정치적인 것>이 발생한다고 했고, 그 정치적인 것에는 '피의 냄새'가 배어있는 것이겠지.
권력자는 <여기엔 볼 것이 없어. 그냥 지나가시오.> 이렇게 말하지만,
자유인은 <여긴 우리가 보고 말할 것이 있어. 좀 모입시다.>이렇게 외치지.
결국 그 사이의 갈등이 <정치적인 것>이 될 거고 말이다. 

그 피의 냄새 때문에 혁명은 늘 <고독>한 것이어야 한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가 민주주의라고 한 시인의 구절도 있듯이,
혁명은 고독한 것임도 마찬가지 성찰에서 나온 시구란다. 

<알지> <~를> <~를> <~를>
이렇게 ~를 알지의 의미를 도치시킴으로서 시에 여운을 남기기도 한단다.
자유에는 <투쟁>이 있어야 하고,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4.19 직후란 시대에 넣어 보면,
희생 없이는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거야. 

율리우스 푸치크란 사람이 쓴 <교수대로부터의 리포트>란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단다.

내가 마지막 투사가 될 지언정, 싸움의 깃발을 내릴 수 없다. 나를 쏴라. 

이런 정신이라야 혁명 투사가 될 것이란 생각을 김수영도 했던 것 같아. 

이 시에서 '어느 시인'과 화자의 노고지리를 보는 관점의 차이를 정리해 보면 이래.

'어느 시인' - 노고지리의 비상에만 주목하여 자유의 이미지 발견(노고지리는 자유롭게 하늘을 난다.)

'화자' - 그 자유를 획득하기까지의 고난의 과정에서 자유의 의미를 포착(투쟁하지 않으면 자유는 없다.)

다음엔 수능에도 났던 시, 김수영의 <사령>을 읽어 보자.
사령은 '죽은 혼령'이란 의미야.
독재 시대의 '살았으나 죽은 거나 다름없이 무기력한 영혼'이란 의미겠지.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도 저 들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김수영, 사령(死靈)>

1연에서 벌써 화자는 주제를 이야기해버렸어.
'활자'는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나의 영혼'은 죽어 있다.
이렇게 <자유를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성찰, 자기 반성> 이것이 주제지.
마지막 연에서 똑같이 <우스워라> 하면서, 자조적으로 자기 반성을 하는 시.  

<활자>는 글자로 찍혀있기만 한 <자유, 정의> 이런 것이겠지.
이승만이란 조선왕조의 후예이자 왕이라 착각했던 초대 대통령이 속했던 당이 <자유당>이었어. 헐~
독재하기로 유명했지.
그러다 군사 독재로 유명한 박정희의 당은 <민주 공화당>이었어.
'민주'는 쉬운데,
'공화'란 republic의 번역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이런 뜻이야.
독재자 이름치곤 죽이지?
광주에서 수백 내지 수천의 동포를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당은 <민주 정의당>이었지.
무슨 독수리 오형제도 아니고, '정의'를 내세우다니, 참 헐~ 일수 밖에... 

글자로는 온갖 자유를 논하지만, 자유가 없는 세상.
화자는 간혹 <글>을 발표하면서,
<시>를 쓰면서, 활자화된 자유를 이야기했나봐.
화석처럼 굳어져버린 <글자>만의 자유. 

뭐,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았더니 <나 그이를 사랑했어요>할 때의 <사랑>같은 의미랄까? 

<~ 않어라!>와 같은 발음은 서울 사투리야.
서울 방언 중에서는 <않아>를 <않어>로 쓰기도 하고,
<~~하고>를 <~~허구>라고 하기도 한대. '너허구 나허구 이러구 저러구' 이렇게 말이지.
좀 간지럽지? ㅋ 

벗에게 화자는 말하고 있어.
그대는 무슨 말을 하는데 나는 고개 숙이고 듣기만 하고 있는 상황이야.
그게 맘에 들지 않겠지?
그래 맘에 들지 않아 해! 이런 의미기도 하고, 자신의 맘에 안 든다, 이런 의미기도 하고. 

암튼 자신의 모든 게 맘에 안 든대.
황혼, 잡초, 페인트 빛, 고요함... 이 모든 것이 다.
<푸른 하늘을> 날으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종달새>처럼 투쟁하지 못하고,
<현실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맘에 안 들고 부끄럽대. 

벗이 외치는 말뿐인 <정의>, 활자 속에만 있는 <정의>도
섬세하게 세상 이치를 따지는 우리의 <논리>도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죽음>에 잠겨버린 젊은이들의 모든 토론도, 하소연도, 넋두리도...
모두 모두 맘에 들지 않는다. 

아마, 교외로 몇몇 친구가 야유회라도 갔는지 모른다.
서로 벗들끼리 문서를 읽고 토의를 하고 술이라도 마셨는지 모른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힘찬 투쟁의 희망은 없는 토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토론은 <죽음에서 나오는 행동>처럼 보이나보다. 

벗이거나, 문서이거나,
간간이 자유를 말하지만,
우습게도,
화자의 영혼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란다. 부끄럽게도...
부끄럽게 스스로 비웃는 것을 '자조적'이라고 하지. 

<말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고요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요함은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거지. 
<불의의 현실, 부정적 현실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자기 반성>
지식인에게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도록 일깨우는 작품으로 김수영의 시가 많이 읽혔던 것도,
이런 자기 반성을 담고 있기 때문일거야. 

이렇게 시대 속에서 자기 반성을 하는 지식인의 시는 참 많았단다.
일제 강점기,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이'란 시를 썼던 시인.
영랑 김윤식의 시에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시어들이 갈고 닦은 옥처럼 등장했었지?
그 영랑조차도 일제 강점기에 '독한 시'를 쓴 일이 있어.
그 독한 시 한번 볼까?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마저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아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김영랑, 독을 차고>

1연에서 <가슴에 독을 찬> 영랑이 등장해.
아직 아무도 해한 일이 없긴 하지만, 새로 뽑은 독은 엄청 독성이 셀 거야.
'벗'이 등장하는데, 벗은
'야, 너하고 독은 안 어울려, 그만 흩어 버려.'
이렇게 충고했대.
근데 영랑은 독한 한 마디 날려 줬어.
"야, 이 독이 너도 해칠지 몰라. 까불지 마. 장난 아냐." 이러고. 

보드레한 에메랄드 곱게 흐르는 /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내 마음의 어딘듯 한편에 /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 은결을 돋우네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런 게 김영랑 시지.
매끄럽고 조금 여성스럽고 부드럽고 순수한 그런 시 말이야.
이런 시인이 독을 품는다니,
어쩌면 더 무서워 보이기도 하는구나. 

영랑의 <독(毒)>은 부정한 현실에 대한 대결 의지, 저항의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벗>은 현실에 순응하는 인간이고 말이야. 

