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엔 폭설이 내린다 하고,
어딘가엔 추위가 닥친다 하는데, 우리 사는 여기는 추위나 눈과 무관하게 사는 곳이다.
사람이 사는 곳은 참 좁은 지구인데,
곳곳에서 겪는 일은 참 다르구나.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민우가 살아가야 할 시대엔 세상이 참 좁아질 것이다.
이제 서울까지 세 시간도 안 걸린다.
세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삶의 중심도 빨리 이탈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중심을 잡으며 사는 일은 그래서 더욱 힘들 것 같구나. 

더 잘 사는 삶을 위하여,
네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일을 배우기 바란다. 

오늘은 김명인의 '소금바다로 가다'란 시를 읽어 보자.
시나 영화에서 일상 생활에서는 쓰지 않는 '기본형'을 쓰는 일이 있다.
'번지 점프를 하다' 이렇게 말이야.
그건, 과거형을 쓰는 것보다 조금 더 멋지고 신선하게 보이기 위함이지, 별 다른 뜻은 없단다.
화자는 '소금바다로 갔다'는 경험을 곰곰 생각해 보기 위해 과거형을 버리고 기본형을 썼을 거야. 

내 몸이 소금을 필요로 하니,
날마다 소금에 절어가며
먹장 매연(煤煙) 세월 썩는 육체를 안고
가는 여행 힘에 겹네
썩어서 부식토가 되는 나뭇잎이
자연을 이롭게 한다면
한줌 낙엽의 사유라도
길바닥에 떨구면 따뜻하리라

그러나 찌든 엽록의 세상 너덜토록
풍화시킨 쉰 살밖에 없어
후줄근한 퇴근길의 오늘 새삼 춥구나
저기, 사람이 있네, 염전에는 등만 보이고
모습을 볼 수 없는 소금 굽는 사람이 있네

짜디짠 땀방울로 온몸 적시며
저물도록 발틀 딛고 올라도
늘 자기 굴헝에 떨어지므로
꺼지지 않으려고 수차(水車)를 돌리는 사람,
저 무료한 노동
진종일 빈 허벅만 퍼올린 듯 소금 보이지 않네
하나, 구워진 소금 어느새 썩는 살마다 저며와
뿌옇게 흐린 눈으로 소금바다 바라보게 하네

그 눈물 다시 쓰린 소금으로 뭉치려고
드넓은 바다로 돌아서게 하네. (김명인, 소금바다로 가다) 

네 연으로 이뤄진 이 시의 화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눈물이 나려고 한다.
3연 마지막 부분에서 '뿌옇게 흐린 눈'으로 화자는 소금바다를 보는데,
이 시를 읽는 나는 마찬가지로 '뿌옇게 흐린 눈'을 하고 화자를 보게 된다. 

<소금>의 이미지는 '타인도 썩지 않게 하는 것'의 이미지를 담고 있단다.
우리 삶은 손보지 않으면 금세
때가 타고,
녹이 슬고,
살짝 맛이 가려고 하는 것이어서, 늘 <소금>으로 썩지 않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그런데, 또 우리 삶은 <날마다 소금에 절어가며> 사는 피곤한 것이기도 하다.
그 피곤하고 무의미하기까지 한 삶을 <먹장 매연(煤煙) 세월 썩는 육체를 안고 가는 힘에 겨운 여행>에 비유하고 있구나.
먹장은 시커먼 그을음과 연기가 가득한 탄광의 마지막 <막장>의 의미고,
매연으로 가득한 세월동안 우리는 썩는 육체를 안고 가는 힘겨운 여행을 하는 나그네인 것으로
자신의 삶의 모습을 성찰하고 있단다. 

인생은 늘 <자연>과 대비되어 표현되곤 한다고 했지?
자연에서 <썩어서 부식토가 되는 나뭇잎이 자연을 이롭게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생각한다면,
인간도 <한줌 낙엽>이 되어 살겠다는 <사유라도>하며 살기를...
그래서 <한줌 낙엽>이 되어 제 몸을 <길바닥에 떨굴> 수 있다면...
인생이 그저 힘겹지만은 않고, 따뜻하리라...
이런 이야기로 1연을 맺고 있어. 

그러나...
2연에서 '그러나'로 시작하는 걸 보니...
인생은 자연에 동화되는 자연스런 삶을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할 것을 예측할 수 있겠다.
화자는 <푸른 엽록의 세상>에서 자유롭게 광합성을 하며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고,
<너덜거리도록 찌들고 풍화된 삶>을 쉰 살이나 살았음에
'후회하는 한탄', 곧 회한(懷恨)의 감정을 가지고 있단다.
그래서 후줄근하게 퇴근하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허망함과 자괴감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지.
그런 회한을 '춥구나' 하는 촉각적 심상, 감각적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는 거야.

 

쉰 살이 넘어 피폐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면서 부끄러워하고 있는 화자의 시선에 뭐가 보이니?
그래.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염전은 바로 소금밭이지.
바닷물을 가둬두는 저수조에서 위의 사진에 있는 수차를 돌려서 바닷물을 공중으로 뿌리곤 했단다.
(물론 요즘엔 이런 작업은 펌프로 다 하지만...)
그래서 농도가 진해진 바닷물은 이제 증발지에 옮겨 두고 햇볕을 쪼여가며 점점 농도가 짙게 만든다.
(비가 오면 묽어질 수 있으니 '함수류'라는 곳도 만들어 두고 비닐 지붕을 덮기도 했단다.) 
이렇게 햇볕에 쪼여 만다는 소금을 '천일염'이라고 하고, 혹은 불로 구워 만드는 곳도 있었단다.

정말 오랜 시간을 두고두고 노력해서 결과가 조금씩 조금씩 보이는 작업이 소금 만드는 작업일거야.
그렇게 소금 만드는 사람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있지.
그 사람은 <등만 보이고 모습을 볼 수 없>어.
제 잘났다고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모습이라 볼 수 있겠지. 

그 사람은 하루 종일 노동을, 그것도 아무 재미도 없이 심심한 반복인 <무료한 노동>을 하지.
날이 밝아서부터 날이 저물때까지 수차를 밟고 또 밟을 뿐인 그 사람은,
온 몸을 땀방울로 짜게 적시면서 노동을 한단다.
그 모습을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에 빗대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어.
시지프스는 벌로 산꼭대기까지 매일 둥근 바위를 밀어올리게 되어있단다.
그렇지만 다음날이면 그 바위는 반대편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다시 그 일을 해야하는 거지.
이 소금 굽는 사람도 수차를 밟으면 수차는 내려가고
그 구렁에 떠러지지 않으려고 다시 밟고 올라서지만, 다시 내려가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거야. 

