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여행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 한 손엔 차표를, 한 손엔 시집을
윤용인 지음 / 에르디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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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참 많소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여행기를 쇼핑하는 사람들은 더 많소

(이렇게 죽어갑니다)(om의 녹턴)

 

김선우 시집에 이런 시가 이ㅆ었다.

여행기로 대신 가는 여행.

아마... 휴가 없는 국민으로 살아서 그럴게다.

 

여행...

낯선 곳에 가면,

작아진다.

외롭고 심심해 지는데, 그런 마음이 시의 마음이기도 하다.

 

내 그지없이 사랑하노니

풀 뜯고 있는 소들

풀 뜯고 있는 말들의

그 굽은 곡선

 

생명의 모습

그 곡선  

평화의 노다지

그 곡선

 

왜 그렇게 못견디게

좋을까

그 굽은 곡선!(그 굽은 곡선, 정현종)

 

여행은 직선의 시간이 아니다.

곡선의 마음으로 나비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이 여행이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황동규)

 

영화 '편지'에서도 등장한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다.

약수동 편에서

<소중한 사소함을 찾아서>란 제목을 붙였다.

소중한 사소함... 예쁜 말이다.

그 사소함은 소중하다.

사랑이라 말하지 않아도, 그것은 표현되지 않은 사랑이다.

 

눈 앞을 가리는 꽃나무 가지를 쳐내자

황혼 빛 아름다운 먼 데 산이 보이네(초의선사)

 

아무리 좋은 것도

좀 멀리서 비껴 봐야한다.

여행은 그런 시간을 준다.

좀 게을러도 되는 시간.

최선을 다하지 않는 시간.

열심이 필요 없는 시간.

 

나 돌아갈 것이다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질 것이다.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짐짓 무시할 것이다

 

나 돌아갈 것이다

무심했던 몸의 외곽으로 가

두손 두발에게

머리 조아질 것이다

한없이 작아질 것이다

 

어둠을 어둡게 할 것이다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즉각 반응할 것이다

하나하나 맛을 구별하고

피부를 활짝 열어놓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눈을 쉬게 할 것이다

 

이제 일하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일할 것이다

생활하기 위해 생존할 것이다

어두워지면 어두워질 것이다(도보순례, 이문재)

 

밝아지고

민감해지는 것의 반대가

여행에서 얻는 것이다.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가 되어,

사는 것을 배우는 일이

시를 읽는 일이고

여행을 하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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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나를 안아 준다 - 잠들기 전 시 한 편, 베갯머리 시
신현림 엮음 / 판미동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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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명한 시인들이 이런저런 시들을 엮어서 책을 내는 것이 유행인가.

이 책은 세계 여러 나라 시인들의 시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마음을 저릿하게 하는 시도 있고,

그림과 엮여 황홀경을 맛보게 하는 시도 있다.

 

 

흑설탕 듬뿍 발린 맛동산을

오도독 오도독 먹으면서

나는 이렇게 성장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연못처럼 뜨겁고 매끄러운

이끼 같은 녹색 차를 마시면서

나는 이렇게 건강해졌다

생각보다 딱딱하고 생각보다 사르르 녹는

갓 구워낸 도넛을 먹으면서

입 주위에 보슬보슬 설탕을 묻히며

나는 이렇게 용감해졌다

무수한 날들의 간식을

무수한 날들의 기쁨을

깨물고 뜯고 빨고 맛보고 바라보고

핥고 씹고 넘기면서

나는 이런 인간이 되었다(간식시간, 에쿠니 가오리)

 

이런 맛있는 시를 읽으면 좋은 꿈을 꿀 수 있겠다.

 

고독한 시간이 없으면/ 시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의미도 이해할 수 없다(수잔나 타마로)

 

당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와 삶을 공정하게 나누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고유한 것을 인정해주는 것도 포함된다.(디즈레온리)

 

잠이 잘 올 듯한 구절들이 많다.

그런데 좋은 구절을 만나러 돌아다니다 보면 잠이 깰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사회에서 어떠한 일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감은 오직 고독에서 얻을수 있다.

당신이 하는 것,

꿈꾸는 것은 모두 이룰 수 있으니, 지금 시작하라.(괴테)

 

꿈은 희망이기도 하다.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신철규, 눈물의 중력)

 

세상에 홀로 우는 것은 없다

혼자 우는 눈동자가 없도록

우리는 두 개의 눈으로 빚어졌다(이현호, 세상의 모든 울음은)

 

울다가도 잠이 들 것이다.

 

사랑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거저 주는 것이지요.(프란체스코 교황)

 

눈에 걸리지 않고 스치는 시들도 많다.

그림들도 그렇다.

 

그렇지만 세상에 모든 사람 얼굴이 기억에 남으면 잠을 못잔다.

그리운 이는

한 명도 너무 많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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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7-03-28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너무 맛깔나네요

글샘 2017-03-29 15:41   좋아요 0 | URL
네 좋은 시들은 세상에 참 많네요. ^^
 
탐묘인간 - 고양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탐묘인간 시리즈
SOON 지음 / 애니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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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함께하는 즐거움과 불편함, 위로받는 순간들을 잘 잡아낸 웹툰. 외로울 때 고양이를 안고 있고 싶도록 만드는 책. 고양이를 버리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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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빈리 일기
박용하 지음 / 사문난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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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사는 시인, 박용하.