2연에서 다시 <벗>이 회유하고 있어. 

"야, 영랑. 임마.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죽고  나마저 죽어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 버릴 거고
나중에 땅덩이도 닳고 닳아서 모래알이 될 거잖아. 
얌마. 세상은 이렇게 허무한 거야!
근데 니까짓 쪼끄만 게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그냥 나랑 술이나 한 잔 하고 독한 맘 풀어라이~" 

이 친구는 진심으로 영랑을 위해주는 친구였는지도 몰라.
이 친구와 헤어진 영랑은 혼자 돌아와 일기에 3, 4연처럼 썼어.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하다!'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삶은 어차피 허무한 거야.
그런데 <이리 승냥이>가 나의 마음을 해치는 부정적인 존재가 있으니,
곧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의 고통을 겪고 있으니,
산 채로 일제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고
먹히게 될 존재임을 생각하면, 

나는 독을 품고 살아 가겠다.
내가 죽는 날,
나의 외로운 혼이
"그래, 나는 허무한 인생을 허무하게만은 살지 않았다."
이렇게 위로할 수 있도록...

이런 저항 정신이 드러난 시가 되겠지.
영랑의 시로는 드물게 직설적으로 저항정신이 드러난 시란다.
다른 시들의 화자가 비교적 여성스럽다면, 이 시의 화자는 남성스런 역할이지.
죽음을 각오하고 혁명의 대오에 들어서겠다던 김수영의 <피의 냄새>와도 통하지 않니? 

그렇게 부정적 현실에 저항하던 이들의 글에는 <비장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었단다. 

시를 읽는 일은 다른 삶을 통하여 나의 삶을 비춰보는 맛이 있는 것 같아.
아빠는 아빠 나름의 삶을 비춰 보고,
아빠와 읽는 시들이 나중에 민우의 삶에서도 비춰보는 기회가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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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이 2011-05-22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너무 좋아요! 어떻게 이렇게 짜임새 있게 시를 설명하시는지..ㅠㅠ 감동이에요!

글샘 2011-05-23 08:43   좋아요 0 | URL
짜임새 있게 읽었다니 고맙네요. ^^

명수명수 2013-05-2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가 대학생인데 수업 과제로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 이란 시를 조사해서 발표하는 과제를 하고 있었는데
시의 내용도 어렵고 잘 이해가 안되서 길을 해매고 있었는데 글샘님의 자세한 설명덕에 지금 너무 잘되가고 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
 

봄이 곧 올 것 같구나.
날이 포근하다.  

오늘은 군사 독재에 저항했던 시인 김수영.
'풀'로써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의 희망을 주었던 시인 김수영.
그의 시 중, 읽기 어려운 시가 있다면 단연 '공자의 생활난'이란 시다.
읽기 어려운 시는 상상력을 충분히 넣어 말랑말랑하게 무르도록 만들 필요가 있단다.
그렇지만 이 시에는 의미가 쉽사리 통하지 않는 한자어들이 제법 등장하여 좀 어렵기도 해.
우선 시를 한번 읽어 보렴.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作戰)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ㅡ 이태리어(語)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는 바로 보마.
사물(事物)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
사물의 우매(愚昧)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 공자의 생활난>

스물아홉 김수영 시인의 데뷔작이라고 알려진 이 시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금세 전달되지가 않아서, '난해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단다.
그렇지만, 김수영이 <거칠게 지었고 넘치게 표현했다, 조제남조 粗製濫造>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지만,
김수영은 무슨 이야긴가를 담고자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입에 씹기 단단해 보이는 것도 오래 머금고 있으면 물러지듯, 이 시를 골똘히 들여다보면 물러질 거야.  

이 시는 1945년에 발표된 시라고 하니, 일제 강점기의 고난을 염두에 두고 썼을 수도 있겠어. 

제목이 '공자의 생활난'이니 공자와도 관련이 있겠고 말이지.
'공자'는 누구나 아는 사람이잖아.
공자는 옳게 사는 길을 제시하려 노력한 정치철학자인데,
그에게 '생활난'을 '먹고 살기 어렵다'고 들이미는 것은 조금 우스워보인단다. 

4연에서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라고 했고, 마지막 연에서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란 표현을 했지.
이런 것들과 연관지어 본다면, 
논어에 실린 유명한 말 '조문도 석사가의 朝聞道 夕死可矣'란 구절이 떠오른다.
아침에 진리(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의미지. 

1~3연은 해석이 구구하고 복잡해.
사람들 누구도 이 구절을 확실하게 해석한 사람은 없단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렇지만 마지막 두 연은 의미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단다. 

3연까지의 이야기는 <세상의 사물을 바로 보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로 보면 될 거야.
유학에서 <격물치지 格物致知>란 참 중요한 말이거든.
<사물, 대상>을 연구하여 <앎>에 이른다는 말이야.
<앎>은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란 거지.
그 <앎>은 무언가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인생일 수도 있고,
자연의 변화일 수도 있고,
인간의 역사일 수도 있어.
그런 것들을 통해 깨닫게 되는 <관조>의 경지도 격물치지의 한 부분일 수 있겠다.

<이제 나는 바로 보겠다>는 화자의 강한 의지,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같은 말의 연속은,
공자가 세상 이치를 <격물치지>의 원리로 바로 보고자 하고,
바로 보는 도를 깨닫는다면 죽어도 좋다는 이야기를 즉각적으로 불러오려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뭘 바로 보냐면 말이지.
사물!
봐, 격물치지하고 관련되는 거야.
사물의 생리! 
사물이 어떤 원리가 그렇게 되었는지.
소설을 읽으면, 인간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 알게 되고,
역사를 읽으면, 인간들은 왜 그렇게 싸우는지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야.
종교, 철학서들을 읽으면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도 따지게 되는 것처럼...
삶과 사물의 원리를 따질 필요가 있다고 본 거지. 

사물의 수량과 한도!
수량의 많고 적음, 한도의 길고 짧음.
많은 것이 적은 것보다 낫기만 한 것도 아니고,
한도가 긴 것이 짧은 것보다 좋기만 한 것도 아님을... 바로 보고 싶대.
세상은 그런 원리로 이뤄진다는 것을 말이야.
일제 강점기에 돈이 많았던 넘들, 해방되고 벌벌 떨었잖아.
인간이 오래 살고 싶지만, 더러운 꼴을 보면서 오래 사는 건 더 힘든 일이잖아.
수량과 한도, 그것들은 많고 긴 것이 좋기만 하진 않음을 바로 보고자 한단 거지. 