인간의 삶은 이렇게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단다.
매일매일이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반복일 뿐이지.
<진종일 빈 허벅만 퍼올린> 것처럼 결과물은 보이지 않는 것이 그날그날의 삶이란다.  

 

그런데 3연에서 다시 <하나>가 등장한단다. '그러나'와 같지.
앞에서 자연은 생명력으로 넘친다. <그러나> 화자는 부질없는 삶을 살아서 맥빠진다는 이야길 했지.
여기서 <하나>가 나왔으니 이제 다시 '의미를 찾는 과정'이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보자. 

삶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으로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러나, 시나브로(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소금의 결정이 뿌옇게 엉기는 것이란다.
삶도 이렇게 소금 결정이 시나브로 엉겨붙는 것처럼, 모르는 사이에 결과물을 맺는 건지도 모른단 이야기야. 

구워진 소금이 어느새 썩어가는 살에 저며오는데,
뿌옇게 흐린 눈으로 그 소금바다를 바라보게 한대.
뿌옇게 흐려진 눈은...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이지.
자신의 맥빠진 삶도 그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님을 염전의 노동자를 통해서 깨닫고 있는거야.
그래서 뿌옇게 흐려지는 눈이 되는 걸게다. 

삶에서 흐르는 눈물.
또는 삶의 무의미함과 부조리성을 깨닫고 흘리는 눈물이
다시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화자는 힘겨운 삶이었지만, <하나> 뒤에서 의지를 품게 된다.
그간 겪었던 눈물을 다시 쓰린 <소금>으로 뭉쳐서 결정을 이루기 위하여...
이제 다시 삶의 바다, 그 드넓은 바다로 돌아서고 있어.
이제 화자는 삶과 정면으로 대결하려는 힘을 되찾고 있는 걸로 볼 수 있겠다.

민우야.
어른들이 하는 '일'을 한번 생각해 보렴.
누구나 '같은 일'을 매일 반복하며 살아 간단다.
그 매일에서 의미를 찾는 일보다, 힘들다고 생각하기 훨씬 쉬운 거야.
그렇지만, 인간은 그 매일을 살아가야하는 '시지프스'와 같은 존재지. 

전에 아빠가 '센과 치히로' 이야기 들려준 적 있지?
자신의 본모습을 잃고 매일을 힘겹게 생각하는 센의 이야기.  

힘들때 한번씩 생각해 볼만한 주제가 아닐까 싶다.
오늘 시도, 힘들다고 생각할 때, 한번씩 읽어 보렴.
혹시나, 소금 굽는 그이를 통해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야.
날이 차다.
감기 조심하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낭만인생 2010-12-28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코 무의미해 보이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다시 새겨봅니다.

글샘 2010-12-29 10:35   좋아요 0 | URL
그걸 매일 되새기려면...
<그러나>와 <허나>의 순간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건가 봅니다.
 

1970년 11월 13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서울 평화시장 앞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한 이후,
1980년 5월 광주에서 숱한 민중들의 죽음을 뒤로 하고 다시 군사독재는 이어지고 있었단다.
그런 사회적 배경으로 1980년대 문학은 <민중 문학>이란 이름을 달고 있었어.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는 그 당시 민중의 보잘것 없는 삶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로 유명하다. 
우선 한번 읽어 보렴.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평역에서> 

 

발간 난로가 타오르는 대합실(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대기실)의 풍경이 시각적으로 떠오르지.
'역'이란 곳은 애환에 젖은 삶의 행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설정된 것이고.
실제로 '사평역'이 어딘지를 궁금해할 필요는 없단다.
영화 '해운대'가 실제로 해운대에서 일어났던 일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야.
소설 중 '무진 기행'의 안개의 도시 '무진'도 '방황'을 상징하는 상상 속의 도시고,
'삼포 가는 길'의 삼포도 '잃어버린 고향'을 상징하는 도시란다.

이 시를 읽고 나면 반복되는 구절을 찾을 수 있을까?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이 두 줄인데... '톱밥'이 '눈물'로 바뀌었지.
이렇게 수미상관처럼 생긴 글들은 그 사이에서 뭔가의 '화학적 반응'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커.
그 화학적 변화가 바로 <주제>에 해당하는 것이란다. 

우선 노란 부분을 기준으로 두 부분으로 나눠 보자꾸나. 그 앞부분을 읽어 보자.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막차가 오지 않는 작은 역의 대합실.
밤새워 굵은 눈송이가 내려 쌓이는데,
그 시린 유리창을 녹여주는 것은 톱밥 난로란다.
이런 배경의 분위기를 띄워주는 부분이 앞부분이다.
작은 시골 역이니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가난하고 볼품없는 시골 사람들이겠지.
신경림의 <농무>에서 배웠듯이, 농촌은 몰락하고 있었으니 말이야. 

화자 <나>가 등장하는데, 그는 톱밥 난로에 톱밥을 던져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야.
간이역의 역무원 정도 되겠지.
그믐은 음력으로 한 달이 마치는 날이니깐,
그믐처럼 졸고 쿨럭이는 사람들은
인생을 마쳐가는 노인들이기 쉽겠지.
이렇게 볼품없는 공간적 배경과 볼품없는 인물의 제시부가 앞부분이야.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몇 사람은 할말들을 가득하게 안은 삶을 살았구나.
누구나 살고 나면 자기 인생이 소설 몇 권처럼 파란만장해 보인다고 하더라마는,
식민지 시대 40년대와 전쟁 시기 50년대.
민주화 운동의 60년대와
군사독재로 농촌이 침몰하고 산업화시대로 탈바꿈하던 60~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인생은,
하나 하나가 그대로 역사였고 민중사의 대장경이 아니었을까 싶구나. 

청색의 손바닥은... 차가운 빛의 이미지다. 말하지 못하는 암울한 시대적 배경이랄까.
창밖도 차갑고... 사람들도 춥다. 

신경림은 '갈대'에서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 
이라고 했었지.
이제 곽재구의 시에서는 이렇구나.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 

술에 취한 것은 제정신으로 살지 못한다는 것이지.
위에서 적은 저런 시대에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 수 있겠니.
보잘것 없는 한 두릅(20마리)의 굴비나 한 광주리의 사과를 사서
고향에 돌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처럼
떠벌이며 자랑할 것 하나 없는 <민중>들의 모습이 잘 형상화되고 있다. 
그 뒤의 <기침 소리>와 <쓴 담배 연기>도 마찬가지로 민중의 모습이란다. 

