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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가디언 ㅣ 푸른도서관 44
백은영 지음 / 푸른책들 / 2011년 4월
평점 :
시간
시간은 늘 흐르고 있다고 느끼고 알고 있다.
지금은 곧 과거가 되고, 과거는 망각된다.
아직 오지 않은 순간은 확정되지 않은 것이라 미래라 부르지만, 그 미래는 곧 현재가 되고,
또 곧 과거로 흘러가서 망각의 강을 건너고 말지.
공간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으로 느끼고 아는 인간에게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 공간에 머물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은 지나간 시간에 움직인 내가 여기 도달했기 때문에 존재하며,
지금 내가 움직이는 곳을 향하여 미래에 나는 다른 공간에 있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나가버린 공간에 대한 기억 역시 과거가 되고 망각된다.
기억에 남는 것 역시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미래에 도래할 공간 역시 마음 속에 존재할 뿐이며, 마음 속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을 확률도 높다.
시간을 되돌리고 공간을 복잡화할 수 있다면?
타임머신이라는 둥,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둥,
인간의 상상은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으로 한순간에 빨려들어가는 상상을 늘 해왔다.
그러나, 거기서 벌어지는 사건과 거기서 만나는 인간들은 늘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나와는 무관한 일들이 벌어지거나 황당무계한 존재들이 거기선 일상이 된다.
아기공룡 둘리가 날아간 우주 공간도 그렇고, 해리포터가 들어선 마법의 공간도 그렇다.
현실감이 많이 떨어지는 곳이어서,
책을 놓는 순간, 시간과 공간은 금세 현실의 이 장소로 복귀한다.
복잡화된 시간과 공간은 한 순간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타임 가디언, 그들이 지키는 시공간은?
조금 색다르다.
과거로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은 꼭 과거의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이 미래의 한 시점에서 달려간 과거의 한 시점.
거기 존재하는 캐릭터들은 자신보다 훨씬 더 미래의 지점에서 달려온 존재들일 수도 있다는 상상력.
엄마는 남자가 되고, 자신이 엄마가 되는 혼돈은 작가가 저지르는 시공간의 여행의 의미를 증대시켜준다.
타임 가디언들이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 시공간은,
바로 부처가 그토록 골똘히 찾아왔던 질문에 대한 해결 과정이다.
그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길찾기의 시작 말이다.
그래서, 만남은? 헤어짐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가 이뤄내는 한 지점에 두 존재가 놓일 때 그 현상을 우린 만남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이후
서로 다른 지점에 놓인 두 존재는 대뇌 피질의 지직거림의 전파를 따라 서로를 상상할 수 있다.
만나지 않은 지점에서 만남이 가능하게도 하고,
전혀 다른 지점에 놓인 두 존재는 인터넷 세상 속에서 아바타의 속성을 띠고 만날 수 있다.
그 만남은 만나지 않은 지점에서 마주치는 것인데,
의미가 발생하는 지점이라면 충분히 마주침 이상의 만남을 형성할 수 있다.
헤어짐이란
동일한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공유하던 존재들이,
공간을 달리하여 놓여있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시점에서 봤을 때 정해지는 그 지점으로만 존재하는 것인지,
좌표의 원점(0,0,...0,0)에 의문을 가지는 순간,
모든 존재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우리의 사고는 뒤틀린 형상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임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곡면 칠판에 그린 평면을 굳이 평면도형이라 우기는 수학선생님같은 시각을 가지고 사는 우리는,
점의 면적이 의미가 없다는 수학선생님이 피부과에 점을 빼러 가서도 같은 주장을 할 것인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3만원 짜리 점 하나 빼면 그 주변의 점 세 개는 공짜로 빼 드린다는 원장님 말씀에,
점은 면적이 없으니 네 개 가격 12만원을 지불하고 나올 것인지를 말이다. 아니면 네 개를 공짜로 해달라고 우기든지...
삶은 수학적이지만은 않다.
충분히 시공간이 뒤틀릴 수 있어서,
나의 과거는 너의 미래가 될 수도 있고,
나와 너의 만남은 과거가 될 수도 미래가 될 수도 있다.
결국 더 우월한 존재인 내가 더 열등한 존재가 되는 것은 시공간이 뒤틀려버렸을 때 한 순간에 뒤바뀌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인간은 근원적으로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터이다.
필연과 우연
하나의 차원에서 절대적 원점을 상정한다면 시공간의 마주침은 필연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차원의 원점이 뒤틀릴 수 있음을 고려한다면,
모든 필연은 우연의 수준과 다를 바 없다.
점쟁이와 의지 사이
인생을 한 좌표 평면 위에 두고 콤마링을 해나가는 사람이라면 점쟁이를 의지하는 것도 좋으리라.
그러나 좌표 평면이 힘의 변동에 따라 충분히 일그러지고 다원화될 수 있음을 인지하는 삶이라면,
현재 자신이 유영하고 있는 우주의 별자리를 즐기는 마음으로,
아라란 이름의 '바다'를 서핑하는 여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사는 것도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판타지 속의 시간과 공간
결국 판타지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삶이 남기는 것도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과거의 특수한 시간과 공간 속에 남긴 삶의 이야기들은 모두 환상이며 그림자다.
금강경의 저 유명한 게송처럼,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꿈같과 환상같고 물거품같고 그림자같고, 이슬같고, 또한 번갯불같은.... 그런 것.
나의 오늘도 판타지
판타지 속의 한 좌표에서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해야할 일은?
이 순간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것.
지나가버린 과거에 불평갖는 어리석음과,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는 어리석음은 모두 탐욕에서 오는 법.
기적은 오로지 지금 숨쉬고 있는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사실.
확실한 일도 내가 여기 있다는 그것 하나.
부활절, 삶은 = 달걀
예수께서 선과 악을 가를 수 있다는 오만함에 빠진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희생한 것과,
모든 보속을 감당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지나가버린 과거에 죄책감을 갖고 살지 말라는 말씀과,
어린아이처럼 미래의 두려움에 떨지 말고 살라는 말씀을 전해주심이리라.
어린아이같이 살면, 천국에 간다고? 뷁!
어린아이는 지금
이 시간과 공간에서 천국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