사물의 우매함과 명석성!
인간이 명석하다고 난리를 치지만 말이야.
옛날처럼 낮은 집을 짓고 원시인처럼 살던 시절엔 지진이 나도 건물에 깔려 죽진 않았을지 몰라.
어제 강도 8이 넘는 엄청난 지진이 일본을 휩쓸었단다.
그런데,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어 방사능 유출도 있었다지 뭐냐.
원자력 같은 거, 인간의 <명석함>이 발견한 문명의 이기 利器지만,
지진나니깐 그 명석함때문에 피해를 입는 <우매함>의 결과를 낳게도 되는 거야.
핵폭탄이든, 교통사고든, 인간의 명석함이 우매함의 결과를 빚는 거지. 

공자님도 살기(생활) 어렵던 시대지만,
화자도 살기(생활) 어렵던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올바로 보기 힘든 시대였을 거야.
친일부역자가 잘 살고, 독립군 가족은 핍박받던 시대였지.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가 생각나는구나. 

캡틴 이인국, 캡틴을 러시어말로 꺼삐딴이라 부른대.
이인국은 일제 강점기 의사가 되어 해방된 뒤에도 소련치하에서도 미군 치하에서도 잘 사는
카멜레온 같은 인간이지.
과연 그처럼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간이 잘 적응하며 살아가는 이런 세상.
화자는 고민했을 거야.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하고 말이지. 

그러다 이런 시를 썼겠지.

   
  <나는 바로 보마>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ㅡ 공자처럼...   
   

이제 앞부분의 단단한 내용을 곱씹어 보자.
거기서 화자인 <나>와 청자인 <너>를 나눠볼 수 있어.
<나>는 세상 이치를 바로 보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랬잖아.
<너>는 세상 이치따위엔 관심도 없이, 그저 권세와 돈에 빌붙는 그런 존재,
꺼삐딴 리의 <이인국>같은 카멜레온으로 볼 수도 있겠다. 

제 1연.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이 구절은 모순을 표현한 것 같아.
꽃은 나무의 생식기관이잖아.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나무가 온 에너지를 꽃가루의 가루받이가 이뤄지도록 돕기 위해
곤충을 부르려고 아름다운 색과 빛깔, 향기까지를 퍼뜨리는 거란다.
그 꽃이 가루받이가 되면 꽃은 시들고,
곧 수분된 씨앗이 자라서 열매가 되는 거야.
꽃이 열매의 위에 피었을 때, 이런 시대는 <말도 안 되는 시대>란 표현이 아닐까?
일제 강점기처럼 모순의 시대 말이지.

그런 시대에 <너>는 장난만 치고 있대.
고민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깨달으려 공부하지 않고 장난만 치는 <너>. 
화자가 <부정적으로 느끼는 상대>란다.
친일파, 친러파, 친미파... 이런 놈들 내지는 스파이, 끄나풀... 

옛날에 이런 노래(참요)가 있었대. 

국놈 믿지 말고,
련놈에 지 말자.
본놈 어난다.
선 사람 심하자.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언어 유희지.
바로 살려고 고민하지 않고,
오늘 죽어도 올바로 살 길을 찾지 않고,
격물 치지의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장난 삼아> 사는 자들을 상대로 쓴 글이겠지. 

2연에서 <나>는 진실을 구하려 노력하고 있어.
그렇지만, 그것은 또 구하기 어려운 거야. 

3연에서 <나>는 <반란성>을 가진 존재일까? 의문부호를 붙이고 있단다. 

장난처럼 세상은 오로지 <무력>으로 <권력>으로 밀어붙이는 부조리한 자들이 득세하고,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국가가 우리에게 해 준게 뭐가 있냐!
이렇게 <술 푸게 하는 세상>이었을 거잖아. 일제 강점기.
그렇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세상에서도 평화롭고 즐겁게 살고 있었어.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이 쓴 수필의 일부분을 읽어 보면,
도무지 <술 푸게 하는 일제 강점기>에 쓴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구절도 있단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낱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그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 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전등도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 보곤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이효석, 낙엽을 태우면서, 부분>

1907년~1942년, 이 극심한 일제 강점기에 이런 수필을 적은 사람도 있음을 신기해할 필요도 없다.
삶은 늘 그런 모순의 양면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황순원의 불후의 명작 <소나기>는 한국 전쟁이 치열하던 1951년에 창작된 작품이기도 하고. 

국수ㅡ 이 한국적인 발음을 이태리어로 마카로니로 바꿔가며 이국 음식을 먹기도 하는 이도 그 당시엔 있었겠다.
1930년대 이후 서양풍의 모더니즘이 들어오면서 서양식 의복, 서양식 음식 들을
쉽사리 익숙하게 먹게도 되었으리라. 

화자도 마카로니라는 이국 음식을 <먹기 쉬운> 계층이었을 수도 있다.
원래 지식인 계층 옆에서는 <진리의 가시 면류관>와 <부정하고 기름진 돈>이
<옳음을 따라야 하는 마음>과 <권력의 달콤함>이
<감옥>과 <권좌>의 갈림길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으니 말이야.  

김수영이 어떤 것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여겼고,
어떤 것들을 <바로 보아야 할 것>으로 여겼는지 이 시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아. 

하지만, 화자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하였>다고 했어.
그것은 무슨 <
작전(作戰)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고도 했고.
발산한 형상이란 말은 조금 어색한 한국어라 볼 수 있는데,
어쨌든 자유롭게 확산되는 삶을 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작전 펼치듯 힘들게 해야 하는 것이라면 발산하기도 쉽지 않지. 

김수영이 나중에 <폭포>를 쓰거든.
<폭포>는 <곧은 소리>잖아.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이런 정신이 <발산의 정신>이라 볼 수도 있겠지. 

이 시에서 <너>는 올바로 사는 것보다는 장난을 즐기고 마카로니를 즐기는 이로 보인다.
반면 <나>는 그런 현실에, 너와 함께 마카로니를 먹기 쉬운 상황에서
바로 보려는 노력을 하는 이같이 느껴지거든. 

화자는 <반란성>을 느끼고 있어.
뭔가 자기 본성에 반대되는 짓을 하고 있는 존재처럼 스스로 느껴졌나봐.
편하게 살고, 부유하게 살고, 우아하게 살고, 번지르르하게 사는 사람들.
일제 강점기에도 그런 사람들이 부럽게 마련이지.
친일파니 뭐니를 떠나서,
배고프고 가난하고 병들고 누추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게 마련이란다. 

그러나, 그런 동물적 본성을 벗어나, <반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아빠는 본다.
그래서 <이제 나는 바로 보겠다>는 발언을 하는 거로 말이야. 

부르기 쉽고 먹기 쉬운 국수를 이태리어로 마카로니라고 보는 전도된(뒤집힌)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하여 <다르게 보고, 뒤집어 보기>의 다른 말. 반란. 