그렇지만 '눈꽃의 화음'이라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넣어서,
그 삶은 고달프지만 서정적이고 평온한 분위기의 대합실에 앉아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단다.
자정이 넘는 시각이 오면,
이제 막차가 눈에 가로막혀 언제 올지 하염없이 연착되고 있는데,
낯설던 앞사람의 얼굴도,
삶에서 겪었던 뼈아픔도 모두 눈밭(설원)에 파묻히듯 친숙해지는데,
이 작은 간이역엔 서지도 않는 급행 열차가
빠~~~앙~ 경적이라도 길게 울리며 철커덩 철커덩 바퀴 소리를 내면서 지나간다.
그 기차에 탄 사람들은 따스한 공간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이들인지
단풍잎 같이 따스한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구나.
그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우리 인생 역정은 참 길기도 하다. 

돌아보면,
그리웠던 순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역무원으로 근무하던 나도 한때는 농촌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고,
그 순간들을 상기하며(호명하는) 화자는 톱밥 난로에 '톱밥'을 던져 준다.
그 '톱밥'은 '연민'이며 '동병상련의 심정'이어서 왠지 '눈물'겨운 것이구나.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언젠가 꼭 돌아올 아름다운 그날들을 부끄럽게 맞이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진실로 아름다운 그날의 시 한 편을 꼭 쓰기 위하여" 시를 쓴다는 말을 시인이 남긴 적이 있다. 
곽재구 시인이 바라던 '그날'은 어떤 날일까?
70,80년대의 민중이 바라던 '그날'은 '민중을 위하여 국가가 서는 날'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세계화의 물결은 갈수록 '온 세계의 민중'을 힘들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아쉽다. 

한때 유명했던 소설가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란 소설이 있단다.
그 줄거리는 이렇다.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는 '영달'은 넉 달 동안 머물러 있던 공사판의 공사가 중단되자 밥값을 떼어먹고 도망쳐 나온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정씨를 만나 동행이 된다.
'정씨'는 교도소에서 목공·용접 등의 기술을 배우고 출옥하여 영달이처럼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던 노동자인데,
그는 영달이와는 달리 정착을 위해 고향인 삼포(森浦)로 향하는 길이다.

그들은 찬샘이라는 마을에서 '백화'라는 색시가 도망을 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술집 주인으로부터 그녀를 잡아오면 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그들은 감천으로 행선지를 바꾸어 가던 중에 도망친 백화를 만난다.
백화는 이제 겨우 스물 두 살이지만 열여덟에 가출해서 수많은 술집을 전전해서인지
삼십이 훨씬 넘은 여자처럼 늙어 보이는 작부였다.
그들은 그녀의 신세가 측은하게 느껴져 동행이 된다.

그들은 눈이 쌓인 산골길을 함께 가다가 길가의 폐가에 들어가 잠시 몸을 녹인다.
백화는 영달에게 호감을 느껴 그것을 표현하지만 영달은 무뚝뚝하게 응대한다.
그들은 다시 길을 나선다. 눈길을 걷다가 백화가 발을 다쳐 걷지 못하게 되자 영달이 백화를 업는다.
일곱 시쯤에 감천 읍내에 도착한다.

역에 도착하자 백화는 영달에게 자기 고향으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하지만
영달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자신의 비상금을 모두 털어 백화에게 차표와 요깃거리를 사준다.
백화가 떠난 후 영달과 정씨는 삼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던 중 삼포에도 공사판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달이는 일자리가 생겨 반가웠지만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지 않는다.
마음의 정처(定處)를 잃어버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소설도 <민중>의 삶에 따스한 시선을 던지던 소설이었다.
그래서 '사평역에서'와 같은 시와 엮여서 시험에 잘 내는 소설이지.
황석영은 장편 민중 소설 <장길산>이나 <객지> 등 민중 작가로 유명했는데 요즘엔 좀 맛이 갔더라.
시대가 변하니 민중은 돈벌이가 안되는 모양이다. 

이 소설의 '정씨'는 감옥에서 굴러먹던 막장 인생이고, '영달'도 막노가다꾼이고, '백화'도 술집 여자일 뿐이지만,
그들이 서로 따스한 마음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
가난하다고 왜 모르겠는가. 하던 신경림의 시가 떠오르기도 한다.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은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바탕으로 하여 이야기로 꾸민 소설이란다. 
줄거리는 이렇다. 

사평역이란 작은 역에서 기침하는 농부와 그의 아들,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중년 사내,
시위 때문에 제적 당한 대학생, 창녀, 행상꾼 아낙네 둘, 미친 여자 등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킨다.
시점을 각 인물들에게로 옮겨서 인물들의 침울하고 어두운 삶의 면면들을 그려내고 있다.
특히, 이 소설은 원작 시의 서정성을 그대로 살리고 있는데,
눈 내리는 간이역, 톱밥 난로 주위에 둘러 앉은 사람들의 모습,
등장 인물들의 정감 어린 태도와 따뜻한 시선이 소설의 서정적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민우야.
사람은 사는 데 무엇을 최고로 쳐야 할까?
무조건 돈만 많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닐 것이고,
사람이 무조건 성실하고 착하다고 옳은 것도 아닐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주변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살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는 일도 삶의 성공 중 하나가 아닐까...
이밤엔 이런 시를 읽으면서 이렇게도 생각하게 되는구나.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0-12-27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25회를 맞았군요.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겨울밤, 이렇게 잠 못 들고 있다가 <사평역에서>를 다시 읽으니
제 조그마한 방이 마치 세상의 외진 곳에서 외롭게 불을 밝히고 있는 간이역의 대합실 같네요 ㅎㅎ

한 주가 지나면 또 해가 바뀌는군요.
올 한 해 여러모로 고마웠습니다.
내년에도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 보내시고 건필하시길...^^

글샘 2010-12-28 00:53   좋아요 0 | URL
매일 한 꼭지 쓰는 것도 쉽지 않네요. ^^
무슨 작가도 아니고...
그래도 수업이니깐... 방학엔 열심히 써보려 합니다.

우리 사는 구석진 곳이 <사평역>의 대합실 같긴 하죠.
거기 한 움큼의 톱밥 넣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 덕에 조금 더 훈훈한 거구요.

한 해가 바뀌는 일이야 무심하게 받아들이고 싶지만...
후와님이야말로 행복한 일을 많이 지으시는 한 해가 되시길 빕니다.

순오기 2010-12-2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랜만에 들러서 시 공부합니다.
언제 읽어도 울컥하는 사평역에서~~~~~~~
우리 독서회 주관 시낭송회에서 으뜸상을 받은 아저씨가 이 시를 낭송했었죠.
좋은 아빠셔요~ 글샘님은!^^

글샘 2010-12-29 10:34   좋아요 0 | URL
울컥 하시기는... ^^
시간이 되는 날 한 편씩 쓰려고 노력중입니다.
 

한동안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이제서야 시간을 낸다.
부지런히 매일 쓰려고 노력할테니, 너도 부지런히 읽어주기 바란다. 

박재삼 시인의 시 중 유명한 것이 두 편 있다. 