주로 논둑길을 걷다가 뛰고는 한다.

그리고 캔맥주를 여덟 개, 열두 개, 열네 개,

마시고 뻗는다.

 

2009년, 그 해엔 유독 속상한 일이 많았지.

전임 대통령의 죽음을 맞았고,

용산 사고도 있었지.

사대강은 파헤쳐지기 시작했고...

 

그러나, 꽃들은 지천으로 피었고,

열매를 맺어 살구를, 앵두를, 홍시를 매달았으며

쪽파, 마늘, 배추, 호박꽃조차 빗속에 아름다이 피워올렸다.

 

인간처럼

뜨겁고 쓸쓸한 나무도 없을 테지만,

 

내 속에 너무 많은 인간이 들어와 있다

그게 나를 망치고 있다(221)

 

텔레비전이라곤 EBS가 좀 볼만하다는 말도 아프게 들리고,

그의 음주벽은 고통스런 현실을 사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주변에는 욕심없는 노인들로 가득하지만, 세상은 또 뜨거웠다.

 

우리는 아직도 시민 이전에 있고,

시민 의식 이전에 있고

시민 사회 이전에 있다.

이슬만한 양심 이전에 있다.(118)

 

그런 시대였다.

비루한 시대였고, 슬프지만 무릎꿇던 시대였다.

 

하루가 일생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절박한 게 또 있을까(168)

 

오빈리라는 마을에서

하루를 사는 일은 물음표의 나열이다.

 

오후에 오빈리 십만 평 황금빛 들녘을 걸었다.

메뚜기도 심심찮게 뛰었다.

뛰지 말고 걷고 싶은 날씨였다.

천지사방이 그윽한 빛의 잔치였다.

빛이 물들고 있었다.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다. 그리고 멸할 것이다.

저녁에 동쪽 산마루 위로 솟아오르는 보름달을 옥상에서 지켜봤다.(199)

 

그렇게 하루씩 사는 시인의 일기는 슴슴했다.

그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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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마주치다 - 옛 시와 옛 그림, 그리고 꽃, 2014 세종도서 선정 도서
기태완 지음 / 푸른지식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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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가 핀 지는 이미 오래 되었고,

목련들이 꽃등을 밝히기 시작했고, 곧 찻길 가로 노랗게 개나리들이 수를 놓을 것이다.

봄은 꽃과 함께 온다.

 

선창엔 해가 길어 향연기 하늘거리는데

한 베개 가에 바람따라 대나무 그늘 곱네

상인은 잡결의 눈빛 서늘한데

연석에 앉아 서로 보며 늙음을 모르네(진화, 금명전석창포)

 

창포 곁에 앉은 스승과 제자는 서늘한 눈빛으로 禪의 세계를 나눈다.

 

내 흑수정에 대해 들었는데

술 담그면 온갖 근심 풀 수 있네

맹세코 한 방울이라도

양주 백 개와 바꾸지 않으리(성삼문, 촉포도)

 

양주자사는 큰 벼슬이다.

사랑을 그렇게 뻥튀겨 표현한 것인데 역시 성삼문답다.

 

달의 항아와 토끼, 계수나무 이야기와 함께 어우러지는

'목서' 이야기도 아쉽다.

 

은목서 금목서로 향기를 날리는

밥풀같은 꽃들을 보면,

아름다운 여인 항아의 절구질이

펄펄 날리는 쌀의 향연처럼 느껴지고,

어떤 향수보다 은은한 가을을 매만져 주는 목서의 향을

계수나무라 부르지 못하고 일본 계수, 서양의 월계수에게 빼앗긴 것은 아쉬운 일이다.

 

만리교 옆 여교서는

비파꽃 아래 문을 닫고 사네

소미재자가 지금 젊건만

봄바람 관리하는 일은 전혀 모른다네(당 왕건, 촉의 설도 교서에게 부침)

 

당의 여류시인 설도는

뛰어난 재능으로 여성 교서랑이라 불린다.

소미재자는 아름다운 눈썹을 그린 여성.

비파꽃 핀 여교서의 상상이란...

원래 아름다움은 상상 속에서 더 부풀려 지는 법이니.

 

설도의 시는 '동심초'라는 노래로 널리 알려진 시를 소월이 번역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꽃잎은 하욤없이 바람에 지고     풍화일장로風花日將老

만날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가기유묘묘佳期猶渺渺

무어라 맘과맘은 맺지 못하고         불결동심인不結同心人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랴는고. 공결동심초空結同心草

 

한 주제를 잡고서

이렇게 문학과 세상과 어우러지는 일도 멋진 일이다 싶다.

난 어떤 주제를 잡고서 아직 젊은 내 나이를 살아갈까나...

 

일본의 어떤 할머니가 환갑에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하여

여든에 노인용 게임을 만들었다 하니,

나이를 한할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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