김수영이 이 시를 쓴 바탕에는 <삶의 가난>이 깔려있는 것 같아.
그리고 공자의 <죽어도 좋으니 도를 듣고 싶다>는 치열한 정신을 떠올리면서,
자기는 공자처럼 훌륭하지 못한 사람임을 부끄러워했을 것 같기도 하구나.
가난하면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기 쉽거든.
비루하고 추한 일, 더럽고 비겁한 일도 하게 되기 쉽거든.
그래서 화자는 마지막에서 먹고 사는 데 얽매이진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를 쓴 것 같구나.


또 이야기를 하나 지어 볼까? 

김수영은 가난한 시인이었다.
늘 배고프고 수중엔 십 전짜리 한 푼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가장이었어.
집에는 까슬하게 여윈 아내와,
난 지 두어 달 남짓 되었지만 아직도 발육 상태가 나쁜,
정말 고것이, 그 핏덩이가 백일까지 살 지 걱정되는 아기가 기다리겠지. 

김수영은 골방에서 곰방대에 넣을 담배마저 떨어진 참에 거리로 나섰어.
길거리엔 온통 가난한 냄새 뿐이었단다.
때는 양력 5월, 곧 보리가 누르익으면 춘궁기는 넘기련만,
어느 집 하나 불 때서 죽이라도 넉넉히 끓이는 집이 없었지. 

길을 나선 김수영이 읍내로 들어선 것은 점심 나절이었어.
읍내 국민학교 앞 복덕방 모퉁이에서 동네 영감들이 힘없이 장기를 두고 있어
하릴없이 그 구경이나 하고 있었나봐. 

뒤에서 옆구리를 쿡 찌르는 기척에 돌아보니
머리엔 구찌 기름을 반지르 하게 바른 춘삼이가 웃고 있었어.
춘삼이는 면사무소에서 서기를 하고 있는 녀석이야.
어려서부터 공부엔 소질이 영 없어서 교실에서 구박받던 녀석인데,
어찌 줄을 섰는지 면서기가 돼서 제법 네꾸따이도 매고 다니니 세상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나봐. 

춘삼이가 점심을 사겠다며 김수영을 데리고 갔어.
김수영은 배고픈 김에 국밥이나 한 그릇 얻어 걸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춘삼이는 읍내 제법 번지르르한 식당이자 술집인 명옥헌으로 들어섰대.
실내는 제법 널찍하게 차려졌는데,
종업원보고 하는 소리가 <마카로니>를 두 그릇 달래는 거야. 

"야, 마카로니가 뭐냐?" 묻는 김수영과,
"어, 그거 서양 국수야, 양국수, ㅋㅋ , 어이, 여기 막걸리 한 주전자 줘 봐~"
막 대놓고 반말 지꺼리인 춘삼이. 

잠시 후 막걸리 한 사발 기울이고 있는데,
종업원이 내온 것은 칼국수 치고는 너무 두툼하고,
그렇다고 가래떡보다는 얇은 양국수가 불그데데한 양념에 비벼져 있었겠지.
"야, 이거 한 번 먹어봐. 양국수라는데 맛이 그냥저냥 먹을만 해."
김수영은 영 그 양념 색이 못마땅해서 막걸리만 내쳐 두 잔을 마셨어.
속이 좀 든든해 졌지만, 그래도 음식을 남길 수는 없어서 그 양국수란 걸 집어 먹어봤대.
근데, 양국수가 굵어 보이지만, 속이 비어있으면서 씹히는 맛도 쫄깃거리고
입에도 착착 달라붙는 것이 희한한 거였어. 

"야, 춘삼아, 이게 이름이 마... 마차... 뭐랬냐?"
"아, 그거 마카로니에요. 마,카,로,니..."
보리차 나르던 사환 애 녀석이 아는 체를 한다.
"야, 수영아, 근데 일본 사람들 세상이 끝내 준단다. ㅎㅎ
내가 일본 세상 아니었음 어떻게 면서기를 다 하겠니.
또 면서기 아니었음 어떻게 마카로니도 다 먹어봤을 거구. 허허허" 

계산을 치르는 춘삼이를 무추름하게 보고 있던 수영은 그 값이 비싼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어찌어찌 춘삼이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엔 수영의 주머니에 춘삼이 사서 찔러준 '럭키' 담배가 한 갑 들어있었다.
럭키 담배, 돌돌 잘 말린 궐련 한 개비를 피워물고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수영.
왠지 사는 게 거꾸로인 거 같았다. 

일본 세상이 더 좋은 사람, 춘삼이.
물구나무 선 세상인가?
물구나무 선 춘삼이는 물구나무 선 세상이 더 자유로운지도 모르겠다.
꽃이 핀 석류 나무를 보면서,
이거 원, 세상이 <열매 윗부분에 꽃이 핀> 것처럼 부조리한 거나 아닌가 생각한다.
물구나무 선 세상에서 즐겁게 <줄넘기 장난>을 하는 춘삼이가 정상인 건가? 

수영은 자신이 '자유로운 영혼을 드러낸 시'를 쓰고자 했지만,
그러기에 세상은 전쟁터처럼 혼란스러워,
무슨 '작전이라도 펼쳐야 할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국수 ㅡ 이태리어(語)로는 마카로니라고
그런 낯선 것도 잘도 넘어가던 자신을 생각한다.
나의 안에 담겨있는 <반란성>은 어디로 간 걸까? 

공자를 떠올린다.
조문도 석사가의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을 정도로 진리를 찾던 사람.
오늘 아침에만 해도 공자처럼 <죽어도 옳은 길을 사랑하는 인생>을 살겠다고 생각했거늘,
배고픔과 <생활난> 앞에서 그 마음은 언제 사라졌던 것일까. 

끝까지 타버린 럭키 담배 꽁초를 버리면서, 수영은 생각한다.
세상을 바로 볼 수 있을까?
배고픔을 뛰어넘는 진리를 위하여 명석하게 살 수 있을까?
그래, 마카로니의 달착지근한 부드러움에 금세 비굴해진 내 혀를 부끄러워하자.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살자.
배고픔에 져버리면 나는 더이상 공자의 후예가 아니다.  

춘삼이가 주머니에 억지로 넣어준 십 전짜리 지쩐으로
보리쌀과 옥수수를 두어 되 사서 아내에게 안기고 수영은 골방으로 들어가 부리나케 펜을 들었다.
럭키에 불을 붙일 여유도 없이,
불붙지 않은 담배만 한 개비 물고 시를 쓴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事物)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
사물의 우매(愚昧)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누운 수영은
스스로가 몹시 부끄럽다.
모순된 세상만큼 모순된 자신의 모습이...
깜깜한 방이 점점 작아지고,
자신의 육신도 점점 작아지고...
깜깜한 방의 담뱃불만 바알갛게 반짝거리고...