'추억에서' 연작과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다. 

진주장터 생어물전에는
바다밑이 깔리는 해다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끝에 남은 고기 몇마리의
빛 발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만큼 손 안닿는 한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맞댄 골방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남강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 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추억에서 67, 전문)  

그의 '추억에서' 연작은 가난해서 서글펐던 추억으로 점철된다. 
그 서글픔의 추억은 평생 그를 '울음'의 시인으로 자라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주를 휘돌아 흐르는 강, 남강.
유서깊은 도시 진주는 양반들은 살기 좋은 곳이었는지 몰라도, 가난한 서민이 살기엔 힘든 곳이었을 거야.
그래서 조선 후기 진주 민란도 일어났고,
박경리는 그 동네 하동 평사리를 배경으로 밑바닥 삶의 끈질김을 <토지>를 통해 풀어냈지. 

화자의 어머니는 진주 장터의 생어물전(마른 어물은 건어물전)에서 생선을 파셨나보다.
오누이(오빠와 누이)는 골방 안에서 머리 맞대고 손시리게 떨고 있었고... 

1연에서 등장하는 배경 <어스름>은 해가 넘어가고 나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이란다.
근데도 엄마는 아직도 생선을 다 팔지 못하고 남았구나.
빨리 팔고 오누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와야할텐데... 마음은 바쁘고, 손님은 점점 적어지고...
'은빛' 이미지는 '은전'으로 '돈'을 가리키는데,
생선 눈깔도 은빛으로 빛나는 것이겠고, 생김새도 그런 것일거야. 

4연에서 다시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엄마의 마음이 빛나는구나.
글썽이는... 이것은 눈물을 형상화한 것인데, 마치 옹기(항아리)가 달빛을 받아 번득이듯,
어머니는 오누이를 생각하며 눈물을 짓는 마음이란다.
어머니는 그 맑고 고운 진주 남강을
해뜨기 전 새벽과, 해진 뒤 어스름에야 보던 힘든 삶을 사셨던 분이구나. 

어린 시절, 그 추억에서 퍼올린 기억 하나가
이렇게 가슴 시린 것이었다니...
과연 민우의 추억들은 어떤 심상을 퍼올릴 수 있을까? 궁금하구나. 

박재삼의 가장 유명한 시는 역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란다.
가을 강에 노을이 타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 시간의 강에 '울음'을 빗댄 것은... 어떤 유사성이 있을지... 생각하며 읽어 보자.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겠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전문) 

이 시는 어렵지 않다.
제삿날 큰집에 내려가 시간이 좀 남아,
가을햇볕, 따가운 햇살 아래, 타박타박 산등성이까지 걸으면서,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동무삼아 올라간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
그러다, 해질녘 노을이 붉게 물든 강물을 본다.
울컥, 서러움이 주체할 수 없이 솟구친다.

첫사랑, 그 다음 사랑, 그리고 미칠 일로 남은 자신의 삶이
막바지에 다 와가는 강물의 처지와 동병상련...  
소리죽여 울고 있는 가을강을 눈물어려 바라보는 시인의 슬픈 눈망울이 금세라도 붉게 비쳐 올 듯하다. 

이런 유사성의 발견이 시의 은유를 완성하는 것이란다.
자신도 젊은 시절(첫사랑)엔 힘내서 팔딱거리며 살았는데,
좀더 나이들어선(그 다음 사랑) 세상이 힘겨워 울음이 났고,
이제는 인생의 종점에 다 와가는(바다에 다와가는) 나이가 되니
가슴에 미칠 일 하나쯤 숨겨져 있지만,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소리죽여 우는 가을 강처럼 그렇게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 

이렇게 인생을 바라보고,
자연을 바라보면서, 유사성을 발견해내는 일을 <관찰>과 <조응>을 맺어서 <관조>라고 한단다. 

넓게 보면, 자연과 인생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 속에 인생이 한 점처럼 존재하는 것일 텐데...
인간은 세상을 자연과 인생으로 나누곤 하지. 건방지게...
아무튼, 자연을 관찰하면서 인생의 묘미를 발견하는 관조의 맛을 잘 보여주는 시인이란다. 

다음엔 아빠가 좋아하는 <한>이란 시를 한 편 보자꾸나.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 설움이요 전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한(恨), 전문>

 

내 마음에 오롯이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내 마음을 모른다. 

자기가 마음 속으로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 그 사랑을,
화자는 <사랑의 열매가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감나무>에 빗대어 표현했구나.
화자의 사랑은 기대감에 넘치는 사랑이 아니고,
기쁨을 동반하는 사랑이 아니고, 서러운 사랑의 열매가 붉게 익고 있는
그래서 감나무같은 사랑이라고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상황을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처럼 '형상'을 드러나게 표현하는 것을
<형상화>라고 한단다.
형상화에 성공한 표현은 이렇게 가슴 속 상황을 다양한 심상으로 느낄 수 있게 하지.

그래서, 2연에서 죽어서라도,
내 서러운 나무(나의 마음)는 그 사람 등뒤로 나지막하게 휘드려질까...
아, 소심한 사람.
그렇지만, 한편 생각하면
그 사람도 날 사랑했을지도 모르고,
내 서러운 사랑의 나무를 알아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면,
삶이란게 뭔지... 이런 마음이 되겠지. 

또, 내 사랑만 이렇게 서글픈 게 아니라,
그 사람도 세상살이 눈물로 보낸 건지도 모른겠다는...
결국, 인생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이런 것이니, 서로 동병상련 할 밖에... 

박재삼의 '한'스런 '설움'을 읽는 일은,
카타르시스를 주는 일이기도 하고,
동병상련의 비를 노박이로 함께 맞는 바보같은 웃음이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는 조금 나이 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단다.
이런 것을 어린 나이에 읽으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고... 

이제 방학이 되었으니 아빠도 부지런히 매일 두어 편의 시를 읽혀주려고 한다.
방학은 쉬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는 게 아빠의 철학이지만,
올해 겨울과 내년 여름은 수도승처럼
네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아들이 되길 바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반딧불이 2010-12-2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박재삼의 시를 읽었을 때 저는 대체 왜 눈물의 시인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오늘 글샘님 설명으로 다시보니 이제야 조금 가슴에 닿는듯 하네요.

신묘년이 멀지 않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글샘 2010-12-28 00:55   좋아요 0 | URL
내년이 신묘년인가요? 요즘엔 해가는 데 무심해서리... ^^
박재삼의 시는 참 아련한 감정을 갖게 해요.
울컥 눈물나게 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저 이야기 따라가다보면, 글썽, 눈물짓게하는 사람.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
 

한 해가 저물어 가는구나.
무언가가 메말라가면서 끝을 향해달릴 때, 나는 이 시가 생각난단다.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우선 한번 읽어 보자.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의 기도> 

단출하게 3연으로 이뤄진 시다.
그리고 처음 부분이 같은 말의 반복이구나.
가을에는 ~하게 하소서... 뭔가 기도하는 경건한 언어처럼 구성되어 있고.  

가을이라고 하면 1년의 마무리가 되는 계절이기도 하겠지만,
인생이 저물어가는 시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뭔가가 끝나갈 때, 사람은 조금 엄숙해지고 경건해질 수 있을 거야.
마치 12월 31일 밤의 마음처럼. 

1연에선 그런 가을을 맞아, 기도하게 해 달라고 빈다.
겸허한 마음으로 가슴이 충만해 지기를 비는 마음.
이제까지는 너무 욕심을 내서 살지 않았는가? 돌아보며 겸허하게 자신을 비우는 성찰의 시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요즘. 그런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구나. 

2연에서 사랑하게 해 달라고 빌고 있어.
단 한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시간을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구나.
사랑이란 걸 공자의 말로 바꾸면 <극기복례>가 아닐까 싶다.
자신을 극복하고, 자기의 이기심을 모두 비우는 마음이야말로 <예>로 돌아간다는 뜻이겠지.
부처님도 <색즉시공>이라고 세상은 텅 빈 것이니 마음을 모두 비우라고 하셨겠지.
자신만을 위한 욕심을 내지 않고,
당신을 위한 마음을 내는 경지. 그것이 사랑이란다. 

3연에선 '호올로' 있고 싶다고 하지.
혼자서 뭘 하겠다고?
영혼의 여행을 떠나는 거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 꽃핀 골짜기를 지나는 일은 다양한 삶의 고비를 넘는다는 의미겠다.
그래서 자신은 어떤 존재가 되고 싶다고 하고 있니?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야.
마른 나뭇가지는 욕심을 버린 사람의 경지가 아닐까 싶구나.
욕망에 사로잡혔던 젊은 시절을 지나, 이제 마음을 비운 사람의 경지.
거기 다다른 까마귀는 <고독한 자신의 영혼>이 되겠지. 

화자가 추구하는 삶은 삶의 유한성을 깨닫고,
매사에 기도하고, 감사하며, 사랑을 나누고, 욕망을 버린 구도자처럼 살고 싶은 것이 아닌가 싶어.
그래서 이 시는 종교적이고 명상적인 시로 볼 수 있겠다.
주제라면 <가을의 고독과 기도를 통한 경건한 삶의 추구> 정도면 되겠지.
고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을 보낼 민우도 스스로 경건하게 지난 2년을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다음엔 김현승의 <눈물>을 보자꾸나.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 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눈물>

 

이 시는 크게 은유법으로 이뤄진 시야.
제목이 눈물이잖아.
근데, 그 눈물을 다양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은유법이지. 

1연에서 물방울이 땅에 떨어져 흙을 적시고,
다시 그 흙이 비옥한 토양, 옥토가 되는 상황을 본다.
그래서 <작은 생명>이 열리게 되는 거야.
물 또는 눈물은 그래서 자신을 희생하여 새로운 생명을 약속하는 거라고 보면 되겠다. 

2연은 <흠, 티, 금>도 가지 않은, 정말 순수한 나의 결정체는 바로 눈물이라고 한다.
이 시의 화자의 측면, 곧 <표현론적 측면>에서 살펴 보자면,
화자는 자식의 죽음 이후에 이 시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눈물이 주루룩 흐를 때, 그걸 생명, 또는 순수와 연관지었겠지. 

3,4연에서 자신의 가장 값진 것. 가장 나아중까지 남을 것은 눈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5연에서, 나무의 꽃이 시들고 열매가 열리는 상황과,
6연의, 웃음을 만든 후에 눈물을 만드신 하느님의 상황을 빗대고 있다.

꽃이 시들면 나쁜 거잖아. 죽음이고 끝인데...
그런데 열매가 열리는 긍정적 상황으로 뒤집으니 <역설>로 보면 되겠지.
<낙화>라는 현상적, 피상적 사실을 보고,
<열매>라는 본질적 의미를 깨닫는 것.
이렇게 삶의 의미를 관찰하면서 얻어내는 것을 <관조>적이라고 한 적이 있지?

웃음을 만든 후에 눈물을 만드신 것도 마찬가지지.
아이를 보고 그렇게 즐거워했는데...
하느님은 다시 눈물을 주시는구나.
그런데, 그 눈물이 슬프고 괴롭기만 한 거라면 시라고 보기 어렵지. 그냥 푸념이지.
근데, 화자는 그 눈물은 <가장 순수한 것>, <가장 희생적인 것>이어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킨단다. 
웃음이라는 표면적이고 외면적인 가치보다는
눈물의 내면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 화자의 시선이다.
관조적 시선의 깨달음이 주는 깊이...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는 시란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끓어 넘쳐 울분을 토하는 시가 아니다.
감정이 지극히 절제되고 있는 시로 보면 좋겠지.
주제는 <슬픔의 종교적 승화> 정도가 되겠지. <눈물을 통하여 본 순수의 의미> 이런 것. 

다음 시는 '양심의 금속성'이란 시다.

모든 것은 나의 안에서
물과 피로 육체를 이루어 가도

너의 밝은 은(銀)빛은 모나고 분쇄(粉碎)되지 않아

드디어 무형(無形)하리만큼 부드러운
나의 꿈과 사랑과 나의 비밀을
살에 박힌 파편(破片)처럼 쉬지 않고 찌른다.

모든 것은 연소되고 취(醉)하여 등불을 향하여도
너만은 물러나와 호올로 눈물을 맺는 달밤……

너의 차가운 금속성(金屬性)으로
오늘의 무기를 다져 가도 좋을,

그것은 가장 동지적(同志的)이고 격렬한 싸움! <양심의 금속성>

양심이 뭘까?
양심적이다. 양심에 맡긴다...
한자로 '어질 량 良'에 '마음 심 心'을 쓰니 <어진 마음>이란 뜻이다.
착한 마음.
착하게 살자.(이거 조폭들이 팔뚝에 잘 새기는 건데... 음... 조폭들은 역설적인 기법이겠지? ㅋ) 

인간은 늘 욕망에 휩싸이는 존재란다.
1연이 그런 이야기지.
사람은 물과 피로 이뤄진 육체를 가지고 있어서 온갖 욕망에 지고 마는 존재거든.

그런데 2연의 너는 곧 '양심'인데,
양심은 '은빛'이고 '분쇄되지 않'는 속성을 띤 것이어서, 곧 금속성을 띤 것처럼...
인간의 마음 속에서 반짝 빛나고 튼튼하게 박혀 있는 거야. 