난해시로 유명한 시를 이야기하다 보니 너무 길어졌나보다.
그렇지만, 딱딱한 무기질같은 시도 이렇게 말랑말랑하게 읽어내는 일은
문학이 우리 삶에 주는 것이 무엇진지
생각해 보게도 해 준단다. 

삶에서 수학처럼 공식이 달린 일만 일어나진 않거든.
배배꼬인 일이 우리 인생에 달려들 때는,
딱딱한 시를 입에 물고 한참 불리는 때를 기억해 보려무나. 

아까 국수 이야기가 나왔으니, 다음 시를 한번 보렴.
'여승'의 시인 '백 석'의 시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은 무엇일까?'
스무고개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재미있는 시야.
토속적인 삶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참 아름다운 그런 시.
한번 읽어 봐.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룻밤 뽀오얀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연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던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느 하룻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옛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버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순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것은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국수>

♣ 김치가재미:북쪽 지역에서 겨울철에 김치를 넣어 두는 움막, 헛간
♣ 양지귀 : 햇살 바른 가장자리
♣ 은댕기 : 가장자리
♣ 예대가리밭 :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 산멍에 : 이무기의 평안도 말
♣ 큰마니 : 할머니의 평안도 말
♣ 집등색이 : 짚등석, 짚이나 칡덩굴로 만든 자리
♣ 자채기 : 재채기
♣ 희수무레하고 : 희끄무레하고
♣ 삿방 : 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을 깐 방
♣ 아르궅 : 아랫목
♣ 고담(枯淡):(글, 그림, 인품 따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아취가 있음

평안도 사투리가 구수한 이 시에서 하나의 답을 요구하며 밀어붙이는 이것은?
바로 제목인 <국수>란다.
구수한 국수의 내음새를 통하여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지.
백석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잃어버리고 있는 <민족 공동체의 삶>을 시로나마 남기려고 노력한 시인이야.
이 시에선 그저 <국수>를 떠올리는 게 아니라,
국수를 삶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구수함,
그 공간과 시간 속의 모든 것들을 눈감고 상상하는 화자의 마음을 잘 쓰고 있는 것 같아. 

백석의 이 시에서 음식물은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특수한 시적 기능,  
즉 민족과 민족성 그 자체를 의미해.
음식이란 민족마다 문화의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면서 그 음식물을 먹는 사람들의 체질이나 성격을 결정짓기도 하고,
백석이 전 국토를 유랑하면서 음식물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바로 이런 데 있어.
국수를 먹으면서 어린 시절 국수와 얽힌 추억들을 통해 우리의 본래적인 삶을 상기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바로 우리의 민족성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시로 볼 수 있지. 

어쩌면 백석이 이렇게 국수 한 그릇을 마시다가
굵은 눈물이라도 한 방울 주륵, 흘렸을지 모르겠다.
백석에게 춘삼이같은 친구가 다가와서 마카로니를 먹였다가는
절교를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야. 

요즘 일본에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몰려와서 난리도 아니더구나.
아빤 평소에 일본 놈들을 지긋지긋하게 저주하는 사람이야.
일본 때문에 아무 죄도 없던 한국이 반토막으로 잘렸고,
그래서 지금도 쓸데없는 국방비에 수십 조를 퍼부어야 하고,
미국놈 앞잡이처럼 살아야 하는 거니깐 말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역사가 미운 거지,
일본인들이 수천 명이 죽고, 고통을 당하고 아이들이 우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더라.
무엇이든 김수영의 <공자의 생활난>처럼 <바로 보기>는 어려운 모양이야.
마음 속에 콩깍지가 되어 가려졌던 일본에 대한 증오심은 일본에 대한 진심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암튼 우리 사는 땅은 지진이 거의 없어서 다행은 다행이다.
주말 잘 보내고, 새로운 한 주를 준비하자.
밤이 늦었다.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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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3-13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무지 해독이 안 되던 <공자의 생활난>이 이 글을 읽으니 말씀처럼 조금 말랑해 지는 느낌이에요. 고맙습니다.

글샘 2011-03-14 08:38   좋아요 0 | URL
조금 말랑해 졌나요? ㅎㅎ
스스로도 거칠고 넘친다고 한 시니깐...
한때 해석이 안 되는 시가 미덕이던 때도 있었겠죠. ㅎㅎㅎ

양철나무꾼 2011-03-16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보다는 해몽이라고, 시도 좋지만 해석이 넘 좋아요.^^
근데 궁금한게요, 요즘 고딩들은 문과 이과 상관없이 저렇게 두루두루 섭렵해야 하나요?
이 '글샘의 문학수업'을 읽다보면, 수업을 듣다보면...저 고딩 때는 모르던 것들이 태반이어서 말이죠~

글샘 2011-03-16 08:55   좋아요 0 | URL
요즘엔 언어영역에 별 것이 다 나오니
많이 들어두면 도움이 되죠. ^^
사실은 저도 모르던 것들입니다. ㅎㅎ

몽유 2012-01-07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대박대박대박!!
예비고3인데요 이 시를 발견해서 으아아얼강겨미;나름댜ㅣ;검ㅇ,ㅡ러 으엉강ㄱ거ㅏㄱ어걱ㅇㄱ 이건무어야!!!!;ㅣㅏ더ㅑㅐ;ㅁㅇ 이러고있었는데 오호,,? 오옷!! 우와아아아!!!! 감동해서 댓글올리려 했는데 아이디 없어서 알라딘 회원가입했어요ㅎㅎ 도움많이많이 됬어요ㅎ,, 저 나름 말랑하다고 생각했었는데ㅠ 아 쨉도안되ㅠ,, 여튼! 감사합니다~~^-^//

글샘 2012-01-12 11:24   좋아요 0 | URL
이 시는 난해시예요. 난해한 시...
난해하니깐, 제대로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겠죠. ㅎㅎ
제 나름대로 풀어본 거니깐,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네요...
 

지난 시간에 이어 정철의 속미인곡을 읽어 보자.
이 시도 마찬가지의 ‘충신연군(주)지사’에 속하는 노래야.

사미인곡과 마찬가지로 천상의 선녀가 땅에 내려오게 된 형식을 띠고 있지.
유배로 땅에 내려온 선녀는 ‘謫降, 귀양갈 적, 내릴 강’이라고 한단다.
적강 설화가 들어간 가사라고 볼 수 있지.
가사는 읽기 좋은 4,4조의 노래로 길어진 시조라고 보면 된단다.

시조는 왜 노래라고 했잖아.
시조창(時調唱).
그래서 순간의 감정을 담아내는(서정) 즉흥 노래로는 어울리지만,
가슴에 담아둔 긴 이야기를 담기엔 조금 부족했나봐.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긴 이야기(서사)를 담아낼 ‘가사’도 필요했겠지.