3연에서 나의 <꿈, 사랑, 비밀>은 바로 자신의 욕망이겠지.
삶에서 꼭 필요한 것을 <욕구>라고 한다면, 불필요한 것까지 뻗치는 것을 <욕망>이라고 한단다.
욕구는 만족시켜야 할 것이지만,
욕망은 절제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
그 욕망에 박혀 파편처럼 <쉬지 않고 찌르는> 것이 바로 양심의 역할이래.
양심에 찔린다~ 이런 표현도 있구나. 

4연에선 모든 것이,
세상 모두가 다 욕망의 불길에 연소되어 버리고,
술에 취한 불나방처럼 욕망에 취하여 등불을 향하여 달려들지만
양심을 가진 존재만이 호올로 눈물을 맺는 밤을 이야기한다.
이 '밤'은 여느 시에서처럼 '부정적' 의미가 아니지.
양심을 지키는 삶의 고독한 시간을 뜻하는 '밤'이구나. 긍정적 의미.

부패하게 쉬운 세상과 <격렬한 싸움>이라도 벌이려는 화자는
동지가 필요하다.
그가 바로 <너, 곧 양심>이란 말이지.
<차가운 금속성>이란 무기로 무장한 양심으로, 세상과 한판 싸움을 벌이려는 화자의 삶의 자세.
역시 좀 경건하다고 볼 수 있겠지? 

김현승의 시는 일반적으로 사회 문제와는 거리가 있는 편이란다.
위의 <가을의 기도>나 <눈물>에서도 경건하게 순수한 삶을 추구하는 쪽이지.
김수영이나 신동엽처럼 현실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편이지.
그런데 이 시는 부패한 현실에 눈을 돌리고 있는 시로
김현승이 비판적 현실 인식을 내비친 조금 특이한 시다.
그만큼 세상이 비양심적인 인간으로 가득차 있겠지.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에 보면
착하게 사는 형 철호에게 동생 영호가 그런 말을 하지.
착하게만 살면 오히려 세상이 비웃는다고...
양심따윈 버려야 잘 살 수 있다고 말이야.
과연 혼란한 시대에 양심을 지키고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지... 한번 되돌아 보자꾸나. 

이번 주말엔,
발이 아프다고 며칠 게을렀던 마음을 좀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말고사가 있고 나도 이런저런 행사가 겹쳐서 한 열흘 쉬었구나.
이제 기말고사도 마쳤고, 제대로 고3 올라가기 위한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기간이다.
학생 시절에 내내 공부만 하는 일은 참 피곤하고 힘든 일이다.
아빠는 아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마지막 고교 1년은 좀 열심히 살아주었으면...
너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탐구과목 강사로 유명한 손주은 씨 말대로 '스스로 감동받는 공부'를 해봤으면 한다.
그런 경험 자체가 인생에 큰 밑거름이 될 것이라 믿으므로... 

오늘은 조금 어려운 시들을 살펴보려 해.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를 우선 읽어 보자.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전에 한번 본 적이 있니? 
느낌이 어때?
뭔가 좀 있어 보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 뭔가가 과연 뭔지, ㅋㅋ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 같다. 결혼식장의 조금 경건하고 신비스런 신부처럼... 베일을 쓰고. 

시를 그냥 분위기가 좋아서 낭송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좋은 감상법이다.
그게 오히려 가장 좋은 방법이야. 
시를 꼭꼭 입에 넣고 씹듯이,
딱딱한 부분은 한참을 입에 넣고 불린 뒤에 쪽쪽 빨아먹을 수도 있겠지.
아빠가 설명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고,
시를, 그리고 문학을 읽어가는 방법 중의 하나니깐, 편안하게 읽기 바란다.

이 시는 우선 제목이 멋지다.
꽃을 위한 서시, 캬,

우리 나라 시 중에 젤 유명하고, 젤 멋진 시가 뭐겠어?
여기서 다른 시 대면 안 되지?
윤동주의 <서시>라고 해야지. ^^
윤동주가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며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음을 부끄리며 쓴 시.
그 시집의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란 시집이고, 그 처음에 올린 시가 바로 <서시>야.
서시의 뜻은 시집의 <서론>격인 시란 뜻인데,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상징적인 권두시란다. 

꽃을 위한 서시니깐, 이 시를 누구한테 바친다고? 바로 꽃이지.
그런데, 똑, 잘라서 마지막에 뭐라고 했지?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라고 했단다.

이 시는 꽃에게 바친 시인데, 그 꽃을 한 단어로 뭐라고 비유했다고?
신부. 

아, 신부...
결혼식 첫날밤 이야기를 어린 시절엔 다들 궁금해 하듯,
신랑...이란 말에 비하자면, 신부...란 말은 뭔가 조금 신비스럽고(발음도 비슷하네 ㅋㅋ)
비밀스런 구석이 있어 보이고, 순수하고 깨끗하면서도 모든 걸 알수 없는 존재.
아름다우면서도 함부로 가까이하긴 어려운 존재... 이런 느낌이 있지 않을까?

사실 결혼식은 신부를 위한 거란다.
엄청난 가격과 엄청난 부피를 자랑하는 신부의 웨딩드레스에 비하면,
양복이든 턱시도든... 신랑이란 참, 들러리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
이 시는 꽃을 위한 서시,이면서, 신부를 위한 서시이기도 해.
아, 얼마나 매력적이야.
아내도 아니고(음, 아내 하니깐 느낌이 팍 삭지. 한 순간에 ㅍㅎㅎㅎ)
신,부.
신부는 말 그대로 결혼식의 꽃이란다.
환하게 웃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그날의 꽃.
그날 찍는 수백 장의 결혼식 사진은 사실은 신부를 위한 거야!
야외촬영, 특수분장 촬영 모두 그런 거지.

그 신부를 사랑하는 화자는 신부를 꽃, 같대.   

자, 여기까지... 읽고 나서,
이 시의 첫 구절을 읽으시면, 허걱, 할걸.
아깐 안 보였던 구절이 바로보이니깐. ㅍㅎㅎ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캬, 요즘 유행이 짐승이지?
'내 귀의 캔디'를 속삭이는 백지영 뒤로 보여주는 짐승돌의 식스팩!!!@_@
꺅~~~, 짐승 중에서도 <위험한 짐승>.
드디어 첫날밤이 시작되는구만.
오늘의 꽃, 신부와 '시방 위험한 짐승'의 한판 승부. 

자, 19금은 요기까지.

<19 금>이 표지에 적힌 책을 오빠 방에서 본 여동생이
긴장하면서 그 페이지를 넘겼더니, 뭐가 나왔게요?
<20 토>

이제 수능 모드로 돌입해보자. 수능 320일 전이니까. 좀 경건하게 ㅋㅋ
여기서 '위험한 짐승'은 '윤리적'으로 위험한 짐승이 아니야.
이 위험한 짐승은,
지적으로 불완전한 인식을 가진 인간,을 뜻하는 말이란다. 