이 노래는 두 선녀의 ‘대화’로 이뤄진단다.
‘꽃보다 남자’에 비유하자면,
구준표하고 싸워서 이별한 상태에 있는 금잔디가
친구랑 우연히 만나서 수다를 떨면서 하소연하는 형식이야.
그걸 구준표는 우연히 듣게 된 것 같은 이야기

맨 앞부분은 친구가 금잔디를 발견해서 말거는 부분이란다.
잘 읽어봐~ 

가) 뎨 가는 뎌 각시 본 듯도 한뎌이고.
天텬上샹 白백玉옥京경을 엇디하야 離니別별하고,
해 다 져믄 날의 눌을 보라 가시는고.

������ 저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한 것 같네.
������ 천상 백옥경(옥황상제가 산다는 곳)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 해 다 저문 날에 누를 보러 가시는고?

   금잔디 친구가 잔디를 발견했어.
“어, 너... 너... 잔디 아니니?
너 맨날 준표랑 놀더니, 준표는 어쩌고
이 어두운 데 누구 만나러 가는 거야?” 이런 거지.


그지? 쉽지?
아빠의 강의는 세상에서 제일 쉬운 문학 강의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맘편하게 읽어 보기 바래.



나) 어와 네여이고, 내 사셜 드러 보오.

������ 아이고 너구나, 내 이야기 들어 보시오.

   안 그래도 누가 손으로 콕 찌르기만 해도 눈물이 주르륵 흐를 심정인 잔디는
아이고, 너구나~ 이러면서 말문이 열리기 시작해.
‘내 이야기’의 내용은 뻔하지? ㅋ

뭐, 잔디의 준표 사랑 아니겠어?

한문으로 쓰면 충신이 연군하는 노래. 충신연주지사. 

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즉 한가마난 
엇딘디 날 보시고 네로다 녀기실새, 
나도 님을 미더 군뜨디 전혀 업서,
이래야 교태야 어자러이 구돗던디,
반기시난 낫비치 녜와 엇디 다라신고.


������ 내 얼굴과 내 행동이 임의 사랑을 받음직 한가마는
������ 어쩐지 날 보시고 너로다 여겨 사랑하시기에
������ 나도 임을 믿어 다른 뜻이 전혀 없이
������ 아양이며 교태며 어지러이 굴었던지
������ 반가워하는 얼굴빛이 이전과 어찌 다르신지.

  “내가 첨에 준표랑 사귈 때 말야~
내 처지가 준표랑은 너무 안 어울리잖아. 그거 너도 알잖아.
근데 내 얼굴이나 행동도 남자들이 좋아할 것도 아닌데,
어쩐지 준표는 날 보고 ‘내가 찾던 여자가 너 같은 애야!’하고 인정해 줬거든.
그래서 나도 준표가 넘넘 좋아져서 다른 생각은 전혀 없이
알랑거리고 까불고 너무 어지럽게 굴었는지
어느 날 준표가 날 반기는 얼굴빛이 전과 완전 달라졌더라고. ㅠ&ㅜ" 

누어 생각하고 니러 안자 혜여 하니,
하날히라 원망하며 사람이라 허믈하랴.
내 몸의 지은 죄 뫼가티 싸혀시니
셜워 플텨 혜니 造조物믈의 타시로다.


������ 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리니,
������ 내 몸에 지은 죄 산같이 쌓였으니
������ 하늘을 원망할까 남들을 죄지었다 할까.
������ 서러워 풀어 헤아리니 조물주(운명)의 탓이구나.

   금잔디의 하소연은 계속 이어져.
“누워도 준표 생각, 일어나 앉아 헤어라도 그 생각 뿐이야.
하늘을 원망하지도 다른 사람을 탓하지도 않아.
내가 지은 잘못이 산처럼 쌓였으니
서러워 풀어 생각해 본들 다 내 운명을 이렇게 정해 놓은 조물주 탓이라고나 할까.
난 이제 완죤 포기했어. ㅠ.ㅠ” 

다) 글란 생각 마오.

������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말아요.

   금잔디, 완전 불쌍하잖아.
차도남, 까도남 구준표한테 상처받고 넘 슬퍼하니깐,
의리 빼면 시체인 친구가 위로를 한단다.
“잔디야, 너무 그렇게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 응?” 


라) 매친 일이 이셔이다.

님을 뫼셔 이셔 님의 일을 내 알거니,
믈 가탄 얼굴이 편하실 적 몃 날일고.

������ 맺힌 일이 있습니다.
������ 임을 모시고 있어 임의 일을 내가 아는데,
������ 물 같은(연약한) 얼굴이 편하실 적 몇 날일까.

   그치만 잔디는 계속 맘속 깊은 이야기를 다 털어 놔.
친구는 들을 수밖에 없지.
“있잖아. 난 준표 하나도 원망 안해.
다만 내 맘에 맺힌 게 하나 있어.
준표를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너도 알잖아.
준표랑 오래 사귀지 않았어도 난 준푤 잘 아는데,
아~, 그 연약한 얼굴이 편한 날이나 있을지…, 걱정이야.
준표 엄마랑, 준표네 집, 장난 아니거든.”  

春춘寒한 苦고熱열은 엇디하야 디내시며,
秋츄日일 冬동天텬은 뉘라셔 뫼셧는고.
粥쥭早조飯반 朝죠夕셕 뫼 녜와 갓티 셰시는가.
기나긴 밤의 잠은 엇디 자시는고.

������ 봄의 추위, 여름의 더위는 어찌하여 지내시며,
������ 가을 해 겨울 날을 누가 모셨을까.
������ 죽과 아침 저녁 식사는 옛날 같이 드시는가.
������ 기나긴 밤에 잠은 어찌 주무실고.

   여기 ‘춘하추동’의 리듬에서 여름은 일부러 ‘괴로울 고, 뜨거울 열’을 썼단다.
이렇게 리듬을 슬쩍 비트는 것이 한국적 멋의 특징이야.
“꽃샘추위는 잘 버티는지, 더위도 잘 타는데 어찌 지내는지,
가을날 겨울날은 누가 챙겨 주는지.
아침 저녁은 내가 챙겨주는 것처럼 잘 먹고 다니는지,
긴긴 밤에 잠은 제대로 자는지…
난 준표 걱정 하나로 요즘 잠도 못자.”
이렇게 선녀는 자기는 맺힌 게 하나 있는데,
그게 임 걱정 뿐이라는구나. 

   님다히 消쇼息식을 아므려나 아쟈 하니,
늘도 거의로다. 내일이나 사람 올가.
내 마음 둘 대 업다. 어드러로 가쟛 말고.