갑자기 재미없어졌지?
자, 정말 알고 싶은 신부, 오늘의 주인공 꽃, 그의 베일을 걷고 싶지만,
<존재>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순간, 그 <존재>는 알 수 없는 존재로 되어버리고 만다는 거야답니다. 

내가 엄마랑 결혼한 때
원래는 아빠 친구들 중에 여자라곤 어머니밖에 모르는 두 녀석에게 미팅을 제가 주선했거든.
그랬는데 대전 카이스트 있던 한 녀석이 펑크를 낸 거야. 토요일인데 못올라오겠단 거지.
그래서 내가 대타로 미팅을 했는데, 그 중의 한 여인이 지금 너의 엄마란다.

처음엔, 얼굴과 이름과 직업 정도만 알았지.
그러니깐, 그 아가씨가 '아는 아가씨'가 된 거지.
그런데, 그날 새벽 1시까지 놀다가 택시로 집앞까지 바래다 주고(이때부터 흑심이 있었던 건 아니고. 매너남 ㅋ)
집에 왔는데, 잠자리에서도 계속 얼굴이 얼른거리는 거야.
전번도 못 땄는데...ㅠㅜ
그래서 다음날 엄마가 근무하는 아산병원 응급실로 전화를 해서 아내를 바꿔달라고 했지.
그래서 그날 오후에 또 만났어.
아, 둘이 만나니깐 얼마나 좋던지. ^^
근데, 그날 딱, 만나니까...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아지는 거야. 
그래서 묻고 또 묻고... 그게 사랑인 모양이지.
알고 싶어요...가 무한대로 나올 수 있는 거.
듣고 또 들어도, 또 묻고 묻는 거... 그래서 엄마랑 일주일에 두세번 만나면서 급 친해졌지.
그런데, 만나고 만날수록 정말 궁금한 건 계속 생기더라고. 

이런 이야기를 이 글의 화자는 하고 싶은 거란다.
인간의 <존재>의 본질은 알고자 하면 끝도 없이 알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이런 거.
나는 쟤 알아~ 라고 하지만, 그 사람과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정말 아는 건 없는 거잖아.
심지어, 나는 내가 제일 잘 알아. 하고 뻐기지만,
정말 곤란에 빠지면 정신과 가서 '제가 누구래요?' 이렇게 묻게 되는 거. 
나를 알려고 절간에 들어가서 '스님, 제가 누군지 알고 싶어 왔습니다.' 이렇게 물으면,
큰 스님은 '너를 가져오너라, 네가 누군지 가르쳐 주마.' 이러실 걸?

'위험한 나'는 너를 정말 알고 싶어 해.
그런데, 내 손이 닿으면, 너는 까무룩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그리고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피었다 지는 꽃.
그 아름다운 꽃은 '이름도 없이'(無名 무명) 피었다 진다.
그 예쁜 것들의 한 송이 한 송이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지만,
아, 그것들은 그 아이들의 특색을 깨닫기도 전에 져버리고 말아. 

그래서 이 맘 보드라운 아저씨는 눈물이 난대.
그 아름다운 하나하나의 존재들을 인식도 하기 전에, 져버리고 마니까.
그래서 이 <이름없음 無名, 무명>의 존재들을 기리기 위해서
나는 불을 밝히고 한밤내내 운단다.
아, 어떡하면 너희 존재를 내가 알아챌 수 있겠니~~

이렇게 우는 사람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지.
관심이 많은 사람이고.
바로 옆에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은데, 바쁘다는 핑계로 다들 외면하고 살아간단다. 슬프게도.
그래서 울던 이 화자는,
밤늦게 어떤 앎의 문을 두드린다.
돌개바람처럼 탑을 흔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탑의 본질을 알 수는 없어.
그렇지만, 그 정성이 돌에 스며들면
그 탑의 돌이 의미있는 존재, 금이 될는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금과 가장 연관있는 탑이 뭘까?
한자로 '쇠 금 金'자와 비슷하게 생긴 '금자 탑'은?
바로 피라미드란다.
보잘것없는 나의 관심이
상대의 본질을 알고자 노력한다면... 피라미드처럼 훌륭한 결과물을 얻을지도 모르지.
크기가 모든 것의 다는 아니지만...

어린 왕자에서 생 텍쥐베리가 그러잖아.
길들이면,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고.  

자, 이 시를 다시 읽어보자.
이 시는 사실은 꽃,을 위한 시도 아니고, 신부를 위한 시도 아니란다.
이런 시를 <철학시>라고 한대.
헐~ 철학은 또 뭐람... 금속 공학이면 몰라도...
철학은 생각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철학, 종교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 중의 가장 기본이,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이라고 하더라. 
그 <존재의 본질>을 새침떼기이며, 말해주지 않고 배시시 웃기만 하는 <신부>에 비유하는 시란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너는 이름도 없이/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탑을 흔들다가/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뭔가 좀 알 것 같아? 알쏭달쏭 하다고?
그럼 이런 시 중에 또 유명한 게 있으니 같이 보자.
하는 짓은 비슷하니깐, 그냥 한번 읽어 보자고. 
신동집의 <오렌지>라는 시야.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에 있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에 있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거죽엔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오렌지 ,신동집)

역시 똑같은 상황이 나온단다.
이렇게 알려고 하는 순간부터, '어떤 상태'가 된다고?

>> 접힌 부분 펼치기 >>

정말 모든 <진리 탐구의 상대>는 <의문 덩어리>라는 걸 생각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좀 복잡하겠지? 
그렇지만, 노력하면,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기도 해. 잘은 아직 몰라도.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박남수, 새, 부분> 

박남수의 <새>에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란. 
'새'를 소유하고 싶은,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포수가,
그만 새의 순수를 겨냥하여 빵! 하고 쏘아 봤자...
그러나, 새의 순수, 새의 본질, 새의 진정한 모습을 알기 전에,
포수의 한덩이 납,이란 방법은, 도구는, 모두 존재의 본질을 상하게 하고 만다는...

 

좀더 유명한 김춘수의 <꽃>을 다시 한번 보자.
이 시는 워낙 유명하고, 주제도 쉽게 드러나니깐, 설명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거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싶다. <김춘수, 꽃> 

아까 꽃을 위한 서시에서 <무명>이란 말이 나왔거든.
기억 나니? 이름 없음. 無名.
그토록 아름다운 꽃들에게 이름도 없이 스러지게 해서, 기억하지 못해 미안해~ 이런 거였잖아. 