������ 님 쪽의 소식을 어떻게든 알자 하니,
������ 오늘도 거의 지났다. 내일은 사람이 올까?
������ 내 마음 둘 데 없다. 어디로 가잔 말인가.

“그래서 준표 쪽 소식을 어떻게든 알아보려고도 했는데,
오늘은 거의 지났으니, 내일이나 연락이 올까?
아, 난 요즘 마음 둘 데가 없어. 어디로 돌아다녀 볼까?
명동을 쏘다니면 마음이 좀 풀릴까? 혹시 준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멀리서나마 준표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을까?

   잡거니 밀거니 놉픈 뫼해 올라가니,
구롬은카니와 안개는 므사일고.
山산川쳔이 어둡거니 日일月월을 엇디 보며,
咫지尺쳑을 모르거든 千쳔里리를 바라보랴.

������ (나뭇가지를) 잡고 (바윗돌을) 밀고 높은 산에 올라가니,
������ 구름은 커녕 안개는 무슨 일인가.
������ 산천이 어두우니 해와달을 어찌 보며,
������ 가까운 곳도 모르겠으니 천리 밖을 어찌 바라보랴.

 “높은 산에라도 올라가 준표네 집을 볼까 해서 말이야.
비탈길을 나뭇가질 잡고 바윗돌을 밀어 가면서 올라가 보기도 했는데,
어제는 구름은 물론 안개까지 무슨 일로 잔뜩 껴서 준표네 쪽 보이지도 않지 뭐야.
세상이 이렇게 어두우니 준표를, 준표네 집을 볼 수 있겠어?
가까운 코앞도 안 보이니 저 먼 준표네를 어쩌면 볼 수 있을까?" 

   찰하리 물가의 가 배길히나 보쟈 하니,
람이야 믈결리야 어둥졍 된뎌이고.
샤공은 어대 가고 븬 배만 걸렷나니.
江강川텬의 혼쟈 셔셔 디는 해를 구버보니,
님 다히 消쇼息식이 더옥 아득한뎌이고.

������ 차라리 강가에 가 뱃길이나 보고자 하니,
������ 바람이야 물결이야 엉망이 되었구나.
������ 뱃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걸렸는가.
������ 강가에 혼자 서서 지는 해를 굽어 보니,
������ 님 쪽의 소식이 더욱 아득하구나.

“산에선 안 보여서, 차라리 한강에 나가서 배나 탈 수 있을까 나갔더니,
바람도 불고 물결도 높아서 엉망진창이 되었더라고.
뱃사공은 어디 가고 없고 빈 배만 흔들거리고 있었어.
그래 강가에 혼자 서서 지는 해를 보고 있자니,
준표 생각, 준표 소식이 간절한데 우리 사이는 더 아득해지기만 했어.”

   茅모詹쳠 찬 자리의 밤듕만 도라오니,
半반壁벽靑쳥燈등은 눌 위하야 발갓는고.
오르며 나리며 헤뜨며 바니니,
져근덧 力역盡진하야 픗잠을 잠간 드니
精졍誠셩이 지극하야 꿈의 님을 보니,
玉옥 가튼 얼굴이 半반이나마 늘거셰라.

������ 초가집 차가운 자리에 밤이 돌아오니,
������ 벽 가운데 푸른 등(청사초롱)은 누굴 위해 밝혔는가.
������ 오르며 내리며 헤매며 방황하니,
������ 잠깐 사이 힘이 다하여 풋잠을 잠시 드니,
������ 정성이 지극하여 꿈에 임을 보았는데,
������ 옥 같은 얼굴이 반이 넘게 늙으셨구나.

“아~ 맨날 준표랑 비싼 거 먹으러 다니고, 좋은 옷 사주고 그랬는데,
준표 침대는 정말 푹신하고 이불도 부드러웠는데,
혼자서 옥탑방 차가운 자리에 누웠으니 죽을 맛이더라.
벽에 걸어둔 스탠드는 신혼방에 어울리는 건데
준표랑 있을 땐 정말 분위기 아늑하던 건데, 혼자 있자니 하나도 안 멋있더라.
하루종일 산에 오르락내리락 헤매고 다니다가 방황하니
잠시잠깐 힘이 빠져서 풋잠이 들었나봐.
내가 하도 준표를 그리워해선지 꿈에 준표를 봤던 거 같은데,
그 해맑던 얼굴이 글쎄 며칠 새 반도 더 늙은 거 같아 보이더라.”  

   마암의 머근 말삼 슬카장 삷쟈 하니,
눈믈이 바라 나니 말인들 어이하며,
情졍을 못다하야 목이조차 몌여하니
오뎐된 鷄계聲셩의 잠은 엇디 깨돗던고.

������ 마음에 먹은 말을 실컷 사뢰자 하니,
������ 눈물이 연달아 나니 말을 어이 하며,
������ 사정을 다 말하지 못하여 목까지 메어오니
������ 방정맞은 닭소리에 잠은 어찌 깨었던지. 

   “꿈에서나마 준표한테 맘 속에 먹은 말 실컷 말하려 입을 여는데, 
눈물이 줄줄 연달아 나서 말이 나오질 않더라.
내 맘 속 이야기랑 있었던 일의 사정이랑 말을 하지도 못했는데,
꿈속에서도 목이 막 메이고 그러면서 계속 눈물이 나는데,
어디서 방정맞은 닭소리가 울려서 잠을 깨우고 말았어.”

바) 어와, 虛허事사로다. 이 님이 어대 간고.
결의 니러 안자, 窓창을 열고 바라보니
어엿븐 그림재 날 조츨 뿐이로다.
찰하리 싀여디여 落낙月월이나 되야이셔
님 겨신 窓창 안해 번드시 비최리라.

������ 아아, 헛된 일이다. 이 임이 어딜 갔나.
������ 꿈결에 일어나 앉아, 창을 열고 바라보니
������ 가엾은 그림자 날 좇을 뿐이구나.
������ 차라리 스러져서 지는 달이 되어서,
������ 임 계신 창 안에 번듯하게 비추고 싶어.

   “아아~ 준표 얼굴 한번이라도 보고, 준표 소식 한번이라도 들으려고,
산에 오르고 강에 나가고 꿈까지 꿨건만, 다 허사더라. 준표는 어디도 없었어.
꿈결에 일어나 앉아 멍한 정신으로 창밖을 열고 내다봤는데,
준표 없는 자리를 돌아보니까는 거기 가엾게도,
불쌍한 그림자만 외로이 내 곁에 있더라고. 
그냥, 차라리 내가 죽어서 지는 달이 되고 싶어.
그래서 준표 창문으로 찾아가서 준표를 환하게 비추면서 준표랑 함께하면 얼마나 좋을까….“

사) 각시님 달이야카니와 구즌 비나 되쇼셔.

������ 각시님 달은 커녕 궂은 비나 되십시오.

 주인공 금잔디는 임을 위해서 달이 되겠다고 했어.
근데 금잔디의 친구는 바보같은 금잔디를 보고 화를 낸단다. 
"야, 이년아! 니가 지금 그넘을 위해서 기도하게 생겼냐? 달은 커녕 궂은 비나 되지~.”
이렇게 말하는 거야. 

금잔디는 임을 위해
거리가 있더라도 환하게 임을 밝혀주는 달이 되고 싶다고 했어.
그런데 환하게 비치는 달빛은 잔디의 슬픔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
그러니 친구는 ‘궂은 비’나 되라고 이야기한 거야.
궂은 비는 일단 임의 옷을 적시더라도 임에게 가까이 갈 수 있잖아.
그리고 화자의 슬픔이나 눈물과도 관계가 있어 보이고 말이야.

잔디의 사랑을 가장 절실하게 표현하는 방법으로 작가는
이런 대화체를 개발했다고 봐야겠지.

지난 시간에 배운 사미인곡은
부유한 화자가 스토커처럼 임을 따라다니겠다는 노래였다면,
오늘 배운 속미인곡은
기둥 뒤에서 지나가던 구준표가
우연히 금잔디가 친구와 나누는 대화를 듣는 것처럼 처리했단다.

곧, 사미인곡은 화자의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는 ‘독백체’를 썼고,
속미인곡은 화자의 대화를 통해 진심이 전달되는 ‘대화체’를 쓴 거지.

연속극이라면, 뭐, 어떤 드라마가 더 인기있을지, 추측이 되지?
게다가 사미인곡에선 부유한 여성의 언어로,
어려운 한자어나 중국의 고사성어, 한시 등이 많이 인용된 반면,
속미인곡에선 순수한 우리말이 소박한 여성의 언어로 표현되고 있어서,
훨씬 솔직한 이야기로 들린다는 특징이 있단다.

정철이 사미인곡(전미인곡)을 쓰고,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속미인곡(후미인곡)을 썼대.
자기가 봐도 스토킹은 좀 아니었다 생각된 모양이지.

가사는 시조(서정시)를 한정없이 늘인 형식이라고 했잖아.
4.4조의 노래고 말이야. 4음보가 되겠지. 시조도 그러니깐.
근데, 시조에서 출발한 형식이라서,
긴 가사의 마지막 부분은 거의 시조랑 같단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으니 돌인들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정철, 훈민가)

이 노래는 늙은이를 공경하자는 성리학적 윤리를 나타낸 시야.
윗사람 말은 무조건 잘 들어야 되지.
그래야 ‘왕조국가’인 조선이 안 흔들리지.

이 시조의 마지막 행(종장)은 글자 수가 <3,5,4,3>이잖아.
가사 몇 편의 마지막 행을 보자꾸나.

아모타/ 백년 행락이/ 이만한들/ 어찌하리. (정극인, 상춘곡)

명월이/ 천산만락에/ 아니 비쵠/ 대 없다. (정철, 관동별곡)

님이야/ 날일줄 모르셔도/ 내 님 좇으려/ 하노라. (정철, 사미인곡)

각시님/ 달이야 카니와/ 구즌 비나/ 되소서. (정철, 속미인곡)

아마도/ 이 님의 지위로/ 살동말동/ 하여라. (허난설헌, 규원가)

이렇게 가사의 마지막 구절을 ‘낙구, 떨어질 락 落, 글귀 구 句’라고 하는데,
낙구는 상당히 시조의 종장을 닮았어.
이렇게 시조의 종장을 닮은 낙구를 가진 가사를 <정격 가사>라고도 부른단다.
뭔가 맞추려 노력한 거겠지.
이 경우에도 낙구의 첫 글자 석 자는 고정불변의 세 글자란다.

자, 속미인곡의 대화 주체를 늘어 놓으면 이렇게 된단다.


갑녀(보조 화자) : 선녀님 아니세요? 어디가세요?

을녀(주 화자) : 나 임이랑 헤어졌어. 다 내 잘못이야.

갑녀 : 그리 생각 마세요.

을녀 : 임 걱정돼 죽겠어. 산에도 가보고, 강에도 가보고, 꿈에도 봤지만.

       난 임을 비추는 달이 되고 싶어

갑녀 : 님 쫌 짱나는 듯, 달은 무슨 달, 궂은 비나 되시지.

어때, 아빠의 설명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문학 수업 같지 않니?
고전도 어렵거나 멀기만 한 건 아니란다.
세상에서 중요한 일은 누구에게나 빈번하게 반복되어 일어나기 때문이야.
그 일이 희극으로 결말지어지기도 하고 비극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힘들 땐,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좋을 거 같아.
“아,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나에겐 비극으로 일어난 거구나.”
그렇지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도 너무 자만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겠지. 이렇게.
“아,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나에겐 희극으로 일어난 거네.”
인생 만사 새옹지마라고 했어.
나쁜 일도 전화위복이 되고, 좋은 일에도 호사다마인 법이지.

자, 허각의 <하늘을 달리다>란 노래 가사를 보면
어떤 순정이 나오는지 가사를 한번 음미해 보며 오늘의 ‘가장 쉬운 고전 수업’을 마치자.

두근거렸지 누군가 나의 뒤를 쫓고 있었고
검은 절벽 끝 더 이상 발 디딜 곳 하나 없었지
자꾸 목이 메어 간절히 네 이름을 되뇌었을 때
귓가에 울리는 그대의
뜨거운 목소리 그게 나의 구원이었어  

마른 하늘을 달려
나 그대에게 안길 수만 있으면
내 몸 부서진대도 좋아
설혹 너무 태양 가까이 날아
두 다리 모두 녹아 내린다고 해도
내맘 그대 마음속으로
영원토록 달려갈거야


내가 미웠지 난 결국 이것밖에 안 돼 보였고
오랜 꿈들이 공허한 어린 날의 착각 같았지
울먹임을 참고 남몰래 네 이름을 속삭였을 때
귓가에 울리는 그대의
뜨거운 목소리 그게 나의 희망이었어


마른 하늘을 달려
나 그대에게 안길 수만 있으면
내 몸 부서진대도 좋아
설혹 너무 태양 가까이 날아
두 다리 모두 녹아 내린다고 해도
내맘 그대 마음속으로
영원토록 달려갈거야


허약한 내 영혼에 힘을
날개를 달수 있다면

마른 하늘을 달려
나 그대에게 안길 수만 있으면
내 몸 부서진대도 좋아
설혹 너무 태양 가까이 날아
두 다리 모두 녹아 내린다고 해도
내맘 그대 마음속으로
영원토록 달려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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