삶도 마찬가지일걸?
우리 모두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존재하긴 했지만, 그저 거기 있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할 따름이란 거야.
친구들이 네 이름을 불러주면 괜히 금세 친해지잖아.
특히 칭찬이라도 해주면...
이름을 불러주면, 그렇게 신이 나는 거지. 그게 바로 알아주는 거니깐.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거지.
그게 바로 <명명 命名, 이름붙임>의 힘이란다. 

명상록으로 유명한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마르코만 인들과 싸울 때 용맹스런 사자들을 데리고 갔대.
마구 달려오는 사자를 난생 처음 본 마르코만 인들이 장군에게 물었어.
저 괴수가 뭐냐고.
그랬더니, '저것은 개다. 로마의 개다.'이랬대. 결과는 뻔하지?
로마의 개를 몽둥이로 다 때려 잡았다는 거야.
사자라면 무서워했을 텐데, 개라니깐 우습게 보고 때려 잡을 수 있었던 거지.

명명의 힘은 그렇게 크단다. 이름을 불러주는 일. 상대를 알아주는 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는데, 칭찬은 '빈말'과 완전 다르잖아?
정말 그 사람의 장점을 들추어 칭찬해 주는 일. 얼마나 사람을 기쁘게 하겠어?
휴 =3=3 선생님들이 제일 못하는 게 이거야. 꼬집기는 도가 텄는데 말이지. ㅎㅎㅎ   
가끔 아빠가 조금 미안하기도 하구나.

조지훈의 <민들레 꽃>이란 시가 있어.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距離)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 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조지훈, 민들레 꽃> 

마음이 한없이 외로울 때,
아, 내 존재는 도대체 이게 뭐야~~~>?
아, 짱나~~~ 이런 날,
까닭없이 마음이 외로운 날이 있지?
그런 날, 지금은 이별했는지, 사별했는지 내 곁에 없는 그대가 생각나고.
그대는 민들레 꽃 안에서,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고 있구나.
당신과 나 사이엔 저바다 보다 먼 아득한 거리가 있지만,
그대는 조용히 나를 찾아온단다.
그대와 내가 말했던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가 나의 존재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몰라요~
이런 시야. 

존재의 외로움은 근원적인 것이겠지.
본질적인 거. 
어차피 '너 날 수 있어?' 이렇게 묻는다면,
'응, 나는 너 일수 있어...'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
얼마나 되겠니?
만일, 있다면, 정말 아끼고 사랑해야겠지?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ㅎㅎㅎ  

그렇지만. 또 우리는,
서로는,
영원히 단 하나의 세포도 공유할 수 없는 남남인 것이란다.
서로의 본질을 알지 못해 눈물짓는 것보다는,
민들레꽃처럼 한 순간이라도 서로 위로해 주는 존재가 되면 그것도 성공한 존재들 아닐까? 

아, 얼마만한 위로이랴! 

이렇게 말이야.
또 정공채의 <간이역>을 잠시 보자.
우리는 서로의 존재들에게 <목적지>는 될 수 없을 거야.
나의 목적지는 <나의 완성>일텐데,
도대체 나는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 완성을 어떻게 꿈이나 꾸겠어?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 하다 그리 되어버리는 것'이 인생인데 말이지.
그나마, 서로가 잊혀진 얼굴들 사이에서
간혹 스쳐지나간 것으로 기억되는 <간이역>으로 남는 것도 뭐, 괜찮겠지. ^^
꿈도 슬림하게... ㅎㅎ

피어나는 꽃은 아무래도 간이역
지나치고 나면 아아,
그 도정(道程)에 꽃이 피어 있었던가

잠깐 멈추어서
그때 펼 것을, 설계(設計)
찬란한 그 햇빛을......

오랜 동안 걸어온 뒤에
돌아다 보면
비뚤어진 포도(鋪道)에
아득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그 꽃은 지고
지금 그 꽃에 미련은 오래 머물지만
져버린 꽃은 다시 피지 않는 걸.

여숙(旅宿)에서
서로 즐긴 사랑의 수표처럼
기억의 언덕 위에 잠간 섰다가
흘러가 버린 바람이었는걸......

지나치고 나면 아아, 그 도정에 작은
간이역 하나가 있었던가

간이역 하나가
꽃과 같이 있었던가. (정공채, 간이역)

<존재의 본질> 하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구나.
일본 애니메이션의 명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고봉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고 아빠는 생각해.
정말 이쁜 만화거든. ^^ 
어렸을 때 같이 보러간 기억 나니?

 

일부러 일본어로 적었는데.
센과 치히로는 한자로 한 글자 차이야. 센 또 치히로 노 카미카쿠시...
'센'은 음으로, '치히로'는 뜻으로 읽은 거지.

부모님이랑 즐겁게 지내던 치히로는 이상한 할망구를 만나게 되고,
거기서 '네 이름은 너무 거창하구나.' 이런 명령에 뒷글자를 잃고 '센'으로 전락하고 만단다.
그런 뒤에 센은 맨날 목욕탕 때밀이를 하지.
목욕탕을 들락거리는 괴물들은 모두 '가오나시(얼굴없는)'들이고 말이야.

존재의 본질을 망각한 존재들은 모두 센이 되어서 무의미한 일상을 하루하루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애니메이션이었단다.
친구로 나오는 하쿠가 그런 말을 반복해.

<네 이름을 절대 잊어서는 안돼!> 
이 말은 곧,
너는 이런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센이 아니야.
너는 행복했던 때의 너,
치히로란 너의 본질을 찾아 가야해~~ 이런 외침 아닐까...  

아빠는 이런 생각들을 하곤 한단다.

 

자, 오늘은 좀 어려운 시를 다루고 나니, 나도 정신이 좀 멍~ 하구나.
그래도, 암튼, 만화영화 이야기도 나오고 하니 좀 맘편하게 읽어 주렴. ^^
센과 치히로 이야기 하면, 수업 시간에 아이들도 진지하게 듣거든.
김춘수, 신동집, 또는 박남수의 <새> 같은 시가 나오면 아이들이 울상이 되어버리는데,
그때 <센또 치히로노 카미카쿠시> 이야기 해주면 또 헤헤거리더라구. 

이 세상에서 아빠와 민우로 만나고 가족이 되었는데,
한국에서 사는 것. 학생으로 사는 것. 21세기에 사는 것.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다 보니 사는 일이 복잡하고,
어떨 땐, 내가 뭔가~~~
이렇게 <센>의 무의미한 나날을 보낼 수도 있을 것 같구나.

그렇지만, 우리의 하루하루가
살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면, 센처럼 목욕탕 청소나 하는 사람으로 살진 않을 거야. 그치?
좀더 의미있고 재미있는 날들을 만들면서 행복하게 살자꾸나.
또 시작된 아빠의 강의를 재미있게 읽어주기 바란다.
추운 날씨에도 힘내서 살자~
사랑해, 아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